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쪽짜리의 이 보고서를 작성한 데이비드 호크氏는 UN의 캄보디아인권본부 책임자를 지낸 인권전문가로 2002년 8월부터 2003년 2월까지 서울을 세 차례나 방문하여 북한의 강제노동수용소에 수용되었거나 경비원으로 근무했던 탈북자들을 만났다. 위성사진은 디지털글로브社와 스페이스이머진社에서 입수한 것이다.
호크씨는 탈북자들의 증언을 기초로 관리소, 교화소, 집결소, 노동단련대 등 다양한 이름으로 운영되고 있는 강제노동수용소의 실태를 고발하면서 수감자들의 고난은 상상을 초월한다고 말했다.
이 보고서는 국제사회, 특히 중국과 한국에 대해서 여러 가지 건의를 했다. 중국은 탈북자 강제송환을 중단하고, UN 난민기구가 중국內 탈북자와 접촉할 수 있게 해야 하며, 국제사회는 압력을 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말했다.
『우리가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눈을 감는다면, 북한 정권은 용기를 얻어 더 많은 사람들을 투옥해서 노예로 만들 것입니다』
다음 글은 이 보고서를 요약한 것이다. 글 중간의 소제목은 月刊朝鮮에서 붙인 것이다]
학살조사 전문가 데이비드 호크의 북한의 강제 수용소 실태 보고서 요약
북한의 아우슈비츠에서 벌어지고 있는 人間말살의 현장을 고발한다
데이비드 호크(David Hawk)는 1964년 민권운동 그룹과 교회단체들을 한데 묶어 선거참여 캠페인에 뛰어든 이래 40년 가까이 인권운동을 펼쳐 왔다. 캄보디아 주재 유엔 난민 고등판무관(1996년 6월~1998년 1월)을 지냈고, 국제사면위원회의 르완다-브룬디 조사관(1995년 6~7월)을 역임한 학살조사 전문가이다.
최근에는 미국의 「지뢰금지협약」(1997년) 가입을 위한 타당성 조사를 주도했다. 현재 미국 워싱턴에 있는 비영리 민간단체인 「북한인권위원회」에서 북한 정치범 수용소 문제를 연구 중인 그는 이 보고서를 위해 지난 2년여 동안 50여 명에 이르는 탈북자를 인터뷰했으며, 2002년 8월부터 2003년 2월까지 세 차례 서울을 방문했다.
[편집자注: 미국의 북한인권 관련 초당파 인권단체 「북한인권위원회」는 2003년 10월22일 북한이 운영하고 있는 방대한 정치범 수용소의 실태를 폭로하는 보고서 「숨겨진 수용소: 북한의 강제노동수용소 폭로」를 탈북자의 증언과 그 현장을 보여 주는 위성사진과 함께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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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부 북한의 강제노동수용소
[1. 관리소]
金日成, 『3代에 걸쳐 씨를 말려라』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인 관리소는 수십 km2의 지역에 산재한 일련의 수용소로 구성되어 있다. 그 수는 일정치 않지만, 대체로 북부지방 산악지대의 계곡에 위치하고 있다. 관리소 하나에 5000명 내지 5만 명 가량이 수용되어 있고, 북한 전체에는 15만~20만 명 가량의 정치범이 이곳에 있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이곳에는 정치범으로 단정된 사람뿐만 아니라 그 가족 3代도 수용되어 평생을 가혹한 환경 속에서 광산이나 벌목, 농산품 가공 같은 일을 하고 있다.
관리소는 보통 철조망으로 둘러싸여 있고, 무장한 경비병이 경계를 하고 있다. 관리소 안에는 정치범이나 그 가족 단위로 수용하는 울타리로 폐쇄된 마을이 있다. 또 종신형을 선고받은 사람들이 사는 완전통제구역과 나중에 석방될 수 있는 사람들이 수용되는 혁명화구역이 있다. 가족과 함께 살고 있는 완전통제구역에서는 특혜받은 사람만이 결혼을 해서 아이를 가질 수 있다. 제18 및 제17 관리소에서 예외적으로 알려진 것을 제외하고는 어느 관리소에서도 외부와의 서신교환을 금지하고 있다.
관리소의 특이한 제도 한 가지는 연좌제다. 이 제도는 1972년 金日成이 『분파주의자나 敵은 누구를 막론하고 3代에 걸쳐 씨를 말려야 한다』고 선언한 데 근거를 두고 있다고 한다. 함경북도의 제11호 관리소에서 경비원으로 근무했던 사람의 증언에 의하면, 이 표어를 나무판에 새겨 관리소 경비본부에 걸어 놓았다고 한다. 국가보위부 보위원이었던 윤대일의 증언에 의하면 이런 관리소에 수용된 사람은 적게 잡아도 20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또 하나 놀라운 사실은 수용된 사람들이 체포, 기소, 재판 등 정식 사법절차를 받은 일이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자신을 변호할 방법이 없다. 이들은 그저 끌려가서 심문을 받고, 자백을 하라는 강요를 받은 다음 관리소로 이송되고 있다. 그들의 가족 역시 아무런 영문도 모른 채 관리소로 이송된다.
사람들은 형편없는 식량과 생활조건 속에서 가혹한 노동을 해야 한다. 배급식량은 겨우 기아를 면할 정도다. 그래서 이들은 수용소內 동물, 식물, 나무 껍질, 쥐, 뱀 같은 것을 닥치는 대로 먹지 않을 수 없다.
관리소에 수용된 사람들은 광산에서 석탄·철·금 같은 것을 채굴하기도 하고, 근처 산에서 나무를 자르기도 한다. 봄과 가을에는 농장에 나가서 일을 한다. 이들은 하루 12시간 이상, 거의 휴일 없이 일한다. 유일한 휴일은 신년과 金日成 및 金正日의 생일 같은 국경일뿐이다.
요덕에 있는 제15호 관리소內 혁명화구역과 제8호 관리소內 한 구역을 제외하고 관리소에는 재교육이 없다. 이들은 사회로 다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관리소 규칙을 위반하거나, 일을 열심히 하지 않으면 식량배급을 줄이거나, 관리소內 구치소에 집어넣는다. 서 있거나 누울 수도 없는 이곳에서 몇 주일 지내면 혈액순환이 안 되어 죽는 수도 있다.
이처럼 가혹한 상황 때문에 많은 사망자가 발생하고 있다. 여기서 탈출하려다 잡히거나 중요한 규칙을 위반하면 다른 수감자들 앞에서 공개처형을 한다.
주로 제15호 관리소의 혁명화구역에서 탈출한 사람이나 경비원들의 증언에 의하면, 그들이 그곳에 처음 도착했을 때 그곳 사람들이 키가 작고, 마르고, 등이 굽는 등 여러 가지 신체적 결함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또 많은 사람들이 작업 중 사고로 팔다리를 잃거나 동상으로 손가락, 발가락이 없었다고 한다. 半기아 상태 때문에 밀고자들이 많이 생겼고, 수감자들 사이에 불신과 적대감이 조성되었다. 그들은 먹을 것이나 죽은 사람의 옷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싸웠다.
관리소는 내무성(1998년까지 사회안전부)의 경찰조직인 인민보안성이 운영하고 있다가 평안남도에 있는 제18호 관리소를 제외하고 모두 국가보위부로 넘겨졌다. 1973년에 창설된 국가보위부는 金正日에게 직접 보고하고 있다. 관리소 외곽은 북한군 중에서도 특별한 부대가 경비를 한다.
관리소는 원래 10여 개가 넘었지만 몇 개가 폐쇄되었다. 특히 중국 국경지대에 있던 수용소가 폐쇄되었고, 현재 6개가 운영되고 있다고 한다. 그중 4개는 이 보고서의 인터뷰에서 확인되었다.
1956년 완전통제구역 처음 설치
북한의 정치범은 전형적인 공산국가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 처음에는 반동분자, 그 뒤에는 노동당과 軍 및 국가기관에서 숙청된 사람들이었다. 그 후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는 金日成 체제에 맞지 않는 사람들을 수용하여 경제적 가치를 생산하는 곳으로 변했다.
북한의 원시적인 강제노동수용소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반혁명 분자를 제거하기 위해 창설되었다. 수용된 사람은 지주, 對日 부역자, 종교 지도자, 월남한 사람들의 가족이었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미군과 한국군에 협력한 사람들도 추가되었다.
金日成이 권력을 장악한 다음에는 黨과 관료조직 및 軍에서 많은 사람들이 숙청되고 투옥되었다. 前 북한 노동당 비서 黃長燁씨의 증언에 의하면 1956년 숙청된 사람들을 수용하기 위한 완전통제구역이 창설되었다고 한다. 南勞黨 및 소련 지지 세력, 중국 연안파는 거의 모두 숙청되었다. 그 후 金日成 개인숭배 운동이 벌어지고, 그의 아들 金正日 승계 작업이 벌어지면서 숙청은 더욱 그 폭이 넓어졌다. 北送(북송)된 교포들도 일본의 자유주의와 자본주의에 오염되었다는 이유로 강제노동수용소로 보냈다.
1990년대에는 소련이나 東유럽에서 공부를 했거나 외교 공관원으로 일했던 사람들이 사회주의 체제의 붕괴를 경험했다는 이유로 강제수용소로 갔다. 불만을 품을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나, 신문에 실린 金日成 또는 金正日의 사진을 잘못 다룬 사람도 강제수용소로 갔다. 한국전쟁 때 한국군 포로, 베트남전쟁 때 越盟(월맹)으로부터 인수한 한국군 포로도 이곳에 수용되었다. 납치된 어부를 포함한 많은 남한 사람들과 일본인도 이곳에 수용되었다.
이들의 존재가 국제적으로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은 1974년 앰네스티 인터내셔널이 베네수엘라人 알리 라마다와 프랑스人 자크 세디오의 석방운동을 벌이기 시작한 다음이었다. 이들은 북한 외무성에 고용되어 金日成의 저서를 프랑스語와 스페인語로 각각 번역하다가 체포되었다. 라마다가 석방되자 앰네스티는 1979년 처음으로 북한 정치범 수용소의 실태를 고발하는 문서를 발간했다. 1967년에서 1974년까지 투옥되었던 라마다의 이야기는 최근에 북한을 탈출한 사람들의 증언과 아주 흡사하다.
알리 라마다의 고발
1988년 12월, 미네소타 법률가들의 국제인권위원회와 「휴먼라이트워치 아시아」는 국제 NGO(비정부 국제단체)로서는 처음으로 북한의 강제수용소 실태를 폭로하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 보고서에는 강제수용소의 조직과 이에 관련된 북한 헌법 및 법률제도가 포함되어 있다.
1990년대 중반부터는 강제수용소를 탈출한 사람들의 증언이 나오기 시작했다. 1992년 요덕의 제15호 관리소 혁명화구역으로부터 姜哲煥(강철환)과 安赫(안혁)이 중국을 경유하여 남한으로 탈출, 서울에서 그 실태를 폭로하는 책을 발간했다. 1994년에는 4개의 정치범 수용소에서 경비원으로 근무했던 安明哲(안명철)이 남한으로 탈출하여 이 시설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제공했다.
1996년, 남한의 統一院이 탈북자의 증언을 토대로 한 북한의 인권실태를 매년 발간하기 시작했다. 1990년대 말에는 식량부족으로 많은 북한인들이 중국으로 탈출하기 시작했고, 그중 상당수는 체포되어 관리소나 교화소에 투옥되었다. 그러나 2000년 이후에는 많은 사람들이 중국을 경유해서 남한으로 탈출할 수 있었고, 그들의 증언이 남한의 신문이나 잡지에 소개되었다.
2002년 12월, 파이스턴 이코노믹리뷰가 함경북도 회령에 있는 제22호 관리소의 정밀한 위성사진을 공개했다. 당시 이 주간지의 서울특파원이었던 존 라킨은 낡은 소련의 북한 지도에서 제22호 관리소의 경도와 위도를 알아내고, 安明哲의 협조로 회령에 있는 수용소의 위치를 확인해서 한 위성사진 회사로부터 그 사진을 얻을 수 있었다.
[증인과 증언]
▲알리 라마다(사리원 교화소)
알리 라마다와 자크 세디오는 북한 외무성에 고용되어 출판부에서 각각 金日成의 저서를 스페인語와 프랑스語로 번역하는 일을 하다가 1967년 체포되었다. 베네수엘라 공산당원이었던 라마다의 詩와 저서는 스페인語 사용권에서 널리 알려져 있었다. 세디오는 프랑스 제국주의자 스파이라는 혐의를 받았지만, 라마다에게는 아무런 죄목도 적용되지 않았다.
라마다는 1년 동안 내무성이 관리하는 가로 2m, 세로 1m, 높이 3m밖에 안 되는 독방에 감금되어 그저 자백하라는 강요만 받았다. 그 후 그는 극심한 영양부족으로 체중이 22kg이나 준 채 평양에 있는 숙소로 돌아갈 수 있었지만, 가택연금 상태였다. 그러나 2개월 후 그는 다시 체포되어 스파이 혐의로 20년간의 강제노역 선고를 받고 평양에서 차로 세 시간 거리에 있는 수용소에 수용되었다.
여기서 그는 3주일 동안 수갑을 찬 채 영하의 기온에서 침구도 없이 마룻바닥에서 지냈다. 그 후는 형무소 本棟(본동)으로 이송되었고, 난방도 없는 곳에서 동상으로 발톱이 빠지는 고초를 겪었다. 그가 수용된 사리원 교화소에는 6000~8000명 가량의 罪囚(죄수)가 하루 12시간 지프 부품을 조립하고 있었다. 그는 의사로부터 그 교화소에 1200명의 환자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
결국 베네수엘라 정부와 루마니아 대통령이 개입해서 두 사람은 1974년 석방되었다. 그러나 세디오는 옥중에서 얻은 병으로 프랑스로 돌아가기 전에 평양에서 죽었고, 라마다는 東유럽에서 요양을 한 후 베네수엘라로 돌아가 사리원 교화소의 이야기를 책으로 냈다.
강철환·안혁의 폭로
▲姜哲煥(제15호 관리소 1977~1987)
姜哲煥은 1968년 평양에서 출생했다. 그의 할아버지는 일본에서 빠찡꼬(슬롯머신) 사업으로 돈을 모았다. 할머니는 열렬한 金日成 지지자였고, 자원하여 북송 교포의 일원으로 평양에 갔다. 그러나 그들이 가지고 갔던 차와 가구, 그리고 은행계좌는 얼마 안 가서 모두 몰수당했다. 할아버지는 어느 날 아무런 말도 없이 갑자기 사라졌다.
몇 주일 후 한 보위부 요원이 姜哲煥의 아버지 집에 나타나 할아버지가 반역죄를 저질렀기 때문에 全가족을 요덕의 제15호 관리소로 보낸다고 통고했다. 고위 黨 간부 가정 출신인 어머니는 제외되었으나, 아버지와 이혼을 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관리소 입구에는 그저 「2915 조선인민변방순찰대」라고만 써 있었다. 그들은 곧 주변에 철조망이 쳐 있는 그 마을이 在日북송교포를 위한 혁명화구역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3년 후 그들은 평양 남쪽에 있는 승호리 관리소에서 이송된 사람으로부터 할아버지가 그곳에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姜哲煥은 아홉 살 때부터 열아홉 살이 될 때까지 이 정치범 수용소에서 살았다. 그는 1987년에 석방되어 북한 여러 곳을 방황하다가 요덕 수용소에서 처음 만났던 安赫을 다시 만났다. 그들은 함께 북한을 탈출해 중국의 延吉(연길), 北京(북경)을 거쳐 大連(대련)에 도착했다. 여기서 그들은 배를 타고 한국으로 갔다.
서울에 온 姜哲煥은 역사연구가인 피에르 리굴로와 함께 수용소 생활을 기록한 「평양의 수족관: 북한 수용소 생활 10년」을 출판했다. 북한 정치범 수용소의 실상이 서방 세계에 상세하게 알려진 것은 그것이 처음이었다. 그는 현재 조선일보에서 기자로 일하고 있다.
▲安赫 (제15호 관리소 1987~1989)
安赫은 1963년 자강도 만포市에서 충실한 黨員(당원)의 가정에 태어났다. 그는 열두 살 때 체육학교에 들어갔다. 1986년, 열아홉 살이었던 그는 중국 국경지대인 혜산에서 스케이트를 타다가 호기심으로 국경선을 넘었다가 중국 경찰에게 잡혀 북한으로 송환되었다. 그는 1년 8개월 동안 평양시 용성구 마람 지하감방에서 독방생활을 한 후 다시 1년 6개월 동안 요덕에 있는 제15호 관리소의 대숙리 혁명화구역으로 이송되었다.
이곳에서 安赫은 며칠 동안 잠을 자지 못하고 부동 자세로 앉아 있었다. 그가 본 수감자는 40명밖에 안 되었지만, 실제 수용인원은 1000명은 될 것이라고 했다. 그가 1년 6개월 동안 수용되어 있는 동안, 대숙리의 독신자 구역에는 2000명 가량이 있었다.
安赫은 처음 수력발전소 공사장에서 허리까지 차는 싸늘한 물 속에서 돌을 모아오는 일을 했다. 수십 명이 이 가혹한 공사장에서 죽거나 凍傷(동상)에 걸렸다. 그 다음에는 일본에 수출하기 위해 높은 산에서 희귀목을 잘라오는 일을 했다. 여기서도 많은 사망자가 발생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한 일은 역시 일본에 수출할 송이 버섯을 채취하는 것이었다.
수시로 공개 처형
▲김태진(제15호 관리소 1988~1992)
김태진은 1956년 중국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중국군에서 일하고 있었다. 1961년 그는 어머니와 함께 북한으로 돌아왔다. 성인이 되자 그는 평안남도에 있는 가죽공장에서 일했다. 1986년, 중국에 있는 친척을 방문한 후 18개월 동안 머물렀다가 체포되었다. 8월 중순, 그는 청진에 있는 무산군 인민보안성 감옥으로 이송되어 고문과 심문을 당했다. 4개월 후 그는 청진에 있는 보위부 구류장으로 이송되어 다시 반역행위 혐의로 잠을 안 재우고, 구타를 당하고, 영하의 온도에서 득실거리는 이와 빈대로 고생을 하면서 심문을 받았다.
1988년 3월, 그는 요덕 대숙리의 혁명화구역으로 이송되어 1992년 4월까지 4년 6개월간 수용되어 있었다. 여기서 그는 옥수수 재배와 장작 패기, 가구 만들기 같은 일을 했다. 8개월이 지나자 그는 수용소 안을 돌아다닐 수 있게 되었지만, 식량부족은 여전했다. 식량은 주로 삶은 옥수수였다. 그러나 식량사정이 더 악화되자 쥐나 뱀, 개구리까지 잡아먹었다. 그는 탈출하려다 잡힌 사람 다섯 명이 공개처형당하는 것도 목격했다.
그는 4년 6개월 뒤 석방되었으나 아내는 그를 버리고 이혼했다. 5년 후 그는 북한엔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중국으로 탈출했고, 몽골을 경유해서 2001년 6월 서울로 왔다.
▲리영국(제15호 관리소 1995~1999)
리영국은 1962년 함경북도 무산에서 열성당원의 가정에 태어났다. 그는 1978년에서 1988년까지 10년간의 의무병역 기간 중 金正日의 경호원으로 근무하면서 金正日과 특별한 사이가 되었다. 1991년에서 1994년까지 그는 평양에 있는 중앙군사학교를 다닌 후 무산의 고위당직을 맡았다.
그는 남한 KBS 방송을 들을 수 있는 라디오를 가지고 있었고, 이 방송을 들으면서 진정한 민주주의와 자유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1994년, 리영국은 남한으로 갈 생각으로 중국으로 탈출했으나, 북한 공작원들은 金正日의 개인생활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그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다. 남한 외교관으로 가장한 북한 공작원들은 그를 남한 대사관으로 데리고 가는 척하다가 북한 대사관으로 납치, 비행기에 실어 평양으로 보냈다.
리영국은 평양에서 6개월 동안 보위부 지하감방에 감금되어 갖가지 고문과 구타를 당했다. 이가 6개 떨어져 나갔고, 한쪽 귀의 고막도 터졌다. 그러나 그의 가족과 다른 친척들이 계속 金正日을 위해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무사했다. 사촌 하나는 金正日의 운전사였다.
1995년 3월, 그는 요덕에 있는 혁명화구역 독신자 수용소로 이송되어 4년 동안 매일 14시간씩 돌을 나르고 나무를 자르는 일을 했다. 94kg이었던 그의 체중은 1999년 석방되었을 때 58kg으로 줄어 있었다. 리영국은 그것이 金正日의 특별한 지시 때문이라고 믿고 있다.
1999년 4월, 리영국은 다시 중국으로 탈출했고, 2000년 5월, 大連항에서 다른 세 명의 탈북자와 함께 밀항선을 타고 남한으로 올 수 있었다.
요덕 수용소 경비병만 1000명
▲제15호 관리소(함경북도 요덕)
함경남도 요덕에 있는 제15호 관리소는 가장 잘 알려진 정치범 수용소다. 이곳에는 평생 나올 수 없는 완전통제구역과 함께 재생의 기회를 주는 혁명화구역이 있다. 이 수용소는 북쪽은 백산(1742m), 북서쪽은 모도산(1833m), 서쪽은 덕산(1250m), 남쪽은 병풍산(1152m)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 계곡은 동쪽으로부터 1250m의 채봉령을 통해 들어갈 수 있고, 여기서 흘러나오는 입석강은 영흥강에 합류되어 원산시를 지나 동해로 들어간다.
요덕군에는 31개의 里(리)가 있는데 그중 5개가 수용소 지역이다. 입석리와 구읍리가 포함된 혁명화구역은 在日북송교포, 대숙리 혁명화구역은 독신자 마을이다. 이 밖에도 평창리, 일종의 형무소인 용평리, 격리된 죽음의 지역 고억리, 종신형을 받은 사람이 사는 구역 등이 있다.
全지역은 3~4m 높이의 철조망으로 둘러싸여 있다. 전선이 깔린 2~3m 높이의 담장으로 둘러싸인 지역도 있다. 높이 7~8m의 감시탑은 1km마다 설치되어 있고, 자동소총과 수류탄으로 무장한 1000명의 경비원이 순찰하고 있다. 경비견을 운영하는 팀도 있다. 수용소 안 마을에는 항상 2명의 경비원이 경비를 하고 있다.
安赫이 1년 6개월 수용되어 있는 동안 종신형 지역에는 3만 명, 독신자 마을에는 1300명, 혁명화구역에는 9300명의 가족과 기타 5900명의 수감자가 있었다. 여기에는 姜哲煥씨 가족처럼 자발적으로 북한으로 갔다가 나중에 金日成 체제에 맞지 않는 것으로 판단된 在日교포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김태진이 1992년 석방되었을 무렵, 혁명화구역의 수용 인원은 2000~3000명으로 줄어들었다. 일부는 석방되었고, 일부는 종신수용구역으로 이송되었기 때문이다. 姜哲煥의 증언에 의하면 구읍리의 노동작업장은 석고채취장과 일제시대 금광이었다. 여기서 800명이 5개 그룹으로 나누어 일을 했는데, 노동조건은 최악이었다.
북송교포들의 지역에는 직물 공장, 옥수수술 공장, 뱀술 공장, 銅제품 공장 같은 것이 있었다. 이들은 병사들의 겨울 외투에 쓸 토끼를 길렀고, 농산물을 재배하고, 산에서 나무를 해오거나 산삼을 캐기도 했다.
姜哲煥이 10년 동안 이곳에서 생활하는 동안 그의 마을에는 2000~3000명 가량이 있었는데, 매년 100명 가량 영양부족과 질병으로 사망했다. 특히 심한 설사로 인한 脫水症(탈수증)이 많았다. 새로운 反혁명세대가 생성된다는 이유로 남녀간의 性的 접촉은 금지되었다. 그럼에도 두 건의 性접촉 사건이 발생했다. 남자는 처벌을 받았고, 여자는 마을 전체에 고백을 하고 아이는 낙태를 시켰다. 姜哲煥의 마을은 혁명화구역이었기 때문에 주로 黨기관지 「로동신문」을 읽는 재교육이 실시되고 있었다.
리영국씨의 증언에 의하면 대숙리의 독신자 지역은 600~700m 가량 되는 산 옆에 길이 4km, 폭 500m 가량 되는 계곡이었다. 그곳에는 1000명 가량이 수용되고 있었는데, 그중 50명이 여자였다. 여자들이 사는 곳은 난방이 되었지만, 남자들의 숙소는 그렇지 못해 겨울에는 귀나 발에 동상을 입었다. 그가 있던 4년 동안 매년 200명 가량이 주로 기아와 질병으로 사망했다.
탈출 기도자, 차에 매달고 달려서 죽여
구읍리와 대숙리에는 교수형이나 총살형을 집행하는 공개처형장이 있었다. 탈출하려다 잡히거나 식량을 훔친 사람의 처형은 더 잔혹했다. 탈출하려다가 잡힌 한승철이란 사람은 차 뒤에 매달고 주민들이 보는 가운데 죽을 때까지 끌고 다녔다. 그의 목숨이 끊어지자 주민들에게 피투성이가 된 그의 시체를 만져 보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 잔혹행위에 항의한 안성은이란 사람은 그 자리에서 총살당했다. 총살형장 기둥에 매달려 아직 목숨이 끊어지지 않은 사람에게 돌을 던지게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 장면을 본 여자들은 졸도하기도 했다. 姜哲煥은 구읍리에서 10년 동안에 15건의 공개처형을 보았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다른 관리소에서 옮겨 온 사람들은 전에 있던 곳보다는 요덕의 사정이 훨씬 나은 편이었다고 말했다. 다른 곳으로 이송되게 되자 자살한 사람들도 있었다고 姜哲煥은 증언했다.
▲김용(제14, 제18호 관리소)
김용은 1950년 황해도에서 출생했다. 일곱 살 때 그의 아버지와 형은 미국 스파이로 몰려 처형되었다. 그래서 어머니는 그를 가짜 이름으로 고아원에 넣었다. 김용은 자라서 보위부 중좌까지 올라갔다. 그는 여기서 외화벌이를 위해 일본에 생선을 수출하는 서해아사히무역회사 대리인으로 일했다. 그러나 우연한 기회에 그의 실제 아버지 사건이 드러나 그는 체포되어 3개월 동안 보위부 감방에서 심문을 받았다. 그는 의도적으로 보안기관에 침투했다는 혐의로 가혹한 고문을 받았다.
그는 1995년에서 1996년까지 평안남도 개천군에 있는 제14호 관리소에 이송되어 탄광에서 일했다. 1996년에는 무역회사 상관의 도움으로 대동강 건너 득창리에 있는 제18호 관리소로 옮겨가서 탄광차를 수리하는 일을 했다. 여기서 뜻밖에 어머니를 만나 함께 살 수 있었다.
어머니는 마을 구역 밖에서 나물을 캐다가 경비병에게 맞아 불구가 되자, 아들에게 탈출을 권유했다. 1998년 9월 그는 문창제련소로 가는 석탄차 안에 숨어 수용소를 탈출했고, 두만강을 넘어 중국으로 들어갔다가, 몽골을 경유해서 1999년 10월 남한으로 왔다.
그의 이야기 일부는 2000년 5월호 月刊朝鮮에 소개되었다. 이 두 관리소를 탈출해서 남한으로 온 사람은 김용뿐이다.
보위부가 운영하고 있는 제14호 관리소는 평안남도 개천군의 산악지대에 있다. 길이가 40~50km, 폭이 30km 가량 되는 이 수용소에는 1만5000명이 광업과 농업에 종사하고, 가축을 키우고 있다. 사람들은 가축목장에서 일하기를 선호하는데, 동물의 사료를 훔치거나 배설물에서 소화되지 않은 곡물을 주워 모을 수 있기 때문이다. 김용의 증언에 의하면 하루 식량배급은 옥수수 20~30알갱이와 멀건 배춧국뿐이었다고 한다.
땅에 떨어진 밤 허가 없이 주웠다고 처형
숙소에는 방이 6개 있었고, 50명이 3층으로 된 침상에서 잠을 잤다. 석탄광산이었기 때문에 난방은 되었다고 한다. 숙소 바로 옆에는 식당과 화장실, 제재소, 펌프장이 있었다. 그들은 굴착반, 운반반, 레일 부설반, 석탄차 운영반, 제재소 작업반 등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김용은 굴착반에 속했는데, 반장은 金正日의 승계를 반대하고 이복동생 金平日(김평일)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숙청된 김재근 소장이었다.
남자와 여자는 격리 수용되었다. 그가 이 수용소에서 2년 동안 있으면서 유일하게 여자를 보았던 것은 광산 밖에서 도로공사를 했을 때였다고 한다.
이곳에서는 공개처형은 없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영양실조와 질병으로 사망했고, 25명 가량이 처형되었다. 광산 사고로 죽은 사람도 많았다. 김철민이란 사람은 광산 입구에서 땅에 떨어진 밤을 허가 없이 주웠다는 이유로 처형당했다. 갈리영이란 사람은 배가 고픈 나머지 가죽 채찍을 훔쳐서 물에 불려 먹었다는 이유로 매를 맞고 죽었다.
대동강을 사이에 두고 제14호 관리소의 반대편에 있는 제18호 관리소는 인민보안성이 운영하고 있는 훨씬 덜 가혹한 강제노동수용소다. 이곳에는 5만 명 가량이 수용되어 있는데, 주로 제14호 관리소에 수용된 사람들의 가족들이다. 그중 2만 명 가량은 아이들과 노인이고, 나머지 3만 명은 작업반으로 조직되어 석탄 채굴, 벽돌 제조, 시멘트 공장, 유리 공장, 술 공장 같은 곳에서 일했다. 그들은 한 달에 30원을 받았는데, 겨우 담배 한 갑을 살 수 있는 돈이었다.
그러나 가족은 함께 살 수 있었고, 특혜를 받은 수감자는 결혼해서 아이를 가질 수도 있었다. 라디오를 듣거나 로동신문을 볼 수도 있었다. 혜택을 받은 수감자는 밖에 나가서 藥草(약초)를 캐올 수 있었다. 이곳에는 또 사회로 복귀할 사람들이 수용되는 혁명화구역, 우편물을 보내거나 받을 수 있고 동네 시장에도 갈 수 있으며 金日成의 생일에는 술 선물까지 받을 수 있는 해방화구역이 있었다.
여기서도 기아와 질병, 사고로 사람들이 죽었고, 공개처형이 있었다. 김용은 10여 건의 공개처형이 있었다고 증언했다.
▲安明哲(前 제11, 제13, 제22, 제26호 관리소 경비원)
安明哲은 1969년 함경남도 함원에서 출생했다. 충실한 당원가정 출신인 그는 보위부 요원으로 軍복무를 대신하면서 제11호 관리소(1987년 5~8월, 함북 경성), 제13호 관리소(1987년 8월~1990년 겨울, 함북 종성)에서 근무했다. 이 기간 중 4개월 동안은 평양에 있는 소규모의 제26호 관리소, 1990년 말에서 1994년 중반까지는 함북 회령에 있는 제22호 관리소에서 근무했다. 그중에서 2002년 12월 현재 제22호 관리소만이 계속 운영되고 있다.
安明哲의 아버지는 식량배급 기관에서 일하고 있었다. 기아가 한창일 때, 그는 이웃에게 식량을 주었다가 체포되어 반동분자로 낙인 찍혔다. 그 소식을 들은 安明哲은 아내와 함께 두만강을 넘어 중국으로 탈출했다. 그는 서울에 온 후 月刊朝鮮과 인터뷰를 했고, 1998년에는 美 의회에 출석해서 증언을 했고, 2002년 12월12일자 파이스턴 이코노믹 리뷰에 실린 제22호 관리소의 위성사진에서 건물과 광장을 식별해 냈다.
『잡초처럼 뿌리부터 제거하라』
安明哲의 임무는 트럭으로 관리소 안의 여러 곳에 물자를 배달하는 것이었고, 4개 관리소에서 일을 했기 때문에 전반적인 사정과 체제를 훤히 알고 있었다. 그는 수감자들을 「이주자」라고 불렀고, 경비원들에게는 「분파주의자」가 혁명에 끼치는 위해와 위협을 크게 강조했다고 말했다. 그는 경비원들이 『분파주의는 계급의 敵이므로 잡초처럼 뿌리부터 제거해야 하고, 우리의 권한을 행사해서 계급의 敵에게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보여 주어야 한다』는 교육을 받았다고 말했다.
제22호 관리소의 공식명칭은 「조선인민 2209부대」 또는 「백산구 국가보위부」였다. 安明哲의 증언에 의하면 이 수용소는 길이가 50km, 폭이 40km나 되었다. 이곳에는 경비원 1000명과 500~600명의 관리요원이 있었고 범법자의 가족 5만 명이 수용되어 있었다.
제22호 관리소에 부과된 연간 농업생산 할당량은 옥수수 400t, 감자 20만t, 콩 5만t, 후추 1만t이었다. 농장에서는 배추·무·오이·가지를 재배했고, 간장과 위스키를 생산하는 釀造場(양조장)도 있었다. 이곳 탄광에서 채굴한 석탄은 청진 화력발전소와 청진 및 김책제철소에 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년 이곳에서는 1500~2000명의 주로 어린이가 영양실조로 죽었다고 安明哲은 증언했다. 공개 처형은 없었지만, 수골이라고 하는 데서 매년 10월경 10명 가량이 처형되었다. 대부분이 수확된 식량을 훔치다가 잡힌 사람들이었다. 배급식량은 옥수수와 감자였고, 채소나 고기는 없었다. 그들이 먹을 수 있었던 고기는 쥐·뱀·개구리 같은 것이었다. 작업량을 맞추지 못했다고 매를 맞아 죽은 사람도 있었다. 매를 맞아 죽는 사람이 늘어나자 수용소 당국이 경비원들에게 조심하라고 경고하기까지 했다.
특혜를 받은 소수의 사람은 결혼을 할 수 있었지만 사람들은 性행위를 금지당했다. 임신해서 처형된 여자도 있었다. 이곳에는 규칙을 어긴 사람들을 수용하는 구류장도 있었는데, 安明哲은 근처에서 근무하다가 매를 맞아 비명을 지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고 증언했다.
이들은 1년에 500원 가량을 받았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기초적인 교육을 받을 수 있었고, 1년에 휴일은 9일밖에 없었다.
폐쇄된 관리소
▲최동철(前 제11호 관리소 경비원)
최동철은 이 보고서 뒤에 나오는 이순옥의 아들이다. 그가 김일성대학교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 어머니가 체포되었다. 그에 앞서 최동철은 1985년 2월에서 1986년 6월까지 軍복무의 일부로 함경북도 경성에 있는 제11호 관리소의 경비원으로 근무했다. 정치범이 수용되어 있던 이 관리소는 1987년 安明哲이 경비원으로 근무했던 곳이기도 하다. 이 관리소는 1989년에 폐쇄되었다. 이 관리소에는 2만 명 가량의 가족이 감자농사와 목재 伐採(벌채)를 하고 있었다.
安明哲은 1987년에서 1990년까지 함경북도 종성에 있는 제13호 관리소에서도 근무했다. 3000명 가량이 수용되어 있던 이 관리소는 중국 국경에 너무 가까워 탈주자들이 생길 우려가 있었기 때문에 1990년에 폐쇄되었다.
安明哲은 4개월간 평양의 화천동에 있는 규모가 작은 제26호 관리소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국토통일원 백서에 의하면 이 수용소는 1991년 1월에 폐쇄되었다. 백서에 의하면, 함경북도 창평에 있는 제12호 관리소 역시 중국 국경에 가깝다는 이유로 1989년에 폐쇄되었고, 평안북도 천마에 있는 제27호 관리소는 알 수 없는 이유로 문을 닫았다. 백서에 의하면 함경북도 화성에는 제16호 관리소, 함경북도 청진에는 제25호 관리소가 있다.
경북대학교 許萬鎬(허만호) 교수의 보고에 의하면, 함경북도 화성군 고창리에는 제16호 관리소가 있다고 한다. 이곳에는 「反혁명, 反黨분자」 1만 명이 金正日의 승계를 반대했다는 이유로 감금되어 있으며, 그중에는 부주석이었던 김동규도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許교수는 청진市 수남구에는 보위부가 운영하고 있는 교화소가 있는데, 황해남도 출신의 목사와 장로, 허택이란 북송 在日교포 등 3000명이 수용되어 있다고 한다.
[2. 교화소]
죽음의 수용소
원래 교화소, 또는 노동교화소란 再교육을 통해서 선량한 사람을 만드는 곳이다. 그러나 북한의 교화소는 그런 곳이 아니다. 증인들의 말에 의하면, 이곳은 주로 金日成과 金正日의 연설을 강제로 암기시키고, 자기 반성을 시키는 곳이다. 이런 교육은 흔히 저녁에 실시되고, 연설을 암송하기 전에는 잠을 잘 수 없다. 수감자들은 수용소 관리와 동료들 앞에 꿇어앉아서 있지도 않은 過誤(과오)를 자백하고 비판을 받아야 한다.
교화소는 인민보안성(前 사회안전부)가 운영하고 있다. 일부 교화소는 높은 담과 전기철조망으로 둘러싸인 넓은 터에 생산공장, 수감자 숙소, 관리와 경비원 사무실 등의 건물이 들어선 형식으로 있다. 산악지대의 계곡에 만들어 놓고, 수감자들에게 광산 일이나 벌목을 시키는 교화소도 있다.
교화소의 생활은 관리소와 흡사하다. 수감자들은 엄격한 규칙에 따라야 하고, 형편없는 식량 배급으로 생존하면서 위험하고도 힘든 노동을 해야 한다. 이 때문에 수감자들은 영양실조로 병에 걸리고 작업현장의 사고로 다치거나 죽는다. 의사나 약도 없다. 그래서 교화소는 사실상 죽음의 수용소다.
교화소가 관리소와 기본적으로 다른 점은 전자가 사법절차에 따라 재판을 받고 형량이 결정되는 데 반해, 후자는 그저 숙청을 당했다는 사실만으로 가족과 함께 평생 바깥 세계를 구경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교화소에 있었던 일부 탈북자는 인터뷰에서 자기들이 다른 정상적인 사회에서도 처벌을 받을 수 있는 범죄를 저질렀다고 시인했다.
그러나 정상적인 나라에서는 범죄가 되지 않는 罪目(죄목)으로 교화소에 간 사람도 있다. 예를 들면 사적인 거래나 정치적 범죄 같은 것이다. 국가의 생산 및 배급제도가 붕괴되자 할 수 없이 중국 국경지대에서 밀수를 했던 사람도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다. 생산과 배급을 담당한 노동당 관리와 이들의 행위를 부패로 보는 경찰간의 권력다툼 때문에 체포된 사람들도 있었다.
[증인과 증언]
▲리순옥(제1호 교화소)
리순옥은 1947년 특권을 가진 충성스러운 노동당원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는 만주에서 金日成의 항일유격대에 참여했고, 아들은 김일성대학교에서 공부했다. 회계사 훈련을 받은 리순옥은 함경북도 온성에 있는 제65호 배급소 책임자가 되어 중국제 직물을 黨과 정부 관리들에게 공급하는 일을 했다.
리순옥은 1986년에 체포되어 절도 및 뇌물죄 혐의를 받고 온성보위부 감옥에 7개월 동안 수용되어 자백하라고 고문을 받았다. 그 후 그녀는 黨에서 축출되고 인민보안성 심문소로 넘겨져 7개월 동안 고문을 받았다. 결국 그녀는 고문과 가족에 대한 박해를 피하기 위해 자백서에 서명했다. 그녀는 재판에서 14년의 刑을 받고 평안남도 개천에 있는 제1호 교화소에 수용되었다. 이곳에서는 의류를 생산하고 있었는데, 그전의 經理(경리)와 관리 능력을 인정받아 이 감옥의 행정사무실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녀는 1994년 2월 석방되자 중국으로 탈출해서, 1995년 홍콩을 경유해 남한에 도착했다. 그녀는 수용소 생활에 대한 회고록을 썼다. 이 책에는 이 수용소에서 박해로 죽은 사람들의 이름들이 소개되어 있다.
제1호 교화소는 평안남도 개천의 산골짜기에 위치하고 있다. 리순옥이 그곳에 갔을 때는 6000명 가량이 수용되어 있었다. 전기철조망으로 둘러싸인 이 수용소에는 2층으로 된 커다란 수감자 숙소와 관리사무실, 경비원 및 직원 건물이 있었다. 이곳에는 실제로 범죄를 저지른 사람, 정부의 규칙을 따르지 않은 사람, 그리고 1987년 11월에 자발적으로 북한에 온 250명 가량의 在日교포 여자들이 수용되어 있었다. 그중 일부는 배급제도가 무너지고 있을 때 식량을 훔쳤다는 이유로 刑을 받은 주부였다.
수감자들은 하루에 옥수수와 쌀, 콩 등 700g의 배급을 받도록 되어 있었지만, 경비원들이 쌀을 가져가 버리고, 수감자들이 실제로 받은 식량은 옥수수 100g을 포함하여 하루 300g밖에 안 되었다.
수감자들은 처음에는 軍服(군복)을 만들었지만, 나중에는 소련에 브래지어, 폴란드에 인형, 일본에 스웨터, 프랑스에 종이꽃을 수출하게 되었다. 그중에서 가장 작업환경이 나쁜 곳은 의류 공장이었다. 여자들이 일하는 의류 공장은 재단·재봉·기계정비·시설관리 같은 부서로 나뉘어 있었고, 각 부서에는 250~300명이 배치되어 있었다. 이들은 50~60명으로 구성된 작업반으로 편성되어 식사와 취침은 물론 심지어 화장실에 가는 것도 班(반) 단위로 하도록 되어 있었다. 신입 수감자들은 이 화장실 시간에 적응하지 못하고 오줌을 싸는 일도 있었다.
영양실조와 중노동으로 畸形 속출
이들은 班員(반원) 중 어느 한 사람이 작업량을 완수하지 못하는 등의 잘못을 해도 전부 처벌을 받았다. 가장 빈번한 처벌은 식량배급을 줄이는 것이었다. 겨울에는 추위로 손발이 얼어 재봉틀 바늘과 가위에 다치는 사람이 많았지만, 수감자들은 피를 흘리면서도 작업량을 맞추지 않을 수 없었다. 실수를 거듭하거나 규칙을 위반하면 구두 공장으로 보내거나, 앉지도 일어설 수도 없는 독방에 감금했다.
좁은 숙소에서는 80~90명이 잠을 잤다. 겨울에는 서로 체온을 느낄 수 있어서 그나마 견길 수 있었지만, 여름에는 숨이 막히고 냄새가 몹시 났다. 그래서 사람들은 가능하면 먼지투성이 공장에서 자려고 했다.
사망한 수감자의 시체는 그냥 동물 시체처럼 산에 내다버렸다. 봉제 공장에서는 실수를 하거나 옷을 더럽히면 발로 채이거나 뺨을 맞았다. 오랫동안 영양실조와 중노동으로 수감자들은 척추가 휘고 몸이 畸形(기형)이 되었으며, 꼽추가 된 사람들도 많았다.
공개 처형도 있었다. 대부분이 경비원에게 도전했던 남자들이었지만, 불평을 한 여자들도 처형되었다. 이럴 때 다른 수감자들은 줄을 지어서 처형된 시체 앞을 지나가야 했는데, 그것을 보고 비명을 지르면 독방에 감금되었다. 이 때문에 공개처형이 있는 날이면 독방이 가득 차곤 했다. 산업 재해는 빈발했고, 각종 전염병도 유행했다. 임신한 채 이곳에 온 여자들은 주사로 낙태시켰다.
일주일에 한 번 자기반성과 선전활동이 실시되었다. 수감자들은 金日成의 신년사를 暗誦(암송)해야 했고, 못 하면 처벌받았다. 암송하기를 거부했던 한 남자는 처형되기까지 했다. 이들은 남한의 과격파 학생과 파업 노동자들의 투옥을 비판하는 북한방송을 듣게 했는데, 수감자들은 북한에서는 사형감인 시위가 열리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지해남(제1호 교화소)
지해남은 1949년 함경남도 함흥시 남문리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한때 노동당 선전대원으로 공장을 돌아다니며 노동자를 격려하고 黨의 정책을 설명했다. 그러나 1989년의 전당대회 이후 그녀의 신념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 무렵 북한 텔레비전이 朴正熙 대통령의 情婦(정부)가 「홍도야 울지 마라」라는 노래를 불렀다는 내용의 드라마를 방영하면서 남한을 조롱했다. 지해남은 이 노래에 감명을 받고 외웠다.
1992년 12월25일 저녁, 함경남도 함주군에서 노래를 하는 저녁모임이 있었는데, 그녀는 다른 네 여자에게 그 노래를 가르쳐 주었다. 그것을 들은 이웃 사람이 고발했고, 지해남은 명천군에 있는 인민보안성 구류장에 끌려가 14일간 머물러 있다가 함경북도 명천군에 있는 인민보안성 구류장으로 이송되었다. 그동안 지해남은 어린 경비원에게 매를 맞고 性的인 모욕을 당해 시멘트를 먹고 자살할 생각까지 했다.
「홍도야 울지 마라」 불렀다고 구속 수감
함께 수감된 다른 네 여자는 8개월간의 강제노동 선고를 받았지만, 지해남은 식량을 훔쳤다는 죄목까지 추가되어 사회불안조성죄로 3년간의 刑을 받고 제1호 교화소에 수감되었다.
1995년 9월, 지해남은 2년 2개월을 복역한 뒤 광복 50주년 기념 사면으로 다른 50여 명과 함께 석방되었다. 그녀는 함주군으로 돌아갔으나 전과자에게는 갈 곳이 없었다. 그녀는 행상으로도 살 수 없게 되자 피를 팔게 되었다.
1998년 9월, 절망을 느낀 그녀는 중국으로 탈출했으나, 소개업자는 그녀를 불구자인 중국인에게 팔아 버렸다. 그녀는 7개월간 性노리개 노릇을 하다가 탈출해 위해市로 가서 식당에서 일하면서 저금을 했다. 그녀는 다른 탈북자 6명과 함께 배를 훔쳐 타고 남한으로 탈출하려고 했으나 엔진이 고장 나고, 물이 들어와 계획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들은 중국 어부의 도움으로 해안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다시 보트를 훔쳐 타고 탈출을 시도했으나 이번에는 중국 해안경비대에게 나포되어 丹東(단동)에 있는 억류소로 갔다.
지해남은 북한으로 강제추방되어 신의주에 있는 보위부 감옥에 수용되었다. 그곳에는 여자 25명과 남자 30명의 탈북자가 있었다. 여기서 지해남은 구타와 고문을 당했다. 한 달 뒤 그녀는 신의주 집결소로 이송되었지만, 1999년 12월12일 사면 덕으로 석방되었다.
지해남은 2000년 1월 무산으로 가서 얼어붙은 두만강을 넘어 다시 중국으로 탈출했다. 이번에는 남한 사람이 운영하는 회사에서 일을 하게 되었고, 탈북자를 돕는 목사의 도움으로 다른 탈북자와 함께 남한으로 떠날 수 있었다. 이들은 조선족으로 가장하고 위해市와 北京을 거쳐 중국 남부의 昆明(곤명)으로 갔다가 밤중에 산을 넘어 베트남으로 탈출했다. 이들은 결국 남한에서 피난처를 얻을 수 있었다.
지해남이 제1호 교화소에 갔을 때 1000명 가량의 여자가 옷과 가죽제품을 만들고 있었다. 이 교화소는 9개의 작업부서와 그보다 작은 작업반으로 조직되어 있었다. 그중 두 곳의 부서에서는 구두와 가죽제품을 만들었다. 이 작업은 환경이 열악하고 힘들었기 때문에 규칙을 위반한 사람들이 맡았다. 여자는 70~80명 가량이었다. 대부분은 절도, 사기, 살인, 간통, 매춘 같은 범죄를 저지른 여자들이었다.
작업시간은 오전 8시에서 오후 6시까지였고, 그 다음에는 1시간30분의 자기반성과, 생활총화 및 상호비판이 있었다. 密告(밀고)한 사람에게는 보상을 주었다. 수감자들은 매일 한 줌의 옥수수와 배춧국을 배급받았고, 가족들이 먹을 것을 넣어주지 않으면 영양실조로 질병에 걸리거나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다.
▲제77호 교화소 수감자 #6
수감자 #6은 1960년 평안남도에서 출생했다. 그는 군대에 복무하면서 일본에서 수입한 물건을 중국에 再수출해서 돈을 벌었다. 이 때문에 그는 軍형무소에 1년간 수용되었다가 제대한 후 덕천에 있는 인민법정에서 2년 刑을 선고받아 1980년대 末 함경남도 단천 근처의 제77호 교화소에 수용되었다.
금광의 작업환경은 열악하여 2년 동안 7000~8000명의 수감자 중에서 2000명이 사고나 질병으로 죽었다. #6은 이곳 금광에서 3개월 일하고, 수용소 진료소에서 6개월간 치료를 받은 후 남은 刑期(형기)를 식당에서 일하다가 1987년 석방되었다. 그는 중국으로 탈출해서 몇 년간 살다가 2001년 남한으로 왔다.
하루 식량이 곡물 한 컵과 배춧국
수감자 #6의 증언에 의하면 함경남도 천마군에 제55호 교화소가 있었으나, 수감자가 넘쳐 경제범은 함경북도 대흥과 검덕 사이의 산 속에 설치된 제77호 교화소로 이송되었다. 그가 수감되어 있을 무렵 이곳에는 평균 刑期 3년의 남자 7000~8000명이 있었다. 이 교화소는 800~1000명씩 한 단위로 조직되고, 그 단위는 다시 60~100명 가량의 小단위로 세분되었다. #6이 속했던 단위에는 15~20명 가량의 탈북자가 있었지만, 대부분은 일반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이었다.
이곳에서는 하루 식량이 옥수수, 쌀, 콩을 섞은 곡물 한 컵과 배춧국뿐이었다. 수감자들은 60~70명을 수용하는 목조 숙소에서 잠을 잤다. 이들은 일제시대에 시작했다가 폐광이 되었던 금광에서 500m나 되는 나무 계단을 내려가 금을 채굴했다. 사고는 거의 매일 일어났고, 갱도가 무너져 사람들이 죽기도 했다. 금광을 계속 운영하기 위해 매주 30~50명 가량의 새 수감자가 들어왔다.
진료소도 있었는데 1000명의 환자가 수용될 때도 있었다. 환자들은 죽음을 기다리면서 한 달에서 6개월까지 이곳에 머물렀다. #6이 수용되었을 무렵 이 진료소에서는 수감자의 거의 3분의 1은 첫 한 달 안에 죽었다. 수감자가 죽음이 임박했다고 판단되면 석방해서 집으로 보내주는 경우도 있었다.
토요일이나 일요일에는 식사 전에 小단위 별로 자기반성 모임이 열렸다. 한 달에 한 번은 단위 전체의 자기반성 대회가 열렸다. 탈출을 기도했거나 물건을 훔친 사람은 수감자들이 모여 있는 앞에서 공개처형을 했다.
▲유천식(제22호 교화소)
유천식은 1963년 11월 함경북도 온성에서 태어났다. 그는 군대에서 소대장까지 지낸 후 온성에 있는 건축회사에서 일했다. 1996년, 회사의 식량배급이 중단되자 그는 강원도로 가서 생선을 사서 중국에 있는 조선족에게 팔다가 체포되었다. 1996년 1월 직장 이탈과 불법 상행위 등의 죄목으로 온성 인민보안성 노동단련대에서 6개월간 강제노역 선고를 받았다.
1996년 5월, 석방을 한 달 앞두고 그는 임시휴가로 나갔다가 술에 취해 교화소로 늦게 돌아왔다. 이 때문에 그는 3시간 동안 거꾸로 매달렸고, 100여 명의 수감자들이 지나가면서 때리는 형벌을 받았다. 그 후 그는 인민보안성 구류장으로 갔다가 함경남도 오로군에 있는 제22호 교화소로 이송되었다. 여기서 그는 1년간 지냈는데, 그와 함께 왔던 8명의 수감자는 모두 영양실조나 구타로 사망했다.
임산부 강제 낙태
유천식은 1997년 9월 석방되자 한 달 뒤 중국으로 탈출했다. 그는 중국 瀋陽(심양)의 한국인 회사에서 2000년 2월까지 일을 하다가 중국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그는 신의주 보위부로 송환되어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는 신의주 보위부 감옥에 수감된 사람은 대부분 여자들이었다고 말했다. 이들은 나중에 그들 고향의 구류시설로 이송되었다. 그가 이곳에 있는 동안 7명의 여자가 들어왔는데, 그중 4명은 임신하고 있었다. 그는 나중에 그 여자들이 강제로 낙태를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유천식은 그 후 평양의 보위부 심문소로 갔고, 2주일간 심문을 받은 후 8월에 고향인 온성에 있는 보위부로 갔다가 인민보안성 감옥을 거쳐 10월에 함경남도 영광군에 있는 제55호 노동단련대에서 1년간 중노동하게 되었다.
2001년 1월 그는 병에 걸려 임시휴가를 받았으나 다시 노동단련대로 돌아가지 않고 두만강을 건너 중국 瀋陽으로 갔다가 몽골로 갔다. 그는 몽골 국경경비대에 체포되었다가 석방되어 수도 울란바토르로 가서 남한 領事(영사)의 도움으로 2001년 5월20일 비행기便(편)으로 서울에 올 수 있었다.
刑期(형기) 1~2년의 남자 800~1000명, 여자 100명이 수용되어 있는 제22호 교화소에서는 수감자들이 주로 돌을 근처 강으로 가지고 가서 수력발전소의 제방을 쌓는 일을 했다. 이곳에는 하루 밀과 옥수수 가루 몇 숟가락과 배춧국이 식사의 전부였다. 7호 감방에서는 20명 중 4명이 1년 안에 영양실조로 죽었다. 한 감방에 60~70명이 수용된 곳도 있었는데, 두 사람이 담요 한 장을 덮고 잤다. 수감자는 대부분 절도·사기·도박, 아편중독자였고, 자살은 있었지만 공개처형은 없었다.
▲제3호 교화소 수감자 #3
수감자 #3은 폭행죄로 체포되어 10년형 언도를 받아 1980년대 초에서 1990년대 중반까지 제8호 교화소(강원도 용담), 제3호 교화소(평안북도 신의주) 등지에 수감되었다. 제8호 교화소에는 3000명 가량이 자전거를 만들다가 대부분이 함경남도 단천에 있는 관리소로 이송되어 광산일과 제철소用 내화 벽돌을 만드는 일을 했다. 그 열기와 연기 때문에 매일 사람들이 죽었다. 그 후 이들은 신의주의 제3호 교화소로 이송되어 의류를 생산했다.
#3은 1990년대 중반 이 교화소에서 석방되었고, 1998년 중국으로 탈출하여 동남아시아를 경유하여 2000년 8월 남한에 도착했다.
신의주의 제3호 교화소에는 1990년대 초 2500명 가량의 남자가 수감되어 있었다. 이들은 죄수복을 만들고 광산 일을 했다. 대부분은 일반 범죄자였고, 하루 쌀과 콩 450g으로 延命(연명)하고 있었다. 탈출하려다 실패한 사람들은 공개처형되었고, 시체는 하루 종일 전시되었다.
▲회령 교화소 수감자 #12
수감자 #12는 43세의 함경북도 청진 출신으로 1991년 트럭을 운전하다가 싸움에 휘말렸고, 상대방은 그 상처로 하루 뒤에 사망했다. #12는 6~10년 刑을 받아 함경북도에 있는 노동교화소에 수용되었다. 수감자들은 銅 채취나 벌목작업을 하고 가구를 만들고 농사를 지었다. #12는 트럭 운전과 수리를 맡았다.
80kg 체중이 35kg으로
그의 증언에 의하면 1993년에는 영양실조로 너무 많은 사람이 죽자 수용소 당국은 사망자 수를 줄이기 위해 1994년에서 1995년 사이에 임시휴가를 보내기도 했다고 한다. #12의 체중은 1991년에는 80kg이었으나, 1995년에는 35kg으로 줄었다. 그는 석방되자 2개월간 체력이 회복되기를 기다린 뒤 중국으로 탈출, 하얼빈에서 조선족 사이에 끼어 살다가 2000년 배를 타고 남한으로 왔다.
회령 교화소는 함경북도의 산악지대에 있다. 수감자 #12는 이곳이 노동교화소라고 설명했다. 1500명의 수감자가 銅 채취와 벌목, 가구제조 같은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수감자들은 오전 5시부터 오후 5시까지 일을 했고, 일이 끝난 다음에는 자기반성을 했다. 수감자들은 고백할 과오를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에 이 역시 힘들었다고 #12는 말했다.
수감자는 1년에서 15년까지 刑을 받은 일반 범죄자들이었고, 일부 정치범도 섞여 있었다. 숙소에서는 60명이 잠을 잤다. 1.5m×1.5m 크기의 형벌 방도 있었는데 여기 수감된 사람은 배급식량의 4분의 1로 1주일간 견디어야 했다.
어쩌다가 수감자들이 교화소 밖을 산책할 때도 있었는데, 이때 수감자들은 나물을 뜯어 먹었다. 사망률은 아주 높아서 1991년에서 1995년 사이에 수감자의 4분의 1 내지 3분의 1이 영양실조와 기타 원인으로 죽었다. 1993년에는 너무 사망자가 많았기 때문에 1994~1995년에는 병든 수감자에게 임시휴가를 주기도 했다.
▲제4호 교화소 수감자 #19
수감자 #19는 함경북도 단천 근처에서 자랐다. 1990년대 중반 배급제도가 붕괴되자, 그는 밀주 공장을 차리고 쌀과 옥수수로 배갈(고량주)을 만들었다. 그는 1996년 체포되어 제4호 교화소에서 6년 刑을 살았다. 그는 석 달 동안 석회 공장에서 일하다가 폐병에 걸려 체중이 30kg로 떨어지자 수용소 당국은 그를 진료소로 보냈다. 그는 중병환자는 집으로 보낸다는 것을 알고 일부러 오염된 물을 마셨다. 설사가 심해지자 그는 임시휴가를 얻을 수 있었다. 집에서 체력을 회복한 그는 교화소로 돌아가지 않고 중국으로 탈출했다.
제4호 교화소는 평안남도 강동군 삼등리에 있다. 수감자 #19가 수용되어 있던 때는 7000명 가량의 수감자가 석회석을 파서 시멘트를 만드는 일을 했다. 이 수용소는 길이 2km, 폭 1.5km 가량 되었고, 철조망 담장이 있었다. 수감자는 모두 5~20년 刑을 받은 남자였다. 작업은 오전 7시에 시작되어 오후 5시에 끝났지만, 분쇄반과 가열반은 오후 10시까지 일을 하기도 했다. 일주일에 한 번 오후에 자기반성과 金正日의 정책 학습이 있었다.
수감자 #19가 수용되어 있는 동안 이 곳에서는 여덟 번의 공개처형이 있었다. 탈출하려다가 잡힌 사람, 탈출했다가 잡힌 사람, 임시휴가 때 범죄를 저지른 사람, 그리고 다른 곳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들이 수감자들 앞에서 처형되었다.
식량배급은 하루 옥수수와 밀 50g에 배춧국뿐이었다. #19의 체중은 76kg에서 3개월 만에 45kg으로 떨어졌다. 대부분의 수감자들은 체중이 50kg 이하였다고 그는 증언했다.
수감자들은 50~100명 단위로 마룻바닥 위에서 잠을 잤다. 목욕시설도 없었고, 한 달에 두세 번 얼굴을 씻는 게 고작이었다. 게다가 석회가루가 옷에 붙어서 피부병을 일으키기도 했다. #19가 이곳에 8개월 정도 있는 동안 그의 작업반원 80명 중에서 3명이 사고로 죽고, 10명이 영양실조와 질병으로 사망했으며, 사망자수를 줄이기 위해 임시휴가를 받은 사람은 20명이었다.
함께 입소한 23명 中 21명 사망
▲제12호 교화소 수감자 #28
청진市에서 살던 수감자 #28은 1990년대 중반 이후 식량사정이 악화되자 가족들을 살리기 위해 중국 국경에서 밀수를 하다가 1997년 12월 체포되었다. 그는 지방 구류장에서 3개월 동안 있다가 온성의 인민보안성 감옥으로 이송되었다. 여기서 8개월간 머문 그는 형법 117조 2항 불법 월경과 불법 금전 및 상품 운반죄로 3년 刑을 받고 함경북도 정어리에 있는 제12호 교화소로 이송되었다.
그는 1998년 12월부터 1999년 7월까지 8개월간 복역한 후 사면을 받아 석방되었다. 그 다음달 그는 중국으로 탈출해서 몽골로 갔다가 다른 탈북자와 함께 2001년 10월 서울에 왔다.
제12호 교화소에는 1300~1500명 가량의 수감자가 銅광산과 철광산에서 일하고, 나무를 자르고 벽돌을 만들고 농사일을 했다. 사망률이 무척 높아서 수감자 #28의 증언에 의하면 함께 입소한 23명의 다른 수감자 중 2명만이 살아남았다고 한다. 나머지 한 사람도 여덟 달 만에 사망했다. 그는 그가 머물러 있는 동안 800명 가량이 사망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곳에서는 자기반성 모임은 없었지만, 매일 밤 9시 정문 앞에 모여 경비원이 지명하면 수용소 규칙을 암송해야 했다. 탈출하려다 잡힌 두 사람이 공개처형당했다.
◈ 2부 중국에서 강제송환된 탈북자 수용시설과 처벌
강제로 북한으로 송환된 탈북자들이 수용되는 곳은 정치범을 위한 관리소, 강제노동수용소인 교화소와는 기본적으로 다른 단기 시설이다. 여기에는 도집결소, 노동단련대가 포함된다. 그러나 가혹한 생활환경이나 높은 사망률에서는 다를 것이 없다. 이들은 교화소를 운영하고 있는 인민보안성과 관리소를 운영하고 있는 국가보위부가 관리하고 있다.
1990년대 중반에서 末까지 식량사정이 악화되었던 기간 중 중국으로 탈출한 북한인은 20만~30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全가족이 국경을 넘은 경우도 있고, 돈을 벌어 남아 있는 가족에게 보낸 경우도 있다. 이들은 중국 동북지방에서 200만 명에 달하는 조선족과 어울렸다. 이곳에는 또 많은 남한 사람들이 사업을 하거나 여행을 하고 있었다.
중국 경찰은 정기적으로 불법 입국자를 체포해서 북한으로 강제송환하고 있다. 그들의 정확한 수는 알 수 없어도 송환된 사람들이 어떤 대우를 받고 있는지는 알 수 있다. 송환된 많은 탈북자들이 수용소에서 석방되면 다시 중국으로 들어가 그 실태를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임신한 여성에게 낙태 강요
탈북자 중 일부는 東南亞나 몽골을 경유해서 남한으로 갈 수 있었다. 이들의 대부분은 가족이 아직 북한에 남아 있기 때문에 그들의 증언은 이 보고서에서 익명으로 처리했다.
대체로 북한에 송환된 탈북자들은 감옥이나 구류장에 수감되어 심문을 받는데, 중국에 들어간 이유와 활동 이외에 남한 사람들, 특히 기독교인을 만났는지, 남한 텔레비전이나 방송을 시청했는지, 남한으로 갈 생각을 했는지를 묻는다. 남한 사람과의 접촉을 시인하면 처형을 당하거나 관리소 또는 교화소로 직행한다. 부인을 하면 고문이 따른다.
몇 주일간의 심문이 끝나면 탈북자들은 집결소나 노동단련대로 이송된다. 재판과 같은 사법절차는 없다. 일반 잡범도 수용하는 이곳에서도 열악한 식량배급과 중노동으로 많은 사람들이 사망하고 있다. 노동단련대는 송환된 탈북자 수가 급격히 늘어나자 만든 것으로 일종의 중간시설이다. 한 증인은 중국內의 자유와 번영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못하게 탈북자 가족은 분리해서 수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곳 수감자들은 고정된 작업장보다는 이동하면서 일을 한다.
모든 탈북자들은 북한 수용소 당국이 중국에서 임신한 여성에게는 낙태를 강요하고 있고, 아기를 낳으면 즉시 살해한다고 증언하고 있다. 중국인과의 혼혈을 막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실제로 일부 탈북 여성은 살기 위해 중국인과 결혼을 하거나 팔려 나갔다. 조선족과 결혼한 여자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 같은 인종정책에 따른 영아 살해는 신의주, 온성, 청진 등 세 곳에서만 보고되었다.
[증인과 증언]
▲최영화(南신의주 도집결소)
최영화는 함경북도 회령 출신의 25세 된 여자다. 그녀는 南신의주에 있는 도집결소에서 2000년 5월부터 6월까지 수용되었다. 그녀는 배급소에서 일하면서 아버지와 동생과 함께 살았다. 그러나 1996년에서 1998년 사이에 배급제도가 붕괴되자 생계를 위해 오징어 장사를 시작했다. 그래도 수입이 모자라자 그녀는 1998년 소개업자에게 200원을 주고 중국 延吉(연길)에 가서 식당에서 일을 하기도 하고 大連(대련)을 방문하는 남한 사람들의 투어가이드 일도 했다. 그러다가 그녀는 중국 경찰에게 잡혀 북한으로 강제송환되었다.
최영화는 국가보위부에서 심문을 받은 후 신의주에 있는 도집결소로 넘겨졌다. 이곳에서 그녀가 영양실조와 피로로 쓰러지자 두 달 만에 석방되었다. 다른 수감자 2명이 죽자 집결소 당국은 사망자가 더 늘지 않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녀는 건강을 회복하자 다시 중국으로 탈출해서 大連을 거쳐 北京으로 간 다음 2002년 1월1일 기차를 타고 昆明(곤명)으로 갔다.
여기서 그녀는 다른 탈북자와 함께 미얀마로 들어가려다 체포되어 중국 경찰에게 인도되었다. 그들은 북한인이 아니라 조선족이라고 주장, 결국 석방되었다. 2002년 3월 그녀는 東南亞를 거쳐 서울로 올 수 있었다.
최영화가 수용되었을 때 南신의주 도집결소에는 100명 가량이 있었는데, 대부분 20~30세의 사람들로 여자가 더 많았다. 이곳은 남한인과 접촉하지 않은 사람들이 수용되는 수용소였다. 감방 2개는 일반 잡범, 4개는 강제송환된 탈북자用이었다. 이들은 밖에 나가 농사와 건설공사를 했다.
신생아 살해에 관한 끔찍한 증언들
작업은 새벽 4시30분~5시에 시작해 오후 7~8시에 끝났다. 식사시간은 30분이었다. 식량은 마른 옥수수를 받아서 물에 불려 먹었다. 집결소 밖에서 일을 할 때는 나물 같은 것을 뜯어 올 수 있었다. 여자 2명이 영양실조로 사망했다. 한 여성은 경비원과 性交(성교)를 강요당하기도 했다.
수감자 중에는 임신한 여성 10명이 있었다. 그중 3명은 임신 8~9개월이었다. 최영화는 그중 한 명을 근처 軍병원으로 부축해서 데려갔는데, 그곳에서 여자는 분만촉진 주사를 맞고 아기를 낳았다. (그들은) 아기는 어머니가 보는 앞에서 젖은 수건으로 목을 졸라 죽였다. 집결소로 돌아간 최영화는 다른 두 임신부를 데리고 軍병원으로 갔던 여자들도 같은 광경을 목격했다는 말을 들었다. 중국인과의 혼혈아를 容認(용인)할 수 없다는 것이다.
▲南신의주 도집결소 수감자 #24
#24 수감자는 평안북도 천마군에서 살던 66세의 할머니다. 1997년 아이들이 먹 을 것이 없자 남편 및 아이 5명과 함께 중국으로 갔다. 아이 2명은 국경선에서 잡혔으나 나머지 가족은 중국에서 3년간 살 수 있었다. 아이 3명 중 2명은 그 후 체포되어 북한으로 송환되었고, 남편은 병으로 죽었다. 그 후 #24는 손녀와 함께 延吉에서 살다가 丹東(단동)을 방문했을 때 중국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24는 50명의 탈북자와 함께 신의주에 있는 남민동 보위부 구류장으로 이송되었다. 그는 중국에 간 것은 식량 때문이었다고 주장했고, 결국 인민보안성이 운영하는 南신의주 도집결소에 한 달간 수용되었다. 그는 나이도 많고 쇠약했기 때문에 근처 진료소에서 임신부를 돌보는 일을 했다. 그는 아기 7명의 출산을 도왔는데, 그중 몇 명은 분만촉진제에 의한 조기출산이었다. 아기들은 모두 살해당했다.
중국인과 결혼했던 28세의 임씨 성을 가진 여인은 건강한 아기를 분만했는데, 아기를 담요에 싸서 안으려고 하자 경비원이 아기를 빼앗아 플라스틱 주머니가 들어 있는 상자에 내던졌다. 의사는 『북한에 식량이 부족하므로 외국인이 아버지인 아이는 먹일 수 없다』고 말했다. 상자에 아기가 가득 차자 경비원들은 가지고 나가서 묻어 버렸다.
김씨 성을 가진 여인이 분만한 아기를 #24가 쓰다듬어 주자 경비원이 와서 상자에 버리라고 명령했다. 그가 머뭇거리자 경비원이 뺨을 때려 이가 부러졌다. 세 번째 아기는 早産(조산)이어서 옥수수 크기였고, 네 번째 아기는 더 작았다. #24는 그 아기를 상자에 넣었다.
그 다음날 #24는 3명의 조산아를 분만시켰고, 역시 상자에 갖다 넣었다. 이틀 후 조산아들은 죽었으나, 출산 달을 맞추어 출생한 아기 2명은 살아 있었다. 그것을 본 보위부 요원은 핀셋으로 아기의 머리를 찔렀다. #24가 비명을 지르자 보위부 요원은 그의 다리를 발로 걷어찼다.
#24는 석방된 후 다시 중국으로 탈출했으나 또 잡혀서 회령으로 이송되었다. 손녀와 생이별을 하게 된 그는 중국에서 배운 찬송가를 부르고 金正日을 비난했다. 다행하게도 집결소 당국은 그 여자가 국가의 敵이 아니라 미쳤다고 생각하고, 불쌍하다고 생각했던지 손녀와 함께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갈 수 있게 해주었다. 이들은 남한 기독교단체의 도움으로 東南亞를 거쳐 2001년 3월 남한으로 올 수 있었다.
中國 간 여자들 6개월간 수용
▲농포 집결소 수감자 #1
수감자 #1은 1967년 청진에서 출생했다. 그는 10년간 無電手(무전수)로 軍복무를 마치고 중국을 드나들며 장사를 시작했다. 1997년 그는 延吉에서 체포되어 무산에 있는 보위부로 송환되었다. 여기서 하루 심문을 받은 그는 다시 인민보안성에서 일주일 동안 심문을 받은 후 청진에 있는 보위부로 갔다가 청진시 송평에 있는 경찰 감옥에 20일간 수용되었다. 그는 군대에 있을 때 남한방송을 듣지 않았는지, 남한으로 탈출하려고 한 것은 아닌지 추궁을 받았다.
결국 그는 농포에 있는 도집결소로 이송되었다. 여기서 한 번은 너무 배가 고파 집결소를 탈출해서 친척집에 갔다 돌아오다가 잡혀 실신할 때까지 매를 맞았다. 그는 강제노동으로 다리가 마비되었다. 뼈와 가죽만 남은 그는 앉아 있을 수도 없었다. 집결소는 그가 죽는 게 보기 싫었던지 2개월 후 석방했다.
반년이 지나 기력을 회복한 그는 어머니와 함께 중국으로 탈출, 東南亞를 거쳐 2000년 3월 남한에 도착했다. 이 인터뷰가 있었던 2002년 8월까지도 그의 어깨와 엉덩이에는 불에서 막 꺼낸 벽돌을 나르면서 화학물질로 인해 입은 상처가 남아 있었다.
지금은 「은정」이라고도 부르는 농포리 집결소는 청진市 송평구의 분구다. 이곳에는 수감자 #1이 있는 동안 남자 70명, 여자 50명이 수용되어 있었다. 숙소에서는 20명 가량이 한방에서 잤는데, 부부일지라도 함께 있을 수는 없었다. 여자는 대부분 중국에 갔다는 이유로 6개월간 수용되었지만, 남자들은 대부분 국가재산을 팔아먹었다는 이유로 그곳에 있었다.
이들은 벽돌을 만들고 농사일을 했다. 벽돌 공장에서 사용하는 화학물질 때문에 수감자들은 피부에 상처를 입었고, 막 구워 낸 벽돌을 운반하는 일도 쉽지는 않았다. 저녁에는 집단으로 자기반성회를 열어 자기나 남의 잘못을 고백해야 했다.
통상 이들은 새벽 5시에 일어나 30분간 농장으로 구보로 가서 두 시간 동안 일을 한 후 30분 동안 아침밥을 먹었다. 정오까지는 벽돌을 만드는 시간이고 30분간 점심을 먹은 다음 오후 1시까지 도구 수리와 작업준비를 했다. 그러고 나서 다시 6시간30분 동안 벽돌을 만들고 30분간 저녁식사를 했다. 저녁시간이 끝나면 오후 8시까지 자기반성회를 열었다.
#1은 그가 2개월 가량 수용되어 있는 동안 1명이 공개처형되었고, 3명이 영양실조로 인한 병으로, 다른 한 명은 파상풍으로 사망했다고 증언했다.
▲청진 집결소 수감자 #8
수감자 #8은 함경북도 무산 출신인 33세의 여성이다. 그녀는 1998년 중국으로 가서 조선족과 결혼했으나, 2000년 5월 중국 경찰에게 체포되어 한 달 후 송환되어 온성 국가보위부에서 남한 사람들과 접촉 여부에 대해 집중적으로 심문을 받았다.
청진 집결소에서 2개월간 수용된 후 석방된 그녀는 다시 중국으로 들어갔고, 조선족 남편과의 생활이 더 이상 안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깨닫고 2001년 10월부터 여행을 시작해 중국 남부와 東南亞를 거쳐 2002년 중반에 서울로 올 수 있었다.
청진에 위치한 이 집결소에서는 남자 30명과 여자 60명이 수용되어 있었는데, 대부분 중국에서 강제 송환된 사람들이었다. 수감자들은 이곳에서 3개월 정도 일을 하면서 자기 거주 지역 경찰이 신병을 인수하러 올 때까지 기다린다.
#8의 증언에 의하면 여자들은 매를 맞지 않았지만, 남자들은 매를 맞았다고 한다. 임신한 여자는 임신 3~4개월일 경우 수술로 낙태를 했고, 임신 4개월 이상이면 주사로 강제분만을 시켰다. #8이 수용되어 있는 동안 6명이 강제로 낙태를 당했다.
『中國서 기독교도 됐다』고 자백한 여자 2명 처형
▲온성 및 농포 집결소 수감자 #25
30代 중반의 여성 #25는 함경북도 새별군에서 태어났다. 1998년 4월 식량 사정이 악화되자 그녀는 중국으로 갔다가, 1년 후 경찰에 잡혀 송환되었다. 그녀는 1999년 가을 온성의 인민보안성 집결소로 가서 5주일간 수용되었다가 12월에 청진市에 있는 농포 집결소로 이송되었다. 그녀는 석방되자 1999년 12월31일 다시 얼어붙은 두만강을 넘어 중국으로 가서 2년간 살다가 2002년 6월 東南亞를 거쳐 서울로 왔다.
#25가 온성에 수용되어 있을 때 그곳에는 150명 가량이 2개의 방에 수용되어 있었다. 그들은 인간 이하의 대우를 받으면서 벽돌을 만들었고, 金正日을 찬양하는 노래를 불렀다. 중국에서 기독교도가 되었다고 자백한 여자 2명은 끌려 나갔다. 보안요원은 그들이 처형되었다고 말했다. 그녀는 온성에 처음 도착했을 때 수감자들이 말라서 유령처럼 보였다고 말했다. 그녀 자신도 5주일 동안에 체중이 5kg이나 줄었다.
농포 집결소에는 180명 가량의 수감자가 어류 양식장을 건설하고 있었다. 몽골로 들어가려다가 체포된 사람들은 남한으로 가려고 했다는 이유로 제22호 교화소로 이송되었다. 교사였던 한 여자는 몽골에서 송환된 후 거의 죽을 때까지 매를 맞은 후 끌려 나갔다. 어머니와 함께 수용된 네 살 난 소년은 영양실조로 죽었다.
농포 집결소의 수감자의 거의 80%는 여자였고, 그중 10~12명이 임신하고 있었다. 이들은 「반역자의 아이」를 가진 채 집결소를 떠날 수 없다는 통고를 받았다. 이들에게는 물이나 먹을 것을 주지 않고 배를 발로 차서 출혈이 되도록 했다. 몇몇 여자는 끌려 나가 낙태를 했다. 출산실에서 출생한 아기 4명은 광주리에 넣고 비닐로 덮어 옆방 창고에서 죽을 때까지 내버려 두었다.
▲농포 집결소 수감자 #26
청진市 출신인 #26은 아이 4명의 어머니이면서 두 명의 손자를 데리고 있었다. 1990년대 중반 남편이 병사하고 식량사정이 악화되자 딸 둘을 중국에 보내 일을 하도록 했다. 그러나 그들은 악덕업자에게 걸려 조선족 남자에게 팔려 버렸다. 그러자 #26은 아들 및 손자와 함께 딸을 구하러 중국에 갔다. 다행하게도 두 딸을 찾을 수 있었고, 이들은 延吉에서 1년간 살다가 2002년 4월 중국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26은 무산 집결소로 갔다가 온성 보위부 감옥을 거쳐 온성 보위부 구류장에 수용되어 일가족이 함께 탈출한 행위에는 정치적 의미가 있다는 이유로 가혹한 심문을 받았다. 그 후 #26은 농포 집결소로 가서 한 달 동안 수용되었는데, 여기서 경비원의 폭행으로 갈비뼈 한 개가 부러졌다. 그녀는 한 달 동안 집에서 치료를 하도록 임시휴가를 받았으나 집결소로 돌아가지 않고 2002년 6월에 다시 두만강을 넘어 아직 잡히지 않고 있던 딸을 만났다.
그러나 한 달도 못 되어 #26은 다시 잡혀 이번에는 회령 보위부 감옥에 6일간 수용되었다가 온성의 삼봉구 보위부로 가서 가혹한 심문을 받았다. 이곳에서 그는 악명 높은 제22호 교화소로 보낸다는 협박을 받았다. 그녀는 빌기도 하고 뇌물을 주기도 해서 결국 인민보안성 감옥에서 1주일 동안 캄캄한 독방에 감금되었다. 여기서 병에 걸린 그녀는 석방되었다.
1주일 후, 2002년 8월, 그녀는 다시 중국으로 들어갔고 12월에는 延吉에서 활동 중이던 在美교포 선교단체의 도움을 받아 다른 8명과 함께 北京과 昆明, 東南아시아를 거쳐 2003년 6월 서울에 올 수 있었다. 그녀의 딸은 지원단체의 도움으로 탈출하려다가 베트남 국경에서 중국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2003년 9월 현재 딸의 행방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26의 증언에 의하면 2000년 5월 농포집결소에는 남자 75명, 여자 175명 그리고 약간의 고아와 10代들이 있었다. 여자들은 방 3개에 분산 수용되어 있었는데 그 중 하나는 파라티푸스 환자, 다른 하나는 임신한 여자를 위한 방이었고, 나머지 방에는 130명의 여자가 수용되어 있었다. 방이 너무 좁아서 전원이 동시에 누워서 잘 수 없을 정도였다. 한 끼 식사는 삶은 옥수수 알갱이 70~75개였다.
2000년 5월 현재 임신한 여자는 28명 있었다. #26은 8개월 된 태아 셋이 낙태되고, 아기 7명이 살해되는 것을 목격했다. #26을 포함한 몇몇 여자들은 분만을 도왔는데, 태어난 아기는 얼굴을 밑으로 해서 땅에 내려놓았다. 금방 죽은 아기도 있었고, 좀더 오래 산 아기도 있었다. 이틀이 지나도록 죽지 않은 아기는 경비원이 젖은 비닐로 질식시켰다. 다른 감방에 있던 여자들은 그 장면을 볼 수 있었다. 경비원들은 『어머니들이 그 아기들은 중국인이기 때문에 죽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
◈ 3부 고문과 유아살해
[1. 고문]
▲ 수감자 #1은 1997년 청진市 농포 집결소에서 배가 고파 저지른 규칙위반 때문에 의식을 잃도록 매를 맞았다.
▲ 수감자 #3은 『규칙 위반자는 설 수도 앉을 수도 없는 상자 속에서 15일간 보내게 된다』고 말했다. 경비원의 구타는 흔했다고 한다.
▲ 리영국은 1994년 평양에 있는 국가보위부 심문소에서 꿇어 앉은 채 물고문을 당하고 총 개머리판으로 얻어맞아 귀와 눈에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받았다고 했다.
▲ 姜哲煥은 요덕군에 있는 제15호 관리소에는 처벌을 위한 독감방이 있었다고 했다.
▲ 수감자 #6은 1980년대 말 함경북도 단천에 있는 제77호 교화소에서 반장으로부터 매를 맞아 죽은 사람이 있었다고 말했다.
구타와 고문 만연
▲ 경비원이었던 安明哲은 그가 근무했던 관리소 세 곳에는 모두 독감방이 있었고, 많은 수감자들이 그곳에서 죽었다고 했다. 제22호 관리소에서는 사망자가 너무 많이 늘어나자 경비원들에게 폭력을 덜 사용하라는 지시까지 있었다.
▲ 수감자 #8은 2000년 중반 청진 집결소에서 남자들이 경비원에게 맞아 죽었다고 했다.
▲ 김민성은 1997년 온성 보위부 구류소에서 손가락이 부러졌고, 머리와 안면을 구타당했다고 했다.
▲ 류영일은 1997년 평양에 있는 보위부 심문소에서 옆방에 수용되어 있던 6명 중 2명은 들것에 실려 나갔고, 2명은 경비원의 부축을 받고 나갔고, 나머지 2명은 혼자서 걸어 나갈 수 있었다고 말했다. 부동자세로 앉아 있으라는 명령을 어긴 사람은 손에 수갑을 채워 감방에 매달았다. 수감자끼리 서로 때리라는 명령을 받은 사람도 있었다.
▲ 1990년대 초반에서 중반까지 회령 교화소에 수감되어 있던 수감자 #12는 사소한 규칙위반은 수감자끼리 때리도록 하고, 중범은 1.5m2의 독방에 1주일 이상 수용했다고 보고했다.
▲ 리민복은 1990년 혜산의 인민보위성 구류장에서 심문을 받을 때 쇠막대로 손톱과 손등을 맞았고, 그 후에 이송된 혜산 인민보안성 구류장에서는 수감자들이 서로 때리라는 명령을 받았으며, 김재철은 매를 맞아 죽었다고 했다.
▲ 2002년 초 회령과 온성의 인민보안성 감옥에 수감되었던 수감자 #15는 의자와 몽둥이로 매를 맞았다고 보고했다.
▲ 리순옥은 1986년 청진의 인민보안성 구류장에서 1월의 추위 속에서 구타와 물고문을 당해 의식을 잃었다고 보고했다. 그녀는 또 1990년대 초에서 중반까지 개천의 제1호 교화소 여성 감방에서 구타와 가혹행위가 있었다고 했다.
▲ 지해남은 제1호 교화소에 처벌을 위한 소형 독감방이 있었고, 1990년대 중반에 여자에 대한 구타가 일상적으로 일어났다고 보고했다. 그녀는 1999년 말, 신의주의 보위부 감옥에서 심문을 받을 때 꿇어 앉아서 매를 맞았고, 실신할 때까지 앉았다 일어서기를 했다고 한다.
▲ 김영은 1993년 마람에 있는 보위부 감옥과 문수에 있는 보위부 감옥에서 물고문과 구타를 당했다고 했다.
▲ 김태진은 1998년 말에서 1999년 초까지 청진에 있는 보위부 구류장에서 잠을 자지 못한 채 구타를 당했다고 했다.
▲ 유천식은 신의주 보위부 감옥에서 하루 종일 구타를 당했으며, 부동자세로 앉아 있는 고문이 더욱 견디기 힘들었다고 보고했다.
▲ 수감자 #22는 2001년 말 온성 보위부 감옥에서 의자로 맞았고, 2002년 초 청진 인민보안성 구류장에서는 더 심하게 맞았다고 했다.
▲ 수감자 #24는 2000년 1월 신의주에 있는 보위부 감옥에서 구타가 있었다고 했다.
▲ 수감자 #26호는 2000년 6월 온성의 보위부 감옥에서 부동자세로 앉아 있으라는 명령을 받았고, 2001년 7월에는 회령의 보위부 감옥에서 6일간 부동자세로 앉아 있는 벌을 받았다고 했다.
▲ 수감자 #28호는 1999년 함경북도 정어리에 있는 제12호 교화소에서 수감자들이 매를 맞아 죽었다고 했다.
[2. 유아살해]
강제 낙태 사례들
관리소에서는 특별한 수감자를 제외하고는 性的접촉이나 아이를 가질 수 없었다. 또 강제로 낙태를 시키거나 유아를 살해하는 행위도 보고되었다. 그러나 이 보고서에서는 중국에서 강제송환된 여자의 인종적 문제에 초점을 맞추기로 한다.
▲ 2000년 중반 청진의 집결소에서 최영화는 세 여자의 분만을 도왔으나, 분만된 아기들은 즉시 살해되었다.
▲ 수감자 #8은 2000년 중반 청진의 도집결소에서 6건의 낙태가 있었다고 보고했다.
▲ 수감자 #9는 2000년 중반 온성의 노동단련대에서 10건의 낙태가 있었다고 보고했다.
▲ 유천식은 2000년 중반 신의주의 보위부 경찰서에서 임신한 여자 4명이 강제로 낙태를 했다고 했다.
▲ 수감자 #21은 1999년 말에 온성 인민보안성 경찰서에서 2건의 유아살해가 있었다고 했다.
▲ 수감자 #24는 2000년 1월 南신의주 인민보안성 경찰서에서 7명의 아기를 분만시켰으나 모두 살해되었다고 했다.
▲ 수감자 #25는 1999년 말 청진의 농포 인민보안성 구류장에서 4명의 아기가 살해되었고, 임신한 여자 6명이 강제로 낙태를 당했다고 했다.
▲ 수감자 #26은 2000년 청진市의 농포 집결소에서 3건의 강제낙태와 아기 7명이 살해되었다고 증언했다.
* 글: 李南圭 디지틀 조선 편집위원
* 출처: 월간 조선 (20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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