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학

[스크랩] 종교간의 대화: 성숙인가 변질인가 (이우윤)

수호천사1 2009. 11. 27. 11:49

종교간의 대화: 성숙인가 변질인가

이우윤 교수           

I. 들어 가는 말: 
 
  한국은 다종교 사회다. 다종교 사회란 한 사회 안에 둘 이상의 종교가 동시에 존재하는 경우를 말한다. 다만 그러한 조건이 충족되더라도, 어느 하나의 종교가 압도적으로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써, 여타의 종교는 있으나마나한 경우라면 다종교 사회로 보기 어렵다.

 
  그러므로 엄밀한 의미에서 다종교 사회의 충분 조건은 한 사회 안에 둘 이상의 종교가 각각 분명한 사회적 영향력을 가지고 동시에 존재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 사회는 지구촌에서 가장 전형적인 종교 다원 사회라고 알려져 있다. 


  1980년대만 하더라도 세계 사람들에게 한국에서의 종교 간 대화와 협력은 매우 비관적이고 한국은 불안스러운 종교적 갈등 사회로 인식되었다. 타 종교에 대한 태도조사에서 한국 교회 목회자 65.5%, 평신도 54.5%가 다른 종교는 배척 혹은 경쟁 대상으로 여기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그러나 90년대 이후, 특히 21세기 들어 한국 사회는 종교 간 대화 ․ 협력이 가장 역동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놀랄 만한 나라로 세계인의 칭찬과 주목을 받고 있다.


  이라한 '종교 간 대화'는 '차이의 수용'을 내세우는 다원주의 시대에 아주 걸맞기 때문에 이 시대의 또렷한 징후가 되어 가고 있다. 그동안 한국 교회 내에서 많은 갈등의 씨를 안고 있었던 종교 간의 문제가 시대의 흐름을 타고 종교 간의 대화로 넘어 오고 있는 것이다.


  과연 종교 간의 대화는 종교 간의 갈등을 극복한 성숙의 표지인지, 아니면 시대의 물결에 젖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다원주의에 적응되고 있는 것인지 물어 보아야 한다.  여기서 종교 간의 대화라고 하는 것은 우리나라 종교인의 90%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개신교와 불교 그리고 천주교 간의 대화를 주로 말한다. 세 종교 상호간의 최근 일고 있는 상호간의 교류 현상을 분석함으로써 종교 간의 대화와 교류가 주고 있는 시대적 의미가 무엇이며,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바람직한 “종교 간 대화”의 태도는 무엇인지 생각해 보고자 한다.   
 
II. 종교간의 연대모임과 교류 현황

  현재 한국에서 공식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종교 간 연대 모임은 한국종교지도자협의회, 한국종교인평화회의, 온겨레 손잡기 운동본부, 한국종교연합선도기구 등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공식적인 모임이외에 개신교와 천주교, 혹은 개신교와 불교 그리고 천주교와 불교 사이에 다양한 비공식적인 모임이 이루어 지고 있다.


  부산외대 아시아지역연구소와 '교토대 21세기 COE 프로젝트'의 공동 주최로 지난 3월22일 '동아시아에 있어서 종교 간 대화의 의의-한․일 기독교의 역할'을 주제로 열린 국제심포지엄도 그러한 예이다. 

  최성규 목사(한국기독교총연합회 대표회장 ․ 한기총)는 지난 4월8일 산불로 인해 불에 탄 낙산사의 정념 주지 스님을 만나 위로하기 위해서 낙산사를 전격 방문했다.  최 목사는 10여 분간 화재 현장을 둘러보며 안타까운 마음을 담아 정념 주지 스님에게 위로의 말을 전했고, 정념 스님 역시 고마움의 뜻을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동안 한국 교회의 보수적인 입장을 줄곧 견지해온 한기총 수장이 사찰을 방문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더욱이 한국의 대표적 목회자 중의 한 분인 조용기 목사는 2004년 5월12일 동국대 불교대학원 특강에서 '모든 종교는 평등하다'고 발언해 참가한 사람들의 열렬한 박수를 받았다. 그러나 기독교계에서는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서울 강북구 수유 지역 종교인 1천여 명이 해마다 가을이면 이웃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한신대 운동장에 모인다. 송암교회(목사 박승화) 수유1동성당(주임신부 이종남) 화계사(주지 성광)는 2000년부터 '난치병 어린이 돕기 종교연합 사랑의 바자회'(종교연합 바자회)를 개최하고 있다.


  또한 화계사 가까이 위치한 한신대 신학전문대학원 운동장에서는 청명한 가을날, 같은 지역의 조계종 화계사, 개신교 송암교회, 그리고 수유5동 천주교회 신도들이 장애아동 치료를 돕는 사랑의 바자를 몇 년째 계속한다. 최근 대구.부산.광주.전주.인천.원주 등 지역마다 종교 간 대화와 협력 운동이 활발해지고 있다.


  천주교 원불교 개신교 불교 천도교 등 부산의 5대 종교 젊은 성직자들이 개설한 '열린 종교 시민대학'은 '종교의 열린 마음'을 강조하는 자리다. "다원화되어 가는 시대를 맞아 폭넓게 종교를 이해하고 평화로운 세상을 이끌기 위해 열린 종교 시민대학을 마련했다"는 것이 '열린 종교 시민대학'을 개설한 젊은 성직자들의 뜻이다.

III. 종교간 대화에서의 사회적 주제사항과 영향력

 최근에 다양하게 이루어 지고 있는 이러한 종교 간의 대화의 여러 움직임은 대사회적으로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던지고 있으며 그 메시지는 다음과 같은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   


  첫째, 현대의 풍조는 인간의 참된 가치들, 그 가운데에서도 특별히 인간의 영적인 가치가 물질주의, 소비주의, 쾌락주의 등으로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다. 또한 세계의 평화와 정의 그리고 창조계의 질서 등이 그 어느 때보다도 크게 위협받고 있는 이 시기에 종교간의 대화는 매우 의미있는 사회적 주제로 인식되어 질 수 잇다. 


  둘째, 한편으로 서로 다른 종교를 가진 이웃 혹은 인종끼리의 대립이 아니라  삶의 대화를 통해 열린 정신과 선한 마음으로 서로의 기쁨과 슬픔, 문제와 걱정거리를 함께 나누며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21세기의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 인식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또한 사회 정의와 인간의 자유와 발전을 위한 종교인들의 노력은 두말할 필요 없이 대단히 중요하다. 인간의 존엄성과 권리를 위해 투쟁하고 불의에 맞서며 평화를 위해 헌신하는 것은 모든 종교인의 의무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문제를 종교 간의 대화를 통해 해결해 나간다는 것은 종교인으로서의 사회적 의무일 수 있다.

IV. 종교 간 대화의 사회적 배경: 분석과 평가

  이러한 요즈음의 종교간의 대화를 분석하고 평가하기 위해서는 종교간 대화의 구도를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필요가 있다.


  우선 다원적(plural) 혹은 다원성(plurality)이라는 개념은 단지 사회적으로 다양한 가치가 존재하고 있음을 말하는 가치중립적 표현이지만, 다원주의(pluralism)는 다원성 자체를 하나의 원리로 삼아야 한다는 가치 판단의 입장이기 때문에 구별해야 한다.


  다원주의 논의에서 대표적으로 나타나는 입장은 다음과 같이 세 가지 정도로 볼 수 있다.  즉 배타주의(Exclusivism), 포괄주의(Inclusivism), 다원주의(Pluralism)가 그것인데, 다원주의 논의가 활발해지면서 다원주의 내에도 다양한 분화가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종교간 공통 기반을 중심으로 놓는 다원주의와 종교간 차이를 중심에 놓는 다원주의로 나누어볼 수 있다고 한다.

1) 배타주의

  배타주의는 기독교에서 가장 광범위한 입장으로 보이는데, 이를 현대에 가장 대표적으로 주장한 신학자로 칼 바르트(Karl Barth)를 들 수 있다. 기독교는 하나님 계시에 근거한 신앙인데 그 계시가 육신을 입은 하나님의 말씀 즉 예수 그리스도에게 유일하게, 결정적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계시를 인정하는 기독교만이 참된 종교이며, 이를 인정하지 않거나 거부한다는 측면에서 다른 종교는 거짓 종교에 불과하다.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는 근본적으로 공통 기반이 없다. 그 사이에는 질적인 차이가 존재할 따름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와 다른 종교와의 만남은 개개인의 개종을 목적으로 한다는 것이 배타주의의 기본적 태도라고 볼 수 있다.


  이 입장은 전통적으로 대다수 기독교인의 신앙 태도를 대변하는 입장으로 간주된다. 우상 숭배에 대한 십계명의 금지 사항이 대표적으로 이 입장을 지지해주는 성경적 근거가 된다.


  그러나 신약에서 예수께서 유대인에게는 우상숭배자로 정죄되던 사마리아인을 환대했거나 초대교회 사도들이 이방인을 적극 만난 사례는 그들이 우상 숭배를 금하면서도 이방인에게 무조건적으로 적대적이지는 않았음을 잘 보여준다. 즉, 신학적으로 배타주의 입장이라고 해서 곧 다른 종교에 대해 호전적이거나 적대적인 반응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간혹 불상이나 단군상 훼손 사건 등이 생길 때 그런 사고방식의 근거로 우상 숭배에 대한 정당한 심판 행위라는 논리를 끌어들이기는 하나, 이를 배타주의 입장을 가진 사람들의 획일적 태도로 보기는 어렵다.

2) 포괄주의

 포괄주의는 가톨릭의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이끌었던 신학자 칼 라너(Karl Rahner)의 견해로 대표된다. 이 입장은 기독교와 다른 종교 사이에는 일정한 공통 기반이 존재한다고 전제한다. 즉 '하나님의 보편적 구원 의지'나 '인간 신비에 대한 추구' 등은 종교가 보편적으로 갖고 있는 근거라고 보는 것이다. 종교란 동일한 뿌리에서 비롯되는 서로 다른 가지들이다.


  그러므로 종교간 차이란 질적 차이가 아니라 '정도(degree)의 차이'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현존하는 종교전통 가운데 계시를 가장 분명하게 가시화하고 개념화하고 있는 '절대적 종교'이다. 전 인류의 계시와 구원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궁극적이고 완전한 성취에 도달했다.


  즉 다른 종교와의 만남은 종교전통 자체를 '익명의 신앙'에서 '명시적 신앙'으로 끌어올리는 데서 의미를 찾을 수 있으며, 각 종교는 '익명의 기독교'로서 존중받을 필요가 있다고 본다.


  라너가 제안해 유명해진 '익명의 그리스도인(anonymous Christian)' 개념은 비록 다른 종교에 몸을 담고 있으나 진리에 부합하거나 근접한 삶을 살고 있는 이들을 말한다. 이 입장은 다른 종교와의 대화에 유연하고, 종교 자체가 갖고 있는 잠재력과 가능성을 인정하는데 인색하지 않다.


  그러나 이 입장은 종교학자들 간에서는 여전히 기독교 중심적 패러다임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여전히 기독교가 궁극적인 진리를 갖고 있고 다른 종교 전통은 진리를 비기독교적 방식으로 불완전하게 포함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종교간 대화를 강조하거나, 다른 종교가 어느 정도 진리를 내포하고 있다고 말하는 신학자들도 자세히 따져보면 다원주의 입장보다는 포괄주의 입장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 또한 배타주의 논리에 전적으로 동의하기 힘들다고 느끼는 경우에도 포괄주의적 입장을 대안으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3) 다원주의

  다원주의는 여러 종교 전통들을 공평하게 대화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관심이 강하다. 또한 통칭 다원주의라고 해도 하나의 균일한 입장이 아니라 상당히 세분화되고 있다. 즉 '공통 기반에 중점을 두는 입장'에는 신중심주의나 구원중심주의 입장 등으로 더 세분화해서 볼 수 있다. '차이에 기반을 두는 입장'은 그리스도 중심주의, 문화․언어 중심주의 등을 들 수 있다.


 공통 기반에 중점을 두는 입장은, 단순화하면, 종교는 '하나의 산을 오르는 여러 갈래 길'이라고 볼 수 있다. 그 공통 분모가 각 종교에서 서로 다르게 드러났지만 결국 신을 중심으로 한다고 볼 때 신중심주의가 되고, 구원이나 해방 기능을 중심으로 보면 구원중심주의라고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여러 종교는 공통의 진리를 찾아 나선 동반자이고, 서로 배울 것이 있는 상대가 된다.


 종교간 대화는 그러므로 상호 보완이나 상호 성숙에 목적이 있다. 어느 종교가 더 낫고 못하다는 평가를 한쪽 입장에서 가하는 것은 무지하거나 무례한 것이 된다. 다양한 종교를 동등한 연구 대상으로 삼는 종교학자들이 대체로 많이 취하는 입장이다,


  차이에 기반을 두는 입장은, 요약하면, 각 종교 전통은 '여러 길을 따라 오르는 여러 산들'이라는 입장이다. 여기서는 각 종교 전통이 동일한 대상과 목표를 추구하고 있을 것이라는 전제를 갖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그럴 수는 있으나, 각 종교는 나름의 진리를 추구하고 있고 그 자체를 존중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 입장은 우선 한 종교의 진리를 전체를 포괄하는 절대적인 것으로 전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진리의 절대성이나 보편성을 포기한 것처럼 보이기는 하나, 포스트모던 시대에는 단지 보편성과 절대성이 주장만으로 영향력을 발휘할 수는 없다는 점에서 현실적인 선택인 셈이다.


  오히려 그리스도중심주의적 입장에서 이 주장을 펴는 학자들은 포스트모던 상황에서 기독교 신앙의 독특성을 약화시킬 필요가 없다는 점과 현실적으로 종교의 자유시장적 상황에 처해 있는 오늘날에 다른 종교를 자극하지도 않고 종교 상대주의로 퇴행하지도 않으면서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정체성이 분명한 입장이 될 수 있다는 평가를 내리기도 한다.


  종교간 대화 내용과 가능성을 검토함으로써 우리는 자기 입장이 대체로 어느 지점에 서 있는지를 파악할 수 있다. 물론 현실은 이렇게 깔끔하게 정돈되지 않는다. 명절 때 제사에 참여할 것이냐 말 것이냐의 문제만 해도 훨씬 복잡한 개별적 상황(가족간의 역할 관계, 친인척간의 교제, 신앙적 문제 등)을 바탕에 깔고 있어서 일률적인 진단이 나오기는 힘들다.


  석가탄신일을 맞아 불교와 기독교의 관계를 한 번 더 생각해보는 것은 기독교계가 일률적인 행동 양태를 내보이기를 기대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각자 다양한 선택을 하더라도 서로의 판단과 결정에 좀더 포용적인 이해와 여유를 보일 수 있기 바라는 기대가 더 크다. 배타주의자나 포괄주의자나 다원주의자나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가 존재 가치를 잘 견지하면서도 사회적으로 화해와 포용력을 넉넉히 발휘해주기를 기대하는 데에는 적지 않은 공통 분모가 있다고 본다.

V. 평가와 성경적 대안

1. 평가

  카톨릭은 1988년 “종교간 대화평의회”를 통해 공식적으로 다른 종교와의 대화 창구를 개설하였다. 서로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 사이의 만남이야 인류 역사 이래 부단히 있어온 사회적 현실이었지만, 한 종교가 다른 여러 종교와의 관계를 증진하고자 공식적인 창구를 개설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역사학자 토인비(A. J. Toynbee)는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사건 가운데 하나로 종교 간의 이러한 만남, 특히 그리스도교와 동양 종교와의 만남을 꼽았다.


  이러한 종교간의  만남의 시기는 인간의 참된 가치들, 그 가운데에서도 특별히 인간의 영적인 가치가 물질주의, 소비주의, 쾌락주의 등으로 심각한 위기에 처해진 때와도 일치한다. 또한 이 만남은 세계의 평화와 정의 그리고 창조계의 질서 등이 그 어느 때보다도 크게 위협받아 온 시기에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종교들의 만남은 종교인들에게 이러한 시대적 도전에 함께 대처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종교 간 대화는 실제로 다음과 같은 네가지 양식으로 나누어 질 수 있다.

1) 삶의 대화

  삶의 대화를 통해 서로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열린 정신과 선한 마음으로 서로의 기쁨과 슬픔, 문제와 걱정거리를 함께 나누며 이 세상을 살아간다. 이 삶의 대화는 가정, 이웃, 지역사회 안에서 다양한 상황을 통해 전개된다. 일상적인 접촉, 서로를 앎, 개방과 우정 등은 이 대화의 전제 조건이다. 삶의 대화를 통해 서로에 대한 선입견이 극복되고, 긴장이 완화되며, 폐쇄적인 사고방식이 교정된다.


  인종적, 문화적, 종교적 소수자가 같은 사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는 것도 이 삶의 대화를 통해서이다. 그러므로 삶의 대화는 언제나 가장 중요한 종교 간 대화의 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들의 일상생활을 통해 이 삶의 대화를 하도록 불림을 받는다. 특별히 다양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요인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이동이 점점 보편화되고 가속화되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이 소명은 날이 갈수록 중요성을 더해간다고 할 수 있겠다.

2) 행동의 대화

  행동의 대화는 그리스도인들과 다른 종교인들 사이에 무한한 협력의 장을 열어준다. 이제 인간 삶의 사회적 영역 안에서 종교인들이 서로 협력하는 일은 각 종교 자체의 쇄신을 위해서나 인류 사회에 대한 진정한 봉사를 위해서나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 대화의 양식이 되었다. 이런 협력을 통해 각 종교는 현대사회에서 스스로의 진실성과 신빙성을 드러낼 수 있고, 나아가서 사람들에게 종교적 영적 가치를 전파할 수 있다.


  사회 정의와 인간의 자유와 발전을 위한 종교인들의 투신은 두말할 필요 없이 대단히 중요하다. 인간의 존엄성과 권리를 위해 투쟁하고 불의에 맞서며 평화를 위해 헌신하는 것은 모든 종교인의 의무인 것이다. 서로 다른 종교를 믿는 이들에게는 다양한 사회적 영역에서의 협력을 통해 서로에 대한 기존의 편견과 장벽을 허무는 상호 신뢰와 우정이 자라난다. 이런 상호 신뢰와 우정은 한 걸음 더 발전한 종교 간 대화의 길을 열어주기도 한다.

3) 신학적 교환의 대화

  전문가들의 대화라고도 불리는 이 신학적 교환의 대화는 각 종교의 전문가들이 서로의 종교적 유산과 영적인 가치들을 좀 더 깊이 이해하고자 하는 탐구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종교인들과 그저 피상적이 아닌 참되고 실속 있는 대화를 하고자 한다면 상대편 종교에 대해 객관적이고 적절한 이해를 하려는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모든 것을 다 상대적인 것으로 돌리는 손쉬운 상대주의(relativism)나 종교 간의 유사점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단순한 화합주의(irenicism)는 당연히 경계해야 한다. 오히려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뚜렷한 차이에 대해 더 큰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러한 차이에 대한 이해가 서로의 정체성과 특이성에 대한 이해를 더욱 명확하게 해주며, 이로써 또한 서로의 종교적 삶을 더욱 참되게 살도록 도와준다.

4) 종교적 체험의 대화

  종교적 체험의 대화는 좀 더 깊은 종교 간 대화의 양식으로 그리스도인들과 다른 종교인들이 서로의 종교적 체험을 나누는 것을 말한다. 이 대화를 통해 그리스도인들과 다른 종교인들은 서로의 종교적 전통에 뿌리를 둔 영적 자산들, 예컨대 기도와 묵상, 신앙과 절대자를 찾는 길 등에 대해 서로의 체험을 얘기하는 것이다. 이 대화는 수도생활의 오랜 전통을 가진 종교, 특별히 가톨릭 교회와 불교가 활발히 전개해 왔다. 가톨릭과 불교의 수도자들 사이의 만남은 이러한 양식의 종교 간 대화를 위한 비옥한 토양을 제공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수도자 간 대화의 특징은 그것이 밖으로 표현되는 언어적 대화가 아니라 침묵과 기도, 공동생활의 나눔 등을 통한 깊은 영적 만남이라는 데 있다.


  이러한 종교적 체험의 대화가 단지 관상 수도자들에게만 제한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 대화는 사제들이나 활동 수도자들 그리고 평신도들에게도 물론 열려있다. 여러 나라에서 특별히 구미 각국에서는 이러한 대화를 지향하며 세미나, 강의, 피정 모임 등을 실시하고 있다.

 2. 성경적 대안
 
  작금에 있어서 개신교의 대 사회적 이미지가 추락한 보다 근원적인 이유는 한국 개신교도들이 처음 복음에 접하여  감격해 하던 처음 순수 신앙이 변질되었기 때문이라고 보여 진다. 즉 주님께서 말씀하신 가장 근본되는 것 곧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계명을 어기고,  제2차적인 것을 더 관심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순수 신앙에 변질이 온 것이다.


  "마음과 뜻과 성품을 다하여 주 하나님만을 사랑하라" 하셨는데, 하나님 대신 기독교라는 역사적 종교와 교파 그리고 교회와 교리를 그리고 신학을 더 사랑하는 죄를 범하고 있다. "네 이웃을 네 몸 처럼 사랑하라" 했는데, 이웃대신 같은 기독교 교인만을, 내 취향과 같은 사람만을 골라서 사랑하는 죄를 범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한국 개신교도들의 마음은 유연성, 포용성, 관용성, 긍휼성을 잃어버리고, 경직성, 배타성, 공격성이 많아 졌다.


  세상 사람들이 개신교 교인들의 모습에서  인애가 넘치며 정의로움을 추구하는 성실함과 숭고함을 느끼기 보다는  교조적 열광주의와 남을 심판하고 판단하려는 공격적 자세를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놀랍게도 신앙적으로 같은 뿌리인 한국 천주교인들을 향해서 묻는 앙케트 조사결과를 보면, 한국 천주교인들이 한국 개신교도에게 갖는 호감의 정도는 한국 불교인들에게서 받는 호감의 정도보다 못하게 나타났다. 이 점에 있어서, 한국의 신학자들과  목회 길에 들어서 사역하는 모든 교역자들이 한번 진지하게 자기를 성찰해야 한다.
 
VI. 결 론

 이와 같은 여러 가지를 고찰하면서 종교 간 대화에 있어서의 그 의의와 함께 다음과 같은 점들이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첫째, 종교 간 대화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종교 간 대화 당사자들의 뚜렷한 종교적 정체성이라는 것이다. 종교적 정체성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은 사람에게 종교 간 대화는 오히려 불필요한 혼란만을 가중시킬 수 있다.


  예컨대, 다른 종교에 대해 열린 마음으로 대화하는 일이 어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절대 진리에 대한 배반이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나약함의 표출로 여겨진다. 또한 어떤 사람들에게는 기존의 종교의 틀을 뛰어넘어 더 많은 사람이 동의할 수 있는 새로운 종교를 형성해 나가는 과정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종교 간 대화에 대한 이런 양극단의 오해는 그리스도교인들만이 아니라 다른 종교인들도 함께 극복해야 할 기본적인 과제이다. 참된 “종교 간 대화”는 각기 자기 신앙에 충실한 사람들이 상호 존중과 개방의 정신으로 만나 서로를 더 잘 이해하고 그럼으로써 서로가 더욱 풍요로워지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이러한 대화의 열매가 바로 자신의 종교적 삶에 더욱 헌신하는 것이요, 이를 바탕으로 보편적인 인류의 공동선에 더 이바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종교 간 대화의 기본적인 전제 조건은 대화 당사자들의 종교적 정체성이다. 올바로 수행된 종교 간 대화는 그 당사자들의 종교적 정체성을 결코 약화시키지 않고 오히려 강화시킨다. 그런데 기독교가 특별히 불교 혹은 힌두교와 개방적인 만남을 갖는 것은 이 종교적 정체성과 관련해 중요한 도전 거리를 교회에 제공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신(神) 중심적 종교인 기독교와는 일종의 신비주의적 종교에 속하는 불교나 힌두교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이야기하기보다는 침묵과 명상을 통한 자기실현을 강조하며, 교리적 가르침보다는 영적 깨달음의 체험을 더욱 중요시한다. 이러한 종교적 지향은 특별히 오늘날 다양한 문화적 요인 때문에 현대인 특히 감수성이 예민한 젊은이들에게 대단히 큰 매력을 주는 것이 사실이다.

  그 결과 오늘날 동서양 할 것 없이 많은 그리스도인들, 특히 더욱 깊은 영적 체험과 영성생활을 원하는 사람들이 이 두 종교에 커다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따라서 이들 종교가 가르치는 기도의 방법과 기교, 예컨대 선이나 요가 등을 배우고자 하는 열망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그리스도인들의 특징은 이들이 불교나 힌두교의 가르침을 흔쾌히 받아들이면서도 기독교 신앙 또한 포기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것은 그들이 일종의 종교적 이중 소속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적지 않은 기독교 신자들이 주일에는 예배에 참석하고 주중에는 선이나 요가 센터를 찾아 개인적인 수련을 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불교(또는 힌두교)적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이중 소속은 분명히 교회로서는 결코 외면할 수 없는 중요한 도전이다.


  적지 않은 교역자와 평신도들이 한편으로는 그들의 기도와 영성생활에 동양 종교의 기도 방법을 적용하면서 나름대로 풍요로움을 얻고 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들의 그리스도교 신앙과의 올바른 관계를 정립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더구나 종국에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포기해 버리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동양 종교와의 만남이 제공하는 이러한 도전에 응답하는 것은 앞으로 교회가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중요한 과제일 것이다.

셋째, 종교 간 대화, 특별히 우리 기독교가 같은 뿌리를 가진 천주교를 제외한 다른 종교 간의 대화에 있어서 기독교 교리와 신앙에 가져다 주는 열매는 무엇일까 하는 질문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 질문의 한가지 적용은 바로 기독교 신앙의 핵심인 삼위일체(Trinity) 교리의 해석에 서 찾아 볼 수 있다. 삼위일체 교리는 다른 종교에는 찾아 볼 수 없는 기독교 만의 독특한 신관을 제시한다고 할 수 있다. 즉 내재하시는 신, 역사 속에 찾아 오신 신, 초월적 존재로서의  신으로서의 하나님을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내재적 혹은 초월적 존재로서의 神觀만을 가지고 있는 다른 종교에게 성경이 계시하고 있는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소개하고 드러냄으로 간접적으로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넷째, 종교 간 대화가 궁극적으로 지향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해야 한다. 종교 간 대화란 교회일치 운동과 달리 결코 종교의 통일을 그 궁극적인 목표로 삼지 않는다. 즉 개인의 신앙적 정체성을 분명히 하는 가운데 서로간의 대화를 통해 풍성한 신앙적인 열매를 맺어 가는 것, 그리고 물질주의적 세계관 속에 정신적 혹은 영적 가치의 존귀함을 일깨우는 것, 아울러 대사회적으로 사회정의와 인권을 위해 함께 노력해 나가는 것이 종교 간 대화의 중요한 목표라는 것이다. 그런 과정 중에서 우리 만의 진리를 분명하게 드러내는 지혜가 더욱 필요하다.

출처 : 내 사랑 중국 ♡ MyLove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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