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한국교회는 중국교회와 협력할 마음이 있는가?
지난 여름, 우리나라 서울에서는 중국선교를 위한 대회가 열렀다. 1992년 우리나라와 중국이 국교를 정상화한 이래로 중국선교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한국교회와 선교단체들로 구성된 한국중국선교협의회(KCMA)와 재중한국선교사협의회(CKMA)가 공동으로 주최하여 개최된 '미션차이나 2009' 즉, '선교중국 2009'이다.
이번 대회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눠 열렸다고 한다. 첫째는 '중국선교비전학교'였다. 이것을 통해 평신도와 대학청년들을 중국선교를 위한 일꾼으로 동원하기 위한 것이었다. 둘째는 '선교중국 컨퍼런스'였다. 이것을 통해 한국교회의 각 교단 선교정책결정자들과 선교단체 대표 및 총무, 그리고 선교지향적인 목회자와 선교학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중국선교를 위한 미래계획을 설계하기 위한 것이었다.
'선교중국 2009'의 컨퍼런스에서는 4가지 영역의 논의가 있었다고 한다. 첫째는 '선교중국의 의미와 현황'이었고, 둘째는 '선교중국의 장단기 전략수립'이었다고 한다. 셋째는 '선교중국에 있어서의 연합과 협력'이었고, 마지막으로 '선교중국과 한국교회의 역할'이었다고 한다. 영역별로 나뉘어 참석자들의 활발한 논의가 심도있게 진행되었다고 한다.
참석자들은 지금까지 한국교회가 '중국을 복음화의 대상으로 인식하는 '중국선교'의 개념에서 이제부터는 중국을 타문화권 선교의 주체로 인식하는 '선교중국'의 개념을 가져야 한다'는 것에 인식을 같이 했다고 한다. 따라서 이제는 한국교회로 하여금 중국교회가 진정 필요로 하는 것에 집중하여 우리 중심의 선교에서 벗어나 겸손하게 현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그들을 도울 수 있는 길을 찾아 현지에 맞는 맞춤형 사역개발과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마련되어야 한다는 것이 참석자들의 통일된 목소리였다고 한다.
따라서 이를 실천하기 위해 한국교회는 중화권교회나 선교단체 및 세계교회와 더불어 공동사역의 장(場)을 만들어 서로 협력하여 중국교회로 하여금 선교중국을 실천하게 하며, 선교중국시대를 열어가야 할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고 한다. 이로써 세계교회로 하여금 중국교회와 더불어 땅 끝까지 이르러 주님의 증인이 될 수 있도록 한국교회가 돕는 다리의 역할을 잘 감당하여 세계복음화의 꿈을 실현하자는 합의를 이끌어 낸 것이 이번 '선교중국 2009'가 거둔 큰 성과였다고 했다.
언론의 보도에 의하면 참 좋은 성과를 거둔 성공적인 대회였다고 했다. 대회에 참석했던 벗도 '100% 만족할 수는 없었지만 대체적으로 참 의미있는 대회로 좋았다'라고 했다. 정말 그럴까? 지난 번 '선교중국 2009'에서 내린 결론이 아름다운 성과라고 할 수 있을까? 나는 자꾸만 '그렇다'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웬지 석연치 않은 생각이 마음을 자꾸만 허전하게 했다.
처음 대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큰 기대감을 가졌었다. 사역의 현장에서 살고 있는 한 사람으로 꼭 참석하고 싶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 참석할 수 없어 얼마나 아쉬웠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대회가 끝난 후에 들려지는 소식들이 참석하지 못한 아쉬움보다는 마음 한 구석을 답답하게 하는 느낌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증폭되어 안타까워지기까지 했다.
대회에 참석하지 않았기에 대회에서 어떤 이야기들이 구체적으로 논의되었는지는 잘 모른다. 단지 언론의 보도와 대회에 참석했던 벗에게 들은 이야기가 전부다. 따라서 언론의 보도와 벗에게 들은 내용으로 대회의 결과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평가할 상황이 아닌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마음이 허전해지고 안타까워지는 마음을 도저히 감출 수 없었다.
'선교중국 2009'에서 논의된 많은 이야기들 중에 단연 으뜸인 화두(話頭)는 '협력(協力)'이었는 듯 하다. '협력'을 국어사전에서는 '어떤 일을 하는 데에 도움을 주는 것', 또는 '어떠한 일을 하는 데에 여럿이 서로 힘을 합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 '선교 2009'이 추구한 '어떤 일, 어떠한 일'은 무엇이었을까? 단연 '선교중국'이었을 것이다. '선교중국'을 통해 세계복음화의 꿈을 실현하고 싶었을 것이다.
세계복음화의 꿈은 어느 특정한 개인이나 집단만의 꿈이 아닐 터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요, 하나님의 백성들을 통하여 이루어져야 할 섭리이기도 하다. 이 꿈은 어제 오늘의 것이 아니라 어쩌면 예수님께서 부활승천 하신 이래로 2천년동안 한결 같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품었던 꿈일 터이다. 그런 꿈을 지난 여름에 '선교중국 2009' 대회에 모였던 분들이 공유하기를 원했을 것이 분명하다.
꿈은 반드시 이루어지기 위해 존재한다. 그렇지만 그 꿈은 무작정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공식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꿈을 이루는 공식은 바로 협력이다. 협력이란 '서로 도움을 주거나 서로 힘을 합하는 것'이다. 따라서 세계복음화의 꿈을 이루려면 그 꿈을 이루고자 하는 이들이 서로 도움을 주거나 서로 힘을 합해야 한다. 세계복음화의 꿈이란 혼자의 힘으로는 도저히 이룰 수 없는 꿈이기에 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서로 도움을 주는 것이나 힘을 합하는 것이란 무엇인가? 이것을 더 분명하게 알기 위해 국어사전의 설명을 확인해 보았다. 국어사전에서 '주는 것'과 '합하는 것'의 차이가 발견되었다. 물론 이 두 가지 의미를 완전한 별개로 구분짓는 것은 아니었다. 상호 관계가 있었지만, 별개의 의미가 있음을 정확하게 알아야 했다.
'주는 것'의 의미를 먼저 찾아보았다. 이것은 '주다'에서 찾아야 했다. '주다'는 동사다. 그렇지만 그것을 '주동사로 보느냐, 보조동사로 보느냐?'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 '주동사'로 볼 때는 '남에게 어떤 것을 건네거나 맡기는 것'이었고, '보조동사'로 볼 때는 '남을 위하여 어떤 일을 하는 것'이었다.
다음은 '합하는 것'의 의미를 찾아 보았다. '합하는 것' 역시 '합하다'에서 그 의미를 찾아야 했다. '합하다'는 동사로 '여럿을 모아 하나가 되게 하다. 여러 가지를 뒤섞다. 더하거나 보태다. 한데 모으다' 따위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또 다른 의미로 '주로 옛말에서 무엇이 일치되거나 부합하다'라고 했다.
두 낱말을 이해하려면 각각 이해를 위한 중요한 열쇠가 있음을 발견했다. 그것은 '주다'에는 '주체(主體)'요, '합하다'에는 '주제(主題)'였다. 주체란 '어떤 사물이나 조직 따위에 중심이 되는 부분, 혹은 주된 것'을 의미하거나, '어떤 행위에 중심이 되는 것이나 또는 사람'을 의미한다. 반면에, 주제는 '생각이나 활동을 이끌어 가는 중심이 되는 문제나 내용, 혹은 어떤 일에 대하여 중심이 되는 내용이나 관념'을 의미한다.
이제 본질적인 이야기를 하기로 하자.
'중국선교'는 한국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이다. 하나님께서 한국교회에 주신 가장 큰 사명이요, 책임이 곧 중국선교이라고 믿는다. 그렇지만 '선교중국'은 한국교회의 사명이거나 책임이 아니다. '선교중국'은 중국교회에게 허락된 사명이요, 책임일 뿐이다. 그런데 왜 한국교회가 '선교중국'을 운운하는 것일까? 중국교회의 요청이 있는 것도 아닌데, 더구나 중국교회를 배제한 '선교중국'을 운운하는 것은 혹 월권(越權)이 아닐까?
한국교회는 한국교회에 주신 사명과 책임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중국교회를 위해 한국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그들을 협력해야 한다. 따라서 이쯤에서 한국교회의 협력에 대한 견해를 돌이켜 볼 필요가 있다.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이 진정한 협력인가를 깊이 숙고해야 한다. 지금까지 협력이 아닌 월권을 한 것은 아니었는지를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 얼마든지 그렇게 여겨질 수 있는 일들이 이곳의 선교현장에서는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었기에 하는 말이다.
진심으로 한국교회는 중국교회나 해외중화선교단체와 협력할 마음이 있는 것이었을까? 행여나 자기들의 목적성취를 그들을 이용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공연한 우월감에 사로잡혀 우쭐 거리는 마음으로 그들 위에 군림이라도 하려는 듯한 오만하고 방자한 행위를 일삼았던 것은 아니었을까? 참으로 저들과 협력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무엇이 진정한 협력이란 말인가?
협력에는 '주다'와 '합하다'의 의미가 있다고 했다. 여기에는 각각 '주체'와 '주제'가 있어야 한다고도 했다. 그렇다면 한국교회가 중국교회나 해외중화선교단체에게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들과 합하는 것은 무엇인가? 어떻게, 무엇을 줄 것이며, 어떻게 무엇을 합할 수 있을까? 누가 주체가 되어야 하며, 무엇을 주제로 삼아야 하는 것일까?
한국교회가 중국교회나 해외중화선교단체와 더불어 협력해야 하는 내용이 '선교중국'이라면, 그 주체는 분명 중국교회가 되어야 한다. 또한 '선교중국'의 주제는 '땅 끝까지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선교중국에 대한 논의는 마땅히 중국교회의 몫이 아닐까? 그들이 주도하고, 한국교회는 저들을 적극 도와주는 것이 옳지 않을까?
그런데 지난 여름에 한국에서 실시한 '선교중국 2009'은 누가 주도했던가? 한국교회였다. 내가 전해들은 이야기로는 '선교중국'을 주제로 모인 대회에 중국교회는 참여하지 않았다고 한다. 물론 보안이라는 민감한 부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중국교회가 배제된 '선교중국'이란 월권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중국교회와 해외중화선교 지도자 몇 분이 강사로 참석했을 뿐, 정작 중국교회에서는 아무도 참석하지 않은 선교대회를 '선교중국'이라 부른 것 자체가 모순은 아닐까?
중국어문선교회 대표 박성주 장로는 '한국교회는 그동안 중국을 위해 신학교육을 비롯해 캠퍼스사역, 문서사역, 의료선교, 구제사역, 조선족선교 등을 통해 적잖은 열매를 맺었다. 이제는 중국교회가 스스로 힘을 갖춰 이러한 사역들을 펼쳐 나갈 수 있도록 도와야 할 때'라고 강조하며, '수많은 중국교회가 한국교회와 동등한 동역자 관계가 되어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길 원하고 있다'면서 '일방적인 선교에서 벗어나 파트너십 선교에 나서야 한다'고 피력했다고 한다.
중국선교연구원 대표 인병국 목사는 '중국선교가 중국의 복음화를 추구하는 것이라면, 선교중국은 중국이 타문화권 선교를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라고 전제하면서, '선교중국'은 중국선교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건강하게 확장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선교중국 2009'에 참가했던 한국교회의 선교 지도자들은 '중국교회 내에서 힘있게 일어나고 있는 선교열정을 한국교회가 구체화하고 체계화하는 데 다리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면서, '이제 한국교회는 중국교회가 타문화권에 선교할 수 있도록 도전하고 격려 해주는 것이 필요하며, 실질적인 선교훈련을 시켜 주는 것도 중요하다'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옳은 말이다. 백번 지당한 말들이다. 하지만 그것이 한국교회의 일방적인 견해라면 곤란하지 않을까? 마땅히 중국교회가 스스로 자각해야 할 일이다. 그렇지 않다면, 한국교회가 그들로 하여금 자각하도록 깨우쳐 줄 수 있는 일이라고 여길 수 있다. 하지만, 정작 마땅해야 할 중국교회를 배제하고 한국교회만이 모여서 이렇쿵 저러쿵 한다는 자체가 모순이 아닐까?
이것은 '남의 제삿상에 감놔라 대추놔라 한다'는 우리나라 속담과 같은 참견은 아닐까? 또한 실효성이 없는 탁상공론이요, 주제넘는 월권이 아닐까? 진심으로 한국교회가 중국교회와 해외중화선교단체를 협력을 원한다면, 그들을 정당하게 대우하고, 그들의 필요로 정확하게 알기 위해 그들과 머리를 맞대고 의논해야 한다. 그리고 그 필요를 채워주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것이 한국교회가 해야 할 일이다.
참으로 한국교회는 중국교회의 진정한 파트너가 되어야 한다. 마음을 나누며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동역자가 되어야 한다. 어떤 우월감에 사로잡혀 있다면, 그들의 진정한 파트너가 되거나 동역자로 인정받을 수 없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겉으로는 동역을 이야기하며 '나를 따르라'는 식의 우월감에 사로잡혀 있는 한, 파트너쉽은 일어나지 않는다. 동역은 이루어질 수 없다는 이야기다.
그동안 한국교회가 가지고 있는 어떤 노하우를 중국교회에 주고 싶어도 무조건 일방적이어서는 안된다. 주는 행위도 받는 상대방과 마음의 교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무익한 일이다. 혹여 강압적이거나 상대방의 생각은 안중에도 없는 일방통행의 주는 행위는 상대방으로 하여금 불편함과 부담감을 줄 수 있게 될 뿐이라는 사실을 유의해야 한다.
무엇인가를 주고 싶을 때 함정에 빠지기 쉬운 두 가지가 태도가 있다. 첫째는 강압적인 태도로 군림하려는 태도요, 다음은 겸손을 가장한 비굴해지는 태도다. 두 가지 태도 모두 바람직하지 않다. 오히려 위험천만하다. 왜냐하면 강압적인 태도는 상대방의 자존심을 손상시킬 수 있고, 겸손을 가장한 비굴한 태도는 자신의 자존심이 손상될 수 있기 때문이다.
상대방에게 무엇인가를 주고 싶다면, 자신의 뜻을 먼저 분명하게 밝혀 상대방의 뜻을 확인해야 한다. 자칫하면 상대방의 뜻을 모른채 일방적으로 주는 태도는 상대방과 불편한 관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것을 주면서도 상대방에게 불필요한 행위가 되어 그를 잃어 버리는 일이 되어, 그와 더불어 더 긴밀한 관계로 발전하는데 방해로 작용할 수 있다는 사실도 유의해야 한다.
유의해야 할 일이 또 있다. 상대방이 내가 주는 것을 아무 말 없이 받아들인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받기는 받되 상대방은 그것의 필요성이나 유익성을 모르기에 실효성의 문제에서는 주지 아니한만 못한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누구에게 무엇을 준다는 것은 결코 가볍게 생각할 일이 아님을 유의해야 한다.
상대방에게 무엇을 주는 일이 아무리 좋은 취지가 있을지라도, 주체인 직접 당사자를 배제한 논의는 바람직하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참견이나 월권이란 결코 모양새가 좋은 것이 아니지 않는가! 참다운 협력에는 참견이나 월권이란 자리잡을 수 없다. 그것은 서로의 긴밀한 의사소통 가운데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참견이나 월권은 의사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에 일어나는 부작용이라 할 수 있다.
'합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상대방과 합하려면 무엇보다도 가장 먼저 자신의 생각을 모두 내려 놓고, 상대방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자신의 생각을 주도하지 않고, 궁극적인 주제를 이루기 위해 자기가 할 수 있는 진정한 역할을 찾아야 한다. 역할은 항상 전체의 조화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어떤 것도 참견하거나 월권으로는 서로가 합하는 일은 일어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참으로 한국교회는 중국교회나 해외중화선교 기관들과 협력할 마음이 있는가? 그들을 자기성취를 위한 도구로 활용하려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그들을 돕고 싶은 마음이 있는가? 그렇다면 그들의 주도권을 빼앗는 어리석은 행위를 조심해야 한다. 섬세한 마음으로 그들의 자존심을 존중하고 지켜주어야 한다. 그들의 입장과 처지를 살피는 일에 마음을 다해야 한다.
이제 시대는 점점 양방향시대로 달려가고 있다. 어떤 힘에 의해 지배되던 일방통행은 자리잡을 수 없는 시대가 오늘의 시대다. 하물려 땅 끝까지 복음의 증인되어야 할 시대적인 사명을 위한 일일까?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한국교회에 허락하신 사명과 책임이 있고, 중국교회에 허락하신 사명과 책임이 있다. 이 둘의 사명과 책임은 서로 협력해야 할 일이지 참견이나 월권을 해야 할 일은 아님을 주지해야 한다.
지난 여름 '선교중국 2009'는 다가오는 2011년을 기약하며 폐막되었다고 한다. 이제 새로운 집행부가 결성되어 '선교중국 2011'이 준비될 것이라 여겨진다. 따라서 이제 나는 '선교중국 2011'은 한국교회가 주도하는 대회가 아니라 중국교회가 주도하는 대회로 개최되길 간절히 소망한다. 중국교회를 향한 21세기에 풀어나갈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데 한국교회와 중국교회가 감당해야 할 역할들을 효율적으로 감당하는 기회로 사용되어지길 소망해 본다.
2009. 10. 4 (주일)
글/ 불꽃 石一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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