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기독교 역사 개요
한국에 기독교가 전래된 시기는 일반적으로 17세기초를 정설로 보고있다.
그러나 이 시기에 한국에 수용된 것은 천주교로서, 일부 양반과 중인계층의 지식인들이 중심이 되어 중국을 통하여 마테오릿치(Matteo Ricci, 利瑪竇, 1552-1610)의 『천주실의』와 그의 '중국화(본토화)' 선교전략을 계승한 '예수회'의 교리를 수용하게 되었다. 신교는 19세기말에 이르러서야 서양선교사들에 의해 직접 한국에 전해졌다. 따라서 한국에서의 기독교역사는 천주교(구교)와 기독교(신교)를 모두 합쳐서 겨우 400년의 역사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이에 비하여 중국의 기독교는 상당히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기독교가 처음 중국에 들어온 것은 635년(당태종 9년)으로, 약 1360여 년의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기독교는 당대에 처음 중국에 전래된 이래 몇 차례의 수용과 소멸을 거듭하는데, 통설에 의하면 기독교는 4차례에 걸친 전래가 있었다.
기독교의 여러 교파 중에 가장 먼저 중국에 들어온 것은 네스토리우스파(635-845, 斯托利派)로서, 페르시아에 의해 전래되었다. '경교(景敎)'라고도 불리는 기독교는 635년부터 210년간 당조의 수도인 장안, 낙양, 섬서성, 사천성과 양주이남을 중심으로 전파되다가 845년에 당무종에 의해 금교 되었다.
제2차 전래(1280-1353)는 원대인 13세기로서 400여 년간의 공백기를 거쳐 네스토리우스파의 기독교가 다시 중국에 들어오고, 한편으로 로마천주교인 프란체스코회(方濟各會 혹은 法蘭西斯會)가 몬테코르비노(J. Montecorvino, 約翰?孟高維諾, 1247-1328) 선교사에 의해 원의 수도인 캄발럭(지금의 북경, 汗八里)에 전래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의 기독교는 주로 몽고인에게 수용되고 한인에게는 거의 전파되지 않았으므로, 그 뿌리를 내리지 못하다가 1368년 원조의 멸망을 따라 자연히 소멸되었다.
세 번 째 전래는 명말청초(1552-1724)에 이루어졌는데, 예수회 소속의 신부인 사비어(Xavier, 方濟各, 1506-1552)가 1552년에 광동성에 도착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이어서 마테오릿치, 아담 샬(Adam von Schall, 湯若望), 회르비스트(F. Verbiest, 南懷仁)를 대표로 하는 예수회 신부들이 북경에 도착하여 그들이 지닌 우수한 과학지식으로 황제의 우대와 총애를 받으며 교세를 확장하게 된다. 이때 마테오릿치는 선교전략으로써 기독교의 '중국화'를 시도하여 정기적으로 공묘에 가서 제사하고, 입교한 중국인들에게도 예법에 따라 계속 공자와 조상에게 제사지낼 것을 허락하였다.
기독교의 여러 교파 중에 가장 먼저 중국에 들어온 것은 네스토리우스파(635-845, 斯托利派)로서, 페르시아에 의해 전래되었다. '경교(景敎)'라고도 불리는 기독교는 635년부터 210년간 당조의 수도인 장안, 낙양, 섬서성, 사천성과 양주이남을 중심으로 전파되다가 845년에 당무종에 의해 금교 되었다.
제2차 전래(1280-1353)는 원대인 13세기로서 400여 년간의 공백기를 거쳐 네스토리우스파의 기독교가 다시 중국에 들어오고, 한편으로 로마천주교인 프란체스코회(方濟各會 혹은 法蘭西斯會)가 몬테코르비노(J. Montecorvino, 約翰?孟高維諾, 1247-1328) 선교사에 의해 원의 수도인 캄발럭(지금의 북경, 汗八里)에 전래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의 기독교는 주로 몽고인에게 수용되고 한인에게는 거의 전파되지 않았으므로, 그 뿌리를 내리지 못하다가 1368년 원조의 멸망을 따라 자연히 소멸되었다.
세 번 째 전래는 명말청초(1552-1724)에 이루어졌는데, 예수회 소속의 신부인 사비어(Xavier, 方濟各, 1506-1552)가 1552년에 광동성에 도착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이어서 마테오릿치, 아담 샬(Adam von Schall, 湯若望), 회르비스트(F. Verbiest, 南懷仁)를 대표로 하는 예수회 신부들이 북경에 도착하여 그들이 지닌 우수한 과학지식으로 황제의 우대와 총애를 받으며 교세를 확장하게 된다. 이때 마테오릿치는 선교전략으로써 기독교의 '중국화'를 시도하여 정기적으로 공묘에 가서 제사하고, 입교한 중국인들에게도 예법에 따라 계속 공자와 조상에게 제사지낼 것을 허락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중국 경전 중의 '天'과 '上帝'로서 기독교의 '하나님'을 억지로 비유하였는데, 마테오릿치와 예수회의 이러한 선교방법은 후에 우상숭배 문제로 '전례논쟁'을 일으켜 급기야 중국황제와 교황 사이의 권위의 충돌로까지 발전하였다. 이 충돌은 강희황제로 하여금 1720년에 금교를 결정하게 하고, 옹정제와 건륭제도 그의 뜻을 이어 서양선교사에 대해 엄격한 조치를 취하게 하였는데, 1724년에는 황제의 칙령이 공포되어 천문학자를 제외한 모든 서양선교사들이 추방되었다.
현재 '하나님'을 중국어에서는 '上帝'와 '神' 두 가지로 다 사용하고 있는데, 대륙에서는 '神'을 대만, 홍콩과 동남아국가의 화교들은 '上帝'를 사용한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자면, '上帝'는 중국의 우상문화 속에서 생겨난 단어로서, '유일신 하나님'을 뜻하는 영어의 'God'과는 내포하는 문화적 의미가 다르다. 따라서 문화적인 측면에서 볼 때, '神'이 'God(하나님)'에 대한 바른 번역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현재 '하나님'을 중국어에서는 '上帝'와 '神' 두 가지로 다 사용하고 있는데, 대륙에서는 '神'을 대만, 홍콩과 동남아국가의 화교들은 '上帝'를 사용한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자면, '上帝'는 중국의 우상문화 속에서 생겨난 단어로서, '유일신 하나님'을 뜻하는 영어의 'God'과는 내포하는 문화적 의미가 다르다. 따라서 문화적인 측면에서 볼 때, '神'이 'God(하나님)'에 대한 바른 번역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중국대륙에서 만든 성경에서는 '神'자 앞에 반드시 한 칸을 비워둠으로써 유일신 하나님을 강조한다. 이것은 우리 나라에서 공간적인 의미가 강한 하늘에 계신 '하느님' 혹은 하늘을 다스리는 '옥황상제'와 변별하기 위하여 하느님이 아닌 '하나님'으로 번역한 것과 같은 이치이다. '하나님'은 곧 여호와 하나님의 본질인 창조주이며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유일신의 의미를 잘 나타내주는 단어라고 말할 수 있다.
네 번 째(1807-현재)로 기독교(특히 신교)가 대규모로 북경, 상해, 광주 등지로 전래되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은 1807년 영국런던기독교의 신교선교사인 로버트 모리슨(Robert Morrison, 羅伯特?馬禮遜)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성경번역자로서, 중국문화를 연구하는 학자로서 중국어사전을 편찬하고 성경을 완역해내었다. 런던선교회 소속의 다른 선교사들도 그의 뒤를 이어 언어연구와 문서보급에 주력하였다. 이로부터 1949년 중국인민공화국 성립까지 영국, 미국, 러시아, 독일, 프랑스 등 각국 교파의 선교사들이 계속 중국으로 들어와 복음을 전파하고 교회를 세웠다. 이들은 문화교육사업, 의료사업과 출판사업을 복음전하는 주요수단으로 삼아서 선교사역에 훌륭한 효과를 거두었으며, 중국의 전통우상문화를 기독교문화로 바꾸는데도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그러나 서구제국주의 열강의 사주를 받은 일부 거짓선교사들이 중국에 들어와 반기독교 행위를 저지름으로써 의화단에 의해 수많은 선교사와 중국의 성도들이 잔혹하게 학살당하였고, 중국정부와 일부 중국인들이 기독교를 배척하고 비판하는 데 빌미를 제공하였다.
네 번 째(1807-현재)로 기독교(특히 신교)가 대규모로 북경, 상해, 광주 등지로 전래되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은 1807년 영국런던기독교의 신교선교사인 로버트 모리슨(Robert Morrison, 羅伯特?馬禮遜)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성경번역자로서, 중국문화를 연구하는 학자로서 중국어사전을 편찬하고 성경을 완역해내었다. 런던선교회 소속의 다른 선교사들도 그의 뒤를 이어 언어연구와 문서보급에 주력하였다. 이로부터 1949년 중국인민공화국 성립까지 영국, 미국, 러시아, 독일, 프랑스 등 각국 교파의 선교사들이 계속 중국으로 들어와 복음을 전파하고 교회를 세웠다. 이들은 문화교육사업, 의료사업과 출판사업을 복음전하는 주요수단으로 삼아서 선교사역에 훌륭한 효과를 거두었으며, 중국의 전통우상문화를 기독교문화로 바꾸는데도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그러나 서구제국주의 열강의 사주를 받은 일부 거짓선교사들이 중국에 들어와 반기독교 행위를 저지름으로써 의화단에 의해 수많은 선교사와 중국의 성도들이 잔혹하게 학살당하였고, 중국정부와 일부 중국인들이 기독교를 배척하고 비판하는 데 빌미를 제공하였다.
신문화운동 기간에는 과학과 민주만을 신봉하는 청년들에게 미신으로 간주되어 1922년 3월에 반기독교운동이 일어났으며, 국민당과 공산당사이의 국공합작 기간인 1924-1927년 동안에는 기독교와 교회가 서구제국주의의 문화적 침략의 도구라는 이름으로 혹독한 공격을 받았다. 중국의 교회들은 자구책으로써 외국선교회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독립적인 교회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 이래 80년대의 경제개방 이전까지 중국교회는 문화대혁명이라는 대 환난 속에서 삼자교회와 가정교회의 형태로 그 명맥을 간신히 유지하다가, 개방 후 지금까지 꾸준히 주님의 나라를 확장하고 있다. 중국 기독교 역사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중국을 향한 복음화의 계획을 볼 수가 있다.
출처 : MyLove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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