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의 뿌리는 한겨레
좌측상단이 인더스문명 발생지 파키스탄, 이 문명의 주인공인 드라비다족(타밀족)이 주로 사는 곳은 위 지도 맨 아래 남동부 타밀라두주이다.
1. 인더스문명의 주인공, 드라비다족은 한겨레.
하랍파와 모헨조다로로 대표되는 인더스문명의 창건세력 드라비다(타밀)족은 검은머리에 갈색피부를 하고 있고 언어도 한국사투리와 같다.(1천3천여개가 현재도 같다) 글자모양도 보면 한단고기의 가림토 글자와 흡사하다.
이 드라비다족은 비옥한 초승달지역인 메소포타미아지역에서 이동해온 수메르문명의 한 지파이거나, 한반도 극동아시아권에서 배달나간 한겨레의 한 지파가 그 후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이동해온 종족으로 추정되고 오랜 세월 기후와 풍토에 적응하면서 외모가 많이 변형된 것으로 판단한다.
위 지도중 노란색 왼쪽 옆이 이라크이고 이 지역이 수메르문명 발생지역인 메소포타미아이다. 오른쪽으로 노란색이 이란이고 그 오른쪽에 갈색이 인도와 접한 파키스탄이고 여기에서 하랍파와 모헨조다로 유적이 나온 인더스문명 발생지역이다.
이들이 여신을 숭배하고 어머니문화권에 속한다는 것은 부도지에 나오는 마고 삼신할머니 문화권에 속해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서양인에 의해 현생인류 최초의 문명으로 알려진 문명은 수메르문명이다. 이 문명은 현재의 이란 이라크지역인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위치하였다. 그리고 수메르인들도 동북아시에서 내려온 한겨레임이 밝혀진 바 있다. 이들도 여신을 섬겼고, 상투를 했으며, 기타 여러 풍습이 현재의 한반도 한겨레와 같다. 드라비다족이 일으킨 인더스문명이 수메르문명과 거의 흡사하다는 것은 이들이 같은 뿌리를 갖고 있다는 것을 짐작 할 수 있다.
인더스문명의 유적지 모헨조다로(상하수도시설과 우물 공중목욕탕 등 시설이 고도로 발달된 계획도시였다.)
드리비다족의 현재 주요 분포지역은 남인도지역(타밀라두주)이다. 이는 서기전 1천5백년경에 아랄해와 가스피해 사이에서 내려온 코카서스계통의 아리안족에게 밀려났기 때문이다.
아리안족: 금발에 흰피부 높은 코를 하고 있는 유목민족으로서 쇠로된 쟁기를 사용.
2. 인도의 뿌리문화는 무당문화.
드라비다족은 현재도 주술사가 있고 주술행위가 유행한다. 이는 무당문화의 한 지류이다.
남인도 힌두사원(스리랑감)앞의 주술사들
음악도 여러 장단(굿거리, 도드리 장단 등)이 현재 한반도의 한겨레 전통장단과 일치하고 악기도 유사한 것이 많다. 음악과 악기와 관련하여 이게 인도에서 한반도로 온 것이 아니냐는 견해도 있고 방송(특히 한국방송 1티뷔의 역사기행-인도 고구려관련 음악과 악기보도)도 이에 편승함으로써 마치 인도가 원류라는 식의 논리를 펴는데 이는 사대주의 리조사관(중국사관 내지 동북공정사관, 서양사대주의)임을 알아야 한다.
무당문화는 한반도권 한겨레가 원류라는 사실은 참역사동아리 깨어있는 푸른역사 다음까페 삼태극에서 이미 다양한 각도에서 고증해 놓고 있다. 특히 굿거리 장단이 인도의 드라비다족과 반도한겨레의 것이 완벽하게 일치한다는 것은 한반도권의 한겨레가 아득한 옛날(약 1만년전) 세계로 배달나가면서 인도까지 진출해 보급하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움직일 수 없는 사례요 증거다.
3. 인도의 힌두교도 그 뿌리는 무당문화.
현재 다양한 종족이 어우러지고 말도 수백종인 인도인의 뿌리 문화인 힌두문화도 그 바탕은 무당적 문화다. 화려한 색(주로 오방색-무당문화의 상징)으로 치장된 사원(남인도 미낙시사원)과 각종신이 존재하는데 이는 한국의 무당문화와 맥이 닿아 있다. 삼태극에서 나오는 삼사상의 하나인 삼을 나타내는 삼지창도 힌두교의 사두들의 지팡이로 사용하고 있는것이 보이며 기타 삼지창이 사용되고 있다.
시바신과 그의 가족(삼지창을 들고 있다)
남인도 마두라이 스리랑감 스리미낙시 힌두사원 전경(드라비다족=타밀족의 작품)
남인도 마두라이 스리랑감 스리미낙시 힌두사원의 꼬푸람(오색으로 찬란하다)
다만, 신의 경우 인도는 아직도 코끼리, 소, 쥐,뱀 등 동물관련신이 많이 있지만, 한겨레는 산신, 지신, 조왕신등 장소적 무형상의 신이 많다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북인도 비카네르 까르니마따 쥐 사원(쥐에게 음식을 주자 쥐들이 몰려옴)
고추로 금줄을 띄우고 악귀나 부정을 없애기 위해 집 출입구에 고추 등 상징물을 걸어놓는 것이나, 수수나, 옥수수 등 곡물을 벽이나 시렁에 매달아 놓는 풍습도 한국과 같다. 이러한 풍습은 동남아권과 북방시베리아권, 미주대륙의 원주민에게 고르게 분포되어 있다.
현재 인도의 문화는 아리안들의 침입이후 북방한겨레 계통(쿠샨왕조, 무굴제국 등)의 민족의 계속되는 침입으로 복합적인 현상을 띄고 있다. 그러나 오래전부터 남인도로 이주하여 이 지역의 주요세력으로 자리잡은 드리비다족은 수천년전의 자신들의 문화를 거의 보존하며 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해양세력도 출몰하였겠으나 그것은 미미하였고, 북쪽 특히 인도 북서부 케슈미르지역의 통로를 통해 시대를 달리하며 침입해 온 이민족도 남인도 까지는 그 세력권이 거의 미치지 못했기에 고유전통문화를 유지할 수 있었다고 본다.
그래서인지, 앞서 언급한 것처럼 현재 한반도의 말(사투리 포함)과 같은 것이 1천3백여개나 된다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는 명백한 사실이다. 또한 한겨레 전통 머리모양인 머리를 따고 다닌 풍습은 여전히 강하게 남아 있다. 이는 미주대륙의 남미 한겨레, 인디오들의 것과도 일치한다.
4. 다음까페 삼태극에서 이미 밝혀놓은 바 있는 고인돌(한반도에 전세계고인돌의 70%이상이 밀집, 가장 오래되고 다양한 양식의 고인돌 집산지)의 경우도 인도 현지의 박물관장이 인도의 고인돌은 한반도권에서 온 것이라고 고백한 바 있다. 이집트 오벨리스크의 원조 당간지주도 인도의 고인돌에서 보이는 데 이것도 한반도가 원조다. 현재 한반도에서는 주로 불교사찰에서 발견되는 데 원래는 고인돌과 관련된 거석문화임을 알아야 한다.
당간지주에 젊은 남녀가 한가로이 쉬고 있다(북한지역-구한말 미국선교사가 촬영-미주 남가주대 소장)
이 당간지주는 솟대나 피라미드, 무당이 쓰는 고깔 등과 더불어 하늘과 소통하는 상징물이라는 점이다. 한겨레는 하늘자손으로서 그리고 현생인류의 종가집으로서 하늘과 소통하는 상징물을 특히 거석문화를 통하여 많이 남겼다. 이것이 시대와 장소를 달리하며 여러 모양과 풍습으로 변형되며 전 세계로 배달되었던 것이다.
인도의 고인돌도 이러한 한겨레 배달문화의 한 사례라고 본다.
5. 인도의 불교
인도문화의 한 축이었던 불교문화의 원조 고타마 싯달다(석가모니)도 북방한겨레의 후손인 샥카족이었다. 이 샥카족은 현재의 네팔과 히말라야산악지대에서 위치해 있었다고 한다. 지금도 네팔의 소수민족을 보면 한반도 한겨레와 닮아있다. 풍습도 비슷한게 너무나 많다. 특히 이들은 불교문화권에 속한다. 현재 대영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가장 신빙성 있는 석가모니의 초상을 보면 한반도 한겨레와 거의 일치한다. 북인도의 역사를 대부분 채우고 있는 왕조나 민족을 보면 대부분 북방한겨레 계통이다. 이들은 한겨레가 세계로 배달나가면서 이곳에도 정착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고오타마 싯달다(석가모니=부처-부르나존자 그림-대영박물관소장)
서기전 317년 카우틸랴가 쓴 실리론(Arthaśāstra, 實利論)에 의하면, 고탐붓다(석가모니)가 있기 이전 까마득한 옛날에 전륜성왕(차크라 바티 라자cakra varti raja)이 다스리던 시대가 있었다고 한다. 전륜성왕시대는 7대가 이어졌는데, 이 전륜성왕에 담겨있는 뜻은 운기조식(運氣造息)을 한다는 뜻으로 한마디로 신선도와 관련이 있다. 이 전륜성왕은 칼과 무력으로 생민을 다스린게 아니라 법(dharma진리)으로 다스렸다고 한다. 여기서 요가가 나왔다. 요가는 인도의 뿌리문화 중의 하나다. 요가는 단순히 기괴한 몸 동작을 통한 몸 건강을 위한 것이 아니다. 우리 몸에는 수많은 차크라(바퀴)가 있는데 요가는 이것을 순환시킴으로서 인간을 뛰어넘는 존재로 변형되기 위한 수행법이다. 한마디로 신선이 되고자 하는 것이며, 그리스도 또는 붓다, 또는 하나님이 되기 위한 수행법이라는 것이다. 결국 요가도 그 뿌리를 찾아가면 한겨레의 신선도와 연결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천부경과 무당문화 그리고 신선도와의 관계는 참역사동아리 다음까페 삼태극의 <한겨레3대원전>방에서 이미 실사적으로 밝혀놓은 바 있다.
요가에서 말하는 몸속에 있다는 차크라
이처럼, 전륜성왕의 시대가 있었다는 것은 1만년전 한국문명과 12개의 연방체제가 존재했었다는 것을 암시해 주는 것이라고 본다. 석가모니도 출가를 하여 붓다가 되지 않았다면, 전륜성왕이 되어 나라를 다스리는 정치가가 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전륜성왕의 흉내를 낸 왕조가 붓다가 죽은 후 서기전 3세기경에 인도에 출현했는데 마우리아 왕조가 그것이다. 이 왕조시대에 불교는 인도전역에서 전성기를 누린다. 힘과 몽둥이로 다스리기 보다는 붓다의 불법으로 교화시켜 다스리고자 했던 왕조다.
6. 한겨레와 인도의 교류
가. 고구려와의 교류.
이에 대하여는 한국방송 1테리비 <역사기행>에서 방영한 자료로 대신한다. 분명한것은 이 방송은 고구려의 음악과 악기 기타 문화가 모두 인도가 원류라는 기초에서 출발하나, 이것은 문제가 있다는 점을 밝혀둔다. 오히려 극동아시아의 한국 신시배달국 고조선과 끝없는 교류를 통해 인도로 전해졌고 다시 개량된 모습으로 고구려시대에는 들어왔다고 볼 수 있다.
황해도 안악3호분 / 인도 전통춤 ‘바라따나띠얌’의 발 꼰 춤사위, 고분벽화에 묘사된 모양과 똑같다
밥딜런과도 공연을 했다는 ‘유랑음악’인 바울. 고구려악기 ‘요고’와 유사한 다마로를 연주하고 있다.
(왼쪽사진) 우리의 도드리장단과 똑같은 장단을 연주하는 인도연주가.(오른쪽사진)
델리에서 공연 중인 카탁. 고구려의 호선무를 연상시킨다.
http://www.kbs.co.kr/1tv/sisa/historytour/vod/1443362_19896.html
나. 백제와의 교류
백제와 인도가 교류했을 가능성을 나타내주는 유물이 한반도에서 발견되었는데, 이른바, '백제대금동향로'이다. 여기에는 각종 그림이 새겨져 있는데 한반도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코끼리, 악어,등 열대지방 의 동물들이 새겨져 있다. 이는 대륙백제를 추측케하는 유물이기도 하지만, 인도와의 교류도 배제못한다고 본다. 이 대향로는 대륙어느곳에서도 찾기 힘든 백제만의 독특한 양식과 기법으로 만들어 졌다고 한다. 이는 불교사찰에서 발견되었는데 불교적으로도 인도와 교류가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겠다.
백제금동대향로(국보제287호- 한반도 충남 부여 능산리 출토-불교유물)
다. 신라와의 교류.
가) 허황옥 이야기
허왕후(許王侯·서기 32~189년)는 가야초대왕비이다.
허왕후 릉 http://blog.naver.com/taemyeong123
삼국유사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해진다고 한다. "저는 아유타국(阿踰陁國)의 공주인데, 성은 허(許)이고 이름은 황옥(黃玉)이며 나이는 16세입니다. 금년 5월 본국에 있을 때 부왕과 모후께서 저에게 말하기를, '우리가 어젯밤 꿈에 상제(上帝)를 뵈었는데, 상제께서 가락국 왕 수로(首露)는 하늘이 내려보내 왕위에 오르게 하였으니 신령스럽고 성스러운 사람이다, 그가 새로 그 나라에 군림했으되 아직 배필을 정하지 못했으니 그대들은 공주를 보내서 그 배필을 삼게 하라. (…) 너는 여기서 우리와 작별하고 그에게로 가거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바다를 건너 멀리 남해에 가서 찾기도 하고, 방향을 바꾸어 멀리 동해로도 가 보았습니다. 그러다가 이제 보잘것없는 얼굴로 감히 용안(龍顔)을 뵙게 되었습니다."
김수로 왕릉 http://blog.naver.com/taemyeong123
이 기록의 핵심은 허황옥이 먼 바다를 건너 오직 결혼을 목적으로 가라국(한반도 남해안-가야국으로 비정)에 왔고, 당시 김수로왕도 다른 여인네는 제쳐 놓고 이 허황옥이 오기만을 기다렸다가 결혼을 하게된다는 것이다.
2005년 4월 제29회 가락문화제 중의 연극 "계욕제, 수로왕 탄강과 건국/결혼"(출연 부산예술대학) 중 허황옥이 등장하는 대목. ⓒ김대식
이것을 두고 한반도 한겨레와 인도는 같은 뿌리로서 아득한 옛날 부터 교류를 해 왔고, 한겨레 전통의 례에 따라 왕실간 통혼 풍습의 하나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 근거를 고구려와 몽골, 고려와 몽골, 몽골과 려진 청나라의 황실간 통혼의 역사에서 찾는다.
이에 대하여 여러 다툼이 있는데, 허황옥 중국인 출신설, 일본출신설, 서북쪽 북방에서 왔다는 설 등 여러견해가 대립하고 있다.
각기 주장하는 근거가 비등하여 어느 견해가 훨씬 설득력이 있다고도 할 수 없다. 따라서 여기서는 앞선 논거를 토대로 허황옥은 인도 타밀나두 지역 출신으로 본다.
참고로 허황옥과 관련하여 쌍어문 이야기가 나오고 실제로 허황옥 릉이나 비석과 관련하여 쌍어문 문양이 나온다. 이에 대하여도 논란이 많으나, 한겨레권 전통 풍습중의 하나가 쌍어문 문양이라는 것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왼쪽부터 진해시 용원동 유주각 출입문의 쌍어문 그림, 김해 시내 다리 난간의 쌍어문 조각, 수로왕릉 앞 보도 난간의 쌍어문 장식. ⓒ김대식
쌍어문은 고조선시대 이상으로 거슬러 올라간는데, 풍요와 조화 다산 또는 악귀를 쫒는 상징물로 사용되어 온것으로 판단된다. 이 문양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용되어 오고 있다. 기독교 초기의 상징물도 이 물고기고, 대륙의 서안일대에서 발견되는 고대문명의 그릇에서도 이 쌍어문 새겨져 있다. 또한 현재도 중국 소수민족의 결혼식에는 두마리의 물고기가 서로 입맞추는 의식을 하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문화방송, 한중우호 특집'황하' 중 황토고원 편)
수로왕릉 납릉 정문의 쌍어문 및 그 확대 사진 ⓒ김대식
나) 석탈해 이야기
신라의 왕들을 보면 박.석.금씨 순으로 왕들이 등장한다. 여기서 석씨는 바로 석탈해가 시조다. 석탈해에 대하여도 그가 어디서 왔냐는 것에 대하여 여러 견해가 분분하나, 고증적 언어학적 추적의 결과 인도의 타밀라두주에서 왔다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 즉 드라비다족의 후예라는 것이다.
석탈해라는 인도 타밀어와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나오는 기록이 일치한다.
석탈해는 인도 남부 ‘촐라왕국’ 출신으로 추정된다.
남인도 스리랑카 바로 위에 촐라 왕국표시가 보인다.
경주에 있는 석탈해 왕릉. 왕릉 주위 소나무는 모두 능을 향해 누워 있다.
다) 박혁거세 이야기
이에 대한 이야기는 직접 현지전문가의 말을 들어보는게 실증적일 것이다. 다음은 타밀학회장인 김정남선생의 현지답사기록이다.
" 필자(김정남)는 가야 초대 왕비 허왕후 및 신라 제4대 석탈해왕의 설화 속에 언어적 유사성 및 해양교류 등을 추적한 결과, 이들이 인도 남부의 타밀 출신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그 연장선상에서 박혁거세의 설화에 나오는 주요 명칭들이 당시 타밀어와 일치하는 것을 발견했다. 더구나 윷놀이와 제기 등 우리의 전통 민속놀이도 타밀어 명칭과 놀이 형태가 완전히 똑같다. 박혁거세의 대부 격인 6촌장이 타밀 출신이라 자신들의 언어와 풍습을 우리에게 그대로 소개했기 때문이다.
알에서 태어난 박혁거세의 설화가 실린 삼국유사.
필자는 인도 남부 및 스리랑카 북부 출신으로 토론토에 거주하는 20여 만 명의 타밀인들 가운데 타밀인협회 및 여성단체 관계자, 힌두교성직자, 교수, 교사 등 전문가들을 직접 만나 취재하고 타밀어 사전 및 역사서 등을 참조하여 다음과 같은 결과를 얻어낸 것이다.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의 탄강신화가 깃든 경북 경주시 탑동 나정. <경향신문>
무엇보다도 당시 타밀어에서 ‘자력이 아니라 타인의 도움으로 왕위에 오른 운 좋은 왕’ 또는 ‘행운을 가져다 주는 왕’을 지칭하여 ‘박히야거세(Pakkiyakose)’ 또는 ‘박히야거사이(Pakkiyakosai)’라고 불렀는데 이를 우리말로 표현한 것이 바로 ‘박혁거세(朴赫居世)’이다. 6촌장들이 이를 한자로 표기하면서 “박처럼 둥근 알에서 태어났다”하여 성은 ‘박(朴)’, “세상을 밝게 한다”하여 이름은 ‘혁거세(赫居世)’라는 한자어 작명을 한 것이다. 인도가 원산지인 ‘박’은 당시 타밀어와 우리말이 아주 똑같으며 현재 타밀어로는 수라이카이(Suraikai)라고 불리고 있다.
또 박혁거세에게 붙인 ‘왕’의 명칭 거서간(居西干)도 당시 타밀어 ‘거사간(kosagan)’과 그 발음과 뜻이 완전히 일치한다. 아울러 6촌장들의 이름 또한 당시 타밀인들의 이름과 유사하다. 박혁거세 알을 처음으로 발견한 돌산 고허촌의 소벌도리는 타밀어로 ‘훌륭한 지도자(Good Leader)’를 뜻하는 소벌두라이(Sobolthurai)와 거의 같다. 알천 양산촌의 알평은 아리야판(Aryappan)과, 자산 진지촌의 지백호는 치빠이코(Chippaiko)와, 무산 대수촌의 구례마는 구레마(Kurema)와, 금산 가리촌의 지타는 치타(Cheetha)와, 명활산 고야촌의 호진은 호친(Hochin)과 각각 일치한다."
위와 같은 증언을 토대로 볼때, 박혁거세도 인도와 밀접한 관련성을 갖고 있다고 하겠다. 특히 반도 한겨레와 언어와 문화적으로 원형에 가깝도록 동일하다는 것은 앞서 설명 한바와 같이 타밀인 즉 드라비다족은 남인도로 이동하면서 지정학적으로 북방에서 침입해들어오던 이민족의 문화가 상대적으로 훨씬 덜 침투하여 문화의 원형이 유지될 수 있었다고 본다.
결론적으로 이상과 같은 기록과 논거를 종합해 보면, 인도는 한겨레에 그 뿌리를 두고 있으며, 한민족 개념이 없던 명나라 사대주의 정권 리조정권이 들어서기 전 까지만 하더라도 활발한 교류를 한 한겨레 나라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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