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과복음
서론
흔히들 구약시대는 율법시대였고 신약시대는 복음(은혜)시대라고 한다. 그것을 통해서 구약시대는 지키면 살고 안지키면 죽는다고 생각했고 신약시대는 예수님의 등장으로 은혜의 시대, 사랑의 시대라고 단정짖기 일쑤였다. 그도 그럴것이 신약에서 간음한 여자를 모세의 율법대로 돌로 쳐죽이자는 항의에 예수님은 자비롭게도 사랑으로 덮으셨다. 이런모습으로 우리들은 구약시대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선지자들을 통해 주신 율법은 죽음으로 몰아가는 잔인한 것으로만 생각되고 반면에 신약에서는 어디까지 은혜와 자비가 베풀어지듯 온전히 사랑만 가득했던 시대였던 것 같다. 이제 죽음으로 몰아가던 구약의 율법이 신약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해내는지 알아야 하겠다.
본 론
율법과 복음의 대해
율법은 우리들이 흔히 법률이라고 볼수 있다. 성경의 대표적으로 출애굽기 20장과 신명기 5장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것만은 꼭 지키라고 주신 십계명, 율법, 법률이 있다. 법은 지켜 행하게 되어 있으며 만약 지키지 않으면 재판을 받아 죄의 유,무와 죄의 크고, 작음과 죄의 형태를 가려내기 마련이다. 오늘날 우리는 이런 법적인 것에 무척 경각심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복음은 무엇인가? 복음이란 좋은소식이란 뜻이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요1:17)처럼 예수님을 통해서 온 것이 이 은혜와 진리, 즉 복음인것이다. 로마서 1장에서는 예수님을 복음이라고 했고 우리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라 믿는자를 구원하신다는 것을 복음이라고 했다. 유대인의 구원은 율법에서 구원하는 것이나 이방인의 구원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그 유업을 잇는 것이다. 또 속죄의 율법에 따라 회개하고 제사를 드려야 하며 이 제사가 복음이라고 한다. 복음은 그리스도께서 자기 몸을 단번에 제물로 드린 것을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은 속죄의 율법에 해당하는 것으로 믿음으로 구원받는것, 따라서 구원은 행함이 아닌 믿음에 의한것이다. 얼마나 기쁜소식인가?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만 믿으면 된다니 말이다. 복음이 속죄의 율법의 요구따라 그리스도의 몸을 제물로 드렸다면 복음은 율법을 폐하는 것이 아니라 굳게 세우는 것이다.
율법과 복음과의 관계
구약에서는 짐승으로 제사를 드렸는데, 신약에서는 그러한 제사가 없어졌다. 또 구약에서는 음식물에 대한 규례가 있었는데, 신약에서는 음식물에 대한 규례가 없어졌다. 이러한 폐하여진 것은 매우 많은데, 구약에서는 제사장이 있으나 신약에서는 없으며 구약에서는 성전의 지성소에 오직 대제사장만이 들어갈수 있었는데 신약에서는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직접 나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구약과 신약의 관계에서 우리가 알아야만 할 가장 중요한 점은 바로 예수그리스도가 몸이며 실체라는 것이다. “믿음이 오기전에 우리가 율법아래 매인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는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갈3:24-27)”여기서 몽학선생은 어린아이가 자랄때까지 돌보아주는 가정교사를 말한다. 실체이신 예수님이 오기전까지 율법은 연약한 어린아이들의 가정교사를 담당했던 것 뿐이다.“그러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갈3:19), 유월절은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발랐다(출12:7), 내가 애굽땅을 칠때에 그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너희는 이 날을 기념하여 여호와의 절기를 삼아 영원한 규례로 대대에 지킬지니라(출12:13-14)” 예수그리스도라는 실체가 오기전까지는 이스라엘은 유월절을 지켰다. 유월절은 그림자일뿐이며 몽학선생이다. 그러나 유월절의 어린양이신 실체가 되시는 예수가 오심으로 우리는 더 이상 유월절을 지킬 필요가 없는 것이다. 유월절의 어린양의 피는 예표이며 그림자가 되어지지만, 예수님의 피는 인류의 죄를 통과하시는 영원한 표적이 되신다. 세례요한은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1:29)“ 예수님이 오심으로 인하여 “거룩”의 개념이 달라졌다. 한마디로 신약의 복음시대에는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의 구별이 없어졌다. 제사장, 성전, 절기등의 여러 가지 정결의 개념이 달라진 것이다. 성전은 이제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영적인 예배라고 말씀하셨고 대제사장만이 들어가는 지성도의 휘장이 찢어짐으로서, 성도들이 하나님께 적접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율법에서 복음으로
율법과 복음의 차이는 많지만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미숙함과 성숙의 차이이다. 율법은 우리를 어린아이 상태로 다루며 세월이 흘러가도 여전히 어린아이로 머물게 만든다. 율법은 미숙하고 어린상태로 머물러서 끝까지 보호와 지시속에 머물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 할 수 있는 힘을 길러주지 못하며, 모든 것을 억지로 하도록 규제하며 명령하는 것이다. 그저 관례대로 행동할 수밖에 없고 다른 사람들이 하는 대로 따라 할 수밖에 없다. 이것을 “맹목적 추종”이라고 부른다(갈4:3) 또 율법은 상벌적인 것이라서 상을 받고 하지 않으면 벌을 받는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보상심리를 자극하는 것이다. 성숙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어떤 일을 하게 하기 위해서는 이런 보상을 따라야 한다. 이런 율법은 기복적이고 수동적인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다. 복음은 이런 율법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이것을 위해서 주께서 단번에 자신을 제물로 드렸고 그 희생으로 인해서 율법의 속박에서 우리를 구원한 것이다. 이복음 즉 그리스도의 희생은 그 대가가 자유함이며 얽어매는 것으로부터 우리를 놓아주는 행위며, 이로 인해서 우리는 성장할 수 있는 길이 열려져 있는 것이다. 성장이란 시키는 사람의 의중을 제대로 이해하고 그 뜻을 따라서 스스로 결정해서 행동하는 자율적인 힘을 의미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 위해서 반드시 율법에서 벗어나서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 성장하여 스스로 책임을 지고 판단해서 행동할 수 있기까지 어쩔수 없이 상벌에 따른 행동 규제를 받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를 맹목적인 사람으로 만드는 부작용이 있지만 그러나 그것이 없이는 우리는 제대로 성장할 수 없는 것이다. 성숙으로 나가는 길에 방해가 되는 율법을 벗어버리고 과감하게 영의 일로 나올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복음은 우리로 하여금 철저하게 자유롭게 한 반면에 엄중한 책임앞에 서는 것임을 일깨워주고 있는 것이다. 책임에 따르지 않는 자유는 방종이며 죄를 짓는 수단이 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얻은 사람은 율법의 일체의 속박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에 그 규육을 따를 의무가 없게 된다. 그러나 여기에는 순종과 책임이라는 결코 쉽지 않은 새로운 부담을 지게 된다. 율법의 부담은 상벌이지만 복음의 부담, 즉 영의 부담은 사랑이다. 성숙함이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 것인지를 알게 되면 우리는 스스로 행동할수 있는 힘을 얻게 되며 희생하는 자리에 기꺼이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부모가 자녀를 기르면서 가장 힘든 시기가 바로 사춘기인데 부모는 이런 시기가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부모에게는 달갑지 않은 시기이지만 자녀에게는 절대로 필요한 과정이듯이 영적성장에서도 역시 이 사춘기를 거칠 수 밖에 없다. 이것은 성장을 위해서는 어쩔수 없이 품에서 벗어나도록 해야 하는 것이며 자신의 통제와 가르침에서 벗어나 스스로 자유롭게 하도록 성장시켜야 하는 것이다. 율법에서 복음으로 전환해야 한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을 채우게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율법이 필요한 이유
거듭난 경험을 한 사람들은 구원받은 후 기쁨에 사로잡혀 주님을 위해 죽을수 있다는 마음과 성경대로 살아갈 것을 결심하게 되고 한 동안 말씀에 사로잡혀 살게 된다. 그러나 성령을 따라 살아간다는 것은 말처럼 간단한 문제가 아니어서 시간이 흐르면 여러 가지 문제에 부딪히면서 말씀대로 살아지지 않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갈등을 극명하게 표현한 것이 로마서 7장이다. 물론 율법은 그리스도가 올때까지 몽학선생으로 계시될 믿음이 온 이후로는 의롭다함을 받는 것은 믿음으로만 얻을수 있다. 그러나 구원받은 이후에도 죽은것처럼 보이는 나 자신이 살아서 움직이게 된다. 이때 율법은 자기의 역할을 성실히 수행한다. “율법이 죄냐 그럴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롬7:7,9) 말씀대로 열심히 살아보려고 하면 할수록 마음의 갈등은 심해지고 사망의 탄식이 온 육신을 휘감을 때 내 육신에 선한 것이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실감하게 되고 율법에 해방되었다고 잠시 율법에 대하여 경시한 것에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게 된다.
결론
우리는 알게 모르게 우리의 선택에 의해서 죄를 짓고 있다. 그 죄는 성령을 근심하게 하며 마귀로부터 참소를 당하는 빌미가 되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죄를 짓지 않으려고 발버둥 친다면 우리의 삶은 황폐해질 수 밖에 없다. 그것은 죄를 짓지 않겠다는 강박감을 만들어 내어 우리를 괴롭게 하는 또 다른 율법이 될 것이다. 죄를 짓지 않을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죄에 대해 무디어 있다면 본문에서 언급하듯 이 또한 방종이 될것이다.
절기를 만드시고 제물을 손질하고 열납받는 방법과 그 태도와 마음가짐에 대한 모든 것들, 생활속의 규례와 옳고 그름에 대한 정의들을 보이신 하나님의 본의, 그 본질은 끊임없이 하나님과 교제하기 원하시기 때문이다. 제물을 준비하는 시간과 율법을 지키려는 마음과 율법을 통한 자기절제의 수단이 생김을 통하여 일상속에 모든 일을 닥칠때 여호와 하나님을 기억하게 하시고 그러한 상황을 통하여 교통을 원하신 것이라고 생각된다.이렇듯 율법은 선한것인고 우리가 은혜안에서 살아갈 때 자칫 놓치고 가는 것들을 체크해주는 하나님이 주신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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