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전적인 성경해석학
목사 노 우 호 (에스라하우스 대표)
가려진 성경
하나님께서는 죄로 말미암아 관계가 단절된 인간들에게 당신의 거룩하신 뜻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특별계시(特別啓示)를 주셨다. 반면에 사탄은 인간들이 하나님의 참 뜻을 깨닫게 되는 날에는 자신들의 정체가 탄로 난다는 사실을 알고는 인간들로 하여금 진리를 알지 못하도록 성경을 가리우려고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하고 있다. 이를 이겨내지 못한 서구(西歐)의 교회들은 사탄이 쳐 놓은 거미줄 걸려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 르네상스(Renaissance) 이전까지는 基督敎徒나 異敎徒를 막론하고 대체로 신 중심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왔다. 그러나 르네상스 이후 人本主義가 대두되었고 이데올로기 시대로 접어들었다. 2차 대전 이후부터는 物質主義로 변질되었으며 마침내 享樂主義, 虛無主義 단계를 거쳐 이제는 그 虛無를 克服하기 위하여 神秘主義, 超越主義, 多元主義, 뉴 에이지 운동으로 치닫고 있다. 급변하는 20세기를 살아오면서 사람들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이제 다시 새로운 세기를 맞이하여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무지(無知)에 가려진 성경
구약 성경이 기록된 후 이스라엘 사람들은 성경을 읽지 않았거나 읽지 못했다. 책을 구하기도 쉽지 않았겠지만 지도층에서부터 성경을 읽지 않았고 백성들에게 가르치지도 않았다. 모세가 신명기를 기록하여 레위 지파 제사장들에게 건네주면서 레위 자손 제사장들과 이스라엘 모든 장로에게 부탁하여 이르기를, “매 칠년 끝 해 곧 정기(定期) 면제년(安息年)의 초막절(草幕節)에는 온 이스라엘들을 여호와 앞으로 불러 모이게 하고 이 율법을 낭독하여 온 이스라엘로 듣게 하되 백성의 남녀와 유치를 막론하고 성안에 우거하는 타국인까지 모으고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고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게 하고 요단 강을 건너가서 얻을 땅에 거할 동안에 이 말씀을 알지 못하는 그들의 자녀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게 하라”고 했었다.(신31:10-13)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땅을 분배하고 정착하게 된 후로 수백 년이 지나도록 성경을 낭독하는 초막절을 지키기 않았다. 사사들이 치리하던 300 여년의 세월 동안 그들은 한번도 초막절을 지키지 않았다. 타락했던 왕들은 물론 다윗이나 솔로몬 왕도 하나님의 율법을 읽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기념일은 유월절(逾越節)이었다. 다윗 왕이나 솔로몬이 유월절을 지키지 않았다면 초막절을 지켰을리 만무하다. 여호수아가 유월절을 지켰다는 기록(수5:10-11)이 있은 후 수백 년이 지나서 요시야 왕이 유월절을 지킨 것으로 나타나 있다.(왕하 23:21-23)
여호수아 이후 바벨론 포로까지 초막절이란 단어가 한 번도 사용된 적이 없다. 솔로몬 왕이 성전을 건축하기를 마치고 모세의 율법을 좇아 절기들을 지켰을 것으로 생각한 역대기 하서의 기록(대하8:13)은 다윗 왕과 솔로몬 왕의 시대를 모델로 민족 중흥을 도모하려는 뜻에서 기록된 것이다.
이스라엘 왕들 중에 정식으로 유월절을 지킨 사람은 요시야 왕이 처음이었는데 이렇게 유월절을 지키게 된 것은 출애굽 이후 약 800년만에 처음이었다.
초막절을 지키고 성경을 낭독했던 것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에스라 시대에 와서야 처음으로 초막절을 지켰다. 에스라가 초막절을 지키게 된 것은 모세로부터 약 1000년만에 처음으로 실시된 것이다. 결국 구약 시대에는 인간들이 무지(無知)에 의하여 하나님의 말씀은 가려져 있었다.(호4:1)(호4:6)
교권에 가려진 성경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통독하면서 회개했던 일은 두 번이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요시야 왕이 성전을 수리하다가 발견한 율법 책을 읽고는 옷을 찢으며 회개하였고 그는 전국을 다니면서 우상을 파괴하고 그 제단들을 헐어버리고 국토를 정화하였다. 그러나 요시야 왕이 애굽 왕 바로 느고를 맞아 싸우다가 전사하고 나자 개혁은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그날 후로는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 온 느혜미야가 무너졌던 성벽을 중수한 후 학사 겸 제사장 에스라가 온 백성을 불러모으고 수문 앞 광장에서 말씀을 낭독하고 그 뜻을 풀어서 이해하게 하였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던 백성들은 대성통곡하였다. 그 때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던 백성의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하였고 자신들의 이름을 밝혀 서명 날인하였다.(느10:1-27) 그러나 에스라가 죽고 느혜미야가 세상을 떠나자 성경을 통독하는 초막절은 더 이상 지켜지지 않았다.
포로기 이후 중간 시대는 바리새인들의 교권주의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우고 있었다. 지식의 열쇠를 이들이 가져가고는 자기들도 들어가지 않고 다른 사람들도 들어갈 수 없게 가로막고 있었다.(눅11:52)
유대교의 수다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混雜)하게 하여왔다. 유대 율법주의자들의 율법 해석은 언제나 과잉해석(過剩解釋)이었다. 유대교의 유산인 탈무드나 게마라 미쉬나 토셒타 등은 단순한 하나님의 말씀을 심히 혼잡(混雜)하게 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게 만들어버렸던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에 보내는 편지에서 자신은 수다한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混雜)하게 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는 뜻을 기록하고 있다. (고후2:17) (고후4:2)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려 하지 않고 계속하여 해석에 해석을 더하고 교훈에 교훈을 더하여 백성들의 등에 지우고는 자신들은 한 손가락도 꼼짝하지 않으려 했다.
(눅11:46) 가라사대 화 있을진저 또 너희 율법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도다
(눅11:52) 화 있을진저 너희 율법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 하시니라
신약 시대로 넘어 온 이후 교회사적으로 초막절에 성경을 낭독했다는 기록은 찾을 수가 없다. 1229년 교황 인노센트 3세는 아예 성경을 읽지 못하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은 다시 교권주의에 의하여 가려지게 되었다.
신학에 가려진 성경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말미암아 성경으로 돌아가려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오래가지 않아서 계몽주의와 이성주의에 의한 큰 도전을 받게 되었고 마침내 과학주의가 등장하면서 성경은 사람들로부터 다시 외면 당하게 되었다.
오늘날은 복잡(複雜)하고 다양(多樣)한 신학(神學)에 하나님의 말씀은 가려져 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말씀은 66권인데 대부분의 성도들은 구약은 우리와 별로 상관이 없는 줄로 알고 있다. 특별히 레위기 같은 율법은 우리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책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레위기에는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폐하지 못할 교훈들로 가득 차 있다. 사람이 구원받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게 되지만 구원받은 사람들이 구원받은 성도답게 거룩하게 생활하는 데는 꼭 필요한 말씀들이 레위기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오늘날도 그 말씀의 교훈을 깨닫고 성실하게 지키면 반드시 참된 복을 받게 되고 개인은 건강하게 되고 가정과 사회는 건전하게 된다. 그러나 인간의 구원과 축복된 삶을 추구하는 기복주의적인 신학이 하나님의 말씀을 제한하여 성도의 삶을 거룩하게 하는 구약의 많은 부분을 가리우고 있는 것이다.
온갖 이성주의적인 신학과 인본주의적 신학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우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오늘날 기독교는 기복교(祈福敎)로 전락하고 말았다.
날마다 쏟아져 나오는 신앙 서적들이 너무 많아서 하나님의 말씀은 가려지고 있다. 사람들은 성경을 읽은 것보다는 성경 외 다른 신앙서적들을 읽는데 시간과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성경은 외면 당하고 있다.
성경이 기록될 당시에 살았던 사람들은 아무런 주석이 없어도 그냥 읽어서 이해할 수 있었다. 로마서를 기록한 바울이 겐그리아 교회의 여집사 뵈뵈의 손에 로마서를 들려서 보낼 때 거기에는 아무런 주석서가 따로 없었다. 바울이 기록한 로마서는 사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에 대한 주석(註釋)이었다. 로마서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누리게 되는 구원의 은혜에 대한 바울의 주석(註釋)이었다. 바울이 로마서를 기록한 것은 자신이 믿고 전하는 복음에 대한 주석(註釋)을 쓴 것이다. 그러므로 로마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굉장한 주석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단숨에 읽어보는 것이 중요하다.
오늘날 신학자들이 입에 거품을 물고 쏟아 내는 그 거품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가려지고 있는 것이다. 유럽의 교회들은 신학자들의 신학적인 거품 때문에 이미 잠들어버렸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런 주석도 쓰시지 않으셨다. 구약의 말씀에 대한 예수님의 해석은 윤리적인 해석으로 산상보훈에 잘 나타나 있다. 그리고 그 윤리적인 말씀을 가르쳐서 지키게 하라고 명하셨다.(마 28:18-20) 구약성경에 대한 예수님의 해석은 사랑의 실천을 가르치는 단순한 해석이었다. 그 해석의 핵심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하셨다.(마22:37-40) 새 계명을 말씀하실 때도 다른 말씀하시지 않고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요13:34-35)
경계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이거늘 사람들이 이에서 벗어나 헛된 말에 빠져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하나 자기의 말하는 것이나 자기의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도다 (딤전1:5-7)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바르게 섬기고자 한다면 인간의 소리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읽어보는 것이 중요하다. 오늘날 신학의 문제는 읽어보지도 않은 성경을 연구부터 하고 해석부터 가르치는 것이 문제다. 교회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는 신학적인 거품을 걷어 낼 필요가 있다. 신학은 점점 인본주의로 치우치고 있는 반면에 교회는 반대로 신비주의로 기울어지고 있다. 이러한 거미줄을 걷어 내고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읽어야 하나님의 교회가 거룩해질 것이다.
이 말씀 외에도 제자들의 들어서 약간 어려운 말씀들이 있었는데 그것은 비유들이었다. 비유를 듣다가 약간 어려운 부분이 있으면 제자들은 주님께 설명을 부탁했고 주님께서는 친절하게 다시 설명하시곤 했다.
예수님께서 쉽게 하신 말씀을 다시 어렵게 한 사람이 있다면 아마도 바울이라고 할 수 있다. 바울이 기록한 서신들이 대체로 쉽게 되어 있지만 더러는 어려운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어떤 부분은 베드로가 읽어도 어렵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도 바울은 수다한 사람들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混雜)하게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교회가 살아나게 되는 길은 분명하다.
무엇보다 먼저 신학이 쉬워야 한다.
신학은 성경보다는 쉬워야 할 의무가 있다.
성경이 어려워서 신학을 하게 되는데 신학이 성경보다 몇 갑절이나 더 어렵다면 그러한 신학은 무익(無益)한 것이다. 그리고 다시 창조주 하나님을 증거(證據)하는 일을 해야 한다. 진화론이 100% 거짓말이라는 사실을 폭로해야 한다. 지상논쟁(紙上論爭)이든지 전파논쟁(電波論爭)이라도 불사하고 응전해야 한다. 진화론이 거짓이란 것은 이미 드러난 사실이다. 이제는 사람들의 의식 수준이 향상되어서 이론의 진위(眞僞)를 가릴 수 있게 되었다. 아울러 다시 국내 선교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 교회가 없는 곳에 교회를 세우고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파송 되는 개척자는 국내 국외를 막론하고 선교사로 예우하고 적극적으로 지원을 해야 한다. 신학이란 신의 계시, 즉 하나님의 말씀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학문이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신학은 어려운 것을 쉽게 하는 방향으로 진행된 것이 아니라 쉬운 것을 어렵게 만드는 노력을 해 왔다.
지금까지의 신학은 대체로 4 필드(field)로 나누어 연구되었다.
聖書神學(Biblical Theology)
組織神學(systematic Theology)
歷史神學(Historical Theology)
實踐神學(Practical Theology)
이를 다시 더 단순화 하면 理論神學(Logical Theology)과 實踐神學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理論神學은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한 것이고 實踐神學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기 위한 것이다. 이론이 너무 복잡하면 이해하기가 어렵고 이해하기 어려우면 실천하기도 어렵다.
신학자들이 분명하게 알아두어야 할 사실은 예수님께서는 신학이란 학문을 복잡하게 하시지도 않으셨고 혼잡하게 하시지도 않으셨으며 오히려 단순한 삶으로 보여 주셨다는 점이다. 반대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끊임없이 해석(解釋)하고 혼잡(混雜)하게 하기만 했고 이를 실천하려고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하나님의 뜻이 담긴 성경을 성도들이 이해하고 오늘의 삶에 구체적으로 적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성경의 해석(Interpretation)은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성경이 기록되어 인간의 손에 들려진 이후 해석자들의 크고 작은 오류로 말미암아 교회는 큰 혼란을 겪어 왔다. 유대교 랍비들의 잘못된 해석과 초대 교회의 이단자들, 즉 영지주의적인 해석이나 중세 교회의 잘못된 해석은 하나님의 말씀을 심히 혼잡(混雜)하게 하였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교회는 거룩성을 잃게 되고 이단으로 변질하거나 그 이단을 정죄하는 과정에서 사랑을 잃어버리고 피를 흘리기까지 했다. 루터를 비롯하여 개혁자들이 일어나 다시 말씀으로 돌아가게 한 것은 천만 다행한 일이었다. 그러나 18세기 이후부터는 이성주의가 일어나 성경의 권위에 도전을 했다. 20세기는 여러 가지 신학의 풍조가 일어나 성경을 경솔하게 비평(批評)하기 시작하면서 서구의 교회들이 힘을 잃어 가고 있다. 한국 교회는 아직 성경의 권위를 의심하는 학자들은 많지 않으나 작금에는 종교다원주의 등의 등장으로 성경의 권위에까지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우려하는 시각도 있다. 교회와 神學이 성경의 권위를 고수(固守)한다고 해도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지 않고 잘못 해석하게 되면 그 결과는 치명적이다.
혼란스러운 성경 해석
오늘날 한국 교회는 온 세계의 여러 가지 신학이 유입되어 대단히 복잡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따라서 성도들은 혼란에 처해 있고 종교나 종파, 교파와 신학이 온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복잡하게 얽혀 있다. 그 결과 한국 교회의 성경 해석은 일관성이 없고 해석된 말씀을 듣는 성도들은 혼란스럽기 짝이 없다.
지나친 해석(過剩解釋)으로 본래의 뜻을 흐리게 하는 해석
말씀을 혼잡(混雜)하게 하는 해석
성경보다 더 어렵게 하는 해석
읽어보지도 않고 연구부터 하는 사람들의 해석
목회 이기주의적인 해석
기복주의적인 해석
청중들의 육신적, 세상적 욕구에 아부하는 해석
기록자의 본의(本義)와 다른 해석
현실을 보고 과거를 함부로 판단하는 해석
억지 해석((στρεβλούσιν ,twist,비비 꼬다, 왜곡하다)
경솔한 비평적 해석
우의적(寓意的) 해석
실천적인 순종이 없는 해석
신비주의적 해석
이데올로기에 편승(便乘)하는 해석 등이 한데 엉켜서 갈피를 잡을 수 없다. 꼭 같은 본문을 가지고 설교를 해도 설교자마다 그 해석이 천차만별이다.
예수님께서 한 율법사에게 반문하시기를,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What is written in the Law?) 네가 어떻게 읽느냐(How do you read it?)"하고 말씀하시고 있다.(눅10:26)
“네가 어떻게 읽느냐?(ἀναγινώσκεις)”하는 말씀은 “네가 어떻게 理解하느냐?”고 질문하신 것이다. 오늘날 신학의 문제는 성경에 무엇이라 기록되었는지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은 채 연구부터 하는 것이 문제다. 책을 연구하기 전에 적어도 몇 차례 읽어보아야 한다. 한번도 읽어보지 못한 채 불완전한 이성으로 경솔하게 비평(批評)하는 신학을 접하게 되면 학문적으로 준비가 되지 않은 신학생들의 믿음을 뿌리까지 흔들어 놓게 된다. 그러한 신학의 결과는 유럽의 교회들을 텅텅 비게 하였다.
서방의 신학은 서방의 교회를 지키지 못했고
서방의 교회는 서방의 신학을 바로 세우지 못했다는 사실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오늘날 한국 교회 신학은 인본주의적인 경향으로 치우치고 교회는 반대로 신비주의로 치우치고 있다. 이러한 양극화 현상에서 목회자들의 고민이 있다. 한국 교회가 매우 열심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저 옛날에 유대인들이 그랬듯이 그 열심들이 참된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닌 경우가 많다. (롬10:2)
오늘날 한국 교회 교인들의 열심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열심보다는 자기의 소원(所願)을 이루기 위한 열심이다. 교회가 이렇게 잘못 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두고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이 먼저 책임을 느껴야 한다. 하나님의 일은 생각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욕망을 이루기 위하여 열심 내는 것은 곧 탐심(貪心)이요 탐심은 곧 우상 숭배와 다를 바가 없다.
성경을 읽는다 해도 욕심에 의하여 굴절된 시각으로 읽는다면 올바른 이해가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바른 해석도 할 수가 없다. 많은 성도들이 성경을 전체로 알지 못하고 요절 몇 구절 암송하는 것으로 그치고 있다. 암송한다는 것과 안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니다. 유대인들은 외우면서도 알지 못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다.
성경을 통전적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요절만 뽑아서 이기적으로 해석하거나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면 더욱 어려운 지경에 빠지게 되고 이것이 지나치면 바로 이단(異端)이 된다. 이단 종파들은 대개 전용으로 쓰는 요절들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그 요절들을 언제나 자기들의 교리에 억지로 해석하여 맞추는 것이다.
작금에는 발달된 인쇄술에 의하여 많은 주석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성경을 해석한 책들이 성경보다 더 어려운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성경 주석들은 마치 구약 시대에 유대교 랍비들이 탈무드를 기록하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混雜)하게 하고 있다. 우리가 만약 성경을 이렇게 어렵고 혼잡하게 하면 사람들이 성경의 교훈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게 될 것이다. 성경은 가능하면 간명(簡明)하게 해석(解釋)해서 듣는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성경의 해석은 쉬워야 한다. 성경을 해석한 책이라면 읽어서 쉽게 이해가 되어야 하고 그 말씀을 오늘의 삶에 적용하여 실천함으로써 사람들의 삶이 거룩해지는 변화가 있어야 한다.
성서적 해석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내려 주신 계시(一般)를 일반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해석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세우신 여러 해석자들을 성경 안에서 만날 수 있다. 그들의 해석은 언제나 듣는 사람들이 즉석에서 알아들을 수 있도록 쉽게 해석한 것이었다.
꿈으로 주어진 계시를 해석(解釋)하는 사람들
하나님의 계시가 꿈이나 환상으로 주어진 경우에는 그 꿈을 해석하는 사람이 있었다. 애굽의 술 맡은 관원장이나 떡맡은 관원장, 그리고 바로 왕을 꿈을 꾸기는 했지만 해석할 능력은 없었다. 반면에 요셉은 꿈을 꾸기도 하고 해석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이러한 경우에는 해몽(解夢)의 은사를 받은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다니엘은 꿈을 해석하는 것이나 문자를 해석하는 지혜의 은사를 받아서 어려운 꿈이나 문자들을 해석하였다. 다니엘서에 나타난 해석이란 단어는 대개 아람어로 표현되었는데 그 어근(語根)은 파타르(ר)와 비슷한 프솨르(ר) 혹은 페세르(ר) 등으로 표현되었는데 이러한 경우의 해석은 대개 꿈이나 환상(幻像)을 본 후에 그 의미를 깨닫게 하는 경우였다.
율법을 해석한 사람들
율법의 해석을 처음으로 시도한 사람은 모세였다.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레위기를 받아서 40년간 실천적인 훈련을 실시한 후 모압 평지에서 율법을 설명(說明)하였다.
신명기(申命記)는 모세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율법 즉 레위기를 설명한 책이다. 신명기의 내용은 광야 40년의 역사와 십계명과 레위기를 비롯한 율법의 해석(解釋)이다.
모세의 해석은 자구(字句)에 매이지 않고 매우 자유스럽게 해석(解釋)하고 있다. 신명기는 최초의 설교였으며 강해설교의 원형이라 할 수 있다. 사실에 있어서 신명기는 레위기에 대한 해석서(解釋書)라 할 수 있는데 하도 귀중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어서 레위기와 함께 성경으로 구별되었다. 모세는 레위기를 가지고 해석하면서 설교를 마치기 전에 아주 귀중한 부탁을 하였다. 그 부탁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 살게 되거든 반드시 매 7년마다 한 번씩 율법을 낭독하고 하나님 섬기는 법을 가르치라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명령은 그 후 약 천년 동안 한 번도 지켜지지 않았다.
예수님의 해석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신 것은 바리새인들이나 사두개인들의 그것과는 현저하게 다른 것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자주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말씀하신 경우가 많다.
이러한 말씀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잘못된 해석을 들어 왔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을 만나 성경을 풀어 주실 때 그 제자들은 자기들과 동행하면서 성경을 풀어주는(해석해 주는)분이 누군지도 모르고 동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중에 그들이 깨달은 것은 말씀을 풀어 주실 때에 마음이 뜨거웠다고 고백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계실 때 성경을 해석하셨고(解釋,ἐπέλυεν,expounded 상세히 설명하다) 비유들을 상세하게 해석하시며 쉽게 설명하여 주셨다.(막4:34)
사도들의 해석
사도들은 대개 구약 성경을 해석할 때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해석했다. 마태나 베드로가 시편이나 예레미야서, 이사야서를 해석하면서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어떤 부분은 듣는 자들의 수준이 낮고 듣는 것이 둔하여 해석하기 어려운 것도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사도 바울이 쓴 글들 중에 알기 어려운 말씀들이 있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바울이 기록한 것을 베드로가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말씀을 사사로이 풀거나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게 된다고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 사도의 성경 해석
유대교의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너무나 복잡하게 해석하여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混雜)하게 만들어 버렸다. 그들은 성경을 보다 더 세밀하게 해석한답시고 탈무드나 게메라, 미쉬나, 토셉타, 등으로 지나치게 분석하고 과잉 해석하다가 마침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만들어 버렸다. 그들이 만들어 낸 유전(遺傳)들이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을 본래의 뜻에서 멀어지게 했다. 유대교의 랍비들이 만든 이러한 유전(遺傳)들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매우 부정적인 말씀을 하셨다. 바울이 가말리엘 문하에서 공부할 때는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있었지만 예수님을 알게 된 후로 그가 깨닫게 된 것은 자신을 비롯한 바리새인들과 수다한(οί πολλοί = πολύς의 주격 복수, 대다수)유대 랍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混雜,καπηλεύοντες)하게 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사람들에게 두 번씩이나 자신은 하나님의 말씀을 수다한 사람들과 같이 혼잡하게 하지 않는다고 천명하고 있다.
오늘날의 신학도 하나님의 말씀을 너무나도 혼잡(混雜)하게 해석하고 있다. 유대교 랍비들의 유전이나 탈무드 이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복잡하고 혼잡하게 해석하여 성도들은 그 방대한 주석들을 볼 때 주눅이 들고 만다.
통전적인 해석
하루에 한 장 두 장을 읽을 수도 있고 그렇게도 읽어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읽어서는 평생 동안 성경을 읽는다 하도 성경 전체를 이해하기는 어렵다. 가능하다면 단기간에 집중적으로 읽는 것이 중요하다. 조금씩 읽을 때는 전혀 알지 못하는 것을 전체를 단시일에 집중적으로 읽을 때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있다.
그리고 성경 해석을 시작할 때는 반드시 먼저 구약에 대한 바른 이해가 있어야 한다. 구약 성경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신약 성경의 해석은 거의 불가능하다. 지금까지의 신학이 기록된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가르치려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노력해 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여러 가지 방법으로도 하나님의 뜻을 알기는 어려웠다.
1. 교리(敎理)는 너무 간추려서 알기 어렵고
2. 주석(註釋)은 너무 방대하게 확대하여 알기 어렵고
3. 설교(說敎)는 평생 들어도 미흡하고
4. 신학(神學)은 어렵기도 하고 시대 따라 변동한다.
그러나 성경을 통독하면서 통전적인 안목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방법은 교리처럼 축약(縮約)되지도 않았고 주석처럼 부풀리지도 않았고 설교처럼 미흡하지도 않고 시대를 따라 변동하지도 않는 방법이다.
모세와 여호수아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읽어본 역사가 없었다. 그 결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되었고 온갖 우상 숭배에 빠지게 되었다. 그리고 바벨론에 포로 되어 가서야 그들 중 몇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살펴보게 되었다. 다니엘과 에스겔, 그리고 에스라와 같은 학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연구하게 되었다. 다니엘과 같은 신령하고 거룩한 사람도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보고야 자기와 및 자기 민족의 죄를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다니엘은 하나님 앞에 금식하면서 기도하기 시작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 하게 된 것은 너무 오랫동안 성경을 읽지 않았기 대문이다. 그 결과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였고 계속하여 범죄 하다가 마침내 나라가 망하여 앗수르에 의하여 멸망하였고 유다는 바벨론으로 포로 되어 갔다가 70년만에 돌아오게 되었다. 포로에서 돌아 온 유대인들이 성전을 건축하고 성벽을 중수한 후 그해 초막절이 이르자 온 백성이 수문 앞 광장에 모이게 되었다. 그리고 에스라와 느혜미야에 의하여 성경을 통독하게 되었다. 그날 그 수문 앞 광장에 모였던 사람들은 에스라가 읽어 들려준 말씀을 밝히 알게 되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는 하나님의 아픈 마음을 깨달아 알게 되었다. 그리고 통회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크게 즐거워했다. 그 방법은 신명기의 명령대로 초막절 한 주간 동안 매일 새벽부터 오정까지 계속하여 성경을 읽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는 밝히 드러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전적으로 읽어서 마침내 신의(神意) 즉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어야 한다.
성경은 이미 하나님의 뜻을 해석해 놓은 책이다. 그러므로 할 수만 있다면 해석하지 말고 읽고 또 읽어서 이해하려는 자세가 중요하다.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성경의 말씀 속에 무슨 숨겨진 의미가 있는가 하여 지나친 해석을 하게 되는 수가 많다. 성경을 과잉 해석하게 되면 본래의 뜻에서 멀어질 위험이 있다.
바울이 로마서를 써서 로마에 보낼 때 거기 아무런 주석이 없었다. 그 편지를 받은 로마 교회 성도들은 특별한 해석이나 주석이 없어도 편지를 읽듯이 읽어서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복잡하게 해석을 하게 되면 오히려 성도들은 아예 성경은 알 수 없는 신비(神秘)의 책으로 인식하게 된다. 성경은 하나님의 신비(神秘)를 감추어 둔 책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드러내어 계시(啓示)하신 책이다. 성경은 결코 비밀(秘密)의 책이 아니다.
바리새인들이 유대인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게 된 것은 성경을 통전적으로 읽지 않고 지나치게 해석하여 가르친 것이다. 그 결과 유대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을 구덩이에 빠지게 하였다. 유럽의 신학(神學)이 성경을 한없이 어렵게 했기 때문에 오늘날 유럽의 교회가 그 어려운 해석에 질식(窒息)해서 죽어 가고 있는 것이다. 유대교 학자들이 성경을 가르치면서 얼마나 많은 오해를 했는지 모른다. 예수님께서는 특별히 사두개인들의 오해(誤解)에 관하여 말씀하셨다.
성경을 해석하려는 사람은 해석에 들어가지 전에 먼저 성경 전체를 충분히 읽어야 한다. 신 구약 전체의 내용이 파악 될 때까지 적어도 10회 이상 30회 정도는 읽어야 한다.
인본주의적인 해석이나 이기적인 해석은 극히 삼갈 일이다. 이기적인 생각을 품고 아전인수격으로 성경을 해석하게 되면 위험을 초래한다. 설교자들이 회중들의 욕구에만 편승하거나 기복 신앙을 가진 성도들의 육신적이고 세상적인 욕망에 아부(阿附)하는 설교를 하게 되는 경우 교회는 온갖 종교 이기주의적인 모습으로 타락하게 된다. 성경을 이기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극히 삼갈 일이다. 부분적으로 해석하는 것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다. 한 절, 한 절 따로 볼 수 있는 성경이 있다면 그것은 잠언뿐이다. 다른 책은 언제나 문맥과 문장을 따라 문법적으로 읽고 스토리를 먼저 파악하도록 해야 한다. 성경 해석의 결과는 마침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밝히 드러나게 해석해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살았고 운동력을 가지고 있다. 성경은 입이 있어서 분명한 음성으로 말을 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무분별한 해석이나 비평에 앞서 성경 안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보아야 한다. 나피어(D. Napier)가 말한 대로 어떤 신학자들이 영적으로 귀가 멀어서 성경이 말씀하시는 음성을 듣지 못하고 그것이 마치 죽어 생명이 없는 시체(屍體)인양 “해부하기를 좋아하는 병원의 인턴(intern)과 같이 성경의 부분을 잘라 분해와 분석을 시도하고 있다.” 사람의 살점을 아무리 찢어발겨도 그 사람의 뜻을 알 수 없는 것처럼 성경의 어떤 부분을 아무리 확대하고 아무리 분석하고 비평한다 해도 그들은 결코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할 것이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사람이라면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 편에서, 하나님의 위하여 최소한의 해석으로 쉽게 전달되도록 해석해야 한다.
1. 성경을 전체적(全體的, 通全的, 通時的, 通視的)으로 보고 해석해야 한다.
2. 66권 각권을 통하여 말씀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한다.
3. 교리적(敎理的) 선입관(先入觀)에 지나치게 매이지 말고 온 성경 전체를 살펴서 해석해야 한다.
4.성경이 본래적(本來的)으로 말씀하시는 그 뜻이 드러나도록 해석해야 한다.
5.불변적(不變的)인 진리와 가변적(可變的) 윤리 사이에서 책임성 있는 해석을 해야 한다.
6.특수성(特殊性)보다는 보편성(普遍性)에 관심을 가지고 성경을 해석해야 한다.
7.성경이 문자로 계시된 신언(神言)이라는 관점에서 신 중심적(神 中心的)으로 해석해야 한다.
8.해석하지 않고도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은 전혀 해석 없이 읽어서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다.
9.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약속(約束)에 대하여서는 믿음을 가지도록 해석하야 한다.
10.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명령(命令)에 대해서는 순종과 실천을 할 수 있도록 해석해야 한다.
11.66권 중에 필요 없는 성경은 단 한 권도 없다는 관점에서 모든 성경을 고루 해석해야 한다.
12.성도들로 하여금 66권의 성경 말씀을 통시적(通視的) 안목으로 성경을 볼 수 있게 해석해야 한다.
13.전체(全體)가 부분(部分)을 해석한다는 관점에서 성경을 짦은 기간 내에 통독을 하면서 해석한다.
4. 1번역이 불완전한 부분에 대해서는 원어 성경에서 직역하여 보완하고 그 외 부분에서도 번역된 성경의 자구(字句)보다는 전체를 흐르는 신의(神意)에 관심을 가지고 해석한다.
성경을 이러한 방법으로 접근하기 위해서는 한 주간 내지 도주간을 투자하여 집중적으로 읽으면서 이해하도록 해야 한다. 다만 어려운 점은 한 주간이란 시간을 온전히 소요한다는 어려움이 있기는 하지만 한 주간을 오로지 바칠 수만 있다면 평생을 혼자 연구한 것보다 더 많은 사실은 더 바르게 깨닫게 된다.
신학을 크게 나누어 두 분야 즉 이론신학(理論神學)과 실천신학(實踐神學)으로 보면 이론신학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는 것이어야 하고 실천신학이란 이론신학을 통하여 깨닫게 된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기 위한 학문이다. 우리가 가장 존경하고 흠모하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아무런 신학자도 없었던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여 거룩한 삶을 살았다. 다윗이 살았던 시대에도 마찬가지이다. 다윗이 무슨 신학을 체계적으로 공부하여 성군 다윗이 된 것이 아니라 단지 신앙 양심을 따라 살아서 그는 성군이 되었다. 신약 시대에 바울이 하는 말도 마찬가지다. 바울은 지식이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사랑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바울은 분명히 말하기를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게 될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영원히 페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믿음과 소망과 사랑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다.
성경 통독의 원리
1.사람의 말이라도 처음부터 끝까지 들어보지 않고서는 잘 알 수 없는 것 같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보아야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처음만 보거나 중간 중간 여기저기를 보거나 끝만 보아서는 하나님의 깊고 넓으시며 크고 높으시며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한편의 영화를 감상하는 경우에도 처음부터 보지 않고 중간부터 보면 이해가 잘 되지 않는 것처럼 성경은 언제나 창세기부터 읽어가는 것이 가장 올바른 방법입니다. 그리해야만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만날 수 있고 믿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2.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처음엔 글자를, 다음은 단어를, 그 다음은 문단, 책, 권, 전서를 읽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하나님의 마음을 읽어야만 성경을 읽었다 할 수 있습니다.우리의 소원이 지나치면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소원을 앞세우지말고 성경 안에서 하나님의 소원,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도록 읽어야 합니다.
3.성경을 알기를 원한다면 성경을 읽어야 하는데 사람들은 성경을 읽으려 하지 않고 "성경에 관하여" 쓰여진 책을 읽습니다.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하여서는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여러 번 반복하여 통독해보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경전이란 읽고 또 읽어야만 경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경 통독 사경회]에서는 성경 안으로 인도하여 안내합니다.
4.경험 있는 안내자의 도움을 받음으로서 크게 유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성지순례를 가서도 안내자의 도움이 필요한 것처럼 에덴동산으로부터 시내 산, 갈보리 산, 새 하늘과 새 땅까지, 바벨탑을 쌓던 시날 평지에서부터 그 큰성 바벨론이 무너지고 하늘의 새 예루살렘까지, 시조 아담으로부터 큰 백보좌에 앉으신 심판주를 알현하기까지 안내자의 도움말이 필요합니다. 가르치는 사람, 지도하는 사람이 없이 혼자서 지나치게 상상력을 발휘하다가는 이단이 나오기 쉽습니다.
5.가능한대로 짧은 시간 내에 독파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쉬엄쉬엄 읽어서는 전체의 일관된 내용을 관조하기가 어렵습니다. 창세기에서부터 예언된 말씀들이 기억에서 생생할 때 그 성취되는 역사를 보고 천지는 없어질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없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6.우리들이 읽는 성경은 대체로 주제별로 혹은 종류별 편집으로 되어서 시대인 배경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습니다. 이것을 다시 시대순으로 재구성하여 읽게되면 예언서와 역사서가 동시에 이해가 되고 초대교회의 모습과 사도행전적인 역사와 서신서들을 단번에 이해할 수 있습니다.
7.일반적으로 하는 성경공부나 설교를 통하여 들어본 성경상식들은 대개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사건이나 인물들을 다루게 됩니다. 솟아오른 산 봉우리만 보고 계곡이나 심신유곡들은 보지도 않고 알려고 하지도 않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통독사경회에 오시면 모든 봉우리와 계곡 유곡으로 내려가서 진리의 말씀의 강물에 이르러 말씀으로 세례를 받습니다.
8.영적인 양식을 편식하던 습관을 버리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이 육신의 양식도 편시을 하면 건강이 나빠지게 됩니다. 이와 같이 영적인 양식도 편식을 하면 그 사람의 신앙이 건전하기가 어렵습니다. 어떤 설교가는 평생에 오바댜서나 나훔서 같은 책은 펴보지도 않고 설교하지도 않은 채 무시해 버리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레위기를 재미없는 책으로 간주하고 설교하기를 꺼리고 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많은 질병으로 고생을 하게 되었습니다. 레위기를 정성 들여 읽고 실천하면 분명히 건강한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서양의 현대의학이 레위기의 교훈을 무시하고 나름대로 식품 영양학을 체계화하여 가르치게되었습니다. 그 결과 많은 성인병들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영적인 양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친 신학이 요리한 양식으로 편식을 하면 그 결과는 언제나 건전하지 못한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9.전문 낭독사가 낭독하는 음성을 들으면서 눈으로 읽으면서 마음으로 감동을 느끼면서 두뇌로 이해하면서 안내자의 안내해설을 듣고 나면 혼자서 10년을 읽어온 것보다 통독하는 한 주간에 더 많은 것을 더 올바르게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묵독을 통하여 느낄 수 없었던 큰 감동이 통독을 통하여 우리 영혼을 사무치게 합니다. 하나님의 성령에 사로잡혀서 읽는 사람의 음성이 우리의 가슴을 두드리게 될 때 느껴지는 감동은 묵독을 통해서는 경험 할 수 없을 것입니다.
10.지금까지 기도하여 오신 수많은 문제들이 많은 물소리 같고 폭포수와도 같은 66권의 하나님 말씀 안에서 한꺼번에 응답 받으시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구하는 대부분의 소원과 기도는 말씀 안에 그 응답이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잘 몰라서 잘못 구한 것들도 많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11.알게 모르게 지어왔던 갖가지 죄와 허물들에 대하여 가차없는 지적을 받을 때 온전한 회개에 이르게 되고 영적으로 종합진찰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해 오면서 처음의 감격과 경건과 순결과 성결에서 많이 퇴보하고 있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현대의 교회가 회개를 촉구하지 않는 경향이 있어서 누가 그 죄를 지적하면서 회개를 촉구하지 않음으로 계속하여 죄 가운데 살아온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나타나는 선지자들은 아껴보지 않고 가차없는 지적과 함께 회개를 촉구할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날 그 음성을 듣게 될 때 마음을 강퍅하게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12.하나님의 말씀을 처음부터 끝까지 겸손하게 경청하며 성심으로 통독한 후에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 사람이란 어떤 존재인지, 또 사탄의 정체는 무엇인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사람, 사탄의 관계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면 성경과 역사와 죄와 사회와 구원의 의미까지도 바르게 알 수가 없을 것입니다.
13.유능한 탈렌트는 시나리오를 통독해야 합니다. 그리고 연출자의 의중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드라마의 메세지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전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드라마는 역사를 말함이요 연출자는 하나님이요 시나리오는 성경입니다. 아무 것도 모르고 주인공이 되려하고 주역만 맡으려 하는 자들이 있어서 역사는 어려움을 당하게 됩니다.
14.성경은 생명의 말씀이요, 사명의 말씀이며 계명의 말씀입니다. 생명의 기원, 생명의 의미, 생명의 가치, 생명의 구원,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성경 안에서 분명합니다. 그 생명으로 무엇을 위하여 살 것인가를 가르쳐 알게 합니다. 생명은 사명을 위하여 존재합니다. 또 계명의 말씀을 통하여 어떻게 살 것인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교회가 사명에 관하여 가르치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계명을 등한히 하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사명이나 계명을 따라 생활하는 것이 아니라 이익을 따라, 유행을 따라 생활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세상적이고 정욕적이며 마귀적인 욕망을 따라서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15.성경을 통하여서만 자기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철학은 "너 자신을 알라!" 고 하며 종교인들은 자기를 완성하려고 애쓰지만 성경은 "자기자신을 부인하고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우리 자신의 영원한 참 모습을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성경말씀대로 살고 나서 천국에 갔을 때 거기서 우리의 영원한 참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미래는 아직 다 밝혀지지 않았지만 주께서 나타내실 때가 되면 우리가 주님과 거의 같은 모습으로 변화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잘 보면 거기에 우리의 미래의 모습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16.성경 통독 사경회는 상당한 인내를 요구합니다. 그러나 끝까지 참고 진실함과 성실함으로 승리하신 분들에게는 세계 역사상 어느 부흥회, 어떤 사경회, 어떤 성경 연구 과정보다도 풍성한 은혜와 진리를 주님께서 주실 것으로 확신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부분적인 과정을 너무 확대하여 가르치고 배우면서 그쪽으로 치우치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을 통독하는 과정은 통전적인 안목으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까지는 많은 인내를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그 인내에 비교할 수 없는 은혜와 진리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17.현대를 가리켜 오염된 시대라 합니다. 물도 공기도 하늘도 땅도 산이나 바다, 심지어 지구 궤도에까지도 오염되었고 어질러졌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공급되는 영혼의 양식마저도 오염되어가고 있습니다. 생수의 수원지인 신학대학까지 민주주의, 사회주의가 오염되었고 개인주의의 집단주의가 난무하고 있습니다. 주지주의 신비주의로 기울어지고 형식주의 배금주의 물량주의 업적주의가 오염되어 확산되고 있습니다. 오직 한 가지 오염되지도 변하지도 않은 것이 있습니다. 그 양식이 바로 성경입니다.
18.성경을 통독하신 후엔 성경을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어려운 책이 아니라. "성경은 어려운 책이 아니라 쉬운 책"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지금까지 출판된 모든 책을 합한 것보다 더 가치가 있다"고 말한 페트릭 헨리의 말에 공감하고 찬성할 것입니다
19.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최대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그 다음 가장 값진 선물은 성경입니다. 선물을 주신 분께 대한 바른 자세는 그 선물의 가치를 바로 알고 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책을 쓰는 사람들은 자기의 책을 기쁘게 일고 유익을 얻었다고 하는 말을 들으면 보람을 느끼게 됩니다. 성경은 사람의 손으로 기록은 되었지만 그 내용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이루어진 것이기에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고 그 말씀이 기록된 성경책을 사랑하여 읽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모든 좋은 것을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20.성경을 주신 하나님께서는 어떤 구절 어떤 소절들을 "너희는 이를 요절로 여겨서 암송하여라!" 라고 말씀하신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요3:15을 물으면 대개가 모른다고 대답합니다.요3:17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15을 물으면 아무도 모른다고 할 것입니다. 거기에는 "항상 선을 좇으라"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이 요절이 아니라 항상 선을 좇으라고 하신 말씀이 더 중요한 구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항상 선을 좇으라고 하신 말씀을 무시하고 잘라 버리고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만을 요절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항상 선을 좇는 사람들을 찾을 수가 없는 것은 매 슬픈 일입니다.
21.성경을 한번 통독하여서 그 내용을 다 알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개역 한글 성경은 그 분량이 1,754페이지나 되는 방대한 책입니다. 보통사람이라면 적어도 10여 차례 정도는 반복하여 통독을 해야만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처음으로 한번 통독한 사람들은 자신이 성경책을 얼마나 모르고 있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고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22,그리고 혼자서 읽는 경우는 그 결심이 흔들려서 끝까지 읽어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함께 읽어나가면 결심이 약하던 사람들도 거뜬히 통독을 할 수 있게 됩니다. 마른 강바닥에 한 방울의 물은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그러한 물방울이 자신의 힘으로는 결코 바다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큰 강물이 흘러가는 물결에 자신을 던지면 그 작은 물방울이 넉넉히 바다에까지 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홍수가 온 세상을 넘쳐흐르는 날에는 물은 많은데도 마실 물이 없어서 애를 먹게 됩니다. 흙탕물과 구정물이 샘물 근원까지 덮쳐서 맑은 물을 구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지식의 홍수 정보의 홍수 책의 홍수 뉴스의 홍수가 매스미디어 멀티미디어를 타고 쏟아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어디가야 청량한 생수가 솟아나는 샘터가 있는지를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책들도 하도 많이 쏟아져 나오기 때문에 읽고 또 읽어도 다 읽을 수가 없습니다. 또 다 읽을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어차피 그 많은 책들을 다 읽을 수는 없습니다. 그럴 바에는 한 권을 읽어도 가치가 있는 책을 읽는 것이 지혜로운 일입니다. 영원불멸의 진리가 살아서 숨을 쉬는, 살았고 운동력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담긴 책을 읽는 것이 지혜로운 일입니다. 부분적으로가 아니라 전체를 읽은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남이 읽은 이야기를 듣는 것보다는 직접 읽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십 년을 믿어오면서도 성경한번을 통독하여 보지 못한 사람이 많습니다. 교회에서 중직을 맡아 일하면서도 성경한번을 제대로 읽어보지 않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심지어는 성경을 연구하시는 분들도 제대로 읽어보지 않고 연구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 번 읽어도 어려운 곳을 연구해야 할 텐데 읽어보지도 않은 성경을 연구한답시고 이 책 저 책을 뒤적이다가는 성경을 알 수가 없을 것입니다. 오늘날 서구의 신앙이 흔들거리는 이유들 중에 하나는 바로 성경을 읽지 않고 연구부터 하는데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길이 몇 가지가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녀들에게 금덩이를 내려주시지는 않습니다. 성경은 지혜를 얻는 것이 금을 얻는 것보다 낫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야말로 지혜의 보고(寶庫)입니다. 지혜의 근본이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이는 지혜를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낫고 그 이익이 정금보다 나음이니라"
"너희가 은을 받지 말고 나의 훈계를 받으며 정금보다 지식을 얻으라"
"지혜를 얻는 것이 금을 얻는 것보다 얼마나 나은고 명철을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더욱 나으니라"
"많은 재물보다 명예를 택할 것이요 은이나 금보다 은총을 더욱 택할 것이니라"(잠03:14 잠08:10 잠16:16 잠22:01)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 주시는 다른 길은 좋은 사람을 만나게 해 주시는 길입니다. 모든 복되고 아름다운 일들이 다 사람과의 만남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일생에 좋으신 부모 형제를 만나는 것을 큰 축복이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좋은 친구를 만나는 것은 참으로 복된 일입니다. 좋은 배우자를 만나게 되는 것을 복 중에 복이라 할 것입니다. 좋은 스승을 만나는 것 또한 크나큰 복이라 할 것입니다. 좋은 선배를 만나는 것과 좋은 이웃을 만나는 것은 참으로 복된 일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복을 살아 있는 사람들 중에서 찾으려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실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들이 소원한다고 다 되는 것도 아니고 노력한다고 다 이루질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좋은 스승, 좋은 친구, 좋은 선배를 만나기를 원한다면 성경을 읽어서 그 안에서 좋은 선배, 위대한 스승, 좋은 친구들을 많이 만날 수가 있습니다.
성경 안에서 우리는 노아와 아브라함을 만날 수 있고 이삭과 야곱, 요셉을 만나며 모세와 여호수아 그리고 갈렙, 사무엘과 다윗과 요나단을 만나게 됩니다. 지혜의 왕 솔로몬과 개혁자 여호사밧, 그리고 히스기야 요시야를 만날 수 있습니다.
이사야 예레미야로 부터 말라기까지 거룩하고 담대한 여러 선지자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들을 만나서 우리는 언제든지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세례요한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을 만날 수 있고 12 사도와 바울과 바나바,누가와 아볼로 디모데와 디도, 두기고,아리스다고,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를 만나고 빌레몬 오네시모를 만날 있습니다.
성경은 또한 아름다운 여인들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 이삭의 아내 리브가 믿음의 여인 레아, 효부였던 모압 여자 룻이며 그의 다정한 시어머니 나오미를 만날 수 있습니다. 슬기로운 여인 여리고의 라합이며 여자 선지자 드보라를 만날 수도 있고 애국여성 에스더를 만나고 솔로몬의 진정한 사랑 술람미를 만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었던 마리아를 만나고 현숙한 엘리사벳이나 요안나 수산나 살로메등 순종과 봉사에 모범들을 만나게 됩니다. 바울과 함께 힘쓰던 두아디라의 자주장사를 빌립에 가면 만날 수 있습니다. 브리스길라와 같이 헌신된 여인들이 없었다면 바울의 사역은 어려웠을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 많은 사람들을 소개하여 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죽었으나 오히려 그 믿음으로써 그들의 삶으로써 진리를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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