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강해설교 작성법/ 강해설교의 정의
(Definition of Expository Sermon)
강해 설교 (講解 說敎)란 무엇인가?
강해 설교에 대해서 일가견(一家見)이 있는 것같이 행세하는 사람들은 상당히 많이 있지만, 강해 설교 분야에 있어서 이론과 실제를 겸비한 전문가는 그리 많지 않은 것이 우리의 실상인 것 같다. 강해 설교에 관한 체계적인 교육을 전혀 받아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 자기 류의 강해 설교를 '개발'해 실제는 강해 설교가 아니면서도 강해 설교의 전문가 연(然)하는 개탄스러운 모습도 많이 본다. 그러니 강해 설교에 관해서 말을 하는 사람들은 많이 있지만 정말 강해 설교가 무엇인지에 관해서 정확하게 알고서 말하는 사람은 더 적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오늘날 한국에서는 물론 외국에서도 강해 설교에 관한 관심은 상당히 고조되어 있다는 사실은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기독교 서점에 들러 서가(書架)에 진열된 책을 일견(一見)해 보면 강해 설교에 대한 인기나 관심이 어느 정도인지 그리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가 있을 것이다. 설교집이라는 설교집은 거의 예외 없이 <강해 설교집>이라고 불리고 있고, 주석 가운데서도 많은 것들이 <강해> (예, 요한복음 강해)라고 불리고 있으며, 그 외에도 <강해>라는 단어가 책의 제목의 일부로 흔히 쓰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필자가 보기에는 이런 유(類)의 저서들 가운데 진정한 강해나 강해 설교는 별로 없는 것 같고, 단순히 인기에 편승한 시대상의 반영으로밖에 볼 수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강해 설교가 무엇인가에 관한 기본적인 인식조차도 없는 설교자들이 자신이야말로 참으로 훌륭한 강해 설교자라고 착각하고 있는 안타까운 모습도 그리 드물지 않게 볼 수 있다.
그러면 도대체 강해 설교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생각하기 전에 강해 설교가 아닌 것이 무엇인지를 먼저 고찰해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1. 강해 설교가 아닌 것
많은 설교자들이 자신이야말로 강해 설교를 하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강해 설교와는 거리가 먼 경우가 너무나 많다. 여기서는 그 대표적인 경우를 몇 가지만 생각해 보도록 하겠다.
A. 종교적 담화
성경 본문과 별 관계가 없는 종교적 담화(religious discourse)는 강해 설교가 아니다.
여기에 속하는 설교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오늘날의 대부분의 제목 설교(또는 주제 설교; topical sermon)라고 할 수 있겠다. 필자는 제목 설교조차도 강해 설교라야 된다고 믿는다 (즉, 제목 강해 설교). 그런데 오늘날의 대부분의 제목 설교는 본문의 내용과는 거의 또는 전혀 상관이 없고, 설교자가 하고 싶은 내용만 늘어놓는 설교이다.
다음의 설교 아웃라인을 한 번 보자.1)
제목: 세상의 빛이신 예수
본문: 요한 복음 8:12
I. 예수님은 지적인 세계의 빛이시다.
1. 나는 예수님을 모르는 세계 최대의 학자 밑에서 배우기보다는 오두막집에 살면서 자기 이름도 겨우 쓸 수 있을 정도지만 예수님을 아는 사람에게 배우기 원한다(고전 1:21).
2. 우리가 구원받을 때 예수님은 우리 마음속에 들어오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기능도 회복시키신다. 그는 우리가 볼 수 있게 하신다.
II. 예수님은 사회적인 세계의 빛이시다.
1. 예수님은 이 나라의 여자를 여자답게 만드셨다.
2. 예수님은 세상의 어린이를 어린이답게 만드셨고, 아기들을 아름답게 만드셨다(막 10:4).
III. 예수님은 종교적인 세계의 빛이시다.
1. 그리스도인이란 자기가 자기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그리스도와 그의 보혈을 의지하는 자이다.
2. 기독교는 찬송의 종교이다. 우리 마음에 찬송이 있게 하시는 분은 예수님이시다 (고전 15:55).
IV. 예수님은 암흑 세계의 빛이시다.
1. 예수님이 계신 곳에는 항상 빛이 있었다.
2. 갈보리 십자가 상에서 그 빛은 죽어져 가는 강도의 마음속에 비쳤다. 그 빛은 그의 영혼의 암흑 상태를 제거하고, 그를 하나님 계신 천국으로 인도했다.
V. 예수님은 영원한 천국의 빛이시다.
1. 그림자가 없는 도성을 한 번 생각해 보라. 거기에는 저녁놀도 아침 햇살도 없고 항상 낮의 광채만이 있을 것이다.
2. 무덤도 없고, 죽는 사람도 없고, 고통으로 부르짖는 사람도 없고, 어느 누구도 상복을 입지 않는 영원한 도성(都城)에서 산다고 생각해 보라.
VI. 예수님은 각 개인의 빛이 되실 수 있다.
1. 그리스도를 의지하라. 당신의 인생 전체를 그에게 맡겨라. 그리하면 그는 당신의 눈물을 진주로 바꾸고, 그것을 엮어서 환희의 면류관으로 만들어 당신의 머리 위에 씌어주실 것이다.
2. 그리스도를 의지하라. 그리하면 그는 칠흑 같은 어두움을 다 몰아내실 것이다. 그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의 어두움을 다 몰아 내실 수 있다(시 23:4).
위의 설교의 아웃라인(outline)을 보면 대지의 숫자가 너무 많기는 하지만 외형상으로 볼 때 그 구성은 큰 문제가 없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문제는 설교 전체의 내용이 본문과는 별로 관계가 없다는 사실이다. 본문은 이렇다. "예수님께서 또 일러 가사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설교자는 위의 본문 전체가 가르치는 내용에는 별로 신경을 쓰고 있지 않는 것 같다. 그 대신 그는 위의 본문에서 "나는 세상의 빛이니"라는 부분에서 힌트를 얻어 그가 하고 싶은 말을 자기 마음대로 하고 있는 것이다. 위의 설교 아웃라인에서 본문의 가르침을 제대로 반영하고 있는 대지는 네 번째 대지 ("예수님은 암흑 세계의 빛이시다") 밖에는 없고, 그 외의 대지는 본문이 가르치지도 않고, 암시하지도 않고 있다. 다시 말하면, 설교자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본문과는 상관없이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설교가 강해 설교가 아님은 부연(敷衍)할 필요조차 없다.
오늘날의 소위 제목 설교라는 것은 대개가 <도약대식 설교> (jumping board sermon)라고 할 수 있다. 수영을 하기 위해 물 속에 뛰어 들어가는 방법으로 흔히 사용되는 것은 도약대에서의 다이빙이다. 그런데 일단 물 속에 들어가고 나면 도약대는 더 이상 필요 없게 된다. 설교에 있어서도 많은 경우가 이와 같다. 설교를 시작하기 위해 성경 본문을 사용하기는 하지만 일단 설교가 시작되고 나면 본문은 전혀 쓸모 없이 되어 버리고 만다. 이런 설교에 관해서 오스본(John Osborn)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종교적인 무엇인가를 언급하기 위해서 성경을 도약대로만 사용한다면 우리 가 말씀을 설교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성경을 한 번 열어보고는 곧 버리고 만다면 그것은 말씀을 소개하는 것이지 설교하는 것은 아니다. 2)
이런 설교는 좀 심하게 말하면 청중에 대한 간접적인 기만 행위이다. 하나님 말씀으로 설교를 시작함으로 설교 전체가 하나님의 말씀인 듯한 인상을 청중에게 주지만 설교 전체가 본문과는 상관이 없고 설교자 자신의 얘기로만 채워져 있다면 청중에 대한 기만 행위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제 성도들은 제목 설교에 식상(食傷)해 있다. 성도들이 교회에 가는 이유는 목사의 개인적인 견해나 단순한 종교적 담화를 듣기 위해서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하시는 말씀이 무엇인지 직접 듣기 위해서 바쁜 시간을 쪼개서 예배하러 간다. 그들의 귀중한 시간을 낭비케 해서는 안될 것이다.
제목 설교의 시대는 점점 소멸되어 가고 있다. 19세기 이전은 전반적으로 제목 설교의 시대요, 20세기는 제목 설교와 강해 설교의 혼재기(混在期)요, 만일 주님이 더디 오시면 21세기는 강해 설교의 시대가 될 것이다. 이제 설교자는 빨리 새로운 시대에 적응해야 할 것이다. 메시지는 불변이지만, 그 메시지를 전하는 방법은 시대마다 문화마다 바뀌어야 할 것이다. 새로운 시대의 요구가 비성경적인 것이라면 아무리 다수가 원해도 배격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요구가 성경의 가르침과 부합하는 것이라면 빨리 수용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래야만 살아 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시대나 문화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면 교회나 기업이나 모두 도태하고 말 것이다.
B. 문맥을 무시한 설교
설교자 가운데에는 성경 해석이나 석의에 관한 기본적인 훈련의 부족으로 인해 성경 본문의 문맥이나 본문 자체의 의미를 무시하고 자기 마음에 드는 한 두 단어를 중심으로 설교를 만드는 경우가 있다. 이런 실수는 때로 신학 훈련을 제대로 받은 설교자들도 가끔씩 범한다. 이런 설교는 앞에서 말한 제목설교와 공통점도 있지만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여기서 언급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유명한 몰건(G. Campbell Morgan) 목사가 휴가 중 참석한 어느 시골 교회에서 들은 설교는 본문이 잠언 9:5 "너는 와서 내 식물을 먹으며 내 혼합된 포도주를 마시고"이었는데, 그 시골 설교자는 이 본문으로 "성만찬"에 관한 설교를 해서 몰건 목사를 경악케 한 적이 있었다. 3)
유명한 설교자인 트루엣(Geroge W. Truett) 같은 목사도 시편 91:6 "흑암 중에 행하는 염병과 백주에 황폐케 하는 파멸을 두려워 아니하리로다"을 본문으로 해서 "인생의 중년(中年)"에 관해서 설교한 적이 있었고, 스펄전(C.H. Spurgeon) 같은 설교의 거장도 때로 문맥을 무시한 채 우화적 해석을 해서 설교한 적이 있었다. 4) 설교자는 자신이 택한 본문을 바르게 해석해서 적용해야 할 의무가 있는 자임을 절대로 망각해서는 안될 것이다.
C. 단편적인 단어의 나열
성경의 본문을 사용하기는 하되, 거기에 나오는 단어나 구절을 아무런 상호관계나 조직도 없이 단편적으로 설명해 나가는 설교는 강해 설교가 아니다.
다음과 같은 설교의 아웃라인을 한 번 보자.
제목: 하나님의 의
본문: 로마서 3:21-26
I. "이제는" (v.21)
II. "율법 외에" (v.21)
III. "하나님의 의" (v.21)
IV.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v.22)
V. "은혜" (v.24)
VI. "화목제물" (v. 25)
VII. "전에 지은 죄를 간과" (v. 25)
VIII. "예수 믿는 자를 의롭게" (v. 26)
위의 아웃라인을 보면 본문에서 특히 중요한 부분은 거의 다 언급이 된 것 같다. 그러나 이 설교는 각 대지가 <하나님의 의>와 어떻게 연관되는지, 그리고 또 대지 상호간의 관계가 어떤지, 설교 전체가 무엇을 핵심적으로 말하려고 하는지가 제대로 나타나 있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식의 설교를 흔히 강해 설교라고 생각하지만, 이것도 강해 설교는 아니다.
위에서 언급한 설교와 상당히 유사하지만 약간 다른 설교 형태가 있는데, 그것은 <나열식 주해> (running commentary)라는 것이다. <나열식 주해>는 대지 상호간의 관계가 거의 없다는 점, 어떤 핵심적 내용을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지 않다는 점으로 볼 때에는 <단편적인 단어의 나열>과 유사하다. 그러나 <단편적인 단어의 나열>은 여기저기 뛰어 넘어가면서 하지만, <나열식 주해>는 단어나 구절을 빼먹거나 뛰어넘지 않고 하나 하나 다 다루어 나가는 식의 설교이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제목: 산 제사
본문: 로마서 12:1-2
I. "그러므로 형제들아"(v.1)
II.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v.1)
III. "너희를 권하노니"(v.1)
IV. "너희 몸을"(v.1)
V. "하나님이 기뻐하시는"(v.1)
VI. "거룩한" (v.1)
VII. "산 제사" (v.1)
VIII. "드리라" (v.1)
IX.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v.1)
X.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v.2)
XI.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v.2)
XII. "하나님의 선하시고" (v.2)
XIII. "기뻐하시고" (v.2)
XIV. "온전한 뜻" (v.2)
XV. "분별하라"(v.2)
이러한 <나열식 주해>가 강해 설교와는 거리가 먼 것은 재론할 필요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설교자들은 위에서 예로 든 바와 같은 구절 풀이식 설교를 강해 설교라고 생각하고 있다.
D. 단순한 석의(釋義)
석의(exegesis)란 주어진 본문이 저자와 최초의 독자(또는 청중)에게 어떤 의미를 가졌었는가를 밝히는 것, 특히 원문을 중심으로 해서 밝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5) 그러나 이것만 가지고는 강해 설교가 되지 않는다.
예를 한 번 들어보자. 요한복음 5:1-9을 보면 38년 된 병자가 베데스다 못가에 있다가 예수님을 만나 그 병을 고침 받은 이야기가 나온다. 석의는 이 기적 자체는 물론, 기적이 일어나게 된 배경, 고침 받은 병자의 상태, 기적을 행하신 예수 그리스도 등에 관해서 자세히 취급함으로 요한이 이 기적을 기록할 때 어떤 의미로 기록했고, 요한복음의 최초의 독자가 어떤 의미로 요한의 기록을 이해했느냐 하는 문제를 자세히 취급한다. 그러나 석의는 이 기적이 오늘의 독자(또는 청중)에게 어떤 의미가 있느냐 하는 문제, 즉 적용은 취급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석의에서 끝나는 설교는 강해 설교가 아니다. 석의는 강해를 위한 하나의 과정이지, 석의 그 자체가 설교에 있어서 긍극적 목적은 아니다.
다음과 같은 설교 아웃라인을 한 번 생각해 보자.
제목: 고린도 성도에 대한 바울의 권고
본문: 고전 4:14-21
I. 고린도 성도에 대한 바울의 권고는 아버지가 자녀에게 하는 것과 같았다(vv.14-16).
1.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지 않았다(v.14).
2.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영적인 아버지였다(v.15).
3.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자신을 본받으라고 권고했다(v.16).
II. 고린도 성도에 대한 바울의 권고는 디모데와 자신의 방문으로 구체화되었다(vv.17-21).
1. 바울은 디모데를 고린도 성도에게 보내어 그의 가르침을 생각나게 했다(v.17).
2.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바울이 친히 방문해 문제를 처리하려고 했다(vv.18-21).
이 설교는 물론 설교의 형식은 갖추고 있지만 진정한 의미에서의 설교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 설교는 본문이 바울과 최초의 독자인 고린도 성도들에게 어떤 의미였는지를 밝혀 주기는 하지만 오늘날의 청중을 위한 <적용>은 완전히 배제되고 있다. 따라서 이런 설교는 석의로서는 훌륭할는지 모르겠으나 강해 설교는 아니다.
E. 관주식 설교
성경 구절만 잔뜩 나열하거나 관련 있는 구절을 꿰어서 계속 연결해 나가는 식의 설교는 강해 설교가 아니다.
어떤 설교자는 설교가 성서적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설교에서 성경을 얼마나 많이 인용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한다. 필자가 미국에서 만난 어떤 목사는 한 편의 설교에 무려 50여 개의 성경 구절을 인용해서 설교를 하고 있었다. 이런 설교는 성경 구절의 나열이지 설교라고 할 수는 없다. 성경을 많이 인용하면 설교자가 성경을 많이 알고 있다는 인상은 청중에게 줄는지 모르겠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전혀 설명이 안되고, 또 설교자가 전달하려는 중심 내용은 초점을 잃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필자는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본문 외의 성경 구절을 너무 많이 인용하지 말아야 하며, 꼭 필요해서 인용하더라도 한 번 설교에 2-3개를 초과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믿는다. 올바른 강해 설교는 본문만으로도 충분하다. 본문을 제대로 요리하지 못할 때 자꾸 밖으로 나가보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본문을 깊이 천착(穿鑿)하지 못하면 본문을 아무리 자세히 설명해도 10분 내지 15분을 초과하기 어렵기 때문에 나머지 시간을 채우기 위해서는 불가불 본문 외의 다른 구절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필자가 미국에서 공부할 때 학교 채플 시간에 설교한 어느 부흥사의 생각이 난다. 그 부흥사는 나이가 그리 많지도 않았는데 신약 성경을 완전히 다 암송하고 있다고 했다. 그때 그가 <하나님의 거룩함>에 관해 설교했었는데, 하나님의 거룩과 거룩함과 관계 있는 성경 구절을 굉장히 많이 열거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설교는 처음부터 끝까지 거의 성경으로 채워져 있었고 그 자신의 설명 같은 것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유감스럽지만 이런 설교도 강해 설교는 아니다.
필자는 위에 언급한 설교자와 같이 관주식 설교를 하면서도 설교를 상당히 은혜스럽게 하는 설교자를 몇 사람 알고 있다. 그들은 대체로 설교를 길게 한다. 필자는 설교 준비만 제대로 하면 30분 동안에 할 말을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방송 강의를 해 본 적이 있는 분들은 공감하겠지만, 15분 강의도 굉장히 길다는 생각이 든다. 관주식으로 설교를 하는 사람들은 설교의 구성을 제대로 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대체로 설교가 길어지는 경향이 있다. 이런 식의 설교는 청중이 어느 한 부분(또는 몇 부분)에서는 상당히 은혜를 받지만, 설교를 다 듣고 나면 오늘 설교가 무엇에 관한 것이었는지 잘 모르게 된다. 다시 말하면, 청중이 부분은 알되 전체는 모르게 된다는 말이다. 데이비스(H. Grady Davis)는 그의 저서 『설교의 디자인』(Design for Preaching)에서 목사와 어느 성도간의 상상적 대화를 소개하고 있는데6), 이것을 여기서 소개하는 것이 필자가 하고 있는 주장에 대한 이해를 북돋아 주리라고 본다.
성도: 목사님,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요.
목사: 아, 뭔가요? 말씀해 보세요.
성도: 저는 매 주일 교회에 와서 목사님의 설교를 듣거든요. 그 때마다 목사님의 설교를 이해하려고 무척 노력을 하는데, 때로는 제대로 이해를 못하는 것 같아요.
목사: 그러면 정확히 무엇이 문제인지 말할 수 있겠어요?
성도: 글쎄요. 정확히 무엇이라고 얘기하기는 힘이 드네요. 저는 대학을 졸업하긴 했지만 신학자는 아니거든요. 목사님의 설교에 관심은 있어요. 그러나 때로 저는 목사님의 영감에 찬 설교를 충분히 이해할 수가 없어요.
목사: 내 설교가 너무 애매한가요? 용어가 낯설고, 이해하기도 힘들고 그런가요?
성도: 아니, 그렇지는 않아요. 그러니까 더 이상하다는 거죠. 목사님의 설교는 한 마디 한 마디 다 이해를 하긴 해요. 그런데 그것들이 서로 어떻게 연관되는지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아요. 목사님이 무언가를 강력하게 전달하시려고 하는 것은 알겠는데 그것이 무언지는 잘 모르겠어요. 핵심을 잘 모르겠어요.
목사: 그 문제를 어떻게 좀 구체적으로 얘기할 수 없겠어요?
성도: 글쎄요. 조금 전에 말씀드린 대로 설교 한 마디 한 마디는 이해하는데 전체를 잘 모르겠어요. 예배가 끝난 후에 집에 돌아가서 제 아내에게 설교 시간에 들은 것들을 이것저것 얘기하거든요. 그런데 만일 제 아내가 그럼 오늘 설교의 요점이 무엇이었냐고 물으면 도무지 답변할 수가 없어요. 그게 낭패스러운 거죠.
관주식 설교는 위의 성도가 지적하는 문제점에서 완전히 탈피할 길이 없다. 관주식 설교뿐만 아니라 구성이 제대로 되지 못한 설교는 다 위와 같은 문제점에 봉착하게 된다. 그런 설교는 청중에게 나무는 잘 보여 주지만 숲은 결코 보여 주지 못하고 말 것이다. 설교자가 계속 이런 설교를 해서 성도들의 기대에 전혀 부응하지 못하고 오히려 혼란만 가중시킨다면 미구(未久)에 성도들은 이런 설교자로부터 등을 돌리게 될 것이다. 설교자가 청중을 배려하지 않는다면 청중도 설교자를 배려하지 않을 것이지만, 설교자가 청중을 존중하면 청중도 설교자를 존중할 것이다.
II. 강해 설교란 무엇인가?
A. 강해 설교의 정의
위에서 우리는 강해 설교가 아닌 것이 어떤 것인지 몇 가지 살펴보았다. 그러면 강해 설교란 무엇인가?
먼저, 몇몇 학자들의 정의를 검토해 보고 그 후에 결론을 내리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하겠다.
브로더스 (John A. Broadus)는 이렇게 정의한다:
일반적인 <강해 설교>의 정의는 이렇다: 강해 설교란 주로 본문의 강해에 치중하 는 설교이다. 본문 설교나 제목 설교를 정의하는 식으로 강해 설교를 정의한다면 설교의 대지나 그 대지의 탐구(exploration)를 본문에서 이끌어내는 설교이다. 실제로 설교할 경우, 설교의 대지와 소지는 대체로 본문에서 나온다. 환언하면, 전체의 사고(思考) 내용이 성경에서 나오는 설교이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자료를 통한 설명, 예증, 적용 등을 배제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설교의 근본적인 내용이 본문에서 나온다는 의미이다.7)
라빈슨 (Haddon W. Robinson)은 이렇게 말한다:
강해 설교란 성서적 개념의 전달인데 이 개념은 본문을 그 문맥에 맞게 역사적, 문법적 문학적으로 연구해서 나오는 것으로, 성경은 이것을 먼저 설교자의 인격과 경험에 적용시키고 그 후에 그를 통해 청중에게 적용시킨다. 8)
라이펠드(Walter L. Liefeld)는 강해 설교의 정의를 한 마디로 표현하는 대신 강해 설교의 특징으로서 다섯 가지를 제시한다.9)
첫째, 강해 설교는 하나의 기본적인 본문을 취급한다.
둘째, 강해 설교는 성서 해석학적 성실성(hermeneutical integrity)을 갖는다. 다시 말하면, 본문에 충실하다는 뜻이다.
셋째, 강해 설교는 결집성(結集性; cohesion)을 갖는다. 다시 말하면, 각 부분을 하나의 전체가 되도록 구성한다는 뜻이다.
넷째, 강해 설교는 움직임(movement)과 방향(direction)이 있다. 강해 설교는 원저자가 의도한 방향으로 청중을 끌고 나가야 한다.
다섯째, 강해 설교는 적용을 포함하는데, 적용은 본문의 목적이나 의미에서 벗어나서는 안 된다.
브래가(James Braga)는 강해 설교의 정의를 이렇게 내린다:
강해 설교란 다소 긴 본문을 하나의 주제와 연관시켜 해석하는 것이다. 설교 자료의 대부분은 직접 본문에서 이끌어 내며, 아웃라인은 하나의 주제를 중심으로 한 일련의 점진적인 사고로 구성되어 있다.10)
보먼(J. Daniel Baumann)은 강해 설교를 이렇게 정의한다:
강해 설교는 2절 이상의 성경 본문에 근거하고 있다. 주제와 대지는 본문에서 나오며, 중심 내용은 다른 성경 구절로부터 빌어오지 않고 본문으로부터 전개된다. 그것은 하나의 목표와 주제에 의해 통일성을 갖게되며, 과거와 현재의 간격을 메우려고 한다.11)
바인즈(Jerry Vines)는 이렇게 정의한다: "강해 설교는 성경의 한 단락을 강해하여 그것을 주제와 대지를 중심으로 조직해서 그 메시지를 청중에게 적용하는 설교이다" 12)
메이휴(Richard L. Mayhue)에 의하면, 강해 설교는 적어도 다섯 가지 요소를 갖추어야 한다고 한다. 13)
첫째, 메시지의 유일한 원천이 성경에 있다.
둘째, 철저한 석의를 통해 성경으로부터 메시지를 도출한다.
셋째, 성경을 그 정상적인 의미와 문맥에 맞게 정확하게 해석해 메시지를 준비한다.
넷째, 메시지는 원래 하나님이 의도하신 성경의 의미를 명확하게 설명하는 것이다.
다섯째, 메시지는 성경의 의미를 오늘날에 적용하는 것이다.
채플(Bryan Chapell)은 강해설교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14)
성경적인 개념을 탐구하는 설교이면 넓은 의미에서는 모두 강해 설교하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보다 전문적인 의미에서의 강해 설교를 정의한다면, 특정한 성경 본문으로부터 대지와 소지를 찾아서 저자의 사상을 전개하고, 주어진 본문 전체를 다 취급하면서 청중의 삶에 적용하는 설교이다.
위에서 강해 설교에 대한 몇 가지 정의를 고찰해 보았는데, 강해 설교에 대한 정의가 학자마다 다소 다르고, 따라서 그것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는 것이 결코 용이하지는 않다. 그러나 필자는 강해 설교를 이렇게 정의한다. "강해 설교란 주어진 성경 본문을 문자적 - 문법적 - 역사적- 문맥적 방법에 의해 해석하여 일정한 조직 하에 현대의 청중에게 적용시키는 설교이다." 이 정의를 자세히 분석해 보면 강해 설교의 요소로서 네 가지가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본문(text)이 있어야 한다.
강해 설교를 하려면 본문이 어느 정도로 길어야 하느냐에 따라 학자들 간에 견해차가 있다. 그러나 엉거(Merrill F. Unger)가 말한 바와 같이 강해 설교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본문의 길이가 아니라, 그 본문을 어떻게 취급하느냐 하는 것이다.15)
강해 설교의 본문은 단 한 절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말하면, 본문을 교훈 문학(didactic literature; 예를 들면, 신약의 서신들)에서 택할 경우에는 본문의 길이가 대체로 짧고, 서사 문학(narrative literature; 이야기식으로 된 부분)에서 취할 경우에는 본문의 길이가 대체로 길다. 그러나 길이가 아무리 짧아도 한 절 이상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강해 설교는 문장(sentence)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것이지, 어느 한 단어(word)나 구(phrase)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길이가 최소한 한 절 이상은 되어야 하는 것이다.16)
둘째는 해석(interpretation)이다.
해석(interpretation)이란 간단히 말하면 본문의 의미를 밝히는 것이다. 본문의 의미란 물론 저자의 의미이지, 독자나 해석자의 의미가 아니다. 의미의 결정자는 어디까지나 저자이다. 의미의 결정자로서의 저자가 해석의 현장에서 추방되어 버리면 해석학적 무정부 상태(hermeneutical anarchy)는 불가피하게 되고 말 것이다.17) 이러한 저자의 의미는 본문에 나타나 있으며, 이것은 문자적 - 문법적 - 역사적- 문맥적 방법으로 밝혀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화적 해석법(allegorical method of interpre- tation)은 결코 올바른 해석법이 될 수 없다.
문자적 - 문법적 - 역사적- 문맥적 해석법만이 가장 타당한 해석법이고 이를 통해서만 본문의 진정한 의미를 밝혀낼 수 있다. 본문에 충실한 설교가 되기 위해서는 본문의 의미를 바로 밝혀내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본문을 해석하는 과정이 올바르지 않으면 진정한 의미의 강해 설교는 불가능하게 되고 만다. 잘못된 해석은 필연적으로 잘못된 설교로 귀착되고 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성경 해석 원리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의 부족으로 인해 설교자들은 굉장히 많은 오류를 범하고 있다. 18)
셋째는 조직(organization)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당신의 형상(Imago Dei)을 따라 이성적 존재로 창조하셨기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과 마찬가지로 질서에의 갈망이 있다. 인간은 비논리적인 것보다는 논리적인 것을, 비조직적인 것보다는 조직적인 것을, 무질서한 것보다는 질서정연한 것을 향해 나아가려 한다. 똑같은 내용의 설교라도 아무런 조직도 체계도 논리도 없이 횡설수설하는 설교보다는 이로정연(理路整然)하게 조직된 설교를 청중은 훨씬 더 잘 이해하게 된다.
구성의 필요성은 설교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모든 연설은 다 체계적인 구성을 필수적으로 요구하며, 넓은 의미에서 연설의 일종인 설교도 역시 구성을 필요로 한다. 플루하티(George W. Fluharty)와 로스(Harold R. Ross)는 그들의 공저 『대중 연설』(Public Speaking)에서 조직(또는 구성)에 관해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훌륭한 연설은 잡다한 생각(idea)이나 세목(細目; details)의 집합체가 아니라 조직된 전체(organized whole)이다. 일관성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연사(演士)는 조직되지 않은 생각들을 잘 기억해서 전달할 수 없고, 청중은 뒤죽박죽이 된 생각들을 기억해서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체계화시킬 수 없다. 이와는 정반대로 생각들이 통일성 있게 구성되면 청중은 연사의 말에 주의를 기울인 대가를 받게 된다. 즉 상호 연관성이 없는 세목(細目)들로 인해 주의를 빼앗기는 일이 없게 되고, 연사가 전달하는 중요한 내용들을 구별해 낼 수 있게 된다. 19)
그렇기 때문에 연설가나 설교자는 자기가 하고자 하는 말을 논리적으로 일관성 있게 조직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청중으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기가 힘들 것이다.
넷째는 적용(application)이다.
성경과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사이에는 엄청난 장벽이 있다. 언어적 장벽, 문화적 장벽, 역사적 장벽, 지리적 장벽, 철학적 장벽 등 양자 사이의 장벽은 너무나 크다. 그러나 그 장벽은 뛰어넘을 수 없는 장벽이 아니고, 그 간격(gap)은 건널 수 없는 간격이 아니다. 이 상이한 두 세계를 연결시켜주는 교량 역할을 담당하는 자가 바로 설교자이다.
두 개의 상이한 세계를 연결시켜주는 교량 역할이 제대로 수행되지 못하면 2,000년 이상 된 성경의 메시지는 20세기 말에 한국에 사는 청중들에게 아무런 의미를 주지 못한다.20) 적용이란 바로 2,000년 이상 된 성경의 메시지를 오늘날의 청중에게 의미 있게 만들어 성경의 메시지가 바로 청중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것을 청중으로 하여금 깨닫게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적용이 없는 설교는 그 중심 목적을 잃어버린 설교인 것이다.
B. 강해 설교의 종류
전통적으로는 설교를 강해 설교(expository sermon), 본문 설교(textual sermon), 제목 설교(topical sermon)로 구분하나, 필자는 이러한 구분 자체가 별 의미가 없다고 본다. 필자는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강해 설교는 물론 모든 설교가 다 강해 설교라야 된다고 믿는다. 스타트(John R. W. Stott)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강해 설교를 여러 가지 설교 중의 하나로 분류하는 것에 만족할 수 없다. 모든 진정한 기독교 설교는 강해 설교라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21) 릿핀(A. Duane Litfin)도 필자의 견해와 대동소이하다: "엄밀한 의미에 있어서 강해 설교가 아닌 것은 전혀 설교가 아니다." 22)
강해 설교의 종류에 대해서는 학자에 따라 다소 견해차가 있겠지만, 필자는 이를 크게 셋으로 나누어 설명하고자 한다.
첫째는 본문 강해 설교이다.
이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강해 설교>라고 할 때 의미하는 설교이다. 즉 어떤 한 본문을 택해서 그것을 연구하여 본문 자체에서 대지를 찾아내 설교하는 형식이다. 본서는 바로 이 형식의 강해 설교를 취급하기 위해 저술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강해 설교는 성경의 어느 한 책을 택해서 그것을 차례대로 설교해 나가는 방식일 수도 있고, 아니면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성경의 어느 부분에서든지 본문을 택해 설교하는 방식일 수도 있다. 어느 방식을 택하든 그것은 설교자의 자유이겠지만, 필자는 전자(前者)의 방식을 주로 하면서 필요에 따라 수시로 후자(後者)를 활용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둘째는 제목 강해 설교이다.
이것은 흔히 말하는 제목 설교(topicl sermon)와는 유사한 점도 있지만 상이한 점도 있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제목 설교란 설교자가 제목 또는 주제를 먼저 정한 후 대지는 그가 원하는 대로 정해서 하는 설교를 가리킨다. 여기서 필자가 말하는 제목 강해 설교(topical expostitory sermon)는 제목이나 주제를 설교자가 정하고 대지의 선택도 상당한 정도로 설교자의 주관에 의해 좌우된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제목 설교와 유사하다. 그러나 제목 강해 설교가 일반적인 제목 설교와 크게 다른 점은 각 대지도 본문의 가르침과 일치해야 된다는 것이다.
제목 강해 설교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순서로 구성해 나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1. 먼저 주제 또는 제목(topic)을 정해야 한다. 그 범위는 신학적인 문제일 수도 있고(예: 속죄, 칭의, 성결, 재림 등),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관련된 이슈(issue)일 수도 있고(예: 이혼, 재혼, 낙태, 불안, 분노, 열등감 등), 그 외의 문제일 수도 있다. 어느 것이든 간에 설교자가 생각할 때 청중에게 필요한 주제 같으면 문제가 없을 것이다.
2. 선택한 제목과 관련된 성경 구절을 수집해야 한다. 성구 사전(concordance)이나 성서 사전 등을 사용하여 제목과 관련된 성경 구절을 모은 후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나 성도들에게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구절을 3개 또는 4개 선택을 해야 한다. 제목 강해 설교는 본문 강해 설교와 달리 본문이 여러 개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3. 일단 본문을 선택하고 나면 그 본문을 하나 하나 문맥에 맞게 해석하고 연구해야 된다.
4. 해석하고 연구한 본문이 선택한 제목과 어떻게 연관되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5. 마지막으로 각 본문으로부터 대지를 도출(導出)해 내고 그것을 논리적인 순서로 또는 설교자가 생각할 때 가장 바람직한 순서로 배열해야 한다.
다음과 같은 설교 아웃라인을 한 번 생각해 보자.
제목: 충성된 종
본문: 고전 4:2
I. 충성된 종은 말씀을 전파해야 한다.
II. 충성된 종은 영혼을 사랑해야 한다.
III. 충성된 종은 주님을 위해서만 살아야 한다.
IV. 충성된 종은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위의 설교의 경우, 설교의 구성은 문제될 것이 없지만, 각 대지가 어디서 나왔는지가 문제된다. 대지의 내용 가운데 어느 하나도 잘못된 것을 포함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그것이 어느 주어진 본문의 해석을 통해서 나온 것이 아니라 설교자가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위의 설교는 전통적인 의미의 제목 설교이지 제목 강해 설교는 아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설교의 아웃라인을 한 번 생각해 보자.
제목: 그리스도의 피
본문: 벧전 1:19; 히 10:19; 마 26:28; 계 12:11
I. 피의 가치: 피는 하나님께 보배로운 것이다(벧전 1:19).
II. 피의 효능
A. 피는 우리를 하나님께 나아가게 하는 기초이다(히 10:19).
B. 피는 우리의 죄를 용서한다(마 26:28).
C. 피는 우리로 하여금 승리하게 한다(계 12:11).
위의 설교는 제목 강해 설교인데, 이 설교는 본문이 넷이다. 그러나 각 대지 및 소지는 본문의 가르침과 일치하고 있다. 제 1대지, 즉 "피는 하나님께 보배로운 것이다"는 내용이 베드로전서 1:19의 해석에서 나오는 것은 재론할 필요가 없다. 제 1대지는 물론 제 2대지의 각 소지도 히브리서 10:19; 마태복음 26:28: 요한계시록 12:11의 해석에서 나오는 것은 물론이다.
제목 강해 설교도 탄탄한 석의적 바탕 위에서 올바로 할 경우에는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자칫 잘못하면 설교자의 주관이 너무 강하게 개입될 수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필자도 제목 강해 설교를 하기는 하지만 그 빈도는 본문 강해 설교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낮다.
셋째는 전기(傳記) 강해 설교이다.
전기 강해 설교는 앞서 취급한 제목 강해 설교와 같으나, 단지 그 내용이 어느 인물의 흐름을 취급한다는 점에서 다를 뿐이다. 전기 강해 설교는 물론 그 제목(topic)을 어느 인물의 생애 내에서 택해야 할 것이다. 전기 강해 설교 가운데 흔히 많이 취급되고 있는 인물은 아브라함, 모세, 다윗, 야곱, 요셉 등이 있지만, 그 외에도 취급할 인물은 상당히 많으므로, 설교자가 필요에 따라 선택을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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