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의 심한 노출의 의상에 관하여 글/扈一麥
여름이라서 날씨가 무덥고 연일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여름철이 되면 여성들의 심한 노출로 인해 불편을 당할 때가 자주 있습니다. 사실 요즘엔 여름이여서 옷이 특별히 더 짧은 것이 아니고 겨울에도 추위에 덜덜 떨면서까지 다리를 드러내고 유행을 따라 가는 철없는 사람들도 종종 보게됩니다.
성도인 우리는 의상에 대해서까지도 분명한 자세를 가지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교회안에서 바른 옷차림을 하는 것은 성도에게 매우 중요한 기본 예의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예(禮)를 갖추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예배 시간조차 예(禮)를 지키지 못한다면 지도자나 나이 많은 세대가 잘못 가르쳤다는 뜻도 됩니다. 특히 사람 보기에도 민망한 옷 차림은 자신은 좋을찌 모르지만 분명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입니다. 가끔 외출을 하는데 계단을 올라 갈 때라든지 지하철에서 하의를 입었는지 안입었는지 구분조차 안되는 짧은 치마를 입고 앉아있는 사람들을 볼 때 민망하여 어디에 시선을 두어야 할찌 모를때가 한 두번이 아닙니다. 분명 이것은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입니다.
의상은 민족이나 부족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또, 단체를 대표하기도 합니다. 군인은 군복을 입고 경찰은 경찰복을 입어서 자기의 신분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군복 중에도 육군의 복장이 다르고 해병대의 복장이 다릅니다. 회사의 사원들이 입는 복장이 다르고 어느 단체든지 그를 나타내는 복장이 있습니다. 목욕탕에도 때밀이는 팬티를 입고 있어서 자기가 때밀이인 것을 알려줍니다. 그와같이 복장은 자기의 신분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의상에 대해서는 이전 시대에도 지역에 따른 다양한 해석들을 동반하고 있었습니다. 의상이 신분을 나타내는 수단이 되기도 했고 부의 상징이 되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많은 국가들에서는 신분에 맞지 않는 색상의 옷을 입는 것이 금지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자주색은 왕이나 상류층과 그 자제들이 입을 수 있는 옷의 색상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층 계급의 사람들이나 범인들은 돈이 많다고 해서 자유롭게 그 색상의 옷을 선택해 입을 수 없었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누구나 자기가 원하는 색상의 옷을 고를 수가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현대의 자유로움은 도를 지나쳐, 의상은 개인의 취향에 따라 자유롭게 입어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 말이 전적으로 틀린 말은 아니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옷은 곧 그 사람의 인격을 반영하는 표현일 수 있다는것을 배제하고 생각없이 유행을 따르든지 자기 몸에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는다면 남에게 불쾌감을 주는 것입니다. 비만이 너무 심한데 남들이 짧은 치마나 바지를 입고 다닌다고 자기도 꽉 끼는 짧은 치마나 바지를 입고 나오는 것은 본인에게는 별 문제가 아닐 수 있겠으나 실상 많은 사람들에게 그 사람을 욕하게 하는 죄를 범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실 의상은 자기만을 위한 것이 아님을 잘 깨달아야 합니다. 의상은 자신의 몸을 보호하는 동시에 품위를 지켜주기도 하며, 동시에 다른 사람들과 인격적 교제를 위한 기본적인 것이기도 합니다. 다시말씀드려서 화장이나 의상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웃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상대편이 볼때도 크게 무리가 없어야 좋은 화장법, 좋은 복장일 수 있습니다. 남들의 시선을 집중적으로 받고싶은 욕구가 있다면 남에게 즐거움 보다 죄를 짓게 하는 경우가 더 많을 수 있습니다.
일례로 어느 부부가 외출을 하는데 남편이 짧은 치마를 입고 가는 아가씨들을 유심히 쳐다보았다고 부부싸움을 한 가정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부모는 자녀들에게 가정에서부터 가르쳐야 합니다. 솔직히 유행은 자기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남을 따라가는 것은 생각없는 행동입니다. 성숙한 사람들은 남들이 무슨 짓을 하든지 상관하지않고 자기만의 독특한 취향을 살리는 것입니다. 유행의 집단 취면에 걸리면 정신없는 행동을 하면서도 정당하다고 생각을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의상이 자기를 과시하기 위한 방편으로 인식된다면 성숙한 사회가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웃의 눈살을 찌푸리게 할만한 옷차림에 대해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면 그것도 문제입니다. 때로 미숙한 사람들이 이웃에 대한 배려를 무시하고 자기 멋을 위해 옷을 입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미성숙한 사람들은 '내 돈 주고 내 취향대로 옷 사입는데 누가 뭐라 할거냐'는 식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 사람들은 의상이 다른 사람에게 자기의 성적매력(?)을 드러내는 수단인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약에 사고를 당하거나 범죄를 저지르게 하였다면 범죄한 사람도 문제지만 원인 제공한 사람도 죄없다 못할 것입니다. 요즘 방송에서는 옷을 자유롭게 입을 권리를 달라고 하는 것을 방송하지만 반대로 불편스러운 것을 보지않을 권리는 왜 안주는지 궁금합니다.
무더운 여름철이 되니 여성이나 남성이나 노출이 심한 옷을 입는 것이 자연스러운 계절입니다. 그런데 요즘 전 세계 여성들의 ‘슬럿 워크’(Slut Walk) 열풍이 언론에서 화제입니다. ‘슬럿 워크’는 여성들이 몸에 꼭 끼거나 노출이 심한 옷을 입고 행진하는 시위입니다. 이런 시위는 지난 4월 캐나다 토론토에서 한 경찰관이 대학 강연 도중 “여성이 성범죄의 희생자가 되지 않으려면 헤픈 계집(Slut) 처럼 옷을 입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 것에 항의하기 위해 시작됐다고 합니다. 이후 세계 곳곳으로 ‘슬럿 워크’ 시위가 확산되고 있는 추세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생의 성추행 사건을 시작으로 ‘슬럿 워크’ 시위의 불길이 서울 도심에 옮겨졌습니다. 성추행 사건을 두고 여성이 성추행 당할 만한 행동을 했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인터넷상에 떠돌자 이에 대한 항의로 ‘슬럿 워크’ 1인 시위가 진행된 것입니다.
시위 참가자들이 항의하는 것은 “도대체 남자들이 생각하는 헤픈 여자란 무엇이며, 야하게 옷을 입는 것이 왜 문제가 되는가?”입니다. 여성들은 “내가 무슨 옷을 입든, 어떤 행동을 하든, 당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한 것이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에게도 성추행이나 성폭력을 허락한 적이 없습니다. 성추행이나 성폭력의 탓을 피해자인 여성에게 돌리지 말라”고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의 몸이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몸은 음란을 위하여 있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여 있으며 주는 몸을 위하여 계시느니라”(고전 6:13)며 분명히 지적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가르친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권리는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하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행하라는 것 입니다.
이어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몸으로 행한 불의한 일에 대하여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전 6:9-10)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삶은 종교적 행위보다 몸으로 살아가는 일상의 삶 속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남을 명심해야 합니다. 성숙한 성도들은 주변의 이웃을 기억하는 가운데 의상을 고르는 일에조차 건전한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과다한 노출을 피해야 하며, 이웃으로 하여금 성적 자극을 일으키게 할만한 의상이라면 피해야 합니다. 자신의 노출된 의상으로 인해 마음속으로 음행하는 자들이 생겨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은 남에게 죄를 짓게하는 망령된 행동입니다. 요즘 교회에 예배 시간조차도 미숙한 모습들을 자주 보게 되어 눈살을 찌프리게 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들은 의상이 자기를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이웃을 위한 것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특히 그리스도인으로써의 신분을 나타내는 옷을 입으므로 그리스도인 답게 살아야 합니다. 특히 주일 예배를 위한 옷차림에 대해서는 각별한 신경을 써야합니다. 지나치게 값비싼 옷이나 사치스런 옷을 피해야 하며 또한 아무렇게나 찢어진 옷을 입음으로서 이웃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일도 없어야 합니다.
그리고 속살이 훤히 들여다 보이거나 신체부위를 지나치게 노출시키는 옷은 절대로 피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이웃을 기억하는 가운데 성숙한 의상생활을 하기를 바랍니다. [엡 4 : 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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