목회학

[스크랩] 우리 시대의 부활의 복음, 어떻게 선포할 것인가? (문상철)

수호천사1 2011. 8. 1. 12:49

우리 시대의 부활의 복음, 어떻게 선포할 것인가?

 
문상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은 영원한 진리이지만, 시대와 문화에 따라 선포하는 방식은 다를 수 있다. 부활의 복음을 올바르게 전하는 데는 부활의 사실과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존재론적인 관점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 부활의 복음을 올바르게 전하기 위해서는 또한 우리 시대의 지배적인 사조인 포스트모더니즘과 종교다원주의의 도전을 파악하고 그 인식론적 과제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이런 이해의 바탕 위에 문화적 흐름을 고려해서 부활의 멧세지를 상황화해서 전하기 위해서는 선교학적 통찰력이 필요하다.  

부활의 사실과 멧세지: 존재론적 관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을 기록한 성경은 그 구조가 우주적 역사이기 때문에 세계 종교의 경전들 중 고유성을 가지고 있다. 부활의 역사성에 대한 논의는 그 자체가 분리된 것이라기 보다 부활을 예수 그리스도의 중심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는 성경 전체의 역사성에 대한 논의가 될 수 밖에 없다. 성경은 부활의 역사적 사실성에 대한 근거가 되는 정황 정보들을 직접 제공하는 한편, 그 사건과 의미에 대한 현재적이고 미래적인 검증을 성령의 사역에 대한 경험에 의존하고 있다. 따라서 부활의 역사성에 대한 검증은 성경의 증거 및 이와 관련된 성령의 증거에 의존하면서 인간의 역할을 허용하고 있다. 하나님은 이 부활의 사실을 전파하시기 위해 인간의 역할을 설정하셨지만, 그 역할은 변호사의 역할이 아니라, 증인의 역할이다. 하나님은 부활의 사실을 입증할 사람이필요하지 않다. 하나님은 부활의 사실과 의미를 체험적으로 증거할 증인들을 필요로 하신다.

성경에 기록된 기독론적 교리들은 실존적-보편적 의미들(existential-universal meanings)을 가지고 있지만, 이러한 의미들은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행위의 규범에 부속되는 것이다 (Franklin 1994, 267). 따라서 우리는 부활의 역사성에 대한 믿음과 함께 그 의미에 대해서 동시에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많은 경우에 부활의 역사성에 대한 논쟁에 소진한 나머지 그 종말론적 의미를 간과하는 오류를 범해왔다. 부활은 하나님의 계시 행위의 절정이기 때문에 우리는 부활의 사건에 대한 이해를 통해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파악하고자 노력해야 한다 (Gnanakan 1994, 246).

부활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통치의 회복을 선언한다. 인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은 인간의 죄악으로 인한 죽음으로 인해 방해를 받는다. 인간의 육신적 및 영적 죽음은 역사를 통해 하나님께서 이루어가실 궁극적인 하나님 나라의 실체를 경험하지 못하게 한다. 이런 단절을 극복하는 결정적 사건이 곧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 이 죽음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온전한 통치를 누릴 수 있게 된다. 이런 점에서 부활은 만유를 하나님께 굴복시키고 만유를 하나님의 통치에 두는 추수의 첫 열매이며 종말의 시작이다 (Newbigin 1978, 36).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신 하나님은 범신론의 수동적인 하나님이 아니라, 활발한 역사의 주관자이시다. 부활을 통한 이 하나님의 온전한 통치는 악의 능력을 정복했다.

부활을 비극의 역전이 아니라, 애당초 십자가가 패배가 아니라 승리라는 것을 증거한다. 즉, 부활은 십자가 승리의 과시인 것이다. 만약 십자가가 마지막이라면 우리에게 희망은 없다 (고전 15:14).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해 이루어질 전적 승리를 미리 맛보는 것이다 (Newbigin 1986, 136).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온 인류의 부활의 시작이라는 점에서 우리에게 희망을 준다. 이 희망은 온전함에 대한 희망이며, 구체적으로는 불멸의 영적인 몸에 대한 희망이며, 전적 인간성의 회복에 대한 희망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희망임과 동시에 심판이다 (Franklin 1994, 272). 성부께서 모든 심판을 성자에게 맡겼기 때문이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부여 받은 그리스도는 의로운 심판관이다 (마 28:18; 요 5:30; 행 17:31; 롬 2:5; 살후 1:5; 딤후 4:8; 벧전 2:23; 계 19:2). 그리스도의 심판은 정의에 따른 것이기 때문에 정당하다. 하나님의 심판은 의로운 자들에게는 구원을 악한 자들에게는 멸망을 가져온다 (신 10:18; 시 25:9-10; 출 6:6; 민 33:4; 신 32:41; 사 4:4; 렘 1:10, 4:12; 겔 5:10, 23:10, 28:22). 기독교의 중심적 상징인 십자가는 우리의 가치와 함께 우리의 죄악성을 지적하며, 부활은 이렇게 노출된 죄악성이 심판받아 마땅함을 증거한다. 부활은 타락한 세상의 이성주의에 하나님을 가두려고 하는 모든 틀마저도 깨뜨리며, 뉴에이지의 자아중심성의 죄악마저도 극복한다 (Clark & Geisler 1990, 234; Newbigin 1986, 150).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한 심판은 포스트모던 시대에 회복되어져야 할 차원이다.

예수님의 역사성과 그 종말론적 의의는 복음의 유일성을 증거하면서 상대화에 대해 제동을 건다. 부활의 멧세지는 종교간 대화의 주제가 아니라, 당초부터 선포의 대상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부활은 단순한 승리가 아니라 열방과 만유를 그의 것으로 주장하는 선교로 이어졌다. 그 선포의 대상은 특정 지역이나 민족이 아니라, 다원주의를 표방하고 있었던 온 세상이었으며, 그 멧세지는 국부적 멧세지가 아니라 보편적 멧세지로 선포되었다 (Clendenin 1995, 158). 초대 교회 성도들은 타협없이 이 부활의 복음을 선포했고 그 결과 순교와 사회적 고립과 지적인 조롱을 당했다. 부활의 멧세지를 담은 기독교 세계관은 특정적이었지만, 그 실행에 있어서 배타적이지 않았다. 그래서 이 고유한 세계관을 강요하기보다 핍박을 받으면서도 사랑으로 권유했을 뿐이다. 이런 점에서 초대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폭력의 존재론이 아니라 평화의 존재론을 표방했다 (Vanhoozer 1997, 66). 그것은 부활의 사건이 부각시키는 성자 하나님의 성육신과 십자가에서의 고난과 희생과 용서와 관용의 정신을 따른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사실과 멧세지는 모든 문화와 민족에게 선포되어야 할 공시적 진리일 뿐만 아니라, 모든 시대와 세대에 전파되어야 할 통시적 진리이다. 우리는 이 진리가 담고 있는 희망과 함께 심판의 경고를 굴절없이 선포해야 하고, 이로써 이 세대에 하나님의 온전한 통치가 이루어지도록 힘써야 한다. 왜냐하면 이 진리는 지적 교류의 대상이 아니라, 힘써 실천해야 할 기독교 세계관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포스트모더니즘과 종교다원주의 시대의 부활의 멧세지: 인식론적 과제

기독교 교회는 첫 삼세기 동안 그 세계관의 혼합과 변질을 피하기 위해 사투를 벌였다. 초대교회는 이 과정에서 성경에 충실하면서도 그 시대 문화와 철학 세계에 적절한 언어로 옷입은 기독론으로 그 시대의 영지주의 및 동양적 이단들에 대처하려고 했다. 이를 통해 참된 세계관은 그 내용을 변질시키지 않으면서도 다른 문화에서 달리 표현될 수 있는 적응성을 가지고 있음을 나타내 보였다. 즉, 기독교 세계관은 니니안 스마트(Ninian Smart)가 말하는 바, 한 세계관의 진리됨의 기준인 감각적인 인식론을 제시할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1995a, 27). 이런 점에서 우리 시대의 복음 전도는 우리 시대의 문화적 도전을 소화하면서 최대한 적절하게 감각적으로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 시대의 사조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든 메타내러티브(metanarratives)에 대해 의심한다. 즉, 포스트모더니즘은 우리에게 공통의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부정할 뿐만 아니라, 한 이야기가 다른 이야기보다 더 가치 있다고 생각지 않는다. 이런 입장은 결국 칼 헨리(Carl Henry)가 말하는대로 존재론적 자아를 상실하게 만든다 (1995, 38). 그것은 포스트모던 언어와 문화는 진실성(truthfulness)보다는 심리적 효과성(psychological effectiveness)에 초점을 맞추며, 타당성(plausibility)에 대해 논하지 않고는 신뢰성(credibility)에 대해 고려하지 않는다 (Phillips & Okholm 1995, 15, 16; Lundin 1995, 31). 이런 맥락에서 우리 시대의 많은 사람들은 사실들을 부정하고 오직 해석만을 인정한다.

모든 것을 관점에 따른 해석의 문제로 여기는 포스트모던 문화에서는 역사도 허구(fiction)로 간주되어 그 진정한 의미를 잃고 만다. 이렇듯 포스트모더니즘은 인식론적인 혼란을 초래하는 가운데 올바른 것을 쓸모 여부에 따라 규정하면서 인식론적 실용주의(epistemic pragmatism)로 흐른다. 포스트모던 인식론은 신학적인 사고에 있어서 초자연적이고 무오한 영감과 계시를 부정하면서 주관적인 독자 중심성의 해석들을 중시한다. 이렇듯 신학이 보편적 진리를 추구하는 것에서 손을 떼야 한다면 신학은 설자리를 잃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도전은 신학의 위상 자체보다도 신학을 어떻게 하느냐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게 만든다.

포스트모더니즘이 반영적(antispiritual)이거나 반초자연적인(antisupernatural) 성향을 띠지는 않는다는 것은 뉴에이지의 대중성이 입증한다. 포스트모던 환경은 많은 점에서 영적 실체들에 대해 더 많이 열려 있다. 따라서 포스트모더니즘은 반교회적일 수는 있어도 반종교적이지는 않다고 할 수 있다 (Hollinger 1995, 186; Sims 1995, 331; Gosnell 1995, 381-382). 포스트모던 철학과 문화는 극단적으로는 지적인 사기극이라고 할 만큼 일관성있는 세계관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복음은 자신을 위한 진리일 뿐만 아니라 모두를 위한 진리이다. 이런 점에서 복음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유아론(唯我論, solipsism)을 극복할 수 있는 보편성을 일관되게 주장해왔다. 따라서 포스트모던 사상에 우리의 신앙을 적응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세계관에 대한 자신감에서 포스트모던 조류에 대응할 인식론적 유연성을 추구해야 할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다원주의를 불가피하고 바람직한 문화적 및 철학적 입장으로 추구한다. 이런 다원주의는 하나님의 보편적 구원 의지(universal salvific will)에 기반을 둔 것이며, 성경적 기독교 세계관은 배타주의(exclusivism) 혹은 특정주의(particularism)를 표방하므로 다원주의를 수용할 수 없다. 왜냐하면 다원주의는 모든 세계관들을 상대화시키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종교간의 평화 공존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진리의 바탕 위에서 관용과 평화를 추구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왜냐하면 근본 문제는 진리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종교다원주의는 교회 역사상 상당 기간 기독교 세계관을 위협해왔는데, 예를 들면 뉴에이지 범신론이 다양한 모습으로 모든 종교에 하나님과의 접촉 가능성을 주장해온 것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Coward 1995, 45; Clark & Geisler 1990, 229). 이런 위협에 직면해서 첫 삼 세기 동안 기독교 교회는 순교를 각오하고 그 시대의 일반적 교리들에 대항해서 복음의 유일성을 증거했다. 문화적 다원주의를 포함한 어느 정도의 프락시스적 다원성(plurality)을 수용하되 기독교 세계관의 근간을 뒤흔드는 종교적 다원주의(religious pluralism)는 거부해야 한다. 이것은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우리의 존재론적 신념이 흔들리지 않는 가운데 다원주의적 인식론을 가지고 있는 약한 사람들의 약함을 고려한 섬김의 태도와 평화의 언어를 표현을 추구할 필요를 제시한다.

성자 하나님의 섬김과 온유의 언어는 본질을 왜곡시키지 않으면서도 포스트모더니즘의 반로고스중심주의(antilogocentrism)의 기대에 어느 정도 부응할 수 있다. 사실 현대 변증학 저작들은 그동안 순수하게 이성에만 호소하고 인간의 상상력은 소홀히 한다는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포스트모던 언어와 인식론적 입장이 모더니티 속에서 복음을 표현한 언어의 한계를 극명히 지적하는 것이 사실이다. 보다 온전한 복음의 변증에는 논증의 자리가 항상 있을 것이지만 그것은 상상적 언어에 대한 호소에 의해 보완되어야 할 것이다. 이미지는 결과-개방적(open-ended)이며 청중들에게 상상을 유발한다 (McGrath 1993, 194, 195). 포스트모던 세대를 전도하기가 복음화 역사상 가장 어려운 것이 될 것이라는 관측은 다름 아니라 교회는 로고스(logos) 언어에 익숙해 있는 반면 신 세대는 미쏘스(mythos) 언어에 적응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복음의 커뮤니케이션에는 단순히 언어적 차원 외에 보다 포괄적인 인식론적 특징적 구조들을 살피지 않으면 안된다. 피터 버거(Peter Berger)가 사용하는 용어인 타당성 구조(plausibility structure)는 한 사회에서 어떤 신념이 타당성이 있는지를 결정하는 조건을 생성하는 사상과 실천의 사회적 구조를 말한다 (Newbigin 1986, 10). 이런 인식론적 구조는 시대와 문화에 따라 변화하는데, 문제는 그러한 변화와 다양성을 우리의 복음 증거의 목적에 부합하도록 활용하는 것이다. 즉, 우리는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인식론적 제약이 무엇인지, 복음에 호감을 가지고 귀기울이고 삶을 드리게 하는 결정을 만드는 판단의 구조가 무엇인지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접근은 복음 전도자가 불신자들이 있는 곳에서 그들을 만나기 위해서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복음을 그릇된 방법으로 전하기 때문에 복음 전파가 가로막히는 것을 원치 않는다.

우리는 포스트모더니즘과 종교다원주의가 제기하는 인식론적 도전에 대해서 기독교적 인식론의 토대 위에서 대응해야 하며, 우리의 전통은 그러한 인식론적 유연성을 가지고 있다. 우리의 기독교적 인식론은 유연성을 가짐과 동시에 기독교적 존재론에 뿌리 내리고 있어야 한다 (Vanhoozer 1997, 68). 왜냐하면 인식론적 과제가 존재론적 토대를 뿌리째 흔들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그런 가운데 복음의 변증자는 우리 시대의 문화의 지적인 현실 뿐만 아니라 사회학적 현실을 다루는 상황화(contextualization)의 작업을 해야 하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Phillips & Okholm 1995, 22; White 1995, 367).

우리 시대의 부활의 선포: 선교학적 통찰력

영원한 복음을 맡은 우리는 21세기에 사는 사람들로서 우리 시대의 도전들에 대응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러한 과제는 선교적인 것이다. 우리의 사명은 불변하는 복음을 새로운 세대가 이해할 수 있도록 우리의 삶 속에서 구현함과 동시에 전파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다음의 몇 가지를 염두에 두고 부활의 복음을 선포하면 좋을 것이다.

첫째, 우리는 성령을 의지하면서 부활의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이것은 시대와 세대를 떠나서 보편적으로 복음 증거에 해당되는 진리이다. 그 이유는 근원적으로 말씀과 성령의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 단순히 로고스일 뿐 아니라 십자가에 못박히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이며, 성령께서 임하실 때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증인이 될 수 있다. 이 성령은 복음을 전하는 모든 사역에 있어서 희망의 근원이시다. 그는 단순히 우리를 위한 희망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온전한 우주적 과업을 완수할 희망의 근원이시다. 왜냐하면, 오직 성령의 내적 증거만이 인간의 가슴과 양심을 만질 수 있기 때문이다 (Newbigin 1978, 63; Sims 1995, 331, 332). 신약 성경은 사도적 멧세지와 세상의 지혜가 근본적으로 모순됨을 보여 준다. 따라서 우리는 인간의 논리와 세상적인 설득력에만 의존하지 말고 성령을 의지해서 담대히 부활의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왜냐하면 멧세지의 타당성과 신뢰성을 구축하는 것은 단순히 지적인 논증 이상의 것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둘째, 우리는 부활의 복음을 공동체를 통해 선포해야 한다. 우리 시대의 한 문제는 가치와 사실이 분리되어 있고, 이것이 개인적 삶과 공중적 삶의 분리로 연결된다는 것이다. 이런 시대에 우리는 복음을 개인적 진리가 아닌 공중적 진리로 선포하고 실천할 의지를 가져야 한다. 하나님 왕국의 현존인 교회는 자체적으로 복음을 맡은 자로서 타당성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통해 기독교 세계관을 표현하는 종의 역할을 다해야 한다 (Newbigin 1989, 9, 225; Hollinger 1995, 183). 왜냐하면, 교회는 글로벌하고, 다문화적이고, 다세대적이기 때문에 포스트모던 세상을 위해 진정으로 준비된 몇 안되는 기관 중의 하나이다 (Dockery 1995, 17).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단순히 선포해야 할 복음만이 아니라 살면서 실천해야 할 이야기이다.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은 높은 도덕적 수준을 통해서 복음의 유일성을 증거했다.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의 도덕성은 하나님의 도덕적 성품에 의해 요구되어 진다. 이 공동체의 구별성의 표시는 희망이다. 미래에 대한 희망이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현재를 책임있게 살 수 있게 한다. 그 책임감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과 함께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고난을 받음으로써 복음을 변증하게 한다. 포스트모던 시대에 기독교에 대해 퍼부어지는 전체화(totalization)의 비난은 비전체적인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고통받고 깨어진 세상을 향한 예수님의 사역을 계승할 때 피할 수 있다 (Middleton & Walsh 1995, 154).

셋째, 우리는 세계관 관점에서 부활의 복음을 선포할 수 있어야 한다. 21세기의 세상과 사상은 구체적인 신앙과 신념에 대해 보다 보편적인 언어로 표현할 것을 요구한다. 우리 시대의 문화는 예루살렘보다 점점더 아덴의 모습에 가까워지고 있으며 우리는 사도행전 17장에서의 바울의 시도에서 배워야 한다 (Brown 1995, 321). 그것은 곧 세계관의 변화에 초점을 맞춘 복음 선포를 말하는 것이다. 또 그것은 기독교의 구체적인 언어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을 배려해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이야기에서 시작하지 않고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세계관 관점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은 교리를 중심으로 전도를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삶의 의문에 성경적으로 응답하는 귀납법적 방식을 취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부활의 복음은 궁극적으로 한 종교 전통이나 세계관에 적용될 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 전통과 세계관에 적용될 메타범주적(metacriteria) 진리로 선포되어야 한다 (Tan 1994, 74; Sim 1995, 330).

넷째, 우리는 부활의 복음을 서술적으로 선포해야 할 수 있어야 한다. 포스트모던 언어의 특징인 상상력에 호소하는 가장 강력한 방법은 이야기를 통해서이다. 이야기는 실체를 해석하는 최고의 운반체이다 (McGrath 199, 195; Hollinger 1995, 188). 그런데 우리는 어렵지 않게 성경의 하나님 계시 자체가 내러티브적 구조를 취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케빈 반후저(Kevin Vanhoozer)가 말하는 대로, 하나님의 존재론적 일체성도 역사 속에서의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자기 현현에서 유래된다 (1997, 66). 이렇듯 성경이 제시하는 타당성 구조 자체가 이야기의 형태이다. 이 때문에 성경의 이야기는 그 자체가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되는 것이다. 특별히 십자가의 사건은 고난과 고통에 대한 진정한 희망을 제시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뉴에이지가 갈구하는 평화와 희망의 욕구가 채워질 희망을 본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이야기 속에서 사람들은 진정한 정체성의 안정성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복음의 거대한 이야기는 개인들의 작은 이야기들을 통할 때 효과적으로 전달된다. 우리의 삶이 한편의 살아있는 신비가 될 때 우리는 효과적인 증인이 될 수 있다. 작은 내러티브라고 할 수 있는 간증은 사도 바울 이래 효과적인 전도의 수단으로 사용되어 왔다 (White 1995, 368; Gosnell 1995, 380, 381). 이러한 내러티브의 사용은 특별히 서구의 지적 전통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폭넓게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단순한 서술적 접근만으로는 다원주의를 조장하기 쉽다는 것에 주의해야 한다. 우리는 기독교의 이야기가 더 나은 이야기라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 왜냐하면 복음은 특별히 우주적 구원의 진리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좋은 이야기로서 복음의 진리는 그 어떤 종교적 체계보다 인간의 존엄성의 토대를 제시하며, 인간 사회의 많은 이슈들에 대해 근본적인 해답을 제시한다.

다섯째, 우리는 부활의 복음을 대화식으로 변증할 수 있어야 한다. 대화식 변증(dialogical apologetics)은 상대의 처지에 따라 반응하는 변증과 전도 방법이다 (Clark & Geisler 1990, 227). 즉 우리 시대의 변증은 그리스도인 자신이 만들어 낸 질문들에 답하기보다 비그리스도인들이 제기하는 질문들과 반대의견에 답하는 방식이어야 한다. 현대 사회에서 복음을 변증하면서 발견하는 것은 우리 시대의 사람들의 기독교에 대한 지식은 이전 시대보다 자꾸만 뒤떨어져 기본적인 지식마저도 이미 대화의 대상자에게 있다고 가정할 수 없다고 한다 (White 1995, 369). 이럴 때 일수록 우리의 복음의 증거, 설교, 가르침은 점점더 대화식(dialogical)이 되어야 한다.

대화식 변증과 전도를 위해서 그리스도인들은 먼저 세상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오늘날 전도하기가 어려워지는 것은 교인들이 비그리스도인들과 접촉할 기회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사람들은 스스로 교회에 나올 가능성이 많지 않다. 왜냐하면 포스트모던 문화가 비교회적 성향(non-esslesial orientation)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회는 기다리기보다 세상 속으로 적극적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렇기 이런 대화식 변증과 전도를 위해서는 평신도의 역할이 점점더 중요해질 것이다. 이것은 신학을 하는데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신학은 성직자 중심주의를 타파할 필요가 있다 (Gosnell 1995, 386-378).

여섯번째, 우리는 부활의 복음을 이성주의적으로도 선포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스스로 반모던을 표방할 필요는 없다.  이성과 신앙은 일치하지는 않지만 분리할 수도 없다. 다르지만 분리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성주의적 접근만으로는 지적인 십자군이 되기 쉽다. 또한 서술적 모드만으로는 상대주의로 흐르기 쉽다. 따라서 서술적 접근법과 이성적 접근법이 상호보완적으로 사용되어야 한다. 이야기를 해야 할 때가 있고, 논증을 해야 할 때가 있으며, 좌뇌를 사용해야 할 때가 있고 우뇌를 사용해야 할 때가 있다. 또한 이성적 논증도 관심과 진정한 돌봄의 정신과 결합되어 복음을 변증해야 한다 (Clark & Geisler 1990, 225-226). 뉴에이지는 영성을 강조하기 위해 이성과 개념적 사고를 버렸는데 우리는 이를 따를 필요가 없다.

일곱번째, 우리는 부활의 복음을 더 자주 상징적으로 선포할 수 있어야 한다. 상징은 인지적 차원, 정서적 차원, 평가적 차원의 결합을 통해 풍부한 의미를 일으킨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역사적 실체이면서도 구속적 상징이며 대규모 불의에 대응하는 구속적 인간 행위의 발현이다;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은 전체 성경 이야기의 클라이맥스적 전환점의 대단원이다. 이런 구속적 상징적 의미들을 되새기기 위해 성만찬이 제정되었다. 성만찬은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과 부활의 사실에 대해 가장 힘있게 증거하는 표현법이다.  일반 상징들은 역사적 실체를 등한시하고 그 의미에만 치중하기 쉽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성만찬은 역사적 차원과 상징적 의미가 결합되어 명제적 진리(propositional truth)가 아닌 실존적 진리(existential truth)로서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표현한다 (Stenger 1995, 105). 성만찬이 진하게 전달하는 하나님의 아가페적 사랑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자아의 우상을 극복하는 대안을 제시한다.

우리는 때로는 세계관 개념을 이용해서, 때로는 이야기식으로, 때로는 대화식으로, 때로는 논리적으로, 때로는 상징과 성례를 통해 부활의 복음을 선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성령을 의지하며, 공동체적으로 복음을 실천적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모든 복음 선포에 있어서 중요한 사실은 교회 자체의 영적 건강이 전도적 노력의 성공에 결정적인 요소가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문화를 복음화하기 전에 먼저 교회의 성숙, 특별히 일체성을 꾀해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18세기의 경건주의보다도, 17세기의 개신교 정통주의 학문성보다도, 16세기 종교개혁의 가르침보다도, 초대교회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한다 (Oden 1995, 406). 모든 교회들이 말씀과 성령 안에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공동체들이 될 때 부활의 복음은 힘차게 선포될 것이다.

출처 : 내 사랑 중국 ♡ MyLove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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