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와 한자, 그리고 중국문화
김병기 (전북대 중문과 교수)
1. 중국, 한자문화권 문화의 세계무대 등장과 주도자 역할
2차 세계대전의 종전 이후 지금까지 약 50년은 인류 역사상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많은 변화를 겪은 시기이다. 급속한 산업화 덕택에 인류는 그 어느 때보다도 물질적인 풍요를 누렸고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시간과 공간의 개념 자체가 바뀔 정도로 큰 변화를 겪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1960년대에 마샬 맥루한(Marshall Mcluhan)은 ‘지구촌’이라는 말이 쓰기 시작하였고 최근 몇 년 동안에는 인터넷과 미디어 네트워크의 대량 보급으로 지구는 그야말로 ‘전지구화(globalization)’의 속도를 더욱 가속화하고 있다. 이처럼 전지구화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세계 각 지역 간의 인적 물적 자원의 교류는 더욱 더 활발해졌고 각 지역 간의 문화접촉도 한층 더 활발해졌다.
이러한 와중에서 새뮤얼 헌팅턴(Huntington Samuel)은 장래의 세계구도는 다양한 문명권 사이의 대립과 갈등과 분쟁의 과정을 거쳐 새로운 구도로 재편될 것이라는 내용의 소위 ‘문명충돌론’을 내세웠고, 헌팅턴의 이러한 견해에 맞서 하랄트 뮐러(Muller Harald)는 ‘문명의 공존론’을 제기하였다.
그런가 하면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는 21세기 세계문화는 여러 가지 문화가 서로 섞이는 ‘잡종적 혼합’이 될 것이라고 전망하였다. 이처럼 다양하게 제시된 의견들 가운데에서 어느 의견이 보다 더 정확하게 미래를 전망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충돌이든 공존이든 아니면 혼재이든 간에 21세기에는 전지구화 현상이 더욱 가속화될 것이라는 점이다.
이에, 세계 각 국은 자국(自國)의 문화가 어떠한 형태로든 살아 남아서 전지구화의 시대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기를 기대하며 자국문화를 세계에 전파하는 일에 열을 올리고 있다. 특히 미국은 미국 중심의 세계 통합, 이른바 ‘세계화’를 꿈꾸며 국제 사회에서 그 영향력을 팽창시키기 위해서 더 많은 노력을 경주하고 다른 나라에 대해 물리적 심리적 압박까지 가하고 있다.
이처럼 새로이 대두된 미국 중심의 세계화 전략에 대응하면서 서양에 대한 동양의 의미를 지킬 수 있는 문화지역이 바로 동아시아 한자문화권 지역이다. 그리고 그 한자문화권 지역의 새로운 힘으로 부상되고 있는 나라가 바로 중국이다. 중국의 개방과 개혁을 주도했던 등소평은 일찍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오늘날의 세계는 개방된 세계로, 세계 어느 국가도 발전하기 위해서는 고립되어서는 안되며 개방치 않을 수 없고 국제교류를 강화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떠한 민족 어떠한 국가도 반드시 다른 민족 및 다른 국가의 장점을 배워야 하고 다른 사람들의 선진기술을 학습해야 한다. 더욱이 우리는 현재 과학기술이 낙후되어 있기 때문에 외국의 선진 과학기술을 배우도록 노력해야 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장점을 배워야 한다.”
‘철의 장막’으로 불리던 중국이 이러한 개방정책을 쓴지 30 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중국은 세계적인 강대국으로 부상하고 있다. 특히 1992년부터 중국경제가 두 자리 숫자의 고성장을 기록하자 이러한 성장속도를 지속적으로 유지한다면, 2010년에 이르러서는 美國을 제압하고 세계 최대의 경제대국으로 부상하게 될 것이라는 전망이 일찌감치 나온 바 있다.
게다가 21세기는 문화 예술의 시대라는 전망이 지배적인데 이러한 문화 예술적 관점에서 본다면 오 천년 전통의 문화․예술 역량과 풍부한 인적 자원을 가진 중국이 21세기에 세계무대에서 주역을 담당할 것이라는 전망은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다.
헌팅턴의≪문명의 충돌(The Clash of Civilizations and the Remarking of World Order)≫은 바로 중국의 이 같은 급부상을 예견하고서 ‘오리엔탈리즘으로 무장한 새로운 냉전 질서’를 구상하고 그에 대한 미국의 대응을 모색하고자 하는 의도가 담긴 책이다. 헌팅턴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중국이 패권국으로 떠오를 경우, 그것은 1500년 이후 세계 역사에 등장한 모든 패권국들을 초라하게 만들 것이다......중국의 경제 발전이 십 년만 더 지속되고(그럴 가능성이 있다), 후계자 문제를 둘러싼 갈등을 겪으면서도 정치적 통합성이 유지된다면(그럴 가능성이 높다), 전 세계는 이 인류 역사상 가장 큰 힘을 가진 주역의 점증하는 자기 주장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대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은 예견 때문에 세계 각 국은 중국의 변화와 성장을 한편으로는 천 오백 년 전 징기스칸에 이어 또 한 차례 나타날 ‘황화(黃禍:황인종에 의한 재앙)’라는 표현을 하면서까지 경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중국을 배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러한 관심은 비단 중국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소위 ‘아시아적 가치’란 이름아래 동아시아 지역의 한자문화권 국가에 대한 전반적인 관심으로 나타나고 있다. ‘아시아적 가치’라는 말이 처음 등장한 것은 70년대 초로서 미국과 유럽의 학자들이 당시 일본과, 한국․홍콩․대만․싱가포르 등 ‘4마리 용(龍)’의 고도 성장의 배경을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내 개념이다.
당시 미국과 유럽의 학자들은 아시아는 농경사회에서 공업사회로 급속히 발전하면서 경쟁과 효율성의 시장원리가 뿌리내리지 못하고 인정에 기반한 공동체 사회를 형성하게 되었다고 분석하였다.
또한 아시아인들은 가족을 소중히 여기고 유교, 불교, 이슬람교 등에서 강조하는 근면과 자기 반성을 중시한다고 지적했다. 이들 동아시아 국가들의 고도 성장은 이 같은 역사․문화적 배경과 정부 주도의 개발 모델이 어우러진 결과라며 이를 통틀어 ‘아시아적 가치’라고 결론 내렸다.
이후, 이 ‘아시아적 가치’에 대해서는 싱가포르의 이광요(李光耀) 총리, 말레시아의 마타하르 총리, 한국의 김대중 등과 미국의 경제학자 제임스 뷰캐년, 리처드 홀브룩 전 미국 국무부 동아시아 태평양 담당 차관보 등의 논쟁을 거치면서 때로는 긍정적으로 때로는 부정적으로 평가되는 부침을 거듭했다.
그러나, 1997년 겨울에 한국이 IMF에 구제 금융을 신청하고 아시아 각 국이 금융 위기에 봉착하면서 아시아적 가치에 대해 근본적인 회의를 하는 사람도 생기게 되었다.
그렇지만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각 국에서는 동아시아 한자문화권 특유의 저력으로서 작용하고 있는 ‘그 무엇’을 여전히 아시아적 가치로 보고 그것에 대한 철학적, 사회학적, 경제학적 탐색을 지속하고 있는데 이러한 탐색의 결과는 앞으로 세계 안에서 한자문화권 국가의 위상을 높이고 21세기 인류 사회를 복되게 하는 주요한 정신으로 작용하게 될 것이다.
지금 세계 각국은 이 ‘아시아적 가치’를 한편으로는 부정하려고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경외적인 태도로 주시하고 있다. 이러한 아시아적 가치의 탐색에 대해 최영진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동아시아 삼국은 아직도 ‘대동아공영권’의 악몽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나 삼국은 하나의 ‘문화권’을 넘어서서 하나의 ‘생활권’으로 진입해가고 있는 것이 현실적 상황이다. 동아시아가 지향해야 할 진정한 아시아적 가치에 대한 모색은 절박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서구적 가치에 대한 對應項으로서, 그리고 근대 이후 새로운 세기를 이끌어 갈 제 3의 대안으로서 아시아적 가치의 모색과 정립이야말로 이 땅에서의 ‘철학함’일 것이다.
한자문화권 국가가 주역이 되어 세계 각국의 관심 아래 이 아시아적 가치를 탐색하는 데에 있어서 한자는 원초적이고 근본적인 역할을 하는 문자이다. 그리고, 그렇게 탐색되고 정립된 아시아적 가치가 21세기를 이끌어 가는 세계적 가치로 주목을 받게 되었을 때 국제무대에서 한자는 영어 못지 않은 위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를 비롯한 세계 여러 나라에 중국어 열풍이 불고 있는 것도 다 장차 세계의 흐름을 주도할 아시아적 가치와 국제사회에서의 중국의 위치를 의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어는 다른 게 아니다. 바로 한자요 한문이다. 혹자는 중국어와 한자를 별개의 것으로 생각하여 “중국어를 배우는 것은 권장할 만한 일이지만 한자를 사용하는 것은 반대한다”는 말을 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중국어가 곧 한자요 한문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까닭에 범하게 된 잘못이다.
한자를 많이 알고 한문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거기에다 중국어의 몇 가지 특수한 용법만 익히면 중국어 독해 문제는 아주 쉽게 해결 할 수 있다. 그리고 한자에 대한 중국어식 발음만 익히면 중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도 있다.
따라서 깊이 있는 중국어를 공부하려는 미국이나 유럽의 학생들은 먼저 한자에 대한 공부를 철저하게 한다. 중급이상의 중국어는 결국 한자 실력에 의해 좌우되기 때문이다. 아시아의 국가들은 물론 세계 여러 나라가 이미 중국과 한자에 대해서 그 국제적 지위를 인정하고 한자를 배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 아시아의 한자문화권 국가 중에서 유독 우리만이 한자를 폐기하고서 여전히 한글 전용의 어문정책을 강행하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중국과 대만이야 말할 필요도 없고 일본, 홍콩,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태국, 월남 등이 한자 사용을 강화하고 있으며, 한동안 소련의 영향아래 한글을 전용하던 북한도 1968년부터 학교에서 한자교육을 심화하고 있는데 우리만 아직도 한글 전용이라는 기본 정책을 바꾸지 않고 있으니 이는 한자문화권 국가에서의 고립을 자초하는 것으로서 일종의 쇄국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하루 빨리 중국의 변화와 아시아의 위상, 그리고 세계 문화의 흐름을 파악하고서 우리의 어문정책을 능동적으로 수정하여 한자의 사용과 교육을 강화해야 할 것이다. 한자문화권의 각 나라가 다 한자를 사용하고 있는데 우리나라만 한자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우리나라는 자칫 동아시아 경제권과 문화권에서마저도 고립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앞으로 중국을 중심으로 세계 무대에 급부상할 동아시아 경제․문화권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주변국가들과 교류․교역․교신하기 위해서는 한자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절실히 필요하다. 한자를 더 이상 방치해 두어서는 안 된다. 하루 빨리 한글 전용이라는 어문정책을 수정하여 한자 교육을 강화하고 한자의 사용을 확대해야 한다.
2. 한자문화권 문화에 대한 서양의 관심
르네상스와 계몽운동 이후에 급속도로 발전해 온 서구의 과학문명은 오늘날 인류에게 역사상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엄청난 혜택을 가져다주었다. 즉 기계․기물의 사용에 의한 자동화와 능률화, 대량생산 현상은 우선 인력 사용을 감소시켰으며 인간을 편하게 하는 여러 가지 편의의 조건을 제공하였다.
뿐만 아니라, 의학의 발달은 질병의 감소와 수명의 연장을 이루어 냈다. 그리고 작게는 원자 세계, 크게는 우주의 법칙에 대한 지적 요구의 충족과 더불어 그 법칙들의 이용으로 막대한 에너지를 얻게 되었다. 또한 과거에는 특정한 기관이나 국가에서 독점하던 정보도, 전자․전산․정보 통신의 발달에 의해 개인이 세계적인 범위에까지 손쉽게 접근․이용하게 된 것은 과거에는 상상도 못한 현대 과학문명의 혜택인 것이다.
이처럼 서구의 과학문명이 전 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자, 일찍이 근대 과학을 낳지 못한 비서구권의 여러 나라들은 서양으로부터 과학과 기술을 수용하기에 급급하였으며, 그 성패가 결국은 근대화의 성공과 실패를 가름해 주었다.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들도 예외는 아니어서 근대화라는 이름아래 서구의 과학 문명이 들어온 이후, 자기 문화를 부정하면서까지 서구문명을 배우는 데 열중하였고 또한 맹목적인 경제성장만을 추구하여 양적인 팽창만을 이룩한 점이 없지 않다.
그러나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과학기술의 무한한 힘이 인류에게 유토피아를 가져다 줄 것이라는 신화는 크게 흔들리게 되었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를 파멸시킬지도 모르는 위협으로 다가온 핵폭탄의 개발과 전 세계적인 위기로 등장한 환경문제는 기존의 과학적 세계관 자체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하다는 인식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시계추는 스펙트럼의 한쪽 끝에서 절정을 맞이하고, 반대편으로 흔들리기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구미(歐美)의 과학문명은 기술화․정보화로 특정 지어지는 후기산업사회로 들어서면서 예기치 못한 곳에서 보다 더 많은 폐해들을 드러내게 되었다. 이러한 폐해와 그 폐해로 인한 서양 문명의 위기에 대해 김충렬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본래 서양사상과 문명 속에는 일찍부터 위기적인 요소가 내포되어 있었기에, 니이체는 20세기에 접어들기도 전에 서양문명의 위기를 예언한 바 있고, 20세기에 들어와서도 스펭글러나 토인비, 소로킨 등의 문명비판가들이 나와 서구문명의 몰락을 경고해 왔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이러한 예언과 경고는 모두 적중한 것이다. 20세기 중반을 넘어서면서 사람들은 문명의 위기를 직접 체험하게 되었으니, 자원의 고갈이나 생존환경의 파괴, 인성의 타락 등등이 바로 그런 예이다. 이러한 서양문명의 위기요소는 근본적으로는 서양철학의 무한사상(無限思想)과 직선사관(直線史觀)에서 기인한 것으로, 이는 공교롭게도 동양철학과 정반대 되는 것이어서, 동양철학이 서구문명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길임을 증명해 주었다.
이와 같이 상당수의 학자들에 의해서 대두되고 있는 서양문명의 위기론으로 인하여 서양의 학자들 가운데에는 21세기 인류의 생존을 위한 지혜를 동양 특히 한자문화권 국가의 전통 문화에서 찾으려는 노력을 기울이는 학자들이 늘어나고 있다.
서양학자들에 의한 한자문화권의 고전 연구, 한의학에 대한 연구와 실험 등이 바로 그러한 예인데 한자문화권 전통문화에 대한 서양의 이러한 관심은 한글 전용정책아래 한자를 폐기해 온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한자문화권 문화에 대한 서양 사람들의 관심은 이처럼 증대되고 있는데 한자문화권의 핵심 국가인 우리는 오히려 한자를 도외시하여 한자로 된 우리 스스로의 문화 유산을 폐기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아도 현재의 우리 사회에서 가능한 한 빨리 한자의 교육과 사용을 강화해야 할 필요가 절실하게 요구되고 있다.
'중국의 문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사진] 중국의 윈난성 다리고성(云南省 大理古城) (0) | 2009.04.30 |
---|---|
[스크랩] [사진] 중국 하이난도(海南岛)의 엽기적인 민속문화제 모습 (0) | 2009.04.30 |
[스크랩] 21세기와 한자, 그리고 중국문화 (김병기) (0) | 2008.12.05 |
[스크랩] 중국의 고대 무덤문화 (0) | 2008.11.26 |
[스크랩] 중국의 고대 곡마(馬戱) (0) | 2008.11.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