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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로이드 존스가 이해한 목회자상

수호천사1 2009. 10. 31. 00:29

로이드 존스가 이해한 목회자상

 

백금산 목사(예수가족교회)

 

들어가는말: 목회자로서 나는 누구인가?

오늘날 한국교회의 가장 큰 문제점중의 하나로 지적되고 있는 것은 교회와 세상의 구별이 잘 안된다는 것이요, 목회자요 평신도간에 잘 구별이 안된다는 점이다. 이것을 달리말하자면 교회란 무엇인가? 목회자란 누구인가?에 대한 정체성의 위기라고 표현할 수도있다. 즉 우리 시대 목회자들의 가장 큰 문제중의 하나는 바로 목회자의 정체성에 관한 문제라 할 수 있다. 목회자가 자기 스스로 자기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자기를 누구라고 인식하고 있는가? 자기의 임무와 사명이 무엇이라고 생각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반드시 어떤 사람의 행동의 이면에는 그 사람의 자기 자신에 대한 정체성의 이해, 자기 이해가 들어있기 마련이다. 자기 이해가 바뀌게되면 행동도 바뀌게 된다. 그러므로 목회자에게 있어서 목회자 자신의 자기이해는 목회에 있어서 출발점이 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로이드 존스는 이러한 목회자의 정체성 즉 목회자가 누구인가?하는 목회자의 정체성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목회자인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고 평가하는데 가장 중요한 기준을 제시해 준다.

 

1.특별한 소명을 받은 자로서의 목회자

 

목회자의 자기이해의 출발점인 소명의식

로이드 존스에게 있어서 목회자로서의 부르심은 성도로서의 부르심 이상의 것이다. 성경에 의하면 모든 성도는 기본적으로 하나님에 의해서 세상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자이다. 그러나 목회자는 단순한 성도로서의 일반적인 부르심 이상의 특별한 사역을 위한 부르심을 받은 자이다. 목회를 올바르게 하기 위해서는 내가 성도로 부름받았을 뿐만 아니라 목회자로서 부름받았다고 하는 의식이 필수다. 이러한 목회자로 부름받았다고 하는 자기이해야 말로 목회의 기초가 된다. 즉 목사로서의 소명의식이 목회의 초석이다. 로이드 존스는 자신의 목회자로서의 소명의식에 대해서 로마서 강해의 한 대목에서 이렇게 밝힌다.

“제가 목회자가 되기로 한 것은 하나님의 손, 강권적이고 강압적인 무엇인가를 느꼈기 때문입니다(로마서 강해 1권 75)”.

 

로이드 존스 자신의 목회자로서의 소명과정

이것은 로이드 존스가 어떻게 목회자로서 소명을 받고 결단했는가를 추적해 보면 좀 더 분명해 진다. 로이드 존스는 18세와 19세 되던 해에 자신의 장래와 목회자로서의 길에 대한 어느 정도의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로이드 존스가 회심을 체험하고 특히 1925년 부활절에 특별한 영적 체험을 경험하게 되면서부터 이 문제가 로이드 존스에게 심각하게 부각되었다. 1924년 3월 ‘시대의 표적’, 1925년 2월 ‘웨일즈의 비극’, 1926년 3월 ‘청교도’에 대한 일련의 연설로서 세상을 떠들석하게 만들 정도의 탁월한 연설능력을 드러내었던 로이드 존스는 스스로나 다른 사람들의 권유에 의해서나 자신의 목회소명에 대해서 아주 진지하게 검토하게 된다. 1926년 6월 목회자로서의 소명에 완전히 응답하기로 결심하기까지 로이드 존스의 내적 갈등은 이루 말로 표현하기 힘들정도였다. 우리는 이것을 1925년 봄부터 1926년 6월경 목회자가 되기로 완전히 결심을 굳히기까지 몸무게가 무려 9kg이나 빠진 것을 통해서 확인해 볼 수 있다. 존스는 이것을 이렇게 말한다.

“매우 격렬한 투쟁이 일어났다. 나는 문자 그대로 체중이 20파운드나 빠졌다.(이안 머레이 마틴 로이드 존스의 초기 40년 143)”

 

목회사역은 파트타임 이상의 것

목회자로서의 소명문제를 놓고 갈등하는 동안 로이드 존스의 주위 사람들 중에는 존스에게 목회자와 의사의 2가지를 병행하라고 권유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로이드 존스는 이러한 권유를 일축했다. 존스에게 있어서 무엇보다 목회란 파트타임으로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가장 중요한 과업을 수행하는 것이다. 곧 목회란 ‘기도와 말씀 전하는 것에 전무해야 하는 일’이었다. 로이드 존스는 목회자가 되기 이전에 이미 목회자란 누구인가? 목회란 무엇인가?에 대한 분명한 전이해가 있었던 것이다. 로이드 존스에 대한 권위있는 전기 작가인 이안 머레이는 존스의 이러한 목회자관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한다.

“로이드 존스가 목회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관점은, 어떤 사람의 생애에서든지 목회자로 부르심을 받고서 그것을 두 번째의 과업으로 생각하고 목회를 감당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임을 분명하게 하고 있었다. 그의 전체적인 소양은 평신도 설교사역을 싫어하는 것이었다......그는 자기는 부분적인 시간을 이용하여 설교자로 일할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이안 머레이 로이드 존스의 초기 40년 142-143)”.

 

목회소명의 확인문제

로이드 존스에게 있어서 목회자로서 목회 소명관은 스펄젼이 자주 말했듯이 “만일 여러분들이 목회를 안하고도 견딜 수 있으며 그냥 지내라” 충고로 요약될 수 있다. 즉 존스에게 있어서 목회란 “이 일 외에는 다른 것을 할 수 없을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목사와 설교116)”이었다.

 

소명받았다고 하는 자들에게 대한 목회자의 태도

따라서 로이드 존스의 이러한 목회관은 자신이 목회자로 부름받았다고 생각하는 자들에게 대한 엄격한 검사의 태도에서도 잘 발견된다. 로이드 존스는 소명을 받고 목회를 하려고 하는 이들에게 최대한의 장애물을 설치하라고 말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테스트를 하라고 조언한다(목사와 설교 119-125). 첫째, 상당한 수준의 영성이 있는지를 살펴보라. 둘째, 신학적 지식. 신앙지식이 있는지를 보라. 셋째, 천성적인 지능이 어느 정도 있는지를 살펴보라, 넷째, 말의 재능이 어느 정도 있는 지를 살펴보라.

 

목회자 후보자들에 대한 로이드 존스의 이러한 태도는 오늘날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준다. 교회내 성도들안에서 조금만 열심히 있으면 ‘신학한번 해 보지 않겠느냐?’고 권유하거나 생활에 조금 어려운 문제를 가지고 찾아온 사람이 있으면 ‘당신은 사명자인 인데 사명을 회피해서 그렇다’고 말하는 일들이 우리 주위에서 얼마나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는가? 또한 한국에서 가장 큰 교단에 속하는 장로교의 합동이나 통합측의 경우만 보더라도 목회자가 되겠다고 한 해에 2000여명 이상의 신학교 입학원서를 내는 이들이 있다. 우리는 이들이 모두 목회자로서의 참 소명을 받은 이들이라고 볼 수 있는가? 이들을 추천한 개교회의 목회자들은 어떤 근거에서 이들을 신학교에 추천했는가? 그렇다면 신학교 담당자는 어떤 목회자 자격조건을 가지고 또한 어떤 근거를 가지고 해마다 이 수많은 목회지원자들 중에서 소수만 신학교육을 받도록 허용할 것인가? 과연 우리는 정말 목회자 후보생을 적절하게 추천하고 또한 배출하고 있는가?를 자문해 보게된다.

 

 

2.목회자의 최우선적인 사역으로서의 설교와 설교자로서의 목회자

 

설교사역의 우선성과 중심성

로이드 존스가 이해하는 목회자상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설교자로서의 목회자상이다. 로이드 존스에게 있어서 설교는 목회자의 최우선적인 가장 중요한 일이다. 목회자에게 있어서 나머지 일들은 전혀 불필요한 일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설교에 비하면 모두 2차적인 것이요, 부차적인 것이다. 목회자는 무엇보다 하나님을 대신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소명을 받은 사람들인 것이다. 이 점을 로이드 존스는 이렇게 단언한다. “나는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이런 것은 잘 해야 2차적인 문제, 2차적인 문제도 아니고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닐 수 있기까지 하지만 그래도 최대로 생각해서 2차적인 문제입니다. 교회나 기독교 목사의 제일 첫째 임무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목사와 설교, 22)”

 

현대교회에서 설교의 가치가 하락한 원인진단

로이드 존스의 이러한 목회자상과 목회사역에 있어서 설교의 최우선적인 중요성에 대한 주장은 그의 설교론에 대한 걸작 「목사와 설교」1장과 2장에서 설득력있게 제시된다. 이 책에서 로이드 존스는 현대교회에서 설교의 위치가 하락된 이유를 교회밖 세상에서의 일반적인 이유와 교회내에서의 특수한 이유로 구분해서 진단한다. 일반적인 이유란 세상의 일반적인 풍조가 웅변정치에서 안방정치로, 집회정치에서 메스콤의 토론정치로 이전됨에 따라 웅변과 연설의 가치가 하락되었고 이로인해 설교도 하락했다는 진단이다. 그리고 교회내의 특수한 문제로서는 첫째, 성경의 권위에 대한 믿음 상실, 둘째, 설교꾼들에 대한 반발감. 셋째, 설교집의 발행으로 수필식 설교가 만연된 것등이 이유가 되어 설교의 중요성이 하락되었다는 것이다.

 

현대교회에서 설교의 중요성이 떨어진 결과에 대한 분석

이와같이 설교의 위치가 하락한 결과 교회안에는 여러 가지 현상들이 생겨나게 되었다고 존스는 분석한다. 첫쩨.설교를 연설이라고 부르면서 설교가 웅변이 아니라 조용한 이야기가 됨. 둘째, 예배의 의식적 요소가 강조됨에 따라 교독문과 음악과 노래와 영창의 요소가 증가하고, 헌금방법이 정교화되며, 목사와 성가대의 입장방식을 의식화하는 등의 현상이 생겨나게됨. 셋째, 공적예배에 흥미본위의 요소가 증가하면서 성경봉독과 기도는 짧아지고 찬양은 늘어나며, 찬양 인도자라는 새로운 직책의 생겨남. 네째.유명인, 연예인들의 간증이 증가함 다섯쩨, 상담에 대한 관심이 증가함. 여섯쩨, 설교단이 예배당의 중앙에서 밀려남 일곱째.교회는 성경과 기독교 교리를 설교하지 말고 정치나 사회문제를 이야기하며 또한 그런 일에 뛰어들라는 주장을 함등의 현상이 생겨나게 되었다고 분석한다. 우리는 로이드 존스의 이러한 교회진단과 분석을 통해서 로이드 존스가 분석하는 19세기 초반의 영국교회 상황은 어쩌면 19세기 후반의 한국교회 상황과 이리도 닮았는가?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교회의 대안: 다시 설교로 돌아가라

로이드 존스에 따르면 교회에서 설교의 중요성이 무시되거나 경시되어지고, 목회자의 사역에 있어서 설교가 목회의 중심사역이 되지 못할 때 교회는 이와같은 각종 기현상내지는 영적 질병의 상태를 드러내게 된다. 그러므로 교회가 교회답게 되고, 목회자가 목회자 답게 되는 첫 걸음은 교회와 목회자에 있어서 설교사역의 최우선성을 다시금 확립하는 것이다. 즉 로이드 존스에게 있어서 설교는 교회와 목사의 최우선적인 사역이다. 로이드 존스는 목회자에게 있어서 설교의 이와같은 최우선성에 대한 1)성경적 증거 2)교회사적 증거 3)신학적 증거를 제시한다(목사와 설교 11-48)

 

설교와 설교자의 본질

왜 이토록 로이드 존스에게 있어서 목회사역에 있어서 설교가 중요한 것인가? 하는 것은 로이드 존스의 설교자에 대한 이해 때문이다. 로이드 존스에 의하면 설교자는 곧 하나님의 대신해서 하나님께로부터 멧세지를 받아 성도들에게 보냄을 받은자이다. 설교란 설교자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다. 설교자의 권위는 설교자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설교자를 보내는 분의 권위다. 설교의 권위도 설교를 하는 사람의 권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다. 설교자의 설교를 받아들이는 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설교를 거부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것이다. 설교를 하는 사람이나 설교를 듣는 사람에 있어서 설교자가 가지는 권위와 설교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설교에 대한 이러한 권위가 참으로 인정되는 곳에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교회, 교회다운 교회는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로이드 존스에 의해서 이해되어지는 설교자로서의 목회자는 곧 구약시대의 선지자적 직분과 신약시대의 사도적 직분을 기능적으로 이어가는 하나님을 대신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말씀의 사역자인 셈이다. 물론 로이드 존스도 설교가 목회자의 모든 사역이 아니라는 것은 너무다 잘 알고 있었다. 또한 다른 사역은 모두 필요없다고 말한 것도 아니다. 단지 로이드 존스가 우리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것은 설교는 목회사역의 중심이요 최우선적인 사역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맺는말: 우리는 목회자 로이드 존스에게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한 사람의 목회자로서 로이드 존스처럼 다양한 사역을 한 사람도 그리 흔치는 않을 것이다. 로이드 존스는 11년동안 초기 웨일즈에서 목회를 할 때도, 후기 30년동안 영국 런던의 웨스트민스터에서 목회를 할 때도 자신이 목회하는 교회에서의 매주 2-3회의 설교사역이외에도 거의 일주일에 2일 정도는 영국 전역의 순회 전도 설교자로서 일을 했다. 또한 각종 집회와 수련회의 강사로 활동했으며, 영국 복음주의 교회에 개혁신학과 청교도 신학을 본격적으로 소개하는 청교도 대회를 주관하고, 국제IVF의장과 회장으로 활동하며, 복음주의도서관, 배너오브트루스 출판사, 런던신학교의 설립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또한 수백명의 목회동역자의 리더로서 목회자의 목회자로서의 삶을 살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의 목회사역에는 설교만이 아니라 매주일 설교이후의 그의 목양실에 찾아온 사람들을 상대로 한 상담사역도 그의 열매있는 사역가운데 하나였다. 또한 로이드 존스의 부인의 로이드 존스에 대한 평가에 따르면 로이드 존스는 ‘설교자이기 이전에 전도의 사람이며, 기도의 사람’이었다. 목회자로서의 로이드 존스는 이처럼 다양한 측면을 가진 단순한 설교자 이상의 큰 인물이었다.

그러므로 사실 로이드 존스를 이해하거나 로이드 존스가 이해한 목회자의 모습을 제시하는 데 있어서 설교자로서의 로이드 존스, 설교자로서의 목회자만의 한 면만을 말한다는 것은 로이드 존스의 전체적인 측면의 한 부분만을 또한 목회자의 전체적인 측면의 한 면만을 말하는 것 밖에는 안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로이드 존스가 우리 시대에 우리 한국교회의 목회자에게 주는 모범과 도전이라면 바로 목회자다운 목회자란 무엇보다도 자신을 ‘특별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말씀사역자로서의 목회자’라는 목회자상을 너무나 선명하게 그려주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로이드 존스의 이러한 목회자관이 오늘날 목회도 전문화시대에 돌입했다고 말하면서, 행정목회자, 상담목회자. 음악목회자, 치유목회자, 교육목회자등으로 목회사역의 어느 한 부분만을 전공해서 잘 하면 목회에 성공할 수 있다고 하는 ‘기이한 목회신화’를 깨부수는 철퇴가 될 수 있을 것인가? 또는 목회를 하면서 하나님의 진리를 성도들에게 전해서 성도들의 삶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도록 변화시키겠다는 목회 정공법을 택하지 않고, 목회에 수많은 방법과 기법과 프로그램을 끌고 들어와서 ‘백화점식 교회’를 만들어 가려고 하는 ‘기교파 목회꾼’들을 회심시킬 수 있을 것인가?

 

*1999년 6월 '목회와 신학'에 실린 글입니다.

출처 : 영적 분별력
글쓴이 : 진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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