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新約 곧 새 언약은 그리스도인의 모든 영적 생활의 기초이다. 새 언약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죄 사함을 얻고 양심에 평안을 얻는다. 신약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능히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할 수 있다. 또 신약으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과 직접 교제할 수 있으며 속으로부터 하나님을 친밀하고 깊이 알 수 있다.
신약은 주 예수님의 피로 맺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확고한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과 신약을 세우기 전에도 여러 가지 언약을 세우셨다. 처음에 세우신 언약은 노아와 세우신 언약이다.(창9:1-17) 그 후에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언약을 세우셨다.(창12:1-3, 13:14-17, 15장, 17:1-14, 22:15-18) 이것은 신약의 기초를 이루는 가장 중요한 언약이다. 그 다음에 하나님은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과 시내산에서 언약을 세우셨다. 이것이 바로 舊約이다. 후에 하나님은 다윗과도 언약을 세우셨다. 이 모든 언약이 있은 후 최종적으로 하나님은 미리 약속하신 대로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신약을 세우셨다.
흔히 신약은 구약을 이은 것으로 생각되기 쉽지만 사실은 신약은 구약을 계승한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 언약을 계승한 것이다.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 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없이하지 못하여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그러나 성령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 (갈3:15-22) 여기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이라는 말에서 천사는 마귀를 가리키고 중보는 모세를 가리킨다. 즉 율법은 사람이 마귀에게 속아서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그 범죄를 드러내기 위해) 주어진 것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모세를 통해서 주어졌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다만 사람으로 좌절과 절망을 맛보며 정죄와 심판을 받으라고 율법을 주셨는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의 의도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절망을 느끼는 만큼 그들로 하나님이 약속하신 더 좋은 언약 곧 새 언약(은혜 언약)을 추구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과 새 언약은 다 같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람의 믿음에 바탕을 둔 것이다. 아브라함 언약이 구약보다 먼저 세워진 것이므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근본 약속(언약)은 율법이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주신 은혜의 약속(언약)이다. 신약은 이 아브라함 언약을 계승한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 그리스도의 피로 세우신 언약이다. (갈3:7,9,16,17, 히8:6) 히브리서 기자는 “구약이 무흠하였더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으려니와”라고 말함으로써 구약이 신약에 비해 흠이 있는 불완전한 언약이라고 했다. 구약(율법) 자체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사람이 하나님의 요구에 부응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율법이 흠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율법의 흠은 사람으로 죄를 깨닫게 할 뿐 그것을 실행하여 생명을 얻게 만들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라”(롬3:20) 율법은 아무 것도 온전케 못하기 때문에(히8:19) 흠과 티가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무엇을 했는가? 그들은 계약서에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언약의 핵심 내용을 어겼다. 그들은 모세가 산에서 내려오기를 더디하자 십계명의 첫째, 둘째 계명을 바로 어기고 말았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가장 강력하게 요구하신 것은 모든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만 섬기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모세가 산에서 십계명을 쓴 증거판을 가지고 내려오기도 전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경배함으로써 하나님을 거역했다.(출32:1-8)
히8:10-12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신약의 내용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내용으로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 신약은 하나님의 율법을 사람의 마음에 새긴 것이다. 즉 하나님의 생명(의 법)을 사람에게 주신 것이다. 둘째, 신약은 그 생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사람이 영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며 그 때문에 사람이 다른 사람의 가르침을 받지 않고서도 속에 있는 생명(마음, 영)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셋째, 신약은 사람으로 이러한 생명을 누리도록 하기 위해 먼저 하나님께서 사람의 불의를 긍휼히 여기시고 죄를 기억치 않고 사해 주시는 은혜를 누리게 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먼저 자신의 생명과 능력을 우리에게 주셔서 그 생명으로 하여금 우리 안에서 생명의 법이 되게 하신다. 그 법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누리며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된다. 그리하여 참으로 하나님은 우리 하나님이 되시고 우리는 그의 백성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해 품으신 영원한 목적이다. 이 영원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하나님은 먼저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 사함이 모든 것이 아니다. 그것은 순서 면에서는 먼저 이루어져야 할 일이지만 궁극적인 목적은 아니다. 우리는 죄 사함을 통해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깨끗한 상태를 얻고 다음에는 하나님과 깊고 완전한 교제를 나눔으로써 하나님의 아들로 살아야 한다. 하나님이 사람의 죄를 기억치 않는다고 해서 사람의 죄를 그냥 넘어가신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은 주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를 사하시고 우리 죄를 기억치 않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실은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심판하시고 그 다음에 우리 죄를 기억치 않으시는 것이다.
“내가 이렇게 많은 죄를 지었는데 하나님이 그것을 다 사해주실까?” “하나님이 비록 우리의 죄를 사해주셨더라도 죄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을까? 하나님은 우리 죄의 흔적을 보고 여전히 우리를 죄인으로 생각하시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다 신약을 잘 모르는 사람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언약에 신실하신 분이기 때문에 결코 사람의 죄가 많거나 악하다고 해서 용서해 주시지 않거나 한 번 사해 준 죄를 다시 묻거나 계속 기억하시지 않는다.
특별히 기억해야 할 것은 신자가 죄를 자백할 때는 반드시 하나님의 빛 가운데서 자백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자기의 죄를 분명하게 깨닫고 견딜 수 없는 부담과 아픔을 가지고 회개를 해야지 건성으로나 습관적으로 회개를 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빛 가운데서만 진정으로 죄의 무서움과 심각함을 알게 된다. 그럴 때에 비로소 진정한 회개를 할 수 있고 이러한 자백에 대해서만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해 주신다.
2.생명과 능력 새 언약에는 죄를 사해주시는 것말고도 극히 영광스럽고 귀한 다른 두 가지 약속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생명과 능력을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로 그것을 누리게 하신다는 것과 또 그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서부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 두 약속은 신약의 핵심 약속이요 매우 귀한 약속인데도 많은 신자들이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있다.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시더라도 사람의 생명이 여전히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는 옛 사람의 생명 그대로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신약 성도인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모르고 또 하나님께 순종할 수 없다면 우리는 무지한 중에서 광야를 헤매던 이스라엘 백성들과 아무 다를 바가 없다.
“내가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내가 너희 열조에게 준 땅에 너희가 거하여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겔36:25-28) “주께서 가라사대 그 날 후로는 저희와 세울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히10:6)
하나님이 예레미야와 에스겔을 통해 약속하셨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신 새 마음 혹은 부드러운 마음, 새 영이 바로 지금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다. 이 생명은 히7:16에서 말한 바와 같이 『무궁한 생명(영원한 생명)』이다. 이 생명 안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다. 이 생명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모든 일을 하나님의 뜻대로 얼마든지 행할 수 있다. 우리 자신이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을 통해 하나님 자신이 친히 행하시는 것이다.
이 생명의 능력은 주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능력이다. 우리 안에서 역사하는 이 생명의 능력은 우리가 추구하는 모든 것을 이루어 주며 우리가 생각하는 것을 훨씬 넘어서서 하나님의 뜻을 얼마든지 이루게 한다.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엡3:20)
이 생명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며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하나님께로 우리의 마음이 향하도록 한다. 뿐만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능히 하나님께 순종하게 한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빌2:12,13) 이 능력은 우리로 하여금 능히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의 일을 하게 만든다.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골1:28) 하나님이 생명이라는 율법을 우리 속에 넣으시고 우리 마음에 새기신 것은 궁극적으로 그 생명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을 알도록 하기 위함이다. 안다는 것은 단지 지식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생명 안에서 하나됨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을 말한다. 곧 우리는 신약으로 말미암아 누가 가르치지 않아도 속에서부터 하나님을 아는 참된 영적 지식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 하나님을 참으로 아는 사람만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다. 사람이 하나님과 연합하여 하나님의 아들로 사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사람은 그렇게 살도록 지음 받았다.
다시 말하지만 이스라엘이 모든 율법과 기적을 항상 경험하면서도 하나님을 아는 자식을 가지지 못한 것은 밖에서 가르치는 것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 속 사람이 강퍅하고 마음이 굳은 마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새 마음과 새 영 곧 하나님의 생명을 우리 속에 주셔야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성도에게 약속하신 최고의 약속은 영생 곧 하나님의 생명을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 생명으로 살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요한일서 2:25,27)
신약 성경의 가르침들을 유의하여 보면 많은 가르침들이 되풀이하여 사람들을 깨우칠 목적으로 주어졌음을 알 수 있다. 거의 대부분의 교훈이 가만히 있는 사람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설명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교회나 형제들에게 어떤 문제가 일어났을 때 주어진 것이다. 바울은 사람들에게 종종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라고 말했다. 그것은 “네가 네 속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느냐? 왜 주님이 네게 명하는 바를 잊고 있느냐?”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바울이 전에 그들에게 한 번도 가르친 적이 없는 진리를 말하면서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고 말한 것은 다 주님께서 그들 속에서 친히 가르치심을 전제로 한 것이다. 우리가 속에서 가르치는 주님의 음성을 부주의하게 지나쳐버리고 또 무시하기 때문에 주님은 사도들이나 선생들을 통해 다시 가르치고 깨우치는 것이다.
마음이 새로워지고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들을 수 있기 위해서는 반드시 십자가를 지려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 홀연히 들어오는 어떤 생각들은 대개 근거 없는 것이며 자기의 탐욕을 바탕으로 마귀로부터 온 것일 가능성이 높다. 우리가 한 가지라도 이미 깨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실제로 순종할 때 하나님은 계속하여 우리 안에서 말씀하시며 능력으로 역사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 말씀을 붙들어야 한다. 또 반대로 성경을 깊이 이해하고 그 가르침을 바로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경의 영 곧 말씀을 기록하신 성령을 소유해야 한다. 하나님의 영을 받아 그 속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경험하는 자라야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바로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둘은 상호보완적인 것이다.
오직 우리가 믿음으로 아멘하여 그것을 누리는 일이 남은 문제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고후1:20) 신약은 하나님이 주신 최고 복된 언약이며 선조들이 바라며 기다리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에게 주어진 이 복된 언약을 우리는 다 믿고 삶에서 온전히 누리자.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이 신약의 축복에 참여할 수 있도록 이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하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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