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 복음 전도와 종말론
Allan Anderson
역 정 재용 교수
1. 선교사의 영
오순절은 아마도 20세기에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종교적인 운동이며, 세계의 모든 곳에서 발견되어지고 있다. 이러한 이유들 중에 확실한 것은 오순절이 항상 선교와 복음 전도에 설득력 있는 강조가 있기 때문이다. 오순절과 은사주의의 시작으로부터 항상 이러한 행위들이 행하여져 왔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의 유력한 성령론으로부터 항상 논쟁이 됐다. 사실, 첫 째로 오순절은 전 세계에 순 복음과 함께하여 마지막 추수기의 영혼들을 위하여 성령의 그들에게 부어주었다고 믿고 있다. 그들의 노력들은 성령이 그들의 모든 행위의 원동력이 된다는 신앙적인 기초를 두고 있고, 그리고 그들은 아주사 거리에의 신문에서 첫 번째 이슈가 선언 되었던 것처럼, 성령의 세례가 세계의 다른 언어들로 그들에게 주어졌다고 믿었다:
한 사역자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20년전에 보여주기를 선교사들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은 그들인 그들의 사역에서나 외국 선교지역에 나가기 전에 방언의 은사를 받게 될 것이라 말하였다. 이것은 이방인에게 가기 위한 증거로 하나님의 메시지이다. 언어의 은사는 오직 성령이 말하게 하여야만 보여 질 수 있다. 이것은 원주민 언어와 같이 배워서 될 수 없는 것이지만, 그러나 주님께서 말의 발성기관을 다스릴 때에 가능한 일이다. 이것은 절대적인 것으로 하나님의 메시지이다.
사실 초기의 모든 선교사들은 그들이 간 곳의 사람들의 언어들을 말 할 수도 하지도 못하였고, 그들은 결정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방언에 의하여 자극되어지지 않았지만, 그러나 그들에게 주어진 성령에 의한 것 이였다. 오순절들은 주로 ‘성령에 의하여 보냄을’받은 것에 비중을 주어 세워졌고 그리고 형식에 맞는 구조들 보다는 성령이 인도함을 받는 것으로 나타내는 것에 더욱 관심을 가졌다. 선교사로 부름을 받은 사람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일들을 행하였다, 왜냐하면 성령이 그들에게 이것을 하도록 지도하였기 때문 이였다, 때로는 몇 몇의 영적인 계시인 예언과 꿈 혹은 환상과 같은 것을 통하여 또한 하나님의 들을 수 있는 목소리를 인지하는 것을 통하여 이루어 졌다. 전통적인 카톨릭과 개신교 선교의 ‘하나님의 선교’와 그리고 복음주의 선교의 지상 위임령의 순종과 비교해서, 오순절 선교는 성령의 이들의 선교적인 행위의 뒤에는 성령의 동기를 주는 능력이 최초의 신앙적인 확신으로 첫 번째 기초가 되었다. 오순절의 지도자인 로즈웰 플로워(J. Roswell Flower)는 1909년 ‘성령이 우리의 마음에 오셨을 때에, 선교사의 영이 함께 오셔서; 이들은 분리할 수 없고...이 곳과 다른 땅에 굶주린 자들에게 복음을 가져가야 하는 것이 자연적인 결과이다’라고 기록하였다. 오순절 선교의 심장은 성령의 능력을 경험 하였다. 시간이 짧다는 다급함을 믿음으로 오순절 선교사들의 사역에 임하게 되는 것으로, 이 선교는 항상 분명하게 공식화되어지거나 전략화 되어 지지 못했다. 사도적 신앙(The Apostolic Faith)은 ‘이것은 세계에 이르는 부흥이다, 마지막 오순절의 부흥을 우리 예수님이 가져다주었다. 교회는 교회의 마지막 행군을 교회의 소중한 것을 만나야 한다’고 선언 하였다. 그들의 선교 행위는 이 전 천년 종말론에 기준하였다, 그래서 사역에 관한 반영은 복음 전도와 선교의 행위와 같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였다. 그들의 선교 신학은 하나의 움직임의 신학이며 그들은 시작으로부터 행위-중심이 된(action-oriented) 선교들 운동으로, ‘중심적 위치를’차지하는 교회들과 선교들로부터 귀에 거슬리는 반대에 부닥치게 되었고, 그리고 종종 격렬함과 함께, 때로는 다른 오순절 조직들 자신들 사이에서 적개심으로 쪼개어지고 내부 분쟁이 있었다.
피터 와그너(Peter Wagner)가 후계자로서 풀러 신학교(Fuller Theological Seminary)의 도날드 맥가브란(Donal McGavran)은 오순절 교회의 성장의 성장에 관하여 첫 번째로 선교학적인 질문을 하였었다; 그리고 그들의 ‘교회 성장’ 학교에 미국 오순절 선교학자들의 중요한 영향력 대하여 피력하였다. 이중에 하나는 바울 포머빌(Paul Poverville)로서 기록되어진 지상 위임령의 순종은 모든 복음주의자들의 강조이지만 그러나 오순절에게는 이것을 주된 선교의 동기는 아니다라고 말하였다. 성령은 오순절날 부어진 것은 하나의 선교서의 영으로서, 성령의 충만한 교회는 본질에 의한 선교사 공동체이며 그리고 교회의 증거는 내면적인 역동적인 것이 풀어 놓이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오직 하나의 성령의 공동적인 경험이 아니다; 개인적인 경험이 가져다주는 것은 각 하나님의 백성들이 성령이 함께 하는 것으로서 또한 교회의 확장을 가져다주는 열쇠이다. 선교 안에서 성령의 중심점은 오순절 연구들의 시종 일관된 주제이다. 오순절 운동은 성령의 위임된 능력에 의한 선교사 운동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2. 리더십의 상황화
우리가 보았듯이, 오순절주의는 성령 안에서의 세례에 대한 그들은 외국어 방언들이 주어진 것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것으로 믿었다. 서구로부터 선교사들은 독립되어지거나 교단적인 오순절 선교는 주된 세계를 향하여 뻗어 나갔다, 대 다수의 압도적인 오순절 선교사들은 종종 일반적인 교육이나 훈련이 없이 ‘성령에 의하여 보내어진’ 구가적인 사람들이였다. 이것은 다른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는 선교와 오순절 사이와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오순절주의 경험에서, 성령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조건 없이 주어지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목회자’와 ‘평신도’그리고 ‘남자들’과 ‘여자들’사이의 엄격한 선을 나누는 것이 오순절 교회들을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었다. 더욱 의미가 있는 것으로, 그들은 본국의 목사들과 복음 전도자들을 세워 성도들을 만들어 가고 그리고 공동체를 향하여 나가도록 장려 하였다. 이것이 많은 오순절 선교가 행하였던 ‘외국’에서 ‘본국’의 빠른 전환이 하나의 결과로 나타난 부흥의 원인이다.
최근에 이르기 까지, 오순절들은 교실에서 이루어지는 것과 같이 사역자들을 위한 전통적으로 형식을 갖춘 훈련이 아니었다. 그들은 모든 믿는 자들의 제사장설의 원리를 맹렬히 지켰다. 성령은 성별이 구분이 없이 교육이나 사회적인 신분인 각각의 믿는 자들에게 동등 하게 말씀 하시고 그리고 오순절 성도들은 복음의 선교사와 사역자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첫 번째 오순절 지도자들은(몇 몇을 제외하고) 사회의 교육받지 못한 저 층으로부터 오는 경향이 있었고 그리고 그들의 은사적인 능력들이 인정이 되었고 장려되진 실습생 형태의 훈련을 받았다. 불행하게도, 복음전도를 통한 자전의 강조와 교회 성장은 때때로 오순절 자체적인 내면에서, 승리주의자들과 주목되어지지 않은 모습이거나 특별히 억압 받는 정부에서 그들의 사회적-정치적 상의 심각한 이슈들의 결과로 여겼다. 아르헨티나 학자인 호세 미구우주 보니노(Jose Miguez Bonino)는 만약에 ‘선교의 세계적인 도전은...본국 때의 환경의 급박한 도전들과 함께한 관심으로부터 논리적으로 전환되어 질 수 있다’고 오순절에게 묻는다. 오순절들은 이러한 경고들을 주의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복음의 사회적인 암시들과 그들의 선교 전략에서 잘 못된 것을 인정하기 시작하였다. 교회는 열방에 복음을 전하는 의무뿐만 아니라 이들의 이웃을 사랑해야 gkse 그리도 이것은 그들의 선교의 생명력의 한 부분이다. 개리 맥지(Gary McGee)는 오순절은 제삼세계의 가난에서 생존하면 그리고 경제와 사회적인 것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눌림에 있는 사람들에게 더욱더 가까운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오순절 선교는 경제적으로 자립하는 현지 지도자들은 빠르게 세우게 됨으로 그러므로 새로운 교회들은 전통적인 교회들이 행하였던 것보다도 더욱 빠르게 문화화 됐다. 이 부분에서 개척자이 하나님의 성회 선교학자인 멜빈 핫지(Melvin Hodge) 이 부분에 주목하였고, 그의 넓은 영향력 있는 토착 교회들 (1953)에서 ‘토착 교회들’을 만드는 것을 강조한 것뿐만 아니라 또한 이것은 본질적인 오순절의 선교 전략의 원리인 교회 개척에 분투하였다고 하였다. 토착 교회들에 대한 롤란드 알란(Roland Allen)의 책에서 1921년대에 오순절 범위에서 이미 알려졌었는데, 이때에 미국 스페인계의 초기 선교사였던 알리스 루이스(Alice Luce)는 알란의 가르침에 대하여 써서 소논문을 연재하였었다; 그리고 핫지(Hodges)는 의심할 여지없이 그의 선교학에 뼈대를 세우는 것에 알란의 아이디어에 빚을 지게 되었다. 그러나 서구의 오순절(특별히 하나님의 성회) 선교에서 핫지의 영향은 현지 지도자들을 세우는데 그들의 헌신을 가지도록 하였고 그리고 신학 훈련 학교(성경학교라 불렀다)를 세울 수 있게 하였으며 그리고 전 세계에 현지 목회자(in-service) 훈련 구조를 가질 수 있었다. 이것은 현지 오순절 교회들의 더욱더 빠른 성장을 가져오는 결과가 되는 변화가 되었다. 핫지는 중앙아메리카의 선교사로서 다른 문화적인 상황 안에 오순절 성장의 심장부에서 선교활동을 했었다고 확실히 말할 수 있다. 그는 모든 선교 행위의 목적은 ‘신약 성서 방법’을 따르는 ‘토착 신약 교회’을 세워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는 교회 자체는(복음 전도자가 아닌) ‘복음 전도를 위한 하나님의 기관’이며, 그리고 타 문화(cross-cultural) 선교사의 역할은 교회가 자립, 자치, 자전하도록 확보하는 것이라 강조하였다. 그는 그의 책의 주 주제인 ‘삼자 정책’을 열광적으로 끌어안고 확장시켰다, 그러나 그는 ‘토착화’를 소개하는 것은 초기의 작업의 주제에서 부족한 것으로 소개되었다. 이것을 가질 수 있도록 한 것은 근거는 성령 이였다:
만약에 복음의 씨앗이 올바르게 심겨지지 않는 다면 지구위에 어느 곳이라고 토착교회가 세워지지 못 할 것이다. 성령이 한 나라에서 사역한 것 같이 다른 곳에서도 일할 수 있다. 가정에 의하여 행하여 나가기 위해서는 어머니 선교에 의한 어떤 땅에 있는 유아 교회는 항상 돌보아져야 하고 제공되어는 것은 우리가 봉사하려는 사람들에 깨닫지 못하는 무례한 행위여, 그리고 복음의 능력과 하나님의 부족한 믿음의 증거이다.
핫지의 견해는 미래의 선교사들이 토착 교회들을 읽으라고 규정을 지은 하나님의 성회의 성장의 결과에 깊은 영향력을 가졌다. 그러나 ‘세 자기’는 더 이상 이국적인 형태를 취하는 교회의 패턴은 더 이상 존재 하지 않게 하고, 그리고 대중적인 문화의 상징과 패턴의 개념에 기초를 두지 않는 다면 ‘삼자 정책’에 이르는 진실 된 상황화는 보장 할 수 없다. 아직 까지는, 오순절주의 종교적인 창조성과 자발적인 상황적인 특성은 세기 저쪽을 위하여 선교사들과 선교 전략에 의하여 이상들과 같은 것으로 특성은 그대로 있다. 토착화를 위한‘삼자 정책’방식은 오래전에 이 목적은 전통적인 교회에 의하여 실현되어진 것으로 자동적으로 그리고 외관상 많은 오순절 교회들에 의하여 쉽게 이루어졌다. 핫지는 이 사실 안으로 가볍게 박자를 마칠 수 있었다. 그에게 있어서, 오순절 선교의 기초와 그리고 이것의 지속적인 팽창의 이유는 창조적인 행위, 힘찬 팽창과 그리고 모든 세계에 ‘토착 교회들’인 전하여 지지 않은 수천의 ‘서 민’들에게 사역의 은사를 주신 ‘성령의 개인적인 충만함’ 이였다.
불행하게도, 핫지는 아직까지 그의 상황의 결과로 생각 하여, 주로 ‘선교’가 북미(혹은 서구의 어떤 곳이든)로부터 ‘외국’의 모든 세계를 향하 나간 것으로 보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오순절 선교의 견해는 미국(US) 오순절 선교학적인 연구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때로는 미국에서 성공한 맥가브란/와그너(McGavran/Wagner)의 발전들과 전략의 재생산은 받아드리는 것들이 더 이상 실용성을 가지지 못하게 된다. 다행이도, 최근에 제외된 것들이 있다. 핫지, 그의 주목할 만한 통찰력에 불구하고, ‘외국’을 향하여 ‘집’을 떠난 백인들로서 외국으로 이주하는‘선교사들’(‘우리’)의 개념에서 도망 칠 수 없었고, ‘토착 교회’의 이상이 이루어진 때 ‘선교사들’의 사역을‘현지인들’(그들)이 반드시(결국에는) 취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핫지는 선교를‘외국에 교회를 개척하는’것과 같은 것으로 보았다. 이것들과 비슷한 기록들은, 세계에서 선교의‘목적’은 머무르고 있어서 커다란 주류의 오순절은 짐짓 과소평가되어지고 있다. 다행이도, 세계의 주류를 이루는 오순절과 은사주의 교회는 현재 외국의 선교 이상주의와 전략들을 맹목적으로 만족하려고 하지 않는 과거의 가설들을 신학자들과 선교학자들을 생산해 내기 시작하였다.
3. 역동적이고 상황적인 선교 실천
우리는 오순절과 은사주의 신앙의 현저한 양상들을 보아 왔는데 이것은 성령의 오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서 ‘기적과 이적들’이 함께하여 복음이 믿을 수 있도록 하게 하였다. ‘기적과 이적들’의 역할은 특별히 신유와 기적들로 오순절과 은사주의 선교 실천과 반영에 중요하다. 전 세계에 걸쳐서 오순절과 은사주의 가난하고 괴로움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으로 치유의 역할로 보여 졌다. 초기 오순절 잡지들에 간행물에는 육체적인 치료와 축귀와 죄에서 자유함의 간증들로 가득 채워졌었다. 초기 오순절 선교사들과 특별히 위대한 복음 전도자들은 ‘최우선적으로 하늘의 능력이 보여 질 것을 구하여-기적과 이적들, 치유, 그리고 못된 습과 사단의 사슬에서 해방되도록’ 복음 전도와 함께 하는 것을 기대하였다. ‘기적과 이적들’은 독립 오순절과 은사주의 교회들에 의하여 진전 시켜져서 세계의 많은 지역에서 오순절과 은사주의 교회들이 급성장을 이끌어 왔다, 그러나 논쟁은 없었다. 우리는 설교자의 자기 확장과 경제적인 것을 취하는 복음 전도자들의 사역을 정밀하게 비평을 할 필요가 있다, 이들은 종종 나누는 것에 매우 인색하다.
오순절이 ‘순복음’에 대한 이해는 복음 전도의 말씀 선포는 특별히 신유와 ‘기적과 이적’들이 함께 하여야 하는 의미로서 그들의 복음적인 전략의 절대 불가결한 부부니다. 사실, 세계의 많은 문화의 산재하고 있는 곳에 종교적인 전문가나 ‘하나님의 사람’이 마법 자와 악한 영들에 사로잡힌 자들 그리고 병든 자를 고치는 능력 있어, 오순절에 의한 병고침이 주는 것은 이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흥미를 가지도록 했다. 이러한 문화들은 통전적인 세계관으로 ‘영적’인 것으로부터 육체적인과 분리 될 수 없는 것으로 지속적으로 그리고 사람들은 오순절의 ‘능력’있는 종교로서 인간의 필요들을 만나 줄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므로 몇 몇의 오순절에게 있어서, 특별히 초기의 시기에, 약을 사용 하는 것을 포함해서 모든 치료 방법을 거부하는 것의 결과까지도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의 믿음으로 직접 치료 하여야 한다고 했다. 오순절 선교를 통하여 많은 치료가 이루어졌다는 보고가 있었고, 복음 전도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확인된 진실임을 말하였다, 하나님의 능력은 그들의 사역의 증거가 되었고, 그리고 결과는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전통적인 신앙에서 떠나 복음을 받아드려 기독교인들이 되었다. 치유를 강조하는 이것은 오순절 복음 증거의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서 커다란 대중 집회와 천막 부흥회들이 엄청난 군중들에 의하여 이루어졌고 종종 지금도 이러한 방법이 사용되어 ‘복음화 되어지지 않은’ 많은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도록 한다.
오순절주의와 은사주의는 신약의 기적의 능력들이 현 시대에 다시 회복이 되어 믿지 않는 사람들을 기독교인들이 될 수 있게 한다고 믿는다. 이러한 것은 특별히 도시화와 세속화 그리고 과학적으로 이성화에 의하여 악영향을 가지게 한 세계의 지역들에게 영향력이 있다. 치료가 준 중심적인 역할은 서구의 오순절에게는 현저한 특징이 아마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듯하지만, 그러나 모든 공동체에 악한 영향을 주고 질병의 문제들이 현존하는 세계에서는 사적이고 개인적인 목회 사역이나 단순한 임상적인 치료의 지위를 떨어뜨리게 하지 않았다. 이러한 공동체들은 건강이 중심이 된 공동체들이고 그리고 그들의 전통적인 종교들과 치료와 보호를 위한 종교적인 행위는 현저한 것이 된다. 오순절은 전통적인 영적인 가치들을 무의식적으로 만나졌던 것들을 파괴하여버렸던 이성주의적인 서구의 기독교 형태에 의하여 빈 공간으로 남겨진 것들에게 대한 그들이 경험한 것에 대한 반응이었다. 오순절은 사단(evil)으로부터 보호를 받고 성서적인 치료의 전통들을 다시 선언하는 메시지를 선포하여, 그들은 이러한 전통들의 행위적인 영향력을 보여 주었고 그리고 기독교인의 선구자들이 되는 것을 행함으로 진정한 의미가 있음을 알게 하여주었다. 따라서 오순절 주의는 때로는 위협적이고 적개심이 가득 찬 세계를 대처하는 삶의 문제들과 방법들의 해결하도록 제공하여 주어 대부분의 세계의 사람들의 육체적이고 감정적이며 영적인 필요들은 만날게 하도록 오래전부터 오고 있었다. 그러나 슬프게도, 이러한 능력의 메시지는 많은 경우에서 그들이 약함에 있는 사람들의 착취를 위한 예가되었다. 능력의 신학들은 반드시 또한 십자가의 신학들이 되어야 한다.
상황화는 하나의 원칙으로 뜨겁게 논쟁이 되었고 그리고 때로는 적게 이해되어졌다, 그리고 이것은 복음과 기독교 신학이 모든 문화와 상황 안에서 같다는 가정하는 ‘토착화’와 혼동되어서는 아니 되며, 그리고 이것이 기독교가 전통적인 문화와 관계가 있다는 경향이 있다. ‘상황화’에 대한 다른 가정은 모든 신학이 이것의 특별한 상황에 의하여 영향이 있고, 그리고 반드시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특별히 급격하게 변화하는 밑바닥에 깔려 있는 것을 포함해서, 모든 상황과 문화에 기독교 메시지와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영안에서의 자유’의 어조는 모든 세계의 오순절주의 특징으로서 의심할 것 없이 많은 다른 상황에서 이러한 운동들이 나타나도록 제공하여 주었다. 전통적인 교회들과 같지 않은 자연적인 예식은 주로 구어체와 이야기 체로서 영을 통하여 직접적인 하나님의 경험을 강조에 의하여 이끌려 간다. 이것은 일반적인 사람들의 가능성의 결과로 현세계의 세속적인 날마다의 지루함에서 황홀한 새로운 영역으로 끌어 올린다. 이것은 모든 일반적인 오순절과 은사주의 예배의 형태에-하나님의 임재에 의하여 방언과 크고 감정적인 지속적인 기도와 그리고 기쁨에 가득 찬 찬양과, 손뼉을 치며 손을 높이 들고 춤을 추는 것을 강조하는 것에 의하여 도움을 가져 온다. 이러한 실천들은 오순절과 은사주의들의 예배에서 더욱 쉽게 다른 문화를 받아들이게 하여, 특별히 하나님의 현존의 느낌이 바로 이루어지도록 만들게 한다; 이러한 예식은 이성적이고 기록된 예전들인 거의 모든 다른 기독교의 형태인 목회자에 의하여 모두 주도되어지는 것과 구분되어 반대된다. 더욱이, 이런 전적인 참여는 평신도의 참여와 모든 사람들에게 유효한 것은 오순절과 은사주의의 예배의 형태는 가장 중요한 것이 되었다, 다시 현저한 역할과 대조적으로 전통적인 교회들의 신부와 사역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많은 새로운 오순절과 은사주의 교회들이 핵심적인 형태를 가지고 사역자들에 의하여 말씀의 설교를 강조한 전통적인 개신교를 회복시켰다고 할지라도,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오순절은 전통적인 교회들 경우 보다도 일반적인(평신도) 성도들에 의하여 커다란 교회 헌신을 가지도록 허락하였다.
현지 설교자들에 의한 복음 선포와 충당은 일반적인(평신도) 사람들은 이미 익숙한 것으로 종교적인 경험과 생각된 양식들 안에서 표현되어진 것들이다. 아프리카에서 몇 몇의 커다란 ‘영’ 교회들은 예를 든다면, 전통적인 신앙의 해답과 행위들인 일부 다처 주의와 그리고 마술에 능력이 부여된 것을 거부한다. 예식과 상징들은 선구의 기독교와 아프리카인의 전통적인 종교들(그리고 때로는 완전히 새로운 것으로)로 부터 순응시켰던 것들이 항상 현지와 관계되어져 있고 그리고 멤버들에 의하여 살아 있는 예배와 그리고 열광적인 참여가 포함되어진 것들이 소개되어졌다. 칠레의 오순절 학지안 주안 세플레다(Juan Sepúlveda)는 현지 문화에서 문화화 기독교에 대한 오순절의 가능성에 대하여 논평하였다:
현대 오순절주의에 의하여 성령론의 재발견은 주로 다양한 문화에 성육신한 복음에 새로움을 주는 영적인 자유 함과 함께 하고 있다: 성령의 능력을 믿는 것은 하나님께서 다른 서구의 기독교인들보다도 문화적인 중개들을 통하여 오늘날 사람들에게 할 수 있고 말하기를 원하고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오순절로서 존재하는 것에 대한 의미는 이러한 영적인 자유를 확신 하는 것이다.
그는 ‘크리오의 오순절주의’는 본질적으로 도시의 가난한자와 농부의 메스티조(mestizo) 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고 그리고 이런 특징은 역사적인 오순절의 이런 모양에서 다른 것으로서 그들 나라의 기원에 주로 문화적인 의존을 보여 주어 선교사의 기원의 다른 오순절 교회들로부터와 같은 것이다 말하였다. 당연히, 서구로부터의 오순절 선교는 이러한 위험으로부터 면제되지 않는다. 그러나 전 세계를 통하여, 오순절 운동은 새로운 자원적인 조직들을 창조하고, 때로는 다양한 인종으로, 전통적인 친족관계 그룹들로 대체한다. 많은 오순절 교회들은 능가하여 현지 적이고 그리고 종족적인 나눔의 새로운 멤버들을 보충하기 위한 프로그램들을 가지고 있고, 그리고 전 세계를 위하여 운동의 일반성과 메시지는 이런 신앙 체제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인종적인 기초를 둔 전통적인 종교들로부터 근본적으로 출발하였다.
4. 오순절의 복음 전도와 교회 개척
오순절 주의는 오순절 차체로 종종 복음 전도에 침략적인 형태들로 소문이 났고, 그리고 오순절의 시작으로부터 복음적인 개척에 강조를 둔 것에 의하여 특징되어져서, 오순절의 가장 높은 주 선교 전략이다. 오순절 주의에 있어서는, 복음 전도는 성령의 능력으로 그리스도를 위하여 나아가서 ‘잃어버린’자들을 찾아 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순 복음’인 ‘구원자, 치료자, 세례자 그리고 오실 왕’ 선포하는 긴박한 메시지를 가지고 있다. 아주사 거리의 부흥은 ‘부름을 받은’ 오순절 ‘선교사들’이 짧은 시간 안에 모든 세계에 펼쳐나가는 바람으로 규정되는 것의 결과가 되었다. ‘선교’는 거의 ‘백인’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하는 ‘외국 선교’로 주로 이해되어졌고, 그리고 이러한 선교사들은 거의가 혼련 되지 않았고 완전히 경험되지 않은 사람들이였다. 그들의 자격은 오직 성령의 세례를 이였고, 하나님의 부르심 이였다; 그들의 동기는 주님이 곧 오시기 전에 세계에 복음 전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됨으로, 복음전도는 그 어떠한 것과 같은 교육이나 ‘도시화’ 보다 더욱더 중요한 것이었다. 소수의 선교사 훈련을 주장하였던 선교사들은 선교사로 받아들이는 자격과 같은 것에 학문적인 업적을 요구하지 않았다. PMU(Pentecostal Missionary Union, UK, 영국 선교사 연합회)가 설립될 때에 1906년 알렉산더 부디(Alexander Boddy)의 정기 간행물인 확신(Confidence)에서 지원자를 위한 자격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발표하였다:
종교적인 테스트. 지원자들은 반드시 그들 자신이 성령을 받아야 한다. 교육적인 자격. 그들은 반드시 성경의 모든 책에 대한 좋은 지식과, 그리고 구원과 성화의 교리의 지식이 분명하여야 한다.
그리고 이것이 모든 것으로서 - 어떤 열광적인 오순절 성도들도 선교사로서 가능하였다. 맥지(McGee)는 첫 번째 20년 전의 오순절 선교사들은 모두가 ‘운영 안에서 무질서’와 같은 것으로 설명하였다. 장식물 회보로 서구로 보낸 여과하는 보고서들은 낙관적이고 개선적인 것으로 어떻게 많은 사람들이 회심 했으며, 치료되었고, 그리고 성령을 받은 것으로 가득 차 있었고 극히 드물게 어떤 어려움을 만났었는지 혹은 피할 수 없는 잘 못을 저질렀는지에 대해서 조언을 구하는 것이었다. 초기의 오순절 선교사들은 종종 온정주의적 이였다, 그들은 종종 그들의 회심 자들 사이에서 의존적이게 하였고, 소위 ‘현지인 사역자들’을 그들은 때로는 눈에 띠는 인종차별주의 자였다, 일반적인 혼돈에서 주목할 만한 제외가 있었다. 남아공의 선교학자 윌렌 싸이멘(Willem Saayman)은 관찰한 것과 같이, 대 부분의 오순절 운동은 선교사회와 같은 존재하고 있는 곳에 들어왔고; 그들의 사역은 ‘몇 몇의 결과가 신학의 결정에 의한 생각에서가 아니었고, 그래서 정치나 방법들은 선교사의 습관의 모진 시련을 겪어 대부분 형성되었다. 오순절의 선교사들은 종종 특별한 부르심의 감각을 가지고 있고, 그리고 신적인 운명과 그들의 주장이 강하여 확신에 찬 그들의 부흥의 메시지에 대하여 굳은 반대에 직면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반드시 인정되어져야 하는 것으로 비록 초기의 많은 선교사들이 순진하게 보였을 지라도, 그들의 복음전도의 방법들은 다양하였고, 실제적 이였으며 그리고 놀랍게도 성공적 이였다. 오순절교회들은 오랜 기간동안에어 다른 기독교 교회들이 존재하지 않았던 ‘교회’와 ‘선교’의 사이에서의 갈림길에서 그들의 매우 자연적인 것에 의한 선교사였다. 이것의 중심적인 선교학적인 밀림은 이것의 존재에서 오순절주의이고 본질적인 것 안에서 분명한 하나의 명확한 장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오순절 선교에서 아직까지 몇 가지 뛰어 넘어가야 할 문제점들이 있다. 그들의 교구제도와 그리고 경쟁은 교육적인 협력이 어려워서, 서구의 선교사들 사이에서 온정주의에 대한 경향이 현지의 견해를 들으려하는 것을 마음에 내키지 않으며, 사회적-정치적 억눌림에 반대하고, 가난의 곤경에 처한 것에 대한 커다란 참여가 필요하다. 이것은 또한 오순절 복음전도의 대 부분의 형태의 특징으로서 선포는 종종 한 방면의 치우치게 되어, 복음이 전파되어진 사람들의 문화적인 상황과 종교적인 경험들에 대하여 충분히 교려하지 않았다. 결과는 ‘개심자’는 대부분 친밀한 것은 잃어 버렸고 그리고 그 기독교는 오히려 외국으로 남아 있는 세계가 되어 기독교 메시지를 연결하는 셀 수 없이 많은 기회를 가지고 있다. 지속적으로 사람들의 삶을 이해에 대한 의미를 주기위하여 기독교 복음과 전통적인 전-기독교의 종교와의 소외되어졌던 관계에 대하여 긴박한 주의를 기울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종교들을 악마 같게 하는(많은 서구의 개신교 선교들의 유산)것은 복음전도에 도움을 주지 못하는 원이 되고 오늘날 교회를 건강하게 자라게 할 수 없다. 이러한 것은 오순절에게 있어서 몇 몇의 논쟁으로서 아직까지 상주하고 있다.
교회 개척은 모든 오순절 선교의 행위의 중심적인 특징이다. 번영하는 오순절 교회들은 어떤 선교사들의 도움이 없이 세계의 곳곳에서 세워졌다. 이러한 교회들은 성령의 능력의 새로운 메시지의 경험으로 더욱 커다란 의미가 되어 설교할 수 있도록 주체할 수 없는 마음에 의한 동기가 된 현지의 사역자들에 의하여 전례가 없는 혁신적인 선교 독창력들에 의하여 세워 졌다. 이러한 오순절 선교의 영향은 이러한 유일한 메시지에 근거를 둔 것으로 양쪽인 수천의 토양의 밀사들과 그들의 흥미를 끄는 자원들이 동기가 되었다. 모든 폭 넓은 다른 오순절과 은사주의 운동들은 중요한 일반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삶의 경험과 그리고 고통으로 둘려 쌓여 있는 것을 구원을(혹은 치료) 선포하고 기념하며 그리고 그들은 삶을 위한 메커니즘을 잘 대처하고 그리고 의식의 품위를 가지도록 위임된 능력을 제공한다. 그들의 선교는 가능한 많은 사람들에게 이 모든 것의 메시지를 끌어안아 전하는 것이며 이것을 이루는 것이다, 현지 오순절 복음전도자들은 멀리 그리고 넓게 나아갔다.
20세기의 오순절과 은사주의의 주목할 만한 성장은 종종 ‘사람의 운동’, 전례가 없는 척도에서 다른 종교들로부터 대량의 다른 사람들이 기독교로 전향하고 서구 선교가 준비하지 못한 다수의 사실들에 의하여 운동 안에서 형성된 것의 사실로부터 분리도어질 수 없다. 은사주의 지도자들은 아프리카 상황에서 하나의 ‘주된 집단 개종’의 운동으로 불려 진 기폭 자들이 되었다. 이러한 운동들은 급격히 확산 되지 못했다 왜냐하면 선구의 교회들이 많은 분열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자들과 여자들의 지칠 주 모르는 노력을 통하여 집단 개종이 기독교인들이 되었기 때문이다. 전 세계적으로, 이러한 초기의 개척자들은 전에 이루어진 몇 몇의 폭 넓은 본보기가 되는 그들의 선교들로부터 그리고 그들에게서의 배움으로 또 다른 선교사의 세대에 의하여 따르게 되었다. 그러나 오순절의 성장은 적은 은사주의적인 ‘지도자들’이나 ‘선교사들’의 노력의 결과가 아니다. 운동의 성장은 현재 사실적으로는 지역을 넘나드는 네트워크와 때로는 국가적인 경계선을 넘었던 알려지지 않은 여자들과 남자들로서 지칠 줄 모르는 광대한 평범한 사람들이 없이는 허락되지 않았다.
대부분의 오순절의 형태들은 모든 멤버들은 사역자들이고 그들이 어느 곳에 가 있던지 선교와 복음을 전하여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종종 제도화가 증가되어짐에도 불구하고 목회자/평신도의 나누어짐이 다시 나타남의 원인임에도 불구하고, 오순절 운동에 ‘평신도’의 많은 참여는 오순절의 성공을 위한 하나의 이유가 된다. 하나의 신학적으로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목회자는 주가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지성적이고 성직의 기독교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이미 그들을 실패하게 하였다. 평범한 사람들에게 쉽게 관계되어지는 사람들에게 의하여 능력의 논증이 실질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의 민주화였다, 그러므로 복음의 신비가 교육받은 적은 수의 사람들과 선택된 특권층에 더 이상 예정해 둔 것이 되어서는 아니 된다, 그러나 과거나 현재에 원하는 사람들에게 계시 되어야 한다.
5. 전 천년설 종말론
초기의 오순절들은 그들의 선교가 그리스도의 곧 오심을 준비하기위한 부분으로 믿었다. 그들이 받은 영 안에서의 세례와 방언은 특히 마지막 날들이 왔다는 증거로 받아들었다. 그들의 종말론은 천년 왕국이 도래되기 전에 예수의 재림을 하는 전 천년설이며, 이것이 가득채운 절박함으로 시작으로부터 그들의 복음전파였다. 복음적인 설교들은 초기의 간행지인 Maria Woodworth-Etter에서는 종말론적인 주제로 가득했음으로 아마도 초기의 오순절의 가르침과 설교에 현저한 부분 이였다. 그리스도의 곧 오심의 신앙이 중요한 부분 이였고 그리고 모든 선교사의 행위에 동기가 되어서 오순절에게 다른 지역들과 문화에서의 삶의 어려움에 대한 약간의 준비와 빈약한 전략들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기대한 것과 같이 마지막이 오지 않았을 때에, 오순절들은 다른 복음주의자들의 선교 전략들을 받아들이고 조정하였다. 오순절인 ‘복음 교회’(Foursquare gospel)은 그리스도의 기독론의 주제인 ‘구원자, 치료자, 성령과 함께 세례자 그리고 오실 왕’을 선포하였다, 종말론적인 주제는 대부분의 두드러짐으로 받아드렸다. 이런 ‘종말론적인 희망’은 오순절의 형성을 이루는 발판에서 운동에서 특색을 지우게 되었고 그리고 ‘마지막 날’과 함께 ‘순 복음’과 연결되어져 오순절이 빠져나오게 된 경건 운동으로부터 오순절이 형성되어지는 패러다임이다. 아주사 거리의 신문인, 사도 신앙 (The Apostolic Faith) 은 이 전 천년설의 주제로 가득 차 있었고, 그리고 이런 영향에서 많은 예언과 비전들로 보도되었다. 이것은 ‘세상의 끝이 오기 전’에 복음전도에 대한 강조 배경에 동기가 된 것이며, 더욱더 깜짝 놀라게 하는 기적들과 같은 방언, 예언 그리고 신유들은 부수적인 것들 이였고 이런 강조를 확신시키는 것이었다. ‘기적과 이적들’ 오순절의 메시지의 설교와 함께하여 ‘마지막 시간’을 증명하는 것으로 보여졌다. 이것은 새로운 오순절 운동으로 그리스도의 오심을 앞서서 이루어지는 일로서 ‘마지막 날’에 ‘늦은 비’의 영의 부어주심으로 믿었다. 이것은 특별히 요엘의 예언의 성취로 받아들였다(요엘2:28-32).
이것은 ‘종말론적인 비전’으로서 결과적으로 영성의 특별한 형태가 되었다. 스티븐 랜드(Steven Land)가 더하였던 것 같이, 교회는 ‘성령(Spirit)의 논증과 능력 안에서 보편적인 선교의 종말론적인 공동체이다’. 따라서 방언의 목적은 이 땅의 모든 언어로 복음의 설교를 촉진시키기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임박한 오심은 본질적으로 그리스도(복음전도)에게로 세계를 회심 시키는 것으로 보여 지는 것과 같지 않은 것으로 복음 전도와 세계 선교를 위한 주된 동기였었다, 그러나 마태복음 24장14절의 성취와 같은 것 이었다. 아주사 거리의 선교사들 중 하나였던 A. G. Garr는 1909년 홍콩으로부터 한 편지에서, ‘그의 사랑의 기치는 모든 나라를 향해 갈 수 있었으며, 그리고 그의 영광스러운 복음은 앞을 향하여 갈 수 있었고, 그의 이름위하여 백성들을 모을 수 있었으며, 이것은 우리의 왕이 다시 오시기 오시기 위함이다’라고 기록했다. 전통적인 오순절은 그러므로 특별히 구원의 역사의 종말론적인 견해에 항상 두고 있었다.
대부분의 초기 오순절(그리고 아직까지 많은 ‘전통적인 오순절’이 따르고 있다)의 미래적인 전 천년설의 뼈대는 플리머스 형제 교회의 창시자인 요한 넬슨 다비(John Nelson Darby)에 의하여 알려졌다. 1970년대까지 영어권 안에서 오순절에 의하여 사용되는 대부분 잘 알려진 권위 있는(King James) 성경의 번역인 Scofield Reference Bible(1909)으로 더욱 이것의 형태를 진전 시켰다. 이것들은 한정된 전 천년설의 세대 주의로서 20세기 많이 두드러진 것으로 애써서 만든 결과로 이루어진 것이고 그리고 종종 알려진 종말론적인 문헌에 대한 미래와 현재의 세계 사건들의 공상에 잠긴 해석이다. 오순절의 행위 불일치 앞에서 세대적인 요소들이 있다고 할지라도, US 오순절 신하고 그리고 정치적인 참여들은 이런 종말론적인 것에 의하여 깊게 영향을 받았다. 다비(Darby)는 교회는(몇 몇은 단지 오순절에서 구성되어졌다는 것으로 믿었다) ‘적그리스도’가 세상을 지배하는 기간인 7년 환란 전에 비밀스럽게 하늘로 휴거 될 것이라고 가르쳤다. ‘이런 커다란 환란’의 마지막 때에, 그리스도가 오셔서 아마겟돈 전쟁에서 적그리스도를 물리치고 그리고 난 후에 천년동안 다스리게 될 것이다(천년 왕국). 천년왕국의 마지막에, 사단은 풀어지고 결국에 멸망을 당하게 될 것이며, 백 보좌 심판에서 진정한 성도들이 아닌(‘염소’)로부터 신실한 성도들이 구분 될 것이다. 결과적으로 천국이나 지옥으로 영원히 들어간다. 가르침은 마지막 때에 관한 계시록의 구절들과 다른 신약 성서의 구절들은 문자적인 해석이었다.
오순절에게 있어서 이러한 가르침의 의미는 믿지 않는 세계의 복음전도의 짧은 기간의 긴박함을 위한 것으로 이것의 절박한 운명과 함께 그들의 믿음은 그리스도가 곧 오신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순절 운동 안에서 세부적인 전 천년설의 종말론은 오순절의 교단들의 제도화가 증가되는 것과 함께 단지 몇 년이 지나서 일어났다,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의 신학적인 설명이 더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전 천년설은 전통적인 오순절 내에서 널리 퍼져 나가게 되어 스티브 랜드는 이것을 오순절의 하나의 본질로 생각하였다. 로버트 앤더슨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오순절의 기대와 외국어 방언을 믿는 것 때문에 희미해지기 시작하였다고 지적하였다, 종말론은 북미의 오순절 이데올로기의 중심적인 양상에서 방언으로(초기 증거)로 대처되었다. 더욱이, 초기의 오순절의 천년설에의 열정은 더욱더 오늘날 번영하고 있는 오순절 사이에서 시들어지게 하고 있다. 랜드(Land)는 ‘위로 향하는 사회적인 가동성은 확실시 종말론적인 열정과 긴박함에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종말론적인 소망과 복음 전도에 대한 열정은 ‘제삼세계의 급격히 성장하는 원시적인 상태 곳에서 더욱 가깝게’ 발견되어진다고 지적하였다. 다른 오순절의 종말론적인 스트레스의 따른 결과는 그들의 마지막의 임박함을 믿는 의미는 ‘영혼이 구원 받아야’한다는 것이 더욱 중요함으로, 사회적의 관심에 대한 짧은 시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방면에서 ‘이미’와 ‘아직’의 사이에서 종말론적인 것 안에서 긴장과 결점의 구분을 위한 그들의 자연적으로 추구되어진 것에 의하여 오순절 주의가 강조된다. 영의 약속은 단지 예언의 성취만이 아니라 ‘마지막 날들’의 징후이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명백한 증거로 ‘마지막 날들’이 이미 온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씀 안에서 현존한 세계에서 계시되어졌고 그리고 실행되었다, ‘종말론적은 체험’은 ‘나타남과 성령의 능력인 임재에 의하여 현존하는 것으로 곧 알 수 있는 것이’되었다. 마지막 날이 오기 시작하였다. 몇 몇의 아프리카 토착 교회들은(AICs), 그들의 새 예루살렘 과 시온의 비유적 표현으로서, 먼 몇 몇 땅에 있는 그러나 아프리카의 명백한 실체 안에서, 이러한 ‘종말론이 인정되어진’것으로 강조되었다. 성령을 통하여 이미 새로운 시대가 왔기 때문에, 이것의 치유의 이익들과, 축귀 그리고 번영은 가난한 자들과, 억눌림을 받은 자들 그리고 재산을 빼앗겨 버린 자들을 위하여 지금 유효 한다. 콕스는 오순절 주의는 ‘원초적인 희망’의 회복을 위하여 세계의 수단이 되어져서, 특별히 약 87퍼센트의 오순절 신앙인들은 ‘세계의 가난의 선 아래 살고 있다.’ 이것이 거의 모든 주요 세계의 사람들에게 그들의 흥미를 주어 오순절을 존속시키는 다른 문화적 모양을 취하는 이유가 된다.
6. 믿음의 말씀 운동
‘긍정적인 고백’ 혹은 ‘믿음의 말씀’의 운동은 두 번째 20세기 절반에 US 아메리카 독립 오순절주의 사역들에게 표면적으로 나타났고, 그리고 ‘인정되어진 종말론’은 오랄 로버츠 그리고 A. A 알란과 같은 독립 신유 복음전도자의 사역자들로서 그리고 저술가인 침례교 목사 E. W. 켄욘과 함께 오순절로부터 간접적으로 발전시켰다. 켄욘(Kenyon)은 예정되어진 신성한 원리에 의하여 ‘믿음의 법칙’의 일과 ‘하나님의 말씀의 긍정적인 고백’을 가르쳤다. 그는 치유는 어떠한 증거나 환경에 상관 하지 않고 믿음에 의하여 모든 사람들이 받을 수 있도록 그리스도의 사역이 완성되었다고 가르쳤다; 그리고 약은 믿음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가르쳤다. 운동의 발전은 은사 운동과 현시대에 텔레비전 복음 전도자인 윌리암 브래함(William Branham)과 오랄 로버츠(Oral Roberts)와 같은 신유 복음전도자의 가르침에 의하여 자극되어졌다. 이것은 현 모든 세계의 오순절과 은사주의 교회의 가르침에서 현저하게 나타나고 있다.
특별히 널리 알려진 ‘믿음 운동의 아버지’로 널리 주목되어진 켄네트 하긴(Kenneth Hagin)에게는, 켄욘의 가르침을 널리 보급하였고 그리고 말하기를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을 행하여 육체적인 건강과, 물질적인 부요와 그리고 성공에 대하여 선택적인성서의 인용에 의하여 가르침은 지지받아야 한다고 했다. 하긴은 말하기를 이것은 성서가 무엇을 말하는지를 믿어야 하는 것으로; 성경은 반드시 드러나야 하며, 그리고 무엇을 사람이 고백하던지 그것일 이루어질 것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사람은 비록 ‘증상’ 머물러 있을 지라도 치유에 대하여 고백하여야 한다고 했다. 수천명의 하긴의 졸업생들은 그의 ‘믿음의 말씀’ 메시지를 모든 세계에 전파하였다, 그리고 하긴의 책들과 비디오 그리고 테이프들은 그들의 수백만에게 팔렸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의 가르침의 유형은 비록 크게 발전된 형태는 아니더라도, 1950년대에 신유 복음전도자의 적지 않은 시기에 오순절에게 부분적으로 영향을 주었다, 특별히 오랄 로버츠의 그리 T. L. 오스본 양 쪽다 하긴과 그를 따르는 자들에 의하여 종종 인용되었다. 켄네드 하긴(Kenneth Hagin)은 그의 심장 만성적인 질병의 치료의 결과인 마가복음 11:24에 의하여 1934년도 ‘계시’를 받았다. 그의 가르침들은 켄욘의 에 의한 것으로 한 사람이 믿음 안에서의 환경이나 증상과 관계없이 치유의 긍정적인 고백인 ‘믿음의 말씀’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켄네드 코펠랜드 (Kenneth Copeland) 재정적인 부의 위대한 강조와 함께 하긴의 가르침을 발전시킨 것이며 그리고 건강과 부를 구하는 자들에 의하여 현저하게 된 ‘부의 법칙’이 형성되었다. 가난은 믿음을 통하여 이겨야할 저주와 같은 것으로 보았다. ‘믿음-힘’을 통하여, 믿는 자들은 그들의 모든 환경을 그들의 온전한 하나님의 권세로 회복하여야 한다.
믿음 운동의 말씀은 육체적인 치유와 그리고 물질적인 부를 가르치며 항상 성경 구절의 지혜의 특별 계시로(‘지혜를 느끼는 것과 구분하여’) - ‘레마 말씀’으로 진실과 같은 것을 긍정적으로 고백하는 것이다. 이 가르침이 주장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레마 말씀’을 믿고 고백할 때에 이것인 힘이 생기고 영향력일 가지게 되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결과라는 것이다. 그들이 고백하였어도 그들이 받지 못하였을 때에, 이것은 항상 부정적인 고백과 믿음이 없는 것이나 혹은 신성함 법을 관찰하는 것을 실패하였기 때문이다. 몇몇의 믿음의 선생들은 믿음이 연약 것으로 간주하여 약을 사용하는 것을 금하고 있고 그리고 고통을 최소화 하거나 중요하게 생각지 않으며 하나님의 목적에서 가난과 핍박을 거절한다.
‘믿음의 말씀’은 US의 오순절에게 있어서 가장 잘 알려진 하나의 운동이 되고 있다. 은사운동 사이에서 널리 퍼져 있는 것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오순절에게도 영향을 주고 있다. 사실과는 별도로, 이런 가르침은 성공적인 윤리를 장령하고 자본주의의 ‘아메리카 꿈’을 고무시키고 있어, 인간의 믿음이 하나님의 은혜와 높은 주권 이상으로 놓이게 됨으로 이들 사이에서 더욱더 의문점을 가지게 한다. 믿음이 하나님의 행위를 위한 조건이 되고 그리고 믿음의 힘이 결과에 의하여 평가되어진다. 물질과 경제적인 부와 건강이 때때로 영성과 긍정의 증거로 보여 지고 그리고 핍박과 고통의 필연적인 역할이 때때로 소외되어진다. 성령은 성공과 부가 이루어지고 메시지의 영향력의 육체적인 결과에 의하여 결정되어진다는 것에 의하여 유사한 마법의 능력으로 지위를 떨어트린다.
독립적인 발전에서, 비슷한 가르침이 한국의 서울에 있는 여의도 순복음 교회의 조 용기(다윗)의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의 신학의 부분이다. 초기 오순절의 4복음에, 그는 ‘오중 복음음의 메시지’를 포함시켜서 (1) 회심, (2) 성령 충만, (3) 치유, (4) 축복(추가한 부분), 그리고 (5) 재림. 더욱이 삼박자 구원에 포함되어진 것은 ‘영혼의 부’ ‘물질적인 부’ 그리고 ‘건강한 삶’으로 믿음의 말씀 운동이 좋아하는 요한 3서 2절로부터 온 것이다. 좋은 소식으로 조 가 선포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믿는 자들의 필요를 만나 주셔서 그들의 영적인 구원과 육체적인 치료 그리고 물질적인 필요를 위한 다른 축복들이다. 그러나 이것은 조에게 한국 전쟁 후 가난과 결핍 가운데 이러한 메시지가 주어진 것으로 그 뒤로는 모든 그의 설교와 사역이 기반이 되어 진 것이다. 오직 ‘삼박자의 구원’을 받는 것은 ‘좋으신 하나님’을 믿는 것이며 그리고 구원은 죄의 용서와 건강과 부을 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축복’의 교리는 이기적이고, 개인적인 ‘나를 축복’하는 것이 아니라, 주위에 함께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축복이 넘쳐흐르게 하는 것이다. 로버트 슐러와 오랄 로버츠와 같은 저명한 ‘믿음’의 선생들이 조의 책의 서문을 기록하여 주었고 그리고 뿐만 아니라 로버츠는 그의 책들과 테이프 리코딩으로부터 그의 부에 대한 가르침을 받으라고 말하였다. 조의 신학의 범위에 대한 질문은 US 아메리칸 오순절에 의하여 영향을 받은 것으로 특별히 오랄 로버츠로서 더 큰 연구를 해야 될 문제이다. 조 자신은 1958년 ‘한국에서 현존의 하나님’을 위하여 그의 간구에서, 그는 ‘요한 3서 2절에 기록된 건강과 부와 구원의 삼박자의 진리’를 받았고 그리고 이것은 그 때 이후에 그의 설교와 사역의 기초가 되었다고 말했다.
몇몇의 논쟁들은 19세기의 ‘신 사고’와 크리스천 사이언스와 같은 것과 이중적인 사물론 과 함께 하는 Norman Vincent Peale'의 '긍정적인 사고와 믿음의 말씀의 가르침과 연관을 지으려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논쟁들은 근거가 없는 것으로 남아 있고 그리고 이것은 아마도 이러한 운동이 오순절 상황과 이 자체의 신유의 강조 안에서 보는데 더욱더 도움이 된다. 초기의 오순절 설교가인 스미스 위글레스워드(Smith Wigglesworth)과 같은 이는 믿음을 강조하였고 그리고 아주 오래전인 1924년 ‘나는 무엇을 내가 보는 것에 의하여 행동하지 않고. 나는 오직 내가 무엇을 믿는 것에 의하여 움직인다,’라고 한 것 같은 믿음의 말씀 설교자에 의하여 종종 인되어진 말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전통적인 오순절들은 ‘극단주의적인 종교적 경향’의 비난과 함께한다, AG의 연구자인 뉴-우맨(Neuman)은 조 용기(Cho), 하긴(Hagin) 그리고 코페랜드(Copeland)를 이러한 잘 못을 지적하고 그리고 특히 조 모사의 입장을 진전 시켜 나가는 동안에 US AG는 이러한 가르침에 대하여 공식적으로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뉴-우맨은 ‘건강과 부의 복음’은 ‘이교적인 기원’을 가지고 있어 ‘이단적인 기독론’이라고 하였고, 그리고 ‘인간의 삶에 파괴적인 영향을 가지고 있고 그리고 잘 못된 기독교 신앙의 상을 세상에 전하고 있다’고 했다. 다른 한편으로, ‘믿음의 말씀’의 메시지의 논쟁은 성경이 물질적인 필요의 질문에 대하여 전체적으로 아무런 언급이 없다는 사실을 계산해야 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구원이 통전적인 것으로 하나님과 그의 은사의 기쁨과 모든 인간의 필요한 것들을 예비하여 주신다. 구원은 인간의 모든 것을 의미함을 인류가 하나님과의 온전한 교제와 하나님의 은사들을 누리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에게 축복을 주시기를 간절히 원하신다, 그리고 이축복은 모든 그들의 필요를 준비하는 것을 포함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몇 몇의 ‘번영’의 선생들이 지적하는 것과 같은 원인과 영향의 파괴할 수 없는 율법과 같은 것은 성서 안에서 묘사되어진 곳은 어느 곳에도 없다. ‘이미’와 같은 ‘아직도’를 항상 ‘인정되어진 종말론’으로 보는 것은 항상 ‘아직도’와 같이 ‘아직도’를 보는 자들보다도 더 나쁘다. 제 삼계에서 독립 교회들과 오순절 교단들의 출현이 되는 이유는 삶 안에서 영혼의 구원이 ‘아직도’와 함께 배타적으로 관계되어진 것으로 현존하는 기독교의 선교들을 많은 사람들이 보는 곳이었다, 후로는 적게 현의 삶의 억눌리는 필요를 위하여 행하여 져서, 오순절과 독립교회들에 의하여 ‘여기에서 그리고 현재’ 문제들에 역점을 주게 되었었다.
그들의 선교와 복음전도엣, 오순절은 실제적은 복음을 선포하였고 그리고 실질적인 필요인 질병과 가난과 실직, 외로움과 악한 영들과 무당들의 문제를 다루는 것을 구하였다. 정도를 변화 시키는데 있어서, 그들의 많은 여러 가지의 형태 오순절, 그리고 엄격히 말해서 그들의 타고난 유연성은 사람들에 의하여 몇 몇의 본질적인 질문이 요구되진 것들을 그들에게 답변 할 수 있는 상황적인 특징을 취하고 있다. 현지의 삶과 문화 동정적인 접근과 그리고 특정적으로 잘 알려진 종교적인 행위들의 보존이 분명히 그들의 끄는 매력이 주된 이유이고 특별히 개인적인 시골로부터 개인과 관계가 없는 도시지역을 이주하는 이들의 도시화에 의하여 가득 메워진 곳에서 이루어진다. 병 고침, 인도함, 악으로부터 보호 그리고 성공과 번영은 몇몇의 오순절과 은사주의 교회들의 믿음의 있는 성도들에게 실질적인 이득으로 제공되어졌다. 이러한 교회들은 많은 기독교 교회들이 이러한 행위들에서 믿음을 잃어버리고 그리고 심각한 내리막길에 놓여있는 동안에(몇몇은 종말로 고하였다고 생각함) 개종을 거부하는 주의를 직면하고 그리고 후 식민지 내에서 선교와 복음전도에 자극을 주었다. 이 모든 것이 말하는 것이 오순절과 은사주의가 모든 올바른 답변을 준비하여 주는 것은 아니며, 패턴이 모든 점에서 애써야 하며, 그렇다고 해서 다른 기독교들로부터 그들이 아무것도 배우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독립적으로 오순절과 은사주의들에 의해서 엄청나고 비교할 수 없는 공헌을 기여한 것은 취소할 수 없는 세계 기독교가 직면하는 것을 변화 시켰고 그리고 선포와 증거에 의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이 교회의 임무를 실행하는 데 전 인류 교회를 풍요롭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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