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과 선교에 대한 동방정교회의 이해
글 / 이문균 교수 / 한남대학교 기독교학과, 조직신학
들어가는 말
선교는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을 세상 속에서 현실화하려는 교회의 사역이다. 선교의 동기와 목적은 구원이라고 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구원에 대한 이해와 선교에 대한 이해는 밀접히 관련된다. 구원에 대한 이해가 선교에 대한 이해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그러므로 문제는 구원이 무엇이냐 하는 점이다. 물론 전통적으로 구원이 무엇이냐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합의된 이해가 있었다. 그래서 구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던 시대에는 선교에 대한 이해 역시 단순하였고 특별히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없었다. 즉 선교란 예수를 믿게 하여 죄를 용서받고 멸망으로부터 구원받도록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활동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기존의 선교 활동에 대한 반성과 함께 구원에 대한 이해가 다양하게 제기 되면서 선교에 대한 이해도 다양한 내용으로 확장되었다. 구원에 대한 이해를 따라 선교관을 몇 가지로 나누어 보자면, 죄에 빠진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복음을 전파하는데 초점을 맞추는 복음화 유형, 구원을 불의한 정치, 경제, 사회적 상황을 변혁시켜 하나님의 평화를 이 땅에 실현하는 활동으로 보는 하나님의 선교 유형, 그리고 구원을 자기 발견, 깨달음 혹은 인간화로 생각하면서 타종교와의 대화와 협력을 추구하는 종교신학 유형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1)
여기서 우리의 관심은 동방정교회의 구원과 선교에 대한 이해에 집중된다. 우리는 동방정교회의 구원관에 대한 고찰을 통해서 그들의 구원관이 개신교의 구원관과 비교할 때 어떤 점이 강조되고 있으며 어떤 점이 결여되어 있는지 확인할 것이다. 또한 그러한 성격을 지닌 구원관에 따라 동방정교회의 선교관이 어떤 유형으로 나타날 것인지 예상해 볼 것이다. 그러나 기대하고 예상했던 것과 달리 동방정교회의 구원관이 선교관을 형성하는데 특별한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면,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논의할 것이다.
Ⅰ. 삼위일체 하나님과 구원
잘 알려져 있듯이 동방정교회 신학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삼위일체론에 대한 강조다. 몰트만이 비판했듯이 서구 교회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실제적으로는 단일신론적인 이해를 극복하지 못했다. 그러나 동방정교회는 고대 희랍교회의 관계적 삼위일체론에 대한 이해를 잘 보존하였다. 최근에 학자들은 삼위일체론은 하나님에 대한 부가적인 설명이 아니라, 기독교에서 믿는 하나님은 곧 삼위일체 하나님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이해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할 뿐 아니라 인간과 사회, 그리고 구원에 대한 이해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온다는 것이 많은 학자들의 주장이다.2) 동방정교회는 구원의 근거와 목표, 그리고 힘과 가능성을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설명한다.
1. 신화(神化: theosis)로서의 구원
기독교의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과 인간은 존재론적으로나 인식론적으로 상호 관계 가운데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구원 문제도 하나님과의 관계 가운데서 논의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오래 동안 서방교회는 죄로 인해 원래의 모습으로부터 이탈된 인간의 현실을 문제의 근원으로 인식하였다. 루터는 자신이 죄를 지은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여 있음을 인식했다. 그에게 있어서 구원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됨으로 벌을 피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문제를 지적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첫째, 루터를 비롯하여 전통적인 구원관에서 하나님은 거룩하신 인격적인 존재로 충분하지 굳이 삼위일체 하나님이어야 할 이유가 없었다. 다만 삼위일체론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그의 속죄론적 의미를 들어내기 위하여 부수적으로 강조되었다. 둘째, 구원은 잘못되어 있는 현재의 인간이 과거 원죄를 짓기 이전의 상태로 회복되어야 한다는 관점에서 해석되었다. 즉 구원은 거룩하신 하나님이 원래 지어주신 모습으로부터 현실적인 인간은 벗어나 있고, 잘못돼 있다는 사실로부터 요청된다. 그런 의미에서 구원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요, 본래 모습의 회복으로 이해된다. 구원의 이러한 측면이 무시될 필요는 없지만 우리는 구원의 의미가 미래와 성취의 차원에 의하여 확장되어야 한다고 본다. 이 두 가지 문제와 관련하여 구원에 대한 논의를 진전시켜 보기로 하자.
첫째, 기독교에서 구원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벗어나서는 생각할 수 없다.
그렇다면 구원에 대한 바른 이해를 위해서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이해는 필수적이다. 그런데 기독교에서 믿는 하나님은 곧 삼위일체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곁들여지지 않고, 삼위일체 하나님과 적극적으로 결부되지 않은 구원에 대한 이해는 바르고 충분한 것이 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전통적인 구원에 대한 이해가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보충되고 확장되어야 한다. 구원은 단순히 죄를 짓기 이전의 원상태로의 회복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다. 구원은 삼위 하나님의 사랑의 사귐에 함께 참여하는 것이다. 희랍 교부들이 생각한 원래 이미지에 따르자면 구원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 즉 원을 그리면서 섞여 돌아가는 사랑의 춤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것을 동방교회 교부들은 신화(神化:theosis, deification)라고 표현하였다. 신화는 인간이 신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사귐에 참여함으로, 창조될 당시의 존재에 기대되었던 성취에 이르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신화의 가능성은 인간의 조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 자체에 그 근거가 있다. 즉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 방식 자체가 인간의 신화를 허용할 뿐 아니라 장려한다. 피조물이 하나님의 삶에 참여하고, 하나님과 사귐을 갖는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성품 그 자체에 잘 어울린다. 삼위일체론의 내적 논리는 이 세계와 인간의 창조가 삼위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한 사귐이 하나님 외부로 확장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도록 한다. 삼위 하나님의 사귐은 타자의 독톡성을 인정하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에게 있어서 차이는 경쟁과 배타의 조건이 아니라 사랑과 사귐의 조건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본성은 차이 속의 사귐(communion-in-difference)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자신과 다른 존재를 허용하고 자신과 다른 존재를 받아들인다. 그래서 인간 역시 하나님과의 차이 가운데서 하나님과 사귐을 갖게 된다. 그런데 그러한 사귐에 참여함으로 인간은 참으로, 그러나 부분적으로 차이 가운데 사귐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하게 된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본성 그 자체는 관계맺음에 개방적이다.3)
둘째, 인간의 구원에 대한 기대는 죄를 짓기 이전의 상태로 회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성취에 이르는 것이다.
현대의 철학적 인간학이나 신학적 인간학에서 강조되는 것은 인간의 미래 개방성이다. 인간은 희망하는 존재일 뿐 아니라 희망의 존재다. 즉 인간은 이미 되어 있는 존재가 아니라 미래에서 성취될 것으로 기대되는 존재다. 인간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에도 지금 이루어지지 않은 미래의 상태를 희망하면서 그 미래의 상태가 내 안에서 구현될 수 있도록 자신을 희망하며 살아간다.
인간의 미래성에 대한 이러한 통찰을 동방정교회는 잘 간직하고 있다. 이레네우스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음 받았지만 완전하고 성숙한 존재는 아니었다고 생각했다. 아담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신적인 완전성과 불멸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낙원에 있을 때에 아담은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 어린아이의 상태에 있었다. 그는 자유로운 선택의 능력은 갖추었지만 은혜에 대한 응답과 하나님의 뜻에 대한 복종을 통한 긴 여정을 거쳐 완성에 이르러야 할 과제를 안고 있었다.4) 그런데 그 여정의 출발점에서 아담은 사탄의 유혹에 빠지고 말았다. 그래서 인류는 아담 안에서 모두 성취에 이를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구원은 단순히 죄를 범하기 이전의 상태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처음 아담에게 기대되었던 것을 성취함으로 하나님의 불멸성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가? 이레네우스는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사랑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그 분처럼 되게 하기 위하여 우리처럼 되셨다고 하였다. 이제 인간은 우리를 위하여 인간이 되신 하나님인 그리스도 안에서 처음 창조될 당시 기대되었던 성취에 이르게 된다. 본래의 아담이 불순종함으로 죄와 죽음의 원리를 이 세상에 도입하였으나 그리스도는 그 분의 순종을 통하여 삶과 불멸성의 원리를 이 세상에 재도입하셨다. 그 분이 인류의 어느 국면에서나 인류와 동일시되시므로, 그 분은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과의 사귐을 회복시키시고 하나님의 형상과 모습에 따라 인간을 완전하게 하신다.5) 이러한 구원에 대한 사유가 동방정교회를 통하여 보다 정교하고 체계적으로 발전되었다.
이처럼 동방정교회에서는 구원을 하나님이 인간에게 부여하신 소명을 성취하는 것으로 파악한다. 동방정교회 사제 크리스토포로스 스타프로포울로스(Christoforos Stauvoulos)는 구원의 목표인 신화(神化)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인간들은 모두 신화를 성취하라는 이 특이한 소명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각기 하나의 신, 하나님을 닮은 자, 즉 하나님과 연합해야 할 운명을 지니고 있다. 사도 베드로는 삶의 목적을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묘사한다(벧후1:4). 삶의 목적은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 그리스도의 생명에 참여하는 자가 되는 것, 하나님의 은혜와 에너지를 전해 받는 자가 되는 것, 하나님을 닮은 자, 참된 신들이 되는 것이다. 대 바실의 말에 의하면, 인간은 하나의 신이 되라는 명령을 받은 피조물이다.”6)
그러나 그는 신화(theosis: deification)라는 말의 뜻이 오해받기 쉽다는 사실을 의식하면서 그 말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신화(theosis)! 이 심오한 단어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영역으로 고양되는 것, 하나님의 영역으로 올라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 본질적으로 신화의 의미이다. 그러므로 인간적 성품은 영화(靈化)를 향해 움직여야 하며, 그 과정에서 물질주의는 파괴되고 붕괴되어야 한다. 인간 영혼이 현재의 둔함에서 벗어나 빛나는 영성으로 변하되기 위해서는 영혼은 연마되어야 한다. 그것이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이 하나의 실체가 되는 방식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모습으로 변화된다. 그러나 이 연합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의 본질의 변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본성적이고 윤리적인 것이며, 은혜와 조화를 이룬다. 그것은 하늘나라의 무한한 행복이신 하나님과 전인(全人)의 연합이며, 인간의 본성은 신의 성품의 생성물이 된다. 그것은 원래의 아름다움으로 재형성되며, 새로운 생명으로 재탄생 한다. 그것은 신적 양자됨을 통해서 재창조된다.”7)
정리하자면 인간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인간이 의지해야 하는 외적인 원리(principle: archi)가 아니라, 인간의 존재론적 기원(origin: archi)이며 완성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는 것은 인간이 신론적인 구조를 가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참 인간이 된다는 것은 매 순간 하나님 중심으로 존재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은 자신을 부정하고 파괴하는 것이다.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갈 때, 인간은 무한에 이름으로 자신을 성취하게 된다. 인간은 영원으로 자신을 확장함으로써 참된 성취를 이룰 수 있다.8) 그 성취를 동방정교회에서는 신화 곧 구원이라고 한다.
2. 그리스도화(Christification)로서의 구원
하나님은 신적 인격의 공동체이고, 인간들은 신앙과 진리와 희망과 사랑 안에서 자유롭게 성삼위 하나님과 연합한다. 神化(deification), 이것이 각 사람이 창조된 이유다.9) 그런데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삼위일체 삶의 표출이다. 그리스도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삶에 온전히 참여한 인간이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외부적인 요소가 아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대표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의 활동 그 자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귐에 인간이 참여하는 길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인간이 일치에 이른 사실에 근거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인간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의 사귐에 들어간다. 그리스도는 그 목표에 이르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1) 인간의 목표와 본성
인간의 본질은 처음 만들어진 상태나 물질적인 성분에서 파악될 수 없다. 인간의 위대함은 창조된 세계를 닮은 데 있지 않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는 현실에 있다. 인간의 본질은 창조된 물질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형성하고, 인간이 지향하고 나아가는 토대가 되는 원형에 있다. 원형은 “형상으로”라는 말의 존재론적 내용이 된다. 인간이 무엇이냐는 문제는 창조된 요소에 의하여 대답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결국 성취되어야 할 원형에 의하여 대답될 수 있다.10) 그러므로 생물학적 범주로는 인간을 충분히 포착할 수 없다. 그러면 인간의 본질을 결정하는 그 원형이 무엇인가? 닛사의 그레고리는 그리스도가 창조된 모든 사람들의 원형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원형인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참된 존재론적 의미를 발견한다.11) 이 의미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함축한다.
첫째, 그리스도는 역사 안에서 우연히 일어난 단순한 사건이 아니다.
신적 로고스의 성육신 즉 신성과 인간 본성의 연합은 하나님의 영원한 뜻의 성취다. 이러한 관점을 계속 진전시키면 하나님은 신성과 인성의 위격적 결합을 위한 기초로서 인간을 창조했다고도 볼 수 있다. 파나이오티스 넬라스(Panayiotis Nellas)는 옛 아담이 새 아담(그리스도)을 위한 모형이 아니라 새 아담이 옛 아담을 위한 모형이라고 카바실라스의 말을 인용하였지만 곧 이어 그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원래 인간은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었으며, 그래서 인간은 자신의 원형을 위한 여지를 갖고 있어야 했다고 말했다.12)
둘째, 인간의 원형인 그리스도 이전에 인간이 창조되었다는 것은 인간이 죄를 범하기 이전에도 인간은 구원의 필요성을 가지고 있었음을 의미한다.13)
인간은 미숙하고 불완전한 아이와 같은 상태로 창조되었다. 인간 본성은 목표에 이르러야 참된 자신이 된다는 점 때문에 원형과의 연합을 이루어야 한다. 인간이 로고스의 인격을 받아들이지 않는 한 인간은 참된 인격, 즉 실제적인 존재가 될 수 없다. 그래서 바질(Basil the Great)은 그리스도가 탄생한 날은, 은유적으로가 아니라 참으로 인류의 생일이라고 불렀다.14)
셋째,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모든 인간은 그리스도의 ‘형상’이 되도록 부름 받았다.
그리스도는 이 목표의 실현을 위하여 길을 열어 놓았다. 그리스도는 인간의 구원을 소극적인 측면, 즉 원죄의 결과로부터 인간을 해방하시는 면에서만이 아니라, 적극적인 측면, 즉 창조될 당시에 부여받은 과제를 완성시킨다는 면에서도 이루신다. 따라서 인간의 구원은 구속 그 이상의 의미, 즉 신화(deification)라는 의미로 해석되어야 한다. 서방교회의 전통에서는 흔히 구원론이 속죄론과 동일시되지만 동방정교회에서는 구원은 신화와 동일시된다.
넷째, 교부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이단의 위험한 영향으로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삶의 의미와 최종 목표를 바로 인식시키기 위하여 바울이 말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삶”이란 곧 신화를 의미한다고 해석하였다.
신화의 인간학적 의미는 그리스도화(Christification)되는 것이다.15) 바울은 그 말을 존재론적으로 이해하였다. 그는 그 말을 그리스도를 외적으로 모방하거나 윤리적인 진전을 가르치는 것이라기보다는 그리스도처럼 되는 것을 강조하는 말로 해석하였다.
(2) 그리스도의 몸
신화(神化)에 이르는 가능성은 인간에게 있지 않다. 신화의 가능성은 타자를 허용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성품에 근거하며, 신화를 가능하게 하는 첫 출발은 앞에서 말했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 분처럼 되게 하기 위하여 우리처럼 되었다. 그런데 성육신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명이 가능하다. 그 하나는 아들의 성육신은 인간의 죄 때문에, 또 그로 인하여 요구되는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를 위해 이루어졌다는 설명이다. 신약성경의 증언도 이러한 해석을 강하게 뒷받침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셨다는 성경의 증언(요일4:10)은 수용되어야 한다. 서방교회는 성육신을 주로 이러한 관점에서 해석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성육신 사건이 갖고 있는 역사 종말론적인 측면을 충분히 나타내지 못하고 있다. 이 경우 성육신은 인간의 죄로 인한 긴급조치로 해석될 수 있으며, 성육신은 십자가의 대속을 위한 바탕을 마련하는 것으로 머무르게 된다. 그래서 십자가를 통한 대속의 완성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기능도 끝나고 더 이상 참 하나님이요 참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론적 위치는 필요 없게 된다.
성육신의 이유에 대한 또 하나의 설명은 아들의 성육신은 영원으로부터 작정된 것으로 하나님의 창조 계획에 이미 들어 있었다는 해석이다.16) 이 경우 성육신은 인간의 죄를 해결하기 위한 긴급조치가 아니라 자신을 내어주는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 안에서 이미 계획된 것이라고 본다.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과 인간의 새로운 결속을 통해서 처음의 창조가 그 완성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동방정교회는 성육신을 주로 이러한 관점에서 해석하였다. 동방정교회에서는 인간의 창조를 하나님과의 연합이라고 하는 종말론적 기대로부터 이해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성육신은 처음부터 마련된 신적 계획의 일부다. 다만 아담의 타락으로 그 과정이 복잡하게 진행되었을 뿐이다. 성육신 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이 하나님과 연합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17) 성육신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종말론적 중심인 그리스도를 인간 역사에 소개하였다. 이로써 그리스도의 탄생과 함께 인간의 삶은 새로운 품질, 새로운 염색체를 갖게 되었다.18) 말씀의 성육신으로 인간은 하나님께 나아가게 되었고, 그 결과 그리스도 이전의 인간성과 그리스도 이후의 인간성은 차이가 생겼다. 성육신으로 처음 가졌던 하나님과 인간의 친교가 회복되었는데, 처음보다 더 견고한 것이 되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로운 창조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것으로 동방정교회의 성육신에 대한 이해를 모두 설명한 것은 아니다. 동방정교회의 관점에서도 말씀의 성육신은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 자신의 역사다. 인간의 신화에 대한 하나님의 기대는 인간이 죄를 지음으로 위기에 처해졌다. 하나님의 본성과 인간의 본성은 타락과 함께 분리되고 비극적인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생기를 불어 넣어주신 삶보다 자신의 자율적인 삶을 선택함으로써 죄를 짓게 되었고, 결국 그의 생명은 불멸성을 상실하였다. 죄의 행위는 그에 따른 외적인 고통을 낳았고, 그 때문에 인간은 죄된 행위의 열매인 쾌락을 찾게 되면서 죄의 습관은 인간의 두 번째 본성이 되었다.
넬라스는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인간이 초래한 세 가지 장애와 연결시켜 설명한다. 첫째 장애는 왜곡된 본성인데 그것은 성자의 성육신으로 제거되었다. 성육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은 온전한 인간의 모습과 영적 삶의 근거를 찾을 수 있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인간 본성의 일치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19)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신성과 인성의 위격적 연합은 인간의 원형이 된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탄생은 새로운 인간 존재론의 시작이었으며, 그리스도는 새로운 인류의 진정한 기원자가 되신다고 말할 수 있다. 둘째 장애인 죄는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제거되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고난과 희생을 통하여 모든 인간을 다스리는 죄와 죄의 권세는 파괴되었고, 인간 본성은 하나님을 향한 적대감으로부터 해방되었고 죄의 노예에서 풀려났다. 셋째 장애인 죽음은 그리스도가 부활하심으로 제거되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참된 인간의 몸은 불멸하는 영적인 몸이 되었고, 시간과 공간의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운 몸이 되었으며, 새로운 영적인 감각과 기능을 부여받았다. 그리스도는 죽음에서 불사의 몸으로 부활하심으로 우리 인류를 위한 불멸성의 개척자가 되셨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몸, 복된 몸은 인류의 새로운 ‘유형’이 된다. 부활하신 주님의 복된 몸은 완전한 인간 즉 신-인의 실현이다. 그리스도는 참된 인간을 보여주신 처음이자 유일하신 분이다.
3. 성령을 통해 교회에서 경험되는 구원의 현실
성부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인간이 신화(神化)에 이르도록 정하셨고, 인간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의 교제 안에 참여하기를 기대하셨다. 성육하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인간에게 삶의 궁극적인 목적인 신화를 성취할 수 있는 길을 실현하셨다. 그런데 성부 하나님이 정하셨고 성자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우리에게 객관적으로 주어지는 신화(deification)는 성령 안에서 우리에게 현실화된다. 오직 성령 안에서만 신화에 도달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신 성자께서 우리에게 제공하신 것을 우리에게 전달해 주는 분은 성령이시다. 우리의 소명은 오직 하나, 성령 안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신화이다. 20)
동방정교회에서는 인간의 신화, 즉 하나님과의 완전한 연합은 부활한 후에 완전하게 실현될 것으로 기대한다. 그러나 신화, 하나님과의 연합은 기계적인 방식으로 전해져서 어느 순간 우리의 연약한 본성이 마술적으로 변화되는 것은 아니다. 신화는 타락하고 연약해진 본성이 조금씩 변화되어 영생에 적합하게 되어야 한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객관적으로 이루어진 신화의 사역은 성령에 의하여 완성되며,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에 적합하게 된다. 성령을 성부와 성자를 이어주고 매개하는 끈으로 이해한다든지, 성자께서 이루어놓으신 객관적인 속죄의 사역을 성령은 우리 자신을 위한 것으로 믿고 고백하게 한다는 것은 모든 기독교 전통이 공유하고 있는 내용이다.
그런데 동방정교회는 성령을 이해함에 있어서 개신교보다는 교회론적으로 사고한다. 동방정교회에서 성령의 사역은 무엇보다 교회와 깊이 관련된다. 성령은 교회와 교회의 성례전적 의미를 완전케 하시는 분이시다. 성례전에서 생명의 빵, 그리고 주님의 몸과 피가 되는 것은 성령의 임재에 의한 것이다.21) 성령은 교회의 위대한 거주자이시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신비한 몸인 교회와 주님을 조화시키는 하나의 신적 결속이다. 성령은 신자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들이 되게 함으로써 교회를 만드시는 분이다.22) 교회는 성령의 활동력(energy)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시간 안에서 확장되며, 그리스도에 의하여 세계가 받아들여지는 역동적인 영역이다.23)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신비한 몸에 연합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성육신만의 사역이 아니다. 그것은 성령의 사역이기도 하다. 성령은 자신의 신령한 은사를 가지고 교회를 만드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이제 신자들은 성령을 통해서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된다. 성부께서 마련하시고 성자께서 실현하신 사역을 성령은 완성하고 사람들에게 적용시키신다. 성령은 교회 안에서 신비하게 신자들을 성화시키고 그리스도와 연합시킴으로써 주님의 신비한 몸을 만들고 생명을 부여하신다. 이 신비한 몸인 교회 안에서 성령의 성화시키는 에너지가 빛을 발한다. 이 성화시키는 에너지와 성령의 다양한 은혜와 은사는 모두 하나님을 닮은 인간의 새로운 성품을 만들고 구체화해 준다. 성령은 인간을 영적인 방법으로 튼튼하게 해주어 신화의 길을 걷게 해준다.
그런데 성령의 도움으로 이루어지는 신화의 길은 교회의 성례전을 통해서 현실화된다. 성화는 단순히 윤리적이고 수도자적인 수행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성화는 이 땅에서 이미 신화를 현실화하고 맛보는 것이다. 그것은 곧 그리스도와 일치에 이르고 경험하는 것이다. 동방정교회는 이것을 그리스도화(christification)라고 한다. 하나님은 성자의 성육신을 통해 인류의 신화를 가능하게 하셨다. 인간은 세례를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사람이 되며 성만찬을 통해서 신화를 경험하며, 성령의 은혜 가운데 그리스도를 원하고 그리스도와 일치에 이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리스도화(christification)는 신화의 존재론적 바탕이요, 신화에 이르기까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이 추구해야 하는 과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화 되기 위하여 교회 안에서 성례전을 통하여 도움을 받아야 한다.24)
(1) 인간 존재와 방향의 그리스도화:
세례는 인간을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태어나게 하며, 삶의 방향이 그리스도를 지향하게 한다. 세례는 죄를 씻어주고, 원죄의 결박을 벗어나게 해 준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세례가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 실체화되도록 한다는 점이다. 사람은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존재가 된다. 이 땅에서 신화가 시작되는 것이다. 물리적인 출산을 통해서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육체의 삶을 살도록 하는 반면 영적인 탄생을 통하여 하나님은 인간들이 영적인 유기체, 즉 영적인 눈과 귀를 가지고 영적인 삶을 살게 하신다. 세례는 문자적으로 그리스도안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며, 이런 의미에서 인간의 새로운 창조다. 성육신 하심으로 주님은 인간의 본성에다가 신적인 본성을 기름 붓듯 채우셨다(chrismated). 그리고 성령이 인간 본성에 들어오셨는데, 처음 창조 때에는 비인격적인 방식으로, 생명의 숨으로 불어넣어졌지만(창2:7) 이제는 인격적인 방식으로 들어와 우리와 교통할 수 있게 되었다.(요20:22) 성령이 인격적으로 부어짐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새로운 기능들이 생기를 얻고 활력을 갖는다. 그런데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존재가 된 사람은 성만찬을 통해서 부활하신 주님을 경험한다.
(2) 삶의 그리스도화:
성만찬에서 삶의 그리스도화가 이루어진다. 여기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완성되고 충만해진다. 밥과 고기를 먹으면 그것들이 우리 몸의 일부가 되는데, 성만찬은 그것을 먹고 마시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화시키는 힘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성만찬은 영적인 삶의 중심이며 근원이다. 심신의 감각과 기능을 지닌 전인적 인간은 그리스도와 깊은 연합을 이루게 되며 변혁되고 그리스도화 된다. 그런데 동방정교회는 성만찬이 인간 생활뿐 아니라 전 우주의 질서를 새롭게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성만찬은 최후의 실재, 즉 모든 것의 ‘목적’이며, 이 땅 위에서의 삶의 목표이며, 천국생활의 내용이며, 역사의 변혁이라는 것이다. 성만찬의 시간은 과거와 하나 되게 하며, 현재와 미래를 하나로 만든다. 성만찬은 영원성을 들어내고, 영원성을 매일의 삶 속에서 실현시킨다. 성만찬의 공간은 그리스도인들의 실제 고향인 천국의 공간이다. 성만찬에서 그리스도의 몸, 즉 사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성부 오른편에서 영광을 받으시는 그 몸이 실제로 성도들에게 양식으로 제공된다. 이 양식을 먹으므로 성도들은 그의 몸의 지체가 되고, 그 몸 안에서 역사적 예수와 동시대인이 되며, 앞으로 올 축복된 삶에 참여하게 된다.
(3) 마음과 의지의 그리스도화:
우리는 마음(mind)과 의지(will)를 다하여 그리스도와 일치되기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 그리스도는 인간의 원형이다. 인간이 처음에 창조된 것은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는 영혼의 고향이다. 그리스도만이 선함이며, 진리며, 모든 것이 찾고 구하는 목표다. 우리의 지성과 의지 역시 그 분을 위한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알기 위하여 지성을 부여받았고, 그 분을 향하여 달려가기 위하여 의지를 부여받았다. 인간의 생각이 그리스도의 생각과 같아지고 인간의 의지가 그리스도의 의지와 합치될 때 그리스도와의 하나됨(그리스도화)이 완전하게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닮으려는 사람은 그리스도에게 생각을 집중해야 한다. 그리고 자아를 뒤로 한 채 하나님을 향하여 온 뜻을 다하여 나아가야 한다. 그리스도의 마음과 뜻을 따르는 참된 영적인 삶은 사랑이다.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은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이다. 물론 완전한 신화에 이르는 것은 부활과 함께 기대된다. 그러나 인간은 이 땅에서 성령의 은혜와 함께 생각과 의지를 그리스도를 향하여 모으는 노력, 성화의 과정이 필요하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 성화의 삶을 향한 인간의 노력과 성령의 성화시키는 은혜를 어떤 관계로 보아야 하나? 동방정교회의 전승과 가르침에 따르면, 은혜와 인간의 자유는 공동으로 표현되며, 서로 분리하여 이해될 수 없다. 그것들은 두 개의 분리된 요소로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이 내면적으로 자유로이 기독교적인 삶과 선을 위한 결정을 내리는 순간,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여 그를 강건하게 해준다. 이 은혜가 주어지는 순간, 그는 자유로운 선택을 한다.25) 즉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자유의지는 서로 협력한다. 우리의 자유의지의 협력이 있기 때문에 우리 안에서 신적 은혜가 증가할 수 있다. 은혜는 인간의 인격을 점유하며 선을 구체화하기 위해서 그 인격을 강건하게 해준다. 그래서 각 사람이 자유로이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받는데 비례하여 그만큼 더 기독교적 삶은 은혜로 충만하고 완전해지며, 기독교적 선행이 증가하고 덕이 진보한다. 이것은 기독교인은 신화의 길을 걸어가면서 은혜로 말미암아 힘을 얻어 점점 선행과 덕행을 증가시킨다는 의미이다.26) 그러므로 성화의 삶을 위해서 우리의 마음에 성령의 은혜가 임해야 하며, 성령이 우리 마음의 수호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 인간들도 결단과 열심을 발휘해야 한다. 우리의 열심이 줄어들거나 결단이 약해질 때에, 은혜는 활동하지 않는다. 우리는 신화에 이르는 삶의 길을 여행하는 동안에 끊임없이 잠들지 말고 깨어 있으라는 복음적 명령을 실천해야 한다.27)
Ⅱ. 구원과 선교
구원에 대한 이해가 선교관의 성격과 내용을 온통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구원관이 어떠하냐에 따라 선교의 목적과 정책이 영향을 받으리라는 것은 누구나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면 동방정교회의 구원관은 동방정교회의 선교관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지금까지 살펴 본 동방정교회의 구원관을 바탕으로 생각해 볼 때, 동방교회는 어떤 유형의 선교신학을 발전시켰을까? 단순하게 정리하기는 힘들지만 대체로 다음과 같이 예견된다.
우선 동방정교회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선교의 근거와 목표로 생각하며, 교회는 선교를 주도하는 주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교를 매개하는 것으로 이해한다는 점에서 볼 때,28) “선교는 궁극적으로는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느님의 선교’에 참여하는 것이라”는 하나님의 선교와 유사한 선교관을 발전시켰을 것으로 예상된다.29) 이른바 하나님의 선교신학은 1960년대 이후에 발달한 선교신학으로서 인간의 신화와 그리스도화에 관심을 기울이기보다는 사회 속에서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를 실현하는 것에 우선적인 관심을 기울인다. 현실의 변혁을 일차적 중심 과제로 생각하는 하나님의 선교는 동방정교회에서 받아들이기 힘든 구원관을 전제하고 있다. 동방정교회의 신학은 현대사회의 문제점과 전통적인 선교신학의 문제점을 인식하면서 등장한 하나님의 선교신학과는 거리가 먼 선교관을 가지고 있다.
다음으로 동방정교회는 인간의 신화를 구원의 목표로 생각하고, 이 땅에서 교회는 그 구원의 실재를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매개한다는 점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볼 때, 복음을 전파하여 개인의 영혼을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촉구하고, 교회를 설립하고 성장시켜 그 일을 확장해 나가는 것이 선교라고 생각하는 복음주의 선교신학과 유사한 유형의 선교관을 발전시켰을 것으로 예상된다.30) 동방정교회의 구원관이 서방교회와는 조금 다른 관점을 토대로 발전된 것은 사실이지만, 기본적으로 인간의 사멸성과 죄로부터 벗어나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을 기초로 전개된다는 점에서 동방정교회의 구원관은 보수주의 신학, 복음주의 신학과 통하는 면이 많다. 그러므로 동방정교회의 선교신학은 당연히 복음화 유형에 속한 것으로 귀결될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그러나 나타난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동방정교회는 서방교회의 전통적인 선교를 기본적으로 외면하여 왔다. 개종의 선교는 선교를 왜곡시키는 것으로 이해한다.31) 이른바 복음화 유형의 선교관을 부정적으로 생각한다. 여기서 문제가 제기된다. 구원과 선교의 관련성을 토대로 예상한 것과 동방정교회의 선교관 및 선교의 현실이 다르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 어디에 문제가 있는 것일까?
우선 그 동안 서구에서 발달한 선교신학이 동방교회의 상황과 전통 그리고 신학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동방교회는 수세기 동안 영적으로, 신학적으로 독자적인 세계를 형성하였다. 동방교회는 오래 동안 서방교회와 상관없이 자신의 전통을 충실히 지켜왔다. 동방정교회는 자신의 교리에 대해서 특별한 의문이나 반론이 제기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의 교리를 신학적으로 반성하고 발전시키는데 적극적이지 않았다. 그래서 서방교회는 오래 동안 동방교회의 신학에 주목하지 않았으며, 배우고 함께 논의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20세기 초 에큐메니칼 운동과 함께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만나면서 신학적인 대화가 진전될 수 있는 기회가 열렸다. 그러나 동방교회가 생각하는 진리와 가르침이 서방교회에 그대로 전달될 수 없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사고방식과 사유의 틀로 상대방을 이해하기 마련이다. 서방교회는 동방정교회의 사상과 주장을 자신의 방식에 의해 분류하였고, 동방교회에는 거의 적합하지 않은 범주들로 변형시켰다. 이것은 구원과 선교에 대한 이해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아는 선교신학은 서방교회의 신학적 전통과 내용, 그리고 상황을 반영하였다. 선교신학에서 동방정교회의 신학과 상황은 고려되지 않았다. 오래 동안 다른 세계에서 살아온 서방의 선교신학자들이 만든 선교신학의 유형으로는 동방교회의 선교신학을 설명할 수 없다. 그런데 우리는 동방정교회의 선교관을 지금까지 서방교회에서 발전시킨 선교신학의 유형을 따라 복음주의 선교신학이나 하나님의 선교신학에 맞추어 보려고 하였다. 동방정교회의 구원관을 나름대로 이해한 다음 그 내용을 토대로 동방정교회의 선교관은 복음주의 선교신학 유형으로 나타날 것이라고 예상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예상은 비슷하게도 맞지 않았다. 우리는 동방정교회의 선교신학과 현실을 담기에는 지금까지 서방교회에서 발전시킨 선교신학의 유형이 적합치 않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 것이다.
그러면 동방정교회의 선교신학과 선교가 우리의 예상과 달리 복음주의 선교신학의 유형으로 나타나지 않은 이유가 오직 신학적 사유의 틀이 다르다는 점 때문인가. 개념과 용어만 놓고 보면 그렇다. 그러나 동방정교회의 선교관이 복음주의 선교신학에서 보여주는 복음전도에 대한 활력이나 하나님의 선교신학에서 보여주는 사회와 역사에 대한 선교적인 관심이 결여된 것은 동방정교회의 신학과 구원관이 가지고 있는 성격과 내용 자체에 기인한다. 우리가 동방정교회의 구원관을 근거로 복음주의 선교신학을 기대한 것은 너무 단순한 생각이었다. 동방정교회 신학에는 그렇게 생각할 내용도 물론 있지만, 그 내용을 다른 방향으로 이끌어 가는 다른 요소가 크게 작용한다는 점을 생각해야 했다. 어떤 신학적인 주장이 가지고 있는 장점이 우수한 것으로 현실화되기 위해서는 그것을 뒷받침하는 다른 내용과 역사적 상황에 의하여 도움을 받아야 한다. 어떤 한 주장이 다른 문맥과 상황 가운데 놓일 때 그 주장은 엉뚱한 방향으로 그 결과가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우리는 동방정교회의 구원과 선교에 대한 이해 가운데 긍정적인 점을 정리할 것이다. 그 다음 그 긍정적인 관점과 내용이 현실에서 기대한 것과 달리 나타나게 된 원인을 찾아볼 것이다. 우선 긍정적인 면을 생각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동방정교회는 철저히 삼위일체 하나님과 관련하여 구원과 선교를 이해하였다.
기독교에서 구원이 근본적으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수립하는 것으로 이해되는 것이 마땅하다면 동방정교회는 바른 관점을 지녔다고 볼 수 있다. 앞에서 이미 확인하였듯이 동방정교회는 인간의 사멸성과 죄라고 하는 인간의 현실을 중심으로 구원의 필요성과 구원의 길을 제시하기에 앞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의 본성 자체에서 구원의 근거와 목표와 가능성을 발견한다. 그리고 구원이 성취되는 과정도 철저하게 삼위일체론적으로 설명한다. 성부 하나님은 인간을 삼위일체 하나님의 친교 가운데 참여시키기 위하여 인간의 신화를 결정하셨고, 인간의 신화를 위하여 성자께서 성육신 하사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으며, 성령은 인격적으로 인간에게 임재 하심으로 신화를 이루신다는 것이다. 이러한 구원에 대한 삼위일체론적 이해는 그대로 선교에 대한 삼위일체론적 이해로 이어진다. 한 마디로 인간의 구원을 위한 선교는 삼위일체 하나님에게서 시작되고 성취된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 양식이 선교의 근거가 되고 하나님과 인간의 친교 회복, 곧 구원이 선교의 목적이 된다. 선교는 세상과 인간을 하나님의 존재양식적 삶으로 인도하는 것, 즉 하나님의 은총을 인간들에게 전하는 것이다. 동방정교회에서 선교는 본질적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다. 구원과 선교에 대한 삼위일체론적 이해는 우리가 배워야 할 중요한 내용이다. 개혁교회는 구원의 가능성과 목표, 그리고 선교의 근거와 내용을 삼위일체 하나님에게서 확인하는 동방정교회의 관점을 적극적으로 수용해서 그 신학적 내용을 풍부하게 만들어야 한다.
(2) 동방정교회는 구원을 신화(神化)로 깊이 있게 이해하고, 교회론적으로 그 폭을 확장하여 구원의 공동체성을 강조하였다.
동방정교회는 인간의 미래 개방성, 인간은 이미 되어 있는 존재가 아니라 미래에서 성취될 것으로 기대되는 존재라는 통찰을 따라 구원을 설명하였다. 구원이란 단순히 죄를 짓기 이전의 상태로 회귀하는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며, 삼위 하나님의 사랑의 사귐에 동참하는 것, 즉 신화에 이르는 것이다. 동방정교회는 구원을 하나님의 기대와 하나님이 인간에게 부여하시고 기대하신 소명을 성취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또한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우리에게 신화를 가능하게 하신 그리스도를 닮고 그리스도가 되는 그리스도화(Christification)를 촉구한다는 점에서 이 세상에서의 성화에도 관심을 기울인다.
뿐만 아니라 동방정교회는 개인의 구원보다는 그리스도화된 사람들이 이루는 교회에서 구원의 현실을 보려고 한다. 그런데 교회는 개신교 신자들이 흔히 생각하듯이 하나님을 믿는 개인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구성한 단체가 아니다. “그리스도의 성례전인 교회는 개종자들의 종교적인 모임, 삶의 종교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조직이 아니다. 그것은 새로운 삶이며, 따라서 인간의 존재 전체, 삶 전체를 대속한다.”32) “정교회에 있어서 교회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삶과 경험을 표현하고 나누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정교회는 이러한 삶과 나눔을 행하는 교회를 강조함으로서 교회의 선교적 연속성을 배타적으로 강조한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계시되고 성취된 인류에 대한 구원 사역을 행함으로서 선교를 교회의 본질로 한다. 선교하지 않는 교회는 교회가 아니다”.33) 그러나 이 말은 서방교회에서 이해하는 것과는 뜻이 사뭇 다르다. 동방정교회에서는 선교를 어떤 소명을 지닌 사람의 활동으로 이해하기보다는 교회의 존재 자체의 결실로 이해한다. 다시 말하면 교회 자체가 이 땅에서 구원을 보여주는 실체이며 이 땅에서 구원을 매개한다는 것이다. 교회는 이 땅에서 구원과 구속의 궁극적인 실체를 나타내고 실현한다. 교회 안에서, 그리고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임재하고 있으며, 사람들에게 전해진다.34) 그런데 하나님의 임재와 구원은 교회의 성례전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나누어지고 경험된다.
동방정교회의 구원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 구원과 교회의 공동체성에 대한 강조, 선교를 교회의 본질로 이해하는 것은 개혁교회 신학이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할 요소다.35) 그러나 우리는 동방정교회 신학의 훌륭한 통찰과 관점이 실제 교회와 선교의 현실에서는 왜 바람직한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았는지 의문을 갖게 된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어떤 신학적인 주장이 가지고 있는 장점이 우수한 것으로 현실화되기 위해서는 그것을 뒷받침하는 다른 내용과 역사적 상황에 의하여 도움을 받아야 한다. 이 점을 생각하면서 동방교회의 구원관과 선교관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 요인을 정리해 보기로 한다. 그 요인들은 서로 연결되고 영향을 미침으로서 부정적인 영향을 확대하였다고 보여진다.
(1) 동방정교회는 사도들과 고대 교회의 신학 전통들을 수호하는 것을 사명으로 느낄 정도로 열심을 보였다.
자체 안에서는 누가 더 고대 교회 전통에 충실한 정통인가 하는 논쟁을 벌이기도 하였다.36) 역사적으로 동방교회는 이슬람 국가들과 지리적으로 맞닿아 있었기 때문에 정통신앙을 중심으로 정통신앙을 보존하는데 관심을 기울였다. 그래서 동방정교회는 서방교회가 잊거나 잃어버린 고대 교회와 교부들의 훌륭한 통찰과 그들이 간직했던 소중한 내용들을 잘 보존해왔다. 그들은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 교회가 시대의 변화에 따라 잃어버린 교회의 본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할 사명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동방정교회 신학자들의 논문을 보면 많은 경우 앞서간 교부들의 사상을 소개하는데 관심을 집중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변화된 시대에 구원의 복음을 어떻게 표현하고 선교를 효과적으로 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에는 아무래도 소홀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2) 삼위일체 하나님과 관련하여 이해한 동방정교회의 구원관은 그 자체로서 훌륭한 통찰과 내용을 갖고 있지만 성례전적 교회관과 연결되면서 긴장과 활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교회는 이 땅에서 이루어진 신화의 실체로 간주되며, 성례전을 통하여 구원을 매개하고 경험하게 한다. 물론 그리스도화를 향한 성령의 은혜와 신자들의 노력을 강조하지만 교회는 이 땅에서 구원과 구속의 궁극적인 실체를 나타내고 실현한다는 확신에 의하여 성화에 대한 강조가 힘을 잃었다. 미래가 현재에 삼키웠으며, 교회는 내향성에 빠졌다. 교회에서 경험되는 구원의 현실이 구원의 미래성을 흐려놓았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계시되고 성취된 인류에 대한 구원 사역을 행함으로서 선교를 교회의 본질로 한다고 하지만 선교를 교회 자체의 결실로 이해하는 동방정교회는 서방교회에서 강조하는 선교의 동기를 결여하고 있다.
(3) 콘스탄틴 황제 이후 비잔틴 제국 속에서 정교회는 국가와 긴밀한 협력 내지는 예속적 관계 가운데 있었으며, 이러한 관계는 근대에 이르러 제정 러시아와 소비에트 러시아에서도 계속 이어졌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교회는 국가의 도움을 받고 혜택을 누리는 현실에 안주하게 되었다. 교회와 신학은 세상의 현실을 해석하고 변혁시키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게 되었다. 이러한 동방정교회의 현실은 타 지역과 문화권으로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전통적인 의미의 선교에 관심을 갖지 않게 했으며, 불의한 현실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변혁시켜 하나님의 평화를 이 땅에 이루어야 한다는 하나님의 선교에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게 되었다. 구원의 실재인 교회에서 구원을 경험하고 매개하는 것으로 만족하게 된 것이다. 삼위일체 교리,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강조되지만 정작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은 주님으로서 교회 안에 설 자리가 없게 되었다. 그리스도가 이루시고 성령이 매개하는 구원을 교회가 현실화하고 있고 매개하기 때문이다.
(4) 성경 말씀은 교회의 갱신을 위하여 자원과 힘을 제공하는 샘이다.
물론 동방정교회에서도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었음을 인정한다. 특히 복음서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교회와 교회의 전통에 대한 강조, 고대 교회가 제정한 신조들에 대한 경외심은 성경의 생명력을 경험하는데 장애가 되었다. 인간의 신화를 위한 신-인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론적 가치에 대한 관심 때문에 성육신과 부활에 대해서는 잘 알았지만, 복음을 전하시고, 치유하시고, 봉사하시고, 전통에 대하여 과감하게 비판하시는 역사적 예수의 행태에 대해서는 깊이 주목하지 않았다. 부활하고 승천하신 그리스도는 바로 역사 가운데서 치유와 해방의 사역을 감당하신 예수임을 통찰하지 못했다. 전통과 교회의 보존에 관심을 기울이다 보니 현실에 깃들어 있는 갖가지 문제점을 볼 수 없었다. 성경을 고대 교부들과 교회가 보존해온 가르침에 사로잡혀서 성경을 읽다보니 현대 사회가 제기하는 문제, 교회의 문제점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심판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리고 성경에서 선교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한 자원과 힘을 얻을 수도 없었다. 결국 전통과 교회에 대한 과도한 관심과 잘못된 강조가 살아 계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활력을 감퇴시켰으며, 교회와 신학의 갱신을 위한 성경의 능력을 경험할 수 없게 하였다. 그 결과 교회와 신학은 복고적이 되고 선교는 교회 중심의 구심적인 성격을 못 벗어나게 되었다.
맺는 말
오랜 세월 동안 동방정교회는 서방교회와는 다른 환경 속에서 살아왔으며 서로간에 접촉도 많지 않았다. 그러나 동방정교회는 서방교회가 잊거나 소홀히 해온 관점과 내용을 잘 보존하고 있다. 우리는 이 글에서 특히 동방정교회의 구원론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정리해보았다. 그리고 구원관과 관련하여 그들의 선교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다. 우리가 그 사상에서 배울 것은 무엇이고 깨달아야 할 점은 무엇인지 살펴보았다.
동방정교회의 구원론은 인간의 미래성에 대한 통찰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인간은 이미 되어 있는 존재가 아니라 미래에서 성취될 것으로 기대되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런데 동방정교회는 이러한 인간의 미래 개방성을 삼위일체 하나님의 기대 및 활동과 관련시킴으로 구원에서 기대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설명한다. 우리는 또한 삼위일체론적 전망에서 구원을 신화(神化)로 이해한 동방정교회의 구원론에 주목하였다. 개신교를 비롯하여 서방교회가 주로 구원을 죄에 빠진 인간에게서 출발한다면 동방정교회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본성에서부터 인간의 구원 문제를 생각한다. 구원은 인간이 창조될 당시에 하나님이 기대했던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과 사귐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런데 동방정교회는 신화라고 하는 구원의 목표뿐 아니라 신화를 요청하는 구원의 가능성도 인간의 조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 자체에 그 근거가 있다고 본다. 즉 타자를 허용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 방식 자체가 인간의 신화를 허용할 뿐 아니라 장려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삼위일체 하나님의 본성 자체에서 구원의 목표와 근거를 발견하는 동방정교회는 신화에 이르는 과정 전체를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의 계획과 매개와 활동으로 해석한다. 물론 이러한 설명이 서방교회에는 전혀 발견할 수 없는 생소한 내용은 아닐지라도 서방교회가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던 측면인 것만은 사실이다.
그런데 이미 살펴보았듯이 구원에 대한 동방정교회의 훌륭한 통찰이 교회의 목회 현실과 선교를 통하여 역동적인 모습으로 나타날 수 없었다는 것은 매우 아쉬운 점이다. 동방정교회는 선교를 본질적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라고 본다는 점에서 이른바 ‘하나님의 선교’ 이론이 등장하기 이전에 이미 그러한 통찰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동방정교회에는 하나님의 선교신학에서 발견하는 교회의 사회에 대한 책임이 결여되어 있다. 동방정교회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사랑의 사귐 가운데 초대하기 위하여 구원의 복음을 불신자들에게 전파하는데 그렇게 열심을 보이지 않았다. 구원관이 거기에 걸 맞는 선교관으로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그 이유를 우리는 동방정교회가 처해 있었던 교회 내외적인 상황과 관련해서 찾아보았다.
우리는 내용을 전개하는 가운데 구원관과 선교관의 관계는 그렇게 단순하게 연결될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구원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도 중요하지만 그 교회가 처한 상황과 역사적 경험, 그리고 실제로 구원이 교회를 통해서 어떻게 매개되고 전달되느냐 하는 문제가 선교관을 형성하는데 큰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역사적으로 피할 수 없었던 동방정교회의 정치 문화적인 상황, 그리고 성례전을 중심으로 구원을 실재화 하고 매개한다고 생각하는 동방정교회의 교회 중심의 사고는 선교를 내향적으로 이해하게 만들었다.
동방정교회와 비슷한 성향을 갖고 있었던 로마 가톨릭 교회는 갖가지 사회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경험하였다. 그리고 종교개혁의 충격에 이은 개신교와의 끊임없는 충돌과 대화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내적인 성숙과 외적인 성장에 도움이 되었다. 아쉽게도 동방정교회는 그러한 외부의 도전에 별로 노출되지 않은채 자신의 문제에만 몰입하였고 점점 더 복고적이고 내향적인 자세를 강화하게 되었다. 그러나 앞으로는 동방정교회도 다른 전통을 지닌 교회들과 활발히 만남으로 자신의 성장은 물론 세계 교회의 갱신과 성숙에 기여하게 되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개신교 역시 동방정교회와의 활발한 만남과 대화를 통해서 거듭 개혁하는 교회로 발전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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