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영원한사명)

[스크랩] 순교 아니라 대화하는 선교라야 (방광현)

수호천사1 2011. 2. 4. 09:23

순교 아니라 대화하는 선교라야
현지인에 군림하지 않는 대화의 선교 필요

 

 

아직 이슬람 지역에서 죽은 김선일 씨와 샘물교회 교인들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교회 밖에서는 정부가 들어가지 말라는 곳에 선교랍시고 들어가서 긁어 부스럼 만들어 죽음을 자초했다며 싸늘한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교회 내에서는 '순교'라며 애도하는 이들이 많았다.

예수가 죽어 부활 승천하며 남긴 마지막 유훈이 '땅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라'는 것이었다. 예수 자신도 피할 수도 있었던 십자가형을 하나님의 뜻이라며 받아들이고 죽는다. 성경에 의하면 예수 사후에 최초의 순교자는 스데반이었다. 그는 유대인들이 던진 돌에 맞아 죽었는데, 죽기 전에 하늘 위로 예수를 보았다고 한다.

로마제국에서 기독교가 공인되기까지 기독교는 유대인과 이방인들로부터 숱한 박해를 받아야 했지만, 이에 하나님과 예수에게 영광을 돌리며 저항 없이 죽음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그리고 확실치는 않지만 예수의 12제자들도 모두 순교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기독교에서 순교는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구원의 보증 수표쯤으로 생각되었다.

이와 같은 타인에 의한 수동적인 순교 말고 공격적인 순교도 있다. 대표적인 것이 십자군 전쟁이다. 예루살렘 성지를 이슬람으로부터 되찾기 위해 유럽 전역에서 죽음을 각오한 사람들이 모여 전쟁에 나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전사한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위한 십자군 전쟁이었기에 죽음도 달게 받았다. 그리고 약간 성격은 다르지만 2차 대전 당시 일본의 '가미가제' 특공대를 공격적 순교의 예로 들 수 있다. 물론 이 경우는 신이 아닌 천황과 국가에 대한 충성으로 자살 공격을 가하는 것이었다. 최근 들어 가장 눈에 띄는 공격적인 순교는 이슬람 세력의 '자살 테러' 공격이다. 그 절정은 '미국의 9·11테러 사건'일 것이다.

수동적이든 공격적이든 순교에는 다른 종교를 가진 이들은 '악'이고, 진정한 종교를 가진 자신들은 '선'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다. 그리고 순교라는 행위를 통해 죽는 것이 그냥 죽는 것보다 더 영광스럽다고 생각한다. 그 죽음을 '신의 뜻과 영광'으로 돌린다.

사무엘 헌팅턴은 <문명의 충돌>이라는 책에서, 기독교권과 이슬람교권의 충돌을 가장 우려했다. 둘 다 일신론으로 선악 구별이 뚜렷하며, 서로를 종교적 경쟁자이면서 잠재적인 적으로 간주하고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땅끝까지 선교하라는 예수의 말에서, 오늘날의 땅끝은 바로 이슬람이라 믿고 있다. 기존의 이슬람 신앙을 사악한 것으로 보고, 강제 개종을 위해 많은 선교사들이 자원하여 파견되었다.

이제는 누가 누구를 개종시키는 시대는 지나갔다. 교통 통신의 발달로 그야말로 한동네 같은 지구촌이 된 것이다. 이런 가운데 이미 자기네 종교를 가지고 잘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19세기 제국주의의 총을 등에 업은 선교사들처럼 군림하며 현지인들에게 개종을 강요해선 곤란하다. 그렇게 선교하다 죽으면 기독교 입장에서 순교라 부를지 모르지만, 사실은 잘못된 선교 정책에 의한 희생자에 불과한 것이다.

이미 천주교는 현지의 문화를 포용하고 토착화해서 소리 없는 선교를 하고 있다. 이는 천주교가 선교 과정에서 많은 희생자를 낳은 역사의 교훈을 깊이 인식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개신교도 희생자를 낳는 공격적 선교 방식을 폐기하고, 현지에 토착화와 포용을 통해 '대화하는 선교'를 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 이슬람 선교로 순교를 꿈꾸는 잘못된 신앙인들을 바로잡을 수 있고, '순교'라는 희생도 줄일 것이다.

맹목적인 행동이 '순교'로 미화되던 시대는 지났다. 대화가 가능한 지구촌 시대에는 '의미 없는' 죽음을 줄이는 유연한 선교 자세가 필요하다.

 

|글/방광현

|출처/뉴스앤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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