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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바로 알아야 할 고조선

수호천사1 2010. 3. 11. 12:19

한중관계에서 바로알아야 할 고조선

 

1. 개관

고조선은 청동기문화를 바탕으로 성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로서, 중 · 근세에는 위만조선 이전의 조선만을 고조선이라 불렀으나, 최근에는 위만조선까지를 모두 포함하여 고조선이라 하고 있다. 요하유역의 비파형동검문화와 대동강유역의 세형동검문화가 고조선의 문화로 알려져 있는데, 기원전 3~2세기대 준왕 대의 고조선과 위만조선은 평양을 도읍으로 하고 있었고, 전국 연나라와의 전쟁이 있기 전인 기원전 4세기 말~3세기 초 이전에는 요하유역 어딘가에 중심을 두고 있었다.

 

고려시대 승 일연이 13세기에 쓴『삼국유사』와 승 일연이 참고한 중국 사서 『위서(魏書)』등에는 고조선이 기원전 2333년 하늘신인 환인의 손자이자 환인의 서손 환웅의 아들인 단군왕검에 의해 건국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를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다만 요하유역의 고고학적인 정황과 여러 문헌기록을 고려하여 볼 때, 기원전 8~6세기 요하유역에서 군장사회(君長社會)의 형태로 출발하였고, 늦어도 기원전 7~5세기 대에는 고조선이라는 이름이 중국에까지 알려졌음을 알 수 있다.

 

고조선은 발달된 청동기문화와 주변의 선진적인 문화를 수용하여 문화와 경제는 물론 정치적인 면에서도 발전을 이룩하였는데, 중국의 사서인 『위략(魏略)』에 의하면 기원전 4세기에는 고조선의 세력이 강성해져 중국의 전국시대 칠웅(七雄) 중의 하나였던 연(燕) 나라와 세력을 다툴 정도에 이르렀다. 고조선과 전국시대 연나라의 긴장관계는 표면적으로는 연나라의 칭왕(稱王)으로 되어 있으나, 고조선의 통치자 또한 연나라에 뒤질세라 칭왕하였다는 것으로 보아 당시 고조선이 결코 약한 나라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고조선과 연나라의 긴장관계는 급기야 기원전 4세기 말~3세기 초 전면적인 전쟁의 형태로 표출되었는데, 고조선은 이 전쟁으로 무려 2,000여리에 달하는 지역을 빼앗기고 그 중심지를 평양으로 옮기게 되었다. 이러던 중 진한(秦漢) 교체기와 한나라 초 중국이 혼란한 틈을 타 연나라를 비롯한 북중국 사람들이 고조선의 변경으로 많이 망명하게 되었는데, 연나라 출신 위만(衛滿)이 이들과 일부 토착집단을 결집시켜 준왕(準王)을 공격하여 위만조선(衛滿朝鮮)을 세웠다.

 

위만조선은 위만을 중심으로 한 소수의 중국 망명집단과 다수의 토착집단의 결합에 의해 세워진 나라였기에 처음부터 고조선의 정통성을 계승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였고 나중에는 중국 망명인 출신들 또한 고조선인으로서 완전히 토착화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한편 정권을 빼앗긴 준왕은 뱃길로 서해안 일대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한왕(韓王)이 되었다. 위만조선은 한나라와의 교역과 중개를 통해 실력을 배양시켰고, 이렇게 하여 축적된 군사력과 경제적 능력으로 임둔과 진번 같은 소국들을 복속시켜 점차 강국으로 부상하였다.

 

위만조선의 성장은 당시 북방의 강자인 흉노와 대치 국면에 놓여져 있던 한나라로 하여금 불안감을 야기 시켰고, 결국 기원전 109년 두 나라 사이에 전면전이 벌어지게 되었다. 당시 한나라는 50,000여명에 달하는 대군을 발동하여 위만조선을 공격하였는데, 위만조선의 군사력은 한나라가 근 1년이 지나서야 그것도 내분을 유도하여 겨우 승리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얼마나 강성하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한편 기원전 2세기 고조선의 북쪽에는 우리 민족의 일부가 세운 부여(夫餘)가 성장하고 있었으며 남쪽에는 진(辰)이라는 나라가 있었다. 고조선은 이들 나라와 함께 고구려, 백제, 신라를 형성한 모태가 되었다.

2. 위치

위치 관련 이미지기록에 의하면 고조선은 기원전 4세기 말 중국 연나라가 칭왕하는 것에 뒤이어 마찬가지로 칭왕한 것으로 되어 있고, 기원전 2세기 초에는 위만이 준왕정권을 전복시킨 다음 왕험성(왕검성)에 도읍을 정하고 위만조선을 세웠으며, 기원전 109년 가을 위만조선과 한나라의 전쟁이 있을 때에는 한나라 군대가 왕험성의 방비가 견고하여 오랫동안 함락시키지 못하였으며, 기원전 108년 여름에는 위만조선의 대신 성기가 왕험성에서 한나라에 항거하다가 결국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으로 되어 있다.

이중 위만조선은 그 왕성인 왕험성이 현재의 평양시 대동강 북안에 있었는데, 이는 위만조선과 한의 경계 역할을 한 패수(浿水)가 지금의 압록강이라는 점, 위만조선의 도읍 부근에 설치된 낙랑군 조선현의 치소가 지금의 평양시 대동강 남안의 토성동 토성이라는 점, 왕험성 및 조선현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 열수(列水)가 지금의 대동강으로 비정되고 있다든지 하는 점을 통해서 입증된다. 따라서 위만조선이 전복한 준왕 대 고조선의 왕성 또한 지금의 평양에 있었던 셈이 된다.

준왕 이전의 고조선, 다시 말해 기원전 4세기 말~3세기 초 전국 연나라와의 전쟁으로 2,000여리를 빼앗기기 전의 고조선 중심지는 구체적으로 어느 지역에 있었는지 분명치는 않다. 다만 준왕과 위만조선의 문화인 대동강유역의 세형동검문화가 요하유역 비파형동검문화의 후계문화이고 비파형동검문화가 요하유역에서 발전하였다는 점을 고려할 때, 요하유역의 어딘가에 고조선의 중심지가 있었을 것으로 여겨지는데, 후보지로는 조양(朝陽), 금주(錦州), 북진(北鎭), 심양(沈陽), 요양(遼陽), 해성(海城), 개주(盖州) 등이 논의되고 있다.

3. 종족구성

고조선은 예(濊) · 맥(貊)이라는 종족이 정치적으로 성장하여 발전시킨 나라이다. 예맥족은 한반도와 요령성 및 길림성 등 현재의 중국 동북지역에 살고 있던 주민으로서, 고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문화인 비파형동검문화를 형성, 발전시켰다. 중국의 여러 사서에는 예맥족에 대한 기록이 많이 보이는데, 이는 일찍부터 우리민족이 중국 등 여러 나라에 알려졌기 때문이다.

 

예맥족은 초기에 중국 요령성에 있는 요하유역을 중심으로 고조선을 건국하였고, 이후 지역적 분화를 통하여 부여와 고구려로 이어져 주변 민족과 구별되는 독자적인 문화와 언어를 발전시켰다. 중국의 사서인 『사기』와 『한서』에는 고조선을 구성하는 중심 종족으로서 ‘예맥조선’이 언급되어 있고, 『후한서』나 『삼국지』에는 부여와 고구려의 선주종족이 예맥이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후 이들 종족은 지역에 따라 약간씩 상황이 다르기는 하지만, 동예, 옥저, 삼한, 백제, 신라 등 여러 나라의 중심적인 지배집단이 되었다. 따라서 우리민족 형성의 근간이 된 종족은 고조선 사람들인 예맥족과 한반도 남부에 있었던 삼한을 구성한 한족(韓族)이라고 할 수 있다.

4. 정치와 경제

고조선은 제정일치적 통치체제와 8조금법 등의 법제도를 갖춘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이다. 그러나 고조선의 존속기간이 긴만큼 정치 및 사회적 단계 또한 변모하여 왔는데, 비파형동검단계에는 적어도 군장사회까지는 이르렀던 것으로 여겨지고, 세형동검단계에는 어떠한 형태로든지 간에 국가단계에 진입하였던 것으로 논의되고 있다.

 

고조선 전기의 정치형태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확실하게 알려진 자료가 발견되지는 않았지만 후기에 접어들면 이미 중앙통치 조직이 마련되어 있었다. 중앙에는 박사(博士) · 경(卿) · 대부(大夫) · 상(相) · 대신(大臣) · 장군(將軍) 등이 있어서 왕을 보좌하여 나라를 다스렸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통치력이 중앙집권화 되지는 못하였고 공동체적인 요소가 적지않이 남아 있었다. 고조선을 구성하고 있는 여러 집단에 대한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일정 범위에서 작용하고 있었지만, 동시에 각 집단은 내부적으로 자치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고위 관직을 차지하고 있던 이들 중에는 독자적인 세력기반을 지닌 이들이 있었으며, 자신의 의견이 왕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일탈하기도 하였다.

 

고조선의 경제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 보다 일찍부터 상당히 발전된 상태에 놓여져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점은 고조선이 중국 내지와 북방의 다른 집단들과는 구별되는 독특한 자기만의 청동기문화를 발전시켰다는 것과 요령지역이 이른 시기로부터 잡곡을 중심으로 하는 농업경제단계로 돌입하였다는 것 및 주변지역과 다양한 교류를 행하였다는 것에서 입증된다.

특히 위만조선 시기에는 중국의 한(漢) 나라와 주변의 여러 나라 사이의 중계무역을 통해 이익을 얻었으며, 연(燕)나라에서 만든 명도전(明刀錢)이라는 화폐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명도전은 중국 북경에서 한반도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서 발견되는데, 이는 고조선 주민들이 주변의 여러 종족과 함께 명도전을 사용하였음을 의미한다.

5. 사회

고조선은 적어도 위만조선 대에는 계급사회인 국가단계에 진입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 시기에는 이미 왕성, 관료조직, 군대, 계급 등의 요소가 모두 확인되고 있다. 위만조선의 국가로서의 성장은 중개무역과 군사정복에 의해 강화되었는데, 중개무역은 한나라와 위만조선 및 위만조선 주변의 여러 집단 사이에서, 군사정복은 위만조선과 그 주변의 진번과 임둔과 같은 소국들 사이에서 이루어졌다. 통치중심인 왕성으로는 왕험성이, 관료로는 상직(相職)이, 군대로는 장군 휘하의 최소 10,000여명의 군사가 있었다.

 

위만조선 이전에는 기원전 4세기대 왕과 대부 및 군사의 존재가 확인되는데, 기록이 희소하여 더 이상을 알 수 없게 되어 있다. 단, 기원전 4세기 말~3세기 초 전국 연나라와의 전쟁이 있기 전 고조선이 요하유역의 어딘가에 있었고 이 일대에 비파형동검문화 관계 유적이 분포하고 있으므로 약간의 추론을 할 수는 있는데, 기원전 8~6세기 요하유역에서 군사와 제정 및 신분을 상징하는 유물을 다량 부장하고 있는 무덤과 유물구성이 단출한 무덤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군장사회까지는 분화 발전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외 위만조선 전후의 것으로 여겨지는 8조금법 중 3조가 전해지고 있는데, 이에 의하면 사람을 죽인 자는 즉시 사형에 처하였고, 사람을 상해한 자는 곡물로 배상하였으며, 남의 물건을 훔친 자는 노예로 삼되 용서 받으려면 50만전을 내야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또한 백성들은 도둑질을 하지 않아 대문을 닫고 사는 일이 없었고 여자들은 모두 정조가 있어 음란하고 편벽된 짓을 하지 않았다고 되어 있다. 이 금법을 통해 고조선 사회가 일정한 법에 의해 통치되는 사회였고 최하층으로서 노예가 존재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6. 신화

신화 관련 이미지단군신화는 고조선의 건국신화로서, 신화의 형성시점에 대해서 여러 의견이 있기는 하지만, 아무리 늦어도 준왕 대의 고조선과 위만조선 대에는 기본적인 줄거리가 완성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단군신화의 맥락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으나, 단군신화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단군과 곰이 북아시아의 문화적 전통 속에 놓여져 있는 것으로서, 단군조선을 신석기시대, 예맥조선(기자조선)을 청동기시대의 상황이 반영되어 있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단군신화를 전하는 기록으로는『삼국유사』이전에 이미 일연 등이 참고한『고기』,『본기』,『위략』등이 있었으나, 지금 전해지는 것으로는 일연의『삼국유사』, 이승휴의『제왕운기』, 권람의『응제시주』, 그리고 『세종실록』지리지 등에 실려 있는데, 이 중『삼국유사』가 가장 고형이라는 데에서는 학자들 간에 이견이 없다. 따라서 여기서는『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단군신화를 간략하게 정리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아득한 옛적 하늘신 환인(桓因)의 서자인 환웅(桓雄)이 인간세상에 뜻을 두었는데, 환인이 그 뜻을 알고 지상의 삼위태백을 내려다보니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할 만한지라 이에 천부인 세 개를 주고 가서 다스리게 하였다. 환웅이 무리 3천명을 이끌고 태백산 꼭대기 신단수 아래에 내려와 신시(神市)라 부르고는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를 거느리고 곡식, 수명, 질병, 형벌, 선악 등 인간 세상의 온갖 일을 다스렸다.

이 때 한 마리의 곰과 한 마리의 호랑이가 같은 굴속에서 살고 있었는데, 항상 환웅에게 사람이 되기를 기원하였다. 이에 환웅이 신령한 쑥 한 다발과 마늘 스무 개를 주면서 말하기를 “너희가 이것을 먹되 햇볕을 100일 동안 보지 않으면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니라”고 하였다. 곰과 호랑이는 그것을 먹으면서 스무 하루 동안 금기하였는데, 곰은 여자의 몸이 되었지만 호랑이는 지키지 못하여 사람이 되지 못하였다.

그런데 사람이 된 웅녀가 이번엔 신단수 아래에서 결혼할 상대를 기원하였다. 이에 환웅이 잠깐 사람으로 변하여 웅녀와 혼인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가 바로 고조선의 건국자인 단군왕검이다. 단군왕검은 기원전 2,333년 즉위하였는데, 백악산 아사달 등에 도읍하였다가, 나라를 다스린 지 1,500년 향년 1,908세에 아사달에서 산신이 되었다.

출처 : 내 사랑 중국 ♡ MyLove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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