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와 이슬람교 1,300년 피의 역사
십자군전쟁에서 이라크전쟁까지
미국과 중동의 대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끝없는 전쟁, 기타 현존하는 세계의 거의 모든 분쟁은 이슬람 세력과 서구 사이의 갈등이다. 이 거대한 싸움의 기원은 이슬람교가 탄생한 7세기 무렵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 첨예한 갈등의 역사 1,300년을 집중조명했다.
9 ·11 테러 이후 지난 1년간 미국은 테러에 대한 보복으로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하여 탈레반 정권을 무너뜨렸고 이제 이라크를 치려고 여론몰이를 하고 있다. 이라크 공격은 이슬람권은 물론 전 세계 대부분의 국가가 반대하고 있으며 심지어 미국 내에서조차 반대가 있다. 이 전쟁은 자칫 기독교권과 이슬람권의 문명충돌로 이어져 인류의 재앙으로 발전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마저 있다.
그러나 문명의 충돌을 넘어 문명간 대화를 시도하는 사람들조차 그 과정에서 종종 이슬람권을 이해하지 못해 당황하거나 서구 시각으로 이슬람권을 해석해 대화가 다시 충돌로 이어지는 우를 범하고 있다. 이슬람 사회는 지금 지구상에 존재하는 다른 사회들과 상당한 차이점이 있고 보통 시각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특징이 있다. 그러므로 서구 사상에 익숙한 사람들은 이슬람 사상에 접근하는 것이 쉽지 않다.
서구의 역사가들은 인류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들을 선정할 때 항상 무하마드를 꼽는다. 하지만 실제로 서구는 무하마드와 이슬람을 오랜 기간에 걸쳐 집요하게 왜곡했다.
역사적으로 살피자면 서구는 중세 시대부터 이슬람을 왜곡하기 시작했다. 신의 이름을 걸고 일으킨 십자군 전쟁 역시 이슬람에 대한 유럽인들의 극단적인 열등감이 폭발한 결과였다. 현재의 국제상황을 문명충돌로 보는 견해도 이런 서구인들의 왜곡 가운데 하나다. 이슬람 문명은 서구 문명과 충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슬람은 자체 규범과 법을 가지고 있고, 타 문화권의 생존권을 보장하는 관용적 문명이기 때문이다.
중세부터 시작된 서구의 이슬람 왜곡
7세기에 시작된 이슬람교는 인류 역사상 가장 빠르게 전 세계로 전파된 역동적인 종교이며 문화다. 610년 무하마드가 알라의 계시를 받아 시작된 이슬람교는 무하마드가 622년 메디나로 이주한 후 그곳에서 최초의 이슬람 공동체인 ‘움마’를 형성하는 데 성공하며 급속히 팽창하기 시작했다.
무하마드 사망후 정통 칼리프 시대(632~61)에 세확장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아라비아 반도는 물론 그 주변국들이 점차 이슬람화되어 이슬람 문명권의 기반을 구축한 것이다. 이러한 기반 위에서 아랍제국인 우마이야 왕조(661~750)를 거쳐 아랍인과 비아랍인이 이슬람교와 이슬람 문명이라는 공통된 이념에 기초하여 통일 이슬람 제국인 압바스 왕조(750~1258)를 건설했다.
문명공동체로서의 이슬람 문명권은 이 압바스왕조 때부터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13세기 몽골의 침입을 받아 압바스 왕조가 무너진 뒤 중앙집권적인 통일 이슬람 제국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지만 이슬람교의 부단한 전파와 더불어 도처에 이슬람 국가들이 세워져 이슬람 문명권은 점점 퍼져 나갔다.
지역적으로 보면 이슬람은 아라비아 반도에서 북으로 뻗어나가 7세기 초반에 고대문명의 발상지인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지역으로 세력을 넓혔다. 그 결과 이 두 지역 사이에 있는 팔레스타인과 시리아 지방이 이슬람화 되었고, 13세기에는 소아시아반도가 이슬람 영역이 되었다.
그보다 앞선 7세기 후반에는 동쪽으로 이란고원을 석권했고, 8세기 초에는 중앙아시아와 인도 대륙의 북서부까지 진출하였다. 8세기 중엽에는 고구려 유민인 고선지 장군이 이끄는 중국의 당나라 군대를 키르키스스탄의 탈라스에서 격파해 중앙아시아 전역이 이슬람권의 영향 아래 들어가게 되었다.
그 후 다시 동쪽으로 중국의 수도인 장안 및 내륙지방은 물론 만주와 한반도까지 무슬림 상인들이 드나들면서 이슬람을 전파했다. 한편 해상 실크로드인 뱃길을 통하여 남방으로 진출한 무슬림들은 13세기 이후 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 및 필리핀의 민다나오 섬에까지 그 위력을 떨쳤다.
이집트에서 서쪽으로 진출한 이슬람은 7세기 후반에는 지중해 연안을 따라 리비아·튀니지·알제리 및 모로코로 뻗어나갔다. 북아프리카를 석권한 이슬람은 이 대륙의 해안과 내륙지방으로 나아가 동쪽 해안의 소말리아·에티오피아·케냐·탄자니아·잔지바르·모잠비크·마다가스카르에 이르렀고 서쪽해안으로 모리타니아·세네갈·감비아·니제르 및 나이지리아로 진출하였으며, 내륙으로는 차드·수단·우간다에도 뿌리를 내렸다.
북아프리카 일대를 석권한 것은 이슬람 초기였으나 동서 해안 지역과 내륙 지방으로 진출한 것은 14, 15세기 이후였다.
유럽을 석권한 이슬람
8세기 초에 이슬람은 북아프리카를 전진기지삼아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정복하고 프랑스까지 침략하였다. 이베리아 반도를 정복한 이슬람은 700년 이상이나 그곳에서 권세를 누렸다. 이후 13세기부터 기독교 세력의 재정복에 밀리다 17세기 초에는 그 흔적만 남기고 사라지게 되었다.
9세기에는 시칠리아를 정복하고 이탈리아 본토를 공격하였다. 특히 846년 시칠리아에서 출발한 무슬림 해군은 티베르 강을 따라 이탈리아의 로마를 침공하기도 하였다. 잇따른 무슬림 군대의 침략은 기독교 세계의 반격을 불러왔다. 그러나 성지를 탈환하기 위한 십자군 원정대의 수많은 시도는 결국 수포로 돌아갔다.
그 이후 유럽에서 보여준 기독교 세계의 대응은 비교적 성공적이었다. 11세기말 시칠리아에서 무슬림들을 축출하였고 1492년에는 스페인을 재정복했다. 700년 이상이나 지속된 무슬림 통치를 끝내기 위한 서구인들의 오랜 투쟁이 마침내 결실을 맺은 것이다. 이러한 승리는 기독교인들이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향해 뻗어나가는 계기가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 세계에 대한 무슬림들의 위협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1237~40년 킵차크 공국으로 알려진 타타르족이 유럽의 동부 지역과 러시아를 정복하였다. 1252년 왕을 비롯해 부족 전체가 공식적으로 이슬람에 귀의하자 여러 동부 유럽의 국가들과 함께 러시아는 무슬림 통치 아래 들어갔다. 그리하여 이른바 타타르의 굴레에서 자신들을 해방시킨 15세기 후반까지 러시아인들은 무슬림의 통치를 받았다.
한편 오스만 터키 제국은 아톨리를 정복하고 15세기 중반에 동로마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을 장악하고 발칸 반도를 점령하여 식민지화하였을 뿐만 아니라 빈을 두 차례나 공격하여 유럽의 심장부를 위협하기도 하였다.
15세기 중반 비잔틴 제국을 멸망시킨 오스만 터키 제국의 이슬람 세력은 발칸 반도로 진출하여 루마니아·불가리아·알바니아·옛유고슬라비아의 남부지역 및 그리스를 석권했다. 이들은 코카서스 반도로도 뻗어나가 옛소련의 아제르바이잔공화국과 코카서스 지방도 이슬람권으로 만들었다.
1453년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흐메트 3세가 유럽 문화의 교두보였던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후 터키 무슬림들은 이후 근세 400년 동안 문화적 야만인으로 규정한 유럽인들을 지배하고 호령하면서 오스만 제국의 시대를 누렸다.
이상과 같이 이슬람 세계는 인류 역사상 가장 빠르게 전파되어 공간적으로는 주변 문화의 수렴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는 고대문화까지 재생시켜 이슬람 문화라는 종합문화를 창출하였다. 이렇게 이슬람 문화가 빠르게 전파된 이유는 특유의 융화력이었다. 아랍인은 정복을 통하여 역사상 최초로 오늘날의 인도와 중국의 경계선 지역에서 그리스·이탈리아 및 프랑스의 변경 지역에 이르는 방대한 지역을 통합하였다. 이 방대한 지역을 처음에는 군사적, 정치적 권력으로 통치했고, 그후 훨씬 오랜 기간 아랍어와 믿음을 통하여 한 덩어리로 묶어 놓았다.
그러므로 아랍인들이 만든 진정한 기적은 군사적 정복보다 오히려 정복된 지역을 문명화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슬람교는 서로 맞서던 두 문화, 즉 그리스·로마 및 다양한 지중해 문화와 인도·중국문화와 오랜 기간 접촉했던 페르시아 문화를 융합했다. 서로 다른 수많은 인종·신앙 및 문화가 이슬람 영역 내에 공존하면서 새로운 문명이 생성된 것이다. 역사학·지리학은 물론 철학·천문학·대수학·물리학·화학·의학·연금술 등이 이슬람 세계에서 독창적으로 발전하였다.
그리하여 중세 유럽이 암흑의 상태에 있을 때도 세계 문화의 정체를 막았다. 이슬람 학문과 과학이 유럽에 전파되어 르네상스의 기초가 되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고 8~16세기 동안 육·해상 실크로드의 주역으로 활동한 무슬림은 이슬람 문화를 동서로 퍼뜨렸고 결과적으로 세계 문화의 다양화와 일체화에 이바지했다.
이슬람 문화가 만든 유럽의 르네상스
유럽이 암흑의 중세 시대를 맞기 전부터 이슬람은 고도로 발달된 문명을 통해 그들의 사회를 유지하고 있었다. 7세기 이슬람 대제국이 건설되었을 때만 해도 유럽은 후진 지역이었다. 이 기간 동안 그리스와 로마 고전들은 빠짐없이 아랍어로 번역되었다. 이렇게 외래문명을 받아들여 발전한 이슬람 문명은 13세기를 전후하여 라틴어로 번역되어 낙후된 유럽으로 다시 전달되기 시작했고 이슬람의 지리학·천문학·의학·수학 등이 유럽 대학에서 교재로 읽히게 되었다.
이슬람 문화가 유럽 문화에 얼마나 절대적인 공헌을 하였는가 하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아라비아 숫자다. 우리가 아라비아 숫자라고 부르는 것은 원래 인도 숫자다. 이 인도 숫자를 아랍인들이 수입하여 여기에 ‘영’의 개념을 정립하여 십진법을 완성하였고 이 숫자가 유럽으로 전파되어 현재까지도 인도 숫자가 아닌 아라비아 숫자로 불린다. 이러한 과정을 계기로 유럽은 잃었던 문명의 전통을 되찾기 시작했으며 이를 발판으로 르네상스를 맞아 급기야 근대에 와서 주도권을 잡게 된다.
그러나 유럽이 암흑기를 벗어나 위대한 문명을 건설했을 때조차 막강한 이슬람 제국에 대한 예전의 두려움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유럽은 이 당당하고 역동적인 문화에 아무 영향도 주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결국 신의 이름을 빌려 자신을 불안하고 열등하게 만드는 존재에 대한 전쟁을 감행한 것이다.
유럽의 식민지로 떨어진 이슬람권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정복했을 때 이슬람교도들을 자신들과 같은 인간으로 볼 수 없었다. 그들은 양민을 무차별 살육했으며, 심지어 같은 유럽인들에게조차 충격적인 대학살을 저질렀던 것이다. 그후 이슬람교도들은 신성한 곳에 절대 들어올 수 없는 더러운 기생충으로 간주되었다. 십자군 사이에서 이슬람교도들을 부르는 공식 은어는 ‘더러운 쓰레기’였다.
그러나 12~13세기 십자군 전쟁은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았으며, 그후 오스만 터키는 유럽에 이슬람교를 전파했다. 이런 두려움 때문에 서구 기독교도들은 이슬람에 대해 도저히 이성적이고 객관적인 시각을 가질 수 없었다. 그들은 이슬람교에 대한 두려운 환상을 만들어내는 동시에 자신들의 불안이 반영된 이슬람교에 대한 왜곡된 이미지를 발전시켰다.
따라서 유럽인들에게 이슬람의 영적 지도자 무하마드는 어머니들이 말 안 듣는 아이를 겁주기 위해 써먹고는 했던 이른바 악령이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왜곡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십자군전쟁 당시 불려진 ‘롤랑의 노래’나 단테의 ‘신곡’과 같은 문학작품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와 같이 역사적으로 뿌리 깊은 연원을 갖는 무하마드와 이슬람에 대한 유럽인들의 증오와 불신은 자신들의 역사적인 불안감과 문화적 열등감의 표현이었다.
이후 이슬람권은 유럽에 역전되어 18~19세기 들어서는 모두 유럽의 식민지가 된다. 20세기 들어 지금의 나라로 독립했지만 서구 제국주의의 분할통치 전략으로 수십개의 왕정으로 갈라진 상태다. 이 왕정국가들은 대부분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서구에 굴종하면서 제대로 국민 편에 선 적이 없다.
이들 국가는 크게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두 체제로 나뉜다. 그러나 사회주의 체제 국가들은 대부분 경제가 완전히 망가졌으며 자본주의 체제를 택한 국가들은 거개가 독재로 흘렀다. 결국 이슬람 사회에서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두 가지 체제를 다 해보았으나 둘 다 제대로 안 됐으므로 이제는 이슬람식으로 하겠다는 정서가 일반적이다. 이런 정서를 서구에서는 원리주의라고 싸잡아 얘기하고 있다.
이 같은 이슬람 원리주의 운동은 전통 이슬람이 부패 무능하여 무슬림 사회가 쇠퇴 몰락하자 이를 재생 부흥하겠다는 개혁 차원에서 18세기 중엽 자발적으로 시작된 흐름이다. 서구 열강의 중동 진출 이후 외압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고 무슬림 국가 대부분이 서구 열강의 식민지 또는 그 영향권에 들어가 사회적으로 파탄에 이르자 이 운동은 더욱 강화되었다. 물론 그 구호는 원래의 이슬람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즉, 이슬람의 원점이며 법원인 꾸란(코란)과 하디스(무하마드 언행록)·이즈마(합의)·끼야스(유추) 등에서 해결 방안을 찾자는 것이다. 이 법원에 입각하여 해석상 문제가 없으면 수용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슬람 원리주의는 원래의 것으로 돌아가는 것과 시대적 요청을 조화시키고자 하는 노력인 것이다. 18세기 중엽 이후 이 현상은 시대 변화에 따라 부흥주의·개혁주의·급진주의적 특성을 지니고 있으며 오늘날까지 유지되고 있다.
부흥주의자들은 비이슬람권 세계와 상관없이 이슬람 사회를 스스로 분석 비판하여 그들 사회의 모순을 개혁하려고 하였다. 이는 이슬람이 가장 완벽한 체제라는 인식 아래 사회 모든 곳에 이슬람 정신을 구현하려는 노력이었다. 따라서 이 경향은 자연스럽게 이슬람의 종교적 정신을 특히 강조하였다.
개혁주의자들은 이슬람 사회의 많은 부분들이 비 무슬림 국가보다 낙후되어 있는 현실을 인식하고 국제적 시각에서 이슬람 공동체의 단점을 보완 개혁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는 이슬람 정신에 유럽의 앞선 기술적 분야를 접목하려는 노력이었다.
이슬람 급진주의는 부흥주의와 개혁주의가 정부의 탄압을 받기 시작하자 억압에 대한 반발로 시작되었다. 이들은 위의 둘을 혼합하였으며 지하드를 표면에 내세우고 있다. 이와 같이 개혁에 대한 가장 중요한 압력은 이슬람 원리주의 운동에서 출발하고 있다. 이러한 개혁의 욕구가 증가하는 원인은 의료시설의 확충으로 인한 인구 급증과 젊은층의 비중이 높아진 탓이다. 정부의 권력남용과 부정행위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이 일반화된 것도 한몫 거들었다. 이런 불만은 경제적 어려움에 직면한 나라에서 더 심하게 나타나고 있다.
미국은 지구상에서 가장 타락한 나라
서구가 지목하는 문제의 원리주의는 이스라엘 건국 이후 본격적으로 등장한 급진주의적 원리주의다. 이 원리주의집단은 극소수다. 따라서 이슬람 정신을 강조하는 모든 단체들을 급진주의적 원리주의 단체로 오인하고 비난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급진적 원리주의가 등장하게 된 원인은 무슬림들이 미국을 지구상에서 가장 타락하고 퇴폐한 문화로 여겨 배척하는 경향이 심하기 때문이다. 무슬림들의 미국에 대한 반감은 사실상 그 역사적 뿌리가 그리 길지 않다. 현대 미국의 퇴폐적인 성문화나 극단적인 물질주의 문명에 대한 반감도 이유 중 하나지만 기본적인 뿌리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간에 얽힌 문제에서 출발한다고 할 수 있다.
중동 지역은 서구 유럽 제국주의 시절 대부분 유럽 식민지로 전락하여 그들의 식민통치를 맛보았다. 이곳 사람들은 영국과 프랑스의 지배를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후 이 지역에 진출한 미국에 대한 반감이 영국과 프랑스에 대해서보다 크다. 이는 미국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에 얽힌 문제에 개입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과 팔레스타인들은 같은 아브라함의 자손들로 그 역사적 관계는 굉장히 오래 되었다. 기원 후 2세기에 유대인들이 로마에 쫓겨나거나 스스로 떠난 이후 십자군 원정 기간을 제외한 거의 모든 기간에 팔레스타인인들이 이 땅의 주인으로 있었다.
그러나 19세기 유럽 대부분의 나라들이 이른바 ‘안티 세미티즘’(반유대주의)을 국내 통치수단의 하나로 도입해 유용한 정치적 무기로 사용했다. 따라서 유대인들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었다. 이런 박해 때문에 유대인들은 시온주의라는 자구책을 찾게 되었다.
당시 팔레스타인은 오스만 터키 제국내 아랍연방의 하나였다. 유대인들은 성서에 기록된 약속의 땅인 팔레스타인 지역에 지속적으로 정착촌을 건설하는 방법으로 국가건설 준비를 했다.
영국은 1차 세계대전을 치르면서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이 지역에서 반터키 운동을 촉발시켰다. 전쟁에서 승리할 경우 유대인과 아랍인들에게 터키 지배에서 벗어난 독립국가 건설을 지원하겠다는 이중의 비밀 약속을 맺은 것이다. 전쟁후 이러한 비밀 약속을 이행할 수 없었던 영국은 팔레스타인 지역을 위임 통치령으로 편입하였다.
이후 대규모 유대인들이 이주하기 시작하였으며 두 진영 간에 갈등이 시작되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미국은 이 지역에 깊숙이 관여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후 1947년 유엔은 팔레스타인 분할 안을 의결했다. 아랍인들은 미국이 이러한 과정을 주도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분할이 유대인에게 유리하게 되어 있어서 이 지역 올리브 농장과 곡창지대의 80%와 아랍인 공장의 40%가 유대인에게 배정되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이스라엘 건국 이후 팔레스타인은 난민 지위로 떨어지게 되어 그들의 분노는 극에 달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에는 심각한 분쟁이 발생했다. 1948년 5월 이스라엘이 건국을 선포한 다음날 전쟁이 터졌는데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이스라엘이 압도적으로 승리했고 그 후 발생한 4차 전쟁 때까지 아랍 진영은 여지없이 그들의 자존심을 구기게 된다.
아랍인들은 이러한 결과가 미국의 이스라엘 원조 때문이라고 여기며 그 반감을 키워 나갔다.
이는 아랍인들의 자부심에 대한 상처이기 때문이다. 이미 기술한 바와 같이 아랍 세력은 15~16세기 정도까지는 유럽을 능가하는 세력으로 군림하다 그 후 유럽에 역전되기 시작하여 18, 19세기에 들어 최악의 상태인 식민지로 전락하게 되었다. 20세기 들어 지금의 나라로 독립하고 스스로 반성하는 의미에서 여러 개혁사상들이 나왔으나, 이 모든 것들이 제대로 성공하여 정착되지는 못했다. 서구의 정치·경제에 예속된 데 대한 분노와 한을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을 등에 업은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무참히 당하자 아랍 세력의 분노는 극에 달하게 되었다
아랍인의 자존심 무참히 짓밟은 이스라엘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사회를 개혁하고자 하는 이슬람 원리주의는 자연히 반정부적 성격을 띠게 되어 집권 세력들과 갈등을 빚으며 탄압받게 된다. 이 탄압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혹독해졌다. 자연히 원리주의 단체들도 지하로 숨어 그들의 존재를 알리기 위한 행동 방법으로 게릴라식 테러를 벌이기 시작하였다.
결국 이슬람 문명권과 기독교 문명권의 충돌처럼 보이는 요즘의 사태들도 따지고 보면 아랍 국민들의 감정을 제대로 대변해 주지 못하는 현 정부에 대한 반감이 일차적이며, 그 부패하고 나약한 현 정권을 뒤에서 도와주는 서구 세력에 대한 반감이 이차적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서구 세력의 대표주자인 미국에 대한 반감이다.
서구 세계에서는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어 있지만, 이슬람 세계에서는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어 있지 않다. 이런 연유로 이슬람 원리주의의 근본 배경에는 이슬람의 정교일치 사상이 깔려 있다.
미국과 이라크의 갈등, 미국과 이란의 갈등,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갈등, 미국과 리비아의 갈등, 소련과 아프가니스탄의 갈등, 보스니아와 세르비아의 갈등, 소련과 체첸의 갈등, 소말리아 내전, 수단 내전, 레바논 내전, 프랑스와 알제리 이슬람 세력의 갈등, 인도와 파키스탄의 카슈미르 갈등의 배경에는 바로 이슬람세력과 서구 사이의 갈등이 내재되어 있다.
이슬람 사회도 급격히 변화하고 있다. 서구 열강의 압제를 경험한 신생 아랍 국가들은 독립 후 채택한 사회주의 이념과 경제체제가 더 이상 국제경쟁력이 없고 국민 복지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이 국가들은 서구와의 협력관계를 적극적으로 찾고 있다.
친서방 성향의 온건 왕정국가들 조차 폐쇄적이고 권위적인 정치에서 서서히 민주주의와 인권에 전향적인 자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더욱이 요르단·모로코·시리아·바레인에서 젊은 국왕들이 연이어 등장하면서 이슬람권 전역에서 세대교체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다.
강경한 반미국가인 리비아도 최근 미국과 관계를 개선해 경제제재를 철폐하는 데 힘쓰고 있다. 이란은 하타미 대통령의 개혁정책으로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하고 있다. 무엇보다 하타미 대통령은 이슬람권과 서구의 갈등을 예단한 새뮤얼 헌팅턴의 ‘문명충돌론’을 서구의 제3세계 지배 음모론으로 신랄하게 비판하고, ‘문명간 대화’라는 새로운 담론을 제창하여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로부터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스스로도 이탈리아와 바티칸 교황청 방문을 시발로 유럽·서구 국가들과의 관계증진에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하타미의 이런 노력도 부시의 ‘악의 축’ 발언 이후 국내에서 도전받고 있다. 부시 정권은 경제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대화의 장으로 나오는 이슬람권의 노력에 찬물을 끼얹고 있는 것이다.
9·11 테러의 영향으로 세계는 제1세계와 제3세계간에 심각한 갈등과 적대감에 직면해 있다. 반테러리즘이라는 이름 하에 인종차별과 억압이 강화되고 있으며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의 악순환도 깊어지고 있다.
西歐의 양보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평화를 위한 봉사와 희생과 인내를 심각하게 생각하고 실천할 때다. 이를 위해서는 지난 1세기 동안 지배하면서 착취하고, 그 자원을 배경으로 선진 공업국으로 또 경제·군사대국으로 발돋움한 서구의 양보가 필요하다. 21세기를 맞아 서구는 빼앗긴 자들의 권리와 억울한 응어리에 좀더 유연한 자세로 접근하여 그들에게 돌파구를 마련해 주어야 한다.
동시에 무슬림들도 중동의 근세 역사에 대한 분노와 좌절을 극복하고, 새로운 미래에 걸맞은 방향으로 체제를 개혁하고 의식 전환을 서둘러야 한다. 그들은 이미 서구 체제에 대한 무조건적 반대와 대항보다 전통적인 이슬람 규범 속에서 새로운 발전과 변화를 수용하자는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이는 서구식 제도나 체제를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이슬람적인 틀에 바탕을 둔 내적 혁신과 적절한 재해석의 방법을 통해 사회의 발전과 현대화를 추구하는 것이다.
따라서 무슬림들도 이제 그들의 한을 털어 버리고 지난 세기까지 수많은 사상, 종족, 문화 등과의 접촉을 이루어왔고 그 시대에 새롭게 발생하는 문제점을 나름대로 치유해 왔듯 다양한 종교들이 공존하는 오늘날의 세계에서도 그 유연성을 보여줘야 한다.
우리가 믿음이 진리라는 사실을 아무리 굳건히 지킨다 해도 세상에는 다른 종교가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면 그 종교의 표현 형식으로 나타난 다른 문화와 문명도 인정할 수 있고 문명의 공존과 대화에 대한 이해도 가능할 것이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을 경우 인류에게는 9·11 테러 사건과 같은 전쟁과 갈등이 끊이지 않을 것이다. 평화를 위한 희생과 인내가 절실하고 시급한 시대다.
- 글: 이원삼 교수·이슬람학
- 출처: 월간 중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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