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영원한사명)

[스크랩] 9-12세기 선교 역사적 배경

수호천사1 2009. 4. 8. 09:52

9-12세기 선교 역사적 배경

 

 

cde1b.jpg (108641 bytes)1. 역사적 상황

기독교력이 1000년을 향해 움직이자 기독교국가들은 심판과 종말이 임박했다고 생각하며 두려움과 공포와 기대로 가득찼다. 그리고 새천녕이 시작되면서 스코틀랜드와 스카디나비아에서 프러시아와 폴란드, 발칸반도에 이르는 마지막 이방지역인 북부 변두리르 복음화하려는 시점에 와있다. 지중해 연변에는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한 비잔틴정통과 안디옥을 중심한 시리아 정통이 있으나 분리되어 결집력을 가지지 못했다. 반면 아시아 제국들은 월력이 다른 관계로 1000년이라는 시간에 대한 관심은 없었다. 그러나 당나라가 멸망하고(907) 5대 10국의 혼란의 시기(907-970)이어지고 송(960-1127)이 들어서나 변방의 유목민에게 밀리게 된다. 아시아의 동쪽이 혼란으로 흔들리고 있었다면 아시아 서쪽끝의 아랍제국은 자신들의 제국 동쪽 변경은 터키족에게, 서쪽 변경은 페미티드 이집트와 기독교 콘스탄티노플에게 잃어가고 있었고 정권은 터키족의 꼭두각시노릇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아시아의 남쪽인 인도에는 터키 유목민들이 들어와서 가즈니왕조를 세우며 인도를 흔들었다. 중국에서의 경교는 사라져갔고 중앙아와 인도북부에서는 기독교가 이슬람으로 대체되어가고 있었다. 다만 남부인도에서는 도마 기독교가 강성했으나 소수카스트로 간주되어 고립되어있었다. 그러나 페르시아에서의 기독교는 자신들의 관할지역(딤미, dimmis)외에는 기독교가 거의 보이지 않았으나 교회는 생존했다.

A. 유럽:


1. 바이킹의 이동

   a. 9세기 봉건주의 / 샤르마뉴 대제 이후 3분된 정치 공백(843년)으로 / 외부의 침략세력-스칸디나비안과 무슬림으로 / 도시보다 시골에서 살았다. 땅이 부의 기준/ 봉신,가신


   b. 교회와 사회의 생존/ 교황권의 쇠퇴, 교회는 봉건적이되고 정치 세력이 되었다. 교회나 수도원은 귀족들의 생존 투쟁의 수단으로 전락


   c. 바이킹의 약탈
 
   1) 790-840년: 시절을 따라서 연계성없이 영국과 프랑스의 소규모 해안 강변 기습(3척),  Noirmountier 수도원은 상습적으로 약탈당하였다.


   2) 841-875년: 대규모의 약탈(350척), 지중해 연안 공격, 육지에 기지를 둠(Aquitaine)


  3) 876-911년: 영국과 프랑스의 해협을 대규모로 약탈하며 식민지화 하고, 상주하기 시작(Ireland, Iceland, and areas in Russia around Novgorod and Kiev), 영국은 군대를 재조직하며 바이킹을 격퇴하나 서프랑크의 왕 Charles는 911년 Normandy를 바이킹에게 준다. 바이킹의 지도자인 Rollo는 충성을 맹세하고 세례받고 다른 바이킹의 공격을 막는 역할을 한다.


2. 슬라브족의 이동


3. 십자군전쟁 


   732년 프와티에 전투에서 이슬람의 서유럽진출이 저지되면서 서방기독교권에서는 이슬람에 대한 직접적인 접촉이 별로 없었다. 이슬람의 지배하의 스페인은 고립되었다. 그리고 1100년 이전 서유럽에서는 이슬람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었고 지식도 거의 전무했다. 그러나 10세기 말부터 서유럽에서는 아랍에게 빼앗긴 영토를 수복하려는 시도가 남부 이탈리아와 스페인의 일부 지역, 시칠리아섬에서 일어났고 수복한 지역의 무슬림을 개종시킬 수 있었다. 십자군 전쟁의 기본적 동기는 무슬림을 선교하려는 것보다 이슬람 치하의 교회와 기독교인을 해방시키기 위함이다. 그러나 전쟁의 과정에서 개종자도 나타나면서 12세기 중엽에는 개종이 십자군의 목적이 된다. 이러한 와중에 무슬림에 대한 강제 개종도 자주 나타난다. 십자군 전쟁으로 이슬람을 알게 된 서유럽은 12세기에 이슬람에 대한 객관적인 연구도 시작하고 1143년에 코란경이 라틴어로 번역되고 무함마드의 생애와 이슬람 교리, 기독교 변증을 모은 이슬람 전집이 클루니 수도원자인 페테루스(1092-1156)에 의해 출판되었다. 그리고 12세기부터 아랍학자들을 통해 들어온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중세신학을 정립하는데 큰 기여를 한다. 13세기에 몽골이 등장하면서 서방 기독교 세계는 몽골을 복음화하고 몽골과 연합하여 이슬람 세력을 함께 공격할 것을 기대했지만 실패한다. 십자군 전쟁은 동로마의 황폐를 불러오고 결국 1453년 동로마는 멸망한다.

B. 이슬람권


1. 서아시아


압바시드 왕조(750-1258)와 분열된 지역 왕조들

Buyid or Buwayhid조(945-1055): 페르시안 르네상스


사산조 페르시아가 아랍에게 멸망했으나 페르시아인들은 자신들의 언어와 문화를 계속 유지했으나 종교는 조로아스터교에서 이슬람으로 돌아섰다. 이들은 쉬아파를 따랐다. 세금을 바그다드로 보내지만 동쪽에서 들어오는 터키족과 대면하면서 자신들의 정치적 불안을 인식한다. 그래서 샤머니즘을 믿는 터키족을 자신들의 도시로 데리고와서 우월한 문명과 부에 감명받게하며 이슬람화를 시켜나갔고 정치적 기회를 본다. 945년 카스피해 남서해안의 산악군인의 쉬아파 지도자(Ahmad ibn Buwayh)는 사산왕조의 마지막 황제의 직계임과 쉬아파 무슬림으로 자신의 종교적 권위를 주장하며 바그다드를 침범하여 순니파 아랍의 칼리파를 왕위에서 몰아내었다. 비록 왕권은 자신이 가졌지만(자신을 amir로 지칭) 종교적 지도자로는 순니파 압바스조를 칼리파를 놓아두었다.

셀주크 왕조 1055-1194 : 751년 탈라스 전투 이후 트란스옥시아나에 대한 아랍지배의 확림은 한세기가 끝난 뒤 이란계 사람들에게 유리한 결과를 가져다 주었고, 발흐 근처의 사만에서 기원한 가문을 지배층으로 한 순수한 이란계 사만조는 875년부터 999년까지 Bokhara 를 수도로 Transoxiana의 패자로 군림하다가 992년에 봉건적인 혼란상을 계기로 붕괴되어 동부이란과 트란스옥시아나의 이란인들의 영역은 카쉬가리아의 카라한조들과 아프카니스탄의 가즈나조 술탄들에 의해 분할되었다.


   10세기 즈음에 Karakhanid 터키족이 페르시아 문학의 중심지며 학문과 종교가 잘 정비된 Bokhara 와 Transoxiana 로 들어간다. 이들은 999년에 이곳을 다스리던 사만조에게서 권력과 부를 빼앗았으나 그들의 종교인 이슬람을 받아들인다. 당시의 터키족에게 선교한 이슬람 선교는 비단길을 통해 무역하며 규칙적인 공중기도로 자신들이 신앙을 실제적으로 증거하는 무역업자들과 발크에 있는 옥수스강 건너에 하나의 중심부를 두고 있던 Sufis들이었다.


   수피즘(가장 경건한 무슬림 신비주의자, 아랍어로는 수피야, 혹은 타?우프.  신도들은 수피유, 혹은 무타?위프, 어원은 수행자들이 양털, 즉  suf로 짠 거친 천으로 옷을 만들어 입고 다닌데서 유래)은 7세기말, 8세기 초 당시 우마위야조 사회에서 성행한 사치풍조에 대한 반동으로 출현하여 8세기 중엽에 이르러 신플라톤주의와 기독교 및 인도사상의 영향을 받아 점차 하나의 신비주의적 파벌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11세기에 al-Ansari가 신비주의를 이슬람교의 정통교리에 접목시킨 후 13세기 Ibn al-Arabi가 범신론적 사상체계로 집대성했다.는 이 당시에 조직되면서 선교를 강조하고 있었다. 12세기부터 미-Qadri, al-Rifai, al-Shadhri 등  개인을 중심으로 한 교단이 형성되어 각자 특유의 교단명이나 상설기구와 조직을 갖추고 광범위한 이슬람세계에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수피즘은 통일된 교단이나 교리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수피즘은 무아의 경지에 이르러 알라와의 융합체험을 얻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를 위해 부단한 꾸란경 송독과 예배, 기도, 염송, 속세의 고행과 금욕을 통하여 6가지 단계를 거친다( 참회와 회심-율법준수-은둔과 독서-청빈과 금욕-마음과의 싸움-알라에 대한 절대적 믿음). 자위야(Zawiyah)는 수피들이 은거하여 수행하는 장소이며 학자들의 연찬장이며 자선장이다. 일명 작은 사원이다.  14세기에는 이러한 자위야가 이슬람 세계 도처에 성행하여서 여행자들이 숙소가 되기도 하나 주된 기능은 거대한 포교망을 형성하여 이슬람 선교의 교두보역할을 하는 것이다.


   최초의 이슬람 터키왕조라 부르는 카라카니드조는 보카라에서 카스카르와 사막으로 연결되는 비단길의 요충지를 999-1074년 까지 지배했다. 그런데 이 터키족을 따라온 셀주크족(Turkomans, or  Ghuzz)은 카라카니드 터키족을 돕기위해 왔다가 아프카니스탄의 가즈니 터키족이 인도를 침범하는 것을 돕기위해 남쪽으로 이주한다. 그러나 자신들의 위치에 불만을 품고 반역하여 극 동부 페르시아에 있는 호라산에 자신들의 제국을 시작한다. 그리고 1055년 서쪽으로 밀고 들어가며 바그다드의 부와이드조를 멸망시키고 순니파 칼리파를 해방시킨다. 이들은 순니파로서 중동의 새로운 무슬림 군주가 되었다(정복자 Toghril Beg). 칼리프는 투르크 왕에게 술탄(권위라는 뜻의 세속군주) 칭호를 내려서 자신의 후견인으로 삼는다.  이 투르크인들은 자신의 제국은 아랍인들의 제국 위에 덮어 씌워 그것을 파괴하지 않고 오히려 강화시켜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기도 한다. 그 다음 30년간 셀주크 터키족은 서쪽으로 진군하며 정복해간다. 1070년 예루살렘 점령하고 , 1071 아르메니아와 소아시아점령, 1095년 예루살렘 회복을 위한 교황 우르반 2세기 십자군 선포, 1099년 십자군의 예루살렘 회복, 1187년 셀주크의 예루살렘 재점령. 이렇게 범 이슬람권의 술탄이 된 셀죽은 그들의 전례에 충동되어 동일한 모험을 하려는 중앙아시아의 각종 투르크-몽골인들의 길을 막으려 하지만, 성공하지 못했고, 결국 1194년 토그릴 3세가 호레즘 투르크 인들의 공격에 굴복하여 페르시아에 대한 셀주크의 지배는 끝이 난다. 이후 셀주크와 적대 관계에 있던 키라키타이와 호레즘은 세력을 확장하다 몽골에 침략을 당한다

압바스왕조의 쇠퇴요인: 이슬람 자체의 종족 당파성과 국가적 적대감과 일시적인 권력을 승계하기위한 피를 부르는 전쟁, 그리고 이슬람 율법과 신학에 있어서 영적 권위의 중심체가 되기위한 해결되지 않는 논쟁등.


a. 종교적 요인:

    이슬람 내란은 두 라이벌 정통인 순니파와 쉬아파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이들의 신학적 분란은 9세기와 10세기의 아랍통일을 파괴했다.


b. 정치적 요인:

    정교일치로 종교적인 분란은 정치적인 분란을 가져왔다. 세 개의 적대세력; 우마위야조의 스페인(순니파), 파티미아조의 이집트(쉬아파), 압바스 아시아(순니파와 쉬아파의 동맹이나 다수의 순니파와 소수의 페르시아 쉬아파와의 불안한 혼합)


c. 인종적 요인:

    3가지 중첩되는 시기를 통해 주도적 인종이 변했다. 초기 아랍족의 통치(9세기 중반까지), 중기 페르시안 르네상스(850-1000), 말기 터키족의 번영(1000-1300)

2. 서부중앙아


가즈니 왕조(Ghazni ;962∼1186)


아프가니스탄의 가즈니에서 일어난 투르크 계통의 이슬람 왕조. 이란 계통의 사만 왕조의 노예 출신으로 호라산 태수가 된 알프티긴이 배반의 혐의를 받자 부하를 이끌고 도주하여 카불 남쪽의 가즈니에 창건하였다. 10세기 후반 제 5대인 수북티긴은 왕조의 기초를 확립하고 호라산의 지배자가 되었다. 그의 아들 마하무드는 이 왕조 최대의 영주로서 사만 왕조로부터 독립하여 전 아프가니스탄 지역을 제패하고, 이후 1024년에 이르기까지 수십 회에 걸쳐 인도에 침입하여 약탈을 자행하였다. 또한 마흐무드는 서쪽으로도 영토를 확장하여 동은 펀잡의 라호르, 북은 사마르칸드, 서는 이스파한에 이르는 이 왕조 최대의 영토를 이룩하였다. 한편, 마흐무드는 군사적 제패와 동시에 페르시아 문예를 보호 장려하여 이슬람 세력의 인도 진출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의 궁정에는 문인ㆍ학자가 운집하여 시인 피르다우시는 ‘샤나메’를 저술하고, 비루니는 '인도사'를 기술하였다. 그러나 마흐무드의 사후, 그 전제 정치의 모순이 드러나 셀주크 족에게 서쪽 영토를 침탈당하고, 다시 1186년에는 애프간 계의 구르 왕조에 의해 수도를 공략 받아 그 후 멸망하였다.

3. 인도

 

인도에 최초로 이슬람교도가 들어온 것은 8세기초인데, 조직적인 인도 정복이 시작된 것은 아프가니스탄에 가즈니, 고르 왕조가 등장하고부터였다. 10세기말에는 가즈니 왕조가, 12세기 후반에는 고르 왕조가 인도 침입을 되풀이 하여 분립, 할거하는 힌두 제 왕국을 격파하고 점점 인도 지배의 발판을 굳혔다. 고르 왕조는 아프가니스탄의 고르에 있던 터키계의 이슬람 왕조로 가즈니 왕조의 예속에서 벗어나 서북 인도 영토의 지배자가 되었다. 13세기초에는 고르 왕조가 분열됨에 그 왕조의 부장이었던 아이바크(Aibark)가 독립하여 델리를 수도로 새로운 이슬람 왕조를 건국하였는데 아이바크가 투르크 인으로 노예 출신이기 때문에 노예 왕조라고 한다. 그 후 약 300년간 델리에 힐지 왕조, 투그루크 왕조, 사이드 왕조, 로디 왕조 등 5개의 이슬람 왕조가 흥망하였으며, 14세기초에는 최남단을 제외한 인도의 대부분이 그 지배하에 들어갔다

4. 우마야드 스페인

 

1301년까지 코르도바에서 남부 스페인을 통치


5. 파티미드 이집트

 

10세기 초 자신이 무함마드의 딸 파티마 쪽으로 7대 이맘의 세습자임을 주장하는 한명의 쉬아파가 있었다. 그는 현 튀니지에서 통치권을 강탈하여 그곳에서부터 모로코에서 이집트에 이르는 영토를 장악한다. 이 왕조는 이맘과 칼리파로서 정교를 장악하였다. 969년 이들은 다마스커스를 탈환하고 바그다드를 위협하였고 1000년경에는 북아프리카의 대서양 해안지방에서부터 예루살렘과 레바논 북부 베이루트까지 이르는 지중해를 통치했다.

C. 중앙아시아


1. 위구르(Uighur, 回紇)

 

위구르라는 이름은 A.D. 8세기에 몽골리아에서 흑해까지 돌궐제국이 확장될 때 튀르크계 유목민족 명으로 나타나는데, 그 "연맹, 군집"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북위시대(A.D. 384-534)에는 고차(高車), 수나라(581-618) 때는 위홀(韋系乞), 당나라(618-907)때는 회골(回 ), 송나라(960-1279)와 원나라(1260-1368) 시대에는 외오아(畏吾兒) 등으로 불렸다.


위구르족은 흉노족의 먼 후예이고 직접적인 조상은 ?뢰스 부족 연맹에 속하던 DFLEO 부족이었다. ?뢰스는 중국의 조정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돌궐과는 계속 불편한 관계에 있었다. ?뢰스 부족연맹이 7세기 초에 와해됨으로써 위구르족은 지금의 외몽골 지역에 독자적인 왕국을 건설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중국의 조정(당나라)은 이미 629년에 위구르의 독립을 인정하였다. 위구르는 당시 돌궐제국 내부에 계속되던 분란을 조심스럽게 이용하며, 641년 경에는 이미 동부 스텝지대의 상당한 부분을 지배할 수 있었다. 이즈음 위구르는 소위 구성(九姓: 9개의 씨족으로 이루어진 연맹)이라고 알려진 토쿠즈-오구즈(Toqus-Oghuz) 연맹을 새로이 건설하여 종주가 되었다. 비록 8세기 초에 위구르족과 전체 토쿠즈-오구즈 연맹은 다시 돌궐의 지배하에 들게 되었지만 소멸되거나 와해되지 않고 중국과 우호 관계를 가지면서 실크로드를 장악하기 위해 계속 노력하였다.


위구르족은 545년부터 745년까지 약 2세기 동안 유라시아 대륙의 스텝지대를 통일했던 돌궐제국의 빌게카간이 사망한 후 혼란기에 바스밀, 카를룩의 두 돌궐부족과 연맹을 결성하여 돌궐제국을 분쇄시킨 후, 몽골리아 외트켄(오르혼강 유역)을 중심으로 오르혼(Orkhon) 위구르 국가(744-840)를 건설하였다. 곧이어 위구르 부족은 동맹부족이자 경쟁 세력이었던 돌궐계 카를룩 부족을 서부 스텝 지대로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하는데 성공하였다. 이 국가는 위구르 부족이 9개의 부족 연맹(토쿠즈-오구즈 연맹)을 통합하여 건설한 것이기 때문에 온위구르(On Uhgur, 10 Uygur)라고 불리웠다. 친 중국계 위구르 부족의 집권으로 당시 상징적이나마 존재해 있던 투르크 부족들 간의 통일 형태는 완전히 와해되었다. 그 후 민족의식과 전통이 강한 대부분의 돌궐계 부족 연합체들은 각각 집단을 구성하여 서부 스텝과 러시아의 스텝 지대로 진출하였고, 위구르만이 중앙아시아의 중심 지역에 남아 거의 1세기 동안 중남부 스텝지대를 지배하였다.  그러나 750년 당나라와 아랍 압바스 이슬람 왕조 사이에서 발발한 전쟁(탈라스 국제전)에서 당나라 편에서 싸웠던 위구르는 전쟁에서 아랍군이 승리한 이후 파미르 고원 서쪽에 대한 영향력을 크게 상실하였다.  


골력배라(骨力裵羅) 통치 시대에 위구르국은 그 세력을 크게 팽창해 나갔으며 이리하여 골력배라는 쿠틀룩 빌게 퀼 카간이라는 황제 칭호를 사용하기에 이르렀다. 그의 통치시기에 진정한 오르혼 위구르 "제국"이 되었던 것이다. 골력배라 통치 이후부터 위구르는 중국의 황제들이 사용한 왕호를 사용하면서 중국과 대등한 제국으로 행세하였으며 755년 중국(당나라)의 안사의 난 때에는 반란을 평정하기 위해 중국 수도까지 4000명의 기병을 파병하고 반군을 무찌르고 수도 장안과 낙양을 탈환시켜주었다. 이들이 중국에 머물 때 그곳에 있던 마니교도 소그드인들과 접촉하게 되었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지배층이 마니교도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후 위구르제국은 중국 내정에 간섭할 정도까지 국력이 팽창하였다. 위구르는 당을 업신여겨 공물과 공주를 바치게 하였다. 그 뒤 약 100년 동안 위구르와 당의 내왕은 빈번하여 위구르는 말을 보태고 당은 비단·옷감, 기타의 생필품을 보냈다. 호시(互市)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위구르에게 유리하였던 모양인데, 이렇게 위구르를 교사한 자는 지금의 사마르칸드 방면에 있던 교활한 소그드인(Sogdians)이었다 한다. 어떻든 위구르인이 소그드인과 교섭을 갖고 있는 동안에, 소그드인 사이에 유행되고 있던 마니교를 일반적인 위그구르인들이 받아들이며 762년에 국교로 받아들이게 되는데, 마니교는 위구르 사회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유목민족 최초로 집단적으로 정착민의 종교를 갖게 되면서 위구르인들의 정착화는 가속되었다. 특히 위구르의 카간인 뵈괴의 적극적인 보호하래 마니교도는 크게 융성했다. 그리고 소그드인들의 수가 위구르제국에 급격하게 증가했고 내정과 외교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러나 779년 뵈게가 쿠데타로 제거되고 알프 쿠틀루쿠 빌게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소그드인 2천명을 학살하고 마니교를 탄압한다.


유목민인 위구르가 외래종교를 받아들이는 이유는 종교적인 이유보다 이 종교가 가진 경제적 문화적 기여 때문이었다. 소그드인들은 당시 내륙교육을 장악하던 국제 상인들이었고 유목민에데 문자를 가르쳐주고 정주문화의 이점을 전달해주었다. 이러한 영향으로 위구르인들은 선대의 고지(故地)인 산악지대로부터 정착을 위해 스텝의 평야지대로 이동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곳에서 중앙아시아 유목민족으로서는 최초로 성곽도시를 건설하였다. 위구르 문명의 발전 과정에서 마니교는 위구르족의 정착화와 도시화를 이루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문자도 제공하였다. 그리하여 위구르인들은 스텝 민족 사상 최초로 문학을 발전시키게 되었다.  


그러나 위구르인들은 정착화 과정을 거치면서 스텝 민족의 특성을 상실하게 되었고 결국 군사력도 약해지게 되었다. 이것은 마니교 이외에도 그들이 부분적으로 받아들인 불교와 같은 정착민 종교들이 육식을 금하게 하고 사랑과 평화를 강조하는 등 위구르인들의 세계관에 많은 변화를 가져다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위계승을 둘러싼 내분으로 약화된 위구르는 840년, 알타이 산맥 북부 스텝에 할거하던 전통적 유목민족이었던 10만명의 키르기즈족에 의해 멸망당했다. 패망한 위구르족은 유목민족으로 되돌아가지 않았고 키르기즈에 흡수되지도 않았다. 위구르족의 오르혼 제국은 여러 개의 다양한 씨족 연맹으로 분열되어 각각 상이한 방향으로 분산되었다. 일부는 중국으로 도피하여 감주지방의 최서부 지역에 정착하여 甘州國과 沙州國을 세우고 1028년 서하에 의해 병합될 때까지 독립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중심세력은 천산산맥 북쪽기슭의 비시발리크 및 남쪽 기슭의 高昌(현재 투르판시 부근)을 거점으로 삼아 Kocho (瓜州國, Gaochang, ca. 860-1284)왕국을 건설하여 동투르키스탄을 지배하였으나 거란족의 카라키타이(Kara Kitay, 흑거란, 西遼)에 예속되었고, 칭기즈칸이 일어나자 1209년 그 밑에 복속되었다가 몽골제국이 분할되었을 때 차카타이 칸국에 구획되어 독립을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다.


지금의 감숙성과 신강성(동투르키스탄)지역으로 분산되어 내려온 위구르인들 중에서 지금의 신강성 동부로 내려온 사람들은 그 곳에 정착하여 농업인구로 변화되면서 오아시스 도시를 이루어 '칸'이 다스리는 소왕국들을 건설하였다. 그러나 몽골족이 돌궐제국 붕괴 이후 800년부터 1200년까지 소왕국들이 난립하던 과도기를 청산하고 새로운 제국인 몽골제국을 세우면서 위구르인의 소왕국들은 몽골제국으로 흡수되었다. 오르혼 위구르 제국은 돌궐제국 붕괴 이후, 몽골제국이 등장하기까지의 과도기(800-1200)에 등장한 여러 제국들 중 하나로서, 정착문화와 유목문화의 혼합적 성격을 띤, 스텝지역의 이례적인 문명이었다.


한편 감주국의 세력이 점점 서쪽으로 확장되면서 먼저 위구르족으로서 최초로 이슬람화된 카라한 왕조와 접하게 되었는데, 이로써 10세기경부터 위구르인들은 이슬람교를 접하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남강 타림분지의 남북 가장자리는 모두 불교가 성행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이슬람교가 이 지역에서 전파되고 발전하는데 시종 불교세력과의 마찰과 투쟁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슬람교는 聖戰(자하드)정신으로 불교와의 전투에서 우세를 점하기 시작했고, 11세기 초(1006년)에는 불교를 국교로 하던 우전국(현재 호탄)의 이씨왕조를 멸망시킴으로써 남강에서 대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15세기까지 이슬람교는 꾸준히 동진하여 신강지역의 위구르족 전체를 무슬림으로 만들었다.


이 위구르의 서역 점령은 동양 역사상 두 개의 의의를 갖고 있다. 하나는 이란계 민족의 거주지였던 서역이 투르크계 민족의 거주지로 되어, 이 지방을 오늘날 터키라 일컫는 원인을 만들었고, 다른 하나는 유목 생활을 하던 투르크인이 농경 생활을 하게 된 일이다. 유목에서 정착 생활로 옮아간 위구르는 닥치는 대로 주위의 고도의 문명을 흡수하였다. 중국식의 달력을 만들고 중국식의 돈을 만들어 중국 문명을 받아들이는가 하면, 마니교 이외에 불교를 숭상하고, 페르시아·티벳의 불전을 위구르 문자로 번역하여 인도·티벳·페르시아의 문화를 받아들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10세기경에는 이슬람교가 위구르인 사이에 널리 퍼져 오늘날 중국인이 이슬람교를 회교라 일컫는 원인을 만들었다.


2. 타타르인:

 

위구르 제국 붕괴후


D. 중국 

 

   1. 당말기의 황소의 난(875-884)

   2. 5대 10국시대(907-979) 주전충에 의해 당이 멸망하고 중국은 5대10국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후량(後梁)ㆍ후당(後唐)ㆍ후진(後晉)ㆍ후한(後漢)ㆍ후주(後周) 등 5왕조와 전촉(前蜀)ㆍ후촉(後蜀)ㆍ오(吳)ㆍ남당(南唐)ㆍ오월(吳越)ㆍ형남(荊南)ㆍ민ㆍ초(楚)ㆍ기(岐)ㆍ연(燕)ㆍ남한(南漢)ㆍ북한(北漢) 등 10여 개국이 난립하고 있었다. 이를 5대10국이라 한다. 5대 10국 이후에는 귀족 불교가 몰락하였다고 볼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불교가 민중과 가장 긴밀하게 밀착되었던 시기라고도 볼 수 있다

   3. 거란(Kitai)의 요나라(907-1125)


a.  4세기 이래, 요하의 상류 시라무렌 강 유역을 본거지로 하고 있었던 반목 반농의 동호족(東胡族)으로 서 처음에는 위구르에 속하였으나 위구르가 쇠약해진 틈을 타고 일어나, 당말에 질라부(迭喇部)로부터 옐뤼아 바오지가 등장하여 907년에 거란족을 통일하고 제위에 올랐다. 그는 내, 외몽고를 합치고 발해를 멸하였으며(926), 한인을 초치하여 중국 문화를 받아들였다.


b. 태종은 국호를 요(遼)로 고치고 (937) 남변 농업 지대의 침략을 개시하여 5대의 하나인 후진(後晉)의 건국을 도와 그 보상으로 지금의 북경, 대동을 중심으로 하는 연운 16주를 얻어 중국 영토의 일부를 지배하였다(燕雲 十六州  936년 석 경당이 거란의 원조를 얻어서, 후당을 멸망시키고 후진(後晋)을 세운 대가로 거란에게 할양 하여, 이후 분쟁의 불씨가 된 땅. 지금의 베이징(北京, 燕), 다퉁(大同, 雲)을 중심으로 해서 장성의 남쪽 에 해당하는 탁·계·단·순·영·막·울·삭·웅·신·규·유·무·환의 16주를 말한다. 후에 후주의 세종이 영·막의 2주를 회복하였으나, 송대에 역주를 잃었기 때문에 15주가 되었다. 한편 장성 이남이기는 하지만, 일찍부터 거란 령에 속했던 평·난·영의 3주는 이 안에 포함되지 않는다) c. 전성기인 성종때 대군을 이끌고 남침하여 전연의 맹을 맺어 송으로 하여금 해마다 막대한 양의 은과 비단을 바치게 하였다. 이 결과 송의 상품이 대량으로 유입되어 요의 귀족의 생활을 풍족하게 하였으나 그 반면에 사치에 물들어 북방 민족 고유의 강건하고 검소한 기풍을 잃었다. 성종은 그 뒤 송과 통한 여진과 고려를 쳐서 그 영토가 만주에서 신쟝에 이르렀다. 이리하여 거란(kitai), 곧 cathay는 멀리 서방에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성종때를 고비로 그 이후 차츰 쇠퇴하여 송, 금 양국의 협공을 받아 망했다(1125). d. 그 뒤 일족인 옐뤼 따시(야율대석(耶律大石))가 중앙 아시아에 들어가 셀주크의 복속국인 위구르계의 카라한조(940-1132)를 1132/1141년 카타완 평원의 전투에서 멸하고(실제적으로 이슬람맹주였던 셀주크왕조의 산자르와 싸움)  Karakitai, 곧 서요(1132∼1211)를 세워 약 80년 동안 나라를 유지하였다.


e. 거란은 민족 의식이 강하여 중국의 문화에 대항할 만한 새로운 문화의 창조에 노력하였다. 그 현저한 예가 문자의 발명이다. 요의 거란 문자는 태조때 만들어진 것으로, 돌궐 문자를 한자 모양으로 조합하여 만든 것이라 한다. 대자·소자의 두 종류가 있어서 공문서 등에 쓰였으며 후에 서하 문자나 여진 문자의 제작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와 같이 요는 중국의 문화에 대항하는 태도를 취하였지만 그 우수한 문화에는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중에서도 중국의 유교문화는 중국인 통치의 편법으로서 국가통치의 고등기술로서 받아들인 데 불과하였으나, 불교는 샤아머니즘의 원시적 종교밖에 모르던 거란인에게 큰 흥미를 돋구어 주었던 모양으로 크게 유행하였다. 특히, 성종·흥종·도종은 불교를 애호하여 사찰을 건립하고 법회를 열고 대장경을 간행하여, 이 때문에 재정에 큰 영향을 끼쳐 요 쇠망의 유력한 원인의 하나가 되었다. 요의 대장경은 송의 대장경과 더불어 고려에 전해져 고려 대장경의 기초가 되었다

   4. 여진의 금(女眞 Jurchens 1115-1234):


  a. 10세기 전반에 발해국이 망한 뒤, 그 땅에 퉁구스계의 여진족이 나타났다. 요는 처음 송화강의 서남방에 살고 있던 여진족을 숙여진(肅女眞)이라 하여 요의 적에 넣어 직접 통치하고, 송화강 동쪽에 살고 있던 여진을 생여진(生女眞)이라 하여 송화강 근처에 관청을 두어 지배하였다. 이들 생여진은 동북 만주의 각지에 할거하여 아무런 통일도 없이 반농, 반수렵의 생활에 종사하였다.


  b. 11세기 말에 하르빈 부근에 있던 완옌부의 추장 아구타가 생여진 제 부족을 통일하고 요에서 독립하여 나라를 세워 금(1115∼1234)이라 하였다. 이가 곧 금의 태조이다. 태조는 송과 연합하여 요를 공격, 이어 태종때 요는 멸망하였다. 금과 송이 직접 국경을 접하게 되면서 연운 16주룰 둘러싸고 분쟁이 일어나 금군이 대거 남하하여 1127년 수도 변경( 京:지금의 開封)을 함락시키고 송의 휘종, 흠종의 부자 2제를 비롯한 황족과 신하 3천여 명을 포로로 하고 화북의 여러 지방을 손에 넣었다. 여진인이 중국의 내지에 깊숙이 들어가 한인과 동거함에 따라 차츰 중국 문화에 동화되기 시작하였다. 금은 국초이래 여진인의 한화를 경계하여, 한자와 거란 문자를 참고하여 여진 문자를 만들었으나 복잡하여 도리어 한자가 많이 사용되고, 한문학이 유행하여 유학·시문에 능한 자가 많이 나타나고, 공식의 의례는 물론 일상의 생활까지도 중국식을 따랐다. 게다가 화북에 배치된 맹안·모극부의 여진인들은 농사일은 오로지 고용된 중국 농민에게 맡기고 자기네는 유락에만 열중하였다. 그리하여 차츰 중국인의 경제적 압박을 받아 토지를 잃게 되고 그 결과 군의 규율이 허물어지고 무력이 크게 위축되었다.


  c. 세종(1161∼1189)은 토지를 정리하여 맹안·모극의 우대법을 강구하는 동시에, 여진인의 관리 지망자에게 여진어와 여진 문자를 배우게 하고, 학교를 세워 자제를 양성하는 등 중국 문화의 침투를 방지하는 데 힘썼으나, 여진인 한화의 대세는 막을 길이 없었다. 이리하여 한문학이 더욱 유행하였으며 송의 교자를 모방한 교초(지폐)가 발행되고 불교가 유행하여 각처에 절이 생기고 대장경이 간행되었다. 도교의 전진교가 유행하여 천사도의 계통을 받은 강남의 정일교와 더불어 도교의 2대 종교를 형성하였다.


  d. 금은 남송과 대립 항쟁하다가 북방에서 일어난 몽고에게 망하였다.(1234) 이후 여진인은 몽고족의 지배하에 들어갔고, 14세기 후반에 명이 흥하여 만주를 경략하자, 명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명말에 이르러 건주 여직에서 누르하치가 나와 여진인을 통합하여 후금(後金)을 세우고 후금국한(後金國汗:황제)이 되어 연호를 건원(建元)이라 하였다.(1616). 그 후 태종은 1636년 국호를 청(淸)이라 고치고, 여진인이라 하지 않고 만주인이라 일컬었다
  
   4. 서하(黨項, 西夏, xi xia: 1038-1227)


a. 송의 서북방 감숙·섬서방면에 있던 티벳 계의탕구트(Tangut, 黨項)는 당말 황소의 난 때 공을 세워 당으로부터 절도사로 임명되고 이어서 송에 복속하였으나 요가 일어나자 요에 복속하여 하왕의 책봉을 받았다. 송·요가 대립 항쟁하는 틈을 타 차츰 세력을 뻗쳐 11세기 중엽 이원호(1032∼1048)가 독립하여 황제를 칭하고 대하(大夏)라는 나라를 세워 요령성 흥경에 도읍하였는데 송은 이를 서하라고 불렀다.


b. 서하의 주요 산업은 목축이었으나, 하서 오르도스 지역에서는 관개 농경도 하고 있었다. 이들은 비단길의 요지를 차지하고 있어서, 중개 무역의 이익이 많았다. 이 원호는 그는 숙적 위구르와 토번을 친 뒤 송의 변경을 침공하여 1044년에 화약을 맺어, 서하는 송에게 신하의 예를 행하며, 송은 매년 서하에게 비단 153,000필, 은 72,000량, 차 30,000근을 제공하며, 국경에 각장( 場; 관영 무역장) 2개소를 설치하고 호시 (互市)를 행할 것 등을 정하였다. 원호의 말년이래 서하·요 관계는 악화, 다음의 이 양조 때에 요에 굴복했고, 요와 금이 항쟁할 때 서하는 처음에 요와 동맹을 맺었으나, 1124년부터는 금의 번신이 되어 송을 공격하여 오로도스 동부의 땅을 얻고, 1137년에는 적석주(積石州)등 3주를 합쳐서 서하 최대의 판도를 이루었다.


c. 송의 남천으로 송·서하의 항쟁은 끝나고 이 인효의 시대에는 내정에 힘을 쓸 수가 있어 경제·문화상의 발전이 눈부시어, 유교·불교 등을 기조로 한 서하 문화가 번성하여 명승 석학도 적지 않게 출현하였다. 이 순우의 말년부터 몽골의 침입을 받았으나, 금과 형제의 관계를 맺고 이에 대항하였으나 서하 최후의 왕 현(睍)이 살해됨으로써 서하는 이원호 이래 10왕 190여년으로 멸망하였다. 서하의 문화는 그 지리적 위치에 따라 중국 문화와 티벳·위구르를 경유하여 들어온 서방 문화의 혼합이었는데, 특히 중국 문화의 수입에 힘써 관직·제도를 중국식으로 하고 한자를 기초로 서하 문자를 만들어 썼다. 이 나라에는 유교·불교·도교 등이 성행하였다.

출처 : MyLove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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