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영원한사명)

[스크랩] 문화적인 민감성과 기독교사역 (이태웅)

수호천사1 2009. 8. 11. 16:25

문화적인 민감성과 기독교사역

이태웅 목사/

 


데이빗 헤셀그레이브 박사는 그의 저서 『타문화권 상담학』에서 타문화 상황에서 상담을 하기 위해서 최소한도 세 가지 요소들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다. 첫째는 우주적인(universal) 요소이며, 둘째는 지역적인 요소, 그리고 셋째는 한 개인의 독특한 요소이다. 이중 지역적인 요소는 문화적인 요소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의 국민, 언어권, 또는 하나의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갖는 독특한 공통적인 생각과 역사와 습관들이 바로 그것이다. 상황을 초월해서 공통적으로 공감대를 이룰 수 있는 부분이 어떤 것들인가(우주적 요소)를 안다는 것 못지 않게 중요하다고 본다. 또 더 나아가서는 한 개인이 가지고 있는 심리학적 구성 요소가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위의 세 요소를 이해하게 되면 비단 상담뿐만 아니라 설교와 교회개척 등 다양한 사역분야에서도 유리하다.


대개 타문화권 사역에 대하여 준비하는 사람들은 두 번째 사실, 즉 지역적 혹은 문화적인 요소에 치중하고 있다. 하지만 타문화에서든 국내에서든 사역을 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이 세 가지 모두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런 사실을 무시했을 때 우리는 최소한도 다음과 같은 중요한 오류를 범하게 될 것이다.


첫째로 수신인에 적중되지 않은 메시지를 전하거나 사역을 할 수 있다.

 

더 나아가서는 수신인에게 무관한 사역을 할 수가 있다. 설교의 경우 이럴 때는 자장가가 될 것이요, 사역의 경우에 있어서는 많은 무관심한 사람들에게 "소귀에 경 읽기" 식이 될 수 있다. 상담의 경우는 필요를 느끼지도 않는데 억지로 치료를 하는 식이 되기 쉽다. 한때 독재적인 상황과 우민정책 속에 사람들이 살았을 경우에는 이와 같은 사실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서도 어느 정도 성공적으로 사역을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상황이 변해서 자유적인 사고와 한 개인의 존중성을 더 깊이 인식하는 현대에 와서는 이와 같은 사역을 하는 사람들은 실패가 거의 보장된다. 얼마나 수신인 중심의 커뮤니케이션을 하는가가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될 것이다.


수신인 중심의 커뮤니케이션은 풀러 신학교의 찰스 크래프트(C. Kraft)가 제창한 용어이며 발달시킨 개념이다. 아무리 우리가 좋은 것을 전한다 할 지라도, 받는 쪽에서 그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면 무참하게 도외시 당할 것이라는 이론이다. 수신인 중심의 커뮤니케이션을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발신자 자신의 문화도 알아야 하며, 수신자 입장에서의 문화도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특히 수신자가 어떤 문화 상황 속에 있는가를 인식하는 것과 더불어 그 개인이 지금 가지고 있는 필요는 무엇인가를 이해해야될 것이다. 더 나아가서는 우주적인 공통적인 메시지를 상황에 얼마만큼 적절하게 전하는 가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이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전하는 사람 자체가 결국은 메시지의 일부가 된다는 것이다. 전하는 사람이 메시지와 정반대의 행동을 보이거나 삶의 형태를 가지고 있다면 그 자체가 메시지가 되어서 자기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격하시키게 될 것이다. 쉽게 이야기해서 듣는 사람은 "당신 말은 그렇게 하지만 행동은 달리 하는 것을 보니 결국 당신이 말하고자 하는 그 내용보다는 당신이 행동하는 그것이 더 사실이군요? 나는 그와 같은 이중적인 메시지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이런 식의 반응이 생길 것이라는 점이다.


복잡해져 가는 현대사회에 있어서 수신인 중심의 사역을 하지 않는다면 많은 메시지를 전하고 많은 사역을 하지만 그것이 결국은 많은 잡다한 광고 중의 하나로 끝나버릴 가능성이 높다. 그러면 복음은 그만큼 소외되며 사람은 더욱더 세속화될 것이다. 만일 목회자가 이런 상황에 있다면 회중은 메마르고 그곳은 비생산적인 목회터가 될 것이다. 만일 선교사의 경우라면 언제나 자기 문화의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로 효과적인 타문화의 접촉을 못한 채 비싼 선교비를 쓰며 갈등 가운데 지내다가 많은 상처를 가지고 본국에 돌아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런 상태로서 사역을 끝마치라고 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적극적으로 수신인 중심의 커뮤니케이션을 통해서 사역을 효과적으로 하라고 우리에게 분부하셨다. 이것은 우리가 위에서 언급한 세 가지 요소를 이해함으로써 가능하다.


둘째로 상황화가 제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상황화는 불변하는 하나님 말씀이 현재 자신들이 처해 있는 상황 속에 어떻게 구체적으로 적용되는가를 의미한다. 에큐메니칼 운동권에서는 이 상황화라는 말을 하나님의 말씀도 융통성 있게 변하고, 또 상황도 계속 변하여 이 둘이 적절히 한 조화를 이룰 때 새로운 계시가 나타난다는 식으로 받아들이고 있는데 우리는 이와 같은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 이 같은 주장들 때문에 상황화에 대한 거부감이 복음주의 진영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상황화를 무시하면 두 가지 오류를 범하게 될 것이다. 먼저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전하는 메시지나 우리가 하는 사역이 계속 외국적인 것으로서 인식되게 할 것이다. 그것은 서구에서 온 것, 혹은 선교사들이나 사용할 수 있는 것, 우리에게는 불필요한 것, 우리와는 너무 다른 것 등으로 느끼게 만들 것이다. 또 하나는 연관성을 전혀 느끼지 못하게 만들 것이다. 설교가 상황과 연관성이 없을 때 예배도 예배답지 못할 것이다.


주일날 교회에 와서 드리는 예배는 예배이고 생활은 생활이라는 생각이 팽배해진다. 그러므로 생활은 예배와 무관하게 될 수 있다. 구체적으로 삶의 상황 속에 성경이 어떻게 연관성을 갖는가를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럴 때 많은 그리스도인이 생기지만 말씀이 적용이 적절히 되지 않기 때문에 사회적 변화라든지 기독교적 증거는 그만큼 축소될 것이다. 연관성과 외국적인 느낌 - 이 두 가지는 상황화를 이루지 못했을 때 생기는 치명적인 문제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상황화가 제대로 되지 못한 영역이 상당 부분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전 인구의 약 1/4이상이 기독교인임에도 불구하고 사회는 사회대로 겉돌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이것은 사회가 그만큼 어렵기 때문에도 일어나는 상황이겠지만 그러나 교회에서 선포하는 말씀과 가르치는 성경내용들이 제대로 상황화되어서 현 생활 속에 적용이 되지 못했다는 증거일 수도 있다. 상황화는 더 이상 상아탑 속에만 가두어둘 개념이 아니다. 이것은 모든 사역자들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는 내용이다.


그러면 보다 긍정적인 의미에서 우리가 어떻게 이 세 가지 요소를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겠는가? 우주적인 부분들은 사랑, 슬픔, 모성애, 부성애, 더 나아가서 건강이나 우정 등 공통적으로 모든 문화가 가지고 있는 분야들로서 우리는 좀더 이 사실들을 이해하고 활용할 필요가 있다. 되도록 우리는 우주적으로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보편적인 점들에 초점을 맞추어 사역을 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성경을 통해서, 더 나아가서 일반적인 학문들을 통해서 계발할 수 있다.


그 다음 문화적인 요소들에 있어서는 우리가 단일 문화권 속에 속해있기 때문에 다분히 우물안 개구리 식이 될 수 있음을 인식해야 하겠다. 심지어는 신학교에서 배우는 내용들까지도 문화나 상황과는 상관없이 한 전통적인 역사적 교리를 배우는데 국한될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신학교에서는 선교사로 나가든 아니든 선교 문화인류학(Missionary Anthropology) 정도는 공부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문화가 무엇이며, 어떻게 효과적으로 한 문화권 내에서 의사전달을 하며, 한 문화 속에 있는 속문화권(sub-culture)들은 무엇이며, 그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과 전통과 생활 풍습은 무엇인가 정도는 반드시 이해해야 하겠다. 자문화권 내에 또 다른 타문화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코페르니쿠스(Copernicus)가 경험한 것과 같은 혁명이 될 수도 있다. 많은 사역자들에게 이와 같은 변화가 필요하다. 내가 사역하는 대상들을 위하여 어떻게 적절하게 해야하는 가에 대하여서는 일생동안 생각하고 연구해야 될 것이다. 이는 자문화나 타문화권에 공히 해당되는 태도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았을 때 폴 히버트 박사가 쓴 『문화인류학』 및 『선교사를 위한 문화인류학적 통찰』이라는 저서들은 매우 도움이 될 것이다. 또 문화를 이해한다는 것은 세계관을 이해한다는 뜻이다. 세계관이란 한 사람이 우주를 보는 관점이라 말할 수 있겠다. 기독교적인 세계관이 있는가 하면 세속적인 세계관이 있고, 또 종교에 따라서 세계관이 각기 다르다. 세계관을 이해하지 못할 때 결국은 문화를 이해할 수 없고, 문화를 이해하지 못할 때 세계관을 이해할 수 없다. 따라서 효과적인 사역을 위해서는 세계관의 이해가 반드시 필요하다. 선교사에게는 자기가 목표로 하는 문화권의 세계관을 이해한다는 것이 필수불가결한 일이다. 한국인들 사이에서도 역시 현대 한국인들이 어떤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가를 이해해야 한다. 특히 내가 목회하고 있는 아파트 지역 혹은 농촌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세계관을 이해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것은 문화인류학적인 접근을 통해서 가능하다.


이렇게 한 다음에도 한 개인에 대한 이해가 없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심리학을 통해서 상담학을 통해서 많은 도움을 얻을 수 있다. 성경 가운데는 이러한 내용들이 많이 나타나 있다. 예수님이 한 개인을 다룰 때마다 그 개인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필요를 잘 알고 다루신 것을 볼 수 있다. 사마리아 여인을 만났을 때는 그 여인이 가지고 있을 문제점과 심성을 충분히 이해한 다음에 대화를 나누셨고, 니고데모를 만났을 때는 그 접근 방식이 다르셨다. 38년 된 병자를 만났을 때는 역시 그의 심성에 맞게 사역을 하셨다. 그에게 지금 구원 받으라 하는 것보다는 "일어나라 내가 네게 명하노니 일어나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개인의 독특한 필요를 성경을 통해서 또 자연계시 영역에 속한 학문들을 통해서 계속 연구할 필요가 있다.


결론적으로 타문화권에서든 자문화에서든 사역은 갈수록 복잡해지고 전문성을 요구한다. 이는 현대화와 세속화가 갖다 주는 하나의 도전이다. 인간들이 세속화와 현대화를 경험하면 할수록 더 많은 자의식과 자기만족과 자기중심적인 욕구에 빠지게 된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는 타문화에서나 자문화에서나 효과적인 사역에 대한 연구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이는 문화적인 예민성과 우주적인 요소들과 개인적인 필요를 더 깊이 이해함을 통해서 보다 효과적인 사역을 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주님이 오실 때가 가까운 이때 세속화와 현대화의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 힘있는 증인의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변화하는 세대 가운데서 문화인류학적인 통찰과 더불어 상황화된 말씀으로, 그러나 여전히 불변하는 하나님의 말씀의 진수를 전해야 할 것이다.

출처 : 내 사랑 중국 [MyLove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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