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자들의 자기관리
"스캔들’이란 대신하여 즐기는 악(惡)이다’ 라고 말한 것은 엘버트 후버드(Elbert Hubbard)였다. 최근 누군가에게서 신문지상을 오르내리는 한국 정객들의 부끄러운 스캔들을 지켜보는 것이 너무너무 재미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들은 일이 있다. 분명히 스캔들은 대리 만족의 쾌락을 제공한다. 그러나 성경은 ‘두려워 함’으로 스캔들을 다루라고 충고하고있지 않은가.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갈6:1)고 바울은 말한다. 우리 주변의 어떤 지도자들, 그들의 타락은 우리의 타락의 가능성이며, 그들의 회복은 같은 예수 공동체인 우리들 교회의 유익이요 축복이다. 따라서 우리는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이 숙제를 그들의 문제가 아닌 우리들의 문제로 다루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스캔들의 소문과 소문사이에서 살고 있다. 과연 이래가지고 한국교회의 내일을 말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비관적인 절망감마저 느껴지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오늘의 한국 권력사회의 마당에서 전개되는 재산공개를 둘러싼 스캔들의 메스를 가지고 오늘의 한국교회를 해부한다면 과연 우리가 설 자리가 있을까? 워렌 위어스비(Warren Wiersbe)가 이 시대의 교회를 향해 던진 다음과 같은 충격적 물음은 과연 한국교회와 무관할 것인가?
“지나간 19세기 동안 교회는 세상을 향해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말해왔다. 그러나 오늘 20세기의 황혼에 세상은 교회를 향하여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고 참된 복음을 지닌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들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자랑하고 있지만, 그러나 그리스도의 복음은 과연 우리를 부끄러워 하지 않을 것인가? (Wiersbe, 17)”
그럼에도 우리는 비관주의자(pessimist)가 아닌 현실주의자(realist)의 안목으로 이 주제에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믿는다. 비관주의자에게는 비관이 있을 뿐 비전을 제공할 수 없는 까닭이다. 우리는 우리의 썩어가는 현실을 숨기는 작업(a cover-up)이 아닌 파헤치는 용기로 대면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주의 자비와 긍휼을 의지하며 기도하는 가슴으로 우리의 타락해가는 동료 지도자들을 품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다시 새로운 모습으로 사역의 장에 서도록 회복을 도와야 한다. 우리는 이런 현실주의자의 용기와 사랑으로 성경의 귀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들의 지나간 타락의 현실이 오늘 우리의 예방의 현실, 그리고 치유의 현실로 적용되어야만 하겠기에 말이다.
1) 성적 타락
영적 지도자들의 타락의 가장 큰 스캔들은 말할 것도 없이 성적 타락이라고 할 수 있다. 영적 지도자도 인간인 이상 모든 인간이 지니는 생리적 성의 욕구에서 예외일 수 없다. 그러나 어떤 영역에서의 타락보다도 이 영역에서의 지도자의 타락은 더욱 감각적 스캔들이 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누군가가 “최선의 선물은 최악의 오용의 가능성을 지닌다”고 지적한 것은 매우 타당한 말이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위한 최선의 선물인 그의 아내 이브를 그 앞에 이끌어 오셨을 때, 아담은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놀라운 시어로 그의 감격을 표현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이 부부사랑의 최선의 관계가 파괴된 음행의 범죄를, 성경은 특별한 범죄로 취급한다.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게 죄를 범하느니라”(고전 6:19)고 사도 바울은 말한다. 하나님의 선물로서의 성은 하나님의 놀라운 사역의 도구인 가정을 세우지만, 오용된 성은 가정과 인생을 철저히 파괴한다.
삼손
세익스피어의 명작 햄릿(Hamlet)에서 주인공은 참된 지도자를 갈망하면서 “정욕의 노예가 아닌 사람을 내게 달라(Give me that man who is not passion's slave)”고 소리친다. 불행하게도 삼손은 정욕의 노예였다. 그는 육체적으로는 비할 데 없이 강한 사람이었으나, 도덕적으로는 비할 데 없이 약한 사람이었다. 그는 구국의 영웅이었으나 동시에 민족의 수치였다. 그의 시작은 얼마나 화려했는가.
그는 어미의 태에서부터 주께 바쳐진 나실인이었다. 그러나 이 나실인의 서약은 그의 아킬레스의 건을 관리하지 못함으로 깨어지고 말았다. 그의 마지막은 곡마단의 구경거리 처럼 인생의 조롱거리 가 되지 않았던가. 삼손의 생애의 가장 비극적인 사건은 다음과 같은 성경귀절에서 발견된다. “내가 전과 같이 나가서 몸을 떨치리라 하여도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더라”(삿 16:20).
이런 비극의 조짐은 그의 생애 도처에 있었다(참고: 삿 14:3, 16:1, 16:4 이하). 그는 서서히 무너져 간 것이다. 이 비극의 이름은 성적정욕을 통제하지 못한 자기관리의 실패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비극은 민족전체에 영향을 끼치고 말았다. 유혹은 사적인 것이지만, 죄의 결과는 언제나 개인을 넘어선다(Charles Stanley, 146).
다윗
스펄전의 지적처럼 다윗의 생의 처음 절반은 음악과 춤으로 상징되나, 그의 나머지 절반의 상징은 통곡과 좌절이었다. 무엇이 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을 무너지게 하였는가, 정욕의 범죄 때문이었다. 열왕기상의 저자인 한 역사가는 다윗과 밧세바의 사건을 가리켜 한 결정적인 오점이라고 기록한다. “이는 다윗이 헷사람 우리아의 일 외에는 평생에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더라”(왕상 15:5).
이 비극의 발단을 살펴보자. 다윗왕은 자기의 참모를 전선에 보내고 무료한 낮잠을 잔 뒤늦게 일어난다(삼하 11:1∼2). 우리는 그의 시에스터-낮잠을 비난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저녁 늦게까지 게으름을 핀 그의 낮잠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이 무장해제를 한 나태한 왕의 눈동자에 비친 목욕하는 여인은 그의 정욕의 제물로써 기막힌 유혹일 수밖에 없었다. 일찍이 청교도들은 ‘게으름은 사단의 공작실’이라고 믿었다. 통제되지 않은 일상생활의 느슨함은 다윗의 결정적 실패의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그는 얼마나 뼈아픈 대가를 지불해야 했었는가. 그는 회개했지만, 존경받는 지도자의 왕좌는 끝내 회복되지 못했다. 언제든지 회개할 수 있다는 은혜의 신학이 지도자의 실패의 구실이어서는 안된다는 처절한 표본을 다윗은 남긴 것이다.
솔로몬
3000개의 잠언과 1005편의 노래를 작곡한 솔로몬은 진정 지혜의 왕이었다(왕상 4:32). 그리고 그것은 그의 삶의 주인되신 하나님께 다른 무엇보다 지혜를 구한 응답의 삶이었다. 그는 그의 아버지의 평생의 숙원이었던 성전을 지어 주께 봉헌하였으며 그의 명성은 당대의 세계에서 회자하였다. 그의 사람됨, 그의 통치, 그의 권세, 그의 지혜는 먼 나라 미모의 여왕 시바를 그의 보좌에로 달려 나오게 할 만큼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 다윗처럼 그의 생애의 말년은 얼마나 우리 모두를 슬프게 울리는가. 그의 삶은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좋은 시작이 좋은 마무리를 보장하지 못한다는 엄숙한 예증이 되었다.
그의 우상숭배, 그의 맹목의 정치, 그의 방황은 마침내 나라를 두 동강이 나게하는 단절의 비극을 초래하였다. 무엇 때문이었는가? 이 성에 대한 욕망을 제어하지 못한 비극 까닭이었다. 그 비극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구약 시대에 어느 정도 다처의 풍습이 허용이 된 것은 사실이지만 성경은 여전히 “아내를 많이 두어서 그 마음이 미혹되게 말 것이며”(신 17:17)라고 경고하였다. 솔로몬은 이 말씀을 주의하지 않은 것이다. 마침내 이 말씀의 경고대로 “솔로몬의 나이 늙을 때에 왕비들이 그 마음을 돌이켜 다른 신들을 좇게 하였다”(왕상 11:4)고 성경은 말한다.
그리고 이런 무너짐은 그의 젊은 시절 때부터 계속되어 온 “많은 여인에 대한 정욕”(왕상 11 :1)을 통제하지 못한 마땅한 비극이었다. 흔들리던 다윗의 왕국, 찢기던 솔로몬의 왕국처럼 오늘의 교회도 지도자의 성적 욕구의 관리 실패로 흔들리고 찢기는 모습을 아프게 바라본다. 그러나 젊은 요셉이 보여준 순결한 모본은 얼마나 우리에게 격려가 되는가. 요셉에게는 하나님께 대한 경건한 두려움이 육체의 쾌락보다 더 큰 삶의 동기였던 것이다.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창39:9). 그의 도망은 거룩에로의 아름다운 도망이었다. 그리고 그 뒤 견고한 가정을 세우고 그의 가정에 주께서 베푸신 은혜를 자녀들을 통하여 증거하였다(창 41:51∼52). 성의 유혹에 대한 최선의 대비는 결국 가정에 대한 성실한 관리 곧 부부애의 관리, 그리고 유혹의 기회를 스스로 만들지 않는 철저한 자제 이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2) 물질적 탐욕에의 타락
돈으로 대표되는 물질적 탐욕은 현대의 가장 거대한 우상이다. 놀랄만한 것은 이 우상은 우리들의 교회 그리고 지도자들의 의식의 깊은곳에도 당당하게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이다. “교회가 돈을 더 밝힌다”, “돈 없이는 예수 못믿겠다더라”는 비판적 구도자들의 발언을 과연 우리는 근거없는 증상으로 일축해버릴 수 있을까.
과연 우리 교회 안에서 과부의 엽전 두 푼이 록 펠러의 십일조보다 더 존귀히 여겨지고 있을까. 가난하지만 시골의 한 영혼의 구원을 위해 애쓰는 존경받는 농촌교회 지도자가 과연, 한 달에 2000만원을 사용한다고 지적된 일이 있는 서울의 어느 대교회 목회자 못지 않게 우리 교계에서 그의 발언이 소중히 여겨지고 있을까? 우리 한국교회에서는 “주를 위해 가난하게 되는 고난을 받아 보십시오”라는 메시지가 과연 “주를 위해 한번 큰 부자가 되어 보십시오”라는 메시지보다 더 큰 아-멘을 끌어낼 수 있을까?
그러나 성경에서도 지도자들의 물질적 탐욕에로의 타락은 결코 낯선 이야기가 아니다. 그들의 타락은 우리들 타락의 경고받을 만한 충분한 샘플이요, 이 탐욕을 극복한 승리는 우리가 본받아야 할 최선의 샘플이 될 수 있다.
가롯 유다
가롯 유다는 본래 신임받는 사람이었다. 아니었다면 누가 그에게 돈궤(회계)를 맡기라고 제안할 수 있었을까?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요 13:21)고 말씀하셨을 때, 아무도 유다를 의심한 사람이 없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해 주는 것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을 기록한 저자이신 성령은 그의 인격의 본질을 이렇게 조명한다.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라”(요 12:6).
유다의 배신의 뒤안길에서 그를 조종하던 미혹의 영은 바로 이 탐심의 영이었다. 이 탐심이 마침내 은 삼십 량에 자신의 주님을 팔아버리는 반역을 기도하게 한 것이다. 그리고 이런 반역의 시작은 사단이 넣어준 ‘생각’에서부터 비롯되었다. 그는 이미 사고의 영역에서 탐욕을 자기의 주로 삼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의 영적 지도자들의 최대의 관심은 어디에 있을까? 만일 그것이 교회의 ‘헌금’이요, 내가 받을 ‘봉급’이라면 우리는 이미 유다를 비난할 자격을 잃은 것이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초대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적 교회원들이었던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은 탐심의 여러 얼굴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우선 그들은 헌금의 필요성을 알면서도 성령의 인도하심에 온전한 순종을 드리기에는 물질이 너무 아까웠던, 물질적 탐심을 극복못한 대표적 사람들이었다. 그러면서도 헌금 전체를 포기하기에는 교회의 인정에 굶주리고 있었던 탐심의 사람이었다.
아마도 그의 헌납은 사도행전 4장37절에 나타난 바나바의 헌납에 자극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헌신의 동기가 결여되어 있었던 이들은 결국 자신들을 속이고, 교회를 속이고, 하나님을 속이는 바람직하지 못한 연극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도 세상도 어느쪽도 온전히 신뢰하지 못했다. 즉 그들은 두 주인을 섬기고 있었던 것이다. 부요함은 많은 경우 하나님을 신뢰하는데 가장 큰 장애요인이며 그래서 그것은 성도의 타락의 요인이 된다(Ellul, 47).
이 타락을 극복하는 유일한 길은 켄트 휴스(Kent Hughes)의 지적처럼 아낌없이 정직하게 드리는 훈련이다. 드림의 훈련없이 경건의 성취는 없다(Hughes, 179∼180).
시몬(Simon Magus)
사도행전 8장에는 돈으로 성령을 사려고 했던 유명한 시몬의 사건이 기록된다. 초대교회에 이미 침투하던 배금주의 사상은 영적 지도자들에게 물질적인 소유로 영적 세계를 조작하려는 미혹을 초래하였다. 과연 이 사건은 오늘의 한국교회와 무관한 초대교회의 에피소드에 불과할까. 학위를 돈으로 사는 목사, 장로와 권사·집사를 돈으로 사는 평신도, 교회에 드리는 헌금, 헌납을 조건부로 교회 직분을 매직하는 오늘의 우리 교회의 모습은 시몬의 모습과 얼마나 다를 수 있는 모습일까? 도대체 돈을 받고서야 직분을 수여하고, 돈을 드리고서야 안수를 받는 형태는 누가 우리에게 가르친 경건의 모습이란 말인가? 이것은 우리가 자랑스러워한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이 가르치시고 보여준 모본과는 분명히 다른 모본이다.
바울 사도는 2∼3년 동안 목회하던 에베소 교회를 이임하면서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너희 아는 바에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의 쓰는 것을 당하여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행 20:33∼34).
“돈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아니한 중립적인 것이다-다만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문제일 따름이다” 도대체 주님은 왜 재물을 “불의한 재물”이라고 말씀하셨을까? 리차드 포스터(Richard Foster)는 돈은 결코 중립적인것이 아니며 돈의 배후에 악한 영들의 힘이 작용한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돈을 비 인격적 관점에서만 생각하는 한 그 돈을 적절하게 사용해야 하는 것에서의 도덕적 문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돈이 권세들(악령의)에 의해서 생기가 돌고 활성화 된다고 하는 성경적 견해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할 때부터 우리가 맺는 돈과의 관계는 도덕적 중대성으로 가득차게 된다”(리차드 포스터, 33).
진실로 우리가 돈을 다스릴 때 우리는 악마를 제압하는 진정한 영적 지도자들일 수 있다고 믿는다. 키케로(Cicero)의 고전적 견해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변함없는 현대적 견해이다-“돈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그런 사람이야 말로 사람 가운데 가장 존경을 받아 마땅한 사람이다.”
3) 오도된 명예심에의 타락
지혜자는 “아름다운 이름이 보배로운 기름보다 낫다”(전 7:1)고 말한다. 서양 속담에 “당신이 돈을 잃을 때 약간을 잃어버리는 것이요, 건강을 잃을 때 많은 것을 잃어버리는 것이지만, 이름(명예)을 잃을 때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는 말이 있다. 인간에게 있어서 아름다운 이름은 자신의 건강한 자아상(自我像) 혹은 자존감에 절대적 영향을 끼치는 것이요, 그를 인간되게 하는 무엇보다 소중한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모든 소중한 것이 가장 추한 것으로 변질될 수 있는 것처럼 명예심도 추하고 악한 권력추구와 안하무인격인 자기 신격화의 타락의 위험성을 언제나 동반한다. 목회보다도 단체의 높은 자리가 더 높게 보이는 지도자들, 한 영혼을 구하고 키우는 일보다도 자기 이름이 신문지상에 오르내리는 것을 더 즐기는 사람들, 묵상의 빛나는 언어로 가득한 손때 묻은 성경보다도 자기지위를 선전하는 기다란 명함을 가지고 다니는 것을 더 좋아하는 이들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이 타락의 길을 걷고 있는 이들이 아닌가 싶다. 우리는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 이 오도된 명예심에로 추락한 선배들의 얼굴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니므롯
흔히 니므롯은 바벨탑 사건의 주동적 지도자로 간주된다. 니므롯의 뜻은 ‘반역하다(torebel)’는 동사에서 유래하였다고 본다. 그는 함 가계의 영웅이었다. 우리말 성경은 그가 세상에 있는 처음 영걸이었다고 기록하였다(창 10:8). 그러나 여기 ‘영걸’의 의미는 성서학자들에 의해 긍정적 이라기 보다 부정적인 의미로 수용된다. 그는 폭력적 영웅이었던 것이다. 창세기 10장 9절에 “그가 여호와 앞에서 특이한 사냥군이었다”는 말을 개혁자 칼빈(Calvin)은 그가 여호와와 맘먹는 자세로 인간의 영혼을 사냥하던 폭군이었다고 풀이한다.
그가 선동한 바벨탑 사건의 주된 범죄는 ‘공명심’이었다. 그들은 말하기를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자”(창 11:4)고 선동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 공명심이야 말로 인간의 그 추한 권력추구의 본질적 동기라고 할 수 있다. 니므롯은 오늘도 우리네 삶과 직장, 사업과 종교의 마당을 빌려 우리 영혼을 노예로 부리며 바벨탑을 쌓고 있는 것이다.
야고보와 요한 형제
베드로를 제외하고 야고보와 요한은 우리 주님의 가장 큰 총애를 입은 제자들이었다. 복음서에서 가장 중대한사건들이 일어나고 있는 어느 현장이나 그들은 항상 주님과 함께 등장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주님과 함께 함은 하나의 특권이었고 이 특권은 그들로 하여금 더 큰 권력의 환상을 꿈꾸게 하는 동기를 제공하였다. 마침내 이들은 주께 나아와 주의 영광이이 땅의 모든 영역을 지배하는 날,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는 특권을 로비(lobby)하기에 이르른다. 여기서 끝을 모르는 권력의 허상을 우리는 발견한다.
심지어 그들은 그들의 어머니까지 동원하여 이 욕망을 달성하는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그러나 주님은 한 어린아이를 그 앞에 세우시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이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야 하며, 으뜸이 되고자 하는자는 먼저 섬기는 종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신다(막1():35∼44, 마18:1-3).
디오드레베
디오드레베는 단 한번 성경에 그 이름이 기록되어 등장하지만 그에 대한 묘사는 읽는 모든 이들로 하여금 결정적인 충격을 느끼게 한다. “으뜸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요삼9)-이것이 그에 대한 성경의 증언의 전부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에 대한 많은 시사를 생동감있게 전달하고 있다. 그는 틀림없이 로마교회의 지도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똑같이 성경에 단 한번 기록되면서도 디오드레베와 전혀 다른 평판을 얻었던 아벨레와 얼마나 대조적이었던가 ! “그리스도 안에서 인정함을 받은 아벨레”(롬 l6:10)-그는 스스로 인정을 추구했던 것이 아니라, 주께서 오히려 그를 기쁘게 인정하셨던 것이다.
공명심으로 말미암은 모든 권력욕에로의 타락은 실로 그리스도의 귀감 안에서만 새로운 치유의 빛을 얻을 수 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신 분”(빌 2:6∼8)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히려 그를 지극히 높여 호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에게 주시지 않았던가 ! 참으로 구주와 주님이신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 살고자 할 때 우리는 더이상 자기 이름을 높이고자 하는 권력의 충동에서 해방될 수 있는 것이다. 니체(Nietzsche)가 인간이 만든 모든 제도의 구조적 본질은 ‘권력에 대한 의지(will to power)’라고 본 것은 타락한 인간의 삶의 장에 대한 정확한 진단이라 할 수 있다(Eisenman, 110).
그러나 교회까지 여기에서 예외일 수 없다면 우리의 희망은 어디에 있는가. 교회와 영적 지도자들만이라도 권력의 우상 앞에 절하기를 그친다면 우리의 역사에는 비로소 정의가 강물같이 하수같이 흐를 것이다.
4) 맺는말
성경에 나타난 지도자들의 타락의 이 여러 실례들이 오늘의 우리교회의 타락 마당의 패러다임(paradigm)으로써 충분한 것들이라면 이제 우리는 이런 타락한 지도자들에게 과연 회복의 희망은 없는가를 마지막으로 물어야만 하겠다. 희망은 있다. 희망은 이제라도 우리의 타락의 현실을 자백하고 어서 속히 바로 잡을 것을 바로 잡을 때에만 꿈꿀 수 있다. 케네스 칸져(Kenneth S. Kantzer)박사는 이 회복의 과정은 반드시 1)회개 2)죄의 처리 3)회개의 열매 4)칩거(후퇴) 5)주의 재소명 등의 충분한 시간 뒤 백성들의 신뢰를 바탕으로 그의 사역과 지도력이 회복되어야 한다(Kantzer. 22)고 주장한다.
최근의 미국교회에는 짐 베이커(Jim Baker)나 지미 스웨거트(Jimmy Swaggert )같은 TV 전도자들의 성적 타락으로 큰 충격을 경험하였다. 그들은 충분한 회개 없이 서둘러 그들의 무대 위로 등장하려고 하였고 미국의 성도들과 사회는 그들을 냉정하게 외면하고 말았다. 반면 골든 맥도날드(Cordon McDonald)같은 복음적 지도자는 자기의 범죄를 아내와 교회, 크리스찬 공중에 고백한 후 1년의 충분한 회개와 칩거의 시간을 지낸 뒤 그를 상담한 위원회의 허락을 얻은 후에 설교를 시작했고 그가 전에 목회하던 보스턴의 그레이스 교회는 최근 그를 다시 교회의 목사로 재초빙하였다.
그러나 오늘의 한국교회의 떨어진 별들 가운데 얼마만큼의 지도자들이 자기들의 과오앞에 정직하게 직면하여 이를 고백할 수 있는 용기를 발휘하였는가! 지금까지 단 한 건의 정직한 자의적 고백과 교회 혹은 교계에 의한 회복의 예증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오늘도 한국교회의 뒤안길에는 자기 방어와 가시 돋힌 폭로의 악순환 속에서 점점 더 큰 절망의 그림자가 우리의 교회를 덮어가고 있다.
-장봉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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