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학

[스크랩] 주일과 안식일

수호천사1 2011. 3. 12. 15:25

주일과 안식일

 

 

주일에 대한 성경적 근거는 요한계시록 1:10에 나타나 있다 - 엔 테 큐리아케 헤메라(주의 날에. '주의'(주님의)라는 형용사 큐리아코스는 주의 만찬(Lord's Supper)과 관련하여 고린도전서 11:20에도 나온다.

 

큐리아코스가 세속적(世俗的)인 용법으로서는 '황제의'라는 뜻인데 A. D. 68년경까지 사용되었다(MM 364). 큐리아코스라는 단어가 고린도 전서 11:20에 사용된 것은 요한계시록 1:10보다 더 먼저이며, 또한 바울이 고린도전서 16:2에서 '일주일의 첫 날'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주의 날(주일)이라는 표현이 아직 그다지 널리 사용되지는 않았음을 알 수있다. 속사도(續使徒) 시대의 문헌들 중에서 주일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는 것들은 다음과 같다. 이그나티우스(ignatius)의 [마그네시아 교인들에게 보내는 편지] (Ad Mag). 9장 1절 : [베드로의 복음전도] (Ev. Pet) 35절과 50절; [바나바 서신](Barn) 15장 9절.

 

주일의 기원을 추적해 볼 때, 그것은 그리스도의 '부활'(해당 항목 참조)일과 관련되어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리스도께서는 주일에 부활하심으로써 그 날을 거룩하게 하셨으며, 일요일에 자신의 부활한 모습을 제자들에게 나타내 보이시고(요 20:26), 일주일의 첫 날에 성령을 보내심으로써(행 2장) 주일을 강조하셨다. 물론 성도들이 처음 예루살렘에서는 매일 모임을 갖기도 했지만 점차 일요일, 즉 주일은 예배를 드리는 특정한 날이 되었다(행 20:7; 고전 16:2). 기독교의 여러 가지 특징들이 유대교의 의식들과 관련된 것으로 나타나 있지만(참조, 고전 10:16-21; 골 2:11; 히 10:22) 주일이 안식일(安息日)의 성취라는 기록은 신약성경에 아무 곳에도 나타나 있지 않다. 주일에 관한 이러한 침묵은 특히 히브리서에 두드러지게 나타나 있는데 히브리서에서는 이 안식일(安息日)이 다만 신자들의 안식을 예표하는 것으로만 언급되어 있다. 사도행전 20:7에 나타난 기사를 볼 때, 주의 만찬을 준수하는 것은 처음부터 주일예배의 두드러진 특징이었음에 틀림없다. 헌금(연보)하는 것도 주일에 행하는 활동들 중의 하나였다(고전 16:2). 저스틴(Justin, A. D. 150년 경)은 주일날 행한 여러 가지활동들, 예컨대 사도들의 서신과 선지서들을 읽는 것과 권고(설교)와 기도와 주의 만찬을 거행하는 것과 헌금 등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변증서] (Apol) 1장 67절).

 

일찍이 아가페(애찬)는 예배 의식의 한 부분이었으나(고전 11:34) 저스틴 시대에 이르러서는 폐지되었음이 분명하다.

 

일요일 논쟁

 

그리스도인들은 일주일의 첫날인 일요일에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을 기념하여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 초대 교회는 일요일에만 예배를 드렸던 것은 아니지만(행2:46), 일요일에 예배를 드리는 것은 초대 교회 때부터 지켜 오던 하나의 관습이다(행20:7). 유대인들은 안식일(토요일)을 그 전날 해질 때부터 지켰다. 초대 교인들은 이러한 유대인의 관습에 따라 토요일 저녁부터 예배드리기 시작하여, 밤새도록 계속하다가 성찬을 떼어먹음으로써 그 절정을 장식했다(행 20:7, 11). 이러한 관습은 누가복음 12:35-40에 기록된 경고의 말씀('신랑이 돌아올 때 깨어 있으라' = 역자 주)에 따라 예배드리고 있을 때 주님이 재림하셨으면 하는 초대 교회 신자들의 바람과 관련이 있다. 뿐만 아니라 노예인 신자들이 참여할 수 있는 시간에 모이고자 하는 실제적인 필요성도 있었던 것 같다(John Wordsworth, The Ministry of Grace, Longmans, Green and Co. , London, 1903, pp. 312-18 참조), 또한 초대 교회는 매주일 첫날인 이 일요일에 정규적으로 연보를 드리고 성찬식을 거행했음이 특징이다. (행 20:7; 고전 16:2)

 

일요일은 주님이 제 8일에 부활하신 것을 기리는 뜻에서 '주의 날'(the Lord's Day)이라고도 불리운다(Ignatius Ad. Mag. ix l: Barnabas 15:9 ; Justin First Apol. ch. 67; 계 1:10). "그리스도인들이 일요일에 예배드리는 것은 이교도들이 그 신(태양신)을 숭배하기 위해 제정한 날을 본딴 것이라는 주장은 옳지 않다. 순교자 저스틴(Justin Martyr)과 바나바(Barnabas)가 이 날을 지키게 된 동기에 대해서 말한 내용과 초대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 우상 숭배를 지극히 혐오했다는 사실을 볼 때 그러한 가능성은 전혀 있을 수 없다"(Ralph E. Prime, "Sunday", SHERK XI, p. 145). 로마 카톨릭 교인들은 안식일을 일요일로 바꾸어야 할 책임이 자기들에게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안식교인들(Seventhday Adventists)은 그러한 주장이 사실이라고 비꼬면서, 그렇기 때문에 일요일에 예배하는 자들은 모두 다 '로마'(로마 카톨릭 교회)의 추종자들이며,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이라고 주장하였다. 초대교회의 사도들은 사도행전15:28, 29에 기록된 요긴한 것들 가운데 특별히 안식할 날을 언급하지 않고 있으며, 일요일에 예배를 드린다고 해서 그날이 다른 날들보다 더 거룩한 날은 결코 아니라고 분명하게 가르쳤다(롬 14:5, 6). 알퀼(Alcuin,733-804)이란 사람이 맨 처음으로, 로마 카톨릭 교회가 안식일에 지키도록 구약에 규정된 사항들을 일요일에 지키도록 했다고 주장했다. 종교 개혁자들은 이러한 로마 카톨릭 교회의 주장을 단호히 배척했고, 칼빈(Calvin) 자신은 심지어 일요일 대신에 목요일에 예배를 드리자고까지 했다. 영국의 청교도들과 스코틀랜드 장로교인들이 '엄격한 안식 법'(일요일을 구약의 안식일처럼 엄격히 지키도록 규정한 법률 = 역자 주)을 제정하여 준수했던 것은 당시에 주일이 너무나 무시된 데 대한 반작용으로 나타난 것이었다.

 

안식일 교회의 오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사람의 생명은 육체가 죽으면서 끝난다고 생각한다. 불교인들이나 흰두교인들은 계속하여 윤회(輪廻하고 전생(轉生)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교훈은 생명이 세상에서 영원히 윤회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육체로 사는 삶이 죽음을 맞게 되면 심판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성경 말씀은 罪人의 靈魂이나 예수님을 믿어 義롭다 함은 얻은 靈魂이 모두 永遠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성경 여러 곳에 永遠한 滅亡 또는 永遠한 刑罰이 있음을 증거한다.

 

어떤 주장과 같이 사람들의 생명이 영원하지 않다면 그 영원한 멸망이나 영원한 형벌은 사실 아무 의미가 없다.

“저희는 영벌(永罰,κολασιν αιωνιον)에, 의인들은 영생(永生,ζωην αιωνιον) 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마25:46)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불구자나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εις το πυρ το αιωνιον ;그 영원한 그 불 속으로)에 던지 우는 것보다 나으니라”(마18:8)

 

불(πυρ)만 영원하고 사람의 생명이 영원하지 않다면 이 말씀은 사실 필요 없는 것이다. 사람의 존재 자체가 없어지면 그 뜨거운 불은 아무 의미가 없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을 말씀하시고 있으나 동시에 하나님의 공의(公義)과 진노(震怒)와 심판(審判)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이다. 안식교인들이나 혹 어떤 소위 휴매니스트들은 생각하기를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영원한 형벌 같은 것을 전혀 하나님의 성품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항변한다. 그러나 그러한 상상은 인간의 착각에 불과하고 성경에 서 예수님의 말씀은 단호하고 분명하다.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εις την γεενναν ) 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το πυρ ου σβεννυται)사람마다 불로서 소금 치듯함을 받으리라 (Πας γαρ πυρι αλισθησεται”(막9:47-49)

 

여기에 분명히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불이 나온다. 영생이라는 것은 영원히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영원한 불은 불이 영원하다는 것과 함께 그 속에서 형벌이 영원하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영원한 불 속에서 영원히 살기 때문에 그 불에 들어가지 않도록 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멸망을 말하되 영원한 멸망을 말씀하신다. 즉 멸망이 영원하다는 것이다(살후1:9)

“너희로 환난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환난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διδοντος εκδικησιν,형벌을 주실 것이다)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δικην τισουσιν ολεηθρον αιωνιον)(살후1:6-9)

 

“또 다른 천사 곧 셋째가 그 뒤를 따라 큰 음성으로 가로되 만일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 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 그 고난(苦難)의 연기(煙氣)가 세세(世世)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계14:9-12)

 

죄인은 세세토록 고난의 연기 가운데 밤낮 쉼을 얻지 못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죄인의 영혼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존재하게 되고 영원히 고난을 받게 됨으로 이를 영벌(永罰)이라고 한다.

 

반면에 거룩한 성도들의 영혼이 영원하다는 것을 더 말할 필요가 없다. 믿는 자들은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아니하고(요8:51) 영원히 멸망치 아니하고(요10:28) 영원한 생명의 약속을 받았다(요일2:25).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영원한 생명이라고 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끝까지 외면하고 거절한 사람들에게 영원한 형벌이 있다는 것과 참고 의를 행하면서 하나님을 믿고 복음을 순종한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증거하고 있다. 죄인의 영혼도 의인의 영혼도 영원히 존재한다. 다만 그 영원을 어디서 보내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될 뿐이다.

 

우리는 모두 영원한 존재들이다. 믿지 않는 죄인의 영혼이든, 믿는 성도들의 영혼이든 모두 영원히 존재한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육체는 영혼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다.

보이는 세계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위한 것이다.

시간적인 것은 영원한 것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다.

 

집을 마련하고, 가구를 마련하고, 옷을 마련하고 장난감을 마련하는 것은 사람을 위해서이다. 요즈음에 환경 보존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되고 있는데 그 이야기들의 대부분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서 그것이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셨기 때문에 그것들은 보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것 자체를 창조 원형대로 보존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옷을 세탁하는 목적은 그 옷을 사람이 입기 위해서이지 단지 그 옷을 깨끗하게 위해서 빨래를 하는 것은 아닌 것과 같다.

 

지구의 장래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많은 이론과 사상을 펼치고 있지만 성경의 말씀은 이 땅이 언젠가 없어질 것이라고 증거하고 있다. 하늘과 땅은 불사르게 될 것이며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 처음 하늘과 땅은 없어진다고 한다. 그 대신 새 하늘과 새 땅을 보게 된다고 한다(벧후3:5-13, 계20:11, 21:1). 지구가 죄의 결과로 소멸된다고 하는 말이 있으나 지구는 창조시부터 없어질 것으로 창조되었다.

 

진동치 아니하는 것들을 영존케 하기 위하여 모든 만든 것들을 변동, 즉 하늘을 진동하게 하신다고 하셨다(히 12:26-28).

 

인간의 육체는 하나님께서 흙으로 빚으셨다. 흙에서 취함을 입었기 때문에 흙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하신다(창2:7,18-19). 육체가 그 소용을 다하게 되면 육체는 다시 흙이 되는 것이다. 육체도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한시적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진 것이다.

 

사람의 족보에 대하여 마태복음에서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고(마1:2)로 시작해서 예수 그리스도에게까지 내려온다(마1:16). 여기에서는 최고 아브라함까지만 올라간다. 그러나 누가복음에서는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할 때에 삼십 세쯤 되시니라 사람들의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이상은 헬리요(눅3:23)의 형식과 같이 ‘이상’이라는 말을 사용하여 하나님까지(눅3:38) 거슬러 올라간다. 이 말을 마태복음 식으로 표현하면 “예수는 요셉이 낳았고 요셉은 헬리가 낳았고 ---- 셋은 아담이 낳았고 아담은 하나님이 낳았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모두 하나님께서 친히 낳으신 생명들이며 자녀들이다.

 

하나님이 아담을 낳은 방법이 바로 생기를 불어넣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녀를 낳는 방법이 사람들이나 동물들하고 다르면 󰡔낳는다󰡕라는 것을 이해 못한다. 직접 자기 생명을 낳는 방법도 있고, 알을 낳아서 생명을 낳는 방법도 있고, 자기 몸의 일부를 분리시켜 낳는 방법도 있다. 낳는 방법이 다르다고 해서 낳은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이 우리 영혼을 낳으신 방법은 생기를 불어넣으시는 방법이었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낳으신 생명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우리가 아버지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 육신의 아버지는 하나님 아버지의 형상(形象)이시고 하나님은 형상이신 육신의 아버지의 실상(實像)이시다.

 

인간은 물질적(物質的)인 부분과 비물질적(非物質的)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 존재이다. 물질적인 것은 인간의 육체이다. 인간의 육체는 하나님께서 낳으신 것이 아니고 만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낳으신 것은 인간의 영혼이다. 낳은 것은 생명이다. 따라서 인간의 생명은 인간의 영혼이지 육체가 아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참 자신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여 인생을 잘 못 살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인간이란 바로 몸 자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생각도 몸에서 유출되는 기능이며, 몸이 죽으면 사람의 생명도 끝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동물이나 사람이나 본질적으로 같다고 보아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생각한다. 이 사람들은 자기가 육체로 사는 동안만을 위해서 살고 있다. 이것은 마치 외투를 입고 「나는 바로 외투」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외투가 존재하는 동안만 자신이 존재하고 외투가 버려지면 자신도 버려지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동일한 것이다.

 

우리의 몸은 소중하지만 몸만으로는 참 사람이 아니다. 참 사람은 내 영혼이다. 즉 속에 있는 나의(소유격)몸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이 아니고 낳으신 영혼이 참 사람이며 참 󰡔나󰡕라는 것이다.

 

시편에서 [나]는 곧 [내 영혼]이라고 말한다(시130:5). 사람이 아무리 잘 생겼다 할지라도 그 얼굴과 모습 그 자체가 그의 참 존재가 아니다. 참 사람은 영혼임을 보여주는 말씀이 있다.

 

예수님 당시에 어느 회당장의 딸이 죽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울며 통곡하였다. 예수님께서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아이야 일어나라 하시자 그 아이의 영(靈)이 돌아와 그 아이가 일어났다.(눅 8:49-56) 또한 사도행전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자기 밭을 팔아 가지고 사도들에게 드리면서 그 돈이 판 것의 전부라고 말하였다.

 

베드로가 아나니아가 속이는 것을 알고 “네가 어찌하여 성령을 속이느냐”하면서 책망을 하자 그 혼이 떠나 죽었다(행5:1-10). 이 경우들에서 보듯 참 생명은 그 영혼인 것을 알 수 있다. 사람의 참 생명은 그 사람의 육체 안에 거하는 영혼이다. 그래서 성경은 영혼 없는 몸은 죽은 것이라고 한다(약 2:26).

 

신앙에서 혼동되어 사용되고 있는 개념 가운데 하나가 믿어야만 영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불멸성은 아담과 하와의 타락하지 않은 상태 안에 존재하는 가능성이라 한다.

 

사람의 본체는 육체가 아니라 영혼이다. 사람 또는 인간이란 육체를 입고 있는 영혼을 일컫다. 인간은 죄를 범하여 마귀에게 속하든 하나님께 순종하여 하나님께 속하든 영원히 존재한다. 죽음이라는 말을 소멸이라는 의미로 사람에게 적용시키면 그것은 하나님과 사람을 잘 모르고 하는 말이다.

 

안식일 교회는 죄를 지은 영혼들은 소멸된다고 주장하여 이단으로 정죄 받고 있다. 죽음을 소멸이라는 의미에서 육체에 적용시키는 것은 가능하나 육체의 죽음이 죄의 결과라는 것은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육체의 죽음은 하나님의 계획하신 인간의 과정적 필요이기 때문에 죽음이 죄의 결과라는 신앙의 공적 사실에서 볼 때 [죽음]이란 말을 사람의 육체의 죽음에 적용시키는 것은 신앙을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죽음을 소멸이라는 의미로 사용하는 것은 죽음의 의미를 혼돈 시키는 것이다. 죽음은 소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에서 죽음은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關係)를 의미한다. 마귀에게 속하여 있으면 죽은 것이요, 하나님께 속하여 있으면 산 것이라고 말씀한다. 그러므로 죽음을 사람의 육체에 적용시켜서는 안된다. 죽음이 상태(狀態)가 아니라 관계(關係)라는 면에서 볼 때 인간은 영원히 소멸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 확실해 진다.

 

죽음이라는 말은 소멸의 의미가 아니라 관계이기 때문에 육체가 죽는다고 말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합당하지 못한다.

 

죄가 사망(죽음,θανατος)을 가져오고(고전15:56), 죄의 삯은 사망(죽음,θανατος)이라고 한다(롬6:23). 여기에서 말하는 사망은 문자적으로는 분명히 육체적 죽음을 가리키는 말과 같지만 그 의미는 단지 몸의 죽음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영적인 관계를 말하는 것이다. 죽었다고 하는 것은 공중의 권세 잡은 자 곧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을 따라 살며 이 세상 풍속을 좇고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마음의 욕심대로 행하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죽음은 사람이 살다가 죽어서 없어지는 것을 말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죽음은 속함(belong)을 말한다. 마귀에게 속하였는가? 아니면 하나님께 속하였는가?

 

마귀에게 속한 사람을 성경은 죽었다고 말한다. 죽음이란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진 것을 의미한다. 성경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진 것을 죽었다고 말한다(엡 2:1-3). 죽음은 속함 및 관계를 말하는 것이지 소멸(消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사망이라는 말은 단순히 육체의 죽음에 대하여 사용하는 말이 아니라 영혼에 대하여 사용하는 말이다. 육체의 소멸을 죽음이라고 말하며 더 나아가 죄의 삯으로 사람의 육체가 죽는다고 말하는 것은 죽음이라는 말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死亡은 육체의 죽음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육체는 영혼을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무엇을 만들 때는 어떤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육체도 영혼을 위한 어떤 목적이 있어서 하나님께서 만들어 영혼이 거할 수 있도록 하신 것이다. 영혼에 대한 육체의 목적을 다하면 육체는 없어질 것이다.

 

필요에 의해서 만든 몸이 필요가 다해서 버리게 되는데 이것을 것을 사망이라고 할 수 없다. 사람의 육체가 소멸되는 것을 사망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육체 중심적으로 생각하는 이방인들의 사고이다. 영혼은 육체를 벗지 않으면 부활의 영체(靈體)를 입을 수가 없다. 영혼의 입장에서 본다면 마치 옷을 벗는 것과 같은 것인데 육체 중심적으로 보기 때문에 사망이라고 하는 것이다.

 

육체의 소멸은 죄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다. 성경에서 사람의 육체를 장막이라 한다(고후 5:1-4). 이 장막 집은 무너질 것이라 한다. 마치 옷같은 것으로 말한다. 이 세상의 의미로 사람이 죽는 것을 성경은 장막을 벗어나는 것으로 말한다(벧후 1:13-14). 사람은 육체라는 장막을 입고 본향을 향하여 가는 나그네이다(히11:13-16). 마치 추운 겨울 두터운 외투를 입고 외출했다가 집에 돌아와 그 외투를 벗는 것처럼 말이다. 사람의 육체는 외출할 때 입는 외투 같은 것이다.

 

외투는 사람이 필요하여 만든 것이다. 만드는 것은 어떤 소용이 있기 때문이다. 추운 지역에 살다가 열대 지방으로 이주를 한다면 그 사람은 외투를 버리고 갈 것이다. 외투는 그가 추운 지역에 살 때만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든 것은 필요가 다하면 그것을 버린다. 하나님은 만든 것을 진동시키신다고 하셨다(히 12:27). 사람의 육체는 하나님이 흙으로 빚어 만드셨다.

 

그러므로 사람의 육체도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계획되어 진 것이다. 하나님은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고 하신다(벧전 1:17). 이 말은 다시 말해 육체에 있을 때 장래 하나님이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므로 육체의 정욕대로 살지 말라는 것이다(벧전:11).

 

사람의 몸이 폐기되는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다(히9:27). 이것은 사망이 아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육체를 흙으로 만드시고 사람의 장막으로 주셨다. 그러나 영혼의 때가 되면 육체를 벗어버리게 하셨다. 하나님은 만든 것들은 모두 진동하며 변동될 것으로 만드셨다(히12:26-27). 진동치 아니하는 것 즉 영혼을 영존케하기 위하여 만든 것들을 모두 진동시켜 버리시는 것이다.

 

육체의 소멸은 필연적인 과정으로서 죄의 직접적인 결과는 아니지만 죄는 육체의 수명에 영향을 미친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의 기한이 되기까지 육체를 보존하신다. 영혼을 육체 안에 두신 하나님의 목적이 이루기까지 영혼과 육체를 하나로 보존하신다.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총이나 칼, 혹은 주먹으로 사람의 육체를 파괴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 사람의 영혼을 어떻게 할 수는 없다.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10:28)

 

마귀는 우리의 육체를 파괴시키려 한다. 병을 들게 하거나 전쟁을 하게 하여 육체의 수명을 단축시키려 한다. 육체로 있는 기회는 그 육체 안에 있는 영혼이 하나님을 배우고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것이다. 마귀는 이러한 기회를 빼앗으려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든 비 그리스도인이든 육체의 수명이 단축되는 것은 영혼의 기회를 상실하게 하는 것이다. 육체가 수한이 못되어 폐기되는 것은 영혼의 기회를 단축케 하는 것이다. 사고나 병으로 육체가 자기의 수명을 다하지 못하고 중도에 폐기되면 그 영혼은 이 세상에서는 물론이려니와 영의 세계에서도 결코 기회를 가질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은 상태에서 사고나 병으로 죽은 사람은 돌이킬 기회를 영원히 상실하여 영원한 저주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육체가 사고나 병으로 불편한 사람은 그 만큼 영혼의 기회가 제한을 받게 되는 것이다.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들어갈 때 입는 옷은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이다. 그런데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고 한다(계19:8). 행실은 육체를 입고 살 때의 행실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육체가 있을 때는 순종하는 행동을 할 수 있지만 육체가 폐기되거나 불편하면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할 수가 없다.

육체로 심은 만큼 영혼의 열매를 거두게 된다.

 

하나님은 우리가 부활할 때 입는 영체가 다 같은 형체가 아니라고 성경은 말한다. 해와 달과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듯 죽은 자의 부활도 그렇다고 말씀한다. 그런데 부활에 참여하는 영적인 신령한 몸을 얻기 위해서는 육의 몸으로 심는 것이라고 한다. 우리의 영혼이 이 땅에서 입고 있는 육체도 다 다르듯 부활시 입을 영체도 다 다르다는 것이다(고전5:40-48).

 

부활한 신령한 성도의 몸은 육체로 있을 동안에 결정된다. 때문에 영혼의 유일한 기회는 육체 안에 있을 동안 뿐이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 마귀는 우리 영혼을 파멸로, 영원한 저주 가운데로 이끌기 위하여 갖가지의 수단을 통하여 육체의 수명을 단축시키려 한다. 그런데 마귀는 우리 사람들의 불순종 곧 죄를 통하여 공격한다. 죄가 있을 때 마귀는 사람의 육체의 수명을 단축시켜 버린다. 죄와 마귀는 하나이다. 마귀는 죄를 짓게 만들고 죄는 사람들을 병들게 하며 결국은 죽여서 지옥가게 만드는 것이다.

마귀는 영혼을 유혹함으로 그 유혹에 넘어간 자의 육체를 공격하여 육체의 수명을 단축게하고 육체의 기회를 철저하게 제한하는 것이다.

 

인간이 유한하다는 것은 인간의 생명 자체에 대한 말이 아니라 인간의 능력의 한계와 육체로 가지는 기회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다. 즉 육체가 영원히 살지 못하고 소멸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육체를 주신 것은 마치 작업복과 같은 의미로 주셨다. 사람은 일을 할 때에 작업복을 입지만 저녁이 되어 일을 마치게 되면 그 작업복을 벗어 놓고 집에서 입는 옷으로 갈아 입는다.

 

본래 하나님께서는 육체를 지으시고 그 안에 영을 두시어 사람이 되게 하셨다. 그러므로 사람의 육체는 마치 일하는 사람들의 작업복과 같다.

 

인간은 육체를 입고 영원히 살 존재가 아니다. 스쿠버 다이버들은 좀 거추장스러운 장비를 착용하고 수중으로 들어간다. 수중 작업시 스쿠버 장비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이 장비는 수중에서만 필요한 것이다. 수중에서는 이것을 입는 것이 좋은 것이지만 뭍에서는 입지 않는 것이 좋다.

 

성경에서 육체의 죽음은 그 영혼이 육체를 떠나는 것을 말한다. 한 아이가 죽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가 잔다고 하였다.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셨지만 그 말은 일반적인 의미로는 죽은 것을 말했다. 예수님이 그 죽은 아이를 향하여 “일어나라 !”하고 말씀하시자 그 영이 돌아와 아이가 곧 일어났다(눅 8:52-55). 영혼이 이 땅에 있을 때는 육체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 땅을 떠나면 육체가 필요 없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흙으로 만드신 육체에 생기를 불어넣으심으로써 살아 움직이는 존재가 되게 하셨다. 그리고 죄 아래 팔려 죄에 속하여 죽어 있던 것을 독생자의 피로써 구속하시고 성령으로 낳으셨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2:7)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는 사람의 몸이 만들어 졌음을 말하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을 낳으신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란 몸을 입은 「영혼」을 말하는 것이다. 물론 평소에 일반적으로 말하는 사람이란 󰡔육체를 입고 있는 영혼󰡕 전체를 통칭하는 것이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는 그 사람의 영혼이 사람의 주체요 그의 육체는 영원한 것이 아니라 일생동안만 필요한 것이다. 이 땅에 사는 날 동안에는 「사람은 만든 것」과 「낳은 것」이 일체가 된 존재이다. 즉 육체와 영혼이 합하여 사람이라는 존재로 살아 움직이는 존재이다. 󰡔만든 것󰡕과 󰡔낳은 것󰡕이 일체라는 것은 시간과 영원이 함께 거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사람은 시간적인 존재이기도 하고 동시에 영원한 존재이기도 하다. 시간적인 것은 영원한 것을 위하여 있다. 영원한 것은 시간 안에 있을 때 영원을 위해 준비하는 것이다.

 

인간은 만든 것과 낳은 것의 일체, 물질과 영혼의 일체, 시간적인 존재와 영원한 존재의 일체로 이루어진 존재이다.

 

안 식 일

 

복음서와 안식일

 

4복음서 내에서는 예수님과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 사이에 안식일 논쟁이 약간 있었지만 이러한 논쟁은 바리새인들의 시기에서 비롯된 것이고 안식일의 신학적인 진지한 논의는 시도된 적이 없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모세의 율법을 지키실 의무가 없으셨지만 덕을 세우고 의를 이루시기 위하여 기꺼이 율법을 준수하셨다. 예를 들면 주님은 안식일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주님을 향하여 시비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성전세도 주님은 내지 않으실 수 있지만 저희로 오해케 하지 않토록 내시게 하셨다. 세례만해도 그렇다. 주님은 아무런 죄가 없으셨기 때문에 주님께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으셨다. 그러나 의를 이루기 위함이라 하시고 세례를 받으셨다.

 

주님께서 무시하신 것은 안식일 계명이 아니라 안식일에 지켜야한다고 만들어 첨가한 할라카(Halachah)였다. 오늘날도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들이 지나치게 복잡하게 해석하게 되면 성경이 본래 목적에서 벗어날 위험이 있다. 다행이 오늘날 주석서들은 단지 해석적인 입장일 뿐 이를 율법처럼 강요하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는 않지만 일반인들이 방대한 주석을 접하게 되면 성경보다 더 어렵게 느낄 수 있다.

 

사도행전에서의 안식일과 주일

 

(행20:7) 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하여 저희에게 강론할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복음서와 사도행전은 기록된 시기가 거의 같은 시기였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때는 이미 기독교와 유대교는 갈등을 충분히 겪어 오고 있었던 때였다. 그래서 안식일도 기억하고 있었고 「안식 후 첫날」도 공식적으로 지켜졌을 가능성이 있다. 언어라는 것은 그것이 관용구 처럼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리기 마련이다.

 

「안식 후 첫날」이라는 말이 관용구 처럼 쓰이고 있다. 이 말은 이미 복음서를 기록한 사도들의 언어에서 익숙해져 있던 말이다.

사도 바울이 제 3차 전도 여행을 마치고 마케도니아와 아가야 성도들이 정성으로 모운 연보를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중에 드로아에서 한 주간을 보내게 되었는데 바울은 안식일에 모임을 가진 것이 아니라 안식 후 첫날에 모임을 가진 것이다. 그리고 그 모임은 단순한 모임이 아니라 떡을 떼기 위하여 모였던 모임이었다. 바울은 이튿날에 떠나고자 계획하고 있었고 다시는 드로아 사람들의 얼굴을 볼 수 없을 것으로 생각했던지 강론을 오래하여 시간이 밤중이 되었는데도 강의 계속되고 있었다.

이러한 모임이 안식 후 첫날 곧 제 8일, 오늘로 말하자면 주일에 있었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다.

   

8 일에 관하여

 

1.할례를 베푸는 날이었고

2.구약 시대로 말하자면 십계명을 받은 날이었다.

3.당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날이며

4.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날이었으며

5.주님께서 승천하신 날이기도 했고

6.성령께서 강림하신 날이었으며

7.초대교회로부터 세례를 베푸는 날이었다.

 

유대인들은 날에 관한 관심이 많은 편이었지만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 등의 의식 법으로부터 자유하다는 것을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새 언약을 세우시던 밤에 특별한 식사를 하셨는데 그날은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이 지키는 유월절보다 하루 전이었다. 유대인들의 유월절은 니산월 14일 저녁이었다. 그러나 주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마가 요한의 다락에서 떡을 떼신 날은 13일 저녁이었고 그 날을 요일로 하면 목요일 저녁이었다. 언약이 새로워지면서 의식이나 일자도 유대교의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질서를 따르게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새 술은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서신서의 주일

 

(고전16:1-2) 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매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에 벌써 매 주일 첫날 모임이 있었다는 사실을 방증(傍證)하는 구절이다. 혹자들은 이 구절을 매 주일 첫날에 노동을 하여 그 이익을 연보하라는 말씀으로 해석하려고 한다. 이 구절이 매 주일 첫날에 예배를 드렸다는 증거라고 강변할 수는 없지만 매 주일 첫날에 떡을 떼는 습관은 매우 일찍부터 정착되었던 것으로 기록된 자료가 있다. 주일 아침에 일찍 모여서 기도하고 그리고 저녁에는 다시 공동식사(떡을 떼려고)로 모였다는 기록이 있다. 아침에 일찍 모인 것은 주님께서 부활하신 아침을 기억하여 모였을 것이고 저녁에 모인 것은 안식 후 첫날 저녁에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 앞에 나타나셨던 것을 기념하여 모였다.

 

(롬14 : 5-6) 혹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지니라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로마에 있는 기독교인들도 아 문제로 인하여 약간의 마찰이나 갈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이 문제는 기독교의 복음이 전파된 모든 곳에서 갈등의 요인이 되었던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날은 저날 보다 낫게 여기고 혹 어떤 사람들은 모든 날이 다 같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대체적으로 믿음이 강한 사람은 모든 날을 같이 여겼을 것이고 음식에 대해서도 상당히 자유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이나 아직도 유대교의 인습에 젖어서 그 습관에 매여 있는 사람들은 믿음 안에 있으면서도 안식일과 먹고 마시는 것에 대하여 아직 자유하지 못했던 것이다.

 

(골2:16-17)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바울이 골로새에 편지를 쓸 때는 이미 이 문제가 거론이 되었고 안식일을 중히 여기는 사람들과 안식일을 폐지하고 안식 후 첫날에만 모이는 사람들의 갈등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이 된다. 어떤 교회에서는 율법주의적인 사람들이 주장하여 주일에 모이는 사람들을 정죄하는 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폄론(κρίνέτω)하지 못하게 하라”하신 말씀은 크리노 즉 정죄하지 못하게 하라는 말씀이다. 그 이유는 먹고 마시는 것이나 안식일 등은 다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신약 성경에서 안식일이란 단어는 56절에 58회 정도이다. 그 중에 단 한번도 안식일을 지키라는 뜻으로 기록된 없다.

 

그나마 대개 복음서에서 사용되었고 사도행전에서 몇 번 사용되었는데 이 모든 경우가 안식일을 지키라는 말로 사용된 경우가 아니고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어떻게 자유하셨는지에 대하여 기록되었거나 안식일에 바울이 어떻게 선교하였는지에 대하여 기록한 것이다.

 

마태복음 9회, 마가복음 10회, 누가복음 17회, 요한복음 9회, 사도행전 9회 그리고 골로새서 1회 나타난다. 그러나 율법으로서의 안식일 제도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율법은 세례요한의 때까지 한시적(限時的)으로 유대인들에게만 주어진 율법이었다. 그러나 그 정신이나 의미에 있어서 좋은 점은 그리스도 안에서도 본을 받아 법있게 쓰면 율법은 선한 것이라는 견해가 바울의 견해였다.

 

율법으로부터 자유

 

율법이나 계명으로부터 우리가 자유하게 되었다는 것은 율법에 대하여 우리가 죽었기 때문이다.

 

(롬7:4)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롬7:6)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율법은 하나님과의 계약인데 이 계약은 우리 이방인들과 하나님 사이에 체결(締結)된 계약이 아니라 모세 시대 시내산 아래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람들과의 사이에 맺어진 계약이었다.

 

그것은 돌에 새긴 율법이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율법에 얽매여서 죽을 고생을 하였다. 그리고 마귀들도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 서기관들을 동원하여 이 율법으로 사람들을 억압하여 이스라엘 사람들의 숨통을 조여왔던 것이다.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까지도 이제는 그 얽매였던 율법으로부터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되 영(靈)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율법이라는 것은 사람이 살아 있을 동안에만 적용되는 것이다. 어떤 율법이라도 죽은 사람에게는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또 살아 있는 날 동안만 거기에 얽매이는 것이다. 죽은 여인은 남편의 법에서 해방되는 것과 같다.

 

죄에 대하여 죽은 자에게 죄가 상관할 것이 없는 것처럼 율법에 대하여 죽은 우리에게는 율법적으로 다시는 요구할 것이 없다. 뿐만 아니라 우리 이방인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과 맺은 계약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고 지금도 없다.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이라면 유대인도 이러한 의문(儀文)의 묵은 것으로부터 벗어나 이제는 영(靈)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을 강조하고 있다.

 

유대인들이 안식일 법이나 기타 다른 율법보다 더 우선적인 율법으로 중시되던 법이 있다면 그것은 할례(割禮)의 법이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 법보다 할례의 법이 더 중요하였기 때문에 안식일이라도 할례의 예식을 거행하였다.

 

유대인들이 의식과 문자(儀文)로 된 율법으로 하나님을 섬길 때는 입술과 의식은 행하면서도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멀어져 있었고 그러한 법을 다 번폐(煩弊)스러워 하고 귀찮아하였다. 그 결국은 외식(外飾)하는 사람들이 되었다. 눈가림으로만 하나님을 섬기는 척 했을 뿐 하나님을 마음으로는 섬기지 않았다.

 

이러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하지 않았다. 그들은 율법을 지키지 않았다가 무슨 저주를 받을까하여 그저 하나님의 엄한 법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에 얽매여서 있는 것으로 여기고 할 수만 있으면 벗어나려고 했고 겉으로는 지키는 척 하고 외식하지만 속으로는 언제나 그 법을 싫어하고 있었다. 이러한 자세로 지키는 종교생활은 오히려 하나님께 무거운 짐이었다. 형식적으로만 드리는 제사야말로 하나님을 역겨웁게 하는 행위였다.

 

아침마다 죄 없는 짐승만 잡아서 죽이는 것은 하나님을 견딜 수 없게 하였다.

 

하나님을 헛되이 경배하는 자들의 신앙은 언제나 이러한 형식주의에 빠지는 것이었다.하나님을 섬기는 자세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이어야 한다. 신령(神靈)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란 마음(心靈)과 진리(眞理)로 드리는 것이어야 한다. 진리도 없이 마음도 없이 시간과 장소에 율법으로 매여서 드리는 형식적인 예배를 하나님께서 얼마나 싫어하시는지에 대해서는 성경 여러 곳에서 책망하시고 있다.

 

예수님께서 안식을 문제로 어려움이 야기 되었지만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폐한다든지 무시하신 경우는 없었다. 예수님께서 과감하게 무시하신 것은 안식일 계명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만들어 낸 「할라카」를 무시하신 것이지 안식일에 대한 계명을 폐하거나 무시하신 일은 없었다.

 

반대로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지키라고 강조하신 일도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예수님뿐만 아니라 사도행전이나 바울 서신을 비롯하여 모든 신약 성경을 다 살펴도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는 어떤 정보를 얻을 수는 없다.

 

사도행전에서 바울이 안식일에 회당에서 설교했다는 기록이 있다.

 

첫 번째 전도 여행에서 바울은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자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앉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얼른 보기에는 이렇게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앉은 것이 곧 바울이 안식일을 지킨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은 바울이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앉은 것을 특별히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이 일이 당연한 것이었다면 특별히 기록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바울이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앉은 사건이 의례적(儀禮的)일 일이 아니라 이례적(異例的)인 일이었기에 이를 기사화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이 그날 회당에서 복음을 전했는데 이는 그야말로 신선한 충격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날 바울의 설교를 들었던 사람들이 더 듣고 싶어했고 따라서 다음 안식일에도 이 말씀을 들려달라고 부탁한 것을 보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이 한 주간동안 기다리다가 마침내 그 다음 안식일이 이르자 온 성이 거의 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하여 모여 왔던 것이다.

 

바울은 첫 번째 선교 여행에서 이러한 반응을 경험한 후 이를 자기 규례로 삼았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른바 바울이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을 자기 규례로 삼은 것은 그 이전에는 그러한 자기 규례가 없었는데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매우 긍정적인 반응을 경험한 이후에는 안식일마다 유대인들이 모이는 곳에 가서 그들을 만나 복음을 전하는 것을 자기 규례로 삼은 것이다.

 

그는 그 후로도 어디를 가든지 안식일이 되면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에 들어가 복음을 전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바울이 이렇게 자기 규례를 삼은 이유는 구원의 은총이 언제나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둘째에 이방인이라는 가기 복음의 신학에 입각한 자기 규례였다고 볼 수 있다.

 

바울이 빌립보에 이르렀을 때는 거기 특별히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이 없었던지 안식일에 기도처가 있는가 하여 찾아 나서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고린도에 이르러서는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강론하여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을 권면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되는데 이러한 기록은 바울이 율법에 의하여 안식일을 지켰다는 기사가 아니고 바울이 자기 규례대로 일단 어디를 가든지 먼저 유대인의 회당을 찾아가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전에 일단 유대인들에게 먼저 복음을 전하는 것을 자기 규례로 삼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일차적으로 유대인들을 만나서 복음을 전하다가 거기서 믿는 사람들이 생기면 그들을 양육하다가 핍박이 일어나면 믿는 사람들과 함께 거기를 떠나서 이방인들에게로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다가 갈 때는 율법 없는 이방인처럼 행동하지 않고 마치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과 같이 유연한 자세를 취하였다.

 

그가 이렇게 유연한 자세를 취한 것은 아무쪼록 더 많은 형제를 얻고자 하는 그의 노력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안식일에 회당을 찾는 이유는 바울이 유대교의 신자로 안식일을 지키기 위하여 거기 가서 앉은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을 만나기 가장 용이한 시간이기 때문에 그날과 그 장소를 이용한 것 뿐이다.

 

이러한 바울의 의향을 모르고 단지 성경에 어떤 구절들만 보면 바울이 안식일을 지키면서 사역을 한 것처럼 보인다. 안식교인들의 오해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바울은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고 말하고 있다.(골2:16)

 

바울이 안식일 문제를 가지고 기록한 곳은 오직 이곳 한 번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내용인즉 이러한 사소한 문제 즉 먹고 마시는 문제나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 문제를 가지고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폄론이란 말은 크리노(κρίνω)라는 말로 표현되었다. 이 말은 그림자와 같은 문제를 가지고 너희를 심판하지 못하게 하라는 말이었다. 이 말씀 뒤에 이어지는 말씀은 “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골2:17)”

 

먹고 마시는 일들이나 여러 가지 씼는 일이나 절기와 월삭이나 할례나 안식일에 관한 지식은 장래일의 그림자에 속한 의식이었다. 안식교인들이 그림자에 속한 지식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정죄하고 폄론하는 것은 크게 잘 못된 것이다. 이 말은 안식교도들을 정죄하려는 뜻이 아니라 반대로 그들이 함부로 교회를 폄론하고 정죄하는 우를 범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쓴다.

 

초대 교회에서도 이러한 오해와 갈등이 있었지만 안식일 교리로부터 자유했던 장성한 사람들이 있었는가 하면 아직 날과 달과 절기를 지키면서 어떤 날을 다른 날보다 더 중요시하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바울을 이들을 믿음이 연약한 자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 보낸 편지에도 이와 같은 말씀이 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 종 노릇 하였더니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 노릇 하였더니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뿐더러 하나님의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그러나 그 당시 사람들은 아직까지 율법과 복음의 참뜻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날과 달을 지키는 것이 자기들 생각에는 하나님을 잘 섬기는 행위로 알았기 때문에 이해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안식교인들은 처음 시작부터 잘 못된 종말론을 주장하다가 급기야는 옛날 초등학문으로 돌아가려 하는 것이다.

 

  초기 기독교의 주일 예배 제도의 진행

 

I. 사도들의 생존 당시

 

(고전16:1-2) 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매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행20:6-7) 우리는 무교절 후에 빌립보에서 배로 떠나 닷새 만에 드로아에 있는 그들에게 가서 이레를 머무니라 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하여 저희에게 강론할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계1:9-10)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골2:16-17)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롬14:5-6) 혹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지니라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II. 사도 시대 니케아 종교회의까지

 

1.사도 요한의 제자요 안디옥 교회의 감독이었던 이그나티우스는 2세기 초의 사람이었다. 그가 남긴 편지들 중에 마그네시아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가 있다. 그 편지에 기록된 구절에는 “그들은 더 이상 안식일을 준수하지 않았고 주일을 준수하는 새 희망을 소유하게 되었다. 이 주일에 우리들의 생명도 그리스도와 그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다시금 용솟음쳤다.”고 기록하고 있다.

 

2.제 2세기 초엽의 기록된 기독교 예배의 지침서인 디다케에 기록되었으되 “그러나 매주 주일마다 모여서 떡을 떼고 너희의 제사가 순결하게 되도록 너희의 범죄를 고백한 후에 감사를 드리도록 하라”라고 기록 되어 있다.

 

3.제 2세기 초엽의 위경적인 기록으로 분류된 프슈도 바나바의 서신에는 “그러므로 우리들은 예수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사신 날인 제 8일을 기쁨으로 지킨다.”

 

4. 주후 112년 경 본도와 비두니아 지방의 총독 플리니우스는 트라야누스 황제에게 보고하기를, “ 그들은 지정된 날에 동이 트기 전에 만나서 교송으로 신과 그리스도께 맹서함으로써 결속하는 관습을 행하였습니다. 이 맹세는 어떠한 범죄를 위한 맹세가 아니라 강도질, 간음, 신앙의 위반을 금하고 기탁물이 요구될 때 그것을 거절하지 않기로 맹세하였습니다.”라고 보고서를 내었다.

 

5.순교자 유스티누스는 3세기 중엽에 󰡔일요일이라는 날󰡕에 모이는 기독교 집회의 예배 순서를 기록하고 있다. 그 순서는 성경봉독, 설교, 기도, 주의 만찬 의식과 봉헌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는 다시 기독교인들이 주일에 모이게 되는 이유를 말하면서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기 시작한 날이면서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날이고 구약의 할례를 받는 날이 제 8일이었다고 강조하고 참된 할례를 받는 날이 바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우리가 육적 몸 전체를 벗어버리는 날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6.고린도의 감독 디오니시우스는 주후 170년에 남긴 기록에서 “오늘 우리는 주의 거룩한 날을 지켰습니다. 이날에 우리는 당신의 서신을 읽었습니다. ”

 

7.리용의 감독 이레니우스는 주후 178년에 로마의 주교에게 부활절이 일요일에 축하되어야 하는지의 여부에 관한 논쟁적인 문제에 관한 편지를 써서 보냈다.“ 주님의 부활의 신비는 주일 이외의 어떤 다른 날에도 축하되어서는 안됩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8.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2세기 말, 3세기 초엽에 일요일의 준수를 지지하는 글을 남겼다. 그러면서 그는 기독교의 주일이 유대교의 안식일과 모종의 유비가 있다고 주장한다.

 

9.터툴리안은 3세기 초엽의 위대한 변증가로서 기독교인들에게 편지를 하되, 우리 기독교인들은 안식일이나 기타 유대교의 축일들과 관계가 없다고 말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의 축일과도 무관하다고 말했다. 터툴리안은 기독교인들이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에 주님 앞에 무릎을 꿇는 일 뿐만 아니라 일체의 근심이나 걱정을 하지 말도록 경계해햐하며 심지어 우리가 악마에게 어떠한 자리도 내어주지 않기 위하여 우리의 사업까지도 중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터툴리안은 주일에 노동을 중지하라고 주장한 최초의 기독교 저자였다.

 

10.오리게네스(알렉산리아 학파의 클레멘스의 제자)는 제 3세기 전반에 살았던 사람이다. 그는 만약 우리가 특정한 날들 즉 주일과 같은 날들을 준수한다는 문제 때문에 반대를 받는다면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날이 다 주님의 날이기 때문에 주님의 날을 항상 지키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11.제 3세기 후반에 기록된 것으로 여겨지는 사도 교훈집 (Didascalia Apostolorum)에서는 주일이 사도들에 의하여 기독교의 예배일로 지정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더 나아가 사도들은 다음을 지정했다고 선언했다. “ 매주 첫날에 예배를 드려야 하며, 성경을 읽고 저녁 소제 봉헌을 올려야 한다. 왜냐하면 한 주의 첫날에 우리의 주님이 죽은 자들 가운데 살아 나셨고 한 주의 첫날에 하늘로 승천하셨으며 한 주의 첫날에 그는 마침내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 쫓아 강림하실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12.카르타고의 주교인 키프리아누스는 주후 253년에 카르타고 제 3 차 교회회의에서 나온 교회 서한에서 난지 8일만에 행하는 유대교의 할례관습을 기독교의 주일 준수를 예시해 주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제 8일은 주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던 날이었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의 할례를 주신 날이다. .... 제 8 일 즉 주일은 전에부터 이미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13.알렉산드리아의 주교 페트로스는 4세기 초에 기록하기를, “우리들은 주일을 기쁨의 날로 지킨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그날에 살아나셨기 때문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14.안식교인들이 종종 기독교의 주일을 부정하게 여겨서 말하기를 이는 콘스탄틴 황제가 태양신을 섬기는 날을 기독교의 예배일로 공포하여 이를 지키는 기독교의 예배일은 잘 못된 날이라고 주장한다.

 

코슨탄틴이란 사람이 주님의 날의 의미를 잘 알고 그날에 휴업하게 했는지는 확언할 수 없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을 믿은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본래 일요일이란 말은 그 근원이 바벨론에서 비롯되어 해와 달과 5 개의 별의 이름을 따서 요일을 만들었는데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일, 월, 화, 수, 목, 금, 토성의 이름을 딴 것이었다.

 

콘스탄틴이 일요일 휴업령을 내린 그 문구를 볼 때 그가 참으로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교회를 위하여 그런 명령을 내린 것이 아닌 것은 거의 확실하다. 왜냐하면 주후 321년 3월 3일에 그가 공포한 말에,“가장 존엄한 태양의 날에”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을 보면 그의 휴업령은 매우 포괄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실제로 313년 밀라노 칙령이 있은 후 기독교는 그리스도에 관한 교리가 본격적으로 논의 되면서 교회가 분열될 조짐이 보이자 325년 그 유명한 니케아 회의를 소집하기도 했었다. 그는 그리스도에 대한 관심보다는 아마도 제국의 분열을 더 우려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일요일은 당시 동방밀교의 태양신의 축제일이면서 또한 상당히 약진하고 있는 기독교도들이 예배하는 날이기도하다는 점을 이용하여 나라가 하나의 질서에 의하여 통제 되기를 희망했을 것이다. 로마에는 일찍부터 동방 밀교가 독버섯 처럼 번져 있었다. 놀랍게도 그들의 주기(週期)와 기독교의 주기가 꼭 같이 7일이었고 공교롭게도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과 동방 밀교의 태양신을 기념하는 날이 일치가 되었던 것뿐이다. 이러한 요일의 형식이 로마까지 언제부터 어떻게 전해졌는지는 확실하지는 않지만 지금은 온 세계가 그 이름으로 사용하고 있다.

 

안식교도인들이 밝히 알아 둘 것은 콘스탄틴의 휴업령으로 인하여 기독교가 태양신을 섬기게 된 것이 아니라 도리어 태양신을 섬기든 사람들의 의식에서 마침내 태양신은 완전히 퇴색하였고 오히려 그들이 심취했던 태양신을 잊어버리게 되었고 오히려 주님의 날로 변화되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기독교인들 중에 아무도 일요일에 태양신을 섬겨야 한다고 믿는 사람은 없다. 온 세계 모든 기독교인들은 일요일을 주님의 날 곧 主日로 부르고 있는 것이다.

 

안식교인들은 콘스탄틴 이전에는 모든 기독교인들이 안식일을 준수하고 있었는데 콘스탄틴 황제가 태양신을 섬기는 날에 휴업하라는 명령을 내려서 결국은 기독교가 제 7일 안식일을 잊어버리고 제 8일 혹은 주중 첫날을 지키게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 안식교도들이 이러한 주장을 하게 되는 것은 이들이 전혀 신학적인 유산을 갖지 못하고 집에서 혼자 교리를 만들어 내었다가 오류를 범하고 수정을 거듭하면서 끝내 정상적인 신학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주일을 기독교의 예배일로 지켜진 역사적 사료를 전혀 접해보지 못했을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우리가 위에서 살펴 본대로 사도들의 시대부터 이미 유대교의 율법이나 할라카에서 자유하게 되었고 예루살렘 총회에서 이미 할례까지 폐한 것과 안식일 같은 문제는 아예 거론조차 되지 않았으며 요긴한 몇가지를 지키면서 스스로 삼가면 잘 될 것이라는 성령과 사도들의 결정을 아직도 믿지 못하는 것이 안식교도들이다.

   

안식일 규례는 영원한 규례인가

 

(출31:16) 이같이 이스라엘 자손이 안식일을 지켜서 그것으로 대대로 영원한 언약을 삼을 것이니

 

안식교도들은 이 구절을 인용하여 안식일을 지키는 언약이 대대로 영원한 언약이라고 주장한다. 성경을 잘 모르는 성도들은 이러한 구절이 성경에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가 안식교인들이 불쑥 이 구절을 찾아서 제시하면 크게 당황하게 된다. 그러나 대대로 영원하게 지키라로 말씀하신 말씀들 중에서 오늘 우리 기독교인들과 상관이 없는 구절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고 있다. 레위 지파 아론의 자손들에게는 대대로 영원히 주어진 규례라하여 제사장 직분과 거기 따르는 응식이 있었지만 오늘 우리에게 는 아무런 상관이 없고 또 그러한 제사장 직분은 오늘날 우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 외에도 대대로 영원한 규례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신약 시대에 와서 폐하진 규례는 많이 있다. 예를 들어 월삭이나 무교절, 초막절 등의 절기도 다 대대로 영원한 규례로 명하셨으나 그것은 그 법의 시효가 만료 되기까지 계속되어야 할 규례라는 뜻이지 참으로 다함이 없이 문자적으로 영원한 규례는 아니었던 것이다. 대대로 영원히 지키라는 말씀은 일회적인 규레가 아니고 자손들 대대로, 혹은 한 두해만 아니고 오랫동안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그 율법과 규례의 시효가 만료되고 나면 그 후시대에 사는 사람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방인들 중에서 주님께로 돌아 온 사람들에게는 율법의 멍에를 두어 괴롭게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예루살렘 총회의 결정이었다.(행15:19-29)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말고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 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가하니 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니라 하더라 이에 사도와 장로와 온 교회가 그 중에서 사람을 택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으로 보내기를 가결하니 곧 형제 중에 인도자인 바사바라 하는 유다와 실라더라 그 편에 편지를 부쳐 이르되 사도와 장로된 형제들은 안디옥과 수리아와 길리기아에 있는 이방인 형제들에게 문안하노라 들은즉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시킨 것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혹하게 한다 하기로 사람을 택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인 우리의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너희에게 보내기를 일치 가결하였노라 그리하여 유다와 실라를 보내니 저희도 이 일을 말로 전하리라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가한 줄 알았노니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 할지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 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하였더라”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어떠한 자유가 주어졌는지를 모르는 안식일 교인들은 다시 성경을 자세히 읽어 보아야 할 일이다. 교리를 만들어 가르치는 사람들이 읽으라는 곳만 읽을 것이 아니라 성경 전체를 자세하게 읽되 열린 마음을 가지고 옳게 들리는 진리의 소리에 귀를 막지 말고 진지하게 성경을 읽게 되면 어렵지 않고 진리의 지식에 이르게 될 것이다.

 

안식교가 안식일을 주장하게 된 것은 주님 재림에 대한 예언이 빗나가게 되자 자신들의 조직관리를 위하여 궁여지책으로 고안해 낸 하늘 지성소 조사 심판설과 안식일 교리를 가지고 하나님의 교회를 혼란스럽게 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에 대한 그들의 무지와 함께 상당한 억지가 그들의 교리 속에 혼합되어 있지만 그 조직 속에서 굳어진 사람들은 이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교회사와 교리사와 신조사 그리고 지금까지 내려온 조직신학적인 소양도 전혀 없다는 것을 스스로 드러내 보이고 있다. 이들은 단순한 논리와 부분적으로 잘라 낸 성경 구절을 인용하면서 조직원들을 집중적으로 훈련하고 있기 때문에 평소에 아무런 준비가 없던 기성교회 성도들은 이들의 이론에 한 번 흔들리게 되면 신앙적인 자긍심을 상실하고 상당한 충격을 받게 된다.

 

한편 우리가 안식교인들에게 배워야 할 부분도 있다. 그들의 그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지조라든지 절제 운동과 식품 규례의 상당한 부분은 우리가 본 받아야 할 것이다. 사회적인 면에서 은둔과 도피의 부정적인 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나 개인들이 도덕적으로 경건하게 살려고 하는 자세는 역시 기성 교회 성도들이 본 받아야 할 점이다.

출처 : 내 사랑 중국 ♡ MyLove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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