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학

[스크랩] 기독교 강요에 나타난 요한 칼빈의 선교사상 (최정만)

수호천사1 2009. 11. 14. 17:14

기독교 강요에 나타난 요한 칼빈의 선교사상

 

최 정만 교수(광신대학교 세계선교연구소 소장)

 

 

Ⅰ. 서론

 

요한 칼빈의 신학사상이나, 그가 교회와 인류의 역사에 미친 영향에 대한 연구는 많아도 선교에 대한 그의 관심이나 칼빈의 선교사상에 관한 연구는 매우 미약한 것이 사실이다. 선교의 과업수행이 교회의 본질적 생명력에 속한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어떻게 참된 교회를 지향하는 종교개혁운동에서 선교에 무관심할 수가 있었겠는가? 종교개혁은 부패하고 거짓된 죽은 교회를 바르고 참된 교회, 곧 생명력이 살아있는 교회를 만들고자하는 운동이었고 따라서 종교개혁자의 신학사상 가운데 선교사상이 결여될 수가 없다는 것이 필자의 지론이다. 그렇다면 칼빈에게 과연 선교사상이 있었는가?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본고를 출발하였으나, 이 주제에 참고가 될만한 자료가 국내에서는 절대적으로 빈곤하였다. 필요한 자료를 구하기 위해서 미국 Fuller신학교 도서관과, Grand Rapids에 있는 칼빈대학교 도서관과 칼빈 연구소인 Henry Meeter Center의 전적인 도움과 또한 칼빈 연구의 세계적 석학으로 알려진 John Hesselink박사와의 만남과 사귐이 이 연구에 도움이 되었음을 밝히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다.

 

이 논문을 쓰면서 필자가 느낀 점은 한국의 교회만큼 칼빈주의 영향을 많이 받은 교회도 없다는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교회만큼 칼빈주의적이지 못한 설교, 칼빈주의적이지 못한 교회정치, 칼빈주의적이지 못한 대사회 문화관, 칼빈주의적이지 못한 그리스도인들 삶을 생각해 볼 때, 한국교회에 진정한 칼빈주의의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칼빈의 사상에 대한 여러 각도에 있어서의 깊이 있는 연구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확신을 갖게되었다.

 

지금까지 한국교회와 신학계에서는 선교분야와 관련해서, 칼빈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가 없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오해의 요소도 많았다. 마치 칼빈은 선교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고, 예정론이라는 배타적이고도 독선적인 교리를 만들어 내서, 선교에 방해꾼 노릇이나 한 사람으로 오해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심지어는 칼빈주의자라고 자처하는 분들과 칼빈에 대해서 매우 존경을 표하는 연구가들 가운데도, 칼빈에게는 선교의식이 없다거나 선교에 대하여 소극적인 자세를 가진 차가운 이성의 신학자 내지는 근엄한 제네바의 목회자로만 알고 있는 자들도 많다. 이렇게 상식적인 수준에서 지금까지 알려진 바와 같이 칼빈은 과연 선교사상이 결여된 자로서 그가 주장한 예정론은 선교 저해적 교리체계라고 하는 편이 옳은가? 라는 문제의식에서 본 연구의 모티브가 시작되는 것이다.

 

본 연구논문은 본래는 『칼빈의 선교사상』이라는 제목으로 그의 설교와 주석에 나타난 선교사상과 기독교강요에 나타난 선교사상을 모두 고찰함과 동시에 이러한 선교사상이 나올 수밖에 없는 그의 생애를 추가해서 단행본으로 출판했음을 밝혀둔다.

 

Ⅱ. 칼빈의 예정의 교리는 과연 선교에 저해적 요인인가?

 

칼빈의 예정론 사상이 선교에 방해적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보는 자들이 있다. 하나님께서 구원할 자와 유기자를 미리 예정해 놓으셨다면 인간 쪽에서 선교할 필요가 어디 있겠느냐는 논리이다. 미국 개신교 해외선교사 파송 175주년을 기념하는 신문특집에서 미국에 있는 어떤 목사님이 쓰신 글의 일부를 여기 잠깐 인용하고자 한다.

 

“1812년은 미국의 개신교 기독교회가 해외에 처음으로 선교사를 파견한 역사적인 해입니다. 이전까지는 미국의 어느 교회도 해외에 선교사를 파송하여 복음을 전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미국의 모든 교회는 칼빈의 예정론의 영향으로, 인간의 모든 운명이 하나님에 의해서 이미 모두 예정되어 있으므로 선교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사역이 아니라고 하고 따라서 해외에 복음을 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추론적인 것이고, 칼빈의 예정론을 깊이 잘 이해하지 못한데서 오는 오해이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선교는 본질적으로 구원론적 성격을 가지는 것이며 칼빈의 신학은 영혼구원의 열정에 불타는 구원론 중심의 선교신학이요, 땅끝까지 모든 족속(παντα τα εθνη)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에 목표를 둔 하나님 영광 중심의 선교신학인 것이다.

 

정 원태 교수는 그의 저서 「열정 칼빈주의」에서 칼빈주의는 원래 성령의 뜨거움이 그 신학사상 가운데 녹아있다 라고 전제한 다음, 열정 칼빈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존엄과 영광에 압복되어 예배의 사람이 되고, 그 존귀하신 하나님의 뜻을 찾아서 순종하기 위해 기도의 사람이 되고 그 결과 성령의 생활 충만을 받아 성령님의 인도와 주장을 온전히 받게 되며 또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기 위한 성령의 능력 충만을 받으므로 증거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고 말했다. 칼빈주의자가 예정론의 잘못된 교리(?) 때문에 선교를 하지 아니 하는 것이 아니라 칼빈주의자야 말로 성경의 절대권위를 믿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성경에서 명령하신 하나님의 선교 지상 명령에 복종하여 뜨겁게 증거와 선교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라고 정 원태 교수는 주장했다. 그리고 증인이란 Martus는 “순교자”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듯이 칼빈주의자들은 순교적 각오를 가지고 증거의 삶을 살아가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한 종교개혁자들을 비롯하여 칼빈이야 말로 선교에 있어서 진정한 기초공사를 한사람이라고 했다.

 

“칼빈의 시대는(기독교회의 상태가) 외적 성장의 시대라기 보다는 내적 개혁의 시대였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부패가 극에 달해서 그 교회에 대한 개혁없이 선교에 주력했을 경우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을 손상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자들과 칼빈은 전도를 등한히 했다기 보다는 먼저 교회의 내적 개혁에 몰두하고 다음에 전도와 선교에 주력하려고 했기 때문에 그러한 비난(선교의 사상이나 의도가 없다는)을 받은 것뿐이다.”

 

고 주장했다. 그의 짧은 생애지만 한국교회의 강단과 신학교단에서 정통보수 열정 칼빈주의를 뜨겁게 외치다가 먼저 하나님 나라로 가신 한국의 칼빈주의자 고 정원태 교수의 주장을 보더라도 칼빈주의 신학과 신앙에는 뜨거운 선교의 의도와 선교의 열정이 흐르고 있다. 그리고 산 칼빈주의에는 또한 신학과 선교에 조화가 있다.

 

칼빈주의 신학은 사변철학이나 구령의 정열이 없는 차가운 도덕강령(Moral Code)이나 추상적 예정교리가 아니라 하나님 구원의 은혜와 그 놀라운 신비적 사역에 두려워 떠는 것이다.

 

영국 런던의 침례교 평신도 목회자 출신 윌리암케리(William Carey)가 인도선교사로 나가기로 작정하고 준비하는 과정에서 이사야 54:2의 말씀으로 해외선교의 필요성을 역설할 때 당시 Highper Calvinism을 추종하는 예정론 신봉주의자로 구성된 장로교 목사 그룹으로부터 그의 선교열정의 불을 끄는 쓴 충고를 받았다. 이것을 후세 사람들은 마치 예정론이 선교를 반대하는 교리인양 예화때 종종 잘못 사용되어wu 온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칼빈의 기독교 강요Ⅲ권 23장 14절에서 예정론과 전도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우리는 누가 예정의 수효 안에 속하는가 혹은 속하지 않는가를 모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도록 마음을 쓰지 않으면 안된다. 따라서 우리는 만나는 모든 사람이 우리의 평안에 함께 참여하는 자가 되도록 노력하는 일이 필요하다.

 

그러면 칼빈신학의 중심 구조가 과연 무엇이며 칼빈의 예정론의 위치는 어떠하며 칼빈의 예정론과 선교의 관계는 어떠한 것인지 칼빈의 기독교 강요를 중심으로 고찰해 보고자 한다. 칼빈의 신학은 한마디로 말해서 구원론 중심의 신학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에 대한 칼빈주의 조직신학자 한철하 교수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칼빈신학 즉 칼빈의 기독교 종교에 대한 가르침을 어떤 각도에서 보느냐 할 때 “구원론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즉 “구원”이란 것을 중심에 놓고 칼빈의 전 신학사상을 조명해야 된다는 뜻이다.

 

칼빈의 신학이 하나님의 절대주권 중심, 하나님 영광 중심의 신학이라 해서, 하나님에 대해서만 서술되어진 신학체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중심에서 계시지만 칼빈의 관심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타락된 인간을 어떻게 구원하시는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기독교 강요 제Ⅲ권은 구원론 중심으로 전개되는데 Ⅲ권 전체의 흐름이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강조한 내용(Ⅲ권 21장) 결론 부분에 가서 예정론을 취급하고 있다. 칼빈은 인간의 구원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의 소관이지 인간 자유의지의 산물이 아님을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하나님의 뜻대로 지배되는 곳에서 인간의 행위는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려고 택하셨다면 분명히 우리가 그렇게 되리라고 예견하셨기 때문에 택하신 것은 아니다.

 

「개혁주의 예정의 교리(The Reformed Doctrine of Predestination)를 저술한 로레인 뵈트너(Loraine Boettner) 박사는 기독교 강요에 나타난 구원론은 칼빈 자신이 철저히 이해한 성경진리에 의거하여 논리적인 체계를 세운 것으로서 그 내용을 한마디로 말하면 “인간의 궁극적 구원은 인간의 선행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총” 이라는 것이다. 기독교 강요Ⅲ권의 제목을 통상 성령론으로 알고 있는 자 많고 또 이형기 교수가 요약한기독교 강요요약”에도 Ⅲ권을 성령론 이라고 붙였으나 칼빈이 본래 붙인 제목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은혜를 수용하는 방법”(The Way in Which We Receive The Grace of Christ)이라는 사실을 전제로 한다면, 은혜를 수용함에 있어 성령의 역할에 초점을 맞출 때 성령론이 될 것이며 구원에 초점을 맞출 때는 “구원론”이 될 것이며 믿음에 초점을 맞출 때 “믿음론” 내지는 “신앙론”이 될 것이며, 하나님의 미리 계획하시고 예정하신 뜻에 초점을 맞출 때 “예정론”이 될 것이다. 칼빈신학 연구에 있어서 세계적 권위자인 포드 레위스 배틀스(Ford Lewis Battles)의 기독교 강요분석(Analysis of the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of John Calvin)에 의하면 기독교 강요Ⅲ권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A. 인간의 마음속에서의 성령의 사역(The Working of the Spirit in Men's Hearts-Foundation of Book Ⅲ).

B. 믿음(Faith-scholastic fals vs. true notion of faith).

C. 회개(Repentance-true repentance and fals views of repentance).

D. 성도의 삶(The Christian Life).

E. 믿음에 의한 칭의(Justification by Faith).

F. 성도의 자유(Christian Freedom).

G. 기도(Pray-an affirmative interpretation of prayer in general and the Lord's prayer in particular).

H. 예정(Predestination-God's Freedom vs. man's freedom).

I. 최후의 부활(Final Resurrection).

 

등 9 개의 주제로 구성되어 있는 기독교 강요Ⅲ권은 칼빈신학의 구원론적 보고이다. 다시말하면 칼빈신학의 중심 진리는 “하나님의 구원”이요, 이 구원은 하나님(제Ⅰ권 신론)께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제Ⅱ권 기독론)를 대속 물로 희생하여 이루어주시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 중심의 사역으로서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 믿음으로 회개를 통해서 의롭다 칭함을 받고, 죄와 어둠의 권세로부터 자유함을 누리면서 기도를 통하여 주님과 신비적 연합관계 안에서 연결되어 최후의 부활까지 하나님의 뜻 안에서 모든 것이 예정되어 있다는 구원의 서정(Ordo Salutis) 교리가 Ⅲ권의 내용이다.

 

그런데 이 Ⅲ권은 성령의 사역에 의한 구원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칼빈의 영향 하에 있는 대부분의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성령론을 별도로 다루지 아니하고 구원론에 포함시켜 버리는 경향이 있다. 칼빈의 신학은 한 마디로 하나님의 은총의 신학이라 할 수 있는데 이것은 칼빈이 바울과 어거스틴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칼빈에게 은총의 표현은 곧 예정론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은총을 회심사건에서 체험했다. 칼빈은 첫 회심에서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체험하였고 이 은총에 대한 칼빈의 응답은 “경외”로 나타났고 하나님 영광 목적으로 살아가는 삶으로 나타났다. 우리는 칼빈의 정확한 회심 일자는 알 수 없으나 (대략 1529년에서 1532년 사이로 추측) 그의 시편주석(1557) 서문에서 그의 회심사건에 대한 힌트를 찾아볼 수 있다.

 

“나는 교황주의의 미신에 너무나 중독 되어 있기 때문에 이 깊은 늪에서 헤어나기가 힘이 들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갑(․)작(․)스(․)러(․)운(․) 회(․)심(․)(Subita Conversio)에(․) 의(․)하(․)여(․) 나(․)의(․) 마(․)음(․)을(․) 녹(․)여(․) 말씀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게(Docilita) 하셨다.”

 

칼빈은 어느 날 어느 순간 갑자기 자기를 회심시켜 주신 것이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 은총이라고 밖에는 달리 설명할 수 없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이렇게 체험하였다. 그런데 이 예정론이기독교 강요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Ⅲ권 총 9개장에서 제8번째 위치하며 칼빈의 전체 신학중 가장 중심적 사상이 된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다. 기독교 강요초판(1536년)에서는 내용 전체가 6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중에 독립된 예정론 항목이 없고 제2장 교회론 안에 예정론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이 예정 교리는 1537년 “신앙의 훈련”(Instruction in Faith)의 제13장 “선택과 예정”에서 독립된 하나의 교리 체계로 첫 취급을 받았고, “제네바 신앙문답”(Le Catechism de Ĺeglise de Geneve, 1537)에서도 비로소 독립된 항목으로 다루어졌다. 1539년 기독교 강요 2판에서는 전17장중 제8장에서 예정교리를 취급하였고, 1559년 라틴어기독교 강요에서는 예정론을 제Ⅲ권 성령론 속에서 마지막 종말론과 기도 사이에서 취급하고 있다. 칼빈 연구가들은 칼빈신학 체계의 무게 중심(重心)이 예정사상에 솔려 있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전적 타당성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예정사상은 칼빈 사상의 출발점이 아니고 그가 은총을 말할 때, 논리적으로 도달한 귀결점이다.

 

그러므로 예정론은 구조와 형식상으로는 기독교 강요의 일부분이지만 칼빈신학의 전체적 체계상으로 볼 때, 성령론이 그렇듯이, 예정론의 정신이 밑바닥에 깔려서 전체적으로 흐르고 있다. 성경의 근본적 주제와 하나님의 선한 뜻과 그의 자유와 절대주권 사상이 그 안에 포함되어 있으므로 “칼빈신학에서의 예정론의 위치는 부분이 아니라 전체적이라고 하면서, 칼빈신학은 하나님의 절대적 은총을 종합적으로 표현한 예정론 신학”이라고 박 봉랑 교수는 단정한다. 테오도르 베자(Theodore Beza)라든지, 1618년 도르트회의(The Synod of Dort),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등에서도 이 예정론을 신학적인 주제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겨서 그들의 신학체계의 대전제로 삼고 있다.

 

그러나 1564년에 나온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The Heidelberg Catechism)을 비롯하여, 16세기의 신앙고백들인 제1 스위스 신앙고백, 제2 스위스 신앙고백, 스코틀랜드 신앙고백, 39조항 신앙고백은 예정교리를 모든 신학적인 사고의 대전제로 설정하지 아니했다. 그러면 칼빈의 신학이 과연 예정론 신학이라고 할 만큼 칼빈 자신도 그렇게 인정하고, 또한 그의 신학사상의 결정체라 할 수 있는기독교 강요에서도 과연 그렇게 표현되어 있을까?

 

기독교 강요Ⅲ권 총25장 중 제21장부터 24장에 위치한 칼빈의 예정교리는 칼빈의 기독교 강요 초판(1536)에는 보이지 아니하다가 1539년판 총 17장 가운데 제8장에서 예정과 하나님의 섭리(Predestination/Providence)라는 제목으로 처음 등장한다. 그 후 1543-50년에 가서는 총21장으로 늘어난 가운데서 제14장에서 예정론이 위치하다가 1559년 최종 결정판인 라틴어판 에서는 지금까지 일반에 널리 전해져 오는 것과 같이 제Ⅲ권의 마지막 결론 부분에서 다루었지 제Ⅱ권인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에서 예정론을 다루고 있지 아니 한 점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칼빈의 기독교 강요의 시대적 구조의 변화를 보면 칼빈의 신학사상이 어떠한 흐름 속에서 형성되어 확정되었는지를 위의 각주 16에 있는 도표를 보면 쉽게 짐작이 간다.

 

어거스틴의 경우 구원은 인간의 자유의지의 공로가 아니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의 결과라고 주장하는 문맥에서 예정의 교리가 나오는데 그는 이 예정교리를 은총과 자유의지의 문제를 취급하는 반 펠라기우스 작품들(The Anti-Pelagian Writings) 가운데 취급하고 있다.

 

루터의 경우도 Gabriel Biel 등의 자유의지에 의한 구원을 반대하여 오직 은혜와 믿음에 의한 구원을 주장하다가 이 예정교리를 언급하게 된다. 따라서 어거스틴, 루터, 칼빈 모두가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총에 의한 선물(엡 2:8)이라고 하는 바울의 구원론에 입각하여, 인간의 이성이나 자유의지에 의한 공로가 무용지물임을 주장하는데 이 예정의 교리를 등장시키고 있다.

 

어거스틴, 루터, 칼빈의 예정교리의 기원은 물론 바울이다. 바울은 로마서 9장에서 11장까지 이 예정의 교리를 전하고 있다. 그러면 바울신학에서의 예정의 교리의 위치를 로마서의 구조를 통해서 파악할 때 이 교리가 칼빈에게서는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 쉽게 알 수가 있을 것이다.

 

롬 1장 - 3:20, 하나님에 대한 무지와 인간의 죄상

롬 3:21 - 6장, 은혜와 믿음에 의한 구원

롬 7장 - 8장, 성도의 좌절과 갈등을 통한 궁극적 승리

롬 9장 - 11장, 예정교리

롬 12장 - 16장, 성도의 윤리

 

이러한 바울신학의 체계와 칼빈 신학의 체계상 예정론이 차지하는 위치에 있어서 유사점을 찾을 수 있다. 즉 그것은 은혜와 믿음에 의한 구원의 체험(롬 3:21-6장)을 경험한 성도가 다시 한번 좌절과 갈등을 거쳐서 승리의 기쁨(롬 7장-8장)을 가지고 고백하는 구원받은 성도의 신앙 고백적 성격이 바울신학의 구조라면 철학자들의 사유 속에서나 존재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를 직접 창조하시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The Knowledge of God as the Creator)은 계시(Revelation)의 하나님으로서 예배를 받으셔야 할 대상(God as Object of Worship)이지만, 타락한 인간이 멸망 받게 되자(The Fall and Degeneration of the Human Race) 그리스도를 보내어 구원하고자 계획하시고, 인간의 마음속에 성령으로 하여금 역사(The Working of the Spirit in Men's Heart) 하게 하시고 믿음(Faith), 회개(Repentance),를 통하여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The Christian Life)하시고 믿음에 의한 칭의(Justification by Faith)와 기도(prayer)를 통한 그리스도와의 연합(union)을 통하여 승리의 삶의 순서 다음에 예정의 교리가 나오는 것이 칼빈의 신학 구조인데 이로써 우리는 위의 두 신학 구조를 함께 포개 놓고 보면 바울과 칼빈은 거의 일치된 신학사상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다음은 바울과 칼빈의 신학 구조를 비교해본 도표이다.

 

<바울과 칼빈의 신학구조 비교 도표>

 

바 울

칼 빈

〔 로마서의 구조 〕

A.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무지로 인한 인간의 죄상(1장~3장20절)

B. 그리스도의 은혜와 믿음에 의한 구 원 (3장21절~6장)

C. 성도의 궁극적 승리(7장~8장)

D. 예정교리(9장~11장)

E. 성도의 윤리(12장~16장)

〔 기독교 강요의 구조 〕

A'.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불 신자에 대한 심판, 인류의 타락과 멸망상태.〔Ⅰ권~Ⅱ권6장〕

B'. 율법과 복음, 그리스도의 구원

믿음, 회개〔Ⅱ권7장~Ⅲ권5장〕

C'. 성도의 삶, 믿음에 의한 칭의, 성 도의 자유, 기도〔Ⅲ권6장~20장〕

D' 예정교리〔Ⅲ권21장~24장〕

E' 성도의 삶의 공동체로서의 교회와 성 례와 시민정부〔Ⅲ권25장~Ⅳ권32장)

 

위의 도표에서 A와 A', B와 B', C와 C', D와 D', E와 E'는 서로 거의 포개질 정도로 일치를 이루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칼빈의 예정의 교리와 선교사상이 어떤 관련이 있는지? 선교와 관련해서 과연 칼빈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자들의 주장대로 이 예정의 교리가 선교를 저해하는 요소로 작용하는지 아니면 이 예정론이 오히려 적극적인 선교의 원동력이 되는 신학사상으로 작용하는지를 검토해 보기로 한다.

 

첫째로, 칼빈이 그의 예정론을기독교 강요Ⅲ권 성령론 가운데 위치시킨 것으로 보아, 예정의 교리는 성령의 사역과 밀접한 관련성을 가진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성령이 선교와 관련을 가진 것 같이 예정론도 선교와 관련성을 가지고 있다는 논리가 성립한다. 물론 어거스틴에서와 같이 은총을 깨닫게 하시는 것도 성령의 사역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예정론이 하나님의 창조사역을 기술하는 기독교 강요 Ⅰ권에 소속되지 아니하고 3권 성령론에 소속되는 것은 반드시 인간의 구원과 관련성을 가지기 때문이며, 인간의 구원은 반드시 선교라는 미련한 방법(고전 1:21)을 통해서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성령의 중심사역은 하나님의 은혜를 수용하여 회개와 믿음을 통하여 구원으로 연결되는 사역이다. 성령이 우리 안에 찾아오셔서 믿음을 불러일으키시고, 회개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과 화해를 가져온다. 칼빈은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 관계를 남자와 여자의 결혼관계로 비유한다.

 

“남여가 결혼하여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 된다. 이 둘은 하나가 된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을 통해서만 우리와 연합하신다. 이 성령의 은혜와 능력에 의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의 지체들이 된다. 그 결과 우리는 그리스도에 예속되고 또한 우리는 그리스도를 소유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관계를 가질 수 있는 것은 오직 성령을 통해서만 가능하며, 이 신비적 연합(mystical union)에 의해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소유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와 우리는 한 몸으로 연합하여 그리스도와 우리는 하나가 된다. 다시 말하면 성령은 말씀의 은혜를 통해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시킬 때, 우리에게는 믿음이 일어나고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서 성도의 성화된 삶이 시작된다. 믿음(신앙)이란 성령의 주요역할(Praecipuum Eius Opus)이다. 그런데 성령은 말씀을 통해서 일하신다. 신앙(Fides)이란 성령이 은총의 외적수단인 교회의 선포된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지성(The Mind)을 조명시키시고 우리의 의지(The Heart 혹은 The Will)를 선택과 결단과 확고부동한 신뢰에 이르게 한다. “복음 말씀을 듣는데서 성령의 조명과 감화로 신앙이 생기는 것이다. 신앙과 말씀은 영원한 관계에 있으며, 이 복음말씀에서 이탈되면 신앙은 성립할 수 없고 지탱될 수 없는 것이다.” 성령의 주된 사역이 그리스도와 우리와 연합 관계를 맺어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은혜(Christi Beneficentian)와 아버지 하나님의 총애(Paterum Dei Favorem)를 깨달아 아는 “양자의 영”(The Spirit of Adoption)을 받은 자가 되고, 거룩과 위엄에 찬 창조주요 심판 주가 되시는 하나님은 아버지가 되신다.

 

이 양자됨이 곧 중생(Regeneration)이요 새 피조물(New Creature: 고후 5:17)인데 이 과정에서 하나님은 성령에 의하여 그리스도와 연합관계 아래 있는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은혜로 “의롭다” 칭해주시는데 이를 의인(義認)이라하고 이 의인(Justification)된 자가 구원받은 자이다. 구원받은 자에게는 성도의 자유가 확보된다. 이렇게 볼 때, 구원이란 전적으로 성령의 사역이요, 성령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셔서 어떤 사람은 구원을 향한 변화를 다른 사람은 그 반대의 변화를 가져오게 하시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예정사항이라는 것을 칼빈은 바울로부터 배운 것이다.

 

“그런즉 하나님께서 구원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유기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신다---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그렇다면 성령은 창조 전에 이미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예정(엡 1:4)하신 그리스도와 우리를 연합함으로써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그리스도 안에 우리가 있게 되므로 결국 우리도 창세전에 예정을 입은 결과가 된다. 이러한 성령이 사도들 안에서 역사할 때 사도행전의 역사가 일어났다. 사도행전은 초대교회 선교확장의 역사요 성령께서 사도들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행전이다. 그러므로 성령은 곧 선교의 영이시다. 성령 충만한 초대교회사도들이 가는 곳마다 수많은 사람들 속에 성령이 역사하여 구원의 역사가 폭발적으로 일어났다. 칼빈이 예정론을 성령론에 예속시킨 주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예정론은 칼빈의 구원론의 중심사상이요 구원론은 성령론에 의해서만 성립되기 때문에 칼빈의 예정의 교리는 과연 선교의 원동력이 되는 성령론이 인간의 구원과 관계를 맺는 필수의 통로가 되며, 이 비밀 통로의 문을 여닫으시는 열쇠는 오로지 하나님만이 갖고 계신다.

 

둘째로, 칼빈은 그의 신학 패턴을 바울신학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바울신학의 구조와 같은 위치에 예정론을 두고 있다. 칼빈 신학에서 예정론의 존재가 1536년 초판에는 보이지 아니하다가 1538년의 Catechism과 1539년 기독교 강요에서 발견되는데 그 위치가 1538년 Catechism에서는 제 13번째 선택과 예정(Election and Predestination)이라는 항목으로 나오고, 1539년 기독교 강요에는 제 8장에서 그리고 1543년판 기독교 강요에는 제 14장에 위치하는 것을 봄으로써, 그 위치가 조금씩 변동되어짐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하여 1559년 최종판에서는 전술한 바와 같이 바울의 로마서의 구조와 거의 일치된 구조를 이루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바울의 예정론이 로마서 9장부터 11장까지인데 그 중에 10장은 특히 선교의 장으로 유명하다.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하니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 하시도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특히 선교사 파송 예배 때마다 혹은 각 교회나 교단의 선교대회나 선교 헌신예배 때마다 인용되는 성경 Text가 바로 바울신학에서 예정론 교리를 표현하고 있는 로마서 9장부터 11장까지의 중심부에 자리하고 있는 10장이라는 사실로부터 바울의 예정론의 중심 의도는 분명히 영혼의 구원에 있고 이를 위한 선교의 장으로 연결되는 선교활동과 선교의 실천을 바울은 강조법의 수사학을 사용하여 최대한 강조하여 표현하고 있다.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바울의 예정론 속에 선교의 사상이 들어있다면 바울신학의 패턴에 따라 같은 구조로 신학체계를 구성한 칼빈의 예정론 속에도 선교의 사상이 들어있다고 보는 것이 논리의 타당성이 아닌가?

 

그리고 우리는 칼빈에게 있어서 소위 실천적 삼단 논법과 같은 논리를 발견한다. 즉 ①하나님의 예정에 의하여 선택함을 받은 사람은 생활에 있어서 열매를 맺는다. ②나는 택함을 받은 사람이다. ③고로 나도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논리이다. 이를 다시 선교 쪽으로 적용해 보자. ①하나님의 예정에 의하여 택함 받은 자는 복음 선교에 있어서 열매를 맺는다. ②나는 택함 받은 자이다. ③고로 나도 복음 선교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 이러한 논리에 의해서 실제로 17세기의 칼빈주의자들과 퓨리탄(Puritan)들이 사회전반으로 파고 들어가서 사회를 개혁하며 과학문명을 발전시키며 새로운 세계를 정복하여 신천지를 개척하여 미국을 건설하며, 온 세계를 향하여 복음 선교사를 파송하는 역사를 일으켰다. “믿는 자들은 구원을 오직 하나님의 선물로 여기고 하나님의 부르심은 여러 가지 형태의 싸인(Signs)들로 나타난다. 우리들은 이 싸인(Sign)들을 보고 우리들의 피택을 확인한다.” 이는 “성령이 내주하신다는 증거로서의 중생의 열매들이기에 성도들은 이 증거를 보고 온갖 역경 중에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계속 기대한다. 이와 같은 열매를 보고 그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경험한다.” 따라서 “성도들은 이 부르심의 열매를 보고 주님께서 자기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택정하셨음을 안다”고 칼빈은 말한다.

 

그의 기독교 강요에 나타난 칼빈의 이러한 예정 교리의 적극적인 사상이 오히려 선교의 힘 있는 원동력으로 작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지금까지 세계선교 역사상 예정론 교리를 믿고 따르던 자들이 선교에 훨씬 더 열심이 있었던 것도 이를 증명해 준다. 어거스틴, 부서, 윌리암 케리, 아브라함 카이퍼, 요하네스 바빙크, 헨드릭 크레머 등은 대표적 예정론자요 또한 그 시대마다 세계선교를 대표하던 인물이었다.

 

역사적으로도 알미니안주의에 대항하여 1618년에 칼빈주의 5대 교리를 확정한 돌트회의(The Synod of Dordt)는 그 신조 제1장이 예정론으로부터 시작한다. 이 신조는 예정론이 결코 선교를 배제하지 않는다고 못 박음으로서 다른 신조보다 선교사상을 더 많이 더 강하게 함축하고 있다.

 

. 칼빈의 교회론에는 과연 선교사상이 있는가?

 

1) 교회의 선교적 과업에 대한 칼빈의 태도

 

“칼빈은 과연 선교적인 인물이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서, 우리는 먼저 선교의 개념(The Concept of Missions)을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현대적 형태 곧 교회의 특별한, 분리된 과업으로서의 제도적 선교사업의 개념(Idea)으로 생각한다면 칼빈과 개혁자들에게는 제도적인 선교사역이 있었다고 말하기는 곤란한 것이다.” 라고 J. Van den Berg는 말했다. 칼빈의 선교사상에 대해서 긍정적인 지지자중의 한사람인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물론 현대적 형태의 선교개념 곧 교회와는 분리된 특별한 과업으로서의, 제도적인 선교사업(The Institutional Missionary Work)으로 생각할 때, 그 당시 종교개혁의 초기로서 지교회로 말하면 아직 개척교회를 막 시작할 때와 같아서 해외선교에 관심을 기우릴 여유가 없었다. 칼빈 당시의 16세기의 시대적 상황에서의 종교개혁의 세력은 영아기에 불과했던 반면 로마 카톨릭의 세력은 1,000년의 긴 역사를 지내오면서 인적 물적 넘치는 선교자원과 로마 카톨릭 국가인 스페인과 포르튜갈은 전 세계의 해상권과 항로를 장악하여 로마 카톨릭 교회의 막강한 선교후원 세력이 되었으나, 당시 종교개혁의 후원세력은 아직 너무 미미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오늘날의 현대적 선교개념을 종교개혁자들의 사상세계에 적용하려고 시도한다는 것은 잘못된 시각”에서 출발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Van den Berg의 주장은 전적으로 옳다. 종교개혁자 칼빈에게 선교의 사상이 있느냐 없느냐를 논함에 있어서 없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많이 있고 부정적 시각에서 그의 잘못된 신학사상이 선교 발전에 방해가 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앞에서는 그의 예정론에 대해서 살펴보았고 여기서는 그의 교회론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한다.

 

“교회의 하는 일이 모두가 다 선교다.”라고 한다면 더 이상 논할 바가 없지만 선교개념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서 그리고 교회의 본질과 사명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칼빈의 신학 사상 중 그의 교회론과 선교의 관계는 어떠하며, 그의 교회론 가운데는 과연 선교사상이 있는가? 이것이 필자의 주된 관심이다. 그런데 문제는 비기독교 세계의 필요 즉 그들의 영적 상태와 교회가 이들에게 선교사를 파송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해야 할 교회의 의무에 대해서 칼빈이 과연 올바로 깨닫고 있었느냐는 점이 중요하다.

 

칼빈의 교회론에서는 선교의식이 결여되어 있다는 비판에 대해서 전 호진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칼빈의 교회론은 부패한 교회의 개혁에 강조점을 두었기 때문에 교회의 사명보다 교회의 본질에 더 치중하였다. 개혁주의 일부 학자들은 말씀, 권징, 성례[를 교회의 3대 표지로 내세우고 있는 칼빈]의 교회론에는 선교가 배제되었다고 주장한다. 선교적 교회관이라기 보다 전투적 교회관(Militant Church)이 칼빈의 특징이다.”

 

위의 설명은 마치 “칼빈의 교회론에는 선교가 배제되어 있다” 라든가 “선교의식이 결여되어 있다”는 비판에 대해서 전 호진은 수긍하면서 그 이유를 교회의 사명보다는 본질에 치중하다 보니, 선교 사명에는 힘을 기울이지 못했다고 변명해 주고 있다. 그러나 그 변명은 옳지 않다. 선교는 교회의 사명이라고 하기보다는 교회의 본질로 보아야 한다.(Johannes Blauw, The Missionary Nature of the Church).기독교 신앙은 본질적으로 선교적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 시작부터가 선교적으로 출발했다고 말할 수가 있다. “초대교회는 뜨거운 선교 정신에 의해서 교회의 신학(the theology of the church)이 형성 되었다”고 말한 빌헤름 파우크(Wilhelm Pauck)의 말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교회의 시작에 관한 가장 권위 있는 기록인 사도행전을 읽어본 독자라면 그 누구도 “교회가 시작부터 선교적으로 출발했다”는 주장에 반대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리고 우리가 칼빈의 선교 사상을 논함에 있어서, 어떤 사상이 행위나 사건이나 업적으로 충분히 나타나는 경우도 있지만 특수한 환경의 제약 때문에 그렇게 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칼빈이 살았던 선교적 환경이 바로 그러했다. 사상이란 물론 어느 정도 환경에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오히려 환경을 이끌어 가고 환경에 영향을 주고 환경을 변혁시키는 것이 사상이다.

 

칼빈의 사상에는 선교의식으로 충일하다. 칼빈의 종교개혁은 세계선교를 위한 든든한 기초공사 작업이다. 세계선교를 위해 출항할 배들을 위해 항구를 구축하는 작업이요, 세계선교를 위해 출동할 비행기가 뜰 공항을 닦는 작업이다. 칼빈의 선교사상 옹호자인 Van den Berg 조차도 칼빈이 이방 세계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지식이란 그가 고전 작품들로부터 얻은 것이 거의 전부요, 종교 개혁가들이 활동하던 지역과 복음이 전해지지 못한 이방 세계( Unreached People) 사이에는 로마 카톨릭 교회가 쌓아놓은 높은 장벽이 가려 있어서 칼빈의 선교사상에 제한적 요소로 작용했다고 하는데 그럴듯한 설명이기는 하나 필자는 이러한 설명에도 동의할 수 없다.

 

칼빈의 방대한 양의 저작을 뒷받침하는 독서의 배경은 시의 고금, 양의 동서를 망라한 넓은 폭과 깊이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서구의 지성을 대표할만한 인문주의적 지식과 날카로운 판단과, 냉철한 지성과 깊은 사색 속에 거닐면서, 당시의 세상 형편에 결코 어둡지 아니했다. 그는 그리스도의 통치(Regum Christi), 혹은 하나님의 왕국(The Kingdom of God)이 전 세계 땅 끝까지 확장되어 모든 민족이 회심하여 주께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던 사람이었음이 그의 저작들 가운데 많이 나타나고 있다.

 

칼빈의 많은 저작들과 설교 가운데서는 아직도 복음을 듣지 못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는 이들에게 계속 복음이 전해져서 하나님 나라가 계속 확장되어 가야 할 것을 주장했지만, 후기 칼빈주의자들과 루터파 정통주의자은 “사도들에 의해서 복음이 이미 땅 끝까지 전파되어서 선교의 지상명령은 이미 다 성취되었다”고 하는 잘못된 주장을 하였기 때문에 칼빈의 선교사상이 크게 오해되어온 것이 사실이다.

 

칼빈은 당시의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 공식적 선교의 기구로서 수도원(Monastery)제도를 활성화하여 해외교세 확장에 전력하고 있음에 대해서도 충분한 정보와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중세 1,000여 년 간 암흑의 소굴이었던 수도원을 강도의 굴로 생각했다. 칼빈은 그의 기독교 강요에서 어거스틴의 말을 인용하면서 “수도원에서 수도를 쌓은 사람보다 더 훌륭한 사람을 만나본 일이 없다”고 하면서 동시에 “수도원에서 타락한 사람보다 더 악한 인간을 만나본 일도 없다”고 수도원의 타락상을 규탄하는 가운데 “정결한 기도실이어야 할 그곳이 매춘굴이라고 말하지 않고 지날 수 있는 곳이 모두 몇 개나 될까?” 라고 탄식하였다. 소위 교회 밖의 선교기구 즉 자발적 선교단체들(Voluntary Missionary Societies)을 칼빈이 고려하지 않았거나 만들어 내어 활용하지 않았고 오직 제도적 교회만 인정했기 때문에 개신교 초기에 선교부재를 초래하였다고 비판하는 자들이 있지만 수도원의 썩고 타락한 상황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칼빈으로서 그 원인이 수도원이라는 선교기구(Sodality)를 파송하고 있는 모체(뿌리)인 교회가 부패하고 썩었기 때문이라고 진단을 내린 결과, 선교보다 더 시급하고 근본적인 문제 해결은 교회의 개혁을 통한 참 교회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칼빈은 이 세상 전체의 총체적 회심을 열망하면서 이 세상을 하나의 극장에 비유하고 있다. 하나님의 영광의 극장(Theatrum Gloriae Dei)으로서, 인류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이 빛나고 있는 극장으로서 비기독교 민족들이라 할지라도 배제되지 아니하고 그 극장에서 작은 역할이라도 담당함으로서 이 세계가 모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를 뜨겁게 소원하는 열망이 칼빈의 저작 가운데 많이 보이는데도 칼빈의 사상 가운데 선교의식이 결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는가?

 

칼빈은기독교 강요에서 이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주기도문을 해설하면서, “하나님의 인간통치가 하나님 나라”라고 정의를 내리면서 “성령의 비밀한 영감을 통한 하나님의 말씀의 역사” 를 통하여 소극적으로는 우리 자신의 죄악을 철저히 회개하고 육체의 모든 욕망을 없애며 사는 것이요, 적극적으로는 하나님 나라의 평화로운 상태와 하나님 나라의 순수성을 교회를 통하여 확장하면서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까지 하나님은 그의 나라를 확장하신다(고전 15:28). 교회와 성도들은 십자가를 지는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확산시켜야 하며 끝내는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을 확신하여야 할 것이다.라고 주장하는 칼빈의 신학사상이야말로 선교 지향적인 신학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 나라의 순수성을 교회를 통하여 확장”하는 일이야말로 “선교”라고 할 수 있으므로 이를 주장하는 칼빈은 분명한 선교신학사상을 소유하고 있었다.

 

2) 칼빈의 교회관과 선교

 

칼빈의 신학사상이 태어날 때부터 천부적으로 확정적 완성 형태로 가지고 나온 것이라든지, 어느 한 순간 갑자기 생각해 낸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을 두고 사색하고, 다듬고, 고치고, 가꾸어온 결정체임을 우리는 칼빈의 서적을 깊이 대조 연구해 보는 가운데서 발견할 수가 있다.

 

여기 교회론에서도 그의 교회관이 1536년 초판 기독교 강요」에서의 그것과 마지막 1559년 판 (라틴어판) 기독교 강요의 내용에서 그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초판 기독교 강요에서 칼빈은 교회를 정의하기를 “피택자의 우주적 총수”(Universus Numerus Praedestinatorum)이라고 했다.

 

John Dillenberger에 의해서 편집 출판된 「칼빈선집」(John Calvin Seclections from His Writings)에 실린 칼빈의 1536년 초판 기독교 강요제Ⅳ부 초두에 칼빈은 교회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첫째로 우리는 거룩한 보편적 교회, 다시 말해서 천사든 사람이든(에베소서 1:9-10; 골로새서 1:16); 사람 중에서는 죽은 자든 산 자든; 살아 있는 자면 이 세상 어디에 있는지, 피택 된 자의 총수(The Number of the Elect) 인 거룩한 교회를 믿는다. 교회는 하나이고 하나님의 백성과 그 공동체도 하나인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지도자이고 왕자이며, 몸의 머리이시다.”

 

우선 우리는 여기서 칼빈의 교회의 정의를 내림에 있어서 주목해야 할 사항이 몇 가지 있다. 교회의 두 가지 개념 즉 가시적 교회와 불가시적 교회 중에서 초판 기독교 강요에서는 불가시적 교회, 우주적 교회, 천사까지도 죽은 자들까지도 선택자의 수에 들기만 하면 다 교회에 속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그의 사상이 1559년기독교 강요 최종판에서는 가시적 교회에 대해서 강조하는 쪽으로 수정하게 되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칼빈이 처음에는 불가시적인 교회를 더 중요시하고 가시적 교회에 대해서는 관심을 적게 가진 것은, 중세의 로마 카톨릭 교회가 가시적이고 유형적인 면에 너무 치중한 결과 교회의 본질적인 면에서는 타락하고 썩어버려서 교회본연의 모습을 상실한데 기인하며 또 당시 현실적으로 로마 카톨릭이라는 가시적 유형교회와의 투쟁 상태에서 카톨릭 교리를 반대하는 입장에 서있기 때문이며, 루터의 교회관으로부터도 상당한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파리에서 일어났던 만성절 사건 이후 칼빈이 1535년 바젤에 있는 루이 듀 띨레(Louis du Tillet)집에서 피난생활을 보내면서 기독교 강요초판을 썼는데 그것을 쓰게 된 동기는 재세례파, 자유 성령파 등의 좌경 급진주의적 종교개혁 운동자들이 1534년 10월 프랑카드 사건을(The Affair of Plancards) 유발시켜서 시끄럽게 하자 프랑스왕 프란시스1세가 개신교도들을 무차별 투옥 화형 등으로 박해할 때 왕과 집권층을 위해서, 그리고 그리스도를 갈망하는 조직의 복음주의자들을 위해서 그 책을 프랑스어로 썼는데 “프랑스 왕 프란시스Ⅰ세에게 드리는 서문(Prefactory Address to King Frances I of France”이라고 제목이 붙여진 글에서 로마 카톨릭 교회의 잘못된 교회론을 비판하면서 “교회란 외형적인 모습이 없이도 존재할 수 있음”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두 가지 점에서 저들의 교회관을 비판합니다. 첫째로 저들은 교회의 형태는 유형적이고 가시적이라고 주장 합니다 둘째로 저들은 이 형태가 무엇보다도 로마 카톨릭 교회의 교황의 보좌와 그 밑에 종속되는 계층 질서적 성직 체계에 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반대로 교회란 가시적 외형이 없이도 존재할 수 있으며, 이 외형은 저들이 바보처럼 찬양하는 외적인 훌륭함에 국한 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오히려 교회는 전혀 다른 두 가지 표지를 가집니다. 그것은 말씀을 순수하게 전파하는 것과 성례전을 합당하게 집례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칼빈의 교회론 사상은 스트라스부르그 목회기간(1538년 9월~1541년 9월) 동안 부처(Bucer)와 교제하면서 종래의 교회관을 수정하게 되었다. 부처는 가시적 교회에 대해서 매우 적극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것이 칼빈에게 영향을 끼친 듯하다. 왜냐하면 1539년에 출판된 칼빈의기독교 강요 제2판에 부처의 사상을 더욱 발전시킨 칼빈의 가시적 교회론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 후 1543년판에는 더욱 추가되고 다듬어진 교회론의 거의 완성된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성경은 두 가지 교회가 있다고 말한다. 성경에서 “교회”라고 하는 말은 어떤 경우에는 하나님 앞에 있는 모든 사람을 의미한다. 이 교회에는 양자로 삼으시는 은혜에 의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과 성령의 성화에 의해서 자녀가 된 사람들과 성령의 성화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참된 지체가 된 사람들만이 들어 갈 수가 있다. 이런 의미의 교회는 현재 지상에 살아있는 성도들뿐만 아니라 천지창조 이후 지금까지 선택받은 모든 사람을 포함한다. 그러나 종종 “교회”라는 명칭은 한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섬긴다고 고백하는 지상위에 흩어져 있는 많은 사람들을 지칭하기도 한다. 그들은 세례에 의해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얻게 되며, 성만찬에 참여함으로 진정한 교리와 사랑에 의한 우리의 하나됨을 증거하고 주의 말씀 안에서 일치하며, 말씀을 전파하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성직을 보존한다.”

 

칼빈은 어거스틴(Augustine) 위클리프(Wycliff) 후스(Hus)에 이어서 가시적 교회와 불가시적 교회의 교리를 주장하는 자가 되었다. 이 두 교회 중에서 불가시적 교회는 구성원 100%가 참 교회인 반면에 가시적 교회에는 이름과 겉모습만 그리스도인인 많은 수의 가짜, 위선자들이 섞여있는 것이 현실이다. 칼빈은 어거스틴과 더불어 “양의 우리밖에 많은 양들이 있고, 양의 우리 안에 많은 이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조직신학자들은 불가시적 교회를 무형교회 천상교회, 승리교회, 영원한 교회로 호칭하며, 가시적 교회를 유형교회, 지상교회, 전투적 교회라고 불렀다. 그런데 유형교회가 존재함으로써 그 사역에 의하여 무형교회가 확장되어진다. 말씀과 성례를 통해서 아직 참으로 신앙을 가지지 않은 유형교회내의 사람들에게 신앙을 가지도록 하여 그리스도의 구원에 참여토록하며 권징을 통하여 위선적인 그리스도인들을 교회 밖으로 내보내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자 목회라고 할 수 있다.

 

불가시적 교회와 가시적 교회를 칼빈이 제시한다 해서 서로 다른 두 개의 교회가 존재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교회는 전 우주적으로 하나이다. 그리고 교회의 구성원은 “세상 어디에 있든지”라는 표현 가운데서 칼빈의 신학체계가 지리적으로 전 세계적 범위를 차지하고 있는데 여기에 선교적 의미가 있다. 또 창조 이래로부터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의 시간적 범위로 볼 때 이것도 바로 선교의 시간적 범위와 같다. 그리고 전 세계 영혼이 이 택자의 범위에 들어오고 못 들어오고는 하나님만이 아시는 예정사항이므로 칼빈의 교회론도 결국은 예정론적 교회론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전장에서 이 예정론 속에 선교적 의미가 있음을 파악했다. 루터에게는 칭의론이 그의 교회론의 기초가 된 것처럼 칼빈에게는 예정론이 그의 교회론의 기초가 되어있다. 칼빈에게 있어서 교회의 기초는 하나님의 비밀스런 선택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비밀스런 선택과 그의 내적 부르심을 생각해야 한다. 왜냐하면 누가 하나님의 자녀인지 하나님만이 아시기 때문이다. 많은 무리 가운데 아주 적은 숫자의 선택된 사람들이 있으며 소수의 알곡이 많은 쭉정이들로 덮혀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만이 그의 교회에 속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아신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교회의 기초는 하나님의 비밀스런 선택이다.”

 

칼빈이 교회의 기초를 예정론 위에 둔 것은 어거스틴의 영향인 것 같다. 어거스틴은 도나티스트 논쟁에서 자신의 교회론을 주장함에 있어서 예정론을 주장했으며 펠라기우스에 대해서도 은총을 강조하면서 필연적으로 이 예정의 교리를 사용하였다.

 

칼빈의 교회론 가운데 교회를 섬기는 자들을 엡 4:11에 근거하여 ①사도들 ②선지자들③전도자들 ④목사들 ⑤교사들로 구분하고 이들이 교회를 지도해야 한다고 했다. 이중에 목사와 교사는 교직 중 교회 안에 항존 하는 일상직(The Ordinary Office=항존직)으로 두고, 사도들, 선지자들, 전도자들의 교직은 교회가 출발할 당시에 생겼으며, 그 후에는 필요에 의해서 생길 수도 있는 비상직(The Extraordinary Office=임시직)으로 두었다.

 

칼빈은 사도직에 관하여 마가복음 16:16을 들면서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에 근거하여 사도직이란 복음 선포와 하나님 나라 건설을 어떤 국한된 지역이 아니라 온 세상 어디서나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고전 3:10참고). 이는 오늘날의 선교사들에 해당하는 직이다. “사도”라는 말 Apostle은 “대사”라는 말인 Ambassador(사절, 사자)라는 말과 어원적으로 통하는 말이라고 하며, 선교사라는 말 Missionary도 어원적으로는 라틴어인 Mitto (보냄을 받은 자) 곧 “사절”이라는 어미이므로 “사도”는 “선교사”가 되는 것이다.

 

칼빈이 종교개혁이라는 로마 카톨릭 교회와의 투쟁을 수행해 나가면서도 교황의 사도계승권을 주장하는데 대해서 이를 부정하기 위해서 사도직을 임시직의 카테고리에 넣고, 사도직의 임무는 12사도로서 종료되었다고 하는 것은 로마 교황의 사도계승권을 부인하는 것이지 복음 선교의 필요성 자체를 부정한 것이 결코 아님이 칼빈의 전체적 신학사상 구조와 성격에서 잘 나타나 있는 바다. 예언직이란 구약의 예언서를 기록한 예언자들과 같은 것이 아니고 에베소서 4:11에 나오는바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를 받은 자들”을 의미한다.

 

“전도자들”이란 사도들보다는 지위가 낮은 자들로서 그들의 직책과 기능에 있어서 사도들 다음가는 사람들이었다. 성경상의 예로는 누가, 디모데, 디도 등과 예수님이 파송하신 70인 (눅 10:1)등이 모두 전도자들이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칼빈이 교직을 열거하면서 사도직, 예언직, 전도직을 목사직과 교사직 앞에 둔점이다. 목사직과 교사직을 항존직이라고 강조한 것은 그 만큼 칼빈의 신학이 교회 중심의 신학이라는 것을 알 수 있으나 임시직으로 분류한 사도직과 예언직과 전도직을 위에 둔 것은 칼빈의 신학이 선교 우선적 신학임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칼빈주의 신학자로 스코틀란드 에딘버러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Thomas Forsyth Torrance가 쓴 「Kingdom and Church」 책에서 칼빈의 교회관을 취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칼빈은 교회와 관련해서 설립(Aedificatio), 발전(Profectus), 성장(Incrementa)을 말하면서, 또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이 궁극적으로 나타나는 것과 관련해서 이것이 이해되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종말론적 성취가 그리스도의 오심에 의해서 이루어지는데 숨겨졌던 것이 마침내 드러나게 된다.” 토랜스 교수의 주장은 결국 칼빈의 교회론 가운데는 선교사상이 있다는 것이다.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이 시편 67편과 관련지어 생각해 볼 때 이것이 바로 선교정신이다. 세계만민이 구원을 얻고 주를 찬양하는 것이 하나님 영광(Divine Gloria)의 궁극적 나타남(Ultimate Manifestation)이다.

 

기독교 강요 제4권 교회론에서 칼빈은 또한 하나님께서 성도의 어머니로서의 교회를 주셔서 그 품속으로 무지하고 게을러서 진리를 꺼려하는 우리 인간을 초대하신후 그리스도와의 교제 안에서 신령한 관계를 지탱하도록 돌보아 주신다고 했다.

 

“하나님은 교회의 품속으로 그의 자녀들을 모으시기를 기뻐하시고, 이들이 유아와 어린이로 있을 동안 교회의 도움과 목회로서 양육시키시고 이들이 장성하여 신앙의 목표에 도달할 때까지 교회의 어머니다운 돌봄으로 인도하신다.”

 

하나님은 이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서 복음을 교회에 맡기셨다. 칼빈은 그의 독특한 신학적 표현 방법을 써서 이 복음은 보물이며 “이 보물을 하나님께서 교회에 맡기셨다”고 했다.

 

“주님께서는 이 복음의 보화를 교회에 맡기셨다. 그래서 주님은 “목사와 교사”(엡 4:11)를 세우시고, 그 입들을 통하여, 그의 백성(성도)들을 가르치신다. 그리고 주님은 이들에게 권위를 부여하셨고, 보편교회(Catholic Church)의 일치를 가져오는 신앙고백과 교회의 올바른 체제를 부여하셨다. 무엇보다 주님은 성례전들(주로 세례와 성찬)을 세우셨으니 이 성례전을 경험하는 우리 믿는 자들은 이 성례전이 우리의 신앙을 양육하고 강화시키는 데에 없어서는 안 될 수단임을 느낀다.”

 

기독교 강요에 나타난 칼빈의 교회론 중에 우선 성도의 어머니로서의 교회비유에서 교회의 선교적 의무 내지 사명(The Missionary Duty or Obligation of the Church as the Mother of the Believers)을 찾아볼 수 있다. 자녀를 낳는 일은 어머니의 일 중 가장 중요한 일이다. 자녀를 낳으면 가족이 늘어난다. 그리고 어머니는 그 자녀를 돌보고 기른다. 맥가브란(Donald A. McGavran) 박사나 와그너(C. Peter Wagner) 박사와 같은 풀러의 교회성장학파는 교회의 성장과 선교를 동일한 개념으로 본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어머니로서의 교회에 복음의 보화를 맡기셨다”고 했는데, 칼빈의 신학사상이 다 그러하지만, 이것은 바로 매우 강력한 성경적 지원을 직접 받고 있는 선교 신학적 사상이다. 즉 마태복음 25장 14절에서 30절 사이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달란트 비유를 말씀하신 것이나 누가복음 19장 11절에서 27절 사이에서 므나 비유를 말씀하신 것에서 주님은 “이윤을 남기는 것” 곧 “수적증가”를 비유로 말한 것은 선교적 개념이다. 달란트를 맡긴 주인이나 므나를 맡긴 귀인은 예수 그리스도다. 달란트나 므나는 복음이고 그것을 맡은 사람은 교회다. 그가 다시 돌아 올 때는 그리스도의 재림의 시기이다. 교회는 주님의 재림 때까지 복음을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만 한다는 선교적 사명을 비유로 말씀하신 것이다.

 

달란트나 므나를 장사 밑천으로 하여 이윤을 남기는 것은 복음을 부지런히 전해서 많은 영적 결신자를 얻는 열매를 거두도록 교회에 강력히 촉구하는 복음 메시지임에 틀림이 없다. 칼빈이 그의 최종판 라틴어 기독교 강요(1559)의 제Ⅳ권에서 교회를 설명함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이러한 강력한 선교적 의미를 담고 있는 비유를 제일 먼저 들고 있다는 것은 그의 신학사상의 건축물이 성경과 바울신학의 주춧돌 위에서 선교 지향적으로 세워졌다는 사실로 설명되어 질 수가 있다. 선교 신학적 시각에서 바라볼 때 성경은 선교의 책이요 바울은 위대한 선교사요 바울신학은 선교의 신학이다. 그렇다면 그 주춧돌 위에 세워진 건축물인 칼빈의 신학도 선교적 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 칼빈의 기독교 강요 제Ⅳ4권의 교회론은 교회의 선교적 사명을 고취하고 있는 강력한 선교적 사상으로 출발하고 있다.

 

Ⅳ. 결 론

 

칼빈에게 선교의 사상이 있느냐 혹은 없느냐는 질문에 대해서 선교신학계에서는 지금까지 긍정 쪽과 부정 쪽의 의견이 엇갈리고 있으나 긍정적인 시각보다는 오히려 부정적인 시각이 우세하다는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라 하겠다. 필자는 칼빈의 선교사상을 연구함에 앞서서 먼저 “칼빈의 선교사상”이라고 표현된 것이 John Calvin's thought on mission, The missionary Concepts of John Calvin, The missionary idea of John Calvin, The missionary elements in the John Calvin's theology, The mission-mindedness of John Calvin, ……등 여러 가지 표현이 있는데, 이러한 여러 방향에서의 접근과 노력을 통해서 개혁주의 선교신학의 수원지가 되어야 할 칼빈의 선교사상을 재검토할 필요가 있음을 주장하였다.

 

Carl D. Setvens은 “우리가 칼빈에게 선교의 의지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을 논하기 전에 먼저 그의 선교사상에 영향을 미친 교회론이 어떠하냐를 살펴보아야 한다”고 했다.

 

필자는기독교 강요의 분석연구를 통하여, 칼빈의 구원론을 검토하고 지금까지 칼빈의 예정론이 선교에 저해적 요인으로 작용해왔다는 종래의 주장에 대해서도 재검토해야할 당위성을 그의 교회론과 함께 살펴보았다.

 

칼빈에게 있어서 선교는 어디까지나 구원론적 성격이 강하다. 하나님의 복음이 전 세계에 전파되고 땅 끝까지 구원이 이르러야 한다는 지극히 당연한 성경적 사상은 바울신학의 초석이었고, 이러한 바울신학은 칼빈신학의 전제가 된 것이다.

 

칼빈의 구원론은 바울의 로마서 9장 10장, 11장에 근거한 예정론 교리와 같은 맥락에서 보아져야 한다. 기독교 강요의 Ⅲ권 21장부터 24장까지의 칼빈의 예정교리와 로마서에서 전개 되고있는 바울의 예정교리가 선교사상을 전제로 한 것임을 비교해 볼 때, 칼빈의 예정의 교리도 선교와 밀접한 관련성을 가진다는 논리의 타당성을 살펴보았다.

 

예정론이 하나님의 창조사역을 기술하는 기독교 강요Ⅰ권에 소속 되지 아니하고 Ⅲ권 성령론에 소속된 것은 반드시 인간의 구원과 관련성을 가지는 것이기 때문이며 인간의 구원은 반드시 선교라는 방법을 통해서 이루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칼빈신학은 바울신학의 패턴이 연속된 것으로 볼 수 있고 바울신학이 선교 지향적 신학이기 때문에 바울의 선교사상을 의심하지 아니 하는 자라면 칼빈의 선교사상도 의심할 필요가 없다.

 

칼빈의기독교 강요 제Ⅲ권에 특별히 성령론이 집중되어 있다고 하지만 칼빈의 성령론은 기독교 강요에 어디든지 골고루 퍼져 있다고 보는 학자들이 많은데, 그렇다면 성령의 사역과 선교의 관련 아래에서 볼 때 칼빈의 기독교 강요에는 선교사상 내지는 선교의 개념 이 풍부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칼빈의 기독교 강요에 나타난 예정교리의 적극적인 사상이 오히려 선교에 힘을 공급해 주는 원동력으로 작용하였다고 볼 수가 있다.

 

칼빈의 교회론을 검토해본 결과에 있어서도 T. F. Torrance 교수의 주장과 같이 기독교 강요를 통해서 살펴본 칼빈의 교회론에서도 선교사상이 강하게 내포되어 있다. 또한 기독교 강요에 나타난 칼빈의 교회론 중에 우선 “성도의 어머니로서의 교회”라는 비유에서 교회의 선교적 의무 내지는 사명을 찾아볼 수 있었다. 칼빈은 그의 최종판 라틴어 기독교 강요(1559) 제Ⅳ권에서 교회를 설명함에 있어서 달란트의 비유나 므나의 비유를 제일먼저 들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칼빈의기독교 강요 제Ⅳ권 교회론은 교회의 선교적 사명을 고취하고 있는 선교사상에서 출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기독교 강요에 나타난 선교 사상을 검토하면서 예정론이야말로 기독교의 세계 선교에 수원지가 되는 사상임을 논증하였다.기독교 강요 Ⅱ권에 하나님의 형상 (Imago Dei)대로 지음 받은 인간이 본래의 형상인 하나님을 찾는 본능이 어떤 인간에게나 있음을 강조한 칼빈의 이론에서 후기 칼빈주의자들의 타문화권 선교에 불을 붙였고, 칼빈의 선교 사상에서 청교도들의 인디언 선교, 그리고 미국의 해외선교 운동으로 연결되어져 온 성격을 분석 검토해 보면 그것은 곧 칼빈의 위대한 선교사상을 더욱 심화 발전시킨 것이다. 칼빈이 제네바를 중심으로 교회개혁운동과 함께 선교활동을 전개해 나간 것은 당시 그가 처한 상황에서 최선을 다한 것이다.

 

우리도 칼빈의 종교개혁정신과 선교정신을 이어받아서 한국교회의 개혁과 세계선교의 사명을 다하는데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출처 : 내 사랑 중국 ♡ MyLoveChina
글쓴이 : null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