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학

[스크랩] 에딘버러 세계선교대회 2010 : 선교를 위한 새로운 도약

수호천사1 2010. 6. 8. 17:19

에딘버러 세계선교대회 2010 : 선교를 위한 새로운 도약

 

 

서문

 

1910년 스코틀랜드 에딘버러에서 열렸던 세계선교사대회를 기념하는 이번 백주년 행사는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21세기 기독교선교를 위한 새로운 통로를 모색하는데 있어서 하나의 시사점을 제시할 것이다. 아울러 세계기독교 내부의 몇몇 다른 교회와 기독교 단체들은 2010년에 맞춰 의미 있는 기념행사를 갖게 될 것이다. 2005년 이래로 에딘버러 대학교 뉴칼리지를 기반으로 “에딘버러 2010”이라는 대륙 간, 교파 간의 프로젝트를 심화시키기 위해 국제적인 협력 모임이 있어왔다. 이러한 준비 모임은 전 세계 20여개의 기독교 기관에 속한 대표자들과 함께 진행되어 왔다. 백주년 기념식을 준비하기 위한 이 모임에서 모든 주요 기독교 교파들과 그들의 신앙고백들 그리고 선교와 교회의 삶에 대한 다양한 모습들을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1910년 에딘버러 대회의 사업에서 중요한 점은 바로 싱크탱크라 할 수 있는 8개의 “위원회”가 논의하고 제시한 안건들에 있다. 각 위원회들은 협력적 성찰을 통해서 기독교 선교에 대한 새로운 단계를 위해 계획들을 모색했다. 하지만 이번 2010년 개최될 에딘버러 세계선교대회는 21세기 선교에 있어서 핵심적 사항이 될 만한 9개의 주제들에 관심을 맞추게 될 것이다. 연구 방식과 과정은 다중심적이고 다양한 이슈들을 포함하게 될 것이다. 또한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에 대한 문제와 세계의 각 지역, 그리고 현대 교회의 신학적이고 고백론적 관점들 역시 가능한 한 대회의 논의에 포함될 것이다.

 

본 책자는 에딘버러 2010 프로젝트의 전반적인 성격과 특징을 잘 담아내고 있으며, 각 연구 분과의 논의 과정에 의미 있는 기여를 제공해 주리라 생각된다. 케네스 로스(Kenneth Ross)는 이 입문서가 완성되기까지 수개월 동안 열심을 다해 노력해왔다. 다시 한 번 그의 노력에 감사를 드린다. 전 세계의 교회나 선교 단체 그리고 선교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이 책을 일독 하도록 권한다.

 

주지해야할 점은 에딘버러 2010 프로젝트를 통해서 출판된 자료들은 부득이하게 기독교 학자들이 공유하는 다양한 관점과 방식들을 반영하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자료의 대부분은 에딘버러 2010 프로젝트 집행부나 총회에서 일하는 직원들의 관점들을 대변하는 것이 아님을 밝혀두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랄프 윈터(Ralph Winter), 베스 스노덜리(Beth Snodderly), 그리고 크리스 간디(Chris Gandy) 박사님께 심심한 감사를 전하고자 한다. 아울러 이 책이 출판되도록 애써주신 윌리엄 캐리 국제대학 출판부에도 감사를 표한다.

 

다릴 발리아(Daryl Balia), 국제 총 책임자
커스틴 킴(Kirsteen Kim), 연구 책임자

 

제 1 장 에딘버러 1910 : 영감의 순간을 기억하기

 

1. 왜 “에딘버러 1910”을 기억해야 하나?

 

1910년 6월 스코틀랜드의 수도 에딘버러에서 기독교 역사상 가장 결정적이고 가장 중요하게 기억될 만한 모임이 개최되었다. 이 모임은 다름 아닌 “세계선교사대회”로 기독교 역사의 마지막 한 장을 마감하면서 또 다른 새로운 역사를 개시하는 초석이었다. 한 세기를 마감하는 역사의 한 장은 세계 기독교의 선취권이 바로 서구 선교운동에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었다. 1910년 열린 이 에딘버러 세계선교사대회는 19세기 선교운동에 있어서 가장 절정적인 사건이었다. 대회에 참석한 대표자들은 함께 모여 자신들의 선교적 업적을 조사했고 앞으로 해야 할 남은 과제에 대해서 평가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에딘버러 대회의 의의는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때로는 이 모임에 참여한 선교사들이 지나친 종교적 열정과 서구제국주의와의 공모와 문화적 둔감이라는 이유로 비판받고 희화되지만, 그럼에도 오늘날 그들의 선교적 업적은 분명한 의미를 갖는다. 에딘버러 대회 이전에 기독교의 영향력은 대부분 유럽과 북아메리카에 국한되었다. 하지만 대회 이후 기독교는 오랜 역사적 중심부에서만이 아니라 남반구 지역의 기독교인들이 믿게 되는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 지난 역사적 과오에도 불구하고, 세계선교 운동은 선교의 극적인 변화를 일게 하는 하나의 도구가 되었다. 세계의 종교적 지리는 기독교 자체가 새로운 특징과 방향을 발견한 것과 동시에 변형되었다. 우리는 그 어떤 때보다도 기독교 확장의 이러한 움직임이 얼마나 토착인들의 선취권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를 의식한 때는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서구 선교사들의 그 중대한 역할을 부인할 수는 없다. 서구 기독교의 선교운동은 1850년에서 1950년에 이르는 시기 가장 정점에 이르렀다. 이러한 시기 에딘버러 세계선교사대회가 선교운동의 상징이 된 이유 가운데 하나는 바로 그 모임이 이러한 선교운동의 최고에 이를 때 개최되었기 때문이다. 그 때는 이미 풍부한 선교적 경험이 축적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여전히 선교적 에너지와 열정이 가장 충만한 상태에 있었다.

 

에딘버러 세계선교사대회는 가장 주목할 만한 종교운동 가운데 그 핵심에 놓여 있었고,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알리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이 대회에 참여한 약 1,200명의 대표가운데 아시아의 교회지도자들이나 비서구인들은 극히 드물었다. 그럼에도 수적으로는 열세였지만, 그들이 세계선교사대회에 참여함으로써 기독교의 변화하는 특징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되었다. 비서구의 교회지도자들은 대회의 각 토론에 있어서 매우 예리하고 날카로운 의견을 제시했다. 이들은 기독교 증언의 다양한 줄기 가운데 훨씬 더 포괄적인 연합을 옹호하는 사고를 견지하고 있었다. 사실, 19세기 선교운동은 경험과 자원의 풍부함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목적만을 고수했던 선교회들의 분열과 때로는 서로간의 노골적인 경쟁으로 인해서 갈가리 찢겨진 상황 속에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에딘버러에 참여한 대표자들을 하나로 엮어준 것은 하나의 확신 즉, 만일 지금의 선교회가 서로 협력할 수 있다면 훨씬 더 많은 선교적 업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 비롯했다. 특히, 이러한 확신과 논의를 더욱 더 심화시킨 대표자는 다름 아닌 비서구교회의 지도자들이었다. 이들은 선교사들 간의 협력뿐만 아니라 연합이라는 주제를 이끌어 내었던 것이다. 아울러, 요한복음 17장 21절의 “저희가 다 하나가 되어”라는 말씀을 되새기며 일치를 위한 노력에 힘을 쏟았다. 이러한 물음과 성찰들은 다가올 세기를 위한 새로운 아젠다가 되었다. 교회 역사가 케네스 라토렛(Kenneth S. Latourette)이 결론지은 것처럼, “1910년 에딘버러 세계선교사대회는 근대 에큐메니칼 운동의 발생지였다.”

 

이러한 역사적 평가는 의심할 바 없이 타당하지만, 에딘버러 대회가 연합 그 자체를 위해서라기보다는 “선교를 위한” 연합에 의해 고무되었다는 점을 기억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 대회에 참여한 대표자들은 자신들이 역사의 한 순간에 서 있다는 확신에 의해서 하나가 되었다. 그 어느 때 보다도 대표자들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마가복음 16장 15절)”는 예수님의 명령을 성취할 수 있으리라는 현실적 가능성에 한껏 부풀어 있었다. 실용적인 사고방식을 견지한 이들은 이러한 복음화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을 찾는데 관심을 두었다. 에딘버러 대회는 기독교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그들 가운데 세상과 어울려 복음을 나누도록 하는 사명을 알려주는 신호였다. 이 대회는 이러한 웅대한 목적과 희망으로 고동치기 시작했고, 예수의 복음화적 사명이 다음 세대들에게 넘겨질 수 있도록 그 희망의 횃불을 밝히고 있었다.

 

에딘버러 세계선교사대회는 세계 교회를 “우리 시대의 새롭고 위대한 사실”이라고 말한 윌리엄 템플(William Temple)의 의도를 가시적으로 알려주는 최초의 경험이었다. 교회를 진정한 지구적 선교 공동체로 꿈꾸는 이러한 획기적인 비전은 다음 세대들에게 지속적으로 영감을 주었고, 땅 끝까지 이르도록 선교를 하라는 그리스도의 부름에 동참하는 사람들에게 하나의 준거점이 되었다. 앤드류 월스(Andrew Walls)가 언급한 것처럼, “1910년 에딘버러 세계선교사대회는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기념할 만한 전설이 되었다. 이 대회는 선교 역사의 중대 사건이었고, 근대 선교신학의 출발점이 되었다. 아울러, 근대 서구 선교운동의 정점이었으며 근대 에큐메니칼 운동의 도약대였다. 이 대회에서부터 기독교인들은 우선적으로 세계 교회의 흐름과 전망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본 장에서는 몇 가지 기본적인 물음을 제기해보고, 1910년 에딘버러 세계선교사대회에 의해 주어진 영감을 좀 더 면밀히 고찰해 보기로 하자.

 

2. 에딘버러 세계선교사대회는 누구의 생각이었나?

 

에딘버러 세계선교사대회는 십년 마다 한 차례씩 대규모의 국제회의를 개최하려는 의도에서 비롯했고, 이를 통해서 자신만의 선교적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기획되었다. 구체적으로 리빙스톤 선교위원회의 총무였던 페어리 댈리(Fairley Daly)가 1906년 초 뉴욕의 미국북장로교 선교부의 총무 로버트 스피어(Robert Speer)에게 1900년의 뉴욕 에큐메니칼 선교회의에 이어서 국제적 규모의 선교사대회를 개최하자는 서한을 보냈다. 스피어와 그의 미국 동료들은 영국과 스코틀랜드 해외선교위원회의 제안에 긍정적인 입장을 보였고 결국 1910년 에딘버러에서 선교사대회를 개최하기로 결의했다. 하지만, 에딘버러 대회의 프로그램과 성격은 두 인물에 의해서 구체화되었다. 한사람은 에딘버러 대회의 회장이었던 미국인 존 모트(John R. Mott)였다. 라토렛은 자신의 글에서 모트를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모트는 품위 있고 위엄 있는 풍채를 지녔다. 또한 종교심이 깊고, 복음주의적 열정에 가득 차 있으며, 야망을 지닌 능력 있고 전도유망한 사람이다. 모트는 폭넓은 비전과 용기, 기지, 행정적 수완을 갖추고 의장으로써 대중회의를 이끌어갈 유능한 인물이다. 확신에 찬 호소력 있는 그의 연설은 청중을 압도하기에 충분하다. ... 모트는 늘 전 세계와 인류에게 영향력을 발휘하게 될 인물들과 선교운동들을 희망했고 이를 실현하려고 행동했다.” 대회 총무인 스코틀랜드인 조 올드햄(Joe Oldham)은 모트의 이러한 역량에 힘을 보탰다. 올드햄은 신학적 통찰이 뛰어났던 인물이자 수완 있는 외교사절로 대회의 배후에서 프로그램을 조직하는데 기여했다. 윌리엄 호그(William R. Hogg)는 올드햄을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모트가 에딘버러 세계선교사대회를 진두지휘했던 인물이라면 ... 올드햄은 마치 기관장과 같은 인물이었다.”

 

3. 누가 에딘버러 세계선교사대회를 조직했는가?

 

에딘버러 세계선교사대회를 개최하는데 있어서 초기 기획은 영국 운영위원회와 미국 조회위원회와 협의회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곧 이 위원회들은 10명의 영국인, 5명의 미국인, 그리고 3명의 대륙 대표자들로 구성된 국제 위원회로 대체되었다. 이 위원회는 1908년 6월 바로 에딘버러 대회가 개최되기 정확히 2년 전 옥스퍼드에서 첫 모임을 갖았다. 여기서 올드햄은 핵심창립위원으로 임명되어 에딘버러 대회의 준비까지 약 3년간 전임으로 사역했다. 점차 그는 29명의 조직위원들을 소집해 에딘버러 대회가 개최되었던 어셈블리 홀 근처에 있는 프린세스 거리(Princess Street) 100번지에 사무실을 마련했다. 이러한 조직적 근거지에서 올드햄은 대규모의 국제회의를 주관하는데 실질적인 업무를 시작해 나갔고 아울러 대회를 위한 우선적 사항과 정책적 안건들을 구상해 나갔다.

 

4. 누가 에딘버러 세계선교사대회에 참여했는가?

 

에딘버러 세계선교사대회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은 해외선교사들을 파송하며 선교 사업을 진행하고 있었던 해외 선교부나 선교위원회에 주어졌다. 구체적으로 해외 부지에 선교기관을 갖추고 있으며 매해 약 2,000파운드의 선교자금을 지출하는 선교부만이 대표로 초청받았고 여기에 4,000파운드의 추가적인 해외선교비용을 지출하는 선교부는 추가적인 대표자를 파송할 자격이 주어졌다. 이러한 기준에 근거해 176여개의 선교부와 선교위원회가 대표단을 파송했는데, 북아메리카에서는 59개, 유럽대륙에서는 58개, 영국에서는 47개, 남아프리카와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12개의 단체가 선교사대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이 대표자들은 압도적으로 영국인(500명)들과 미국인(500명)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유럽 대륙으로부터 온 대표들은 소수(170명)에 불과했고, 인도, 중국, 그리고 일본과 같은 “신생교회”에서는 가장 적은 수의 대표들이 파송되었다. 아울러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그리고 태평양 섬에서는 참석자가 없었다.

 

이 대회는 전적으로 개신교 선교공동체를 위한 행사였다. 로마가톨릭이나 동방정교회는 호의적인 서신만 보내졌을 뿐 초대받지는 못했다. 1910년 점차 눈에 띄기 시작한 오순절 교회 역시 초청 대표 명단에서 제외됐다. 아울러 여성들이 이미 선교운동에 있어서 크나큰 기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참석자들은 남성이 압도적이었다. 또한 장기적인 역사적 관점에서 바라보았을 때, 이 대회에서 참여자들의 다양성이 상당히 제한된 점은 매우 두드러진 특징이었다. 그럼에도, 이 대회는 이후 좀 더 다양하고 광범위한 대표단들을 초청해야 한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다. 이 점에 대해서 런던선교회의 워들로 톰슨(Wardlaw Thompson)은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나는 우리가 향후 선교대회를 개최할 때 그리스 정교회나 로마가톨릭교의 대표단들이 우리와 함께 그리스도의 사역에 관해서 함께 나누길 간절히 희망한다.”

 

대표자들은 교회선교위원회나 선교부의 전임사역자였던 반면 이외의 소모임은 일반대중에 의한 참여로 조직되었다. 대중 모임의 순서는 대표자들이 모여 있는 어셈블리 홀에서 길 맞은편에 위치한 시노드 홀(Synod Hall)에서 개최되었다. 이 모임에서는 대회에서 다루어질 안건들을 특별히 다루었고 대회의 주제들을 해외선교사역의 후원자들과 함께 나누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주요 대표자들에 의해 진행된 저녁 공개강좌 역시 로열마일(Royal Mile) 맨 앞에 위치한 톨부스 교회(Tolbooth Church)에서 매일 개최되었다. 이와 비슷한 시리즈 강연이 글라스고 세인트 앤드류 홀(St. Andrew Hall)에서도 진행되었다. 이러한 모임들은 수많은 대중들의 관심을 끌었고 이 행사가 얼마나 인기 있는 행사였는가를 잘 보여주었다.

5. 어디서 에딘버러 세계선교사대회가 개최되었는가?

 

이 대회는 현재 스코틀랜드 교회의 어셈블리 홀에서 개최되었는데, 이곳은 에딘버러 대학교 신학부인 뉴칼리지에 매우 근접해 있었다. 이 건물은 19세기 후반에 스코틀랜드 자유교회의 중심 센터로 건축되었다. 스코틀랜드 자유교회는 1843년 교회와 국가와의 관계문제로 인해서 스코틀랜드 교회와 분리되었다. 1900년에는 자유교회가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또 다른 분파인 연합장로교회와 통합했다. 따라서 1910년에 어셈블리 홀은 해외선교사역을 전 세계적으로 가장 활발히 전개했던 연합자유교회의 소유였다. 장로교 전통에 서 있었던 어셈블리 홀은 활발한 토론의 장으로서, 이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협의회적 방식으로 문제점들을 논하고 결정을 내리곤 했었다. 이 때문에 스코틀랜드 의회가 거의 300년 만인 1999년에 재소집 되었을 때 그 첫 모임의 장소로 어셈블리 홀을 이용하게 되었고, 여기서 스코틀랜드 국회의사당이 2004년 완공되기까지 약 5년간 연회가 개최되었다. 따라서 어셈블리 홀은 때때로 참가자들에게 역사적 분위기를 느끼게 해주었다.

 

6. 왜 에딘버러에서 세계선교사대회가 열렸는가?

 

에딘버러에서 세계선교사대회가 개최된 이유는 그곳에서 회의를 위한 초대가 발표되고 수락되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좀 더 중요한 질문이 제기 될 수 있다. 선교회의 지도자들은 왜 그렇게 작은 나라에서 세계적 규모의 대회를 개최하는데 확신했고, 왜 그 밖의 대안적 장소가 제기되지 않았는가? 에딘버러는 앞서 선교사대회가 개최된 런던이나 뉴욕과 같은 대도시들과 비교해 볼 때 조용한 소도시임은 분명했다. 하지만, 선교사대회의 장소에 대한 적절성을 문제 삼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당시 정점에 있었던 서구 선교운동에서 스코틀랜드가 차지하는 위상을 제대로 파악해야 한다. 에딘버러 대회의 문서는 당시 에딘버러가 차지하고 있었던 선교상의 위치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에딘버러는 대회를 위한 최적의 장소였다. 유럽을 복음화 했던 초기 선교 사업에 있어서 그 어떤 나라도 스코틀랜드만큼 두드러지지는 않았다. 또한 지난 세기 그 어떤 나라도 세계 복음화를 위한 그 범위와 영향력에 있어서 스코틀랜드만큼 뛰어나고 헌신된 선교사들을 갖추지 못했다.” 특히, 이 문서의 후반부는 대회 총무인 올드햄에 의해서 재차 강조되었다. 그는 스코틀랜드가 선교사대회의 장소로 선정된 것을 희년의 때라고 회상했다. 왜냐하면 바로 스코틀랜드는 “데이비드 리빙스톤(David Livingstone)이나 알렉산더 더프(Alexander Duff), 그리고 이들과 같은 위대한 선교사들이 태어난 본국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그들이 선교적 비전과 헌신을 보여주는 세계의 위대한 중심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고, 이러한 정황 속에서 선교사대회의 대표자들은 에딘버러로 자신들의 발길을 향했다.

 

7. 에딘버러 세계선교사대회의 목적은 무엇이었나?

 

에딘버러 세계선교사대회의 두드러진 특징은 과거의 선교대회들이 그랬던 것처럼 선교운동의 신봉자들을 위한 집회가 되지 않고자 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이 대회는 당시 선교운동에 있어서 영적으로 감화만 주는 것을 그 주요 목적으로 삼지 않았다. 이전의 선교대회가 열정을 과시하는데 집중했다면 에딘버러 모임은 대회의 부제가 말해주듯이 “비기독교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선교 문제를 고찰하기 위한 목적”을 담고 있었다. 이 대회는 기독교 선교의 세계적 관계 속에서 좀 더 연합된 선교전략과 더 낳은 협력을 달성하기 위한 하나의 시도였다는 점에서 이전의 선교대회와는 확연히 구별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조직위원회 역시 “선교지 탐사를 위해 선교사업의 계획과 방법을 제시하고, 전 세계의 모든 지역으로부터 선교적 경험들을 공유하도록 모든 노력을 하나로 연합”하는 것을 대회의 목적으로 삼고 있었다. 이 대회는 선교운동이 최상의 기회의 순간에 도달할 것이라는 확신 속에서 비롯했다. 여기에는 세계선교를 위한 긴급함이 있었고, 만일 올바른 전략과 계획이 형성되지 않고 실행되지 않는다면 복음화의 기회는 사라질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확신에 의해서 더욱 촉발되었다. 이에 대해서 에딘버러 대회의 한 문헌은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다. “지금처럼 세계의 모든 지역에 선교를 위한 간절한 요청과 선교의 문을 두드리고자 하는 노력이 조화를 이루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8. 에딘버러 세계선교사대회에서 논의된 안건은 무엇이었나?

 

조직위원회는 대회가 개최되기 2년 전부터 선교운동이 직면한 핵심적 과제들과 도전들이 무엇인지를 서로 나누어 왔었다. 에딘버러 대회를 위한 준비에 있어서 각 주제별로 연구와 성찰이라는 철저한 과정을 진행하기 위해 20명으로 이루어진 위원회가 구성되었다. 대부분의 위원분과에서는 질의응답의 방식을 통해서 선교지에 있는 다양한 선교사들에게 조언을 얻었다. 전례 없을 정도의 규모와 열정 속에서, 각 위원회들은 자신들에게 할당된 각 주제에 의거해 광범위한 선교지역에서 축적된 지혜를 모으기 시작했다. 이후, 각 위원회는 상당한 분량의 그 결과물들을 보고서의 형식으로 만들었는데, 이는 각각 약 200에서 500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이었다. 대표자들은 대회를 개최하기 전에 이 보고서들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각 위원회는 보고서를 발표할 수 있도록 하루 정도 시간이 주어졌고, 대표자들에게는 최대 7분간의 매우 짧은 평가와 조언으로 응답할 수 있는 기회가 허락되었다. 에딘버러 세계선교사대회는 기독교 선교 사업에 있어서 당면한 핵심적 안건들에 관심을 두었고, 각 주제들에 대해 다음과 같은 전망을 제시할 수 있었다.

 

제1분과: 모든 비기독교 세계의 복음전파


이 주제는 대회와 그 내적 동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다. 복음화 사역의 그 방대함과 위급성은 대회의 대표자들을 결속시켰고, 모든 개별적 논의들이 구체화 될 수 있도록 핵심 사항을 제시해 주었다.

 

제2분과: 선교지내의 교회


가장 중요한 문제 가운데 하나는 바로 서구 선교부와 각 지역에서 새롭게 등장하는 토착교외와의 관계에 대한 부분이었다. 이 토착교회는 기독교 선교가 진일보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토착교회의 대표들은 기존의 서구교회와 신생교회 사이에 보다 더 평등한 관계를 공식적으로 요청했다.

 

제3분과: 국가적 삶의 기독교화와 관련된 교육


선교운동에서 채택된 주요 방법은 바로 교육이었다. 특히 어떠한 교육적 방식이 적합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중심을 이루었다. 선교교육이 영어로 전달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토착어로 전달되어야 하는가?

 

제4분과: 타종교에 대한 선교적 메시지


선교지에 있는 선교사들로부터 가장 방대하게 전달된 문서는 바로 어느 정도로 타종교에 대해서 공감과 존중의 태도를 견지해야하는 가에 대한 부분이었다. 특히, 어느 정도로 기독교가 타종교에서 발견된 내적 희망과 열망의 성취로서 이해될 수 있는지에 대한 부분이 논의의 핵심이었다.

 

제5분과: 선교사 양성


에딘버러 세계선교사대회는 더 많은 선교사와 단체들이 선교사역에 참여할 필요가 있다고 분명하게 인식했다. 특히, 질 높은 훈련이 광범위하게 권장되었고 선교사 양성을 위한 대학과의 협력과 연계는 선교사 양성에 있어서 매우 바람직한 전략으로 인식되었다.

 

제6분과: 선교의 국내본부


해외선교부의 힘은 국내 교회의 영적 생명력에 달려 있었다. 따라서 국내 교회에 정보를 알리고 선교적 열정을 고취시키려는 방법이 구체적으로 논의되었고, 교회의 삶에 있어서 영적 각성이 가장 중점적으로 요청되었다.

 

제7분과: 선교부와 정부


선교사들이 일하는 지역을 관할하는 정부와 선교부의 관계를 논의하는 것은 에딘버러 대회에서 나타난 하나의 혁신적인 움직임이었다. 특히, 정부의 유형을 구분하는 기준이 제정되었고, 선교부는 필요할 때 정부를 향해 비판적인 목소리를 제기하더라도 정부와의 관계에 있어서 가급적 공정한 관계를 유지하도록 권장되었다.

 

제8분과: 협력과 일치의 증진


이 분과에서는 좀 더 긴밀한 협력관계가 더 효과적인 복음전파를 이끌 수 있다는 주장이 논의되었다. 분열된 교회를 연합하는 것이 본 토론의 일부로서 제기된 것은 아니지만, 특히 중국에서 온 일부 대표자들은 향후 교회의 일치가 훨씬 더 명백한 사실이 될 것이라고 그 가능성을 희망적으로 표명했다. 이 논의는 다음 세기에 영감을 주어야할 교회들이 서로 하나가 되길 간절히 희망했던 대회에 있어서 큰 공감을 얻었다. “세계선교 사업에 있어서 중요한 문제들이 그 어떤 때보다 이렇게 철저하게 조사되고, 연구되고, 평가된 적은 없다”고 윌리엄 호그는 기록하고 있다.

 

아울러 에딘버러 대회에서 미처 논의되지 못한 부분을 주목하는 것 역시 중요할 것이다. 특히 다른 선교회와 선교부에서 파송된 대표자들 사이에서 교리의 문제나 교회 조직에 대한 논의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사전에 일치가 있었다. 오히려 대회의 주요 관심은 전적으로 교리 외적 차원의 선교 사역에 있었다. 이로 말미암아 이전의 그 어떤 국제적 선교사대회보다도 훨씬 더 광범위하게 대표들이 참여할 수 있었다. 또한 대회가 개최되기 이전에 합의를 본 점은 각 토론과 논의가 “비기독교세계”에 국한된다는 점이다. 라틴아메리카나 동유럽과 같이 이미 기독교를 믿고 있는 지역에서 이루어지는 선교사역들은 대회의 주제에서 배제되었다. 이렇게 토론의 범위를 구체화함으로써 비기독교세계에서 온 참석자들의 논의가 좀 더 심화되었고, 그 주제는 고교회에 속한 영국 성공회와 저교회에 속한 비국교도 사이에 본질적인 공통점을 모색하도록 이끌었다.

 

9. 에딘버러 세계선교사대회는 어떻게 진행됐는가?

 

선교사대회의 모습에 경이로움을 느낀 참석자들은 이 대회가 세계의 모든 지역에 자신들의 삶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데 헌신하고자했던 꿈을 실현하게 하는 결정적 방법을 제시할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많은 참석자들은 이러한 대회가 개최될 수 있었던 원인이 그들이 태어났을 때는 전혀 듣지 못했던 높은 수준의 기술적 도움에 있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에딘버러 세계선교사대회는 세계여행과 통신수단을 통해서 새로운 가능성을 포착할 수 있으리라는 사실로부터 그 원동력을 한껏 고취시켰다. 증기선의 발달은 국제적인 선교여행에 일대 혁신을 일으켰고, 그럼으로써 세계의 다른 지역으로부터 수 백 명의 사람들이 대회에 참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바로 모트가 전 역사를 통틀어 구석구석 세계 각지를 여행한 몇 안 되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어느 누구도 이러한 새로운 가능성들에 대해서 주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술적 진보는 전 세계적으로 복음을 전파하는데 있어서 가장 훌륭한 수단으로 등장했다. 세계에 널리 퍼져있는 수 백 명의 선교사들에게서 막대한 양의 정보를 수집하는 일은 1910년 이전에는 거의 불가능 했을지 모른다. 이러한 모든 기술적 발전과 소통의 원활함은 참석자들에게 감격적이며 새롭고 희망적인 가능성으로 가득 찬 시대에 존재하고 있다는 의식을 불어넣어주었다.

 

이러한 목적의식은 대회의 방식을 더욱 성공적으로 이끌어 주었다. 미리 준비된 보고서와 일간지의 발행, 그리고 토론의 장으로 사용될 각종 홀, 아울러 효율적인 연설과 논의를 위한 7분여 정도의 시간배정 등, 이 모든 구체적 회의의 방식들은 보다 확실하고 행동지향적인 사고를 지녔던 당시 세대들을 위해 세심하게 준비되었다. 대회를 조직하는데 있어서 천부적인 기질을 발휘했던 올드햄은 다음날 논의될 내용이 담긴 회의록을 에딘버러 전역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있던 대표자들에게 정확하게 전달함으로써 매우 훌륭한 진행을 이끌어 나가기도 했다. 각 논의를 진행하는데 있어서 마련된 이러한 근대적이고, 효율적이고 순조로운 준비는 대표자들이 대회에 집중할 수 있게 했다.

 

이러한 모든 일정들은 매우 인상적이었지만, 가장 기억될 만한 대회의 모습은 바로 내적인 영성에 있었다. 특히 그 영성의 중심에는 예배와 기도가 차지하고 있었다. 대회규정은 일일대회 일정에 있어서 대회가 그토록 성공적일 수 있게 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바로 “연합 중보기도”였음을 밝히고 있다. 오후 12시가 되면 자연스럽게 회의와 토론이 잠시 그치고 대표자 가운데 한 사람이 나와 “정오 중보모임”을 알리고 주어진 주제에 대해 짧게 묵상하고 기도하는 시간을 갖았다. 템플 가드너(Temple Gairdner)는 이러한 깊은 영성의 순간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매일 청중들이 가장 활기차고 생동감에 넘칠 그 순간에 본 대회는 그 토론의 시간이 부족했음에도 그것을 잠시 멈추었다. 약 반시간 동안 토론의 목소리는 잦아들었고, 곧 기도의 시간이 이어졌다. 기도의 시간에 헌신의 영이 점차 각성되었고, 하나님의 침묵이 그 대회장 안을 채우기 시작했다.” 중보기도의 순간 대표들은 어셈블리 홀의 출입이 엄격히 금지되었다. 당시 선교대회를 이끌었던 진정한 원동력은 새로 발명된 과학 기술의 도움도, 이에 대한 조직위원들이나 대표들의 간절한 염원도 아니었다. 그 원동력은 오직 기도에 있었다.

 

대표자들은 이들이 에딘버러에서 받은 환대에 깊은 인상을 받기도 했다. 에딘버러시장을 비롯한 다른 인사들은 시회의실과 스코틀랜드 국립박물관에서 환영식을 열었고, 에딘버러 대학은 특별학위 수여식을 열어 14명의 가장 뛰어난 대표자들에게 명예학위를 수여했다. 또한 개회식이 에딘버러의 세인트 자일스 대성당(the High Kirk of St. Giles)에서 열렸고, 프린세스 거리에 있는 세인트 존 교회(the Episcopal Church of St. John)에서 성공회 대표자들을 위해 일일 성찬식이 진행되었다. 에딘버러 시 전역에 있는 몇몇 가정은 자신들의 집을 개방해 대표자들을 위해 숙박을 제공하기도 했다.

 

10. 에딘버러 세계선교사대회의 결과는 무엇이었나?

 

우리는 다음 장에서 20세기 동안 지속적으로 반향을 일으켰던 에딘버러 대회의 메아리에 귀를 기울여 볼 것이다. 에딘버러 대회는 공식적인 결의안으로서 단 한 가지 결단을 내리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여덟 번째 위원회의 안건인 “협력과 일치의 추구”로 다음과 같은 결과를 가져다주었다. “에딘버러 세계선교사대회는 국제적인 대표자로 구성된 계속위원회를 구성했고, 이 대회의 여덟 번째 안건을 향후 협력적 선교사업의 기초로서 중요하게 유지시킬 수 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 안건은 미래의 선교 발전을 위한 튼튼한 토대를 제시하고 협력적 행동을 통해서 세계복음화를 위한 영적인 힘을 생생하게 북돋우도록 이끌 것이다.” 이 제안이 선교사대회에 제출되었을 때는 아무런 이견이 없었다. 대회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영광의 찬송을 부르기 위해 기립했다. 대표단은 에딘버러 대회를 통해서 그들이 발견한 그 새로운 영감을 가지고 보다 새로운 선교의 통로가 반드시 열려져야 한다는 결단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1910년 개최된 에딘버러 세계선교사대회는 새로운 영감과 상상력을 발휘함으로써 위원회의 결의안이나 계획을 공식화하는 것 그 이상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세상의 모든 곳곳에서 이 대회는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영감을 일으키는 하나의 역사적 기억이 되었다. 대표들은 당시에 존재하지 않았던 그 어떤 무언가에 대한 비전을 갖게 되었다. 그 비전은 바로 모든 대륙에 깊게 뿌리를 내리고 역동적으로 나타난 하나의 “세계 교회”였다. 이러한 비전이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점차 현실이 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새로운 기독교의 지형이 처음으로 드러났던 곳인 에딘버러를 되돌아보게 되었다. 이 뿐만 아니라 에딘버러 대회는 선교의 희망을 보여줌으로써 교회가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전 피조물”에게 선포하는 주요한 사명에 헌신하도록 했다. 마지막으로 이 대회는 “더 낳은 협력과 일치를 향하자”는 확신을 나타내기도 했다. 이는, 교회와 선교기관이 더욱 밀접하게 연합될 수 있다면 선교적 명령을 성취하는데 훨씬 효과적인 자리로 매김 할 수 있다는 신념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에딘버러 세계선교사대회는 이러한 주제들을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이러한 역량을 교회와 선교기관에 전달하도록 힘을 모음으로써 다가올 세기동안 하나의 아젠다를 교회가 수립하게 했으며 이러한 문제를 다룸에 있어서 훌륭한 추동력을 제공했다.

 

11. 주목해야할 횃불

 

1910년 개최된 에딘버러 세계선교사대회는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매우 중대한 의미를 지니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당시 대회 회장이었던 모트는 다음과 같이 이점에 대해서 진술하고 있다. “이 대회는 이 전에 열린 기독교 팽창의 관심 가운데 가장 주목해야 할 모임으로써 그것은 단순히 선교사들의 역사만이 아니라, 모든 기독교인들의 역사를 담고 있다.” 약 50년 후인 1960년 휴 마틴(Hugh Martin)은 에딘버러 대회를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지금까지 모든 유능한 선교 역사가들이 일반적으로 동의하듯이 1910년 6월에 열린 에딘버러 세계선교사대회는 기독교 교회의 장구한 역사 가운데 가장 창의적인 사건 가운데 하나였다. 그 대회가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의미는 앞으로 50년 후에 훨씬 더 명쾌하게 드러날 것이다. 이 대회는 선교 사업에 있어서 새로운 시대를 열었을 뿐만 아니라, 소위 ‘에큐메니칼 운동’이라 일컫는 새로운 선교운동의 흐름에 물꼬를 텄다. ‘에딘버러 1910’은 사실상 그 깊이와 규모에 있어서 결코 전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사건으로 국제적이고 교회 간 협력의 근원지였다고 볼 수 있다.” 에딘버러 세계선교사대회가 개최된 지 100년이 지난 시점인 오늘, 우리는 그 대회를 어떻게 평가 할 수 있을까?

 

이 평가를 위한 몇 가지 분명한 점이 있다. 우선, 그 대회는 선교 운동의 “시대의 도래”를 알리는 표징이라는 점이다. 에딘버러 대회는 종종 교회 내부에서 조차 주변적이고 이상한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현재 소집된 대표자들은 켄터베리의 대주교 랜달 데이비드손(Randall Davidson) 못지않게 교회 지도자들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있다. 한때 이 대주교는 “교회의 삶에 있어서 선교의 자리는 반드시 가장 중심에 서 있어야 하며 그 어떤 것에 자리를 내주어선 안 된다”고 언급한바 있었다. 또한 그는 교회와 선교와의 관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결론 맺기도 했다. “우리의 계획, 우리의 정책, 그리고 우리의 기도 가운데 선교가 진정한 자리를 차지하도록 지켜야 할 것이다. 선교는 하나님의 것이지 인간이 좌지우지하는 선택 문제가 아니다. 교회가 선교의 중심이 되어야 다음의 성서 말씀이 우리에게 실현 될 것이다.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느니라(누가복음 9장 27절).’” 데이비드손의 말처럼 선교운동을 신앙과 교회의 행동의 중심에 둠으로써 에딘버러 대회는 하나의 중대한 역사적 사건이 되었다. 또한 “선교”가 교회의 사명 그 자체라는 생각이 에딘버러 대회를 통해서 수용되었고, 이는 20세기 선교 발전에 있어서 주요 주제로 남게 되었다.

 

또 다른 분명한 점은 바로 에딘버러 세계선교사대회가 교회와 선교의 패러다임에 있어서 하나의 역사적 전환점이라는데 있다. 이 점에 대해서 호그는 다음과 같이 매우 웅변조로 말하고 있다.

 

1910년 개최된 에딘버러 세계선교사대회는 세계 개신교 에큐메니칼 운동의 핵심으로 나타났다. 비유적으로 말해서, 그 핵심은 아치 꼭대기의 쐐기돌과 같다. 그것은 한곳으로 수렴하는 모든 건물 지축을 서로 뭉치게 해 기반을 보다 튼튼하게 한다. 아치는 상부구조가 세워질 수 있도록 토대를 제공한다. 쐐기돌은 아치도 아니며 벽도 아니지만, 이 둘 모두를 조화시킨다. 만일 쐐기돌이 사라지면, 아치와 벽 모두 붕괴하고 만다. 그렇기에 쐐기돌은 매우 중요하다. 이는 에딘버러 대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 대회는 19세기와 20세기 양 시대를 조화시킨다. 이 대회는 아치의 쐐기돌처럼 19세기의 선교와 일치의 발전을 20세기의 것과 연결시킨다. 이러한 연결을 통해서 두 세기 동안 진행된 선교의 역사적 모습은 온전히 평가될 수 있다.

 

지난 200년간 기독교의 변화하는 지형적 모습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면 반드시 1910년에 열린 에딘버러 세계선교사대회를 고찰해야만 한다. 기독교 역사가들에게 있어서 이 대회를 간과하는 것은 매우 위험스런 일이라 할 수 있다.

 

에딘버러 대회는 교회와 선교에 관심을 갖고 있는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를 던져주는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로 에딘버러 대회는 강력한 준거점을 제시해준다. 그 대회의 야심찬 주제와 분석적인 방법은 당시에 논의된 수많은 안건들이 오늘의 급격하게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도 여전히 관계해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대회의 정수이자 실체를 보여주는 위원회의 보고서들은 대회에서 제기된 논의들을 고스란히 담고 있으며, 오늘날 선교를 연구하고 관심하는 사람들에게 매우 가치 있는 자료로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구체적인 분석적 관점들보다 더욱 중요한 점은 바로 그 대회가 선교사역에 대해 넘치는 희망을 보여줌으로써 오늘날 우리의 모습에 도전을 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월스가 이미 설명한 것처럼, “에딘버러 대회는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 사이의 축적된 상호 경험을 분석하고, 이를 새로운 단계로 도약하도록 하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고 있다.” 현재 우리는 에딘버러 대회에서 제시된 선교 패러다임이 오늘날까지 그대로 이어지는 모습을 지켜보며 살아가고 있다. 선교의 새롭고도 역동적 모습은 그 윤곽이 아직 불분명하고 예측하기 어렵지만 그럼에도 우리 눈앞에 서서히 나타나고 있다. 1910년 에딘버러 대회의 기억을 되새기면서 다시 한 번 우리는 오늘의 기독교 팽창의 흐름에 새로운 힘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까? 예수 그리스도의 선교적 위임 속에서, 과거 에딘버러 대회는 21세기 교회와 선교의 모습을 회복하는데 새로운 비전과 신선한 에너지를 제공하고 이를 더욱 촉진시킬 수 있을까?

 

케네스 로스

출처 : 내 사랑 중국 ♡ MyLove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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