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학

[스크랩] 찬송에 대한 자료들

수호천사1 2010. 5. 29. 00:13

찬송에 대한 자료들 
 

 

언제 찬송하나? (I)

언제 밥을 먹나? 보통 주어진 시간에 하루 세끼를 먹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물질로 이루어진 우리 신체에 생물학적 욕구를 충족시켜 주기 위해서 입니다. 그래야만이 인간이 일(살아가는 것)을 할 수 있게 됩니다. 물론 시도 때도 없이 먹어대는 사람도 있습니다.

찬송은 언제 하는가? 시도 때도 없이 해야 한다면 넌센스일까요? 사도바울은 옥중에서도 찬미하였다고 하는데 시간을 정해서 했겠습니까? 유대교는 제사를 정해진 시간에 드린다고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의 제사는 어떤 특정한 상황에서가 아니라 어느 때든지 드려야 합니다. 이것은 항상 그리스도의 사랑을 확인하는 성도들은 항상 그리스도를 인정하고 찬미의 제사를 드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3장 15절에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라고 말씀하였습니다.

등교길에 찬송 한 곡 부르고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느끼며 걸어갈 때, 고전문학이 이해가 되겠고, 쉬는 시간에 도시락 먹으면서 그래도 세상 노래보다는 주님을 찬양하고, 점심시간에 남의 밥 얻어(뺏어) 먹고나니 배불러서 잠이 올 때 주님의 사랑을 찬양하면서 자고, 등등등. 물론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야 한다는 입장에서 본다면 이래선 안되겠지요. 하지만 앞에 한 이야기들은 신앙을 가진 학생들이라면 매 순간 순간 찬양이 입에서 떠나야 하지 말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할려고 하는 것입니다.

친구들과 '봉숭아 학당'이야기는 안합니까? '우리들의 천국'에서 나오는 쌍둥이 이야기는 안 합니까?가수 아무개 이야기도 하고 싶은데요, 찬양은 언제 합니까?좋아요. 그렇다면 이렇게 하지요. 이것은 약속입니다. 찬양 50% : 기타 50% . 내년에는 찬양 60% : 기타 40% . 후년에는 70:30. 후후년에는 80:20. 호호년에는 90:10. 점점 성장하도록 합시다. 언제 찬송하냐고요?

어디서 찬송하나? (II)

일주일에 한번 오는 교회. 혹시 일주일에 한번 오는 '교회'에서만 찬송을 하십니까? 미리암은 홍해를 건너고 너무나 기뻐 그 자리에서 춤을 추며 찬양을 하였습니다.(출애급기 15:20) '이스라엘의 노래 잘하는 자'로 알려진 다윗의 삶을 보면 양을 칠때나 왕이 되서나 언제 어디서나 찬양하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Magnificat(마리아의 노래, 눅1:46-55), Benedictus(사가랴의 노래,눅1:68-79), Numc Dimittis(시므온의 노래, 눅2:29-32). 이 3가지의 노래는 교회음악사에서 중요한 내용으로 예수의 탄생을 기뻐하며 부른 것으로, 마리아는 엘리사벳의 집에서, 사가랴는 정확히 나오지는 않았지만 집에서 한 것 같고, 시므온은 성전에서 부른 것을 알 수 있다. 다락방에서 최후의 만찬을 한뒤 그 곳에서 찬양함을 알 수 있다.(마26:17-29,30) 감옥에서 부른 바울도 알고 있습니다.

학교 음악시간에 교실에서 노래 부를터이고, 소풍가면 그 곳에서 노래할 터이고, 운동장에서 고무줄 하면서 노래 할 터이고, 집에서 만화영화 보면서 따라 부를터이고, 뭐 그런거는 아무데서나 잘 하지 않습니까? 왜 찬양은 어디서나 할 수 없는 것입니까? 이것은 우리의 삶속에서 '항상'과 '어디서나'의 문제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하다못해 화장실에서는 하지 못합니까? 순간 순간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아니면 그 사랑을 느낀다면 그 곳에서 하면 안됩니까? '잠깐만 기다려. 이번주 교회가서 한꺼번에 몰아서 할께.' 이렇게 하십니까? 그냥 그곳에서 하시기 바랍니다. 그 곳이 교회면 교회, 집이면 집, 운동장이면 운동장, 가장 좋은 등.하교길. 입으로 불러야만 합니까? 그냥 마음으로 불러도 다 듣고 계십니다. 그저 우리는 어디서나 부르면 됩니다.

누가 찬송하나? (III)

"성가대", "찬양팀"의 찬양이 있겠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같이''함께' 부릅니다. 물론 '같이''함께' 부르는 것이니까 누구나 다 부르는 것입니다. 혹 방관자는 없습니까? 성가대의 찬양 시간에는 물론 성가대가 부릅니다. 하지만 입으로는 성가대가 부른다 하더라도 우리는 앉아서 마음으로 "함께" 불러야 합니다. 우리는 관객이 아닙니다. "함께" 하나님께 찬양을 해야 합니다.

어떤 가수가 TV에 나와 노래를 부르고 있다면, 라디오에서 노래가 흘러 나오고 있다면 대개 따라 하곤 합니다. 때로는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열심히 따라 합니다. 해드폰을 끼고 옆사람이 들릴 정도로 크게 틀어 놓고, 아무런 생각 없이 흥얼 흥얼 따라 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남이 어떻게 생각하든 말든 노래에 취해서 열심히(?) 따라 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나는 아닙니까?

"다같이 찬송가 몇장을 부르시겠습니다." 전주가 연주되고 1절이 훨씬 지나 2절이 들어 갈 무렵 '야! 몇장이냐?' 막 찾고 있는데 "1절과 마지막 절 부르시겠습니다" 하면, 이미 찾았을 때는 후렴을 끝내고 '아~멘' 하고 끝이 납니다. 나는 아닙니까? 누가 찬송하는 것입니까?

사회자, 설교자 아니 목사님, 전도사님, 장로님, 성가대, 찬양팀?

왜 거기에는 내가 없습니까? 나는 찬송을 안 합니까?다른 사람들 하는데 곁들여서 그냥 앉아 있기만 하면 됩니까?그런 소극적인 찬양말고 적극적인 찬양을 합시다.

성가대에 다 들어가란 이야기는 아닙니다. (많이 들어 갈수록 좋아요.)
찬양은 바로 내가 하는 것입니다.

무엇 찬송하나? (IV)

'그 크신 하나님 사랑 말로다 형용 못하네',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 '하나님 크신 사랑은 측량 다 못하며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 성도여 찬양하세' (찬송가 404장)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잘 표현한 곡입니다. 찬양의 대상은 하나님입니다.

찬송가(HYMNS)는 삼위일체이신 성부, 성자, 성령을 찬양하는 노래이며, 복음 찬송가(GOSPEL HYMNS)는 삼위일체에 대한 찬양으로 속성, 섭리, 사역 등을 감사하며 찬양하는 노래입니다. 복음성가(GOSPEL SONG)는 인간이 인간에게 신앙의 권면, 전도, 인간의 교재 등을 위한 내용으로, 그 대상이 절대적으로 인간이기에 '아멘'이 올 수 없습니다. 요즘은 '찬송가학'이 무색할 정도로 복음성가가 다양화, 다변화 되었습니다. '찬양과 경배'라고 하여 찬송의 의미가 좀 바꾸어 졌음을 보지만, 엄밀히 말해서 찬송의 정의는 변함이 없어야 합니다. 가사는 분명히 하나님을 찬양하는 내용인데 분위기는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복음성가 스타일인 곡이 많이 있습니다. 또한 찬송가 책 안에도 복음성가적인 내용이 많이 있음을 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찬양할 때 가사를 생각하면서 불러야 합니다. 최소한 찬양을 하는데 있어 오류를 범해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찬송'과 '찬양'은 구별되야 하는 것입니다. "찬양합시다" 할 때는 그것이 '찬송가' 일 수도있고 '복음찬송가', '복음성가'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구별은 정확히 해서 불러야 할 것입니다. '찬송가' 하자고 하고선 '복음성가'를 열심히 부른다면 대상은 누가 되겠습니까? 그러고선 열심히 '아멘' 하는 것을 우리는 종종 봅니다.

찬송의 대상은 하나님입니다. 이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섭리, 긍휼하심, 인자하심. 이 또한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또한 나의 구원의 기쁨, 감사, 체험 등을 기억하며 찬양해야 합니다.

어떻게 찬송하나? (V)

다윗은 왕의 된 후에 믿음의 증표로 아비나답의 집에 있는 하나님의 궤를 다윗성으로 옮기려 합니다. 옮기는 이는 삼만을 모으고, 이스라엘 온 족속이 잣나무로 만든 여러가지 악기와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양금과 제금으로 여호와 앞에서 주악하였다고 합니다.(삼하6:1-5)

다시 오벧에돔의 집에서 옮길 때에 다윗은 소와 살진 것으로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이때 베 예봇을 입고 추었다고 합니다.(사무엘하 6:12-14) 예봇은 제단 앞에서 직무를 행할 때에 입는 옷으로, 엉덩이까지 내려오며 소매 없는 제사용 겉옷입니다. 다윗의 그 모습은 하나님께 대한 그의 기쁨을 공적으로 나타내고 여호와께 그 자신을 복종하는 일종의 종교적 환희의 표현이었습니다. 사울의 딸 미갈이 비꼬았을 때 다윗은 "기꺼이 낮아져서 천하게 보이기 원했고 주께서 그런자를 높이시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라고 말함을 성경에서 볼 수 있습니다.(삼하 6:22. 삼상2:7,8. 마23:12) 엉덩이까지 내려오는 옷을 입고 춤을 추었답니다. 그것도 왕이.

'다같이 박수치며 찬양합시다!' 하면 우리의 손은 반경이 몸 밖으로 나가지를 않는 것을 쉽게 봅니다. 다윗은 바지가 엉덩이까지 내려왔음을 알면서도 기쁨으로 찬양하며 춤을 추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한다면 무엇이 걸립니까. 체면, 눈치, 분위기? 왕은, 그것도 최초의 왕인 다윗은 체면, 눈치, 분위기하고는 전혀 개의치 않았습니다. 성경을 보면 그의 삶이 찬양의 삶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때 그는 어떻게 찬양했습니까. 있는 그대로, 손에 악기가 있으면 있는대로, 없으면 없는대로, 기쁠 때는 기쁜대로, 어려울 때는 어려운데로 찬양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박수치며 찬양한다는 말에는 많은 학문적 견해가 있지만, 그런 것은 우리가 다룰 문제가 아니므로 접어 두고 춤추며, 박수치며, '띵까띵까'데며 찬양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우리가 열심으로 찬양해야 함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또한 신령과 진정으로 찬양해야 합니다.(요4:24) 저는 이 말씀에서 '예배'라는 단어를 '찬양'으로 바꾸어 말하고 있습니다. 앞의 다윗의 경우도 이 말씀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 찬송하나! (VI)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음악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심장의 맥은 리듬이요,말은 선율이요,억양은 음정, 이미 음악의 기본적인 요소를 갖춘 것이다. 사람의 말을 들으면 그사람에 대하여 왠만큼 알 수 있다고 한다. 말은 곧 사상이기 때문이라. 현 시대는 말이 거칠다. 이는 선율이 즉,아름답지 못하다는 것이다. 또한 비 음악적이다. 아름답지 못하고 비 음악적이라면 음악으로서의 가치가 상실된 것이고,이를 즐기며 부른다거나 듣는다면 가치관의 문제인 것이다. 크리스챤으로서의 음악에서의 가치관은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을 찬양함이다.

우리는 때로 아주 자그마한 일에도 기뻐하며 즐거워 할 때가 있다. 남들이 보면 하챦은 그런 것에도 본인에게는 말할 수 없이 기쁨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모두가 축하하며 즐거워 해야 할 때 기꺼이 노래하며 춤을 출 때가 있다. 이것은 우리 민족의 한 모습이기도 하다. 나에게 얻게 되는 자그마한 기쁨에도 우리는 이렇게 기뻐하고 즐거워 한다.

다시 성경으로 돌아 오면, 다윗의 삶 자체가 찬양이었고, 마리아도(눅1:46-56),사가랴도(눅1:67-79), 시므온도(눅2:29-32), 심지어는 최후의 만찬까지도 찬양으로 마침을 볼 수 있다.(마26:17-29,30) 하나님에 대한 은혜와 사랑에 대하여 찬양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기뻐하심이 함께 하며 경건한 삶을 살아가는 은혜를 더욱 누리게 되는 것이다.

왜 찬송하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함이라.

출처 : 내 사랑 중국 ♡ MyLove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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