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학

[스크랩] 선교의 개요

수호천사1 2009. 11. 8. 21:53

선교의 개요

 

 

-들어가는 말-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면서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당부하신 말씀은 바로 '선교'(mission)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19,20). 예수께서 부활하신 이 선교의 핵심은 죄의 구렁에 빠진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강한 의도를 깊이 내포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선교의 가장 중심적인 주제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며 그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복음(Gospel)인 것이다. 따라서 선교의 저변에 깔려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복음 선포이며, 그 복음 선포는 사람의 살아감의 전반적인 역사 과정에서 표출되는 본질적인 양식인 것이다. 특별히 현대 사회처럼 복음의 본질이 왜곡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퇴색되어 가는 교회 현실 속에서 선교(mission)의 올바른 의미를 생각하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다. 형식과 알맹이 없는 큰 소리만으로 가득 찬 오늘날의 교회가 근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명령인 선교를 돌아보고 그 깊은 뜻을 찾는 것은 바로 마지막 시대인 오늘, 교회가 마땅히 감당해야 할 의미 있는 행위(action)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이러한 근본적인 취지를 갖고 본서에서 선교론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겠다.

 

 Ⅰ. 선교의 개념

 

 "선교란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기계적으로 복종하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또한 어떤 공동체(Gelatined)의 존재를 위한 의무적 행위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선교란 구원받은 전 피조물들 위에 예수 그리스도의 절대적인 주권을 올바로 세우려고 하는 포괄적인 목표를 가지고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는 것이다. 우리가 임하는 선교의 가장 큰 의미는 그것이 하나님의 일이며, 인간인 우리가 하나님의 일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위의 말은 빌링겐(Willingen) 회의에서 채택한 선교의 개념이다. 선교란 구주로 고백하는 공동체와 개인이 구체적으로 감당해야 할 일이며, 그것의 가장 근본적인 의미는 하나님의 일, 즉 하나님 나라의 일을 수행한다는 데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본질적으로 선교란 소명 받은 인간의 일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일이며 하나님께 속한 활동인 것이다. 하나님은 만물의 창조주이시며, 명령하시는 분이며, 존재하는 모든 것을 주재하시는 분이다. 선교란 하나님께서 당신이 지으신 세계에서 자신의 뜻을 펴 나가는 구체적인 방법이며 실천적인 행동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선교를 말할 때 '교회의 선교' 혹은 '우리들의 선교'라는 말조차 해서는 안 된다. 교회는 선교가 하나님의 사랑에 기초를 두고 있고 인간들의 독립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님을 명백히 할 때 교회와 선교의 관계를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교회와 선교는 둘 다 하나님의 도구요,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교회가 겸허하게 하나님의 선교적 의지에 순종할 때 비로소 교회는 자신의 선교적 사명에 대해서 말할 수 있다. 이는 본질적으로 교회의 선교적 사명이 하나님 자신의 선교에 의거하기 때문이다.


 교회는 하나님에 의해 사용될 수 있을 때에만 하나님의 도구가 될 수 있다. 만일 교회가 하나님의 일을 거절한다면 교회는 하나님의 뜻을 불복종하는 것이고 그 교회는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 교회가 될 수밖에 없다. "세계를 향한 그리스도(성자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지 않고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을 가지 못한다"(Vercoroff). 또한 교회는 그 자신이 선교를 수행하려고 하는지 않는지를 결정해서는 안 되고, 오히려 그 자신이 교회가 되려고 하는지 않는지만을 결정할 수 있을 뿐이다. 교회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선교가 실행되는지를 스스로 결정할 수 없다. 왜냐하면 선교는 언제나 하나님의 이끄심에 의한 것이며, 이 사실은 무엇보다도 사도행전이 우리에게 잘 가르치고 있다. 하나님의 일로서 선교란 하나님이 그의 사랑을 모든 사람들에게 그를 믿는 자들을 통해 나누어 주시기를 원하는 만큼, 그를 믿는 모든 자들에 대한 주권, 즉 치리권을 요구하신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 스스로에 의해 선교를 성취하심으로써 이러한 요구를 분명히 하신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이미 행하시고 있는 일을 따라 순종할 뿐이며 또 그가 무엇을 하든지 그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이렇게 선교는 하나님 자신의 일하심을 근거하고 있다.


 하나님의 일인 선교는 그의 독생자 예수를 이 세상에 보내 준 사건으로부터 말미암는다.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세계에 성육하심으로써 선교는 '보냄'(sending)의 속성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은 보내시는 분임과 동시에 보냄을 받는 분이시기도 하다. 따라서 모든 선교의 실천은 하나님의 보내심(sending)에 의거하며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그 근원적인 기초를 두고 있다. 이에 대해서 어거스틴 이래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의 보냄 혹은 선교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는 보냄을 하나님의 내적 근본 질서에 근거하여 하나의 신적인 품격 (person)을 다른 또 하나의 신적인 품격을 통해 피조물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라고 이해한다"(M. schmaus).


 우리 인간은 모든 측면에 있어서 인간과 관계를 맺으시는 하나님의 행동으로부터만 이해될 수 있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비밀 앞에 서 있는 존재이다. 선교의 선상에서 가장 큰 신비는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보내시고 아버지와 그 아들은 성령을 보내셨다는 사실이며, 이로 인해서 선교가 생명력 있게 곳곳에서 실천되고 있다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하나님의 내적인 파송의 과적은 선교에 있어서 교회의 직무와 연관하여 깊은 의미를 지닌다. 왜냐하면 교회의 본질적 위상은 하나님의 일 속에 의존하고 있고 봉사는 하나님의 사역에 의해 이미 주어져 있으며 그 직무의 의미와 내용은 하나님의 선교로부터 규정되어지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 자신의 일인 선교를 통해 자신이 절대적인 주권을 지닌 주님이심을 나타내신다.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장애에도 제약받지 않으신다. 이렇게 하나님은 어떤 인간적인 방법들로써 집근한 수 없는 방식으로 스스로의 의지를 가지고 존재하시며 역사하신다. 하나님의 모든 행동과 존재양식은 인간의 영역밖에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교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절대적이고 독특한 주권의 표현이고 인간에게 주시는 계시라고 할 수 있다.


 성서는 언제나 하나님을 인간과의 관계에서 서술하고 있다. 그러므로 선교에 있어서 하나님의 계시는 어느 경우에서나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나타난다. 하나님께서는 그 자신의 행위를 통해 자신을 계시함과 동시에 인간에 관해서 말씀하신다. 그는 인간을 심판 아래에 두심으로써 그의 사자 즉 예언자들을 통하여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을 선포한다. 그러므로 선교란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한 구원을 선포하심으로써 하나님의 구원활동을 지속해 나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의 구원활동은 이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관계이고 인간과 함께하시는 은혜로서 그것은 '보내심(sending)'이라는 동적인 개념으로 쓰인다. 이른바 하나님의 선교란 하나님의 창조와 활동을 나타내는 전체적인 개념이며 그렇기 때문에 전체의 구원사는 바로 하나님의 선교 역사이다(W. Kohlhammer).

 

 Ⅱ. 초대교회의 선교


 초대교회에 있어서 선교는 교회의 본질적 요소이며 임무이다. 당시의 교회는 선교 외에는 거의 하는 일이 없었다. 초대교회의 지상 과제에 대해서는 신약성서의 여러 부분에서 많이 언급하고 있다(참조;마:18-20;막16-15;눅24:46-49;요20:21;행1:8). 교회라는  어휘는 복음서에서 2회밖에 언급되지 않는다. 그리고 사도행전에서 기독교적인 의미로 사용된 것은 행5:11과 행8:1에서이다.


 신약 시대의 교회들은 자신들을 이스라엘에게 주신 언약의 상속자로 여기고 있다. 그래서 구약의 이스라엘은 신약에서 '교회'로 바뀌어진 것이다. 이러한 개념은 주께서 친히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의 개념이나 사도들의 성만찬 교훈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어거스틴은 천국을 지상의 교회와 연결시켜서 생각하고 있다. 또 그러한 교회에 대한 개념은 칼빈에게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로 나타나고 있다. 칼빈의 교회론, 하나님 나라론의 개념을 보면 결국 지상에 있는 보편적인 교회와 눈으로 볼 수 없는 불가시적인 교회와 천국을 연결시키고 있다.


 초대교회의 사도들은 예수님의 지상 명령을 받고서는 그 즉시로 그들의 국경을 넘어서 선교에 임한 것은 아니었다. 오순절 성령 사건이 있은 뒤에도 해외에 선교하는 일에 대해서 그리 적극적이지는 않았다. 스데반의 순교가 있으면서부터 신약 시대는 본격적인 선교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사도행전에는 베드로와 바울의 선교를 중심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역사적인 기록들을 보면 안드레는 흑해 연안의 스구디아에 선교를 했고,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는 스페인 선교를 했으며, 요한은 에베소에서, 빌립은 가울에서, 바돌로매는 히에라폴리스에서, 도마는 인도에서, 마태는 이디오피아에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는 예루살렘에서 순교의 제물이 되었고, 유다는 바돌로매와 함께 아르메니아에서 전도하였으며, 가나안인 시몬은 애굽, 구레네, 아프리카 등에서 선교를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모두 다 선교사들이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들은 곳곳마다 교회를 설립하는 데 그치지 않고, 설립한 교회를 성장시키고 사회 속에서 특별한 역할을 하도록 이끌었다.


 바울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주장함으로써 교회가 그리스도의 사역을 담당하여야 할 주체임을 말하고 있다. 따라서 예수께서 하신 사역을 말하고 있는 마4 : 23은 곧 교회가 담당해야 할 일인 것이다. 예수께서 지상에서 하신 일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 전파와 병든자와 약한 자들을 위한 헌신적인 봉사였다. 이것을 우리는 복음 전파와 사회 봉사라는 말로 축약할 수 있다. 이 두 부분을 우리는 통상 선교의 영역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복음 전파와 사회봉사가 별개의, 혹은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올바른 하나님 나라를 나타내는 하나의 일의 두 측면이라는 사실이다. 주님의 복음 전파가 실천의 또 다른 형태로 나타난 것이 사회 봉사인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의 교회는 사회봉사를 거의 등안시하고 있다. 교회가 사회를 위하여 마땅히 해야 할 부분의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 일이 주님께서 보여 주신 선교(mission)의 한 모습임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뜻을 설천하지 않고 있다. 오늘날 교회가 이처럼 사회에 봉사하지 않기 때문에 불신자들에게는 교회가 아주 이기적이고 자기밖에 모르는 단체로 생각되는 것이다.

 

 Ⅲ. 복음주의 선교 신학의 최근 동향

 

 세계 신학의 조류에서 1970년대 이후 특히 1974년 이후 복음주의 신학은 상당히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기존의 복음주의 신학이 가지고 있던 선교 신학에서 상당히 많은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기독교를 개인적으로만 이해하던 경향에서 기독교를 전인격적이고 전체적인 차원에서 이해하기 시작했으며, 그 동안 백안시했던 사회에 관한 관심이 더욱 커져서 선교의 영역을 사회로까지 확장해 가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W.C.C.의 에큐메니칼 신학은 1961년 제3차 뉴델리 총회에서부터 적극적이고 보다 근본적인 사회 참여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봉사의 본질과 형태 문제를 취급하면서 교회는 근본적인(radical) 형태의 정치 사회 참여를 통해 봉사의 과업을 수행해야 한다고 했다. "교회는 인종의 평등과 정의를 위해 적극적으로 투쟁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그리스도인들은 한 가화, 중재, 반항, 경제적 제지, 비폭력적 행동 및 혁명 세력들과 연대해야 한다. 교회는 역압과 멸시와 차별적 대우가 존재하는 곳에서 정의의 성취를 위해 싸우고 있는 억압받는 인종과 자신을 동일시해야 한다. 교회는 이와 같은 투쟁을 인도해야 한다"고 그들은 말하고 있다.


 최근까지 복음주의자들은 전도와 복음 선포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사회 선교나 사회참여에는 소극적인 자세를 취했었다. 어쩌면 그것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등장한 사회복음주의에 대한 반향일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사회복음주의자들은 하나님나라의 역사를 일반 역사와 동일시하며 사회적인 문제를 그 중심 주제로 삼고 있었다. 그들은 이 역사선상에서의 유토피아(Utopia)를 추구했으며 교회도 역시 그러한 것을 구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와 반대 방향에서 복음주의자들은 더욱더 극단적인 복음주의를 강조하기 시작했다. 그 대표적인 지도자라고 할 수 있는 빌리 그래함은 교회와 사회, 정치 참여를 전적으로 부정하며 개인의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 기독교의 진리라고 역설하였다. 따라서 그는 개인의 전도와 개인의 윤리적 삶을 격려하는 것을 교회의 지상 과제로 여겼다.


 그러나 1970년대 초부터 복음주의 내에서 강력한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1969년에 미네아 폴리스에서 개최된 복음대회에서 성서적 사회활동이 이미 주창되기 시작했고, 급기야 1973년 에 '시카고 선언'을 통하여 본격적인 복음주의 사회화를 주장하고 나섰으며, 1974년 '로잔 언약'에서는 적극적인 사회 참여를 통한 사회의 복음화를 강력하게 주창하였다. 실로 놀라울 만치 급격한 복음주의 내에서의 이러한 변화는 기존의 복음주의 신학과 선교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다시 정립할 수 있도록 자극했다. 이제 비로소 신학이 사회, 경제, 정치 문제를 자기 문제로 삼고 고민하고 씨름해야 할 문제임을 깨닫기 시작했다. 이러한 것은 복음주의 신학 자체 내의 자기 성찰과 노력의 대가로 빚어진 결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이제 복음주의가 새롭게 선교의 장으로서 사회를 받아들인 몇 가지 선언들을 요약해 보기로 하자.

 

 1) 시카고 선언


 시카고 선언은 론 사이더(Ron Sider)의 주도하에 1973년 11월 시카고에 집결한 50여 명의 복음주의 지도자들에 의해 작성된 선언문이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함께 기독교인의 사회·경제·정치 참여의 필요성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정의를 요구하심을 인정한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를 불의한 사회에 선포하지 않았고 표명하지도 않았다. 주님은 우리로 하여금 가난하고 억눌린 자의 사회·경제적 권리를 변호하라고 부르셨지만 우리는 그저 침묵을 지켜왔을 뿐이다. 우리는 미국의 교회가 역사적으로 인종 차별에 관여해 온 것을 탄식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복음주의 기독교인 형제들이 회개를 표명하며 우리나라의 정치·사회적 불의와 맞서야 할 것을 촉구한다. … 우리가 이 선언을 함으로 어떤 정치적 이데올로기나 정당을 지지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이 나라의 지도자들과 백성들이 나라를 높이는 의를 추구하기를 촉구하는 것뿐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그의 나라를 완성하실 것이라는 성서의 소망을 가지고 이 선언을 하는 바이다."

 

 2) 1974년 로잔 언약


 존 스타트(J. Stott)의 주도하에 작성되었고 '로잔 세계 복음화 국제대회'에 참석했던 복음주의자들에 의해 서명된 '로잔 언약'은 복음화의 우선권을 인정하는 동시에 복음화와 그 복음의 사회 참여의 불가분리적 관계를 강조함으로써 복음주의 신학이 사회 참여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게 되는 획기적인 전환점을 만들었다. 그들은 제5항 '크리스천의 사회적 책임'에서 20세기의 서구 복음주의 전통이 사회 복음주의(혹은 기독교 사회주의)에 대한 반발로 "크리스천의 사회적 책임을 등한하 하고 복음화와 사회적 관심을 상호 배타적인 것으로 간주해 온 것을 참회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복음화와 사회·정치적 참여가 기독교인의 임무의 두 가지 부분임을 주장한다."고 천명했다. 로잔 언약은 크리스천의 사회적 책임이 하나님과 인간과 구원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올바른 신학적 이해에 근거하고 있음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기독교인의 사회적 책임이 무엇보다도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신앙에 근거한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이 모든 인류의 창조주이며 심판주이심을 확신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류 사회 안의 공의와 화해를 위한 하나님의 관심에 동참해야 하며 모든 억압으로부터의 인간 해방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에 동참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다음에 인간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기독교인의 시회적 책임을 요청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심을 받았기 때문에 모든 인간은 인종, 종교, 색깔, 문화, 계급, 성, 연령에 상관없이 본질적인 존엄성을 지니고 있으며, 따라서 존경과 봉사를 받아야 하며 착취를 당해서는 안 된다." 그 다음 권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사회적 책임에 대한 올바른 입장을 갖게 한다고 지적했다.


 이에 로잔 언약은 인간의 화해가 하나님과의 화해가 아니며 사회적 참여가 복음화가 아니며 정치적 해방이 구원이 아님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구원은 곧 죄로부터의 구원이며 하나님께서 인가들을 죄로부터 구원하기를 원하시고, 죄와 불의를 미워하시고 심판하심으로 기독교인들도 죄와 불의에 대항하고 고발하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끝으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불의한 세상에서 그의 나라와 의를 실현하는 변혁적인 사회 참여의 삶을 격려한다고 했다. 로잔 언약이 표명한 사회 참여에 대한 적극적인 입장은 오늘날 한국 복음주의 교회들이 받아들일만한 바람직한 포괄적인 사회 참여의 입장이라고 생각된다. 단지 복음화의 책임과 사회 참여의 책임을 동반자적으로 보는 적극적인 입장이 어디까지나 복음화의 우선권을 강조하는 복음주의적 입장이 전제되어질 때 바람직한 것이며, 만약 이 전제가 허물어질 때 인도주의적 내지는 사회주의적 참여의 행동 신학을 정당화할 위험성을 내포할 수도 있다고 하겠다.

 

 3) 1982년 '복음화와 사회적 책임' 로잔 W.E.F 대회


 1974년 로잔에서 선언된 복음화와 사회 참여와의 관계에 대한 입장을, 그 이후 논의되고 결의된 여러 견해들에 비추어 재분석하고 재천명하기 위한 모임이, 1982년 미국 그랜드래피드에서 로잔과 W.E.F 공동 주최하에 '복음과 사회적 책임'이라는 주제로 모였다. 실상 1974년 이래로 복음주의 내에서는 우파적 경향과 좌파적 경향이 서로 갈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파적인 부류들은 로잔 언약의 내용을 받아들이기를 꺼려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있어 로잔 언약은 복음주의를 부정하는 것처럼 보여졌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두 경향간의 갈등을 극복하고 복음화와 사회적 책임간의 관계에 대한 중요한 문제에 대해 복음주의자들이 분열되는 것을 막고, 이 주제에 대한 보다 심도 있는 논의로 통일되게 하려는 모임이 바로 이 모임이었다. 여기서 이들은 "복음화와 사회적 책임에 대한 복음주의적 확약" 이라는 선언문을 채택함으로써 복음화와 사회적 책임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는 사실을 재천명하였다. 이 두 가지는 근본적으로 그리스도의 사역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목적이 개인의 구원에만 국한되지 않고 창조 세계의 궁극적 회복에까지 확장된다고 지적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회활동은 복음화의 결과와 목표로서 복음화를 뒤따르고 복음화의 다리로서 복음화를 선행할 뿐 아니라, 복음화의 동반자로서 함께한다. 그것은 가위의 두 날이나, 새의 두 날개와 같다. 이 동반 관계는, 복음을 선포하셨을 뿐 아니라 주린 자들을 먹이시고 병든 자를 고치셨던 예수님의 공생애의 사역 가운데 잘 나타난다. 그의 사역 가운데 선포와 봉사는 하나로 병행되었다. 그는 또한 우리를 선포하고 봉사하도록 세상에 내보내셨다. 이것은 그것들이 서로 통일시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복음 전도는 사회적 책임이 아니며, 또 사회적 책임이 복음 전도 그 자체는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두 각각은 상대방을 수렴하고 있다."


 김명혁 박사는 위의 복음주의적 사회 참여를 근본적으로 받아들이면서도 자칫하면 범할 수 있는 과오의 가능성을 다음과 같이 몇 가지로 정리하고 있다.


 첫째, 구약에 모형으로 비유된 의와 평화를 근간으로 하는 하나님 나라의 특정이 물질적 부요, 국가적 번영, 사회적 평등과 공의 실현 등으로 묘사된 것을 문자적으로 신약에서 그대로 반영하려는 실수를 범할 수 있다. 구약과 신약의 관계는 일치나 반복이나 재연이 아니라 예유적 성취 내지는 본질적 변혁이라고 하겠다. 따라서 구약에 묘사된 물질적 번영과 국가·사회적 차원의 공의가 문자 그대로 성취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신·구약의 관계를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 하겠다. 신약에서 성취된 하나님의 나라는 물질적·국가 사회적 차원을 내포하면서도 그것을 넘어서는 초물질, 초국가·사회적 내지는 영적 차원의 나라라고 하겠다. 또한 참여에 대한 적극적인 자세가 해방신학에서 볼 수 있는 대로 지금 부분적으로 성취되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표현으로 나타나는 사회, 정치적 현상의 특정을 종말론적으로 완성된 하나님 나라의 특정과 동일시하려는 잘못을 범하게 할 수도 있으며, 그 결과 종말론적 기대를 약화시킬 수도 있다. 현세와 종말과의 관계는 일치나 반복이나 재연이 아니라 예표적 성취 내지는 본질적 변혁이라 하겠다. 따라서 사회적 정의를 성취하기 위한 현세적 인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분명히 한계가 있음을 솔직히 시인하면서 종말론적 성취를 바라보며 실재론적으로 사회 참여의 과업을 수행해야 할 것이다.


 둘째, 사회 참여를 적극적으로 강조하는 복음주의적 신학이 일부 행동주의적 복음주의 신학에서 볼 수 있는 대로 복음화의 우선권은 부인하고 열의를 약화시키며, 성서적 복음 자체보다 사회·정치·경제적 삶의 정황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잘못을 범할 수 있다. 그리고 사회 참여에 대한 집착이 W.C.C. 에큐메니칼 신학이 주창하는 인본주의적 내지는 사회주의적 행동 신학의 근본적인 신학적 오류를 간과하고 이에 동조하는 심각한 신학적 오류를 범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경향은 결국 복음화의 정열을 냉각시킬 뿐만 아니라 성서적 복음 신앙을 변질시킬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하겠다. 행동주의적 복음주의 신학의 대표자격인 교리에 집착하지 말고 우리의 구체적인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전적인 관심을 기울이고 이를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한 일이 있다. 또 올란도 코스타스(orlando E. Costas) W.C.C신학의 입장을 지지하고 나서기도 하였다. 따라서 복음주의 신학은 사회 참여의 복음화의 신학은 사회 참여의 복음화의 우선권을 견지하는 범위 내에서 그리고 W.C.C에큐메니칼 신학의 오류를 분명히 파악하는 입장에 서서 실천해 나가야 할 것이다.


 셋째, 사회 참여를 적극적으로 강조하는 복음주의 신학이, 교회와 성직자가 교회와 성직자로서의 본분을 망각하고 사회·정치·경제 각 분야에서 전문가로 자처하고 행동하게 하는 혼동의 문제를 야기시킬 수 있다. 성직자는 사회학자나 경제학자가 되기에 앞서 우선적으로 복음 사역자로 부름받았으며, 교회나 총회는 국회가 되기에 앞서 하나님 나라를 세상에 실현하고 확장해 나가는 천국 실현의 사명을 받았다. 교회와 성직자는 교회와 성직자의 이름으로 사회·경제·정치 각 분야에 대해 신앙적 및 윤리적인 진단과 비판과 충고를 하는 것이 타당하며, 그 각 분야의 전문가로 활동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그런 각 분야에서 직접적으로 종사하며 그가 처한 분야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실천하려는 사람은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훈련과 부름을 받은 그리스도인 또는 단체라고 하겠다. 정치·사회 참여의 은사를 특별히 소명으로 받아들이는 성직자는, 마땅히 성직을 사면하고 자기가 받은 은사와 소명의 분야에 투신함으로써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이바지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의 복음주의 교회는 이제 이 어려운 문제를 올바르게 정립하려는 구체적인 노력이 절실히 요청된다. 이를 위해서는 과감한 자기 성찰과 자기 정립이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Ⅳ. 현대 사회와 선교 신학

 

 오늘날 목회자들이 일선 목회를 하다 보면 과연 '바람직한 목회란 무엇인가?'라는 심각한 고민에 빠지게 된다. 이제 한국 개신교의 선교를 이루어 나갈 것인가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로 하자. 개략적으로 보아 한국 개신교의 종류는 다음과 같다(이 분류는 김동익 목사에 의한 것임을 밝혀둠).

 

 ① 성부파 교회 :

 

이런 유형의 교회는 소위 보수적인 교회이다. 성부 하나님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교파이다.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고 심판하시는, 천국과 지옥의 열쇠를 쥐고 계시는 하늘에 계신 엄위로우신 성부 하나님을 강조하는 교회이다. 이러한 신앙은 성도들의 훈련을 비교적 엄격히 시키고 전통과 신조를 잘 지키고, 이 세상에 대한 관심보다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만 충성을 다할려는 퍽 견고한 신앙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이러한 신앙을 살려야지 기독교는 생명력을 가지고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성보를 강조하는 교회적 요소에 한국의 문화들이 가미되었다. 이를테면 가부장적인 권위, 지배와 피지배, 삼강오륜적 윤리관, 배타적인 사고방식 등이 스며들어서 신앙의 권위주의, 독선 등을 길러 주었다. 이런 교회일수록 분열이 심하고 교회 내부적인 문제들이 심각하다. 자기의 것을 절대시하고 남의 것을 용납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매우 짙게 나타난다. 절대자이신 하나님의 권위를 강조하면서 자신의 논리만을 강조하는 부정적인 요인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② 성령파 교회 :

 

소위 은사파 교회이다. 삼위일체 중 성령은 보혜사이다. 성령은 성도의 어머니이시다. 즉 성령 하나님은 어머니와 같은 따뜻함으로로 삶을 인도하시는 분이다. 하나님의 세심한 배려를 알 수 있는 부분이다. 한국에서의 성령의 강조는 냉랭하고 근엄한 신도들에게 활력을 불러일으켰고 신앙의 열기를 북돋았으며 은혜에 충만하도록 한 것이다. 그래서 성령이 충만한 교회는 부흥하였고 뜨거운 열기를 가졌고 앞으로도 더욱 왕성하게 얼어나야 바람직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성령파 교회에도 부정적인 요소들이 많이 가미되었다. 미신적이고 주술적인 것들이 끼어들어서 신앙을 기복적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래서 흔히 교회의 집회에서 축복받고 은혜받자 등의 신앙으로 전락시킨 것이다. 이런 사고방식은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억압과 부정부패의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답도 줄 수 없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을 때 베드로는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주께서는 다시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신다. 바로 우리가 먹여야 할 양이 이리떼에게 먹히고 있을 때 우리는 받기만 하는 신앙으로써가 아니라 더욱더 이웃을 사랑하는 봉사적인 신앙으로 나아가야 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③ 성자파 교회 :

 

여기에서는 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강조하고 있다. 사회 참여를 강조하고 있는 진보적인 교회에서 이런 유형을 띠고 있다. 천한 말구유에서 태어나 목수로 사시다가 가난하고 억울한 사람 편에 서서 싸우고 고난을 겪다 피 흘려 죽기까지 하신 예수님을 신앙의 중심에 놓고 있다. 그들은 예수님이 오신 목적이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포로 된 자에게 보게 함을, 눌린 자에게 해방을 주는 해방의 해를 전파하려 함이다. 이처럼 가난하고 착취당하고 상처입은 사람들을 찾아가서 그들의 이웃이 되려고 하고 이것을 선교의 모델로 삼으려 하고 있다. 물론 바람직하고 마땅히 있어야 할 선교의 모습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간과하지 못할 잘못된 부분들이 포함되어 있다. 사랑보다는 증오의 요소가 많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 교회 전체의 모습을 보면 어떤 면에서 성부파, 성령파, 성자파의 상태로 나뉘어진 현실 속에서 이 삼위의 일체성을 망각하고 있는 듯하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고 할지라도 어느 한쪽에 편중되어 다른 것을 배타적으로 대한다면 그것은 기형적일 수밖에 없다. 이제 한국 교회는 닷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을 회복시켜야 한다. 삼위가 일체로 조화되고 공존되는 일체성을 이루어야 한다.


 우리는 먼저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참조 ; 엡1:23)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여야 한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선교를 통해서 자라고 성숙되어야 한다. 균형된 성장과 성숙을 위해서는 성서적인 선교적 관점을 반드시 견지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전제들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첫째, 선교 지향적인 교회의 구조와 예배로 거듭나야 한다.


 교회는 단순히 사람들의 결집체가 아니라 생명력을 지닌 선교적 공동체이다. 따라서 이제 교회는 여태까지의 기형적인 교회의 모습을 청산하고 교회의 모든 체제와 구조, 운영 등을 전적으로 선교 지향적으로 마련해야 한다. 교회의 모든 내용들이 선교를 위한 것이어야지 운영을 위한 운영이나, 구조를 위한 구조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요즘의 교회들 중에는 일시적인 성장을 한 후 퇴보하는 교회가 있고, 꾸준한 성장을 보이는 교회가 있다. 전자는 성령 운동 중심의 교회이고 후자는 성령의 힘을 의지하고 꾸준히 선교하는 교회였다. 모든 측면에서 교회가 선교 지향적으로 될 때 진정한 의미에서 의 성장을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선교 현장에서 일치 운동이 활성화되어야 한다.


 교회는 선교가 보다 성서적으로 올바른 방향으로 가기 위해서는 교회가 선교하는 여러 현장 속에서 일치 운동이 활성화되어야 한다. 교회가 지역사회를 위해서 일하다 보면 분명히 그 일이 함께 힘을 합하여 할 수 있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각 교파의 명분 문제로 하나가 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것은 반드시 우리 세대에 청산되어야  할 문제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오늘도 통일을 요구하신다. 모든 지체가 한몸 안에서 통일되어 있듯이 교회도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통일된 내용을 하나로 가지고 있어야 한다. 선교 2세기를 달리고 있는 한국 교회는 이제 과감히 교파의식을 넘어서는 일치 운동을 활성화해야 할 것이다.


 셋째, 복음의 문화적 토착화가 필요하다.


 초대 기독교가 서양으로 전파되었다. 중국의 수 당 시대에는 기독교의 종파인 네스토리안이 들어와서 중국 각지에서 경교로 발전하였다. 그런데 동양으로 전파된 기독교가 15,16세기에 들어와서 거의 흔적을 찾을 수 없을 만큼 붕괴되었고, 그 반면 서양으로 전파된 기독교는 활발히 유지되고 세계 선교의 축을 이루었다. 그 대표적 이유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흡수되는 성격의 문제이다. 즉 그 선교지의 문화에 기독교가 함께 살아 있을 때만 기독교는 왕성해질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Ⅴ. 선교의 방법론

 

 교회의 선교를 위해서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다. 거기에는 교회 내적으로 실시할 수 있는 방법과 교회 외적으로  실시할 수 있는 방법들이 있다. 여기서는 그 대표적인 방법으로 전자에 해당하는 제자훈련 교육과 후자에 해당하는 사회 봉사를 이야기하기로 하겠다.

 

 1. 제자훈련 교육

 

 한국 교회에서는 많은 교회가 교회 갱신과 올바른 선교를 위하여 제자훈련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실제로 그 훈련에 임하고 있다. 이는 제자훈련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신앙적 방법으로 평신도를 교육하는 일이기 때문에 더욱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평신도 가운데 소수를 선정하고 능동적이고 생산적인 지도자를 훈련시키는 일은 현대 교회가 시급히 서두르지 아니 하면 안 될 가장 중요한 과제가 되고 있다. 이것은 여태까지 무능한 군중으로서의 교회가 새롭게 갱신하고 올바른 교회로 체질 개선하기 위해 교회가 마땅히 담당하고 젊어져야 할 시대적인 소명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교인이 있으나 그 중에 몇 명이나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살면서 기쁨을 누리는가를 생각해 볼 때 이는 실로 심각한 문제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제자훈련의 가장 중요하다고 실질적인 선교인 평신도를 교육하는 일은 가장 중대한 선교적 사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전제가 필요하다(이는 옥한흠 목사의 주장이다).

 

 1) 제자훈련을 목회자 자신의 목회 철학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목회 철학은 목회자가 목회에 임하는 근본적인 자세이다.
 목회자는 목회 전반에 걸친 사항을 성서를 통해 발견하고 그 길을 찾아야 한다. 이 시대 속에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목회가 무엇인지 찾아야 한다. 그것이 곧 목회 철학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서 속에서 교회론을 연구해야 하며, 성서 속에서 바람직한 평신도상을 발견하고, 오늘날 현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무엇을 요구하는지 연구해야 한다.

 

 2) 자신이 먼저 제자로 만들어져야 한다


 제자훈련은 남을 만드는 일이 아니라 먼저 자기 자신이 제자가 되는 길이다. 자신이 먼저 진실한 제자가 되고 그 다음에 자신의 모범을 통해 다른 사람을 변화시키는 일이다. 예수님께서는 입으로만 제자를 만들지 아니하였다는 사실을 깊이 명심해야 한다. 올바른 제자만이 또 다른 제자를 만들 수 있다. 바울은 그래서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고전11:1)고 하였다. 이것이 제자훈련의 원리이다. 교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으라 하여도 교인은 가장 가까이 있는 목회자를 닮기 마련이다. 오늘날 목회자들의 문제는 자신은 가르칠 줄 모르고 남만을 가르칠려고 한다는 사실이다. 너무 가르치기만 해서 자신을 위해 채울 시간이 없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제자훈련이 올바로 되기 위해서는 목회자와 평신도 사이의 벽이 깨져야 한다. 왜냐하면 성도들이 목자 가까이에서 그의 모든 것을 속속들이 보기 때문에 그 경계가 살아 남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자훈련은 목회자가 시키는 것이 아니라 제자가 된 사람이라야 할 수 있는 것이다.

 

 3) 귀납법적 성서 연구를 실시하여야 한다


 기록된 성서가 없었을 때나 신자들의 지적 수준이 낮을 때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지도자가 모든 것을 말해 주는 교육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오늘날 같은 시대에는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방법보다는 함께 배우며 경험하는 방법이 보다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연역적인 방법보다는 귀납법적으로 성서를 연구함이 훨씬 힘이 있을 것이다. 아울러 소그룹에 대한 연구도 실시되어져야 한다.

 

 4) 제자훈련의 기본 모델


   제자훈련


 이것은 사랑의 교회의 실례이다.
 제자훈련을 받은 사람은 850명 정도이다. 약 1년 6개월 동안 꾸준히 교육한다. 그룹의 규모는 10-15명이다. 이렇게 훈련을 받은 사람은 다락방 훈련을 받을 수 있다. 현재 다락방 교육반은 240개인데 그들의 순장은 다 제자훈련을 거친 사람들이다. 현재 제자훈련받은 초급반과 고급반으로 나누어진다. 초급반은 부교역자 8명이 8개월 동안 맡아서 교육한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고급반으로 옮겨간다. 고급반은 목회자가 직접 교육을 한다. 담임 목사는 그 교회를 올바로 지도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다락방 전도 교육


 다락방을 인도하는 순장은 반드시 제자훈련을 거친 사람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곳에서도 소그룹, 귀납법적인 방법을 적용하고 있다. 그들은 실질적인 측면에서 모두 작은 교회의 목사로서 일을 하고 있다. 성례만 집행하지 않을 뿐이지 모든 일들을 교역자와 같은 수준에서 일하고 있다. 행함으로 모범을 보이며 일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다. 이 다락방에서 10명이 모이면 나누어 버린다.

 

   순장 교육


 여자 순장은 200명 정도인데 다락방에서 가르칠 내용을 미리 교육받는다. 남자 순장은 30-40명인데 이들도 역시 같은 내용으로 교육받고 있다. 이 교육의 가장 큰 특징은 교육의 체계가 일원화되어서 조직적으로 이행되어 간다는 점이다. 한국의 교회가 현대 사회 속에서 올바르게 성장하려면 이러한 제자훈련은 시급한 필요성이 요구되는 좋은 선교 방법이다.


 각 교회는 모두 다 각자의 지역에 존재하는 교회이어야 한다. 그 교회의 위치가 봉천동이면 봉천동 사람들의 삶과 깊은 유대를 가지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한국의 대부분의 교회들이 교회 내적인 일은 굉장히 열을 올리고 있으나 교회 밖의 선교 즉 지역사회 선교에는 등한히 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바람직한 방향이 아니다. 교회가 올바른 교회라면 그 지역의 사람들과 깊은 연대와 공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현재의 교회가 그렇게 되려면 먼저 자신을 개방해야 한다. 주일을 제외하고 평일에는 항상 문이 굳게 닫혀 있는 교회를 사람들이 좋아할 리가 없다. 열린 교회가 되도록 모두 노력해야 할 것이다.

 

   교회 공간을 개방


 주일 예배 외에는 쓰지 않는 교회의 건물을 평일에도 그 지역 사람들이 생산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 내야 한다. 할 일이 있으나 공간이 없는 사람들에게 공간을 제공하고 그들을 교회와 맺어지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지역 조사


 자기 교회가 속한 마을의 지역 조사를 통해 사람들의 삶의 내용을 보다 잘 알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제공해 주고 그들과 함께 살 수 있는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지역 조사조차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것이 대부분의 우리 교회 설정임을 생각 해 볼 때 이는 시급한 문제이다.

 

   지역의 봉사 기관과의 연대


 보다 활발한 지역 선교가 되기 위해서는 그 지역에 자리잡고 있는 다른 봉사 기관들과의 깊은 유대가 필요하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함께 한방향으로 일해 가는 것이다. 교회가 독자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 할지라도 지역 사람들이 하나가 될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하고 다같이 작은 일부터 하는 것이 더욱 중요한 일이라 생각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각 지역에 있는 지역 공동체와의 연대가 필요할 수밖에 없다.

출처 : 내 사랑 중국 ♡ MyLoveChina
글쓴이 : null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