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의 목회관과 한국 교회의 과제 - 사회복지의 목회적 의미를 중심으로
1. 들어가는 글
16세기 종교개혁은 중세 세계로부터 근대 세계로 전개되는 역사적인 시점에서 그 근본적인 신학적 패러다임을 변혁시킨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종교개혁은 결과적으로 개신교회를 탄생시켰다. 이 개신교 신학의 최고의 정수가 칼빈이라고 하는 데에는 이견이 거의 없다.
개신교회의 신학을 종합했던 칼빈의 장점은, 그의 신학을 실제로 적용했던 교회 현장이 있었다는 점이다. 칼빈은 실제로 1536년에서 1538년, 그리고 1541년에서 1564년 그의 임종시까지 거의 전 생애를 제네바 시의 교회에서 활동했다. 물론 1538년에서 1541년까지의 3년간의 스트라스부르그 나그네 생활 가운데서도 칼빈은 한 번도 목회를 중지한 적이 없었던 것은 물론이다. 칼빈의 신학은 언제나 목회 현장과 분리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칼빈의 교회 사역의 기본이 되는 그의 신학적 특징이 무엇인가를 탐구하면서, 동시에 칼빈의 사역이 실제적으로 어떻게 전개되었는가를 연구하는 것은, 이론과 실천 모든 면에서 매우 유익한 신학적 작업이 될 것이다.
칼빈의 목회관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16세기 초에 유럽이 직면한 사회적 문제들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당시 교회의 목회 현장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 논문은 먼저 보다 넓은 16세기 유럽이라고 하는 환경을 전제하면서, 작은 도시로서 개신교 정신과 국가주의가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었던 칼빈 당시의 제네바라고 하는 세부적인 사항을 탐구할 것이다.
본 논문은 칼빈이 이 제네바에서 실행했던 목회 사역의 특징을 연구해 볼 것이다. 특별히 제네바에서 칼빈이 실천했던 교회의 자선 활동에 초점을 두고자 한다. 칼빈 탄생 500주년을 맞아, 한국 교회가 칼빈의 목회 사역으로부터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를 숙고해 볼 때, 교회의 자선 사업은 한국 교회의 현장에서 비교적 간과되고 있는 점 중에 하나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한국 교회는 자신의 장점을 계승하면서도 미흡한 점을 더 보강하여 보다 나은 방향을 제시 받을 수 있을 것으로 사료된다.
따라서 칼빈의 신학적 전망이 16세기 제네바의 목회 현장에서 어떤 모습으로 전개되었는지에 초점을 맞추어 탐구하는 본 논문을 통해, 한국 교회가 무엇인가 교훈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은 한국 교회를 위해서 유익한 일이 될 것이다.
2. 16세기 유럽 교회의 목회적 환경의 변화
2.1. 사회적 환경 변화에 따른 사회복지의 필요성
16세기는 여러 의미에서 중세에서 근대적인 토양으로 발전되는 변화의 시대였다. 신학적으로 보면, “오직 성경”과 “오직 믿음”, 그리고 “오직 은총”의 원칙은 중세 말 교회로 하여금 자신의 본질적인 정체성을 발견하도록 촉구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운동은 비단 신학적인 측면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이 역동적인 16세기는 사회 복지의 역사라는 측면에서 볼 때도 큰 전환점이었고, 실제로 현대적 의미의 사회복지가 출발하게 된 시기라고 말할 수 있다. 이 16세기 유럽 사회의 큰 특징중의 하나로서 사회복지의 변화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중세 말의 유럽 사회는 사회적으로 매우 불안한 시기였다. 페스트가 발생하여 유럽인들을 괴롭히고 있었고, 백년전쟁(1337-1453)을 비롯한 각종 전쟁들은 인간적인 삶을 크게 위협하고 있었다. 사회적으로는 중세의 봉건 제도가 회의와 도전 앞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이런 변화들은 유럽 사회 안에서 구걸하는 농민들이나 군인들, 그리고 부랑자들의 숫자를 점증시켰고, 이것은 당시로서는 큰 사회적 문제를 야기시키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 거지들과 부랑자 문제는 당시 유럽의 교회와 사회 기구들이 해결해야 할 가장 중요한 사회적 이슈 중의 하나였다. 특히 당시의 도시들이 주로 이런 큰 문제들에 직면하게 되었고, 따라서 사회 복지 문제는 긴요한 사업이었다. 따라서 교회가 이 문제에 대해서 문제의식을 철저하게 갖게 되었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이 시기에 유럽 내 여러 곳에 존재했던 빈민 구제를 위한 기금과 행정이 중앙 집권화 되었다. 이 조직화 과정은 대륙 전역에 걸쳐 발견된다. 그러므로 16세기에 급격하게 발전하게 되는 사회복지 법령들의 큰 특징들은 조직화, 중앙집권화, 그리고 세속화라고 할 수 있다. 독특한 점은 16세기에 이르러 교회는 말할 것도 없고 국가 당국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자선 사업에 책임의식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2.2. 제네바의 역사 발전과 목회적 환경의 변화
2.2.1. 제네바의 정치적, 종교적 상황
제네바는 종교개혁 전에 사보이인들에 의해 좌우되었고 도시의 중심에 있는 가톨릭 성당을 중심으로 추기경에 의하여 통치되었다. 전형적으로 정치와 가톨릭이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서로 깊이 얽혀 있었던 곳이었다. 한편 프랑스와 국경을 접하고 있으면서 간접적으로 프랑스의 종교적인 영향은 그대로 받는 상황이었다.
16세기 제네바는 사보이인들의 지배로부터 벗어나려는 도시인들의 반대 의지가 컸다. 그러나 주교가 사보이인들 편을 들었기 때문에 시민들의 애국적 정서는 가톨릭에 대한 반대로 흘렀다. 그래서 본격적인 동요가 시작되기 전인 1527년에 이미 제네바 사람들 사이에는 민족주의와 개신교 신앙과의 급속한 결합이 나타나게 되었다. 말하자면, 가톨릭 주의는 사보이인의 지배와 동일시되었으며, 사보이인들로부터 자유를 쟁취한다는 것은 주교를 쫓아내는 것이었고, 동시에 개신교로 돌아서는 것이었다. 결국 1534년 9월에 교회의 땅과 재산들은 제네바의 소유가 되었고, 1535년 10월 15일에는 미사가 마침내 폐지되었으며, 1535년 연말에 제네바에 있는 수도원과 유물과 성직자 계급제도와 함께 중세의 가톨릭은 무너지게 되었다.
전체적으로 볼 때, 1525년부터 1546년까지 제네바의 교회는 불안정, 불화 그리고 분열적인 변화를 겪고 있었다고 묘사할 수 있다. 실질적으로 말하면, 제네바 사회가 통제 불능의 상태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1546년에 접어 들면서, 제네바의 교회 구조는 안정적인 시기로 들어섰다. 이 기간에 유권자들은 질서를 선택하여 정치적 위기를 해결해 갔다. 1555년 이후 칼빈의 제네바의 목회적 혁신은 매우 현실적이고, 매우 분명한 사회 변화에 영향을 끼쳤다.
2.2.2. 칼빈 당시 제네바의 사회 복지 활동
16세기 사회복지 사업의 발전과 관련하여 중요한 구체적 사례로서 제네바 도시 국가를 들 수 있는데, 왜냐하면 이곳의 개혁은 매우 급진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16세기에 프랑스에서는 국가가 대대적으로, 또 합법적으로 칼빈주의자들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때 수많은 난민이 발생했는데, 이들 칼빈주의자들은 프랑스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제네바로 신앙의 자유를 찾아 모여들어 난민이 대거 발생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제네바는 가톨릭을 후원하는 이탈리아의 사보이로부터, 개신교를 주창하는 도시 국가로 이제 막 정치적인 독립을 획득했기 때문에, 박해받던 개신교도들은 난민이 되어 이 제네바에 모여들었던 것이다. 이것이 칼빈이 제네바의 부름을 받을 당시의 제네바의 사회적 환경이었다. 따라서 위와 같은 배경을 가지고 있던 제네바에서, 개혁 교회가 그 목회적 활동을 한다는 것은 다음의 몇 가지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첫째, 본 논문의 주제와 관련하여, 대거 발생한 프랑스 난민들이 인접한 제네바로 몰려왔고, 그로 인한 사회적 문제가 대두되었는데, 이것은 칼빈의 목회 환경의 중요한 변수가 되었다는 것이다. 즉 가난한 자들과 병든 자들이 많이 발생하게 되면서, 이것을 목회적으로 풀어야 하는 상황이 주어진 것이다. 칼빈은 “오직 성경으로” 라는 그의 신념에 따라 성경으로부터 통찰력을 얻어 구체적인 목회적 적용을 하게 되었다.
둘째, 제네바 도시 국가 안에서 교회가 종교개혁의 신학적 정체성을 세우는 일은 국가의 문제이기도 했다. 따라서 사회 복지의 문제에 있어서도 이 두 기관은 서로 밀접하게 관련을 갖게 되었다. 즉 사회 복지 활동은 교회의 문제이기도 했고, 동시에 국가의 의제이기도 했다. 제네바의 자선은 국가의 법에 의해 성립되었다. 신학적으로 보면 개혁주의의 자선 사업은 필연적으로 교회론적인 문맥에서 찾아진다. 이점은 사회 복지 문제에 있어서 제네바의 모델이 다른 지역과 차별되는 이유 중의 하나가 된다.
칼빈의 이상은 좀 더 넓게 교회의 역할을 강조한다. 그는 제네바에 최고의 설교적 영향력과 함께 콘시스토리의 기능을 통해 사회적 윤리적 기능을 형성하였다. 게다가 칼빈과 시 당국은 가난한 자들을 살피는 것과 의무교육의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것은, 옛 교회의 물건들은 종합 구빈원(Hpital Gnral)에 조달하고, 프랑스 구호 기금(Bourse Francaise)을 수립함으로써 대부분 해결할 수 있었다. 제네바에서는 목회에 있어서 종합적이고 의미있는 변화를 보게 되었다. 이 체계는 개혁된 사회가 현실을 만든다는 칼빈의 비전을 보여준다.
요약하자면, 16세기 칼빈이 목회를 감당할 때의 유럽 사회는 위에서 살펴본 바처럼, 사회적 불안과 가난과 질병이 큰 문제로 대두되어 있었다. 이것이 새로운 신학으로 무장하면서 등장하고 있었던 개신교회가 실제로 활동을 펼쳐야 하는 삶의 환경이었다. 특히 칼빈은 이런 제네바의 상황 속에서 그 목회적 사역을 감당 했다. 따라서 칼빈 당시의 제네바에서 사회 복지는 교회와 국가 모두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로 발전하게 되었으며, 이 제네바에서의 칼빈은 양과 질에서 큰 목회적 변화를 주도했다.
3. 사회 복지 목회를 위한 칼빈의 신학
이상과 같은 목회적 환경 속에서, 칼빈은 어떤 신학을 가지고 목회적 활동을 펼쳤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먼저 기독교강요의 초판(1536년)과 최종판(1559년)을 중심으로 그의 신학적 전망을 고려할 것이며, 이 후에는 그의 성경 해석을 통해서 칼빈의 목회와 사회 복지의 관계를 조명할 것이다.
3.1. 기독교강요에 나타난 교회의 정체성과 사회 복지
3.1.1. 교회의 본질적 사역과 자선
칼빈은 그의 기독교 강요에서 사도행전 2장 42절을 인용하면서 교회의 본질적인 사역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이 사도행전 2장 42절은 칼빈의 기독교강요 초판(1536년)과 1559년 최종판에 모두 나타난다.
칼빈은 이곳에서 성만찬을 받는 초대교회 성도들의 모습을 설명하면서, 사도들은 성만찬을 “엎드려 숭배한 것이 아니라, 앉아서 받아 먹었다”는 점을 환기시키고 있다. 따라서 성찬은 떡을 경배하는 것이 아니라, 떡을 떼면서 교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교회의 정체성과 구제와의 관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교회의 본질적인 사역을 자선 사업과 연결시킨 부분이다. 이것은 기독교강요 초판과 최종판 모두에 나타나는데 다음과 같다.
누가는 사도행전에서 그것이야말로 교회의 관습이었다고 말한다. 믿는 자들이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떡을 떼며, 교제하며, 기도하기를 계속했다” (행 2:42)고 그는 말하고 있다. 그리하여 교회의 어떤 모임도 말씀과 기도와 성찬과 구제 없이는 이루어지지 말아야 한다는 불변의 법칙이 생겼던 것이다. 그것은 또한 고린도인들 사이에 확립된 규례이기도 했다는 것을 우리는 바울의 말로부터 넉넉히 추정할 수 있다.(고전 11:20).
칼빈은 사도행전 2장에 등장하는 초대 교회로부터 교회의 4대 사역을 주장하고 있다. 칼빈에 의하면 교회의 집회 때마다 반드시 시행되어야 하는 것이 4가지가 있다. 그것은 첫째 말씀을 가르치고, 둘째 기도를 드리며, 셋째 성찬에 참여하며, 넷째 구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칼빈에 의하면, 이 네 가지, 즉 말씀과 기도와 성찬과 구제 없이는(sine verbo, orationibus, participatione coenae et eleemosynis) 어떤 교회의 모임도 없다는 것이 교회론적인 변함없는 규칙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우리는 칼빈이 교회의 예배를 구제와 구별하여 말하지 않았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다. 말씀을 듣고, 공적인 기도를 하며, 성찬을 하기 위해서 교회로 모이는 공동체는 동시에 반드시 구제를 시행하는 것이 초대교회의 규칙이며, 이것은 변경되지 않고 내려오는 규정이라는 것이다.
한편 기독교강요 초판에 나타나는 칼빈의 이런 사상은 그의 기독교강요 최종판(1559)까지 지속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칼빈은 초판의 내용을 가감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이와 같은 칼빈의 기독교강요 내용에 근거한다면, 교회의 목회적 활동에 반드시 구제 및 자선 사업이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3.1.2. 이중의 집사직과 자선
칼빈은 또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가르침을 제시하고 있는 로마서 12장을 주석할 때, 교회의 자선 사업을 교회론의 차원에서 접근하여 해석하고 있다. 즉 집사를 2개의 직으로 나누어서 각각 자선의 사역을 감당하도록 하고 있다.
칼빈은 먼저 그의 기독교강요 최종판에서 교회 안의 직분을 설명하면서, 다스리는 직과 구제하는 일의 두 가지를 지적하고 있다.
… 우리가 인용한 에베소서 4장에서 (엡 4:11) 바울은 다른 직분들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로마서와 (롬 12: 7-8) 고린도전서에서 (고전 12:28)는 다른 직분들을 능력, 병고치는 은사, 통역, 다스리는 것, 구제하는 것이라고 부른다. 나는 이 가운데서 두 가지는 일시적인 것이며 길게 논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해서 생략하겠다.
그러면서 칼빈은 “다스리는 일과 구제하는 일 두 가지는 영구적인 것이다”라고 기술하면서 교회 안에서 구제하는 직분의 영속성을 부여하고 있다.
한편 칼빈은 본격적으로 교회의 집사 직분을 설명하는 부분에서는 보다 명확하게 집사의 사역을 사회 복지적인 측면으로 강력하게 부각시키고 있다.
칼빈은 집사의 직분을 이렇게 정의 내리고 있다. 우선적으로 집사들이 맡은 것은 구제하는 사역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칼빈은 로마서 12장 8절에 등장하는 두 종류의 구제에 대해서 언급한다.
그러나 로마서에는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고 (롬 12: 8) 두 가지 종류에 관해 언급하였다.
여기서 바울은 교회 안에 있는 공적인 직분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분명하며, 따라서 집사직에는 두 가지 다른 등급이 있었을 것이다.
이 기독교강요에서 칼빈은 집사를 “구제 물자를 나누어 주는 집사”와 “가난한 자와 병자들을 돌보는 사람들”을 모두 지칭한다고 보았다.
만일 내 생각이 틀리지 않는다면, 바울은 처음 문장에서 구제 물자를 나누어 주는 집사들을 가리킨다. 그러나 둘째 문장은 빈민과 병자들을 돌보는 사람들을 말한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말한 과부들도 두번째에 속하였다.(딤전 5: 9-10).
그러므로 칼빈은 집사를 구제 행정을 보는 역할을 맡은 집사와, 실제로 가난하고 병든 자들을 찾아가서 위로해 주는 집사로 나누었던 것이다.
칼빈은 계속해서 이 두 종류의 집사들의 역할을 명확하게 지적하면서 우리는 이 두 종류의 집사들의 사역을 마땅히 본받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 해석을 인정한다면 (또 인정해야 한다), 집사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교회를 위해서 구제 사업을 관리하는 집사들과 직접 빈민들을 돌보는 집사들이다. Diakonia라는 말에는 더 넓은 뜻이 있지만, 성경에서 집사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교회가 구제물자를 분배하며, 빈민을 돌보고 빈민 구제금을 관리하는 일을 맡긴 사람들이다. 그들의 기원과 임명과 직분에 대해서는 누가가 사도행전에 기록했다.(행 6:3)… 그러므로 사도들의 교회에는 이런 종류의 집사들이 있었고, 우리도 그것을 본받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므로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칼빈은 교회에 영속적으로 존재하는 직분으로서 집사를 위치시켰다. 따라서 칼빈에게 있어서 이 집사는, 구제 행정을 감당하는 자들과 실제로 가난하고 병든 자들을 찾아가서 구제금을 전달하고 위로하는 자들의 2중의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3.2. 성경 주석에 나타난 교회의 표지와 사회 복지
3.2.1. 교회의 본질적 사역과 사회 복지
칼빈은 사도행전의 앞부분인 1장에서 13장에 대한 자신의 주석을, 덴마크의 왕 크리스티안 3세에게 보내는 헌정사와 함께 1552년에 출판했다. 뒷부분인 14장에서 28장은 1554년에 출판되었다. 한편 칼빈은 1560년 사도행전 주석의 제2판을 출판했다. 그러므로 사도행전 2장 주석에 나타나는 칼빈의 신학 사상은 1550년대 초반의 그의 사상을 드러내 준다고 할 수 있다. 즉 이 사도행전 주석을 통해서 우리는 기독교강요 초판(1536년)에서 최종판(1559년)으로 가는 중간 기간의 칼빈의 사상을 엿볼 수 있다.
칼빈은 사도행전 2장 42절에 나타나는 초대 교회의 사건에 대한 요약적인 기록을 주석하면서, 분명하게 교회의 본질적인 정체성을 자선과 연결시키고 있다. 칼빈은 먼저 교회의 본질적인 특징 중에서 “사도들의 가르침”과 “기도”는 그 의미가 분명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칼빈은 교제하는 일과 떡을 떼는 일에 대해서는 당시의 해석들에 대해서 반대하고 있다. 즉 떡을 떼는 것을 주의 만찬으로 보거나, 자선으로 이해하거나, 혹은 성도들의 음식 교제로 해석하는 것을 반대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다른 사람들은 코이노니아를 성찬의 집행이라고 하는 것도 반대한다. 왜냐하면 칼빈이 볼 때 코이노니아는 특별한 설명이 없는 한, 성찬의 의미로 사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칼빈은 교제함, 즉 코이노니아를 상호 교제, 자선, 또는 기타 형제간의 사귐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칼빈이 사도행전 2장 42절의 주석에서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는 것은, 교회의 참되고 성실한 모습을 판단할 수 있는 특성으로서의 네 가지이다. 칼빈이 볼 때, 그리스도의 참된 교회의 모습은 바로 이 곳 즉 사도행전 2장 42절에 생생하게 나타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칼빈의 사도행전 2장의 주석으로부터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사도행전 2장 42절에 나타나는 교회의 모습, 즉 말씀과 기도와 성찬과 자선이 잘 행해지는 교회야 말로 질서가 잘 세워져 있는 참된 교회라는 점이다.
따라서 만약 교회가 하나님 앞에서와 천사들 앞에서 참된 교회로 인정받기를 원하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그 헛된 교회의 이름을 자만하지 않으려고 한다면, 칼빈에 의하면 반드시 위에 언급했던 네가지의 질서를 지키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1552년에 출판되었던 칼빈의 사도행전 주석에서 칼빈은 참된 교회의 본질적인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그것은 사도들의 설교의 말씀과, 기도와 성찬과 자선이다. 이에 근거한다면, 이 네 가지가 균형있게 실시되는 목회가 칼빈이 지향하는 이상적인 목회였던 것이다.
3.2.2. 로마서 주석에 나타난 이중의 집사직과 사회 복지
칼빈은 로마서 주석에서 12장 8절을 주석할 때 집사의 2중 직책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칼빈에 의하면, 바울은 주는 자들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교회의 공적인 재물을 분배할 책임을 맡고 있는 집사들을 지칭한다는 것이다.
한편 이에 대칭적으로, 칼빈은 자비를 가지고 고대 교회의 전통을 따라서 병자들을 방문하여 간호하는 책임을 맡았던 과부들을 언급하고 있는데, 칼빈은 명확하게 이 두 종류의 직책, 즉 가난한 자들에게 필요한 물자를 공급하는 책무와 그들을 위로하고 보살피는 것을 구별하여 별개의 직책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칼빈은 행정적으로 사회 복지 사역을 감당하는 자들은 기만이나 사람에 대한 차별없이 성실하게 맡은 임무를 감당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 또한 빈민들과 병자들을 찾아가서 위로하는 책임을 맡은 자는 즐거운 마음으로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3.2.3. 신구약 주석에 인용된 롬 12.8 해석에 나타나는 이중의 집사직과 사회 복지
(1) 고린도전서 12: 28절 주석.
칼빈은 바울이 상세하게 열거하고 있는 직무는 “분명히 그것은 오래 전에 교회에 있었는데, 지금은 우리가 알지 못하고 있는, 직무와 은사의 두 가지를 언급하는 말이거나, 혹은 가난한 자를 돌보는 말하자면 집사의 임무이었거나 두 가지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라고 해석하면서, 자신은 후자를 더 선호하여 자선 활동을 하는 집사의 임무로 이해하고 있다. 따라서 칼빈은 다시 이곳에서 앞에서 설명했던 두 종류의 집사를 언급하고 있다.
(2) 야고보서 1장 5절 주석
칼빈은 야고보서 1장 5절의 주석에서 길지는 않지만 짧게 바울이 사역자들의 너그러운 마음을 요청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구제를 강조하고 있다.
(3) 이사야 23장 18절 주석
칼빈은 이사야의 말을 통해서 우리는 일상적으로 행해지는 것보다 더욱 풍성하게 형제들의 필요를 공급해 주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칼빈은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이웃이 도움을 받아야 할 때, 사람들은 매우 인색하게 행한다.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의무나 수고의 친절을 기꺼이 행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줄 것을 그들 자신의 소유물에서 떼어 내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칼빈은 우리의 이런 잘못을 교정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자신해서 내는 것을 크게 칭찬하신다고 말한다. 따라서 칼빈은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하라는 집사들에 대한 바울의 명령을 모든 사람에게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칼빈은 또한 구제를 하나님께 구별하여 드리는 것과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제사라는 점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또한 가난한 자에게 주어진 것은 하나님께 성별 되어진 것이라는 선지자의 말은 우리의 주목을 끌 만하다. 그 밖의 다른 곳에서도 ‘이 같은 제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느니라(히13:16, 고후9:12)’고 성령께서 가르친다. 그가 제사를 드리도록 명하신 것은 결코 그 자신을 위해서였거나, 그것이 필요하였기 때문은 아니었다.
다시 한번 반복해서 칼빈은 우리의 소유를 이웃에게 제공하는 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향기로운 제물과 같다고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자선 행위가 크게 칭찬받으며 우리의 손은 선물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거룩하게 바쳐진 것임을 깨닫고 친절과 자비를 베푸는 일에 크게 힘써야 한다”고 칼빈은 그의 주석을 마무리하고 있다.
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칼빈은 교회에서 집사의 직분을 통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구제하며 자선을 베푸는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이것으로부터 우리는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향한 교회의 자선 사역은 결국은 하나님을 향하는 예배이며 교회의 본질적인 사역이라는 칼빈의 목회 신학을 발견할 수 있다.
4. 칼빈의 사회 복지 목회의 실제
4.1. 칼빈과 제네바 종합 구빈원(Hpital Gnral)
복지 개혁을 위한 움직임의 확산은 거의 정확하게 종교개혁의 확산과 함께 동시에 일어났다. 종교개혁자들은 많은 정통 가톨릭에게 도전을 주었다. 칼빈의 리더십 아래에서 제네바는 교회 조직 안에서 가장 철저하고 완고한 개혁을 개발하였다. 그것은 또한 초기 개신교들이 어떻게 사회복지에 대한 행정을 개혁했는지에 대한 모델이 된다.
제네바의 복지 개혁은 당시의 다른 도시의 일반적 형태를 그대로 따랐다. 즉 교회와 목회자가 아닌 평신도가 빈민과 병자를 치료할 목적으로 운영하는 종합 구빈원이 그것인데, 빈민 구제 집중화라고 할 수 있다. 이 제네바 종합 구빈원(Hpital Gnral)은 개혁에 의한 설립이었지만 칼빈의 의한 설립은 아니었다.
이 종합 구빈원은 그들이 그들 자신의 필요를 채우지 못하고 있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에게 환대를 제공하는 다목적 기관이었다. 대부분 전쟁으로 인한 고아와, 자기 자신을 돌볼 수 없는, 너무 늙고, 아프거나, 심한 장애를 가진 소수의 노인들에게 집을 제공하였다. 그곳에서는 가난한 가정에게 빵을 매주 나눠주었고, 자신들의 숙박료를 지불할 수 없거나 막 제네바에 도착한 방문객에게 매일 저녁 쉼터와 음식을 제공하였다.
구빈원 안팎에서는 재정과 행정적인 책임을 맡는 집사(procureur)와 직접 빈민과 환자를 방문하여 돌보는 구제 도우미(hospitallier)의 주관 하에 자선행사가 열렸으며 구걸은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었다.
자발적 기부를 기대하고 장려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세속화된 교회 재산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했다. 칼빈은 직접 이 구빈원에 관여를 하지 않았으나, 서신을 통해 적극적 관심을 가지고 사역했다. 요컨대 칼빈은 이 제네바 종합 구빈원에 직접 참여하여 사역을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칼빈이 제시했던 집사 제도를 통해서 그는 사상적으로, 간접적으로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새로운 종합 구빈원(Hpital Gnral)의 방향은 평신도에게 넘겨졌다. 전임 구제 도우미(hospitallier)를 임용하였다. 그는 그의 가족과 함께 본부로 거처를 옮기도록 요구되었고 식사가 포함된 하숙이 제공되는 것으로 인해 이 자리가 많은 인기를 얻었다.
칼빈이 1541년 교회조직 구축의 총 책임을 맡기 위해 제네바에 돌아왔을 시점에는 복지 행정사(procureur)의 역할이 이미 정해진 것으로 보인다. 복지행정사(procureur)들은 이외에 다른 많은 특별한 임무가 있었다. 그들은 구빈원에 할당된 상당한 자산을 관리하는 책임이 있었다.
틀림없이 칼빈은 그의 글 여기저기서 구제도우미(hospitalliers)와 구빈원 복지행정사(procureur)들에 대해 언급하는데 특히 1541년에 스트라스부르에서 돌아온 직후 그가 감독하려던 개혁교회를 위한 정관으로 제네바 시를 위한 초안인 교회의 법령(ecclesiastical ordinances)에 많이 언급되어있다. 이러한 교회의 법령들은 교회 안의 사역을 네 종류로 구분하는데 네 번째가 집사에 관한 것이다. 더 나아가 칼빈은 집사를 두 가지로 구분하는데: 1) 가난한 자를 위해 구호금을 모으는 자들과 2) 이러한 구호금을 나누어주는 자들로 분리했다. 더욱이 칼빈은 그의 여러 글에서 집사와 관련하여 원리를 전개하였다. 이러한 진술들이 증거하는 것은 칼빈은 집사 직분이 오로지 가난한 자를 도와주는 일에 헌신하는 사역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한편 킹던 교수는, 칼빈이 제네바에 영향을 준 것이 아니라, 제네바가 칼빈에게 영향을 주어,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갖게 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칼빈의 기독교강요 초판을 보면, 칼빈은 이미 제네바 사역을 시작하기 전부터 교회의 본질적인 4중 사역, 즉 말씀과 기도와 성찬, 그리고 구제를 중요한 요소로 간주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4.2. 칼빈과 프랑스 구호 기금 (Bourse franaise)
종합 구빈원(Hpital Gnral)이 해결해 줄 수 없었던 제네바의 사회적 문제는 다른 나라로부터 이주해 온 많은 종교적 난민들을 돕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구빈원은 제네바 시민과 제네바에서 단기 체재할 계획을 가진 사람들의 문제만 대처하도록 의도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네바에 장기간 거주하기 원하는 난민들의 경우는 문제가 제기 되었다.
국제무대를 배경으로 한 종교 위기를 대비하려는 특별 헌금은 1545년 칼빈의 촉구에 의해 최초로 시작되었는데, 그 해 프랑스의 프로방스에서는 대대적인 개신교 박해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칼빈은 시민들의 각성을 촉구했고 원조를 구했으며, 탄원을 위해 여러 다른 도시들을 순회하면서 제네바에서 훨씬 멀리 떨어진 외부 지역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이런 문제 의식 속에서 현금 기금이었던 프랑스 구호 기금(Bourse franaise)이 칼빈에 의해서 세워졌다. 이 기금은 프랑스에서 제네바로 피난온 난민들, 즉 질병이나 가족의 문제나 프랑스에서 자산을 모두 상실하는 등, 더 이상 자신을 부양할 수 없는 가난한 프랑스 피난민에게 나누어 주기 위한 것이었다. 구빈원과는 달리 Bourse franaise는 사적인 기관이었다. 종교개혁 동안 제네바에 창립되었던 기관인 Bourse franaise는 칼빈의 목회와 사회 복지와의 관계 속에서 매우 중요하다.
이 곳은 기증한 사람들에 의해 선출된 집사의 직책을 가지고 있는 평신도들이 운영하였다. 이런 집사들은 돈을 걷고 분배하고 수입 지출 모두를 기록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Bourse franaise는 구빈원과 매우 유사했으나 처음부터 칼빈의 관심과 강력한 지지를 얻은 점에서 다르다.
칼빈의 광범위한 프랑스 구호 기금 활동을 고려한다면, 칼빈은 가난한 자들의 필요에 관심이 특심했으며, 그가 가치를 두는 사항을 진전시키기 위하여 국가와의 관계에서도 긴밀하게 활동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부제로 운영되는 망명자 단체는 정기적인 헌금을 후원받았는데, 이 단체는 제네바 빈민층을 위한 종합 구빈원과 같은 선상에 놓여 있었다. 망명가 사회는 그들 사회 속의 빈민과 불우한 사람들을 돌보고자 자신들 스스로 조직화하기에 이르렀다. 최대 규모의 망명자 단체는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집단으로, 가난한 구성원과 여행자를 후원하고자 정규 기금을 마련한 첫 번째 공동체였다. 집사는 기금 기부자들이 선출한 사람으로서 자금을 배분하고 빈곤층과 병자들에게 각별히 신경을 쓰고 돌볼 책임이 있었다. 망명자 단체의 회합에서 성직자의 참석은 관례였으며 유서 깊은 기업과 교회는 서로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올슨에 의하면, 많은 헌금 기부자들이 일정한 시간 간격으로 정해진 금액을 기부했다.
제네바의 망명자들을 위한 다양한 원조 물자와 함께 프랑스 및 다른 지역 교회에 대한 개혁가들의 관심사를 한데 모으면서, 구제헌금은 여기저기 흩어져 활동하고 있지만 서로 결속된 개혁 단체들 사이를 묶어주는 끈이 되었다.
5. 결론 : 칼빈의 목회관이 한국 교회에 주는 교훈
이상에서 우리는 칼빈이 목회 활동을 했던 16세기 유럽과 제네바의 역사적, 사회적 상황을 고찰해 보았다. 그리고 그런 목회 현장에서 실제로 목회를 감당했던 칼빈의 신학적 특징이 무엇 이었는지를 살펴 보았다. 특별히 본 논문은 한국 교회에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사회 복지와 목회와의 관계 속에서 칼빈의 목회 사역을 탐구해 보았다.
칼빈은 전쟁과 가난과 질병이 풍미하던 종교개혁 시대를 살면서 교회를 섬겼다. 그의 목회 또한 이런 현실을 저버릴 수 없었으며, 칼빈의 그의 기독교 강요와 성경 주석을 통해 자신의 신학을 가지고 해결책을 제시했다.
그것은 “자선”을 “말씀”과 “성찬”과 “기도”와 더불어 동일하게 주요한 교회의 본질적인 모습으로 보았다는 점이다. 그리고 칼빈은 이 본질적인 사회 복지적인 측면을 두 종류의 집사 제도를 통해서 목회적으로 풀어갔다. 그것은 재정적인 행정을 감당하는 복지 행정사와 실제로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방문하여 위로하고 격려하는 복지도우미였다.
이와 같은 신학적 이론을 가지고 실제로 칼빈은 그의 사역지였던 제네바에서 종합 구빈원(Hôpital Général)과 프랑스 구호 기금(Bourse française) 등을 통해서 목회의 장으로 펼쳐 나갔다. 칼빈의 위대한 점은 이처럼 신학이 이론에만 머문 것이 아니라, 늘 교회의 현장에서 함께 나갔다는 점일 것이다.
이상과 같은 연구에 근거하여 본 논문은 한국 교회를 향한 몇가지의 시사점을 제시하려고 한다.
첫째, 칼빈은 교회의 예배와 교회가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자선 활동을 이분법적으로 보지 않았으며, 오히려 자선을 교회의 본질적인 사역 중에 하나로 보았다. 그러므로 한국 교회도 신앙과 삶, 예배와 윤리가 불일치하여 사회 속에서 그 영향력을 상실하지 않도록 통전적인 목회관을 가져야 할 것이다.
둘째, 칼빈이 말하는 집사라는 직분은, 가난한 사람들과 병자들을 위해서 행정적으로 구호 기금을 모으고 또 실제로 방문하여 위로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한국 교회의 집사 직책, 더 나아가 한국 교회의 직분론은 과연 칼빈의 신학 위에 서 있는가를 돌아보아야만 할 것이다. 칼빈의 집사직은 단순히 교회 안의 행정 및 회계 관리에 그치는 항존직이 아니었다. 오히려 사회복지 개혁의 중추적인 역할을 감당한 사회개혁자였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현대 교회는 이 칼빈의 집사직을 잘 음미하여 사회 복지적인 차원에서 유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셋째, 그러나 칼빈은 교회의 목회직을 사회 복지적인 차원에만 제한한 것은 절대 아니라는 것을 환기해야 한다. 칼빈이 그의 기독교강요와 성경 주석에서 계속 강조하듯이, 교회의 목회적 활동은 말씀과 기도와 성찬, 그리고 자선(혹은 사회 복지)라는 네 가지의 요소가 잘 균형이 잡혀야만 한다. 다만 한국 교회가 다른 세가지 요소는 서양의 교회와 비교할 때 나름대로 잘 감당하고 있는 것 같지만, 마지막 사회 복지, 혹은 가난한 자를 위한 디아코니아는 아직 성숙하게 실천하고 있지 못하다는 인식이 있으므로 차제에 한국 교회가 더욱 돌아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
안인섭 교수(총신대 신학대학원 역사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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