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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디지털시대의 글쓰기] 광장에서 글쓰기

수호천사1 2011. 4. 22. 13:51

[디지털시대의 글쓰기]

광장에서 글쓰기 

 

 

엽기와 비판으로 무장한 네티즌 시대  

 

아고라 광장에서 연설한 논객을 향해 반격하는 청중, 그 반격은 다시 청중들의 논쟁으로 치닫는다. 글로 판을 벌이고 그 놀이판에서 신명나게 놀고 있는 이 시대, 글쓰기의 변화를 절감한다.

 

일찍이 글판이 이렇게 시끄러워본 일이 있었던가. 필자들이 쓴 글을 독자들은 경건한 침묵 속에서 읽었다. 인쇄, 출판의 제도는 견고했다. 신춘문예나 추천 등을 통한 등단의 절차를 거친 문인들만 글을 쓸 수 있었고 신문이나 잡지사 편집인들의 엄격한 심사를 거쳐야만 식자들은 책을 낼 수 있었고 글을 실을 수 있었다. 이 견고한 절차는 신문이나 잡지에 실린 글에 권위를 부여했고 그 아우라는 독자들의 독서 행위를 더욱 침묵의 경건한 기도와 흡사하게 만들어왔다. 작가(author)는 문자 그대로 권위(authority)가 있었고 독자들은 그에게 함부로 비난의 잣대를 들이대지 못했다. 이때 권위는 일방성을 의미했다. 독자의 비판이 이미 출간된 책을 되돌릴 수 없었다. 책은 수 백년 동안 빛 바래면서도 원형은 변하지 않는 그 모습을 지식의 불변성과 동일시하며 스스로의 자태를 뽐냈다.

 

그런데 오늘날 신문의 칼럼들을 보라. 각 분야 전문가들의 시사 진단이나 논지는 인터넷 신문에 그대로 옮겨지면서 바로 그 밑에 수많은 답글(reply)이 달린다. 익명이지만 대부분 평범하고 건전한 시민임에 틀림없는 장삼이사들의 아우성…. 입에 담을 수 없는 욕도 있고 수준 낮은 비판도 많지만 네티즌들은 글의 모순점을 요소요소 지적하며 가차없이 비판한다. 하나의 글을 놓고 그 사안에 대해 확장된 논지를 펼치며 갑론을박하는 장관이 연출되기도 한다.

 

이건 글이 아니다. 아고라 광장에서 연설한 논객을 향해 반격하는 청중의 모습, 그 반격은 다시 청중들의 논쟁으로 치닫는다. 글로 판을 벌이고 그 놀이판에서 신명나게 놀고 있는 이 시대 민주시민의 모습에서 글쓰기의 변화를 절감할 수밖에 없다.

 

처음에 말이 있었다

 

처음에 말이 있었다. 사람들은 말을 통해 의사소통을 하고 배우고 생활했다. 몸동작, 억양, 표정 등이 동원되고 상대방의 질문이 허용되기 때문에 대화는 지식전달에 효율적이었다. 그러나 말은 전달성과 보존성에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말은 발화와 동시에 인간의 망각 속으로 사라져버린다. 말소리는 멀리 나아가지 못한다. 망각 속에서 지식은 축적되지 못하고 다음 세대로 전달되지 못하였다.

 

말의 보존과 전달을 위해 인류가 발명한 것이 글이었다. 문자를 통해 지식은 보존, 축적되고 전달되었으며 인쇄술이 발달하면서 지식의 생산과 전달은 획기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인쇄술은 균일한 활자로 쓰인 지식을 균일한 책에 넣어 수천, 수만 명에게 전달했다. 이제 인류는 다양한 지식을 표준화하는 지식의 대량생산과 전달을 기반으로 한 근대 문화를 이루게 됐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 인쇄 텍스트로 지식을 전달, 보존하는 것도 한계에 이르게 되었다. 예를 들어 인터넷은 종이 파일들이 너무 많아 보존과 지식 검색이 한계에 이르른 시점에서 발명됐다. 또 종이책은 선형적이기 때문에 단어를 찾기 힘들다. ‘전자’라는 단어 하나를 사전에서 찾는데 ㅈ, ㅓ, ㄴ…. 이런 식으로 범주를 좁혀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걸렸다. 이런 정보 검색 방식을 개선하기 위해 과학자들은 연상의 원리에 의한 검색체계를 고안했다. 사람들은 평소 생각할 때 책을 읽는 것처럼 순차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다발적으로 머릿속에 생각을 떠올린다. 이 방식을 적용한 것이 인터넷이다. 거대한 데이터베이스의 바다에서 독자는 자신이 원하는 정보를 머릿속에 지식을 떠올리는 것처럼 자유자재로 검색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자료들은 공간과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언제 어디서나 연결된다.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유비퀴터스 컴퓨팅 개념은 마이크로칩이 모든 사물에 침투해 언제 어디서나 컴퓨터와 상호작용할 수 있는 시스템이다. 지하철 등에서 휴대전화를 통해 정보를 얻는 것이 그 예이다.

 

아무튼 이런 체계 내에서 형성되는 언어 공동체는 지금까지와 다른 독특한 언어 문화를 형성한다. 그 첫 번째 현상이 언어 자체에서 일어나는데 말과 글의 경계가 무너지는 현상이다.

 

흔히 통신언어라고 하는 이 언어는 채팅언어에서 비롯했고 전자우편, 게시판, 휴대전화 문자, 채팅 등에 사용된다. 통신언어는 수신자와 발신자 사이에 의사소통이 동시적으로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에 신속함이 생명이다. 또 상호소통이 되기 때문에 일방향적인 글과 달리 친교적 표현을 중시한다.

 

화상 채팅도 있으나 아직까지는 소통의 매체가 글인 반면 소통의 형식은 말과 닮아 있다. 이런 모순 때문에 통신언어에는 말의 요소와 글의 요소가 혼재된다. 첫째, 표현의 측면에서 소리나는 대로 표기하는 경향이 있다. 손이→소니, 먹다→먹따처럼 말할 때의 방식을 선호하는 것이다. 어서 오십시오→어섭쇼, 핸드폰→핸펀처럼 탈락과 축약 현상이 나타나는 것 또한 구어체와 비슷하다.

 

근대 국가관의 변모와 외계어의 등장

 

어휘에서는 은어와 약어, 감정표현 부호(emoticon)가 나타난다. 같은 사이버 공동체로서 유대감을 드러내는 데에 은어만큼 효과적인 것도 없다. 또 채팅을 하다보면 상대방과 마주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감정과 얼굴 표정을 보이려는 경향이 나타난다. 이모티콘은 이렇게 탄생되었다. 전산용어 사전인 http://www.terms.co.kr를 검색해 보면, emoticon(이모티콘)은 인터넷 전자우편이나 채팅 그리고 메시지를 뉴스그룹 등에 올릴 때 글의 내용을 보충하기 위해 키보드 글자나 부호들의 짧은 나열을 이용하여, 보통 얼굴표정을 흉내내거나 느낌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대부분의 emoticon들은 웃음이나 윙크, 옆으로 뒤틀린 입 등 얼굴 표정을 만들기 위해 몇 개의 부호를 사용한다.

 

emoticon은 emotion(감정)과 icon(기호, 형상)이 결합된 용어이다. 1980년대에 미국 카네기 멜론 대학생인 스코트 펠만이 이메일의 끝에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말라는 뜻으로 웃는 얼굴을 덧붙여 보낸 것이 그 시초라고 한다. 초기에는 웃는 표정을 주로 사용하였으므로 스마일리(smiley)라고도 불렸다. 스마일리는 국가에 따라 자주 사용하는 것이 조금씩 다르고 새로운 아이디어도 계속 추가되고 있다. 현재 한국과 미국 등에서 사용 중인 이모티콘은 2000여 개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모티콘에는 사람의 감정이나 표정을 나타낸 것과 사물의 특징을 나타낸 것 두 가지가 있다. 후자는 아스키 아트(ascii art)로 발전하고 있다. 이모티콘은 문자보다 그림에 가깝다. 사람의 표정을 키보드로 타이핑한 것으로 글쓴이의 미묘한 감정을 표현할 수 있다. 문장의 끝에 미소짓는 표정 하나만으로 글쓴이의 감정 상태가 드러나기 때문에 글 전체의 뜻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어 가독성을 높인다. 이는 컨텍스트가 공유되는 일대일 대화에서 상대방과의 교류가 원활해지는 장점을 살린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모티콘의 특장은 만국 공용어라는 점이다. 나라마다 쓰이는 언어는 다르지만 그 사람의 표정과 몸짓으로 의사소통이 가능한 것처럼 이모티콘 또한 구어의 의사소통 방식을 닮아가는 것이다.

 

a. 흑흑.. 우리 착하고 좋은 친구들을 놔두고 서울로 가요.
b. ㅎㅎ 우리 차카고 조은 친구들 놔두고 설로 가요.
c. 흐흐흐ㄱㄱㄱ☆ㅠ_ㅠ 어 탸콰 뎌응 九들乙 ㉯드 설 家

 

a는 정상적인 문장이고 b는 통신언어로 어느 정도 뜻을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c로 가면 도저히 그 의미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맞춤법이 파괴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세종대왕이 창제하신 한글에서 파생되었다는 유래담까지 통신공간에 있는 이 외계어는 종래 통신언어가 신속함, 편리함 때문에 연음이나 줄임말을 사용하던 것과는 딴판으로 복잡하고 느린, 불편하기조차 한 조어법을 지니고 있다. 한자, 히라가나, 러시아 문자, 특수 문자들이 섞여 있어 일반 문장을 칠 때보다 2~3배는 느리다.

 

최근에는 한 네티즌이 외계어 번역기 사이트를 개설해 일반문장으로 번역해 주고 있는 실정이다. 이 프로그램은 외계어를 일반 문장으로 번역해줄 뿐 아니라 일반 문장을 외계어로도 번역할 수 있다. 2002년 한글날 각 방송사에서는 외계어와 한글 파괴를 특집으로 방영하기도 하였고 인터넷상에서 논쟁거리가 되기도 했다. 포털 사이트 다음에서는 통신언어에 대한 찬반토론과 설문 조사를 벌였는데 자제가 필요하다고 대답한 네티즌이 41.1%, 적극 반대한다는 네티즌이 21.4%로 나타나 대체로 언어파괴의 심각성을 인정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외계어는 특히 아직 한글을 완전히 익히지 못한 초등학생들에게 나쁜 영향을 미친다. 이 심각성을 고려하여 인터넷 사이트 ‘아이두넷’에서는 언어파괴를 반대하는 서명 운동을 벌이고 있고 ‘언어파괴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경우는 온라인에서의 언어파괴를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많은 네티즌들이 자기 커뮤니티에서 자유자재로 외계어를 구사하고 있고 심지어 외계어에 강한 애정을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외계어는 간편하게 사용할 수도 없으며 배우기도 힘든 언어이다. 언어의 합리성에 전혀 맞지 않는 이 외계어를 네티즌들은 왜 쓰고 있으며 무엄하게도 세종대왕의 한글에 비견하고 있는 것일까.

 

자국어에 대한 사랑이 강조되고 맞춤법 등이 제정된 것은 근대 이후의 일이었다는 점을 상기해 보면 외계어의 시대적 의미가 드러난다. 단군 이래 수천 년의 단일 민족 공동체임을 역사적 자부심으로 간직하고 있는 한국으로서는 좀 껄끄러운 주장이겠으나 민족을 이런 원초적 공동체가 아니라 근대 자본주의의 발전 과정에서 생겨난 역사적 구성물로 보는 견해가 사실 더 설득력이 있다. 민족주의가 갖는 이데올로기적 호소력은 근대 이행기에 왕조의 정통성이 끊긴 상실감을 대체해줄 효율적 가치관이었고 이 가치관은 소설이나 신문이 ‘상상의 공동체’로서 민족적 연대감을 만들어가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때 자국어는 소설과 신문의 형식으로서 작동한다. 자국의 언어로 의사소통하는 과정에서 같은 언어를 쓴다는 연대의식은 같은 민족이라는 동질감을 구체적으로 확인시켜 준다.

 

그런데 자국어가 민족 공동체의 연대감을 확인시켜 주는 존재라면 외계어는 사이버 공간의 연대감을 확인시켜주는 의사소통의 도구라 볼 수 있다. 물론 외계어가 자국어를 대체할 수는 없겠으나 외계어는 은어를 사용함으로써 동질감을 확보하는 동아리 차원에서 훨씬 강화된 언어 개념인 것이다. 다소 극단적으로 논의를 진전시킨다면 네티즌들의 이 자국어 파괴라는 부정적인 특질 속에는 국가 개념으로 사유하던 근대인들과는 달리, 다양한 연대로 지구화 시대에 대처하는 최근 지구인들의 경향을 반영하는 것일 수도 있다.

 

위풍당당한 네티즌들의 비판적 글쓰기

 

인터넷의 네티즌들은 신문으로 대변되는 문화권력을 향해 난리들이다. 처음엔 공격의 화살을 보수성향의 신문을 향해 쏘았다. 여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고 그것에 대한 다양한 진단들이 있으나 중요한 원인을 사람들이 간과하고 있다. 표면적으로 보수성, 독점 언론에 대한 비판이 이렇게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게 된 것은 인터넷 그 자체의 속성에 말미암은 것이다.

 

인쇄의 복잡한 공정 때문에 한정된 사람만이 ‘권위 있는’ 매체에 글을 쓸 수 있었고 실린 글은 일방적인 전달 방식에 의해 그 권위를 더욱 강화할 수 있었다. 형식적 요건들 때문에 독자는 수동적이고 순종적인, 말없는 독서를 할 수밖에 없었다. 올바른 독서의 관건은 주어진 글을 필자의 의도에 맞게 얼마나 정확하게 해독하느냐에 있었다. 그러나 인터넷의 형식은 글쓰기의 수동성을 일거에 바꾸어버렸다. 누구나 자신의 주장을 게시판에 올릴 수 있고 게시판의 글들에 답하는 글을 올릴 수 있다. 언어의 광장에서 사람들은 말을 주고받듯이 의견을 나눌 수 있었다. 이제 글쓰기는 특정한 사람, 선택된 사람, 전문가의 영역에 한정되지 않는다.

 

수직적·일방적 관계에서 수평적·양방향의 관계로 변모한 작가와 독자 관계의 첫 시험대는 가장 큰 대중성을 확보하고 있는 신문이었다. 대입논술의 가장 중요한 교과서가 신문이었는데, 고등학교 재학시절 내내 신문을 비판적 자료로 삼아 논술 연습을 해온 네티즌들은 위풍당당하게 신문의 논지를 비판해가면서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기 시작했다. 이런 양상을 최근 신문사에서도 받아들여 인터넷 신문에서는 아예 기사마다 게시판이 있는 형편이다.

 

아햏햏 등장과 엽기적 글쓰기

 

‘글쓰기’의 권위를 약화시킨 것은 인터넷상의 정보들의 유동성 때문도 있다. 하이퍼텍스트에서는 인쇄매체에서와는 달리 편집과 수정이 자유롭다. 끊임없이 업그레이드되는 정보들, 오늘 사이트에 틀림없이 있었던 정보가 내일 가보면 삭제되어 있다. 수백년 동안 보존되는 인쇄매체의 지식과 달리 인터넷의 정보는 마음대로 삭제되고 조작될 수 있다.

 

내 글과 네 글의 경계도 미약하다. 다른 사람들의 글을 따와 재조립하고 패러디하는 것은 식은죽 먹기다. 좀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하이퍼텍스트에서의 표절은 창조의 시작이다. 상호 텍스트성이 그 형식의 본질과도 같은 이곳에서 글쓰기는 작가와 독자의 공동 창작과 같은 것이다. 다른 사람 글에 대한 비판은 자기 글쓰기의 출발점이 되는 것이다. 글이 글을 낳는 이 연쇄의 고리는 글의 중심을 상실하게 하는 것이다.

여기에 익명성도 한몫을 한다. 굳이 추적하지 않으면 아이디만으로 상대방의 정체를 파악할 수 없다. 이런 익명성의 틈새에서 개인의 무의식은 극대화된다. 사이버 공간에서는 이 익명성의 뒤에서 자신의 평소 모습과는 다른 페르소나를 보이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다분히 공격적일 수 있는 이 상황은 글쓰기를 흔히 비판적으로 만든다.

 

최근 개벽이가 죽었다고 한다. 개벽이가 누구인가? 아사이트의 스타 개벽이는 처음 한 네티즌이 벽 틈으로 고개를 내민 개의 모습을 디지털 카메라로 찍어 ‘디시인사이드’에 올린 데서 탄생했다. 디시 폐인들의 표현대로 우는 듯 웃는 듯 고개를 내민 개의 모습이 시공을 초월한 진리를 말하는 듯했다는 것이다. 우연히 고개를 내민 개의 모습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엽기의 대명사로 인구에 회자됐다. 개벽은 이룰 수 없는 일을 이루어내는 존재의 대명사이면서 아무 데서나 불쑥 튀어나오는 사람을 비웃는 용어에까지 널리 쓰이기 시작했다. 개벽이의 동생 개죽이도 등장했다. 대나무에 매달려 있는 개죽이는 개벽이의 동생이자 라이벌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개벽이를 주인이 집을 비운 사이 친척들이 복날 잡아 먹었다는 것이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네티즌들은 개벽이 추모 사이트를 만들어 추모의 글을 올렸다. 노무현 대통령이 분향하며 눈물 흘리는 합성 사진을 비롯하여 개벽이에 대한 애정이 깃든 사진도 많이 등장하고 있다. 피식 웃어 넘기기에는 너무도 엉뚱하고 진지한 이 글쓰기의 원인과 정체는 무엇인가?

 

먼저 아무 의미 없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신조어 만들기는 엽기 사이트의 전형적인 의사소통 구조다. 우선 유행어는 아주 우연히 탄생한다. 어떤 네티즌이 한 벽보를 디카로 찍는다.

 

“이곳에 개똥 쌔우지 마세요. 아이들 방이니 개똥 쌔우지 마세요. 개를 키우려면 남에게 피에는 주지 말아야지. 이 양심 업ㅂ는 인간들. 이곳에 개똥 쌔우지 마세요.” 서툰 글씨와 틀린 철자법으로 보아 한글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사람이 자기 집 벽에 붙인 벽보를 찍은 이 사진은 ‘쌔우다”와 ‘업ㅂ는’이란 유행어를 낳았다. 이 사이트의 사람들은 “똥을 싸게 하다”나 “리플 등을 달다” 혹은 “어떤 행동을 취하다” 등의 뜻으로 ‘쌔우다’를 쓰고 ‘없는’ 대신 ‘업ㅂ는’을 쓰기 시작했다.

 

엽기 사이트의 의사소통 방식은 일면 선문답을 닮았다. 예를 들어 “왜 이렇게 늦게 왔어?”하고 야단치는 말에 “고구마 장사가 힘들어요. 100원만 주세요”라고 답변한다. 이 문장은 할 말이 없을 만큼 궁지에 몰렸을 때 엉뚱한 대답으로 상대방을 어처구니없게 만드는 역공격의 일종이다. 네티즌들은 자신을 ‘자’라고 표현한다. ‘득’을 이루기 위해 ‘수’하는 자로서 ‘귀차니즘’과 ‘게을르니즘’을 기본기로 갖고 있단다. 무의미함이 의미가 되는 도의 경지가 자신들의 세계라는 것이다.

 

인터넷은 정감의 공동체

 

딱 ‘시덥지 않은 놈들’로 표현될 만한 이들의 행태는 그러나 결정적인 이슈를 만날 때면 범상치 않은 힘을 발휘한다. 실례로 반미 촛불시위는 한 엽기 사이트에서 네티즌이 촛불시위를 제안함으로써 비롯되었다. 그 엽기 사이트에는 그 이전부터 김동성 선수의 금메달을 가로챈 오노에 대한 비판과 패러디, 한국인의 개고기 식습관을 공격했던 브리지트 바르도를 비판하는 사진들이 상당수 축적되어 있었다. 그 장난기 어린 그림들이 심각한 사안과 마주치면서 네티즌들의 힘을 강하게 결집시킨다. 평소 낄낄거리며 시간이나 죽이던 폐인들이 광화문으로, 시청으로 몰려들면서 역사의 한 방향에 영향을 미친 것이다.

 

사이버 공간을 부유하다가 엄청난 힘으로 결집되는 이들의 행동을 마페졸리는 인터넷이 기본적으로 ‘정감의 공동체’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사이버 공동체는 현실공간에서처럼 이해관계가 아니라 개인의 취미나 관심사로 형성된다. 이렇게 가슴으로 모인 사람들이 학연, 지연, 혈연의 이해관계 없이 어떤 사안에 대해 공감할 때 무서운 응집력이 생긴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엽기’의 감수성은 ‘비판’의 감수성과 맥을 같이한다 하겠다. 익명성, 양방향성이 허용되고 시공간으로부터 자유로운 사이버 공간에서 개인의 자아는 이성적인 제약으로부터 자유롭다. 할 일, 안 할 일의 구분이 모호해지면서 ‘황당한 일’을 찾아내며 재미있어 하는 감수성이 지배적이 된다. 그러나 특정 이슈를 만나면 강하게 결집하는 것이다. ‘엽기의 글쓰기’는 사이버 민주주의의 담론이라 하겠다.

 

인류의 의사소통 방식은 매체의 변화에 따라 현저히 다른 양상을 띠어왔다. 구술언어로만 조직된 부족사회에서는 구술언어의 특성상 사용되는 것만이 전승되고 전승된 것만이 사용되기 때문에 변화가 적고 안정되어 있었다. 공동체의 규모 또한 구성원들이 직접 지각할 수 있는 범위로 한정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문자가 발명되고 다시 인쇄술이 보급되면서 지식의 폭발, 균등 분배가 이뤄지고 문화적 민주주의가 정착된다.

 

이제 전자 매체의 발달로 지식의 생산과 교환, 소비의 양태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전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문자성과 구술성의 통합 및 새로운 발전이 이루어지고 있고 읽기와 쓰기의 경계 또한 모호해지고 있는 형편이다. 인쇄시대가 지식의 평등한 분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면 디지털 시대의 지식은 공동 생산과 소비의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종래와 다른, 비판적 글쓰기, 엽기적 글쓰기의 단초가 보이고 있고 온라인상의 글쓰기는 오프라인의 현실에 만만치 않은 위력을 과시하고 있다. 글쓰기의 지각 변동은 이제 가시화되고 있다. 그 올바른 방향을 위해 우리 모두가 지혜를 모아야 할 때라고 보여진다.

출처 : 내 사랑 중국 ♡ MyLove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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