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시대의 글쓰기]
나의 온라인 글쓰기 이력서
부글거리는 욕망의 배출구
글쓰기의 핵심은 ‘불특정 다수’의 ‘낯선 사람들’과 열린 마음으로 대화’를 나눌 만한 ‘인간에 대한 예의’를 갖추고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다.
흔히 ‘디지털 글쓰기’라 함은 곧 ‘온라인 글쓰기’다. 왜냐하면 책이라는 아날로그 매체를 통해 독자들에게 전달될 것이 분명한 이 글조차 나는 워드프로세서라는 디지털 도구를 이용해 디지털 방식으로 쓰고 있으며, 또한 이메일이라는 디지털 매체를 이용하여 편집자에게 전달할 것이고, 나아가 이 글이 종이에 인쇄되기까지 복잡한 출판과정 또한 대부분 디지털 방식에 의해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디지털 방식으로 글을 쓴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렇게 엄밀하게 용어를 정의할 때조차 ‘온라인 글쓰기’는 기본적으로 ‘디지털 글쓰기’를 전제할 수밖에 없으며, ‘온라인 글쓰기’의 중요한 특징으로 지적할 수 있는 내용 중에는 그것이 ‘디지털 글쓰기’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들이 포함되어 있다.
내가 처음 워드프로세서를 사용해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1990년 봄부터다. 당시 대학 한 학기 등록금을 훨씬 웃돌던 20메가바이트짜리 하드디스크가 달린 AT급 컴퓨터를 구입하려고 결심했을 때, ‘온라인 글쓰기’의 필요성이나 전망 따위는 막연하게라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저 첨삭·수정이 자유로운 타이프라이터가 필요했을 뿐이다. 이미 오래 전 골동품이 되어버린 1200bps짜리 모뎀이 어디에 쓰이는 물건인지도 알지 못했고, 굳이 알 필요도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올 일이지만, 그해 가을 어느 후배가 제 모뎀의 성능을 큰 맘 먹고 2배쯤 향상시키면서 먼저 쓰던 것을 버리는 셈치고 내 컴퓨터에 달아 주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 그 후로도 상당기간 ‘온라인 매체’가 존재하는지도 모르고 살았을 것이다. 내 또래의 많은 사람들이 꽤 오래도록 내가 상용통신망을 사용하는 것을 기이한 취미쯤으로 여기며 신기해 했다.
실은 나 역시 텔넷 기반의 ‘온라인 매체’ 환경이 웹 기반의 인터넷으로 눈 깜빡할 사이에 돌변하지만 않았어도 쓸 만한 워드프로세서 프로그램을 작동시킬 수 있는 정도의 기본적인 사양(20메가바이트 저장 용량의 16비트 컴퓨터로도 HWP 1.5버전으로 글을 쓰고 공개 소프트웨어였던 ‘이야기’를 돌려 통신을 하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었다)만 갖춘 컴퓨터도 여전히 만족스러웠을 것이다. 그만큼 나는 문화적으로 ‘보수적’이었다. 좀더 솔직히 말하자면 나의 그 ‘보수성’은, 하루가 다르게 업그레이드되는 매체 환경에 발빠르게 적응할 수 없는 가난한 경제적 능력에 기인했다.
생각의 속도를 따라가는 손가락
‘디지털 매체’를 이용하여 일상적인 글쓰기를 하리라고는 꿈도 못 꾸던 그때도 내게는 첨삭·수정이 자유로운 타이프라이터인 워드프로세서가 필요했고, 다시 말해 ‘디지털 방식’으로 글을 써야 할 이유가 분명히 있었다. 무슨 하고 싶은 말이 그리도 많았는지 머릿속에서 부글거리는 생각들을 문자로 옮겨놓고야 말겠다는 욕망은 수많은 밤 빈 종이와 씨름하게 했다. 그러나 날이 훤히 밝을 무렵 남은 것이라곤 원래 쓰려던 내용의 고작 10분의 1도 안 되는 분량의 정서된 종이 몇 장과 그 10∼20배쯤 되는 쓰다 버린 파지들, 밤새 몇 장 되지도 않는 분량을 최소한 서너 번 이상 정서해서 베껴 쓰느라 뻣뻣하게 굳어버린 오른팔의 묵직한 통증이었다. 그리고 몸이 먼저 지치지만 않았다면 며칠 밤이라도 쏟아내야만 직성이 풀릴 듯 도무지 사그라질 줄 모르고 오히려 감질만 나버린 글쓰기의 욕망들이었다.
게다가 내 오른팔을 더 지치게 만드는 것은 머릿속의 생각이 달려나가는 속도를 손이 따라가지 못하면서 생긴 짜증이었다. 다른 대책이 필요했다. 그리고 컴퓨터를 들여놓은 지 불과 몇 달 만에 어림잡아 200자 원고지 3000장 분량의 글을 써내고는 본전은 뽑은 셈이라고 자족했다. 대부분 당시 활동하던 국어운동학생회와 관련한 ‘정치적’ 내용의 문건이었고 마침 공부하던 영어책을 우리말로 옮겨 정리한 문서와 부업 삼아 선배의 자료정리를 돕기 위해 작성한 문서도 꽤 있었지만, 실은 소설을 써 보고 싶다는 생각도 없지 않았다.
이처럼 디지털 방식의 글쓰기가 아날로그 방식의 글쓰기와 근본적으로 다르게 다가왔던 것은, 어느 워드프로세서 프로그램의 편집메뉴에도 빠지지 않고 들어 있는 ‘오려두기’ ‘복사하기’ ‘붙이기’ ‘지우기’ ‘바꾸기’ 따위의 기능 덕분이었다. 첨삭·수정할 부분이 생길 때마다 다시 새 종이에 일일이 베껴서 정서하지 않아도 됐고, 일단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문장이 되든 안 되든 생각이 달려나가는 속도 그대로 화면에 띄워 곧바로 확인할 수 있었다.
‘디지털 글쓰기’는 처음부터 어느 정도 정리된 생각을 웬만큼 정확한 문장으로 만들어내야 한다는 글쓰기의 부담을 한결 덜어 주었다. 생각하고 나서 말하기보다 말을 하면서 생각을 정리하는, 말 그대로의 의미에서 ‘대화’ 방식으로 글을 쓰는 것이 가능했다. 글쓰기가 본질적으로 ‘대화’라고 할 때, 이러한 변화는 일상적으로 이루어지는 (타인뿐 아니라 자신과의) ‘대화’의 맥락이 고스란히 글로 옮겨질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글쓰기는 더 이상 정리된 문장으로 자신의 생각을 옮겨놓을 수 있는 훈련을 받은 일부만이 독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대화’의 계기와 맥락에 열려 있는 모든 사람의 일상일 수 있으며, ‘디지털 글쓰기’의 출현으로 글쓰기는 이제 ‘능력’이 아니라 ‘태도’의 문제가 됐다.
채팅, 전자게시판, 그리고 온라인 글쓰기
‘디지털 글쓰기’의 특성이 가장 분명히 드러나는 것이 ‘온라인 글쓰기’다. 디지털 기호를 이용한 통신은 지극히 일상적인 대화까지도 고정된 문자 텍스트의 형태로 존재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예컨대 채팅을 보라. 두 사람만이 주고받는 지극히 사적인 이메일을 쓸 때조차 우리는 편지라는 형태의 격식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고, 정리된 글을 써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힌다. 그러나 보다 더 많은 사람들, 심지어 개인적으로 잘 알지도 못하는 불특정한 사람들 앞에 분명히 ‘글’로 자신을 표현하면서도 우리는 그것을 ‘글쓰기’라고 의식하지 않는다. 설령 채팅 내용이 누군가에 의해 ‘갈무리’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해도 오히려 녹음기 켜놓고 하는 대화보다 훨씬 자유롭다.
나의 첫 ‘온라인 글쓰기’는 채팅이었다. 물론 그때나 지금이나 그것을 본격적인 의미에서 글쓰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글쓰기가 아니었다고 할 만한 근거를 찾을 수도 없다. 그것은 비단 문자 기호의 형태로 나의 사상과 감정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했으며 내가 그것을 따로 보관하지 않았을 따름이지 적어도 어느 순간 문자 텍스트의 형태로 호스트컴퓨터에 분명히 저장되어 있다는 기술적인 측면에서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실은 그것은 지극히 현상적인 일면에 지나지 않는다.
좀더 솔직히 말하면 그동안 이러저러한 전자게시판들에 그때그때 온라인으로 써 올렸던 무수한 쪽글들과 때로는 채팅실에서, 때로는 메신저를 이용해 떠들었던 토막 대화들 사이의 차이를 잘 모르겠다. 다시 말하자면 전자 게시판을 이용한 글쓰기 또한 내게는 (채팅이 그 자체로 글쓰기는 아니었다고 말할 때의 의미에서) ‘본격적인’ 글쓰기는 아니었던 셈이다.
그렇다면, 내가 전자게시판에 썼던 내용을 정리해서 엮은 에세이집 ‘나는 남자의 몸에 갇힌 레즈비언’에 담긴 글들, 최소한 그 글의 원자료가 되었던 단행본 5∼6권 분량의 텍스트들은 ‘글’이 아니고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게다가 나는 전자게시판에 접속하여 온라인 상태에서 쓰는 글들과 출판 지면에 발표하기 위해 워드프로세서 프로그램을 열어 ‘본격적으로’ 쓰는 글 사이에서도 별다른 차이를 느끼지 못한다. 따지고 보면 차이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그 차이는 글에 대한 책임성이라든가 또는 글의 무게에 기인한 ‘태도’의 차이는 아닌 것 같다. 1991년 6월 전자 게시판에 처음 글을 쓰기 시작한 이래, 단 한 번도 ‘익명’으로 글을 써 본 적이 없다. 언제나 나의 인격적 정체성을 걸고 글을 썼으며 내 글에 대해서든 또는 내 글을 읽는 독자들에 대해서든 ‘게시판 사용자 똥개’의 책임성이 ‘평론가 변정수’의 책임성보다 더 가벼워야 할 이유는 기실 없다.
‘온라인 글쓰기’ 쪽이 긴장감이 덜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차이는 순전히 출판매체의 특성이 강제하는 분량의 제한에 따른 긴장에서 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또는 그것은 양방향적인 피드백이 상당히 제한적인 출판매체의 특성상 텍스트의 ‘자기 완결성’에 대한 강박의 차이인지도 모르며, 글쓰기의 태도나 매체 특성과도 무관한 직업적 거래 관계에서의 신뢰와 관련된 ‘마감’의 존재에 기인한 것일 수도 있다.
그 차이가 분명 ‘사소한’ 것은 아니겠지만, 내가 직업적으로 쓰는 글도 ‘온라인 글쓰기’와 별반 다르지 않은 ‘아마추어리즘’에 기반하고 있다. 또 그러한 의미에서 내게 ‘본격적인’ 글쓰기란 애당초 존재할 수 없다. 굳이 ‘본격적’이라는 수사를 붙이려면 다분히 시간 때우기용 잡담에 지나지 않던 채팅실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전자게시판에 본격적으로 나의 의견을 개진하기 시작한 때가 적당할 것 같다. 나는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성실하게 쓰려고 애쓸 뿐이다.
내 안에 갇힌 욕망을 배설하다
나는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논박하거나 설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불러모으기 위해 글을 쓴다. 다시 말해 내 견해를 밝히고 그럼으로써 ‘지식인 사회’의 동의를 구하거나 ‘대중 사회’를 설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것이다. 대다수 사람들과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왕따’를 당할까 두려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한마디 항변도 해보지 못한 채 스스로를 질식상태로 몰고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들에게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적어도 한 명은 있구나’라고 숨통을 틔워 주고 싶다는 소박한 소망에서 내게 주어진 발언의 기회와 지면을 활용할 뿐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전자게시판에서 일상적으로 이루어지는 ‘온라인 글쓰기’와 제 골방에서 ‘일기장’에나 끄적일 글과 제대로 격식을 갖춰 불특정 다수 앞에 내놓는 ‘본격적인’ 글쓰기를 구별하려는 시도는, 글쓰기를 일상에서 떼어내 특별히 훈련을 받은(실은 그럴 만한 사회경제적 능력을 가지고 있고 문화적 자본을 가지고 있는) 계층이 독점하려는 일종의 역사적 음모로 보인다.
어쨌든 불특정 다수에게 접속을 허용하는 전자게시판의 등장은, ‘발표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기준을 무색케 했다. 애당초 ‘발표할 만한 가치가 없는’ 글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여전히 제한된 자원을 경제적으로 활용해야 하는 출판매체의 입장에서 상품화할 수 있는 글과 그렇지 않은 글이 존재할 뿐이다. 그렇듯 ‘온라인 글쓰기’는 제도화된 상품 논리로부터 글쓰기를 해방시켜 자기 표현 욕망 또는 타인과 소통하고자 하는 욕망의 일상적인 발현이라는 글쓰기의 본원적인 모습을 드러나게 해주었다. ‘이르고자 할 바가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펴지 못할’ 사람은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없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진단은 반은 맞고 반은 그르다. 예컨대 내가 드나드는 ‘온라인 커뮤니티’가 개방적으로 운영되기를 원하는 까닭은 그 공간을 매개로 더 많은 ‘나와 닮은’ 사람들과 소통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내가 때때로 그 개방성에 무기력해지는 까닭은, 그 대로를 ‘나와 닮은’ 사람들이 아닌 ‘나와 닮은’ 사람들을 적대시하는 사람들이 차지해버리기 때문이다. 오해하지 말지니, 나는 ‘나와 닮지 않은’ 사람들로부터 ‘나와 닮은’ 사람들이 존중받기를 원하는 만큼 ‘나와 닮지 않은’ 사람들을 존중한다. 내가 그들을 혐오하는 것은 단지 그들이 나와 닮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들이 나를, 혹은 우리를 적대시하고 심지어 우리가 우리를 만나기 위해 운영하는 커뮤니티에서 노골적으로 우리에 대한 혐오감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도대체 누가 그들에게 타인의 존재를 혐오할 ‘자유’를 주었단 말인가. 나는 절망한다.
사이버 폭력과 온라인 디스토피아
이러한 부작용을 ‘온라인 매체’의 특성이나 또는 ‘디지털 글쓰기’의 함정으로 환원시켜, 자유가 방종을 불렀다는 식으로 재단하는 것은 심각한 착오다. 인터넷에서 이런 행위가 벌어지는 이유는 인터넷이 ‘자유로운 의사 표현의 장’이어서가 아니라 이러한 폭력에 대해 뚜렷한 제재 수단이 없이 무방비 상태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일상적으로 접촉할 일이 없는(문제가 생겨도 안 보면 그만인) ‘낯선 사람들’을 상대로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인터넷 게시판에서 행한 발언에 대해 어떠한 형태로든 사회적 책임을 져야 한다면 게시판에서의 태도는 훨씬 더 신중해질 것이다. 혹은 동창회처럼 ‘대면 관계’를 수반하는 커뮤니티의 게시판이라면 다른 사람이야 어떻게 생각하든 말든 자기주장만 되풀이하는 ‘투정’을 좀처럼 보기 어려워질 것이다. 물론 이런 현상이 인터넷만의 고민은 아니다. 평소 아무리 점잖은 사람도 운전대만 잡았다 하면 ‘입에 걸레를 물게 되는’ 까닭은 길바닥에서 스쳐지나가는 다른 운전자들이 다시 부딪칠 일이 거의 없는 ‘낯선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글쓰기라는 행위의 본질이 자신, 나아가 타인과의 성실한 ‘대화’라면 그것이 원고지나 편지지에 펜으로 꾹꾹 눌러 정서하는 아날로그 방식이든 날아갈 듯 가볍게 자판을 두들기며 손쉽게 첨삭·수정을 되풀이하는 디지털 방식이든 아무런 차이가 없다. 글쓰기의 핵심은 ‘불특정 다수’의 ‘낯선 사람들’과 열린 마음으로 ‘대화’를 나눌 만한 ‘인간에 대한 예의’를 갖추고 있느냐 없느냐, 또는 그 이전에 자신의 내면과 진지하게 마주할 만큼 스스로에게 정직한가일 것이다.
불행히도 우리는 나와 다른 가치관, 다른 삶의 방식을 가진 사람들과 공존하기 위한 대화법을 배우지 못했다. 아니 그냥 배우지 못한 것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기존 질서에서 벗어난 생각이나 삶의 방식을 억압하기만 했다. 인격을 가진 사람으로서 존중받아 본 경험이 없는 사람이, 더구나 일상적으로 대면할 가능성이 없으며 따라서 아무렇게나 대해도 손톱만큼도 뒤탈이 없을 다른 사람의 인격을 존중하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 더 이상 글쓰기가 특별한 능력을 훈련받은 일부 계층의 전유물이 아닌 ‘온라인 매체’ 환경에서도 여전히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는, 그저 인격을 가진 사람이라면 당연히 갖추고 있어야 할 태도의 훈련이 필요하다. 그리고 어쩌면 그러한 태도가 몸에 배도록 훈련하는 것은, 글쓰기의 능력을 훈련하는 길보다 훨씬 더 어렵고도 긴 시간을 요구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과정을 건너뛰거나 우회한다면 ‘디지털 글쓰기’의 편리함도, ‘온라인 글쓰기’의 개방성도 한낱 위험한 몽상에 머무르고 말 것이다. 결국 ‘온라인 글쓰기’의 미래는 거기에 참여하는 이들이 그 과정을 통해 얼마나 성숙한 시민으로 거듭나는가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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