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학

[스크랩] 선교란 무엇인가? (박창현)

수호천사1 2009. 10. 4. 23:00

선교란 무엇인가?

박창현 (감리교신학대학교 선교학 교수)


맥가브란(Donald McGavran)은 1960년대에 “선교란 교회 성장이다”라고 정의를 하면서, 선교가 얼마나 더 다양한 많은 말로 정의 되어야 하는가? 라고 한탄한다. 그런가 하면 독일의 선교학자 프라이탁(Walter Freytag)은 “전에는 선교가 문제를 가졌으나 오늘날은 선교자체가 문제이다”라는 말로 기독교 선교의 문제를 지적하며 선교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통하여 세계교회가 하나 되는 길을 모색하고자 했다. 1974년 복음주의 교회들이 선교는 복음선포만이 아니라 사회 참여와 봉사까지를 포함한 통합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로잔 선언문’을 발표할 때까지 세계교회는 선교에 대한 두 가지 관점에서 복음주의와 에큐메니칼이라는 두 진영으로 나뉘어 갈등과 대립을 반복했었다. 사명, 초청, 평화화, 인간화, 문화화 등 선교에 대한 너무나 다양한 정의가 있고 또 그 나름대로 정당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본인은 선교라는 의미가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본질적인 문제에 관하여 잠시 살펴보고, 그렇게 함으로 선교에 대한 잘못된 이해들이 오늘날 교회의 선교를 위협하며 혼란에 빠트리는 현실을 직시하고자 한다.

선교란 무엇인가? 우리말로 선교라는 말은 본인이 아는 세상 어느 나라의 말보다도 성서적인 의미를 잘 담고 있는 아주 좋은 말이다. 이는 한자로는 베풀고(宣) 가르친다(敎)는 의미인데,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르치고 그의 사랑을 베푼다”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우리가 선교의 가장 중요한 본문으로 여기고 있는 마태복음 28장 19~20절에서 중요한 선교적 명령은 ‘가르치라’와 ‘지키게 하라’이다. 이 둘은 예수의 삶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것으로 예수가 ‘가르친 모든 것을’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그것을 삶 속에서 스스로 지키며 또 다른 이들에게 지키게 하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의 사랑의 삶을 가르치고(敎), 그 사랑을 나누면서 사는 삶을 지켜나가도록 하라(宣)는 것이다.

여기서 잠시 이런 말이 어떻게 생겨났을까? 에 대한 배경을 상상해보자!
우리나라에서 처음 예수를 접한 사람들은 (일제 식민지 세력의 위기가 고조된 1884년 개신교 선교시작) ‘선교’라는 것을 외국인 선교사들을 통하여 이해하게 되었는데, 저들이 그들의 일을 무엇이라고 하였든 당시에 복음을 처음 받아들였던 한국사람들로서 소위 서구 그리스도인들이라는 사람들이 이 땅에서 하는 일을 우리나라 말로 처음 이해한 것이 ‘宣敎’라는 말로 정리하여 전승되었다는 것이다. 왜일까? 다행히도 우리의 역사 속에서 그들은 식민지배자들이 아니었다. 아마도 이것은 그들이 우리에게 와서 성경의 이야기를 가르치려고 애쓰고, 주로 예배에 설교를 하는 것을 보았고, 그런가 하면 자기들의 돈으로 병원과 학교를 세우고 거기서 가난하고 병든 사람을 무료로 치료해주고 또 여인들과 당시의 소외된 계층들에게 평등한 교육의 기회까지도 주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이 아닐까? 선교사들은 말로만 전도를 한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소중한 물질까지를 한국 사람들에게 기꺼이 나누어 주는 일을 하며 이것을 mission 이라고 하였을 것이고, 이것을 우리나라 사람들은 “저들이 가르치기도 하고 베풀기도 하는구나” 하며 그들의 일을 선교라고 이해했을 것이다. 이는 당시의 ‘대일본 제국’의 국민이 되게 해주겠다면서 식민착취를 자행했던 일본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경험이었을 것이다. 우리말의 전도(傳道)라는 것이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만 이해되기 쉽고, 또 교회 안으로 사람을 모으는 교회 성장을 전제한 포교(布敎)라는 의미로 이해되었고, 교회의 사회에 대한 봉사는 복음전도에 비하여 덜 중요하거나 심지어는 부정적인 것으로 이해될 수 있었다. 이와는 달리 선교는 말 그대로 넓은 의미의 복음전도와 사회봉사를 포함하는 아주 적당한 우리말이다.
그런가 하면 선교를 영어의 “Mission”으로 표현하는 것은 국제적이고 일반적인 추세이지만 이는 교회의 선교에 부정적인 인상을 가져오는 근거가 되고 있다. 이유는 이 Mission이라는 영어가 “군인들에게 사명을 주어 보내다” 라는 군사 작전을 의미하는 단어와 구분 없이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영어의 어원이 라틴어에 그 근거를 가진 것으로 ‘보냄’ 또는 ‘보내다’라는 뜻의 명사 mitto, 또는 동사 mittere 에서 파생되었다고 보고 그것이 15세기 수도원에서 처음으로 포교를 나갔던 수도사들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었다는 근거를 제시하지만 본인이 생각하기에는 그보다는 군사력을 이용한 로마의 평화(Pax Romana) 라는 제국주의 사명을 가진 로마 병사가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여 그 사명을 이룬다는 군사적 의미가 강조되어 해석되고 있다고 보여 진다. 실제로 이 말의 근원인 예수의 제자들을 ‘보내다’라는 헬라어 아포스텔레인(ajpostevllein)에 근거하여 실제로 군인에게 사명을 주어 보내는 것과 무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선교가 군사적으로 이용되는 것은 복음을 잘못된 문화와 전통 속에서 그 성서적 근원과 분리하여 곡해 해왔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문제는 이런 잘못된 문화와 역사적 배경을 통하여 곡해된 선교라는 의미가 현실의 교회 선교의 역사 속에서 십자군 전쟁, 식민지 정복, 토착 종족과 문화 말살 등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기 때문이다. 오스트리아의 정치가 Peter Pilz는 그의 책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두를 대적하여-미국의 세계 지배를 위한 전투”(Mit Gott gegen alle - Amerikas Kampf um die Weltherrschaft, Deutsche Verlags-Anstalt, Stuttgart - M?nchen 2003)의 첫 번째 ‘Bin Bush’라는 장에서 mission이라는 말로 미국 대통령 부시의 이라크 침공과 9.11테러의 배후세력으로 알려진 빈 라덴의 테러를 mission이라는 단어로 비교하고 있다. 둘은 신의 소명을 받아 악을 제거하는 mission을 받았다고 믿는 믿음에서 살인과 전쟁까지도 불사한다는 것이다. 부시는 세상에 악의 세 축을 그리고 그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닌 폭탄으로 제거해야 평화가 온다는 것을 mission으로 이해한다는 것이다. 톰 크루소가 나오는 미국영화의 제목 Mission impassible 은 거의 불가능한 첩보작전을 이루는 전사(戰士)의 사명을 나타내는 말로 mission을 사용한다.

어떻게 예수가 이해한 제자들을 보내는 다른 사람을 위하여 스스로 희생하고 봉사하며 스스로 십자가를 지는 선교라는 말과 그 의미가 사람을 죽이는 일에까지 같은 단어로 사용이 가능해 졌을까? 이것은 미국이라는 나라가 인디언들의 땅에서 그들을 제거하고 자신들의 삶을 영역을 기초 놓았던 역사적 문화적인 경험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이러한 영어의 영향이 한국에서는 교회가 교인과 그들의 행사를 나타내는 말로 기도 특공대, 전도폭발, 여리고 함락작전, 40일 기도 작전 등을 자연스럽게 사용하여 폭력으로 전쟁을 수행하는 일과 선교를 혼동하게 하는데 별무리가 없게 만든 듯하다. 전쟁의 사명은 철저히 보낸 자의 이익을 위하여 상대를 폭력으로 제압하고 제거하여 승리를 하는 것이 목적이듯 mission이라는 단어는 그렇게 잘못 이해되기가 십상이며 실제로 그러한 양상이 어렵지 않게 목격되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자인 사람들, 교회 주변의 이웃들을 사랑의 감동을 받아 변화시켜야 할 하나님의 피조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마귀의 자식, 적으로 보고 제거해야 할 상대로 보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선교라는 우리의 말은 세계교회의 잘못된 선교이해를 바로잡는 신학적 용어로 사용하기에 아주 적합한 것이다. 우리의 선교라는 말로는 사람을 죽이는 일까지를 사명으로 착각하는 파괴적인 일은 감히 상상할 수도 없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말의 선교는 복된 소식의 복음이다. 다만 사람들에게 말로 복음을 전하고 몸으로 사랑을 나누며 베푸는 사람으로 다른 이들을 감동케 하는 것이 선교로 이해 될 수 있을 뿐이다.

현 독일의 선교신학을 대표하는 테오 쥰더마이어(Theo Sundermeier)는 그래서 선교가 무엇인가를 정의하다가, 서구와 제1세계의 말로는 예수가 제자를 보내고 전 세계를 복음화하려는 의미를 나타낼 수 없다고 고백하고 제3세계의 인디언들의 축제의 언어인 콘비벤쯔 (Konvivenz, 함께 어울려 축제함)라는 단어를 사용할 것을 권한다. 선교는 서로 배우고, 서로 도우며, 서로 나누며 함께 하나님 나라의 축제를 준비한다는 것이다. 그는 무엇보다도 기독교의 선교라는 말이 가지고 있는 자기중심적이며, 폭력적인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본디 하늘을 경외하며 인간을 사랑하는 경천애인(敬天愛人)의 민족성을 가진 한국의 교회가 만들어내고 오늘날까지 전승해온 선교라는 말의 가치를 인정하고 세계에 알리는 우리의 노력이 필요하다 하겠다. 예수가 몸으로 실천하고 제자들과 교회들에게 사명으로 남겨준 사역, 예수가 제자들을 보낼 때, 사용하셨던 ‘너희는 가서’(마 28:19) 라는 아포스텔레인은 ‘선교’라는 우리의 말 속에 자연스럽게 살아나는 하나님께서 선물하신 한국교회의 축복이다. 우리 선교하러 갑시다!

 

출처:선교타임즈

출처 : 내 사랑 중국 [MyLoveChina]
글쓴이 : null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