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치게 하는 영
무속인이 되기 위해서는 일정한 절차를 통과하게 됩니다. 먼저 점치게 하는 영이 자신을 사로잡는 과정을 거치는데 이 과정을 흔히 ‘무병’(巫病)이라고 부릅니다. 이름 모를 질병으로 인해서 고통스런 날들을 보내게 되고 마침내는 무당을 찾게 됩니다. 축사자를 찾는 경우가 있는데, 이 경우 그 사람을 괴롭게 하는 점치게 하?영을 이길 수 있는 강력한 능력을 가진 사역자가 아니면 감당이 되지 않습니다.
기도원에도 가보고 병원에도 가보았지만 고침을 받지 못해서 마지막으로 할 수 없이 무당을 찾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내림굿을 받게 되면 점치는 무당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을 통칭해서 샤먼(Shaman)이라고 부릅니다. 샤먼에 관해서는 전에 이미 설명했는데, 이 샤먼의 영에 잡히면 꼭 무당이 되지 않더라고 무당과 같은 점치는 일을 하게 됩니다. 정식적인 과정을 거쳐서 무당이 되면 무당 세계의 질서와 위계에 따라서 행동하게 됩니다.
무당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좋지 않기 때문에 최근에는 젊고 지식이 있는 샤먼들은 자신들의 품위를 높이려는 노력을 많이 합니다. 그래서 점집을 우중충하고 고립된 분위기에서 벗어나 밝고 격이 있는 분위기로 만들어 ‘카페’라고 지칭하기도 합니다. 대학가의 젊은이들을 겨냥해서 ‘사주카페’가 생긴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자신들을 무속인이라고 부르지 않고 ‘선사’(仙師)라고 부릅니다. 불교의 선사(禪師)와 발음은 같지만 전혀 다른 용어입니다.
이렇게 점치는 영이 들어와 무속인이 되게 하는 경우는 그들의 영역이 정해지지만 낮은 단계의 점치는 영에 휘말리면 어설픈 점쟁이가 됩니다. 이들은 내림굿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정체성이 확보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정통적인 샤먼이 거치는 무병이나 내림굿을 거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들 역시 무당처럼 주문을 외우거나(a charmer), 신접한 사람(a consulter with familiar spirits)이 되거나 영매(a wizard)가 되거나 죽은 혼을 부르는 일(a necromancer)을 하게 됩니다(신 18:11).
무속인 협회에 속하지 않은 사람을 그들은 ‘사이비 무속인’이라고 부릅니다. 이런 유형의 사람들이 기독교 안에도 있습니다. 예언의 영을 받아서 오랜 세월동안 하나님으로부터 힘든 과정을 소화하지 않고 미숙한 예언자가 되어 예언을 남발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이들에게는 예언의 영 대신에 점치게 하는 영이 주관하게 되어 아무에게나 예언해주려고 접근하게 됩니다.
예전에 삼각산에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기 위해서 찾을 때 그곳에 그런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기도원에도 많이 있기 때문에 기도원에서는 이런 사람들을 각별히 주의할 것을 당부하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교묘한 수단으로 여성 성도들에게 접근해서 예언을 해줍니다. 이들은 어떤 대가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다만 예언하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미혹하는 영, 속이는 영, 점치게 하는 영은 예언함으로써 말할 수 없는 즐거움을 느끼게 합니다.
마약 중독자가 약물에 도취되었을 때는 황홀하지만 깨고 나면 비참함을 느끼지만 시간이 지나면 다시 약물을 접하지 않을 수 없는 가혹한 고통을 겪습니다. 흡연자 역시 마찬가지로 흡연하면 머리도 무겁고 가래도 생기지만 시간이 지나면 다시 충동에 휘말려 견딜 수 없습니다. 이를 ‘금단현상’이라고 합니다. 이런 현상 때문에 다시 흡연하게 되듯이 점치게 하는 영에 사로잡히면 점을 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압박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언해줄 사람을 찾아다니는 것입니다.
자신의 눈에 보기에 만만한 여성들을 대상으로 접근해서 예언을 해 주는 것입니다. 이들 안에 있는 영은 점치게 하는 영이므로 샤먼들이 족집게처럼 지나간 일을 알아맞히듯이 그렇게 신통력을 발휘하기 때문에 속아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들의 입에서 하나님 말을 하고 있지만 실상은 ‘광명한 천사’로 위장한 것일 뿐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더 많은 기도를 하고 더 많이 신령한 것처럼 보입니다.
이들은 ‘미치게 하는 영’ 즉 귀신 들림과는 전혀 다르기 때문에 분명한 이성을 가지고 있고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서 자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런 영에 속게 되면 그를 추종하게 되거나 그 일을 옹호하게 됩니다. 이런 영이 교회를 장악하게 되면 거룩한 모습으로 위장하기 때문에 쉽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결국 악한 영이 그러하듯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영화롭게 하며, 성도를 유익하게 하기보다는 속박과 올무에 빠지게 합니다.
점을 보는 사람은 마치 연속극에 빠지듯이 계속 점집을 들락거리게 됩니다. 이처럼 이런 점치는 영을 가진 사람과 접촉하게 되면 계속 관계를 맺게 되고 그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어 속박 당하게 됩니다. 그들에게 얽매여 그리스도 안에서 누릴 수 있는 자유함이 사라지게 되고 그들의 지시를 일방적으로 따를 수밖에 없게 되는 상황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목회자라고 해서 여기에서 예외가 없습니다. 목회자가 이런 영에 사로잡히게 되면 성도들을 ‘해바라기 성도’로 만들게 됩니다. 오직 목회자만 바라볼 것을 요구합니다. 그 어떤 곳에도 가지 말고 그 어떤 설교도 듣지 말고, 그 어떤 집회도 참석하지 말고 오로지 교회 안에만 머물도록 강요합니다. 오로지 자기의 가르침 이외에는 그 어떤 가르침에도 관심을 두지 말 것을 강요하는 것입니다. 이런 태도는 이단의 영이 일반적으로 취하는 태도와 같지 않습니까?
이단의 영은 성도들을 고립되게 만듭니다. 자신들이 주장하는 교리 이외에는 그 어떤 것도 용납하지 않습니다. 성경보다는 교리서가 더 중요합니다. 점치게 하는 영에 사로잡힌 사람을 신실한 예언자와 구분할 수 있어야 하지만 일반 성도들은 이것이 쉽지 않습니다. 점치게 하는 영을 성경에서는 ‘사술의 영’이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비전성경 사전에 의하면 ‘사술’이란 ‘마술이나 점 등을 이용하여 사람을 현혹시키는 술법을 말하며, 사술, 복술, 점 등을 사용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방법이 아니다(레 20:27; 신 18:10-11)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술(sorceries)은 오늘날 교묘한 방법으로 위장하여 우리들 속으로 침투하고 있습니다. 악한 영은 본성적으로 속이는 일에 능하기 때문에 우리들이 쉽게 눈치 채지 못하도록 교묘하게 위장하는 것입니다. 설교자로 예언자로 위장합니다. 발람처럼 선지자의 위치에 있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속아 넘어갑니다. 목회자가 되어있으면 이단적인 가르침을 주게 됩니다. 박옥수 집단과 같이 그 정체가 드러나는 경우에는 쉽게 구분이 되지만 그렇지 못한 목회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영들을 분별하는 노력을 계속 해야 하는 것입니다.
미숙한 예언자나 성숙하지 못한 목회자는 이런 영에 휘말릴 위험이 아주 높은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양신 역사’의 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악한 영을 쫓아내고 성령충만을 받아 성숙의 과정으로 나간다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못하면 결국에는 악한 영에 사로잡혀서 교회에 많은 해를 입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들을 제대로 분별하는 일이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신 안에 역사하는 악한 영에게 속으면 그 속임수에서 쉽게 빠져나올 수 없게 됩니다.
사울 왕에게 악신이 임하자 그는 자신의 행위를 계속 변명하기에 바빴습니다. 사무엘 선지자의 지적에도 불구하고 그는 계속 자신의 행위를 변명했습니다. 회개가 없으면 그는 그 영으로부터 결코 벗어날 수 없게 됩니다. 미혹의 영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특징은 변명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광명의 천사로 자신을 위장하고 계속 그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최근 타락한 교회 지도자들이나 정치 지도자들이 이런 저런 변명으로 자신이 억울하다고 계속 호소하는 모습을 봅니다.
교도소에 들어가면서도 억울하다고 말합니다. 정치적 음해라고 주장합니다. 비록 그것이 음해라고 할지라도 신실한 지도자들은 마치 주님이 그러했듯이 잠잠할 것입니다. 이사야가 주님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 53:7)
억울하기로 따지면 주님보다 더한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들 중에는 이미 법원의 판결을 받아 유죄확정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판결이 부당하다고 주장합니다. 세상에 온갖 조롱거리를 만들었고, 그 일로 수많은 교회 지도자들에게 도매금으로 해를 입혔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반성도 없이 계속 자신의 결백만을 주장하는 것은 결코 주님을 닮은 모습이 아닙니다.
정말로 억울하다면 세상을 향해서는 잠잠하고 하나님 앞에 그 문제를 들고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주의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그 일을 바로잡아주실 것입니다. 주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처럼 떨어지는 기도를 했듯이 그렇게 주님 앞에서 기도한다면 결코 세상을 향해서 자신의 억울함을 계속 호소하지 않을 것입니다. 신실한 지도자가 오해를 받았을 때 불신자인 정치 지도자들처럼 그렇게 행동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모든 일에 최종 심판자이기 때문입니다.
기도원에도 가보고 병원에도 가보았지만 고침을 받지 못해서 마지막으로 할 수 없이 무당을 찾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내림굿을 받게 되면 점치는 무당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을 통칭해서 샤먼(Shaman)이라고 부릅니다. 샤먼에 관해서는 전에 이미 설명했는데, 이 샤먼의 영에 잡히면 꼭 무당이 되지 않더라고 무당과 같은 점치는 일을 하게 됩니다. 정식적인 과정을 거쳐서 무당이 되면 무당 세계의 질서와 위계에 따라서 행동하게 됩니다.
무당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좋지 않기 때문에 최근에는 젊고 지식이 있는 샤먼들은 자신들의 품위를 높이려는 노력을 많이 합니다. 그래서 점집을 우중충하고 고립된 분위기에서 벗어나 밝고 격이 있는 분위기로 만들어 ‘카페’라고 지칭하기도 합니다. 대학가의 젊은이들을 겨냥해서 ‘사주카페’가 생긴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자신들을 무속인이라고 부르지 않고 ‘선사’(仙師)라고 부릅니다. 불교의 선사(禪師)와 발음은 같지만 전혀 다른 용어입니다.
이렇게 점치는 영이 들어와 무속인이 되게 하는 경우는 그들의 영역이 정해지지만 낮은 단계의 점치는 영에 휘말리면 어설픈 점쟁이가 됩니다. 이들은 내림굿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정체성이 확보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정통적인 샤먼이 거치는 무병이나 내림굿을 거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들 역시 무당처럼 주문을 외우거나(a charmer), 신접한 사람(a consulter with familiar spirits)이 되거나 영매(a wizard)가 되거나 죽은 혼을 부르는 일(a necromancer)을 하게 됩니다(신 18:11).
무속인 협회에 속하지 않은 사람을 그들은 ‘사이비 무속인’이라고 부릅니다. 이런 유형의 사람들이 기독교 안에도 있습니다. 예언의 영을 받아서 오랜 세월동안 하나님으로부터 힘든 과정을 소화하지 않고 미숙한 예언자가 되어 예언을 남발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이들에게는 예언의 영 대신에 점치게 하는 영이 주관하게 되어 아무에게나 예언해주려고 접근하게 됩니다.
예전에 삼각산에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기 위해서 찾을 때 그곳에 그런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기도원에도 많이 있기 때문에 기도원에서는 이런 사람들을 각별히 주의할 것을 당부하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교묘한 수단으로 여성 성도들에게 접근해서 예언을 해줍니다. 이들은 어떤 대가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다만 예언하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미혹하는 영, 속이는 영, 점치게 하는 영은 예언함으로써 말할 수 없는 즐거움을 느끼게 합니다.
마약 중독자가 약물에 도취되었을 때는 황홀하지만 깨고 나면 비참함을 느끼지만 시간이 지나면 다시 약물을 접하지 않을 수 없는 가혹한 고통을 겪습니다. 흡연자 역시 마찬가지로 흡연하면 머리도 무겁고 가래도 생기지만 시간이 지나면 다시 충동에 휘말려 견딜 수 없습니다. 이를 ‘금단현상’이라고 합니다. 이런 현상 때문에 다시 흡연하게 되듯이 점치게 하는 영에 사로잡히면 점을 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압박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언해줄 사람을 찾아다니는 것입니다.
자신의 눈에 보기에 만만한 여성들을 대상으로 접근해서 예언을 해 주는 것입니다. 이들 안에 있는 영은 점치게 하는 영이므로 샤먼들이 족집게처럼 지나간 일을 알아맞히듯이 그렇게 신통력을 발휘하기 때문에 속아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들의 입에서 하나님 말을 하고 있지만 실상은 ‘광명한 천사’로 위장한 것일 뿐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더 많은 기도를 하고 더 많이 신령한 것처럼 보입니다.
이들은 ‘미치게 하는 영’ 즉 귀신 들림과는 전혀 다르기 때문에 분명한 이성을 가지고 있고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서 자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런 영에 속게 되면 그를 추종하게 되거나 그 일을 옹호하게 됩니다. 이런 영이 교회를 장악하게 되면 거룩한 모습으로 위장하기 때문에 쉽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결국 악한 영이 그러하듯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영화롭게 하며, 성도를 유익하게 하기보다는 속박과 올무에 빠지게 합니다.
점을 보는 사람은 마치 연속극에 빠지듯이 계속 점집을 들락거리게 됩니다. 이처럼 이런 점치는 영을 가진 사람과 접촉하게 되면 계속 관계를 맺게 되고 그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어 속박 당하게 됩니다. 그들에게 얽매여 그리스도 안에서 누릴 수 있는 자유함이 사라지게 되고 그들의 지시를 일방적으로 따를 수밖에 없게 되는 상황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목회자라고 해서 여기에서 예외가 없습니다. 목회자가 이런 영에 사로잡히게 되면 성도들을 ‘해바라기 성도’로 만들게 됩니다. 오직 목회자만 바라볼 것을 요구합니다. 그 어떤 곳에도 가지 말고 그 어떤 설교도 듣지 말고, 그 어떤 집회도 참석하지 말고 오로지 교회 안에만 머물도록 강요합니다. 오로지 자기의 가르침 이외에는 그 어떤 가르침에도 관심을 두지 말 것을 강요하는 것입니다. 이런 태도는 이단의 영이 일반적으로 취하는 태도와 같지 않습니까?
이단의 영은 성도들을 고립되게 만듭니다. 자신들이 주장하는 교리 이외에는 그 어떤 것도 용납하지 않습니다. 성경보다는 교리서가 더 중요합니다. 점치게 하는 영에 사로잡힌 사람을 신실한 예언자와 구분할 수 있어야 하지만 일반 성도들은 이것이 쉽지 않습니다. 점치게 하는 영을 성경에서는 ‘사술의 영’이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비전성경 사전에 의하면 ‘사술’이란 ‘마술이나 점 등을 이용하여 사람을 현혹시키는 술법을 말하며, 사술, 복술, 점 등을 사용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방법이 아니다(레 20:27; 신 18:10-11)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술(sorceries)은 오늘날 교묘한 방법으로 위장하여 우리들 속으로 침투하고 있습니다. 악한 영은 본성적으로 속이는 일에 능하기 때문에 우리들이 쉽게 눈치 채지 못하도록 교묘하게 위장하는 것입니다. 설교자로 예언자로 위장합니다. 발람처럼 선지자의 위치에 있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속아 넘어갑니다. 목회자가 되어있으면 이단적인 가르침을 주게 됩니다. 박옥수 집단과 같이 그 정체가 드러나는 경우에는 쉽게 구분이 되지만 그렇지 못한 목회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영들을 분별하는 노력을 계속 해야 하는 것입니다.
미숙한 예언자나 성숙하지 못한 목회자는 이런 영에 휘말릴 위험이 아주 높은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양신 역사’의 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악한 영을 쫓아내고 성령충만을 받아 성숙의 과정으로 나간다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못하면 결국에는 악한 영에 사로잡혀서 교회에 많은 해를 입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들을 제대로 분별하는 일이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신 안에 역사하는 악한 영에게 속으면 그 속임수에서 쉽게 빠져나올 수 없게 됩니다.
사울 왕에게 악신이 임하자 그는 자신의 행위를 계속 변명하기에 바빴습니다. 사무엘 선지자의 지적에도 불구하고 그는 계속 자신의 행위를 변명했습니다. 회개가 없으면 그는 그 영으로부터 결코 벗어날 수 없게 됩니다. 미혹의 영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특징은 변명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광명의 천사로 자신을 위장하고 계속 그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최근 타락한 교회 지도자들이나 정치 지도자들이 이런 저런 변명으로 자신이 억울하다고 계속 호소하는 모습을 봅니다.
교도소에 들어가면서도 억울하다고 말합니다. 정치적 음해라고 주장합니다. 비록 그것이 음해라고 할지라도 신실한 지도자들은 마치 주님이 그러했듯이 잠잠할 것입니다. 이사야가 주님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 53:7)
억울하기로 따지면 주님보다 더한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들 중에는 이미 법원의 판결을 받아 유죄확정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판결이 부당하다고 주장합니다. 세상에 온갖 조롱거리를 만들었고, 그 일로 수많은 교회 지도자들에게 도매금으로 해를 입혔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반성도 없이 계속 자신의 결백만을 주장하는 것은 결코 주님을 닮은 모습이 아닙니다.
정말로 억울하다면 세상을 향해서는 잠잠하고 하나님 앞에 그 문제를 들고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주의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그 일을 바로잡아주실 것입니다. 주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처럼 떨어지는 기도를 했듯이 그렇게 주님 앞에서 기도한다면 결코 세상을 향해서 자신의 억울함을 계속 호소하지 않을 것입니다. 신실한 지도자가 오해를 받았을 때 불신자인 정치 지도자들처럼 그렇게 행동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모든 일에 최종 심판자이기 때문입니다.
장봉운목사 갓피플카페 healinghouse
출처 : 예수가좋다오
글쓴이 : (일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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