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교회의 치료
The Cure for the Modern Church
현대 교회는 병들었다. 그것이 많은 목사들과 지도자들이 지적하는 부분이다.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서 의사는 반드시 병이 무엇이며, 그것을 치료하기 위해서 적절한 처방을 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교회의 아픔을 알고 계신다. 교회는 신약의 초대교회 공동체의 모습을 잃어가고 있다. 닐 맥브라이드(Neal McBride)가 말하기를 “소그룹은 단순히 사회학적으로 일시적인 유행이 아니다. 그것은 교회 출석을 늘리기 위한 방법도, 교회의 고질병을 위한 만병통치약도 아니다. 소그룹은 견고한 성경적 기초에 의한 사역 방침이다.”라고 하고 있다.
교회의 병이 낫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처방을 겸손히 받아들여야 한다. 교회는 치유에 있어서 나아만을 통한 교훈을 배워야 한다. 나아만은 아람왕의 군대 장관이었고, 문둥병 환자였다. 나아만 장군은 시중들던 계집아이를 통해서 치유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아람왕은 이스라엘 왕에게 서신을 보내어 나아만과 엘리사가 만날 수 있는 방법을 알아보았다. 겁에 질린 이스라엘 왕은 최대한 빨리 그들을 만나게 해 주었다.
나아만 장군이 엘리사의 집에 도착했을 때 엘리사가 사자를 그에게 보내어 지시를 내린다. “요단강에 가서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여전하여 깨끗하리라.” 나아만은 선지자가 그에게 보잘 것 없는 하인을 보내어, 말도 되지 않는 지시를 내린 것에 대하여 분노했다.
나아만 장군에게는 그의 상처에 대한 처방이 너무 단순하고, 평범했다. “요단강에 몸을 담그라고! 요단강은 작은 하천에 불과하고 더럽기까지 한데!” 다행히도 하인이 그를 설득하여 나아만 장군이 요단강에 지시대로 7번 몸을 담근 후에 그의 몸은 그의 살이 여전하여 어린아이의 살과 같이 되었다고 했다.
이 이야기의 교훈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치료하심은 아마도 단순하고, 전통적이지 않으며,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일 수도 있으나, 그것은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교회를 향한 처방이 무엇인가?
수년 동안 종교적 지도자들은 교회의 병든 것을 치료할 만한 것들을 찾아 헤맸다. 값비싼 처방과 복잡한 과정들을 시도해 보았으나, 실패로 끝나는 것들을 경험했다. 비싼 돈을 들여 다양한 방법으로 교회를 개혁하고자 했으나 신약과 같은 상태를 회복할 수는 없었다.
우리가 단순한 하나님의 지시를 무시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너는 너의 소그룹을 데리고 요단강에 가서 몸을 담그면 너의 살이 회복되리라.” 나아만 장군과 같은 교만함이 교회로 하여금 작은 강물에 몸을 담그지 못하게 하고 있다.
어떻게 소그룹이 대단한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가? 큰 교회의 불빛과 거대한 빌딩, 잘 짜여진 예배들이 있는데 , 어떻게 평신도가 집에서 이끄는 5-12명 정도의 모임이 어떤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단 말인가?
이러한 소그룹들은 다른 견고한 교회의 단체에 비해서는 산만하고, 예측할 수 없어 보인다. 우리가 알고 있는 전통적인 교회는 힘 있어 보이고, 눈에 보이며, 교회 건물 등을 통해서 종교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당연히 그들에게 있어서 치료는 더러운 곳이 아니라 깨끗하고, 무균의 환경에서 이루어 져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 이것은 우리의 상황에 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처방이다. 나아만이 원했던 처방이 아니라 이사야가 했던 처방이었다. 하나님의 길을 우리의 생각과 다르다. 우리가 만약 하나님의 단순한 소그룹 구조에 눈을 돌린다면, 그곳에서 일하시는 하나님 자신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소그룹의 중심 가운데 거하시겠다고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단순히 나아만 장군의 교만이 문제였던 것이 아니라, 그의 훈련 때문이기도 했다. 그는 군인이었다. 명령이 내려지면 즉각 무엇이든지 행동을 취해야 하는 것이다. 왜 엘리사가 그에게 이러한 행동을 요구했던가? 나아만은 즉각적인 치료를 원하는 지도자들의 전형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로 하여금 과정과 절차를 따르기 원하셨던 것이다. 하나님의 치료는 명령이 내려져서 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지도자들은 다른 누군가에게 명령을 내려서 교회를 치료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들이 먼저 물 속에 몸을 담그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나아만이 강으로 갔을 때 그는 그 모든 절차를 따랐다. 다른 사람들은 반만 하기를 원할 수도 있을 것이다. 7번 대신에 3-4번만 담그는 것이다. 아니면 몸을 살짝 반만 들어갈 수도 있었다. 많은 교회 지도자들은 소그룹이 교회의 건강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속에 전체 몸을 담글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들은 단지 오래된 교회치료의 일부분으로 소그룹을 사용하는 것이다. 반만 적용하는 것과 섞어서 적용하는 것은 치료를 넘어서 악영향을 초래할 수 있다. 소그룹을 반만 적용하는 것은 페니실린의 반만 투여하는 것과 같고, 이렇게 되면 약의 효과는 중화되고 말 것이다.
만약 교회의 살이 아이의 살처럼 회복되고자 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완전하게 따라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7번을 담그라고 하시면,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다.
신약에서의 소그룹을 통한 치료
이 치료 방법은 1세기에도 유효했다. 1세기에 교회가 각종 기적이 교회 가운데 일어나면서 교회는 특정한 구조 없이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1세기 교회는 잘 세워진 단체도, 특별한 설교 방법도, 교파, 선교단체나 사역, 매스미디어나 “운동”같은 것이 없었다. 그 자체가 하나의 큰 움직임이었다.
엘튼 트루는 “예수의 멍에”의 25페이지에서 초대 교회의 모습들에 대해서 말한다.
“초대교회의 기독교가 어떠했는지 알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오늘날의 기독교와는 판이하게 달랐을 것이다.
“그때는 좋은 건물도 없었다.”
“성직자 계급제도도 없었다.”
“신학교도 없었다.”
“기독교 대학교도 없었다.”
“주일학교도 없었다.”
“성가대도 없었다.”
단지 믿는 사람들의 소그룹이 있었을 뿐이다.
초대교회가 시작될 때에는 신약성경도 없었다. 신약성경 그 자체는 교인들에게 큰 영향력이 없었을 때이다. 그래서 초기 신약성경은 작은 모임들이 어려움과 위험, 유혹에 처해있을 때 그들을 위로하기 위한 편지들이었다. 그들에게는 단지 교제가 풍성했을 뿐이다. 그들은 어떤 지위가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으나, 그들 가운데는 특별한 힘이 있었는데 이는 그들 가운데 모임 속에 함께 하는 것으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신약성경에서 소그룹은 “기적의 약”이다.
최근에 나온 잡지 중에 “기적의 약!”이라는 것을 보았다. 그 약이 무엇인지 아는가?
평범한 아스피린이다. 아스피린을 통해서 많은 병들이 치료될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은 기적의 약으로 불린다. 때로는 익숙한 것이 가장 효과적일 수 있다.
소그룹은 교회의 병든 많은 부분을 고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교회 가운데 주신 기적의 약이다.
혼란.
교회는 큰 교회와 작은 교회, 예배와 선교, 주일과 평일, 모임과 흩어짐, 성직자와 평신도 간에 중심을 잡고 있지 못하다. 소그룹을 통해서 이러한 부분을 바로잡고 바로선 길을 갈 수 있을 것이다.
불임.
교회는 재생산 할 수 있는 능력에 대해서 문제가 있다. 소그룹은 교회가 스스로 배가하지 못하는 문제에 대해서 세상을 품고 나아가는 시스템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도와줄 것이다.
정지.
교회는 건물에 중점을 두고 살아남기 위해서 더 좋은 시설과 설비를 들여놓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고 있다. 건물에 국한되어 세상 밖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은 다른 것에 의해서 치료되어야 한다. 소그룹은 건물생활을 청산하고 전통교회의 구조를 후원하면서 건강한 교회의 모습을 되찾아 세상 가운데 움직이고, 활동성 있는 교회를 만들어 낼 것이다.
빈혈.
교회는 약하고 힘이 없다. 소그룹을 통해서 그 분의 은사를 통한 교회 회복을 이룰 수 있다.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를 따라 그 몸을 자라게 하여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에베소서 4:16)
당신의 교회 회복되어져서 아이의 피부처럼 되는 것을 보기 원하는가? 이런 단순한 지시들을 따를 준비가 되었는가? 당신은 더러운 강으로 뛰어들 준비가 되었는가? 그렇다면 뛰어들어라! 물을 통해서 놀랍게 치유될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의 세상에서 소그룹 강에 있는 많은 사람들을 보게 될 것이다.
출처 : 빌 벡햄(Dr. Bill Beckham) Touch 국제 사역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