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에 있어서의 참된 지혜
배경식 (한일장신대)
칼빈이 그의 기독교 강요에서 말하는 참된 지혜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과 우리 자신에 관한 지식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이 두지식은 서로 상관관계가 있다. 어느것이 먼저인가라는 물음에 대해서는 쉽게 말하기 어려우나 분명한 것은 우리가 받는 모든 은사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존재자체가 하나님안에서 인것만은 분명하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존재(being)혹은 현존(existence)이라는 말을 칼빈은 사용하지 않고 그가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라고 말한 것은 칼빈 신학의 구조와 내용에 있어서 계시가 중심이 됨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보여 진다. 이런 의미에서 그가 말하는 지식은 우리가 이해하는 일반적인 객관적인 지식과 는 거리가 멀다.
칼빈은 보다 고상한 지식으로서의 믿음을 전제하면서 여기에서 말하는 지식은 인간의 감각적 지각의 대상이 아니라 감각을 훨씬 초월한 것이기 때문에 믿음에 도달하기 위해 자신을 초월하고 넘어 가야 한다고 말한다. 바울은 이 믿음을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아는것"(엡3:18)이라고 표현한다. 바울이 말하는 믿음으로서의 지식은 무엇보다 고상한 것이며 무한한 것이
다. 주님께서 만세 전부터 감추었던 비밀을 성도들에게 나타내셨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이유로 믿음은 인식이다(엡 1:17, 4:13, 골 1:9, 3:10). 요한은 믿음을 지식이라고 말하면서 믿음으로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확신한다고 한다. 믿음은 지식의 이해가 아니라 확신이기도 하다.
기독교의 증언은 하나님의 인식(앎)을 전제로 한다. 이 앎은 하나님이 자신을 나타내 보여 주셨기 때문에 가능하다. 인간에게 자신을 계시하셨고, 계시하시고 계시하실 하나님은 어떤분이신가?
칼빈이 말하는 참된 지혜로서의 하나님 인식을 현대 신학과 연결 시켜 논리 전개를 하려 한다.
1. 계시란?
"계시"는 신약성서에서 "지금까지 숨겨진 것을 보여주다"와 거의 같은 뜻을 가진다. 계시하다를
의미하는(마 11:25, 롬 1:17-18)은 "가면 혹은 껍질을 벗어 버리고 드러낸다"(Enth llung)는 말이며 은 "보이게 한다"(sehen lassen) 그리고 은 "인간의 힘으로 도달 할수 없는 것이 인간에게 전달 된다"(zu erkennen geben)라는 뜻이다.
이상에서 보는 바대로 계시는 우리의 세계와는 무언가 다른 것, 시간과 공간 속에서 경험하는 것과는 다른 것으로 우리에게 자신을 알려준다는 것이다. 이 새로운 것, 초월적인 것은 하나님 자신을 의미한다. 계시의 주체는 하나님이시며 계시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보여지는 하나
님의 은총이다(롬 1:17, 3:20, 눅 3:32, 엡 3:4, 딤전 3:16). 이 하나님을 성서는 (비밀)이라
한다. 이 비밀은 어떤 신비한 비밀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안에 나타나는 하나님을 말한다. 이 비밀은 역사의 종말에 완전히 드러날 하나님 나라의 비밀(막 4:11), 하나님의 뜻의 비밀(엡 1:9)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비밀(엡 6:19)이다.
이방인들과 유대인에게 보여진 하나님의 진노도 해당 된다(롬 1:18이하). 바울에 의하면 계시가 이방인들의 자연적 신 인식에도 사용되었기 때문에(롬 1:18-19) 그의 계시개념은 말씀뿐아니라 창조의 계시인 그 만드신 만물(롬 1:20)도 포함된다.
말씀의 계시도 하나님의 활동 속에 나타난 계시이다(출애굽, 십자가와 부활...).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보여준것은 지금까지 가려져 있던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 사랑속에 하나님의 본질이 있다(요한). 그 하나님은 역사적인 하나님이시다. 인간과 더불어 가고 그들을 앞서가시는 하나님이시다.
초대교회에서는 세가지의 계시적 권위가 있었다. 계시의 책(말씀), 계시 신앙, 계시의 영적직무이다. 계시신학적 입장에서 철학을 적대시 했던 터툴리안(Tertulian)은 "아테네와 예루살렘사이"와 "아카데미아와 교회 사이", "이교도와 기독교간에" 아무런 공통점이 없었다고 한 반면에 저스틴(Justin)은 이성적으로 살았던 모든 사람들은 헤라클레이토스나 스크라테스 모두 그리스도인들 이었다라고 말했다.
로고스개념의 도움으로 말씀과 이성이 통합적으로 사고 되었다. 여기에서는 구속사와 세속사가 하나로 보였다. 역사속에서 로고스는 씨앗과 배아의 형태로(이방세계) 기독교에서는 충만한 형태로 계시된다(변증II 13). 하나님은 그의 피조물속에 진리의 씨앗을 뿌려 놓았다. 그리스도교는 하나의 계시철학이다라고 말한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는 "율법이 히브리인을 그리스도에게 이르도록 교육하듯이 철학은 헬라세계를 그리스도에게 이르도록 교육한다."라고 하였다. 철학은 로고스가 인간에게 나
누어준 바 이성의 빛이다. 영혼은 희랍의 철학을 통해서 신앙에 이르는 준비를 갖추게 되며 그러한 신앙의 터전위에 진리는 지식의 체계를 세운다. 철학은 사고하는 인간이 진정한 기독교의 본질을 파악하는 방편이 된다. 이러한 클레멘트의 사상은 그의 제자인 오리겐(Origen)의 체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오리겐은 기독교를 보다 높은 철학이라 생각하였다. 그는 우주를 하나님의 첫계시로 본다. 우주는 영적, 정신적, 물질적인 세가지의 요소로 되어 있는데 하나님의 두번째 계시인 성서도 세가지 의미를 가진다고 하였다. 성서는 첫째로 물질적인 문자적 의미를 가지며 평범한 대중은 여기에 의존한다. 둘째로 정신적 혹은 도덕적 의미를 가진다. 현실에서 개개인의 영혼과 그들 상호간의 윤리적 관계및 하나님께 대한 관계이다. 세째로 영적 혹은 사변적 의미를 갖는 성서의 진정한 영적 내용, 즉 장성한 신자 이외의 모든 사람들에게 숨겨져 있는 보다 의미 깊은 것이다. 성서에는 문자적 의미를 전적으로 무시해야 되는 경우도 있다(창 19:20이하, 25:1이하, 29:27이하, 30:3,9). 진주를 돼지앞에 던지지 않기위해 영적의미를 숨겨 두었으며 장성한 신자는 문자적 의미를 뛰어 넘어 하나님의 말씀의 신비적 의미를 발견하는데 까지 나아 갈 수 있다.
이레네우스(Ireneus)는 구원이란 원초적인 창조의 회복으로 보았다. 영지주의에 대항하여 구약과 신약에 계시된 오직 한분의 하나님을 강조하였다. 하나님은 종들에게 율법을 주고 아들에게는 유산을 주시는 아버지시다라고 했다. 그역시 철학적 사변을 반대하였다. 하나님은 사색을 통해서가 아니라 계시를 통해 우리에게 알려진다. 이레네우스는 "하나님이 왜 인간이 되셨는가?"(Cur Deus homo)라는 질문을 제기하였고 그 대답으로는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기 위함이라"한다.
이러한 논의는 중세신학에 까지 이르며 여기에서 배타적, 포괄적, 구속사적, 사색적 계시이해가 등장하게 되었다. 루터는 계시를 율법과 복음이라는 이중형태에서 일어난다는 실존적인 계시이해(非사색적)를 주장한다: 율법은 네빚을 갚으라(마 9:2), 복음은 네죄가 사해졌다(마 9:2)이다. 협정신조에서는 하나님이 존재한 다는 것과 작은 희미한 인식의 불꽃이 있다 보았다.
정통신학에서 계시는 1. 일반, 자연계시(revelatio generalis, naturalis)와 2. 특별, 초자연적 계시(revelatio specialis et supernaturalis)로 나누인다. 특별계시는 다시 직접계시(영감, revelatio immediate)와 간접계시(성서, revelatio mediate)로 보았다. 초자연적 계시는 하나님이 말씀을 통하여 인류가 구원에 이르도록 가르치기위한 하나님의 행위로 정의 된다. 하나님이 자신(sese)을 계시하시며 가르침을 위한 개념(ad formatioem)에 계시한다는 것이다. 관념철학에서 계시는 자기계시로만 이해 된다.
특별계시 혹은 초자연적 계시는 성서에 기록되어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말하며 자연계시 혹은 일반계시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을 통한 하나님의 계시를 말 한다. 전자의 성서적 근거는 요1:10-14, 행 4:11-12, 롬 3:21-26, 5:12-21, 고전 1-2장, 갈 2:15-21, 엡 2:1-10, 빌 2:6-11, 요엘 1:15-20, 히 9:11-22, 요일 2:2 이며 후자의 성서적 근거는 창 1:26, 욥 12:7-15, 시 8,18, 19편, 요 1:2-4, 행 17:22-28, 롬 1:19-20, 32, 2:14-16등 이다.
정통주의에서는 하나님의 자기계시 수단인 계시의 말씀을 율법과 복음으로 보았다. 계몽주의에서는 특별계시를 자연계시로 대치하였으며(Lessing의 이웃사랑의 개념과 계시) 관념주의는 간접계시를 종교적인 체험으로 보고 직접계시로 변형 시켰다(칸트의 역사적 신앙이 순수한 도덕적인 종교에 의해 지배받는다). 쉴라이어마허는 이러한 계몽주의와 합리주의, 도덕주의에 맞서 종교는 순수한 이성이나 도덕이 아니라 순수감정이라 하였다(절대 의존의 감정). 계시란 우주가 인간에게 새롭게 전달되는 것이기에 전통적인 계시의 의미가 약화 된다. 트뢸치(Troeltsch) 역시 인간에게는 종교적 선험(a proori)이 주어졌기 때문에 계시는 직접적인 것으로 보아 그리스도교를 최상의 계시의 하나인 신적인 계시로 보았다.
1. 점진적 계시와 종결된 계시
그리스도안에서 모든 종교들을 포함하는 점진적 계시(트뢸치)는 1. 근본적이고 중심적 계시(성서) 2. 발전 계시(교회사적 전통과 종교적 세계) 3. 현재적 계시(종교 체험)로 보며 예수그리스도안에 보여진 계시는 원초적 계시이며 역사가 끝날 때까지 계속된다고 한다. 프릿체(Fritzsche)는 계시의 사건을 대략 30년간의 성육신에 쿨만(Cullman)은 그리스도의 출생으로 부터 마지막 사도들 까지 대략 7-80년까지로 보았다. 특별계시는 성육신으로 종결 되었다. 종결되지 않고 점진적 계시로 이해 되는 것은 간접계시이며 바르트의 말씀의 삼중적행위인 계시-성서-선포에서 보여진다. 계시는 추상적으로 우리에게 오지않는다(K. Barth). 우리는 계시를 성서로 부터 선포속에서 간접적으로 인식한다.
2. 이원론적, 일원론적 계시
율법과 복음간의 문제는 루터교회에서 알트하우스(P. Althaus), 쉬링크(E. Schlink), 에러트(W.Elert)에 의해 분명해 진다. 하나님에게서 진노와 은총이 인간에게는 죄와 신앙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렇게 말 함으로써 엘러트는 계시의 사중적인 것을 말 하였다. 바르트는 루터교회에 반대해 계시의 일원론을 말함으로 율법과 복음의 대립을 배격하였다. 율법은 복음의 형식이며 일부이고 한 부분이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은총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율법이나 복음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는 사실은 그자체가 은총이다. 율법은 도덕적인 기능을 가졌으며 복음은 교육적인 기능을 가졌다. 율법이라는 어두운 배경에서 은총이 빛난다. 모든것이 은총이라면 그어떤것도 은총이 아니다.
루터교회의 율법과 복음의 대립은 이신칭의라는 복음을 율법의 차원에서 대립시킨 바울의 입장에서 생겼다(롬 3:20, 28, 10:4, 갈 2:16, 3:11). 요한과 히브리서에서도 나타난다(요1:17). 율법은 원래 구원을 가져다 주는 것이었는데 명령과 절대적 실체로 전도되었다(Von Rad, M. Noth).
알트하우스는 요한이 계명과 율법을 구분한 것에 의해 계명, 율법, 복음이라는 삼중적 계시를 말한다. 태초의 "너는 해도 된다"는 계명이 타락으로 인하여 율법과 금령으로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율법과 복음을 강한 분리와 대립으로 보았다.
바르트는 계시를 자신의 전체신학을 대별하는 삼위일체의 사고에서 이해한다: 계시는 인간에게 밝혀 질 수 없는 자기 현시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계시안에서 형태를 취한다. 그분이 제2의 자아인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일어난 하나님의 계시가 우리안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계시가 되기 위하여 하나님은 자신의 성령을 부어 주셨다. 그리스도의 계시는 계시의 객관적 현실이고 성령은 주관적 현실이다. 성령속에서 계시는 각사람에게 전달되며 사건화 된다. 그는 계시의 삼위일체적 운동을 다음과 같은 삼중구조로 본다. 성부-성자-성령은 계시자-계시-계시됨이며 은폐-드러냄-전달, 자유-형태-역사성을 갖는다.
루터적 이중행위와 바르트의 삼중행위 이모두는 율법속에서 진노하신 그 하나님이 성부, 성자, 성령을 통하여 인간을 복음안에서 사랑하시기 때문에 루터적 관점에서 합치 될 수 있다.
3. 배타적, 포괄적 계시
바르트의 계시이해는 배타적이며 수직적이다. 그는 어떠한 자연적 신인식과 일반계시를 부정한다. 다른 종교는 하나님에게 반대하는 불신앙에 이른다(K.D. I 2, 328ff). 그의 바르멘 선언에 의하면 "예수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유일한 말씀이며 유일한 계시이다. 본회퍼도 종교비판적인 입장을 표명하였다.
일반계시를 포함하는 포괄적인 계시는 알트하우스, 틸리히, 칼 라너, 한스 큉이다. 알트하우스에 의하면 말씀계시 이외에도 창조 계시, 모든 인간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원래적인 자기증거, 원계시가 있음을 주장한다(롬 1:18, 2:15, 행 14:15, 17:17, 23). 그는 쉬라터(A. Schlatter)의 모든것을
포함하는 계시의 개념을 받았다. 알트하우스의 원계시는 인간의 구원을 위한 계시의 불가결한 전제로 인간들로 하여금 죄책감을 갖게하여 사죄의 복음이 인간에게 있게끔 기회를 제공한다는 것
이다(Die christliche Wahrheit, 41.). 일반계시는 특별계시를 준비한다. 복음은 종교들의 진리와 접촉한다. 종교들의 진리는 진정한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 순종하는것, 인간의 잘못을 아는것인데 스스로 구원하려는 기만속에 있다는 것이다.
틸리히(P. Tillich)는 계시의 매체로 1. 자연 2. 역사 집단과 개개인 3. 언어를 열거한다.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나타난 계시는 최종적, 결정적, 규범적인 계시이다. 보편적인 준비단계의 계시는 그리스도교 이외에도 존재한다(Systematic Theology I, 165, 171). 틸리히의 계시의 역사는 다음과 같은 도식으로 본다. 보편계시---(준비시기)____최종계시-----(수용시기)_____(완전계시?)
라너(K. Rahne)r는 기독교이전의 종교들에도 구원의 길이있다고 보았다. 그속에서 초자연적인 실존이 활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우 기독교의 복음이 인간의 양심속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길로 이끌때이다. 이 종교들은 그리스도교 이후에도 구원의 길이 될 수 있다. 다른 종교들은 구원의 잠정적인 방편들이다. 이 모든 구원의 길들은 교회의 그리스도안에서 교점과 종점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어떤것은 역사안에서 종점에 이르지만 다른 것은 역사의 피안에서 종점에 이르른
다(Schriften zur Theologie VIII, 370ff). 그의 제자 쉬레테(H. R. Schlette)는 종교는 통상적인 구원의 길이며교회는 특별한 구원의 길이다 라고 까지 말한다(Die Religionen als Thema der Theologie, 85, Ev. Theol. 33. Jg. 1973, H. 3, S. 293ff). 큉(H. K ng)도 다른 종교들 속에 구원의 길이 있다고 본다. 그는 포괄적인 기독교 보편주의를 주장하는데 기독교의 배타성이 아닌 독자성을 말한다.
우리가 견지해야할 두가지 명제는 1. 그리스도의 계시는 유일한 계시는 아니나 2. 유일한 구원의 계시이다. 원계시는 구원의 계시가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의 계시이다(롬 1:18이하). 롬1:18-20과 2:14-15의 일반계시는 진노와 율법의 계시이지 은총의 계시가 아니라는 점을 이들은 간과하였다.
히르쉬(Emmanuel Hirsch)의 계시이해는 바르트를 비판하면서 특유한 독일적 계시를 만들었다. 계시개념과 은총개념에서 단순한 그리스도론적 협소화로 부터 해방 되 어야 한다는 것이다. 역사적인 변혁속에서 활동하는 하나님은 과거지향적인 교회에 맞서 미래를 제시한다고 한다. 히르쉬는 독일 기독교인의 민족주의적 신학을 주창하면서 반유대적 행동들을 긍정 할 뿐아니라 피에대한 경외와 충성과 국가의 막중한 활동에 협조해야 함을 말한다(오늘의 정신적 상황, 12). 이러한 모델이 신학적, 정치적 소산의 적용신학에서 유행되고 있음은 흥미로운 일이기도 하다.
4. 역사로서의 계시
계시가 역사라는 사실은 오늘의 신학에서 거의 일치된 확신이다. 쿨만(O. Cullman), 베버(Otto Weber), 판넨베르크(W. Pannenberg), 앤더슨(Andersen)등이 주장한다. 쿨만에 의하면 점진적 축소와 확대의 과정을 밟는 구원사적 계시를 말하는데 창조→ 인류→ 이스라엘→ 남은자→그리스도→ 사도들→ 교회→ 구원받은 인류→ 새창조로 본다(참조:이레네우스). 그리고 일차적으로는 하나님의 사건에 연관된 계시이나 이차적으로는 나의 실존에 관한 계시이다. 베버에 의하면 계시가 역사화 하는 것은 하나님이 역사의 주체이시기도 하지만 자신을 역사의 객체로 만들기 때문이다.
성육신을 통한 자기계시속에서 자신을 인간의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우리도 그에 대해 말한다. 계시를 하나님의 자기 유한화로 파악한 베버의 계시는 중요하다(Gr. d. Dogmatik, 194).
판넨베르크의 "역사로서의 계시"도 비슷한 신학적 관심에서 이다(저스틴과 비교). 그가 배격하는 것은 계시가 하나님의 직접적인 자기계시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자기계시는 간접적으로 역사적인 행위들을 통하여 일어났다. 그러므로 계시는 시초가 아니라 역사의 종국에 일어난다. 예수의 운명 가운데 모든 역사의 종국이 미리 일어 났다고 한다. 그는 초자연적 계시와 자연적 계시의 구별을 부정하고 하나의 유일한 계시를 인정한다. 그러나 이계시는 일반, 자연계시와 유사하다.
직접적인 계시는 없고(출 3:14-15!) 실존적인 보통 역사에서 보여지는 간접적인 계시가 언어를 통해 일어난다는 그의 명제는 문제점이 있으나 일방적인 말씀주의에 대항하여 케리그마에 대한 역사의 우선권을 명료화 하였다. 앤더슨의 역사적계시는 하나님을 인간에게 말씀하시는 분, 행동하는 분(시33:9, 창 1:1) 그리고 오는 분으로 계시한다. 오늘날 말씀의 신학과 구원사의 신학간의 대립과 오시는 하나님을 계시의 본질로 간주하는 시도가 이루어 지고 있음은 다른 측면을 절대화 하기가 어렵다. 서로에 대해 자신을 주장하는데 우리는 설교와 세례, 성만찬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으며 하나님은 그분을 통해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오신다.
일반적인 자연계시와 특별한 율법계시속에서 진노를 알리시는 하나님이 복음계시속에서 자신의 은총과 자기자신을 열어 보이신다. 종교들속에서 이스라엘과 만드는 계시의 역사는 그리스도안에서 그 목표에 도달하며 규범적 중심은 그리스도 이다. 특별계시는 성육신의 직접자기 계시속에서 종결된다. 간접계시로서의 특별계시는 교회안에서 계속 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계시는 항상 말씀과 동시에 사실로서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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