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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구약성서에 나타난 相生的 민족통일 고찰 (방석종)

수호천사1 2011. 3. 11. 06:57

구약성서에 나타난 相生的 민족통일 고찰

방 석 종 교수 (감신대/구약학)

역사는 일찍부터 정치 영역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다. 이런 역사틀 속에서 [민족의식과 통일]은 이른바 '정치적'이란 형용사 없이는 불러질 수 없으며, 따라서 정치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구약시대에 있어서 이스라엘 민족의 형성과 정치의 왕도(王道)는 고대 중동의 정치 형태와 평행되면서도, 이스라엘의 야웨의 신앙은 그런 보편적인 정치를 독특하게 발전시켜서, 인류에게 모형화 또는 전형화(典型化)를 시켰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이제부터 이스라엘의 왕국 이전부터 있던 민족과 하나님 통치의 사상과 왕국 이후에 첨가된 정치적인 동기들을 고찰하도록 하겠다.

 

§ 왕국이전의 민족과 하나님 통치에 관하여 : 이스라엘의 최초 역사는 애굽에서의 탈출(출1-15)에서 시작하여 광야방랑(출 16-18; 민 10-34), 그리고 그 사이에 시내산 율법계시 사건(출 19-민 10:10)이 끼어진 도식에서, 억압으로부터 구출/자유, 진정한 자유를 찾기위한 조건으로 제시되는 시내 계시/계약이 서술되고 있다. 여기에 최초의 하나님의 자유 의지의 선택과 인간을 자유케하는 하나님의 주권 통치가 실현되었다. 출애급 해방과 자유 그리고 계약 체결 이전에 땅과 후손의 약속을 받았던 족장들의 역사(창 12-50)는 하나님의 항구적인 미래의 약속을 보여주고 있다. 이와같이 출애굽과 창세기 족장 역사는 내용적으로 이스라엘 민족에 제한되었지만, 태고 설화(창 1-11)에는 인류사와 하나님 백성의 상생(相生 또는 共生)의 이야기가 설화적인 형태로 묘사되었고, 신학적인 해석을 붙이고 있다.

 

민족 기원에 관해서 말하자면, 이스라엘은 창 10장의 노아의 세 아들들 셈, 함 그리고 야벳 세대에서는 나타나지 않다가, 창 11:10에서 셈 부류의 지체인 데라에게서 나타난다 : 아브라함, 나홀, 하란이 데라의 아들들로 계보화되었으며, 북부 셈족에 속한 이들이다. 아브라함은 셈족의 대표자로서 지역적으로 광대한 지역과 관계를 맺는다 : 예컨대 상부 메소포타미아, 북부 시리아, 아라비아 반도, 팔레스틴 남동부, 요르단 동부와 서부 등이다. 이런 셈족 계열 옆에 비셈족 계열이 나중에 도 추가된다.

 

이스라엘이 영토, 왕, 성문법을 갖지 않았던 상태에서, 그들은 유목민적 장막촌에서 살았고, 공동 연대의식 가운데, 강권적인 명령이나 억압적인 지배보다는 권유와 설득을 통해서 연장자의 말을 따랐다. 이런 씨족 대표자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예배 제단을 설립하여, 영적인 지도자가 되었다. 이런 3 기능을 한 인격 안에 통합하였다. 이런 신앙 형태는 출애굽 사건 후 시내산에서 받은 계명과 율법을 순종하는 야웨 신앙으로 확대/발전하였다. 족장신앙과 야웨신앙 형태는 이스라엘을 점차 민족 공동체로 성장시켰다. 말하자면 하나님이 족장에게 약속하신 "땅과 후손"이 출애굽 사건 후 "가나안 영토와 이스라엘 민족"으로 구체화되면서 하나님의 주권 통치의 사상과 고대 중동 왕권의 통치 사이의 긴장이 생겼으며, 결국 사울 다윗 솔로몬 통치 시대에 이르러 하나님의 주권 통치는 세속왕권 통치로 이양되었다. 이런 왕도 통치는 솔로몬 사후 남북 분단을 고착화시켰으며, 남과 북의 민족의 분열은 심화되었다. 특히 주전 8세기 중엽 예언자들은 앗수르의 정치적인 위협 아래서 옛 시온-다윗 시대의 전통이 흔들리는 것을 보았고, 왕도 통치권의 한계 상황을 의식하였다. 따라서 예언자들은 고대 출애굽/광야 생활과 시내 율법을 통하여 남북 민족의 변화와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하는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주권 통치를 설교하였다.

 

§ 왕국 이후의 정치 상황 : 비교적 다른 강대국들이나 이웃나라보다 뒤늦게 국가 형태를 이루었던 이스라엘은 다윗 제국을 기점으로 일대영화를 누릴 수 있었다(주전 1010-970년). 인간 왕도의 성립은 주변 국가들의 항구적인 위협과 침공 아래서 필요불가결했다. 그러나 이런 다윗 국가는 민족적으로 남부 지파와 북부 지파의 두 요소들이 분리되었으며, 지역적으로는 각 지파들의 독립적인 생존 영토들이 분할되었기 때문에, 다윗 국가는 처음부터 민족-영토적인 분리의 요소들로써 형성될 수밖에 없었다. 다윗은 북부 지파 사울왕과의 대립 관계를 벗어나지 못하였기 때문에, 조건부 계약 통치를 이스라엘 장로들로부터 위임받았을 뿐이다. 이런 위임은 다윗왕 당대에만 가능할 뿐, 그의 후계자에게는 세습시킬 수 없었다. 그러나 다윗이 남북 통치를 합법화시켰던 것은 다윗이 예루살렘으로 북 왕국의 법궤를 옮겨온 사실이다.

 

이제부터 정치적 의미를 가진 시온-다위 전통은 이스라엘이 광야 생활중 시내에서 받았던 율법궤를 받아들임으로써 종교적인 의미도 갖게 되었다(예를 들면 시; 68:18b<17절> : "주께서 시내에서부터 성소<예루살렘/시온> 안으로 진입하신다."). 이런 두 전통들 시온 전통과 시내율법전통은 다윗 통치 이후 항상 한 쌍을 이루는 유기체가 되었지만, 신학적으로는 정치적인 메시아 왕국의 도래보다는 하나님의 현현으로서 율법 수행이 우세하게 성찰되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남북 민족이 하나가 되는 길은 시온 전통에서보다는 시내 전통의 율법 순종에 따르는 생활의 변화에서 가능한 것이다.

 

그럼에도 남북 왕들은 시내 전통 보다는 각각 예루살렘 전통과 사마리아 전통에 서서 정치적인 통일을 추구하는 길로 들어섰으며, 하나님 주권 통치 영역에서 벗어났다. 여기서 필자는 앗수르 대국이 주전 750년 신흥 세력으로 등장하기까지 930-750년 기간의 남북의 분단과 그들의 정치적인 투쟁들을 다루겠다. 여기서 주목할 수 있는 것은 주전 930-750년의 근 180년 동안은 고대 중동국가들이 시리아와 팔레스틴에 정치적인 영향을 행사하지 못했던 시기였다는 점이다. 이런 평화로운 시대에 이스라엘과 유다는 경쟁 의식에 사로잡혀 주도권을 쟁취하기 위해 전쟁을 빈번하게 일으켰다.

 

분단 민족들의 전쟁 : 이미 위에서 제시했던 바와 같이, 930-750년에 있던 남북의 왕들은 각기 3 가지로 분류되는 정치사적인 사건들과 관계되었다 : 첫째, 영토 분쟁과 동족 상잔의 남북 전쟁의 주역들이다. 예를 들면 르호보암과 여로보암, 베사, 아사 등이다. 둘째, 북왕국 주도하의 통합 시대에 있어서 오므리, 아합 그리고 예후 왕조이다. 셋째, 남북의 경제 공영시대에 있어서 여로보암 2세와 아사랴이다.

 

1. 르호보암과 여로보암(주전 930-914년; 930-910년)

 

이 두 왕은 남북 분단의 책임자들이다. 르호보암은 북왕국의 여로보암이 뉘우치고 다시 돌아올 것이라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던 반면에, 여로보암은 남왕국 르호보암이 분단의 책임을 져야 한다고 했다(왕상 11:29 이하; 12:16). 그는 남왕국 르호보암이 야곱과 요셉 조상신앙으로 돌아와야 한다(신 33:13 이하)고 주장했다. 그리고 북왕국은 유다 지파에 속했던 베냐민 지파를 에브라임 북쪽 지파에 귀속시키기 위해 일생동안 전쟁을 되풀이 했다. 그러나 그런 남북 전쟁으로 인해 남북 왕국은 다윗 때에 얻어 놓았던 아람-시리아 영토를 상실했고, 암몬이 독립하여 떨어져 나가게 했으며, 에돔에게 독립을 허용했던 것이다. 이웃을 향했던 공격 전쟁이 수비 태세로 위축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베사(909-886)와 나답(910-909)

 

베사는 나답왕(이스라엘의 잇사갈 출신)이 블레셋인과 전투 도중에 있던 나답을 깁돈에서 살해하고 혁명을 일으켰다. 그후 베사는 실로 성소의 아히야 선지자 후계였던 예후 벤 하나니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았다(왕상 16:2). 베사는 적에 대한 이적 행위를 저질렀던 장본인이다.

 

아사(주전 910-870)와 베사(북왕국, 주전 909-886)

 

이 기간은 북쪽의 다메섹이 북이스라엘을 정치적으로 능가했던 기간이었다. 그럼에도 북이스라엘 베사는 장기 집권을 하면서도 남왕국 아사와의 베냐민 지파 영토 쟁탈전으로 국력을 소모시켰다. 그러자 북이스라엘 베사는 다메섹의 벤하닷왕과 동맹을 맺어 아사왕을 치려고 햇다. 그러나 아사는 외교적인 행동으로 응수하여 다메섹과 이스엘의 전쟁 동맹을 단절케 하였다. 아사왕은 다메섹을 재물로 매수하였던 것이다. 동족 끼리 반목하면서 강대국을 위해 이적 행위를 자초한 결과였다. 이런 사례는 훗날 유다의 아하스(주전 736-716)가 시리아-에브라임 전쟁 때 앗수르를 개입시켜 이스라엘의 베가를 공격하여 패배케 하였던 역사와 비슷하다(사 7:1-9; 10-17장 참조).

2. 북왕국 주도하의 통합시대

 

오므리 왕조(주전 885-841)는 반세기 가깝게 지속되었다. 남유다의 다윗 왕조에 버금가는 수완을 보인 오므리 왕은 군사 동맹과 결혼 정책을 통해서 남북의 화해를 준비하엿다. 그가 신명기적인 역사가에 의해서는 부정적으로 평가받았지만, 그는 정치적으로는 유다를 자기 편으로 흡수하여 협력체제를 구축하였다. 오므리의 아들 아합은 아버지 오므리가 준비했던 남북의 평화 조약을 실천에 옮겼으며, 유다의 왕 여호사밧이 친히 이스라엘을 위하여 전투에 종군케 하였고, 여호사밧은 이스라엘 공주 아달랴를 며느리로 맞이하였다. 군사 동맹과 결혼 정책을 통해 남북의 평화 통일을 이룩케 한 것이다. 그러나 북이스라엘이 주도권을 행사하였고, 유다가 양보함으로써 평화 통일이 이룩된 것이다.

 

예후 왕조 : 오므리 왕조의 마지막 왕 요람(852-841)과 다윗 왕조의 아하샤(841)를 살해하고 왕으로 등극했던 예후는 근 백 년에 가까운 왕조를 세울 수 있었다(874-752). 주전 8세기 중엽 앗수르가 신흥 강대국으로 부상하기 전까지 그의 왕조는 존속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다윗 왕가의 많은 왕자들을 무참하게 죽여가면서(왕하 11:1) 통일을 유지하려고 했다. 바알 종교를 퇴치하겠다는 명분을 내걸고 야웨 신앙의 예언자들 엘리사와 요나답 벤 레갑의 호응도 받았다. 그럼에도 예후는 이런 하나님의 사람들을 자기 편을 위해 정치적으로 이용하였다. 이런 예후의 정치와 밀착해서 하나님의 예언을 향상시킬 수 있는가라는 문제가 새로이 생겼다. 그러나 예언자의 활동은 저차원적인 힘이요, 온전치 못한 덜 신학적인 성격을 띈다고 볼 수 있다.

3. 남북의 경제공영시대

 

예후 왕조의 말기까지만해도 아직 강대국의 정치적인 위협이 나타나지 않았다. 이스라엘과 국경을 접하고 있던 다메섹은 자기 뒷편 앗수르의 국력을 의식하고 약소 국가들을 함부로 건드릴 수 없었던 때였다. 이런 기회를 이용하여 여로보암 2세(782-753)는 르호보암과 여로보암 시대(930-910년)에 상실했던 동부 요르단을 탈환했고, 암몬과 모압을 위압할 수 있었다(암 6:2). 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번영을 구가하였다. 그러나 예언자들(예: 호세아, 아모스)은 그 당시 향락 생활과 도덕적인 타락과 부패에 대해 질책을 가하였다. 예언자들 눈에는 "국력 신장"과 "경제 번영"이 남북 통일을 위한 일종의 준비 단계로 보이지 않았다. 그보다 더 화급했던 것은 경제 번영으로 인한 대부분의 타락과 부패에서 벗어나는 일이었다. 여로보암 못지 않게 남유다 아사랴(웃시아, 주전 768-740)는 도시들을 축성하였으며, 두로와 시돈을 통해 중개 무역을 하였다. 군사 제도를 재정비하면서, 경제적인 번영을 가져왔다. 그러나 이사야 예언자는 국가 번영과 경제적인 부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불공평과 부도덕한 사회에 대해서 준엄하게 질책하였다.

이상으로 우리는 남북의 왕들이 통일보다는 남북 영토 분쟁으로써 국력을 소모시켰던 일, 남북의 통일이 군사력과 경제력에 근거한 어느 한 나라의 주도권 아래서 가능했던 일 그리고 경제 번영은 빈부의 양극화 현상으로 인한 민족의 내적인 균열과 부도덕을 가져왔던 것을 고찰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은 바빌론과 앗수르의 포로가 되어 이국에 흩어져 살면서도 여전히 남북의 갈등과 분단을 자처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들은 "민족적인 화해와 통일"은 남북의 어느 왕권 통치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의 통치에서 가능하다는 것을 전망하게 되었으며, 하나님의 심판 다음에 올 약속에서 메시아적인 왕국을 기대하기에 이른다. 이스라엘 백성은 옛날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왕이 되셨던 시절을 회고하면서 포로된 땅에서 하루바삐 고국으로 돌아가서 기쁘게 서로 웃으며 살 날을 고대하였다. 변화된 생활로 다윗 왕조를 세울 것을 기대하면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시내산에서 주셨던 율법을 순종하리라고 다짐하였다.

 

§ 하나님의 주권 통치와 새 계약 :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점유하는데는 3 가지 절차가 있었다 : 첫째는 애굽의 정치적인 억압으로부터 벗어나는 자유(Befreiung, Liberty)요, 들째는 가나안에서 누릴 자유(Freiheit, Freedom)이다. 그런데 이런 영구적인 자유는 하나님의 율법/계약의 준수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억압으로부터 벗어난 "자유"와 땅을 점유하고 생활하는 "자유" 사이에 꼭 있어야 할 자유하는 자의 "율법 준수"의 과정은 "하나님의 통치 구역"으로서 해석되었다. 이제부터 이스라엘 백성은 이런 하나님의 율법(토라)의 계시를 통해서 하나님에 의해 압류(押留)되었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인간이 그 마음에 하나님의 뜻을 지닌다. 하나님이 기적을 통해 인간으로 하여금 완전한 순종을 가능케 한다는 인간상의 윤곽이 정해졌다(렘 31:31-34; 32:37-41 참고). 고로 시내전승 단락과 신명기에서 하나님의 율법이 모세에게 주어질 때 상황은 언제나 불 가운데서, 온 산이 진동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강림하셔서 백성을 두렵게 하는 하나님의 현현 때문에 모세를 통한 율법 계시가 있었다(출 19:11-12, 17-25; 20:18-26, 특히 18-22; 24:1-3; 신 5:25-31 참고; 시 50:2-3 비교). 이런 율법 계시는 예언자들에게서 각기 다르게 표현된다. 예컨대 예레미야는 '영'의 표현을 쓰지 않고, '계약'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 반면에, 에스겔은 '계약' 표현 없이 '영'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1/ 하나님과 인간과의 정상화는 오로지 이런 계약과 영의 임재에서만 가능하다.

 

반신성(反神性)과 부자유(不自由)에서 탈피하여 그 본래의 자리로 돌아오는 것이다(사 7:3; 호 3:5; 14:2 이하). 왜냐하면 자신의 길을 규정하는 것은 자신의 능력에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누구나 자신은 자신의 범죄에 의해 더럽혀진대로 존속하고 있으므로(렘 2:22), 인간 영역 및 인간 정치 영역에서부터 새로운 공동체로 옮겨질 때 인간의 마음과 정치 상황은 변화된다. 에스겔은 역사 행위 속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민족의 단절을 곧 죽음으로 보았다. 즉 그들이 옛 출애굽 전통, 시내 전통, 다윗 전통의 "외적인 기구"를 통해서만 구원을 기대하는 한, 죽음의 지대에서 벗어날 수 없었음을 알았다. 남의 땅, 남의 나라에서 그날 그날 살아가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어떤 강대국의 보호를 받고, 강대국의 세계적인 지배 세력에 의존하는데서 메시아의 나라는 실현되지 못한다. 그래서 예레미야와 에스겔은 현존하는 세鶂들에게 메시아 대망을 연결시키지 않았으며,/2/ 제2 이사야도 다윗의 약속을 이스라엘이 열방들의 방백(나키드, 사 55:3-4 :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에게 영원한 언약/계약을 세우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니라 내가 그를 만민에게 증거로 세웠고 만민의 인도자와 명령자를 삼았었나니")이 될 것이라고 선포했다. 이것은 '민주화'(Demokratisierung)의 특수한 내용으로 해석된다.

 

그렇다면 다윗의 약속은 어떤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일까? 다윗 전통에 근거한 메시아의 대망이 유다와 이스라엘 두 민족이 하나가 될 것이라는 약속이라면,/3/ 이스라엘이 유다에게 흡수되는 통합인가(겔 37:19)?/4/ 또는 유다의 왕 다윗이 인격연합체제(연방체제) 아래서 유다와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것인가(겔 37:22-24)?/5/ 이런 정치적인 위상(位相)이 과연 이스라엘 민족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가? 여기서 우리는 인간 통치 영역의 구 다윗 전통과 하나님 통치 영역의 새로운 메시아 전통과 시내 전통을 구별하여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미 다윗 왕국은 없어졌으며 다윗 전통은 그의 효력을 상실하였다. 그러나 이런 옛 기구가 극심한 고통과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하게 될 때, 새 출애굽, 새 계약, 새 다윗으로 살아나게 된다. 지도자와 백성들은 각기 마음 속에 야웨의 경외함을 둔다(렘 32:39 이하).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 함은 곧 율법의 순종이요, 이런 예언자의 정신은 시내전승 단락에 나타난(출 19:11, 17-25; 20:18-26 참조)경외와 일치한다.

 

여기서 우리는 시온-다윗 전통보다 시내의 계약 전통이 더 우세함을 인식할 수 있다. 인간이 외적인 정치적인 형태에서부터 율법을 순종하는 새로운 공동체로 옮겨질 때, 메시아적인 세계의 도래를 볼 것이다. 메시아적인 세계는 어떻게 실현되는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예언자들이 구체적으로 선포하였다 : 예레미야와 에스겔에게서는 이런 메시아 왕국을 위한 자연적인 변화나 낙원적인 풍요 또는 신화적인 낙원 상태/축복 동산이 없다. 다만 황폐해진 땅의 생활 조건의 정상화에 대한 기대 뿐이요, 외적인 상태만큼(겔 36:34-35) 야웨의 구원 사건은 사람 내부에서 성취될 것이다. 즉 굳은 마음이 영으로 말미암아 부드러운 마음으로 변한다(겔 36:24-28 참고); 사람들은 귀국하여 예루살렘으로 순례의 길을 행하며(렘 31:6), 기뻐하는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거리에 가득할 것이다(렘 30:18 이하; 33:10 이하). 그리고 여호와의 선의의 눈빛과 긍휼과 자비가 넘치는 거처가 될 것이다(렘 24:5 참고).

§ 요약 : 앞에서 우리는 두 종류의 자유, 즉 억압에서부터 벗어나는 자유(Liberty)와 약속받은 땅에서 누릴 지속적인 자유(Freedom) 그리고 이런 두 자유 중간에 있었던 시내 (산) 계약/율법을 받았던 사건을 고찰했다. 억압에서부터 벗어난 자유, 아직 시내에서 하나님의 율법 계시를 받기 전에 있었던 자유는 유다와 이스라엘 두 민족과 국가들의 정치사 영역에서 반복될 수 있었다. 이것은 세속적-정치적인 의미의 자유이다. 즉 억압에서부터 벗어난 일차적인 자유(Liberty)에 속한다. 예컨대 블레셋의 위협에서부터 이스라엘을 보호하기 위하여 이스라엘을 유다로 흡수시켰던 다윗 왕조, 정치적인 우세 속에서 유다를 흡수시켜 통합 국가를 이룩했던 오므리와 예후의 북이스라엘 왕조는 한 왕조의 주도 하의 통합 시대로 특징지어지며, 남북 분단 후 르호보암과 여로보암, 베사와 아사왕은 동족상잔의 남북 전쟁과 영토 분쟁자들이었으며, 여로보암 2세와 아사랴는 남북의 경제공영 시대를 이룩하였으나, 사회의 불평등, 도덕의 타락과 부패를 초래하게 했으며, 하나님의 공의를 상실하게 했다.

 

주전 930-750년의 180년이란 기나긴 평화시대가 지속된 동안, 이스라엘과 유다의 일련의 정치적 사건들은 남북의 반목, 질투, 배신행위/이적행위와 군사/경제 경쟁으로 점철되었을 뿐, 두 나라의 영구적인 공존/상생과 통일에는 실패만 거듭했다. 남북 두 국가는 몇가지 조상들의 신앙적-문화적인 유산/유업들, 즉 아브라함을 중심으로 계보화된 광활한 중동 영토권, 유목민 특유의 자발적-종교적인 공동체와 가족-형제 개념으로 이루어진 민족 개념 그리고 모세가 주었던 두 개의 자유, 억압으로부터 벗어난 자유(Liberty)와 시내율법·계명을 순종하는, 영구적인 내적인 자아의 자유(自我의 自由, Freedom)인데, 이런 영토, 민족 그리고 두 개의 자유(Liberty and Freedom,Befreiung und Freiheit)는 다윗의 대국을 전후했던 역사와 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주전 722년 망했던 역사, 근 300년 동안 시온-다윗 전통을 형성했지만, 결국 그 효력을 상실하였다.

 

그 후 포로기에는 이런 3 가지 요소들--영토, 민족 그리고 자유--은 보다 내적인 깊이를 가진 시내전통으로 확대되었다(출19-민10:10 시내전승 단락). 정치적인 인간 통치에서 시내율법·계명을 중심한 하나님의 주권 통치가 "메시아 왕국"으로 기대되었다. 그러면 남북 두 국가와 민족이 대립에서 벗어난 서로 함께 상생(相生)/공생(共生)할 수 있을까? 상생/공생의 원인자(原因者)는 누구일까? 그는 애굽에서 탈출한, 억압에서 벗어난 군단에게 두번째 자유(Freiheit, Freedom)를 위해 시내 율법을 계시하는 분이다.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누릴 자유를 위해 율법 순종을 명령하는 분이다. 이때에 새 다윗국가(겔37)·메시아 왕국의 통치상과 백성됨이 구체화 된다: (1) 계명과 율법에 근거하여 자유케 된 자들은 다른 민족의 정신적인 지도자/생활의 모범자(사 55:3-4 : "나기드", 귀인)요, 사회를 "민주화"시키는 이들이다. (2) 이들은 현실적인 정치 세력 또는 다윗 계의 여호야긴/시드기야 혹은 스룹바벨을 메시아로 희망하지 않았다(렘 22:24-30). (3) 이들은 환상적으로 낙원적/신화적인 풍요를 말하지 않으나, 사실적으로(real) 황폐해진 땅의 생활 조건에 정상화를 생각하며, 영을 받은 부드러운 마음, 율법을 순종하며 기쁘고 즐거운 생활을 하는 귀향자들의 예루살렘 성전 순례를 말한다.

메시아 왕국의 실현과 우리의 현실: - 우리 현실의 구약성서 해석 적용 - 이상에서 고찰된 관점에 근거해서 우리는 우리의 정치적인 현실과 통일에 대해서 대안들을 제시할 수 있겠다. 강대국 중국과 일본에 나란히 서서, 우리는 아세아권을 향한 정신적인 지도자/생활 모범자로서 민주화된 삶을 실현시켜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외쳤던 "민주와 통일"은 정치적인 이해 관계에서 작성된 정치적인 구호였다. 기아 선상에서 가난의 위협에서 벗어나는 자유(Liberty)는 달성되었으나, 민주화를 위한 자유(Freedom)는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폭력과 완력 일변도의 민주 운동, 자신의 부도덕성과 불성실성을 도외시하고 상대방을 매도하며 적대시하는 양 정당들, 이들은 억압과 민생고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자유만 주장할 뿐, 진정 양심과 도덕의 법, 인간존중, 항구적인 민주 의식을 마음 속에 심지 않은 채, 구태의연한 "신파조"의 민주·통일이라는 슬로건을 연발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북에서는 '주체성'의 이념을 우상시하고, 남에서는 사회복지를 우선시하는 "낙원적인 풍요"를 꿈꾸고 있다. 그러나 "상생적·공생적 민족 의식"은 이런 "정치-사회적인 메시아"사상을 받아들일 수 없다. 본질적으로 "민족과 통일"은 외적인 자유(Liberty, 억압에서 방금 벗어난 )에서가 아니라, 시내계명을 준수하는 내적인 자아의 자유(Freedom)에 입각해서, 1945-1950년 이후, 이데올로기로 분단된 인간성을 회복하고 서로의 고향을 순례하는 것이요, 황폐해진 도시와 가옥을 수축하여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으며, 오염된 자연을 소생시켜 안전하고 즐거운 생활을 할 수 있을 때, 남북이 다시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정치 지도자들이 일차적인 자유(Liberty)뿐만 아니라, 이차적인 자유(Freedom)를 위해 " 민주 헌법"을 준수하고 백성의 형제로서 "평등의식"을 생활화 할 때, 통일 국가의 길이 열릴 것이다.

註)

1. G.von Rad, 허혁 역, {구약성서신학} 2권, 1975(1977), p.212 참고.

2. G.von Rad, 상게서, p. 269에서 보면, 유다의 종말과 함께(주전 597-587년 사

이) 정치적인 지배자의 합법성이 불투명해졌으며, 포로로 끌려간 여호야긴이나

시드기야에게 메시아 희망을 걸지 않았다;렘 22:24-30 참조.

3. 겔 37:16-28. 특히 16, 19, 22-24절.

4. 겔 37:19 : "에브라임 막대기를 취하여 유다 막대기에다가 붙이라!"

5. 겔 37:22, 24 : "(22)그 땅 이스라엘 모든 산에서 그들로 한 나라를 이루어서

한 임금이 모두 다스리게 하리니 그들이 다시는 두 민족이 되지 아니하며 두 나라로 나누이지 아니할찌라....(24)내 종 다윗이 그들의 왕이 되리니 그들에게

다 한 목자가 있을 것이라."

출처 : 내 사랑 중국 ♡ MyLove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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