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영원한사명)

[스크랩] 새로운 시대 새로운 선교 전략을 위한 제언 (장동민)

수호천사1 2009. 8. 11. 16:28

새로운 시대 새로운 선교 전략을 위한 제언

장동민 교수 (백석대학교, 역사신학)


역사의 흐름을 보는 눈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내어 보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마10:16) 순수한 동기만 가지고 나아가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이며, 동시에 동기의 진정성을 무시한 채 기능만 가지고 가는 것을 경계한 말씀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순결한 동기를 보전하기 위하여 지혜가 필요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지혜’라고 하는 것은 시대를 보는 안목을 말하는 것이다. 역사의 흐름과 대중의 여론을 파악하며 이에 기초하여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을 가리킨다. 홀로 복음을 들고 오지(奧地)에 들어가서 순교를 각오하고 복음을 전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시대의 흐름을 생각하면서 선교를 재정의하고, 전략을 새롭게 수립하며, 교육과 훈련을 받는 것이 중요하다.

이 글에서 ‘선교’라고 할 때 반드시 해외선교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전방’은 물론 복음을 듣지 못한 불모지를 연상케 하지만, 그러면서도 우리 사회에도 복음을 접하기 어려운 ‘전방’이 점차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다.  과거 한 20년 전만 해도 우리 사회는 상당히 단순한 구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세계화가 진행되고 IMF 구제금융 시기를 거치면서, 우리가 사는 사회는 한 마디로 ‘파편화’되었다. ‘민중’은 다양화되고, 국제화되고, 모든 사람이 일상생활 속에서 보편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현상이 된 것이다. 비정규직 노동자, 저소득계층, 버림 받은 장애인, 자유무역으로 인하여 살길을 잃은 농민, 재소자, ‘언니들’, 외국인 이주노동자, 학대받는 여성과 어린이, 거리를 방황하며 ‘형님’ 밑에서 똘마니 노릇하는 초등학생들, 소년소녀 가장, 독거노인, 특수 아동 등으로 확대되었다. 선진국에서는 진작 있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좀처럼 생길 것 같지 않던 ‘노숙자’도 등장하였다. 이들은 보통의 한국 사람이 쓰는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 전혀 다른 문화를 가지고 있다. 정상적인 ‘전도’ 활동으로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기가 쉽지 않다. 이들도 전방이라고 생각하고 선교의 대상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 글에서 선교와 관련된 우리 시대의 흐름을 두 가지로 정리하고, 이에 따르는 선교의 전략을 논하려 한다.


세계화와 선교

 

첫째로 반드시 고려해야 할 것은 세계화의 확산이 우리 시대의 흐름이라는 것이다. 세계화가 과연 지구의 미래를 위하여 바람직한 현상인가에 대하여는 많은 논의가 있어 왔고, 지금도 진행 중이다. 그러나 세계화가 이미 거스를 수 없는 대세임에는 틀림이 없다. 작년 9월 이후의 세계적 금융위기의 원인 중 하나로서 세계화가 거론되었고, 그래서 보호무역주의가 대두될 것이라는 지식인들의 예언이 있기도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미 세계화가 많이 진행되었기 때문에 보호무역주의의 장벽이 다시 드리워질 것 같지는 않다.

 

세계화 자체가 제3세계 저개발국가를 저개발 상태로 묶어 두는 구조이다. 강대국들이 자신들이 타고 올라간 사다리를 걷어차 버린 결과이다. 게다가 최근과 같은 경제 위기가 주기적으로 찾아오게 될 때 가장 큰 고통을 받게 될 사람들은 저개발국가의 가난한 민중들일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그 세계화의 독배를 마시는 민중들이 바로 선교의 대상일 경우가 많다. 10/40창(window)에 속한 다수의 나라들이 복음이 없는 저개발국이다. 화폐가치의 차이가 10-20배이기 때문에, 선교를 효율적(?)으로 할 수 있다는 이유로 선교대상으로 선정되기도 한다.

선교하는 나라는 세계화의 혜택을 받는 나라이며, 피선교국이 바로 세계화의 피해를 받는 나라인 것이다! 제국주의적 선교의 망령이 되살아날 수 있는 구조이다. 우리 대한민국은 서양 제국주의자의 후예들과는 피부색에서 차이가 난다고 묘한 자부심을 가지고 말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대한민국이 이미 제국주의의 대열에 들어서 있다. 며칠 전 예멘에서 일어난 폭탄테러의 표적이 우리나라 관광객이었다는 사실이 예사롭게 들리지 않는다. 이미 아프간과 이라크 등지에 군대를 파병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아랍권 국가에 한국은 이미 기독교를 공격적으로(십자군적으로) 선교하는 나라이다.

 

제국주의적 선교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정신과 정면으로 배치되기 때문에 성공할 수 없었던 프로젝트였다. 기독교는 ‘인민의 아편’이고 선교사는 제국주의의 ‘주구’(走狗)가 되기 일쑤였다. 총칼과 상품을 앞세운 선교는 으레 원주민의 반발에 부딪힐 수밖에 없고, 잠시 성공한 것처럼 보여도 곧바로 뒤집어지곤 하였다. 네덜란드가 인도네시아를 3백 년간 지배하면서 개혁교회를 이식하려 하였지만, 인도네시아는 해방 후 몇 년이 못 되어 세계 최대의 이슬람 국가가 되었다. 베트남에서 로마 가톨릭의 자취를 찾아보기가 쉽지 않으며, 지금껏 인도의 민족주의자들에게 기독교는 배척해야 할 외세의 종교일 뿐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다행스럽게도 (아니,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복음전도의 주체가 제국주의 일본이 아닌 미국이었다. 미국의 선교사들이 일제의 침략에 맞서는 우리의 독립을 지지하고 성원한 것을 기억한 한국인의 대규모 복음화가 해방 후에 일어났다.

우선 선교를 하는 우리가 제국주의 국가일 수 있고 피선교국이 세계화의 압박을 받는 나라라는 것을 마음에 깊이 새기는 것이 중요하다. 피선교국이 저개발국가라고 해서 그 국민을 무시할 권리가 우리에게 없는 것이다. 우리보다 못한 사람들, 가진 것도 없고, 지식도 뒤떨어지고, 복음도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시혜(施惠)하는 마음을 가지면 안 된다. 그 앞에서 우리의 가진 것을 자랑하는 천박함을 보이지 않아야 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들에게 ‘빚진 자’라는 심정을 가지는 것이 좋겠다. 과거 사도바울이 이방인은 유대인으로부터 신령한 것을 나누어 가졌기 때문에 육신의 것(구제연보)으로 유대인을 섬기는 것이 옳다고 하였다면(롬15:27), 이제는 우리가 육신의 것에서 빚을 졌기 때문에 신령한 것을 나누어 준다는 마음 자세를 갖는 것이 옳다.

이런 마음 자세를 어떻게 선교 현장에 적용할 수 있을까? 우선 복음을 직접 전달하는 직접선교(혹은 ‘선교’)와 교육, 의료, 구제 등을 통하여 복음을 전하는 간접선교(혹은 ‘봉사’)의 관계를 재정립해야 할 것이다. 지난 2007년 샘물교회 단기선교팀의 아프간 억류 사태 시, 선교와 봉사 간의 관계가 도마 위에 오른 적이 있었다. 기독교 선교에 대한 여론이 악화되자 샘물교회 측에서는 이들이 선교를 위하여 간 것이 아니고 ‘순수한 봉사’를 위하여 갔다고 서둘러 발표하였다. 이를 두고 어떤 기독교인들은 자신이 기독교인인 것을 자랑하지 못하는 비신앙적 처사라고 비판하기도 하였다. 지금에 와서 보면, 봉사를 선교의 일부라고 말하지 못하였던 샘물교회의 발표도 떳떳하지 못하였던 것 같다. 그러면서도 봉사를 선교에서 배제시킨 채 영혼의 구원만이 선교라고 하는 좁은 카테고리로 선교를 이해해 왔던 한국교회의 문제점이 더 컸다고 지적할 수 있겠다. 늦은 감이 있지만, 지금이라도 이 문제를 성경적으로 신학적으로 그리고 선교전략적으로 분명하게 해야 할 필요가 있다. 선교자원을 일으키기 위해서도 그렇고, 불신자들에 대한 변증의 목적에서도 그렇고, 무엇보다도 선교에 대한 바른 이해를 위하여 더욱 그러하다.

물론 선교의 최고 목표는 복음을 전파하여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복음을 바로 알기 위해서는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어떠한 곳인지를 또한 알아야 한다. 악한 세대로부터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그 악한 세대가 어떤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가 복음을 제대로 전하기 위해서는 전 지구를 뒤덮고 있는 세계화가 어떤 것인지를 알아야 한다. 세계화를 분석하고 이에 적절하게 대응하는 것이 ‘봉사’의 내용이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좀 더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의 간접선교 혹은 ‘봉사’가 좋을까? 피선교국이 세계화의 물결에 편입되도록 돕는 방법이 있을 것이고, 세계화의 물결을 거슬러 독자적인 생존을 취할 수 있도록 돕는 방법도 있을 수 있다. 일단은 세계화의 물결에 편입되도록 하는 것이 손쉬워 보인다. 세계화라는 것이 우선은 개발을 통하여 의식주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하자는 노력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식량이나 의료시설을 자급자족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기본이고, 더 나아가 그 지역의 특산물을 개발하고 양질의 교육을 시키며 다른 나라에 수출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삶의 질을 높여 줄 수도 있다. 미국 새들백교회의 선교프로그램인 ‘피스’(PEACE)가 대표적인 예이다. 전방선교지에 가서 ‘목적이 이끄는 삶’을 가르치고, 어떤 재능이든지 가지고 있는 것을 통하여 이들의 삶의 개선시키라고 한다.

혹은 세계화 자체에 대한 비판적 자세를 견지하면서 현지인을 도울 수도 있을 것이다. 상품과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을 억제하고, 스스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더 나은 방법일 수 있다. 세계화의 내면에서 꿈틀거리는 인간의 욕망을 제어하고, 영적이며 관계 중심적이며 친환경적인 대안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 안에 있는 ‘전방’ 선교의 대상들을 생각할 때도, 세계화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앞서 예를 든 대로 다양화되고 파편화된 민중들은 대부분 세계화로 인하여 생겨났다. 이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도 빚진 자의 심정으로 미안한 마음으로 접근해야 한다. 이들을 위한 물질적 개선의 노력을 잊지 말아야 하지만, 동시에 세계화를 기능하게 하는 가치관을 전수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깊은 반성을 해야 할 것이다. 최근 노숙자들에게 인문학을 가르치는 것과 같은 노력은 이런 반성의 일종이라고 여겨져서 환영할 만하다.


후기식민주의(Postcolonial)와 후기근대적 다원주의

 

두 번째로 우리가 선교해야 할 대상 가운데 많은 사회는 이미 후기식민주의와 종교다원주의의 영향 하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과거 식민지였던 제3세계 사람들이 자신을 지배하던 서구의 눈으로 자기를 보던 것을 탈피하여 자신의 기준으로 자신을 보려하는 담론을 후기식민주의라 부른다. 식민지 시절 형성된 사회 구조나 사고의 틀을 비판적으로 본다는 말이다. 서구의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우위를 반대한다.


후기식민주의를 대표하는 학자로 유명한 분은 최근 작고한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Said)를 들 수 있다. 그는 서구 사람들이 자신의 관점(이를 ‘오리엔탈리즘’이라고 부른다.)에서 동양인들을 바라보고 미개하다느니 문화가 발달하지 못한 후진국이라느니 하는 비판을 한다고 하였다. 동양은 동양 나름대로의 삶과 가치와 문화와 종교가 있는데, 이를 서구인의 입장에서 평가하고 책을 쓴다. 그러면 그 책을 읽은 사람들이 동양적인 것이 열등하다는 생각을 확대재생산한다. 예를 들어 동양은 여성, 독재, 비이성, 야만이 지배하는 나라이고 이에 반하여 서양은 남성, 민주, 이성, 문명이 있는 곳이라는 시각이 강화된다.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이러한 비판을 종교의 영역에까지 확장시킨 것이 종교다원주의이다. 모든 문화의 배후에 종교가 있는 것이다. 즉 기독교와 타 종교를 비교하여 기독교가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것이 단지 문화적인 요인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은 타 문화에 대한 경외심을 가지고, 타 문화의 심층에 있는 종교성(혹은 영성)의 깊이를 발현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라 한다.

한 마디로 말하여 복음 전도의 대상이 되는 10/40창의 저개발국가의 국민들도 그 지성이 깨어 있다는 말이다. 이제 잘 사는 나라의 발달된 지식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들 나름의 삶의 지혜가 있고, 문화적 관습이 있고, 종교적 세계가 있는 것이다. 그것을 무시하고 이들을 함부로 대하면 그들 속으로 깊이 침투할 수 없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과거 근대화와 미국을 동일시하며 동경하던 시대는 지났다. 미국이 자국의 이익을 추구하는 나라이며, 그 문화와 관습 중에서 받아들이지 않아야 할 것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리 문화와 우리의 종교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계발시키려는 노력도 있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기존의 기독교를 독선적이라 비웃고, 바로 그런 기독교 때문에 환경 파괴, 여성 억압적 가부장제 등 근대 세계의 문제가 표출되었다고 비판한다. 다원성의 세기를 살아가는 21세기 인간에게 절대를 주장하는 기독교에는 독선과 아집이 설 자리가 없다고 한다. 새만금 살리기 삼보일배(三步一拜)와 같은 종교간 연합 운동이 뉴스의 주목을 받고, 오강남, 김용옥 등의 기독교비판이 각광을 받는다. 종교다원주의의 선구자인 다석 류영모, 함석헌, 변선환 등의 사상이 재조명되고, 전통적인 기독교에는 지면이 거의 할애되지 않는다.

 

종교다원주의의 발전은 어떤 의미에서는 그간의 사상의 역사를 고려할 때 어쩌면 불가피하기까지 한 자연스런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토착화신학과 아시아신학, 민중신학을 거쳐 한국 종교의 심성에 근거한 한국적 신학이 탄생한 것이라 말할 수도 있겠고, 한국의 도교와 기철학(氣哲學) 그리고 동학과 증산도와 같은 한국근대민중 종교의 완성이라 생각되기도 하며, 칼 바르트, 불트만 등의 신정통주의에서 시작한 전통적 신학에 대한 반대가 폴 틸리히, 칼 라너, 포스트모던 신관 등을 거쳐 다원주의로 귀결된 것이라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종교다원주의적 사고의 만연이 전통적 기독교에 치명적 재앙을 가져다준다는 사실은 말할 필요도 없다. 유일성을 상실한 기독교는 더 이상 기독교가 아니기 때문이다.

 

‘세속화’(secularization)는 종교다원주의와 더불어 포스트모던 사회의 쌍생아이다. 특히 성(性) 윤리와 가족의 가치, 근면을 강조하는 윤리는 그 힘을 잃게 될 전망이다. 이미 진보주의자들에 의하여 이런 것들은 여성을 억압하는 도구로, 그리고 난개발로 말미암아 자연을 훼손하는 도구로 지정되었다. 이제 세속화는 점차 대중에게로 확산되어 가는 중이다. 윤리를 강조하는 전통적인 기독교는 점차로 설 자리가 없어진다. 기독교가 택할 수 있는 길은 둘 중 하나이다. 전통적인 윤리적 덕목(예를 들어 이혼 금지, 혼전 순결, 가부장제, 술, 담배, 포르노 금지 등)을 포기하고,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는 프로그램 위주의 교회가 되는 것이 그 하나이다. 혹은 아니면 윤리적 철저성을 지키다가 게토화된 마이너리티로 전락하든지, 둘 중 하나이다.

이러한 후기근대적 상황에서 선교를 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떤 전략을 세워야 할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선 선교사들이 갖추어야 할 것의 목록 가운데 변증적인 노력이 있어야 할 것은 분명해 보인다. 과거 서구의 선교사들처럼, 총칼과 불평등조약과 강제적 개항으로 복음을 전할 수는 없다. 발달된 근대적 학문과 우월한 문명을 자랑하면 전할 수도 없다. 대다수의 저개발국의 정신이 이미 개화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이들을 설득하는 수밖에 없다. 이슬람의 단일신론과 인격신이 어떻게 양립할 수 없는 것이며, 삼위일체론을 전제할 때 쉽게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야 한다. 불교의 무신론이 어째서 설 수 없는 것이며, 대승불교 공(空) 개념이 결국 기독교의 신개념으로 완성된다는 것을 이해시켜야 한다.

변증 가운데 가장 강력한 변증은 삶으로 보여주는 변증이다. 타 종교의 구원관이 허무주의에 빠지는 데 반하여 기독교인들이 항상 소망의 하나님을 품고 살 수 있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한다. 성경의 기독교가 (종종 역사적으로 나타난 기독교와 다르게) 세상을 섬기고 소외된 이웃과 함께 하는 종교임을 보여야 한다.

변증과 더불어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가진 기독교가 정말 성경이 말하는 순수한 기독교인지 아니면 서구의 사상적 영향을 받은 기독교인지를 비판적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자칫 잘못하면 ‘토착화’(indigenization) 신학의 오류에 빠질 염려도 있다. 십자가의 대속 교리와 같은 기독교의 핵심교리를 단지 서구적인 것으로 치부해 버릴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구적인 영향을 털어버리고 남은 복음의 고갱이에 현지인의 사상적 문화적 옷을 입히는 작업은 생각해 볼만하다. ‘상황화’ 사역과 ‘상황화’ 신학을 진지하게 고려해 볼 수 있겠다는 말이다.

 

시대는 정신없이 변하고 있는데, 그 시대의 흐름을 따라 잡지 못하는 기독교인의 치열하지 못함을 안타까워하며 몇 가지 정리해 보았다. 시대의 흐름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피선교국의 상황과 필요를 잘 알기 못한다는 의미이다. 성경의 정신을 올바로 알고 증거하기 위하여 시대정신을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너희가 천기(天氣)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없느냐?”(마16:3)고 한탄하시던 예수님의 음성을 떠올리며.

출처 : 내 사랑 중국 [MyLove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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