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으로 하는 선교시대
하화평 목사
2010 세계선교전략회의(NCOWE Ⅴ)가 주님의 은혜 중에 마쳤다. 성과와 함께 숙제를 남긴 대회였던 것 같다. 세계 선교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생각하면서 한국형 모델을 발견하는 중요한 대회였다. 이러한 계기를 통하여 앞으로 다가오는 남은 시대에 한국교회가 선교현장을 어떻게 섬기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겠는가를 늘 고민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무엘 헌팅튼(Samuel Huntington) 교수는 그의 저서 ‘문명의 충돌(The Clash of Civilization)’에서 “냉전시대 이후의 전 세계는 문명의 재편이 일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 19세기는 힘에 의한 재편이 이루어졌고, 20세기는 이데올로기에 의해 재편되었으며, 21세기는 문명의 충돌에 의해 재편된다는 것이다. 서구 문명과 정통주의 슬라브 문명, 라틴아메리카 문명, 중국유교 문명, 이슬람 문명, 힌두 문명, 일본 문명 그리고 아프리카 문명간의 거대한 충돌이 일어날 것이라 예상했다. 헌팅튼의 이러한 주장이 다소 무리가 있는 점도 있었지만 911테러가 발생하고 나서 이러한 이론에 동의하는 사람도 많아졌다. 이러한 현상들은 선교에도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문명은 종교와 깊은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창의적 접근지역이나 기독교가 약한 지역에서의 선교는 점점 더 어려워지고 그 속에서 마찰은 점점 더 많아지게 될 것이다.
이러한 시점에서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선교방법을 하나 소개하고자 한다.
홍콩에 가면 도풍산이 있다. 노르웨이 출신의 칼 라이헬트 선교사는 절과 불교신자가 많은 이 지역에 복음을 전하면 홍콩섬과 광동성 일대에 복음이 쉽게 확산될 것을 생각하고, 매일 기도하였다. 어느날 그는 도풍사로 찾아가서 2년 동안 중국어를 배웠다. 그리고 불교에 관한 지식을 도풍산 근처에서 승려들에게 배우기 시작하였다. 이 일은 당시 중국인과 분리된 선교사 주거 지역에서 살면서 하루의 정해진 시간 동안만 중국인들과 사역을 했던 대부분의 선교사들의 눈에는 이상한 행위였다.
7년 동안 그는 매일 승려들과 대화하면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으나 그리 쉽지는 않았다. 수 년 동안의 선교사역이 가시적인 열매를 맺지 못한 상태에서 라이헬트 선교사는 자격박탈 위기를 맞게 되었고, 본국 선교본부로 부터 세 번이나 소환 명령을 받았다. 그러던 어느 날 주지스님이 선교사님에게 하나의 제안을 했다. “우리가 그동안 당신에게 불교의 사상에 대해 알려주었다. 이제는 당신이 알고 있는 기독교를 나에게 알려 달라.”는 것이었다. 그는 오전에는 불교의 설법을 들었고, 오후에는 기독교 교리에 대해서 강의를 했다. 그렇게 10년이 지난 뒤 주지스님이 개종을 했고, 도풍사 70여 명의 모든 스님들이 집단 개종을 하고 세례를 받았다. 지금 도풍산에는 신학교가 세워져 있고, 600여 명의 아시아권 신학생들이 수업을 받고 있다.
덴마크 건축가에 의해 타종교인들에게 이질감을 없애고, 누구나 편히 와서 복음을 듣도록 하기 위해서 현재 교회 예배당이 8각형 불교식 건축물로 지어졌다. 그래서 불교의 탁발승(=시주승)들이 시주를 위해 길을 나섰다가 들리기도 하고 쉬어가기도 하면서 교제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1930년에서 1949년 사이에는 200여 명의 승려들이 개종하는 열매를 맺었다. 선교사는 기독교의 진리를 현지인들에게 그들의 삶에 맞게 설명해 내어야 한다. 기독교가 그들이 믿고 있는 삶과 진리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믿고 있는 진리를 기독교 진리로 온전하게 완성해 줄 수 있도록 설명해 내야 한다.
중국에 들어온 서구 선교사들이 자신의 문화와 경제에 대한 우월감 속에서 현지인들에게 자기 방식을 주입하고자 했을 때, 라이헬트 선교사는 당시 선교사들의 관심 밖에 위치했던 불교 승려들을 찾아가 그들과 같이 살며 그들이 귀하게 여기는 진리에 대해서 먼저 배우고 이해하려고 했다.
지금 이 시대에 도풍산의 기적이 일어나기를 간절히 기도해본다.
삶으로 보여주는 선교!
그것은 좀 더딘 것 같고, 힘든 것 같고, 때로는 우리의 마음에 차지 않지만, 선교사의 설 자리가 점점 좁아지는 이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사랑으로 세상을 변화시켜 나가는 타민족, 타문화권 선교방법이 되어야 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것처럼 중요한 것은 ‘사람’이다. 사람이 변화되는 것은 결국 강압에 의한 것이 아닌 말씀의 능력, 기도와 인격적 만남에서 가능한 것이다. 승려가 변해 그리스도인이 되면 그의 겉모습도 결국 기독교의 모습으로 스스로 변화되어 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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