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해방둥이’란 말이 유행했다. 1945년에 태어난 사람들을 말한다. 그만큼 해방은 우리에게 큰 상징적 의미를 가져다 준다. 하지만 건국 60주년을 맞은 올해에는 ‘해방’이란 말보다 ‘건국’이란 표현이 더 와 닿는다. 해방이 우리에게 독립을 가져다 줬지만, 건국은 우리를 현대사회로 이끌고 부(富)까지 가져다 준 일대의 사건이기 때문이다.그래서 그런지 일부에서는 ‘건국의 역사를 혁명의 역사’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우리의 생활상은 건국 이후 어떻게 변했을까. ‘건국 60주년 기획’으로 세 차례에 걸쳐 변화상을 짚어본다
衣 60년대 초록동색 ‘간소복’서 90년대 각양각색 ‘개성복’
‘옷은 날개’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헐벗고 굶주린 시절의 옷은 사치에 불과했다. 보릿고개에 꿀꿀이죽으로 연명하던 시절, 화려한 옷이 무슨 소용이 있었겠는가?
해방 이후 의생활의 큰 변화는 1961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정권을 잡으면서 시작됐다. 당시 박 전 대통령은 재건국민운동을 내세우며 국민들의 정신 개조를 강력하게 추진했는데 옷도 개조 대상이었다. 이에 따라 정부는 1961년 10월 전 국민에게 ‘표준 간소복’을 정해 입도록 했다.
‘표준 간소복’은 종전의 헐렁한 한복 대신 활동하기에 편한 ‘간편복’이란 의미로, ‘표준’은 국가에서 일률적으로 지정했다는 뜻으로 해석하면 된다.
복식 전문가들은 “당시 표준 간소복을 만든 이유는 한복에 비해 돈이 적게 들고 옷값에 소비되는 돈을 아껴 쓸 수 있는 데다 착용 시 새로운 정신을 함양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고 말한다.
특히 간소복은 주로 양복을 입던 사람들에게 양복 대신 입도록 하는 복장으로 알려진다. 남자 근무복, 여자 근무복, 여자 개량한복, 남자 여름 노동복, 근무복에, 학생들의 교복도 일종의 표준 간소복이다. 그러나 사회 전반에 걸친 간편복 바람은 한편으론 패션 자유화의 걸림돌로 작용했다. 국민들의 정신을 개조했을지는 모르지만 몰개성이란 역풍을 가져온 것이다.
당시 한 언론 사설에는 “교복 입은 학생들은 꼭 군인 같고 나쁘게 말하면 죄수들 같다”고 묘사했다고 한다. 심지어 행정부서의 어느 장관은 근무복을 왜 입지 않느냐고 기자가 묻자 “간소복을 하루 종일 입으면 왠지 정신적으로 부담이 가고 여유가 없어 월요일에만 근무복을 입는다”고 변명했다는 기사도 있다.
하지만 꿈틀거리는 자유화 바람 앞에서는 간소복도 변화를 겪어야 했다. 1960년대 말부터 월남전에서 돌아오는 군인들의 영향으로 월남치마가 유행했고, 1967년 미국에서 들어온 가수 윤복희에 의해 미니스커트가 폭발적인 인기를 끌기도 했다.
1970년대 들어서자 서양 옷이 우리의 평상복으로 완전히 자리 잡았다. ‘OO라사’, ’XX양복점’이니 하는 양복 맞춤집이 이때 큰 재미를 보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패션업계의 한 관계자는 “당시 기성복을 만드는 회사가 없던 것은 아니지만 맞춤집이 기성복집의 기술을 훨씬 앞질러 맞춤인기가 높았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80년대 초에 접어들면서 수제품 양복점은 기성복점의 기세에 눌리게 된다. 반도패션, 삼성물산, 코오롱, 한일합섬, 제일모직 등 대기업들이 옷 사업에 뛰어든 때문이다.
또한 1980년대 컬러TV, 1982년 교복 및 두발 자율화, 1988년 서울올림픽과 해외여행의 자유화 등은 패션산업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특히 1990년대 이후 웰빙바람은 건강과 함께 패션의 중요성을 일깨웠고, IT산업 발달에 따른 통신판매의 증가는 입을 거리를 한층 화려하고 다양하게 만들었다.
食 끼니 굶던 ‘보릿고개’ 넘어 이젠 비만·성인병과의 전쟁
오늘날의 시대를 ‘영양 과잉의 시대’라고 한다. 너무 잘 먹고 잘 지내서 생긴 고급병이다. 하루 한 끼도 먹기 힘든 아프리카 사람들을 생각하면 한심스러운 일이겠지만 지금의 우리 현실을 고려하면 영양 과다는 가장 큰 적(敵)이자 병(病)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고급스런 병을 달고 산 게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란 점을 안다면 아이러니 하기까지 한다. 초근목피(草根木皮)니 보릿고개를 겪었던 시절이 불과 50~60년 전의 일이기 때문이다.
정부 관계자는 “해방 이후 기아 문제가 하도 심해 ‘기아해방한국위원회’가 설치되기도 했다”며 “당시에는 굶주림이 엄연한 현실이었다”고 말했다.
더욱이 설상가상으로 터진 한국전쟁은 국민을 사지로 몰아넣기에 충분했다.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야’라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였다. 한국생활사박물관에 따르면 한국전쟁 3년 기간 중 피해액은 전쟁 전 총국민소득의 2배 수준인 30억3200만 달러에 달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미군의 원조물자가 당시에는 가장 요긴한 먹을거리였다고 한다.
1950년대를 힘겹게 넘긴 정부는 식량난 해결에 국력을 쏟아 붓는다. 그래서 제일 먼저 시행한 정책이 보리혼식과 분식을 권장하는 정책이었다. 이러한 정책은 보리밥, 콩밥, 조밥, 잡곡밥 등의 소비를 늘렸고 하루에 한 끼는 밀가루를 먹자는 운동도 펼쳐졌다. 때마침 미국에서 밀가루 중심의 잉여 농산물이 들어와 밀가루, 설탕, 식용유, 우유 등이 일반화되는 계기도 됐다. 우리나라 식생활의 신기원인 ‘라면’도 이때 개발됐다.
한편으로는 1962년 4월 농촌진흥청을 중심으로 곡류 위주의 식사형태 개선, 영양식품 증산, 식량자급 및 국민 체위 향상을 위한 응용영양사업(Applied Nutrition Program)도 진행됐다.
엄기철 전 농촌진흥청 농업과학기술원장은 “당시 10개 마을에서 시작한 응용영양사업은 농민의 식생활 개선과 영양 향상에 기여한 바가 크다는 유엔기구의 평가를 받았다”며 지금도 전 세계적으로 성공한 우수사례로 꼽히고 있다”고 소개했다.
1970년대 들어서는 쌀의 자급이 가능했다. 1971년 다수확 품종인 통일벼가 개발되면서 쌀 생산이 늘었고 77년에는 600만 톤의 쌀을 생산하기에 이른다. 특히 70년대에 불어닥친 산업화바람은 인스턴트식품을 국내에 첫 상륙시켰다. 정덕수 SPC그룹 홍보팀 차장은 “70년대 산업화는 식생활에도 불어와 먹을거리 산업을 소규모 수공업에서 대규모 공업화로 전환시키고 식품의 생산·가공·저장 등이 발전하면서 조미식품과 간식까지 다양화시켰다”며 “이런 현상은 즉석식품, 인스턴트식품이 우리 식생활에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계기가 됐다”고 설명했다. 특히 1979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패스트푸드점인 롯데리아가 들어서며 식생활 변화를 예고하기도 했다.
1980년대 들어서는 식생활구조가 더욱 서구화됐다. 외식산업이 붐을 이뤘고 육류 소비가 크게 증가했다. 대신 식생활 변화에 따라 늘어나는 성인병 발병률을 줄이기 위해 건강식품, 무공해식품, 자연식품 등이 새로운 대체식품으로 등장했다.
1990년대를 거쳐 2000년대에 들어서는 식생활 화두인 웰빙과 함께 광우병, 조류독감 등 식품재료 안전에 대한 관심이 모아졌다. 또한 식생활의 서구화로 간과됐던 전통식품이 재조명받으며 한류 열풍의 근원지가 되고 있다.
住 갈수록 진화하는 아파트…주상복합, 꿈의 타운으로 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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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 후 60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옷, 음식과 함께 주택도 많은 변화를 겪었다. 새마을운동 노래에 나오는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히고…’라는 가사가 현실이 됐다.
한국전쟁을 겪으며 우리나라의 주택난은 심각한 정도였다. 서울만 해도 전체 주택의 30%가 파괴되었다고 하니 그 시절의 주택사정을 짐작할 만하다. 그래서 정부는 1955년 대한주택영단을 통해 ‘국민주택’을 공급하기 시작했다. 당시 국민주택은 단독주택이나 연립주택의 형식을 띠고 있었다. 특히 서구의 건축 개념을 도입해 부엌과 화장실이 현대화됐고 거실이 새롭게 도입되는 등 주거 수준이 한 단계 뛰어올랐다.
1960년대에는 경제성장과 함께 ‘아파트’라는 신개념의 주거지가 속속 등장했다. 물론 이에 앞서 50년대에 이미 ‘종암아파트’, ‘개명아파트’ 등 아파트란 이름의 주택이 건설됐지만 엘리베이터도 없고 연탄보일러를 사용한 구세대의 개념이었다.
그래서 현대적 의미의 아파트는 1962년 건설된 ‘마포아파트’를 효시로 본다. 마포아파트는 6층, 10개동의 642가구로 아파트단지의 시대가 열리는 출발점이 됐다.
건설업계의 한 관계자는 “196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경제성장을 하면서 일자리를 찾아 서울로 이주하는 사람들로 주택난이 심각했는데, 빠른 시간 내 주택을 대량 공급해야 한다는 생각에 도시지역을 중심으로 아파트가 대량 공급되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1970년대 이후 아파트는 주로 중산층 위주로 공급됐다. 1970년 국내 최초로 중앙공급식 난방이 도입된 ‘한강맨션’을 시작으로, 1971년에는 국내 최초의 고층 아파트인 ‘여의도 시범아파트’가 들어섰다. 여의도 시범아파트는 12~13층 규모로 지어져 장안의 화제가 됐으며 20~42평에 이르는 대형 평수를 도입하기도 했다. 또한 1974년에 건설된 반포 1단지 아파트는 생활권 개념을 도입해 한국 최초로 단지 내에 편의시설을 설치했다.
1980년대와 1990년대에는 초고층 대형 평수의 아파트가 인기를 끌었다. 아파트 건설지역이 수도권으로 확대돼 과천, 목동, 상계동 등에 대규모 단지가 들어섰고 1988년에 지어진 올림픽 선수촌 아파트는 25층이 넘는 초고층이었다.
특히 90년대 200만호 주택건설에 힘입어 아파트 건설은 최정점에 이른다. 고층·고급·대형화는 물론 ‘초고층 주상복합아파트’가 새로운 유형으로 등장했다.
기존의 아파트가 상가·유치원·학교 등 편의시설을 단지 내에서 해결한 반면 이 아파트는 단일 건물 내에서 해결한 점이 특징이다. 주로 저층에는 상가, 상층에는 주거용 아파트가 들어서는 구조다. 특히 최근 강남 도곡동, 경기도 분당 등 부유촌에는 헬스클럽, 파티장, 호텔로비 등을 갖춘 초호화 복합아파트들이 건설돼 소비자들을 유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