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교회의 성장과 자립
아편전쟁으로부터 시작된 중국 복음화는 서방의 선교사들에 의한 일방적인 선교 역사로서 격동의 한 세기를 지냈다. 아편과 불평등 조약, 반제국주의와 반기독교 운동의 숱한 유혈의 계곡을 넘어 20세기를 맞았다 국권과 민족 자주권을 서방에게 짓밟히면서 그 시대의 상처들이 아물기도 전에 청조(淸朝)는 역사의 한을 안고 그 국력이 소멸되었다.
중국교회도 지난 날의 외국 선교부의 부속 교회로서의 탈을 벗고 자립 교회로서 그 모습을 갖추어 가게 되었다. 1911년부터 1919년까지는 중국 교회의 내지 전도의 황금 시기가 되었다. 이 때 요나단 고포드(Jonathan Goforth), 쉐우드(Sherwood Eddy), 존못트(John R. Mott) 선교사들의 활약도 매우 컸다. 전국 전도 운동 위원회(1914), 중국내 전도회(1918), 중국교회 선교부 등이 조직된 것이 바로 이때이다. 또 이 시기는 중국 교회 자립 운동의 전성기이기도 하다. 중국 남부의 <민남장로회>의 자립.자양(自立.自養)운동, 중부의 <중국예수교 자립회>, 북부의 <중화 기독교회>의 자립 운동이 이 시기에 실시되었다. 교회의 자립운동은 중국 교회 성장에 추진력과 자생력을 갖추게 된 것이다.
1910년부터 1920년까지 10년간의 중국 교회 실태를 보면, 교회의 자립운동이 교회 성장에 주효했던 것을 알 수있다. 이 어간에 선교사는 5,144명에서 6,204명으로 증가했으며, 중국인 교역자는 5,364명에서 9,663명으로 증가했는데 이 중에 여교역자는 1,789명이 3,304명으로 증가했다. 그리고 교인수는 10년동안 배로 증가하여 167,075명이 366,524명이 되었다. 교회당은 2,955개 교회가 4,727개 교회로, 전도소는 3,897개소에서 6,480개소로 각각 늘어났다.
1. 자립교회 운동
선교 방법면에 있어서 19세기와 20세기는 서로 대조적이다. 19세기 선교 방법은 사람을 모은는 데(숫적 증가) 역점을 두었다. 그러나 20세기 선교 방법은 사람을 키우는데(질적향상) 중점을 둔 것이다. 당시 세계적으로 수준 높은 선교사들이 이 시기에 중국에 옴으로 양적으로 성장 일로에 있는 교회들을 질적으로 육성시키는데 주효했다.
1) 자립 운동의 배경
선교사들이 질적 방법으로 선교 정책을 수정한 것은 몇 가지 점을 유의케 한다. 첫째는 19세기의 선교사 위주로 한 선교 방법이 결과적으로 부작용을 초래했기 때문이다. 둘째는 제국주의와 선교의 유착관계에 대한 인식를 씻기 위한 선교사들 자신의 각성이기 때문이다. 셋째는 중국 현지의 현대사적 상황을 고려한 것이다. 질적 육성으로서의 선교 방법은 또한 현지 교회를 현지인으로 지도케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있다.
이와 더불어서 정치 사회적 상황 역시 큰 몫을 차지한 것이다. 즉 1842년에서 1911년까지 69년 동안은 외국 열강국의 통상 및 외교 조약의 비호아래서 선교가 실시된 것이다. 이 시기는 현지 정부가 선교를 제한하고 있었다. 그리고 1912년에서 1937년까지 25년간 겨우 선교의 자유 시기였다고 할 수있다. 때는 신해혁명으로 군주제가 타도되고, 쑨웬(孫文)이 제창한 삼민주의(민족주의, 민권주의, 민생주의) 강령에 의하여 공화국이 태동함으로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단계였다. 쑨웬의 삼민주의는 당시 중국의 역사 진로를 제시한 민족 자각의 의의를 지니는 동시에 중국 교회사의 새로운 전기를 부여한 선교적 의의도 고려케하는 것이라 보여진다.
중국을 중국인의 중국으로 만들고, 중국의 정치는 중국인이 한다는 것은, 곧 민족 자립의 확고한 의지를 나타낸 것이다. 따라서 민족 자립의 의지는 교회 자립으로의 연계성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현지 교회들이 외국 선교부에서 이탈하여 독자적인 선교 운동을 벌인것은 고무적인 일이라 해야 할 것이다. 이에 따라서 선교사들이 질적 육성 방법으로 그 정책을 수정 실시한 것은 곧 민족 자립 운동에 부응하는 것으로 판단했을 것이라 간주되어진다. 그래서 선교사들은 현지 교역자 육성에 선교 사업적인 비중을 크게 두었던 것이다. 이 시기에 현지 교역자가 9,663명으로 증가하고, 교세가 크게 확장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배경을 특히 주의케 한다.
2) 자립 운동의 단계
중국 교회의 자립 운동은 대체적으로 4단계로 구분되고 있다.
- 선교사 위주의 선교 시기
- 선교사와 현지인의 협조 시기
- 중국인 위주의 자립 시기
- 중국인의 선교 시기
이러한 단계의 실현이 지역에 따라서는 그 시기가 상당한 차이를 나타내 보이기도 한다. 예를 들면 해안 지역 교회가 제 2단계 시기일 때, 내지의 교회는 아직 제 1단계에 머물러있다. 해안 지역 교회와 내지 교회의 성장 단계는 시간적으로 약 20년 내지 30년의 차이를 보인다. 이에 대하여는 다음 도표를 참고로 한다.
이 도표에 나타난 대로 가장 빠른 성장의 속도를 보이는 지역은 중국 외지 지역 즉, 동북, 서북,서남 지역이다. 이외 비교적 성장 속도가 빠른 지역은 민남, 절강, 온주 일대의 교회들이다.
3) 자립 운동의 모델
중국 교회의 발전은 중국 역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발전의 방법은 자립과 자양이다. 지역에 따라서는 자립 운동이 형식상의 차이가 다소 있으나 교회의 발전의 속도는 매우 신속했던 것이다. 이에 대하여 중국은 세 지역으로 나누어 그 실제적인 모델을 들어 본다.
중국 남부 지역에 민남 장로회는 종파 교회 가운데 자립, 자양을 실시하며 가장 성과가 좋은 교회로 소개된다. 민남 장로회는 선교 55년 후(민남선교 20년후), 존 톨메지(John Tolmage)선교사가 제안한 선교 정책이 실시되면서 그 성과를 크게 나타내었다. 존 톨메지는 한 지역에 한 종파교회를 각 선교부가 협력하여 세우는 전략을 주장했다. 존 톨메이지의 전략에 따라서 영국, 미국, 두 장로회 선교부가 협력하여 민남 장로회는 선교초기부터 외국 선교부에 의존하지 않고 중국인 위주로 자립, 자양하여 독특한 성장을 보였다. 1862년부터 1925년까지 83년간의 성장 내용은 다음과 같다.
중국 중부 지역의 <중국 예수교 자립회>의 경우는 외국 선교부와 완전 분리하여 자립한 교회이다. 예배의식, 조직, 전도인 훈련방법 등이 전통적인 교회와는 완전히 다르다. 중국 예수교 자립회는 1902년 상해 기독도회에서 시작되어 1936년에 46개 교회에서 1949년까지 총 194개 교회로 부흥되었으며, 지역적으로는 주로 중국 중부 지역에 분포를 두고 있었다.
이교회들은 완전한 토착화를 위해 총회와 같은 기구 편성을 두지않고 행정상의 직분 구별까지 없으며, 평신도가 성찬식을 거행할 수도 있는 특성을 갖었다.
1930년대에 발전한 웟치만니의 소군교회(小群敎會)나 <예수가정교회>들은 많은 지방 교회들이 이런 형식을 따랐다. 이들 교회는 조직상의 허약한 면도 있으나 개교회의 발전 추진력이 강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북부 지역의 <중화기독교회>의 자립 운동은 지식층과 상인들이 중심이되어 대도시 지역 위주로 발전하였다. 즉 북경,천진,연대,제남,청도 등이 주로 중화 기독교회 분포 지역이다.
4) 자립 운동과 인력 안배
대다수의 외국 선교사들은 본국 교회의 행정이나 제도를 그대로 선교 현지에 적용했던 것이다. 그러나 자립교회들은 선교부의 제도적 장치에서 벗어나, 지역 상황을 고려하여 인력을 안배하였던 것이다. 그 비율은 다음과 같다. 자립 교회들은 종파 관념이 희박하다. 이것은 중국 상황에서 선교의 토양에 대한 특수적인 의미를 고려한다. 당시 중국에는 130여 종파에 소속한 선교사들이 선교사 상호간의 이해 관계들로 물의를 빚은 일들이 적지않았다고 한다. 자립 교회들은 재정적 자립, 행정적 자립, 인력적 자립의 성격을 띠고 있다. 이런 성격에서 볼 때 토착 교회와는 그 성격이 다른 것으로 보아진다.
2. 토착교회 운동
혹자들은 자립 교회와 토착교회의 개념을 혼돈하고 있다. 그러나 자립 교회와 토착교회는 그 개념이나 형식이 구별되어야 할 것으로 사료된다. 자립 교회는 우선 경제적으로나 행정, 그리고 인력의 수급이 선교 현지인에 의하여 수급되고, 관리되는 교회이다. 이런 교회는 무엇보다 경제와 행정의 독립성이 강조되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반하여 토착 교회는 자립, 자양, 그리고 선교현지의 문화와 역사의 전통을 고려한 자전(自傳)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자립교회는 선교의 당위성이 강조되고 토착교회는 민족주의가 강조된다고 할 수있다.
미국의 선교사 존 네비우스(John L. Nevius)의 원리는 자립을 강조하고 있다. 물론 네비우스가 중국에서 실시한 선교 방법은 자립의 원리에 의한 것임을 확실하다. 그러나 그의 근본 원리는 토착이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 자립 원리에 의한 선교 과정에서 토착의 필요성과 지역적 상황을 고려한 발전적인 면에 있어서는 토착의 근원적 배경은 될 수 있으나 토착의 창시자는 아닌 것이다. 네비우스의 원리가 가장 적절하게 적용된 선교지는 한국교회가 행당되 것으로 볼 수있다.
한국 교회는 네비우스의 자립적인 면에서도 그 발전이 높이 평가받을 수 있으나, 토착적인 면에서는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것으로 보아진다. 그리고 허드슨테일러(Hudson Taylor)의 <내지회> 선교방 역시 자립 원리에 근거한 것이다. 그러나 내지회 선교 역시 토착에는 미치지 못한 것이다. 중국교회의 토착 운동은 자립 운동과 더불어서 특수한 상황에서 발전한점을 유의케 하고 있다.
1) 토착운동의 배경
5.4운동(1919)에서 북벌성공(1927)까지가 중국근대사 중 가장 중요한 시기이다. 사상면에 있어서, 5.4애국학생운동의 전개(1917~1921), 신문화운동의 사상 혁신(1919~1922), 중.서문화논쟁(1923), 사회주의 사상의 대두 및 비종교와 비기독교운동이 보편화(1922,1924~1927)했으며, 특히 유가 사상과 각종 종교 신앙 모두에게 치명적인 타격이 가해진 시기이다.
정치면에 있어서는 중국 공산당의 창당(1921), 국공합작(1924~1927), 혁명군의북벌(1926~1927) 그리고 비기독교 운동의 전도와 교회 성장에 상당한 타격과 장애를 끼친 시기이다. 무엇보다 기독교에 대한 최장기적인 공격과 집요한 박해가 가해졌으니, 그것은 공산당의 비기독교 운동에 기인했기 때문이다. 이 때 교회는 공산주의자들에 의하여 제국주의의 주구(走狗), 문화의 침략자로 규정되었던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의 교회에 대한 공격 대상은 선교사, 전도인,교회,학교, 병원, 문서사업에 등을 포괄했다. 공격 방법은 학생, 노동자, 농민, 등을 선동하여 비기독교 운동 시위를 주도했으며, 이에 따른 전단을 뿌렸다. 특별히 1924년과 1925년에는 성탄절을 기하여 비기독교 운동 주간을 정하고 대대적인 시위를 전개했던 것이다. 이 시위로 인하여 내지회의 외국 선교사들이 해안 조계 지역으로 피신했으며, 1927년대에 8,250명의 선교사들이 4,375명으로 감소(1928)되기도 했다. 이즈음 전국 선교사 총수의 절반이 본국으로 귀한 조치되리 만큼 사태가 악화되어 갔다.
이런 역사적인 변혁의 사조(思潮)가 사나운 물결로 목전에 출렁이자, 외국 선교사들은 철수를 서둘렀고, 그들의 사역의 공백은 현지인 사역자로 대치되지 않을 수 없었던 상황이었다. 이를 계기로 중국교회가 토착화 운동을 범교회적으로 추진해 나간것이다. 당시의 토착화 운동은, 곧 교회의 서양 색채를 제거하고, 자주권을 확립하여 기독교로 하여금 중국인의 기독교가 되게 하는 것이었다. 또 기독교 신앙은 중국 고유 문화와 융통될 수 있으며, 기독교의 예의로 하여금 중국 실정에 적당하게 해야 한다고 했다. 토착 운동과 함께 <중화기독교회>의 전국 교회 합동 운동까지 추진되었던 것이다. 이 시기에 교세 상황은 다소 어두운 면이 없지 않다. 외국 선교사들이 대거 퇴진하고, 교회의 수난과 더불어서 목사와 전도사의 수가 다소 감소 현상을 나타낸 듯하나, 일반 평신도의 수는 더욱 증가했다. 1920년대에 전국 교회 신자수가 총 366,524명이었는데, 1928년대에 신자수가 총 446,631명이었다.
2) 토착 운동과 사조(思潮)
1922년 5월 상해에서 개최된 기독교 전국대회는 중국교회 역사상 하나의 이정표를 세우는 중요한 회의였다. 이 회의는 중국 교회의 토착신학의 발전을 가늠하는 대회이기도 하였다. 전체 출석회원1,185명중, 중국 교회 대표가(19개성의 568명) 과반수 이상을 차지했다. 이 대회는 50년 이래 거행된 전국 규모의 대회중, 현지 교회 대표가 가장 많이 참석한 회의였다. <피차 연합하고 서로 협조하는 교회>로 출석 회원의 만장 일치로 가결했다. 이 결의건은 중국 교회의 과거, 현재, 미래를 포괄하는 의의를 지니고 있다. 연합과 협조는 과거 외국 선교사들이 현지 교회 면전에서 신학 문제와 사업상의 문제를 논쟁하고 분규한 데 대한 부정적인 태도를 표명함이고, 현재의 상황에 있어서는 토착 교회 발전에 추진력을 집약시키는 교회의 긍정적인 단합 결의인 동시에 중국인이 환영하는 교회 목표를 지향하는 미래적 이상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이 대회의 주제가 암시하듯이 당시 중국교회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교회의 시대적 사명을 모색하여 그 의지를 국가와 민족 앞에 나타내 보였던 것이다. 교회의 파쟁과 분규는 교회 자체의 발전력을 소모할 뿐 아니라 국가 건설과 민족 역사를 빛나게 하는 데 백해무익한 것을 교회들은 과거 체험에서 뼈저리게 느꼈던 것이다.
5.4운동을 기하여 점증된 국가주의에 지배된 반기독교 운동의 폭풍 지대를 헤쳐 나가기 위한 교회적 진로가 그 어느 때보다 더욱 절실했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전국교회가 피차 연합하고 서로 협조하는 것은 곧 중국 교회사적 요청이었던 것이다.
선교 2세기를 맞은 중국 교회의 토착 문제는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성경은 이미 토착화된 상태였고(번역상에 있어서), 재정과 행정은 독립 단계에 있었으며, 단 한 가지 미완성의 토착 문제가 남아 있었으니 그것은 곧 신학의 토착화였다. 이 문제에 대하여는 성정이(誠諪怡)박사가 대회 개회 치사를 통하여 특히 제의를 했던 것이다. 성박사는 중국교회가 직면한 가장 곤혹스러운 문제는 경제적으로 외국 교회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고 전제하고 사상과 조직과 사업 방법이 아직 다른 사람의 인도에 의뢰되고 있는 점이라고 지적했다. 그리고 토착 신학은 외래의 이론을 기계식으로 중국인의 뇌리에 주입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일정한 환경에서 일정한 문제가 합치하여 복음으로 하여금 자연히 발전케 하고 성장케 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와는 달리 현대 과학과 철학 이론에서 토착 신학을 모색하기도 했다. 이들은 기독교의 도리가 시간의 제한이 없고, 용납하지 않는 것이 없는 보편적인 종교이므로 그 원칙이 중국 사회에 반듯시 적용될 수 있다고 했다. 교회 지도자들에게 토착 문제는 시급한 것이었다. 그러나 일반 신자들은 대부분이 토착 교회운동과 토착 신학에 관하여 흥미가 없었다. 이들은 1세기 이상 외국 선교사들에 의하여 종파관념, 성례의식, 신학관점, 교회치리 등에 지배되어 오면서 인식이 타성화 되었던 것이다. 한편 교계 외부에서는 지식인들 간에 전통문화에 대한 논란이 심심찮케 거론되고 있었다.
3) 토착화 신학의 모색
중국 교회의 토착 운동은 사상적 심저에서 모색되었다고 할 수 있다. 우선 교회는 신분상에 있어서 중국 문화의 전통을 잊을 수 없는 중국인이라는 사실과 신앙의 원리를 배도할 수 없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떠나서는 토착 자체를 논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토착 신학은 이 양면의 신분과 관련하여 모색되었던 것이다. 이 양면의 신분을 서로 모순되지 않게 토착화하는 것이 중요하게 취급된 것이다. 여기서 무엇이 토착화인가? 어떻게 기독교로 하여금 동방에서 동방인의 필요에 적합하게 하는가? 어떻게 기독교 사업으로 하여금 동방의 풍속과 환경,역사와 사상에 융화되게 하는가? 라는 문제들이 제기된 것이다.
연경대학(燕京大學) 교수 오뇌천은 중국 기독교인이 중국의 학술, 예의와 풍속에 대한 인식을 필요로 할 때 비로소 토착 운동이 추진될 수 있다고 전제하고, 모든 진리가 하나의 근원(道)에 귀의하기 때문에 비록 기독교 신앙과 유가 사상의 방법이 서로 다르기는 하나 결국은 하나의 근원에 도달하는 것이라 했다. 오뇌천의 주장은 중국 고전 문화 중심에서 기독교 신앙을 관찰한 것이다.그는 또 기독교 신앙과 기타 종교와 철학이 기본적인 교의(敎義)상에는 큰 차별이 없기 때문에 어떤 충돌이 있을 수 없다고 했다. 이는 마치 강과 시내가 비록 다른 형태에서 흐르지만 결국은 다 같이 바다에 모이는 것과 같이 기독교가 유가의 사상을 흡수하거나 유가 사상이 기독교 신앙을 용납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하면서 성경의 근거로 그 접근을 시도했다. 기독교의 신관은 한 분의 초월한 신을 가르키여, 그 신은 우주 만물을 관장하며 사랑으로 각 민족을 연락케하는 하나님이라고 정의하고, 시경(詩經)과 서경(書經)에서 묘사되고 있는 천(天)과 상제(上帝) 관념이 후대에 자연계를 관리하는 지혜와 힘을 대표하는 사상으로 인식되었다고 함으로써 성경의 창조주 인격의 신관과 시경, 서경의 추상적 신(神) 관념을 동일시 했다.
또 창조 역사관에 있어서는 창세기 1.2장과 중용(中庸)의 이론을 비교시켰다. 즉 창세기 2:7절은 신이 어떻게 생명을 사람에게 부여하셨는가에 대하여 상징적으로 서술하나, 중용 1장은 자연계의 형성은 천명(天命)의 뜻에 의하여된 것을 말한다고 했다. 이 말은 만물의 생성 원리는 음양 오행의 운동에 근원을 두며, 사람의 지혜와 의지가 다 천명에 속하므로 이로써 사회질서가 유지된다는 유가의 사상적 공간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다시 이사야 11:1~10의 내용을 들어, 메시아 강림설은 마치 중용 제 3장 제 11편에서 자사(子思)가 말한, 장차 성자가 출현하여 화평과 공의로 만민을 통치한다는 것과 같다고 했다. 그리고 이사야와 자사의 시대적 배경은 공히 정국의 혼란으로 인하여 민심이 동요되어 구세주를 갈망한 때였다고 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는 유가 사상의 중심인 인(仁)을 기독교의 삼위일체 중 제 3위 신인 성령으로 대등시키고, 인이 사람의 마음에 작용할 때 성경의 천국이 곧 마음에 임하는 것이라 했다. 그래서 인을 구하는 기도를 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오뇌천교수의 이같은 논조는 결국 유가의 정통 사상에서 토착 신학이 정립되어야 한다는 것인데, 그는 교회의 토착보다 사회 제도 개혁에 더 많은 관심을 나타내었던 것이다.
다른 한 방면에서는 문화적 융화에서 토착 신학을 모색하는 예도 있었다. 그 대표적 인물로는 금릉신학원 철학 교수였던 왕치심(王治心)이다. 왕교수는 문화는 한 국가나 한 민족의 전리품이 아니라 세계적인 것이기 때문에 문화 그 자체가 한 곳에 고정될 수 없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는 기독교는 하나의 세계적인 문화 체계를 가졌기 때문에 동.서방의 전통을 다 포용할 수 있는 것이라 보았다. 왕교수는 문화 융합에 대한 근거를 요한복음 9:16을 들어 중국을 “우리 안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으로 비유하고 중국이 장차 선한 목자에 의하여 인도되어 질 것을 기대했다. 그는 기독교는 세계 각국의 각이한 문화가 서로 접촉점으로서의 세계적 문화관을 가졌기 때문에 토착화 신학의 그 가능성을 확신했다. 토착화 신학의 가능성과 더불어 토착화 신학의 형태에 대하여 그는 반듯이 민족의 특징과 의식이 반영되어야 할 뿐 아니라, 민중의 심적 동향이 고려됨과 동시에 전통 사상과 도덕관념이 표시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했다. 여기서 왕교수는 기독교 신앙을 토착화하려면 기독교와 유가 사상의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했다. 이 조화를 위하여 왕교수는 중용도(中庸道)를 적용시겼다. 즉 예수그리스도가 그의 제자들이 죄악 세상을 도피할 것을 가르치지 않고, 세상 사람을 죄악에서 구출하도록 했으며, 세상에 살되 세상에 물들지 말며, 세상에서 생활하되 세상에 속하지 말 것을 지도했으니, 이것이 중용도와 일치하는 것이라고 했다. 문화의 융화를 말하는 지식인들은 다 중국 문화에 대한 편견을 벗어나지 못한 감이 있다. 이들은 중국 사상과 의식 구조에서 기독교를 이해하였고, 그러한 입장에서 기독교를 중국 문화 안으로 수용하는 자세로 토착을 모색했다.
이상이 당시 중국 교회 토착화 신학 사상의 주류였다. 주류 신학 사상과는 다른 각도에서 토착 신학을 모색하는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왕명도목사로서 1920~1930년대 정치혼란과 사회 불안이 소용돌이 칠 때 고난 받는 신자와 교회를 위로하고 그들에게 희망을 안겨 주었다. 그는 교파와 토착화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성경의 원리를 따라 중국 교회의 성경화를 역설하면서 당시 국내 교계의 주류를 이루고 있던 자유주의 신학사상을 대항하여 맹공했던 것이다. 왕명도의 토착 신학의 노선은 그의 역사관과 일치했다. 그는 교회와 세상은 두 개의 대립적인 조직으로서, 마치 인류를 함께 밀고 가는 큰 수레바퀴와 같다고 했다.
왕목사는 인류의 역사를 구속의 관점에서 보았고, 교회의 토착과 사회와 인간 관계의 문제점들을 항상 성경안에서 그 해답을 찾으려했다. 그는 성경은 문화와 전통에 얽메려는 자들에게 그 관념 자체를 비판했으며, 사회 개혁을 주장하는 주류파의 인간 천국론을 부정하고 도덕 대신에 하나님의 은혜를 주장했고 천국은 인간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강림하는 것이라 했다. 왕명도는 토착화를 곧 성경화에 두었다. 이러한 왕목사에 대하여 사회 참여 의식이 결여된 태도며 문화 관념이 희박한 태도라는 비판도 없지 않았다. 중국 교회 토착은 곧 신학의 토착에서 모색된 것이다.
4) 토착운동과 교회 연합운동
19세기 말엽 이래 중국교회는 종파 문제가 선교 활동에 장애적인 요소가 되고 있는 것을 감지했다. 선교사들은 대부분이 종파의 굴레로써 현지 교회를 사로잡았고, 이에따른 사업상의 이해 문제 또한 적지 않았다. 이런 문제가 토착 운동과 함께 교회의 연합 일치를 촉구하게 되었다.
20세기초 중국교계 지도자들이 토착 운동을 교회의 연합 운동과 연계하여 추진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교계의 이런 움직임이 1922년 상해 기독교 전국 대회를 계기로 하여, 1927년 <중화기독교회>를 성립시킨 것이다. 이로써 교회 연합 운동의 한 이정표를 세운 셈이 된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당시 비교적 보수 성향을 띤 교회들은 교회의 연합에 대하여 매우 냉담한 태도를 취하였던 것이다. 그 이유는 신앙의 관점이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많은 자립 교회 혹은 웟치만니의 “소군교회(小群敎會)”, “참 예수회”, “예수가정” 등은 교회 연합에 대하여 관심을 두지 않았다.
당시 중국교회의 토착 운동은 내용적으로 다음 다섯 가지 방향에서 모색되었다고 할 수 있다.
- 기독교의 중국화
- 경제적 자립
- 관리(행정)의 중국화
- 제도(조직)의 중국화
- 신학의 중국화
이 내용들은 교회 연합의 공감대를 형성케 할 수 있는 가능한 조건들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일부 교회들이 교회 연합을 외면시한 것은 당시 중국교회의 상황에서 주의를 집중케하는 일이 아니수 없다. 교회연합에 대하여 부정적인 견해를 가진 교회들 가운데 특히 왕명도를 그 대표로 이의 예를 들어 살펴본다.
왕목사는 1920~30년대 중국 교회의 토착 운동을 예의 주시하면서 토착운동이 사조적시류(思潮的時流)에서 모색되고 있음을 개탄했다. 왕명도는 중국 전통문화를 오랫동안 죄악에 젖어 온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토착화는 사실상 세속화와 다름없는 것으로 관찰한 것이다. 그는 “나는 교회가 서양화하는 것이나, 중국화하는 것을 다 찬성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구미 각국이나 중국이 다 원래는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겼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왕목사의 견해는 토착화를 주장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신 신학 사상에 젖어 그들이 표면상으로는 기독교의 서양 색채를 제거하려고 하나, 그는 중국 교회가 성경화의 노선을 걸어야 할 것을 토착화는 모든 중국 교회가 <사도들의 방법을 따라 교회를 세우고 사도들이 믿은 것을 믿으며, 사도들이 전한 것을 전하며, 사도들이 행한 것을 하는 것이다> 이런 원칙은 왕명도가 추구하는 토착 교회의 시금석이다. 이런 관점에서 왕목사는 중국교회의 연합 운동의 엄격한 신앙의 표준을 세우지 않고 자유주의 신학의 대세로 기울어지고 있다는 점을 비판한 것이다. 중국 교회의 연합 운동에 대하여 왕명도는 “대바벨론성식의 합일운동이며 실제로 복음에서 이탈하는 운동이라고 공박하고 그 배후에는 사단이 조종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신앙과 불신앙은 원래 배합되지 않으며 , 같은 멍에를 메지 못한다”고 하고, 신앙과 불신앙의 연합은 용납될 수 없는 일이며, 교회가 불신앙을 용납하는 위험은 죄악을 용납하는 위험보다 더한 것이라 주장하였다. 이에 대하여 왕목사는 좀더 주체적인 논리를 개진 시켰다.
“우리는 주께서 서로 사랑하라, 하나가 되라고 한 명령을 지켜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배경이 다르고, 역사가 다르며, 진리에 대한 인식이 다른 교회가 다 하나로 연합하는 것을 주장하지 않는다. 만일 이런 식이 되면 동상이몽의 합일이 되고 만다.”
왕목사의 이런 태도는 교회의 자립에서 토착, 독립에까지 이어진 것이다. 그는 당시 중국 교회의 연합운동을 하나님을 배반하는 운동으로 단정하고, 정교 분리의 원칙을 고수하여 중.일 전쟁 당시 일군이 점령한 화북일대 교회들이 중화기독교 가입 강요을 받을 때도 그는 종교의 정신으로 이를 거절하고 독립교회 노선을 지켰다.
3. 독립교회운동
자립교회의 특성은 경제, 행정, 인력면에서 자립이 강조된 점이라 하겠다. 자립교회는 지역 문화나 전통사상, 그리고 외국 선교부와의 관계 등이 주요한 문제로 취급되지 않은 순수성이 있다. 그러나 토착 교회 운동은 선교 현지 문화나 여타의 의식이 특별히 강조된, 신학 사상의 자유적 성격을 띠고 있는 점이 자립 교회와 그 성격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자립 교회와 토착 교회이외 중국에서 크게 발전한 교회는 독립 교회이다. 독립교회는 자립 교회적인 특성을 같이 띠고, 토착교회에 대하여는 비판적이다. 그러면서 독립적인 특성을 지닌 교회이다. 자립교회나 토착교회가 교파의 종파성을 완전히 배제하지 못한 점이 있다면 독립교회는 종파성을 완전 배제한 또 하나의 특징이 있으며, 자립 교회와 토착교회가 교회의 제도와 직제면에서 전통교회를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면 독립 교회는 여기에서도 탈피한 것이다. 독립교회는 일종의 평신도 교회라 할 수있다.
1949년까지 중국교회의 1개조직 단위 교회로 교세가 가장 큰 교회는 <중국내지회>이고 연합 단위로는 <중화기독교회>이다. 중화기독교회는 장로회, 감리회, 침례회, 회중교회 등 14개 종파로 구성된 연합체이다. 그러나 교인 점유율 비례에서는 독립교회들이 강세를 보이고 있다. <참예수교회>, <소군교회>, <예수가정> 등이 그러하고 왕명도가 인도한 <기독도회당>은 여타의 독립 교회와는 다른 형태에서 발전했으나 그 차이는 크지 않았다고 하겠다.
1) 독립교회 발전의 시기
1912년 국민 혁명 이래 중국 교회는 자립(自立), 자양(自養), 자전(自傳)을 교화 운동의 슬로건으로 삼고, 이에 대한 교회 발전의 관심을 크게 표시했다.
신해혁명(1911)과 더불어 중화 민국 성립(1912.1)의 중국 교회사적 의의는 헌법상에 종교, 신앙의 자유를 명문화한 것과 당시 정계 요인중에 기독교 신자들이 많으므로 교회 활동에 다소의 도움이 되었던 점들이다. 청조 시대까지만 하여도 정부와 교회의 관계는 실제적으로 미묘했다. 이런 관계 때문에 반기독교의 감정을 더욱 고양시킨 점도 없지는 않다. 이런 관계가 중화민국 성립과 동시에 해소됨으로 교회에 대한 사회의 인식도 어느 정도 수정되어 갈 수 있었다.
정치적으로 , 사회적으로 민주 독립의 풍토가 조성되면서 추진된 것이고 교회의 자립 운동이었다. 그러나 자립교회 운동 성격에 있어서는 의견의 일치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즉 외국 선교부와의 완전 분리를 주장한 사람들이 있는 대신, 이에 대한 반론을 표시한 사람도 있었다. 1902년 중화기독교회를 발기로하여, 1906년 <예수교자립회>가 성립되고, 1920년 상해에서 “예수교 자립회” 제1차 전국대회가 개최되었다. 이 대회는 전국 16개성의 189개처 지회 회원 1만여명을 대표하는 회원 120여명이 출석함으로 명실상부한 자립교회 운동의 전기를 이룩한 셈이 되었다.
독립교회 운동은 자립교회 운동과 그 시기를 같이 하였다는 점에서 자립 교회 운동의 연장이라 할 수 있겠으나 자립교회와는 교회 형식 자체가 다르다. 이들 독립교회는 중국선교 현지 상황에 한하여 특이한 노선을 지향하고 있음을 주의해야 한다.
2) 예수가정교회
예수가정(耶蘇家)은 1921년 산동성에서 경전영(敬奠瀛)에 의하여 처음으로 조직된 완전 독립교회이다. 그는 1890년 산동성 출신으로 유.불가정의 영향을 받으면서 성장했으며, 22세에 미국 감리교 선교부에서 운영하는 미션스쿨에 입학하여 기독교에 접촉하게 되었다. 선교사들에 의해 양육된 그는 성령충만 운동의 영향을 받아, 주변으로부터 냉소적인 대우도 받았지만, 그 자신의 체험에 의한 신앙 형태를 독자적으로 가꾸면서 이를 <예수가정>에 그대로 적용시켰던 것이다. 경전영은 그의 모든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한 필지의 땅에 예수가정의 신앙 공동체를 세운 것이다. 이 예수가정은 조직에 있어서 가장(家長)은 그가 되고, 그 가족은 예수가정에 가입한 회원들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가입되지 않은 사람들은 모두 세인(世人)이라 부르고 외국 교회나, 선교부와는 물론 어떤 원조도 거절하는 자립. 자양. 자전의 원칙을 철저히 고수했다. 이 단체는 주로 농촌을 포교의 중심으로 한 것이 특징이고 농촌에서 크게 발전했다.
1951년대까지 30년동안 역사를 이은 이 단체는 1951년까지 1백여 가정이 전국10여개 성에 분포되었고, 주로 중국 북부 지역에서 발전했으며, 회원수는 1만여명에 달했다. 이들 중 극소수의 고등교육 수준을 제외한 95퍼센트 이상은 모두 낮은 교육 수준이었고, 예수가정의 생활은 공동 생활을 원칙으로 하기 때문에 사유 재산을 인정하지 않으며, 혈연 관계나 가족단위 제도를 인정하지 않는다. 누구를 막론하고 예수 가정의 회원이 되려면 사유 재산을 처리하고 공동 생활의 규율을 따라야 한다. 모든 회원들은 공동 생활 원칙에 따라 청빈 생활의 지표로 삼고 노동의 봉사로 공동 생활의 자립을 유지하게 되어 있다. 그들은 하루에 두끼의 쌀죽을 먹어야 하고 고난의 생활을 신조로 엄수해야했다.
그들은 공동 생활의 복지를 위하여 교육 및 의료기관, 의식주는 물론 회원들의 후생복지 대책까지 마련하고 있었다. 회원들은 예수가정이 곧 각자의 가정임을 인식하도록 하기 위하여 회원들의 약혼, 결혼 등을 가장인 경전영의 인준을 받게 했다. 심지어 부부일지라도 각자가 공동 생활의 원칙을 따라야 하므로 동거가 용인되지 않으며, 노동의 분야까지 다르게 하고 있었다. 또 자녀의 공동 양육을 하기 때문에 부모의 특별한 애정이 필요없게 되어 혈연관계를 일체 차단시켰다.
회원들은 매일 아침4시에 기상하여 공동 기도회를 가지며, 기도는 꿇어서 앉아서 큰 소리로 5시에 기상하여 공동 기도회를 갖고 찬송은 일제히 일어나서 불렀다. 이 기도회 시간에 회원들이 이상이나 현몽을 각자 체험한 대로 간증하고 가장의 설교를 마지막으로 아침 기도회를 전부 마친다.
예수가정의 특색은 고난으로 청빈한 생활을 목적으로 했으며, 조직 자체는 중앙 집권식 제도를 탈피하려고 한 듯하나, 공동 생활 규율로 회원들의 복종을 강조한 것은 가장의 독재 체제를 나타낸 것이라 하겠다. 뿐만아니라 가장의 개인적 신앙 체험(성령충만)을 모든 회원들에게 동일하게 적용하므로 은사에 대한 성경적 의미를 분별치 못한 결함이 있고, 아울로서 이로 말미암아 기성 교회와의 교제를 갖지 못한 것은 분리주의적 색채를 면키 어렵게 했다. 또 이성과 지식을 경시하므로 일반 은총을 배제한 것이다. 예수가정은 그 형태가 하나의 교회적 의의를 지니고 있지 않다. 다만 기독교를 표방한 단체를 추구하는 천국 실현의 이상향에 사로잡힌 이교적 형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3) 소군교회(小群敎會)
<소군>의 어원은 누가복음12:32의 "적은 무리(The Little Flock)"에 근거하고 있다. 소군은 성경에서 그 명칭을 딴 것이지만 기성 교회와의 독립 관계를 표시하기 위하여 지방명과 함께 “예수의 이름으로 모이는 신도”로 더 많이 사용되었다. 이를 약칭하여 <집회소>라 한다.
집회소는 1923년 예탁성(倪拆聲)으로 영문명은 Watchman Nee로서 그에 의해 <복주집회소(福州集會所)>를 시작으로 1928년 상해 집회소 개설과 함께 그 발전의 양상이 돋보이게 되었다. 1949년까지 중국의 집회소는 총7백여소, 신자수는 약 7만명에 달했다. 이들 신자들은 대부분 외국 선교부와 관계된 교회에서 이탈하여 온 것이다.
워치만니는 조부때부터 회중교회 신앙을 따른 가정에서 자라면서 회중교회 기독교 학교인 삼일서원에서 초.중.고학교를 마치고 상해의
당시 그의 시국관은 국가주의자들과는 달리 민족주의적인 입장이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외국 선교사들과 부단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식견을 넓혔으며, 영국을 포함한 여러 구라파 탐방을 통하여 서구 교회들의 정황을 관찰하기도 했다. 그러나 워치만니는 중국에서 선교하는 외국인들의 선교정책에 관하여는 비판적이었다. 그는 선교사들에게 종노릇하는 사람들에게만 교회 안에서 승진의 길을 열어 줌으로써 결국 선교사들이 기독교 계급을 형성시켰다고 했다.
그의 비판적 자세는 상대적으로 비판을 받게 되었다. 선교부 소속 교인들이 그들의 교회를 떠나 <집회소>로 몰리게 되자, 선교사들은 그를 양도둑이라고 몰아붙이기도 했다.
1938년 워치만니가 발표한 책중에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교회 생활>이란 책명에서 그는 “종파는 일종의 죄악이며 일종의 타락한 조직으로 보고 이를 갈라디아서 5:24의 ”정과 욕심“에 적용시켰다. 이 정과 욕심에서 탈출하는 것이 성경적이라는 그의 해석은 곧 기성 교회들로부터 나오라는 말로도 적용이 가능했기 때문에 비판을 받기도 한것이다. 이에 관하여 그는 고린도전서 9장의 내용을 인용하면서, 사도의 신분과 지위, 교회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을 고려하여 정기적인 봉급을 받는 것은 잘못이라고 했다. 뿐만아니라 교회의 직제를 부정하기도 했다. 그는 또 한 지역에 한 교회의 원칙을 세우고, 독립적 운영이 되도록 했다. 이 밖에 그는 문서사업, 성경공부, 그룹별 기도의 방법으로 기성 교회의 성장을 압도했다.
1952년 공산당의 <오반(五反)운동>, 곧 탈세, 증수뢰, 자재횡령, 급료사기, 착복및 국가 경제 정보의 누설 등 다섯가지 해를 없애자는 것으로 중공은 초기에 이 운동에 의해 많은 사람을 인민 재판에 부쳐 처형했다. 이 때 그는 체포되어 20년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그의 사상적 측면에 있어서 지적되어야 할 문제점들이 많으나, 그의 독립교회 성향이 민족주의 입장에서 형성된 것이 특징인 것이다.
4) 기독도 회당(基督徒會堂)
1925년초 북경에서 왕명도에 의하여 처음 시작된 기독도 회당(Christian Tabernacle)은 1937년 8월1일에 예배당 봉헌과 함께 새로운 교회 활동의 비젼을 던지기 시작했다. 그는 1900년 북경에서 태어났으며, 부친은 미 감리교 선교부가 세운 북경 동인병원 의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왕목사는 어릴 때부터 신구약전서, 천로역정 등 많은 책을 읽었으며, 자신을 철저히 경건의 훈련을 쌓아 매일 정기적인 기도와 성경 읽기와 교회를 열심히 섬겼다. 학교는 런던선교부 기독학교를 다녔다.
왕명도목사가 중국교회에 공헌한 일은 경건한 신앙 생활과 문서활동, 부흥운동, 교회의 순수한 자립운동 등이다. 1920년대 중국 교회는 신학 사상 논쟁으로 일대 신학적 분기점에 이르렀다. 그것은 19세기 말엽부터 대두하기 시작한 진화론과 성경 비평 사조가 서방교회들을 흔들다가, 20세기초에 이르러 베르그송의 창조론, 다윈의 진화론, 듀이의 실용주의 등과 다시 합류하여 선교사들을 매개체로 중국교회에 몰려 온 것이다.
이 때 중국 내지회 선교사들을 주축으로 한 <중국성경협회>의 조직(1920)은 사실상 근본주의와 자유주의 신학의 분리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내지회 선교사들은 기독교의 초자연성과 창조론이 과학의 이치와 불합리한 미신이라고 강변하는 자유주의자들을 성경의 진리에서 떠났다고 비평했다. 이런 혼미한 시기에 왕명도가 중국 교회에 미친 영향은 매우 크다. 우선 왕목사는 기독론에 있어서, 예수그리스도는 완전한 신이며 완전한 사람이라 하고, 성경의 권위를 강조하면서 특히 교회의 본질을 세 가지로 지적했다. 첫째, 교회는 중생한 단체이다. 그러므로 세상과는 분리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당시 자유주의자들의 교회관과는 상치되는 것이다. 자유주의자들은 “하나님은 인류의 아버지며 만인은 그의 자녀이다. 그러므로 모든 세상 사람이 다 형제며, 한 가족이다”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왕명도는 신.인간의 부자 관계는 창조의 각도에서 해석할 수 없고 구속의 각도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사람이 비록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으나 하나님이 지우신 것과 하나님이 낳으신 것은 같지 않다고 주장했다.
둘째, 구속의 관점에서 인류는 하나님의 자녀와 그의 원수로 분별되기 때문에 교회는 곧,하나님의 자녀의 단체라고 했다. 그는 교회를 하나님의 선택된 무리로 보고 교회는 피동적이고 하나님이 주동적인 관계에서 구원의 은혜가 나타나는 것이라고 했다.
셋째, 예수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교회는 신부로 묘사된다고 했다. 이교회는 지상에서 이미 구원되었으며, 그 구원의 완성은 장래에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하고, 현대 교회의 위기는 도덕상의 파괴와 신앙상의 배도라고 힐책하기도 했다.
그의 기독도회당은 자립원칙, 바른 신학원칙, 성경원칙을 세우고, 그 실천 방안으로 순교정신,정교분리, 교회토착을 중심했다. 후에 그는 중국 대륙이 적화될 때 공산당에 체포되어 무수한 고초를 당하기도 했다. 독립교회의 성립은 당시 민족주의 배경에서 그 뿌리가 내리면서 선교사위주의 교회들보다 그 성장 속도가 신속했던 것을 볼 수 있다.
4. 부흥 운동과 시련
근세 개신교의 선교 운동은 영국의 월리암켈리(William Cary: 1761~1834)로부터 진작되어 <런던선교회>가 발족되면서(1795) 그 전기를 마련한 셈이다. 19세기 전반기 50년동안 세계 곳곳에서는 이미 선교의 불꽃이 피어오르고 있었으며, 1858년 이후 2년동안 세계 교회는 5백여만명을 주께로 인도하리 만큼 그 열기를 더 해갔다. 교회 부흥과 선교는 역사적으로 매우 밀접한 관계에서 진행되었다.
19세기 영국 교회의 중국선교는 곧 영국 교회의 부흥을 뜻하는 것이다. 이런 부흥의 여세가 중국 대륙에 영향을 미친 것은, 곧 세계 교회들의 부흥을 증명하는 것이라 할 수있다. 20세기초, 중국 교회의 부흥은 동남아의 부흥을 위시하여 전세계 교회의 부흥과 그 맥을 같이하고 있다고 보아진다.
1) 교회 부흥의 원인
중국교회의 부흥은 대략 세 가지로 그 원인을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영적 각성이다. 20세기초 중국은 각 방면에서 자각 운동이 전개되면서 군주 제도를 몰아내고 공화제의 정치적 변화를 가져왔다. 따라서 교회는 지금까지의 외국 선교사에게 의존했던 교회 생활을 지양하고 독립적인 교회형태로 그 발전을 추구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는 기도와 회개가 전제되었다.
둘째, 인재 배출이다. 19세기 선교 시대는 중국인 인재가 많이 부족했다. 선교사들이 현지 교회의 자립을 시도했으나 인재가 부족했기 때문에 결국 선교사들이 교회를 주도하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선교사들은 현지인 육성과 배양을 선교의 정책으로 삼고, 이 방면에 각고의 수고를 아끼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당시 교회 부흥운동에 공헌한 사역자들은 송상절(宋商節),계지문(計志文)
워치만니, 왕재(王載), 왕치(王峙), 왕명도(王明道) 등이다. 이들은 각기 방법과 개인적인 품격은 다르지만 회개를 강조하고 경건 생활을 촉구한 점에 한해서는 공통점이 있었다.
셋째, 자립운동이다. 교회의 자립 운동은 영적 각성과 함께 교회의 실천 생활로서 적용된 것이다. 자립운동의 주요 골간은 지방교회의 확장, 경건생활, 신앙부흥, 복음을 위한 수고에 두었다.
2) 정체의 시기
1927년에서 1937년까지, 10년간은 교회 성장의 폭이 비교적 둔화된 현상을 보이고 있다. 당시 선교사의 총수는 4,375명(1928)에서 6,059(1936)으로 증가했지만, 최고로 많았던 1926년에 8,325명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중국인 교역자 수도 현저히 감소되었다. 중국인 목사는 1,696년(1923)에서 1,865명(1936년), 신자의 수는 446,631명(1928)에서 536,089명(1936), 교회당수는 5,424개처(1923)에서 5,800개처(1936)로 각각 증가의 열세를 보였다.
그리고 1937년에서 1945년까지의 기간은 중.일 전쟁과 관련하여 많은 선교사들이 체포되거나 본국으로 귀환 조치되고 , 중국 교회는 고난의 길을 걸어야했다. 1945년에서 1949년까지 4년 어간은 중.일전쟁이 끝나고 서방 선교사들이 다시 돌아와 선교 활동을 재개하여 교세를 회복하려했다.
공산당 정권이 들어설 때까지(1949) 전국 신자 수는 총 834,909명, 교회당 수는 6,536개 처였다.
출처 : 강석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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