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이단] 윗트니스 리의 삼일론 논박(글 차영배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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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차영배 교수(서울성경신학대학원대학교 총장)가 월간 <교회와신앙> 2001년 10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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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서적 <윗트니스 리(Witness Lee)의 저서> [1] 하나님의 경륜과 하나님-사람의 합당한 삶(94-경륜) [2] 세 부분인 사람의 생명 되시는 삼일 하나님(93-삼일)
[3] 그 영, The Spirit(90-그 영)
[4] 교회(90-교회)
[5] 정상적인 교회생활의 회복(회복)
[6] 윗치만 니 (Watchman Nee)(91-윗치만)
[7] 생명의 체험과 성장(89-체험)
[8] 그리스도의 몸의 건축을 위해 그리스도를 말함(88-건축)
[9] 하나님의 경륜(87-경륜)
[10] 하나님의 계시와 異象(86-계시)
[11] 그 영과 몸(85-영몸)
[12] 성경의 핵심(85-핵심)
[13] 그리스도, 그 영, 생명, 교회(84-그 영)
[14] 내주하시는 그리스도를 주관적으로 체험함(83-내주체험)
[15] 성경의 다섯가지 큰 비밀(83-비밀)
[16] 그리스도의 탁월성(83-탁월)
[17] 새언약(80-새언약)
[18] 생명 메시지(78-생명1)
[19] 생명 메시지(78-생명2)
[20] 생명 메시지(78-생명3)
[21] 생명 메시지(78-생명4)
[22] 그리스도를 체험함(78-체험)
[23] 한 몸, 한 영, 한 새사람(77-한몸)
[24] 그리스도의 풍성을 누림(71-풍성)
[25] 교회의 내용이신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표현인 교회(65-교회)
[26] 그리스도와 교회의 빛안에서 본 신약의 개관(64-신약1)
[27] 그리스도와 교회의 빛안에서 본 신약의 개관(64-신약2)
[28] 그리스도와 교회의 빛안에서 본 신약의 개관(64-신약3)
[29] 그리스도와 교회의 빛안에서 본 신약의 개관(64-신약4)
[30] 생명의 체험을 위한 기본원칙(63-생명체험)
[31] 성령의 역사(63-성령)
[32] 그리스도의 증가를 위해 그리스도를 누림(63-누림)
[33] 만유를 포함한 그리스도(62-만유)
[34] 기도(59-기도)
[35] 생명의 체험(56-체험上)
[36] 생명의 체험(56-체험下)
[37] 영과 영 안에서의 봉사(54-영봉)
I. 서언(序言)
1-1. 비성경적 필자는 위에 실린 윗트니스 리의 책을 거의 다 읽어보았다. 한 마디로 윗트니스 리의 삼일론(三一論)은 비성경적이다. 그 원인은 첫째, 단일신론이고, 둘째, 단일신론의 근거인 성경해석의 오류에 있다. 단일신론(monarchianism)이란 하나님이 한 분뿐이라는 사상이다. 교리사상(敎理史上) 삼위일체를 부인(否認)한 모든 이단은 예외없이 단일신론이었다. 주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게 한 유대주의도 단일신론이었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요 5:17~18). 예수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면, 하나님이 두 분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예수를 죽이고자 한 것이다(요 5:17~18).
유대주의뿐만 아니라, 기독교 역사상 삼위일체론을 부인한 사상은 예외없이 단일신론이었다. 사벨리안적인 양태론적 단일신론이든, 아리안적인 역동적 단일신론이든, 성부와 성자가 서로 비슷하다는 유사론적(類似論的) 단일신론(單一神論)이든, 모두 하나님이 한 분 뿐이라는 사상이다.
물론, 성경적인 삼위일체론도 하나님이 한 분뿐이라고 한다. 그러나 단일신론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 이유는 첫째, 성경의 원어와 그 문맥에 따라 순수하게 풀이하기 때문이고, 둘째, 수백년 동안에 걸쳐 좌우로 치우친 잘못된 사상을 정리하고 확립된 건전한 교리를 존중하면, 그만큼 헛된 시간의 낭비를 막을 수 있다. 기독교의 모든 건전한 교리는 이 같은 역사적 검증을 거쳤으므로 주의깊게 공부할 필요가 있다. 셋째, 성경계시에 의존하는 믿음으로 신학을 세워야 한다. 자기가 세운 신학이 제일인줄 알고, 여기에 집착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깊은 함정에 빠져, 여기서 벗어나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몇 해 전에 최삼경 목사와 윗트니스 리측이 교리논쟁을 했다. 그 때 최삼경 목사가 윗트니스 리의 삼위일체론이 변형된 양태론임을 밝히자, 반대로 윗트니스 리측에서는 최삼경 목사를 삼신론자라고 주장한 사실을 알고 있다. 그것은 결국 윗트니스 리의 양태론적 단일신론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고 본다. 최목사가 논쟁 중에 윗트니스 리의 주장처럼 한 분 하나님(성자) 안에 다른 두 분 하나님이 들어와서 한 인격이 된다고 한다면,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신 예수님의 기도는 자기가 자기에게 기도하는 것이 되는데, 그것이 바로 양태론이다, 그리고 성자 하나님만 육신을 입었다 라고 한 것을 가지고 삼신론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양태론적 눈으로 보기 때문에 저지른 잘못이 아닐 수 없다.
요컨대 삼위일체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서로 구별되면서도 그 본질과 속성이 모두 하나라는 것, 환언하면 삼위 곧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세 분이시면서 모두 참 하나님이시며, 그 권능과 영광이 동등하시므로 일체 곧 하나이시다. 그러나 오직 성자만 성부에게서 영원히 나셨으며, 오직 성령만 성부와 성자에게서 영원히 나오시므로 삼위는 영원히 구별된다. 따라서 영원히 성부는 성자일 수도 없고, 성령일 수도 없으며, 성자는 영원히 성부이거나 성령일 수 없으며, 성령은 영원히 성부이거나 성자일 수 없다. 성자와 성령이 성부에게서 영원히 나시고 나오시기 때문에 영원히 서로 구별되시며, 동시에 나심과 나오심은 영원히 동질동등임을 증거한다. 성자는 성부에게서 나셨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영원히 나오시기 때문에 동질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성자는 성부의 좌편이 아니라 우편에 계시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의 보좌 앞에 계신다(계 1:4~6).
1-2. 무난한 말 1) 파라클레토스는 또한 법정에서의 대언자와 같은 의미를 갖고 있다. 그 영은 하늘의 법정에서 우리의 변호사이자 대언자이다(93-삼일, 90쪽). 2) 다음과 같은 말은 거의 완벽하다: 히포스타시스(hypostasis)와 동등하게 사용된 라틴어 단어는 페르소나(persona)이다. 페르소나는 영어 단어 퍼슨(person)의 어근이다. 성경교사들은 하나님의 삼일성의 연구에 있어서 하나님은 하나의 본질 안에서 세 위격을 지니신 분이라고 말한다(90-그 영, 19쪽). 다만 여기서 삼일성이란 말만 삼위일체로 바뀌어졌었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삼일성이란 말은 라틴어의 트리니타스(Trinitas) 또는 영어의 Trinity의 번역이기에는 약간 미흡하다. 물론, 삼위일체라는 번역도 완벽한 것은 아니다. 삼위(三位)는 세 위격(位格)의 준말이기 때문에 무난하나, 일체(一體)라는 용어가 오해를 받을 소지(素地)가 있다. 한글 사전에 보면, 한 몸과 하나로 되어 있는데, 한 몸이 아니고, 하나로 이해하면 무난하다. 3) 진리에 근접한 말: 우리는 하나님이 위격 안에서는 셋이지만, 본질 안에서는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90-그 영, 18쪽). 이것은 상당히 진리에 가까운 말이다. 이것을 바로 잡으면, 하나님의 위격은 셋이지만, 그 본질은 하나다. 또 다음과 같은 말도 진리에 근접해 있다: 삼일 하나님의 셋에 관해서 신학자들은 헬라어 단어인 히포스타시스(hypostasis)와 라틴어 단어인 페르소나(persona)와 영어단어인 퍼슨(person)을 사용한다. 이러한 단어들은 셋이신 하나님을 말한다(90-그 영, 19쪽). 밑줄 친 부분을 바로 잡으면, 이러한 단어들은 셋이신 위격(位格) 곧 삼위(三位)를 뜻한다.
1-3. 정견(正見): 중생관 거듭남에 관한 다음과 같은 생각은 성경대로 바로 되었다(56-체험上, 11-14쪽): 1) 거듭나기 전의 상태: 첫째, 우리의 본성은 부패했다(렘 17:9). 둘째, 마음은 하나님에 대해 굳어져 있다(겔 36:26). 셋째, 우리의 영은 하나님을 향하여 죽어 있다(엡 2:1). 넷째, 사람 전체가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떠나 있다(엡 4:18). 2) 거듭남을 체험할 때의 상태: 첫째, 우리는 바깥 행위도 부패하고, 속의 본성도 부패한 것을 보게 된다. 둘째, 우리의 마음이 통회하며 하나님을 향하여 돌이킨다. 셋째, 우리의 영이 하나님을 향하여 통회한다. 넷째로, 사람은 하나님의 생명을 접촉한다. 3) 거듭난 후의 상태: 첫째, 우리의 본성이 부패한 것을 느낀다. 둘째,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여 부드럽게 된다. 셋째, 우리의 영이 하나님을 향하여 살게 된다. 넷째,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을 갖는다. 이로써 우리의 본성은 하나님의 생명 안에 있게 된다. 비평: 다만 여기서 마지막 줄친 부분에서 생명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확실치 않다. 만약 우리의 생명 또는 영혼과 같은 의미라면, 두 영혼이 우리 속에 있는 것으로 되어 한 인격의 단순성에 어긋난다. 만약 하나님에게서 나오시는 성령이 우리 안으로 들어오심으로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가 살아나는 것으로 보았다면, 성경적 바른 생각이라 할 수 있다(엡 2:1). 1-4. 진리에 가까운 말은 또 있었으나, 최종완성된 분이라는 말이 문제다: 찬송가 447장 1절을 인용하면서 한 말: 참 기묘해 아버지 아들 성령 셋이나 본질 한 영이실세. 영광일세 하나님 내 맘 속에 들어와 계속 내 공급되네. 셋이나 본질 한 영이실세 라고 말하는 대신에, 실체는 셋이나 본질에 있어서 다 하나일세 라고 말하는 것이 더 좋다. 우리는 하나님이 세 실체를 지니시지만, 단 하나의 본질을 지니신다고 말할 수 있다(윗트니스 리, 그 영, The Spirit, 1990, 10쪽). 여기까지는 옳다. 그러나 바로 그 다음이 문제다: 그분(성령)은 최종 완성된 분이시고, 이 최종 완성된 분은 삼일 하나님의 최종 완성이시다(90-그 영, 10쪽). 여기서 성령을 최종 완성된 분으로 보는 것, 이것은 성부는 성자의 모습으로, 성자는 성령의 모습으로 바뀌어져 최종 완성되었다는 것인데, 이것은 계승설(successionism)이므로 비성경적이다. 1-5. 오해한 부분 요 4:24에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 안에서 예배할지니라 한다. 오직 영만이 그 영을 접촉하고 만질 수 있다(54-영봉, 11-14쪽). 이것을 원문대로 번역하면,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성령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로 되어야 한다. 여기서 프뉴마(영)는 성령을 가리키고, 알레테이아는 진정이 아니고, 진리를 뜻하므로, 진리이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가리킨다. 사람의 영은 혼과 몸과 더불어 전적으로 부패되었으므로, 온갖 더러운 것이 몸과 영이다.: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고후 7:1). 성경은 육과 영이 모두 더러운 것이므로, 오직 진리이신 그리스도의 말씀과 성령으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 그러나 윗트니스 리는 고후 7:1을 인용하면서도 이러한 더러움은 영 그 자체에 속한 것이 아니라, 혼과 몸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오염된 것이라 한다. 창세기 3장에서 사람이 타락할 때, 혼과 몸이 관여했고, 사람의 영은 관련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영 자체는 더럽혀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56-체험, 110-111쪽): 칠년 후에도 같은 말을 하고 있다: 사람의 영은 혼과 육에 의해 더럽혀지고, 영향받고, 손상받고, 망쳐지게 되었지만, 영 그 자체는 육과 혼처럼 죄 있지는 않다. … 육체 안에는 죄를 가지고 있고, 혼 안에는 자아를 가지고 있다. … 그러나 우리 영에 직접적인 문제가 있다고 추정할 수 없다. 이 같은 것을 시사해 주는 유일한 구절은 고후 7장 1절로 육과 영의 더러움에 관해 말한다. 그러나 영의 더러움은 영 그 자체의 더러움이 아니다. 그것은 혼과 육에 속한 것으로서 영에 영향을 준다. 우리 사람의 영이 혼의 영향과 육의 손상 아래 있으므로 더럽혀진다(63-생명체험, 233-234쪽). 영은 우리 인간의 가장 내적인 부분이고, 중심이고, 실체이다. 영은 마음보다 더 깊으므로, 참된 신실함은 영 안에 있는 것이다(63-생명체험, 126-127, 130, 234쪽). 비평: 우리는 영을 만지거나 접촉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을 마신다(요 7:37~39, 20:22). 우리는 성령으로 우리의 목숨과 마음과 뜻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해야 한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7~40). 우리는 우리 이웃을 우리 몸처럼 사랑해야 한다. 여기서 몸은 단지 몸만을 가리킨 것은 아니고, 이웃 사람의 영혼을 포함하여 全人을 사랑해야 하지만, 우선 몸이 중요함을 가르치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따라서 사람은 영만이 아니고, 몸과 혼과 영 모두를 성령으로 깨끗함을 받아야 한다.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야 할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영과 혼은 관절과 골수의 구별이 있을 정도의 차이밖에 없고, 혼이 떠나도 별세하고(행 5:5), 영이 떠나도 죽는다(행 7:59). 마리아가 성령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잉태하리라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녀는 영으로는 기뻐하고, 혼으로는 오히려 찬양했다(눅 1:47). 주 예수께서는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 10:28) 하셨다. 여기서 영혼이란 푸수케로서 혼을 뜻한다. 더욱이, 고후 7:1의 해석에는 아연실색치 않을 수 없다. 육과 영이 온갖 더러운 것이라고 말씀했는데도, 영은 깨끗하다고 하니, 어이가 없다. 온갖 더러운 영 안에 어떻게 참된 신실함이 있을 수 있는가! 윗트니스 리는 영과 성령을 혼동하는 일이 많고, 또 그의 영 지상주의는 성경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게 한다. 심지어 몸이나 혼은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다고까지 하니, 마음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할 수도 없게 되는가?(54-영봉, 30, 34쪽).
성경해석의 오류는 치명적이므로, 다음의 한 장(章)에서 다루고자 한다.
II. 성경해석의 오류 2-1. 요한복음 해석의 오류 요1장에는 아버지가 계시고, 그 다음 장들에는 아버지의 표현인 아들이 있고, 20장22절에는 아들의 호흡이 되는 영이 있다. …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 라고 말씀하시고 있다. 하나님 자신인 이 말씀이 어느날 사람이 되어서 우리와 함께 - 우리 안에 거한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 거하셨다. 그 때 그분은 33년 반 동안 이 땅 위에서 사셨고, 결국에는 죽으셨다가 다시 부활하셨다. … 부활한 후 그는 밤에 부활된 몸으로 제자들에게 찾아 오셨다. 모든 문은 닫혀 있었는데, 그는 몸을 입고 들어오셔서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셨다. … 그는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다. 그 숨이 바로 수박의 즙과 같은 성령이다(87-경륜, 56쪽). 이것은 참으로 기상천외(奇想天外)한 해석이다! 요1장에는 아버지가 계시고, 그 다음 장들에는 아버지의 표현인 아들이 있고, 20장22절에는 아들의 호흡이 되는 영이 있다? 이 가운데 하나도 옳은 말이 없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1)를 오해하면 큰일 난다. 원문에 있는 그대로 정관사(定冠詞)의 유무여부(有無與否)에 주의하면서 번역하면, 그 뜻이 더 명백해진다: 태초에 그 말씀이 계시니라. 그리고 그 말씀이 그 하나님을 향하여 계셨으니, 그 말씀은 하나님이시니라(요 1:1). 여기서 그 하나님을 향하여(프로스 톤 데온)는 서로 대등(對等)하게 마주 보고 사랑과 대화를 나누고 계시는 것을 묘사한 것이다. 그 하나님은 물론 성부 하나님이시다. 성자를 뜻하는 말씀과 함께 쓰여진 하나님은 예외없이 성부 하나님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이 성경해석의 원리이다. 함께 또 와와 같은 전치사와 함께 쓰여졌을 때 그러하다는 뜻이고, 주어와 술어가 서로 연결되었을 때는 그렇지 않다. 예컨대, 말씀은 하나님이시니라에서의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일 수 없고, 성자 자신(聖子 自身)이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요 1:1~3의 말씀은 마치 희랍인(그리스)들, 특히 희랍철학을 의식하면서 논쟁적으로 논박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사도요한 자신은 희랍철학 사상을 잘 몰랐을 수 있었겠지만, 성령께서 희랍철학 사상을 대항하여 사도요한으로 하여금 그렇게 인도하셨을 수도 있었겠다.
여하튼 요 1:1~3의 말씀은 참으로 묘하기 짝이 없다: 엔 아르케 에-엔 호 로고스(태초에 그 말씀이 계시니라) 라는 말씀은 희랍사람을 깜짝 놀라게 했을 것이다. 희랍철학자들이 주 예수께서 오시기 전에 이미 말한 로고스는 피조물이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 말씀이 태초 전에도 계셨고, 태초에는 물론이고, 그 후에도 계속 계시니라(과거미완료) 라고 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더욱 놀라운 말씀은 호 로고스 에-엔 프로스 톤 데온(그 말씀이 그 하나님을 향하여 계시니라)이다. 그 말씀이 어떠한 분이기에 감히 그 하나님을 향하여 대등하게 마주보고 계속 계실 수 있었느냐 라는 것이다. 바로 그 다음 말씀이 그 이유를 밝히고 있다: 데오스 에-엔 호 로고스(그 말씀은 하나님이시라). 여기서 보어인 하나님이 맨앞에 나온 것은 강조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이시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시니, 그 하나님 곧 성부 하나님을 향하여 마주보고 대화를 나누시거나, 성부의 사랑을 온전히 받을 수 있지 않는가! 사도요한은 다시 한번 되풀이하여 강조한다: 후토스 에-엔 엔 아르케 프로스 톤 데온(이 분이 태초에 그 하나님을 향하여 계시니라)! 놀라지 말라! 이 분은 또 천지를 창조하셨단다! 성부 하나님께서 그(말씀)가 없이는 지으신 만물이 하나도 없었단다! 이것을 피동문으로 하면: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3).
요 1:1~2을 오해하니까, 1:14의 말씀도 바로 해석되어질 수 없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 라고 말씀하시고 있다. 하나님 자신인 이 말씀이 어느날 사람이 되어서 우리와 함께 거하셨다(87-경륜, 56쪽). 하나님 자신이 어느날 사람이 되어서 우리와 함께 거하셨다? 성경 어디에 이러한 말씀이 있는가? 요 1:14에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라고 되어 있다. 여기에 하나님 자신이란 말씀이 어디에 있는가?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라고 했고, 이 말씀은 아버지의 독생자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지 않는가!
윗트니스 리는 또 승천을 부인하는 듯한 말을 한다: 그 때로부터 예수님은 어디에 계신다고 요한복음에서 말하고 있는가? 이 복음은 부활한 주님이 제자들에게 오신 후 하늘로 승천하신 것을 결코 언급하고 있지 않다. 그러면 요한복음의 끝 부분에서 이 놀라운 분은 어디에 계신가? 우리 안에 있는 수박처럼 주님은 호흡인 성령을 통해 제자들 안에 계신 것이다(87-경륜, 56쪽).
삼년 후의 글은 승천을 인정하는 것으로 표현되었다: 승천을 통하여 주 예수님은 그분의 과정을 완성하셨다. 그분의 승천은 삼일 하나님의 최종 완성에 있어서 마지막 단계였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세분 모두가 주님의 승천안에서 완전히 완결되셨다(90-그영, 53~54쪽). 승천을 인정하든, 아니하든, 그 시비를 가리기는 어려우나, 다음과 같은 말은 이상하다: 요한복음의 끝 부분에서 이 놀라운 분은 어디에 계신가? 우리 안에 있는 수박처럼 주님은 호흡인 성령을 통해 제자들 안에 계신 것이다. 주님이 호흡인 성령으로 바뀌어졌다는 것, 참으로 놀라운 발상이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는다. 주님은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오셔서, 영은 뼈와 살이 없으나, 자신은 있다 하시면서 음식을 잡수신 일이 있다: 저희가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발을 보이시나, 저희가 너무 기쁘므로 오히려 믿지 못하고 기이히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매,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눅 24:37~43).
하나님이 한 분밖에 없다는 단일신론은 이 같은 어이없는 일, 곧 주님은 호흡인 성령을 통해 제자들 안에 계신 것이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모양이다.
2-2. 고전 15:45 해석의 오류 고전 15:45에 의하면, 그 영은 생명 주는 영이시고, 그리스도는 그 분의 부활 안에서 이 생명 주는 영이 되셨다. … 생명 주는 영은 현재 믿는이들의 존재 안에서 역사하고 움직이고 있다. … 생명의 영은 그분의 믿는이들에게 부활 안에서 신성한 생명의 그 영이신 공기같은 그리스도이다(90-그 영, 20쪽).
이러한 해석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성경은 문맥을 따라 해석해야 하므로 49절까지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무릇 흙에 속한 자는 저 흙에 속한 자들과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는 저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으니,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고전 15:45~49).
여기서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라고 해서 몸은 없고 영으로 되었다는 말씀이 아니라는 것은 창세기의 말씀이 증거한다. 그들에게 몸이 없었다면, 어떻게 벗은 몸이 되면서 서로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더라고 했겠는가! 아담의 몸은 영혼이 있어야 비로소 살아있는 사람 곧 산 영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부활하심으로 살려주는 영, 곧 그를 믿는 모든 신자들의 몸을 다시 살리시는 부활의 근본이 되신 분이다. 그는 길이요, 진리요, 부활이시다. 아담은 육 있는 자요,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마지막 아담인 그리스도는 신령한 자요, 하늘로서 나셨으니, 하늘에 속한 분이시다. 거듭난 우리는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고,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게 될 것이다! 그는 살려 주시는 영, 살리시는 분 곧 몸과 영이 있는 부활의 주님이시다.
2-3. 아담의 원죄인식(原罪認識) 부족 그리스도의 죽음은 매우 효능있는 죽음이다. 아담의 죽음은 끔찍한, 멸망시키는 것이지만, 그리스도의 죽음은 위대하고 효능있는 것이다. 아담의 죽음은 우리로 사망의 종이 되게 했지만,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를 사망에서 해방시켰다. 아담의 타락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악의 성분을 가져 왔지만, 그리스도의 효능있는 죽음은 우리 안에서 아담에 속한 모든 요소를 처리하는 죽이는 능력이다(87-경륜, 13쪽). 이것을 바로 잡으면, 아담의 죽음이 인류에게 죽음을 가져온 것이 아니고, 그의 범죄가 죽음을 초래케 한 것이다. 아담이 반드시 죽으리라는 말씀을 어겼기 때문이다. 신학에서는 이것을 원죄(原罪)라고 한다. 우리는 이러한 진리를 창 2장과 롬 5장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 2:7). 사람이 생령 곧 살아있는 영이 되었다 함은 몸에 생기 곧 영혼을 불어넣으시니, 산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영혼이 떠나면 죽고, 영혼이 돌아오면 산 사람이 된다.
또 인류가 죽는 것은 아담의 죽음 때문이 아니고, 아담 한 사람의 범죄 때문이었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노릇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을 인하여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노릇하리로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롬 5:12~21).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심판은 한 사람을 인하여 정죄에 이르렀으나,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였은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라는 말씀들은 모두 아담 한 사람의 범죄와 불순종으로 인하여 인류에게 범죄와 사망이 왔음을 증거하고 있다. 이것을 원죄(原罪)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여기에는 아담이 죽었기 때문에 인류도 죽는다는 원리는 없다. 결과(結果)와 원인(原因)을 혼동(混同)해서는 안 된다.
2-4. 이사야 9장6절에 대한 오해 이제 이사야 9장6절에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 그 이름은 …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전능한 사람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있다. 한 어린 아기가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불리운다. … 만일 여러분이 성경 말씀의 권위를 믿는다면, 아버지라고 불리워진 그 아들이 바로 아버지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 우리에게는 다만 한 하나님이 계신다. 왜냐하면 아기 예수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며, 아들은 영존하시는 아버지이기 때문이다(87-경륜, 53~54쪽). 아버지라고 불리워진 그 아들이 바로 아버지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 우리에게는 다만 한 하나님이 계신다? 참으로 놀라운 주장이다. 이 같은 말은 전형적인 단일신론(單一神論)임을 입증하고 있다. 하나님 아버지가 곧 아들이라는 주장, 정신이 없어도 그 도(度)를 넘고 있다. 어떻게 아들이 아버지인가? 아들은 아들이고, 아버지는 아버지가 아닌가? 아무리 배우지 못한 집안의 자식들이라도 아버지를 향하여 내가 아버지다! 하는 자식은 없을 것이다.
성경은 문맥을 따라 해석해야 한다. 전에 고통하던 자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으로 멸시를 당케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길과 요단 저편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 … 이는 그들의 무겁게 멘 멍에와 그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꺾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음이니이다. …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 9:1~6).
위에서 줄친 부분을 자세히 읽어보면, 예루살렘 사람들에게서 멸시를 당하던 나사렛과 갈릴리인들을 연상케 하기에 족하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 하던 유대인들이 아니던가! 그러나 주 예수께서는 나사렛에서 사셨고, 갈릴리 해변가에서 오래 동안 천국복음을 증거하셨다. 수많은 이적과 기사를 직접 목격한 그들에게는 예수님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었다. 고아같이 버림을 당한 그들에게는 나사렛 예수가 곧 영존하시는 아버지였다! 이사야 선지는 이러한 정황을 주 예수께서 나시기 전 약 팔백년 전에 이미 예언한 것이다!
주 예수께서 우리의 아버지일 수 있다는 비유의 말씀이 주께서 드신 예증 곧 눅 15장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원망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 다니지 아니하느냐?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어느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도록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또 찾은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았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또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그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비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 …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 가니라. …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눅 15:1~24).
위에서 언급된 목자와 여인과 아버지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 이유는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라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왜 죄인을 영접하는가에 대한 설명으로 세 가지 비유를 드신 것이다. 주 예수께서는 죄인들 곧 잃은 양들을 찾으시는 목자와 같으시고, 잃은 돈을 찾는 여인과 같으시고, 탕자를 기다리는 아버지와 같으신 분이시다! 주 예수께서 우리에게는 아버지도 되시고, 형님도 되시고, 남편도 되시고, 목자도 되신다. 그러나 삼위 하나님 사이에서는 결코 아버지일 수 없고, 영원히 하나님 아버지의 독생자이시다!
2-5. 성육신 되신 예수의 제한성 나는 주님께 부르짖었다: 오 주 예수여. 나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럴 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그냥 그대로 제한받고 속박받으라. 보라, 나는 무한한 하나님이지만, 성육신되어 삼십년간 제한받았다. 나는 삼십년이 지난 뒤에는 네가 해방될 것이라고 약속할 수 있다(85-핵심, 70쪽).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그리스도는 바로 성육신되신 분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 분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성육신되어 계신다. 왜냐하면 내주하시는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서 기꺼이 제한받으시고 갇혀 계시기 때문이다(85-핵심, 70쪽).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그리스도는 바로 성육신되신 분이다 라는 명제는 옳지 않다. 왜냐하면 주 예수는 부활하셔서 승천하사 지금 하나님 우편에 계시기 때문이고, 우리 안에 內住하시는 분은 주 예수께서 보내주신 성령이기 때문이다. 주님은 우리 마음 속에 갇혀 계시는 분이 아니다. 성령의 내주에 관하여는 사도요한이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요일 3:24). 성령의 내주는 곧 주 예수께서 내주하시는 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성령의 내주로써 충분하기 때문에 주 예수께서 우리 속에 내주하실 필요가 없다. 그는 재림 때까지 하나님 아버지의 우편에 계신다는 것이 사도신경이다. 따라서 주 예수는 우리 안에서 갇혀 계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에 제한받으실까 염려할 필요는 없다.
2-6. 그리스도의 성결성 여부 그리스도께서 사람으로 오셨을 때, 그는 인성을 입었다. 그러나 이 인성은 거룩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의 성품과 똑같았기 때문이다. 오직 한가지 차이점은 우리의 성품에는 죄가 있었으나, 그의 성품에는 죄가 없었다. 죄가 없게 되는 것과 거룩하게 되는 것은 같지 않다. … 그의 육신은 죄있는 것도 아니었고, 거룩한 것도 아니었다. … 그러므로 인성을 입은 그리스도는 거룩하게 될 필요가 있었다. 이것은 그의 부활을 통해 완성되었다(85-영몸, 76쪽). 참으로 어이없는 주장이다. 그리스도의 성품이 우리와 같은 성정이라는 것은 일리 있는 말인 것처럼 들리나, 성경대로 바로 말한 것은 아니다. 주님은 그 모친 마리아의 몸 안에서 잉태되었으므로, 우리와 같은 죄있는 육신의 모양을 가진 것은 사실이다. 이것은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시키기 위함이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3~4). 여기서 죄 있는 육신의 모양이라는 것은 마리아의 육신 곧 우리의 육신과 같은 육신을 가졌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죄가 없었다. 왜냐하면, 죄의 좌소(座所) 곧 그 보금자리가 육신이 아니고, 그 마음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영혼은 마리아에게 성령으로 잉태될 때, 깨끗하게 지음받았으므로, 그에게는 죄가 없었다. 아담의 원죄도 그에게 적용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육신의 아버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억만 죄악이 넘어온 것은 속죄를 받아야 할 자기백성들의 죄악을 담당하셨기 때문이었다. 그는 세상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었다. 그는 십자가 위에서 마치 뱀처럼 저주를 받아 못박혀 죽으셨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요 3:14) 라고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셨고, 사도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3).
그리스도께서 사람으로 오셨을 때, 그는 인성을 입었다. 그러나 이 인성은 거룩하지 않았다.(85-영몸, 76쪽).
이것은 물론 옳은 주장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육신이 우리와 같았지만, 그는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그의 人性은 神性과 분리되질 않는다. 성경은 한결같이 증거하기를 그는 거룩한 분이라고 증거하고 있다:
아,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눅 4:34);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줄 믿고 알았삽나이다(요 6:69); 또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19);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치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행 2:27);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자를 부인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주기를 구하여(행 3:14);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동하여 하나님의 기름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스려(행 4:27);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 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롬 11:16);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히 2:11).
2-7. 성부와 성자가 아니라, 성령께서 내주하심 나아가서 아버지 하나님도 또한 그 영이시다(요 4:24). 그러므로 하나님의 세 인격은 모두 그 영이시다. 만일 아버지 하나님이 그 영이 아니라면, 어떻게 그 분이 우리 안에 오실 수 있으며, 어떻게 우리가 그 분을 접촉할 수 있는가? 더욱이, 만일 아들 하나님이 그 영이 아니라면, 어떻게 그 분이 우리 안에 오실 수 있으며, 어떻게 우리가 그 분을 체험할 수 있는가? 아버지와 아들이 바로 그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쉽게 하나님을 접촉할 수 있고, 그리스도를 체험할 수 있다(87-경륜, 15-16쪽).
영(靈)은 우리 안에 내주할 수 있다는 생각은 옳다. 그러나 삼위 하나님을 모두 같은 영으로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 하나님 아버지는 영이시지만, 우리 안에 들어오실 수 있는 영은 아니고, 오직 그에게서 나오시는 영 곧 성령이 우리 안에 내주하신다. 만약 성부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시면, 우리는 이미 죽어버린다. 어떻게 성부 하나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실 수 있는 것처럼 감히 생각할 수 있는가!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다. 이것은 성부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심을 전혀 모르는 무지에서 나온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하나님의 영광이 시내산에 임재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하셨다: 모세가 하나님을 맞으려고 백성을 거느리고 진에서 나오매, 그들이 산 기슭에 섰더니, 시내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심이라. 그 연기가 옹기점 연기 같이 떠오르고 온 산이 크게 진동하며, 나팔 소리가 점점 커질 때에 모세가 말한즉 하나님이 음성으로 대답하시더라. 여호와께서 시내산 곧 그 산꼭대기에 강림하시고 그리로 모세를 부르시니, 모세가 올라 가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려가서 백성을 신칙하라. 백성이 돌파하고 나 여호와께로 와서 보려고 하다가 많이 죽을까 하노라. 또 여호와께 가까이 하는 제사장들로 그 몸을 성결히 하게 하라. 나 여호와가 그들을 돌격할까 하노라(출 19:17~22).
성자 하나님께서도 우리 안에 들어오실 수 있는 분이 아니다. 그는 몸과 영혼이 있는 분이심과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사도요한은 밧모섬에서 주 예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고, 그 앞에 엎드려져 죽은 자같이 되었다: 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라고 하셨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2-8. 人性과 神性의 不可分離性 행 13:33에서는 왜 그가 부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했는가? … 그는 육신을 입었을 때, 그의 하나님 성분인 신성을 사람의 성분인 인성 안으로 가져왔다. 그리스도가 육신을 입고 부활하기 전에 땅에서는 하나님의 성분과 사람의 성분을 다 가진 사람이었다. 그의 하나님 성분은 하나님의 아들의 성분이었지만, 그의 사람의 성분은 하나님의 아들의 성분이 아니라 사람의 아들의 성분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인성이 아들의 명분으로 태어나기 위하여 그에게는 부활이 필요했다. 부활 이전에 그리스도는 그의 신성에 따르면 하나님의 아들이었으나, 그의 인성에 따르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었다. 이 인성은 하나님께로서 나야 했다. 그러므로 로마서 1장 4절에서는 그가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 고 말하고 있다. 다윗의 자손인 그리스도는 부활 안에서 성결의 영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이 된 사람으로 인정되었다. 이와 같이 하여 하나님의 독생자는 하나님의 맏아들이 되었다. 하나님의 독생자에게는 신성만 있고,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된 인성이 없었다. 그러나 부활 안에서 그는 신성과 인성을 다 지닌 하나님의 맏아들이 되었다(85-영몸, 73-74쪽). 위에서 줄친 부분은 모두 이상한 생각들이다: 그의 하나님 성분인 신성을 사람의 성분인 인성 안으로 가져왔다; 부활 이전에 그리스도는 그의 신성에 따르면 하나님의 아들이었으나, 그의 인성에 따르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었다; 로마서 1장 4절에서는 그가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 하나님의 독생자에게는 신성만 있고,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된 인성이 없었다. 그러나 부활 안에서 그는 신성과 인성을 다 지닌 하나님의 맏아들이 되었다.
또 다른 곳에서도 비슷한 맥락으로 말하고 있다: 두번째 성분은 성육신인데, 그것은 하나님의 신성과 인성의 연합이다. 성육신을 통하여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사람 속으로 모셔왔고, 하나님의 신성한 성분과 인성이 연합되게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는 하나님이 계실 뿐 아니라, 사람이 있다(87-경륜, 13쪽).
이 같은 사상은 人性과 神性을 분리시키는 이단사상이다. 우리는 兩性敎理 곧 칼세돈(Chalcedon) 교리를 중히 여겨야 한다: 人性과 神性은 서로 결합되었고, 연합된 것이 아니다. 성육신을 통하여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사람 속으로 모셔온 것이 아니고, 만세전부터 계시던 독생자께서 때가 찼을 때, 인성을 입으신 것이다. 이 성육신을 우리는 신성과 인성의 결합이라고 한다. 이 결합(結合)은 혼합(混合)된 것도 아니고, 분리(分離)된 것도 아니고, 분할(分割)된 것도 아니고, 신성과 인성은 각각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2-9. 계승설(successionism) 다음을 읽으면, 계승설을 연상케 한다: 경륜의 첫 단계에 따라 아버지는 자신을 아들 안에 넣으셨고, 아들은 자신 속에 일곱가지 요소(신성, 인성, 고난의 인생, 죽음의 효능, 부활의 능력, 승천의 초월하는 능력, 보좌에 앉으심)들을 지니셨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람 속에 들어오시기 위하여 우리에게는 또하나의 단계, 즉 마지막 세 번째의 단계가 필요하다. 처음 단계는 아버지께서 아들 안에서 몸을 이루신 것이고, 둘째 단계는 아들이 인성 안에서 성육신되심으로 일곱가지의 놀라운 성분을 포함하신 것이다. 세째 단계는 아버지와 아들이 이제 그 영 안에 계신 것이다. 아버지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아들 안에 있고, 아버지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요소들을 포함한 아들은 성령 안에 계신다(87-경륜, 14-15쪽).
성령이란 무엇인가? 성령은 진리의 영이다(요 15:26). 그러면 진리란 무엇인가? 진리라는 핼라어 의미는 실제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성령은 실제의 영, 즉 그리스도의 완전한 실제이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몸으로 나타나신 것처럼 그리스도는 성령의 놀라운 인격 안에서 실제가 되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떨어진 분이 아니고, 성령은 그리스도와 떨어진 분이 아니다. 그리스도는 나타난 하나님이요, 그 영은 실제가 되신 그리스도이다(87-경륜, 15쪽).
이제 주(主)는 그 영이시니(고후 3:17). 이 말씀은 성령이 그리스도와 떨어진 분이 아님을 증명한다. 주(主)는 그리스도 자신이요 또한 그 영이시다. 마지막 아담은 생명 주는 영이 되었나니(고전 15:45). 여기에서도 성경은 마지막 아담인 그리스도가 그 영임을 보여 주고 있다. 우리는 이 생명 주는 영이 성령임을 깨달아야 한다(87-경륜, 15쪽).
그러므로 삼일신의 세 인격은 하나님의 경륜의 과정 안에서 이어지는 세 단계가 된다. 이러한 세 단계가 없다면, 하나님의 성분은 사람 속에 공급될 수 없다(87-경륜, 11쪽).
삼일 하나님은 인성에 참여하기 위하여 성육신되셨다(요 1:14, 히 2:14). 성육신되신 후에 하나님은 성육신되기 이전과는 달라지셨다. 성육신 이전에 그 분은 다만 하나님이셨지만, 그러나 성육신되신 후에 그 분은 사람의 껍질 안에 계신 하나님이셨다. 베들레헴 어느 주막 말구유에 놓여진 한 아기가(눅 2:7) 전능하신 하나님이셨다(사 9:6). 그 당시 많은 유대인들은 오늘날 많은 유대 학자들처럼 구유에 놓인 작은 아기가 여호와 하나님이었음을 믿을 수 없었다(93-삼분, 54쪽).
그리스도는 생명 주는 영-그 영-이시다(고전 15:45이하, 고후 3:17). 그리스도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체현된 아들이실 뿐만 아니라, 부활 안에서 그 영이 되셨다. 그러므로 그 분은 그 영, 즉 공기같은 그리스도이다(93-삼분, 87쪽).
위에서 다음과 같은 말은 계승설이 아닐 수 없게 한다: 아버지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아들 안에 있고, 아버지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요소들을 포함한 아들은 성령 안에 계신다; 성령은 실제의 영, 즉 그리스도의 완전한 실제이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몸으로 나타나신 것처럼 그리스도는 성령의 놀라운 인격 안에서 실제가 되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몸으로 나타나신 것처럼 그리스도는 성령의 놀라운 인격 안에서 실제가 되었다; 세 인격은 하나님의 경륜의 과정 안에서 이어지는 세 단계가 된다; 성육신 이전에 그 분은 다만 하나님이셨지만, 그러나 성육신되신 후에 그 분은 사람의 껍질 안에 계신 하나님이셨다. 베들레헴 어느 주막 말구유에 놓여진 한 아기가(눅 2:7) 전능하신 하나님이셨다; 그리스도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체현된 아들이실 뿐만 아니라, 부활 안에서 그 영이 되셨다. … 그 분은 그 영, 즉 공기같은 그리스도이다.
교리사상(敎理史上) 계승설은 사벨리안 이단 곧 양태론적 단일신론이었다.
2-10. 성부고난설? 아버지의 모든 충만은 아들 안에 거하시며(골 1:19; 2:9), 아들로 나타나셨다(요 1:18). 모든 것의 무한량한 공급이 되시는 아버지는 아들안에서 몸을 입고 나타나셨다(요 1:1).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하나님의 형상인 그리스도 안에 나타나신 바 되었다(골 1:15). 그러므로 아들과 아버지는 하나요(요 10:30), 아들은 아버지라고 불리운다(사 9:6). 전에는 사람이 아버지를 접촉할 수 없었다. 그 분은 오로지 하나님이었고, 그 분의 성격은 오로지 하나님에 속한 것이었다. 아버지 안에 하나님과 사람을 잇는 다리가 없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은 자신을 아들 안에 나타내셨고, 인성안에서 성육신 되셨다. 아버지께서는 아들 안에서 자신의 신성(神性)을 인성과 연합하기를 기뻐하셨다. 사람이 가까이할 수 없었던 아버지가 이제 성육신을 통하여 가까이할 수 있는 분이 되셨다. …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람 안에 공급하기 위한 첫 단계는 성육신 되심으로 자신을 사람으로 나타내는 것이다(87-경륜, 12쪽).
더구나 고후 3:17에는 이제 주는 그 영이시니 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그 영은 성령임에 틀림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므로 아들은 아버지라고 불리워지고, 주님이신 그 아들은 또한 그 영이시다. 이것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하나임을 의미한다(87-경륜, 54쪽).
위에서 아버지는 아들안에서 몸을 입고 나타나셨다; 아들은 아버지라고 불리운다; 하나님은 … 인성안에서 성육신 되셨다. … 사람이 가까이할 수 없었던 아버지가 이제 성육신을 통하여 가까이할 수 있는 분이 되셨다; 아들은 아버지라고 불리워지고, 주님이신 그 아들은 또한 그 영이시다 등등, 아들은 아버지라고 불리워진다니, 주후 190년경의 노에투스(Noetus)나, 220년경의 로마의 감독(현 교황) 프락세아스(Praxeas)의 성부고난설과 너무나 비슷하다. 이들은 물론 이단자들이었고, 아들-아버지(휘오-파토르) 라는 용어까지 만들어 낸 것과도 서로 비슷하다. 주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못박혀 죽으실 때, 자기 자신을 향하여,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고 하신 것으로 되니, 보통으로 웃기는 사람들이 아니다.
더욱이, 고후 3:17에서 이제 주는 그 영이시니 라는 말씀은 주님이 성령이 되셨다는 말씀은 결코 아니다. 그 다음에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라고 함을 보아 주님이 계시고, 그의 영이신 성령이 계시는데, 주의 영이 계시는 곳에는 자유함이 있다는 것이다. 만약 주님이 성령으로 변했다면, 곧 주의 영이라는 말씀을 할 필요가 없고, 그냥 성령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다고만 하면 되는 것이다. 주 예수께서 떡을 가지시고 이것은 내 몸이다 라고 하셨을 때, 자기 자신이 떡으로 변한 것이 아닌 것처럼, 주는 영이라고 해서 주님이 성령으로 변한 것이 아니다. 일찍 죽임을 당한 어린 양에게 일곱 눈이 있다 라고 하는 계 5:6의 말씀처럼, 어린 양에게 성령이 풍성하게 넘치므로, 주는 영 곧 성령이 한량없이 넘치는 분이시고, 이 어린 양의 일곱 영 곧 주의 영이 계시는 곳에서는 자유함이 있다는 것이다.
III. 단일신론(單一神論, monarch- ianism) 다음의 사상은 양태설(modalism)이 아닐 수 없다. 3-1. 양태설: 세 인격으로 나타난 한 분 하나님
하나님이 사람 속에 넣어 주시는 것은 영이다. 그러나 우리는 한 하나님이 이 역사를 어떻게 하시는지를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삼일성에 의해 이 역사를 하신다. 삼일(三一) 하나님 곧 아버지-아들-성령이 바로 하나님의 경륜의 중심이다. 과거 수세기동안 기독교에는 삼일성(Trinity)에 대한 많은 이론들이 있었다. …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서로 다른 세 하나님이 아니라, 세 인격으로 나타난 한 분의 하나님이시다(87-경륜, 10-11쪽). 사랑과 은혜와 교통은 세 단계에 있는 한 가지 성분이다. … 이와 같이 하나님, 그리스도, 성령도 세 인격 안에 나타난 한 분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근본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표현이요, 성령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사람 안에 전해주는 것이다(87-경륜, 11쪽).
3-2.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한 人格的 內住
다음 구절들을 주의해 보자.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 만유 안에 계시도다(엡 4:6).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줄을 알지 못하느냐? …(고후 13:5). … 그의 영이 너희 안에 거히시면…(롬 8:11). 이 세 구절의 말씀은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과 그 영이 우리 안에 계심을 계시하여 준다. 그러면 몇 가지 인격이 우리 안에 있는가? 셋인가, 하나인가? 우리는 서로 다른 세 인격이 우리 안에 있다고 말할 수도 없다. 우리는 다만 삼일(三一)이 우리 안에 있다고 말해야 한다. 하나님의 세 인격은 세 영들이 아닌 하나의 영이다. … 세 인격이 한 영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아버지도 있고, 아들도 있고, 성령도 있다(87-경륜, 16쪽). 3-3. 유일한 하나님
하나님이 유일한 하나님이라는 것은 성경의 여러 곳에서 분명히 알 수 있다. 고린도전서 8:4절, 6절과 디모데전서 2장5절에서 이 말을 하고 있다. 그러나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을 가리킨 대명사는 나가 아니라, 복수인 우리이다(창 1:26~27). 그러나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이 한 분 이상이라고 말한다면, 여러분은 이단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을 유일한 분이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온 우주 가운데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다. 그러면 하나님이 유일한 하나님이라면 왜 복수 대명사가 사용되어야 하는가?(87-경륜, 52-53쪽).
창 1:1의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에서 하나님(엘로힘)은 복수이다. 그러나 그 동사 창조하시니라는 단수이다. … 그렇다면, 내가 묻겠다: 하나님은 한 분인가, 세분인가?(87-경륜, 53쪽). 마 28:19에는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제자를 삼아 …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 구절은 그들이 하나님의 한 인격의 이름으로 세례를 준다고 말하지 않는다. 또한 이름들로 라고 말하지도 않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단수) 라고 말하고 있다(87-경륜, 54-55쪽). 3-4. 수박과 같은 하나님: 온전한 수박(父) - 조각난 수박(子) - 수박의 즙(성령)
수박을 여러 쪽으로 잘라서 먹으면 위로 들어가 즙이 된다. 그러면 이것들은 각각 다른 세 가지인가, 한 가지인가? 나는 이것이야말로 삼일성(三一性)에 대한 가장 좋은 설명임을 확신한다!(87-경륜, 55쪽). 아버지는 온전한 수박으로 설명된다. 아들은 조각난 수박으로, 성령은 수박의 즙으로 설명되어진다. 이제 여러분은 요점을 알 수 있다. 아버지는 아버지일 뿐 아니라 아들도 된다. 그리고 아들은 아들일 뿐만 아니라 성령이 되기도 한다. 바꿔 말하면 이 수박은 먹기 위한 조각도 되며, 우리 안에 있는 즙도 된다. 그 수박은 먹혀진 후 없어진다. 본래 그 수박은 식탁 위에 있었지만, 그것을 먹은 후에 그 수박은 온 가족 속에 있는 것이다(87-경륜, 55-56쪽). 3-5. 근본(父) - 체현(子) - 실제화(성령)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체현이며, 그 영은 그리스도의 실제화이다. 그리스도는 그 영으로 실제화된다. … 성령은 또한 과정을 거치신 삼일 하나님의 체현이신 그리스도의 실제화이다(요 14:16~20)(93-삼분, 89쪽). 근본이신 아버지는 아들 안에서 체현되시고, 아버지의 체현이신 아들은 그 영으로서 실제화되신다. 그러므로 삼일 하나님의 셋 모두는 그 영 안에 계신다. 우리가 그 영 안에서 혹은 그 영 안으로 침례받았을 때, 삼일 하나님 안으로 침례받았다. 그 영은 삼일 하나님의 최종완성이 되었다(90-그 영, 11쪽). 하나님은 근본이시요, 그리스도는 근본의 체현이시며, 이 그리스도는 그 영으로서 실제화되신다. 그 영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도달하심이고, 하나님의 체현의 실제화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체현되시고, 그리스도는 그 영으로서 실제화되신다. 그 영은 그리스도의 실제화이고, 그리스도는 모든 것의 근본이신 바로 그 하나님의 체현이시다(90-그 영, 8쪽). 3-7. 최종 완결된 그 영
그 영은 또한 과정을 거친 삼일 하나님의 최종 완성이신 완결된 그 영이다(마 28:19; 계 22:17). 마 28:19에서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언급된다. 아버지는 근원이며, 아들은 근원으로부터 흘러나온 과정이며, 그 영은 우리에게 도달하시는 아버지와 아들의 최종완성이다(93-삼분, 90쪽). 그러나 성부는 신성의 근원이며, 성자는 성부에게서 홀로 영원히 나셨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영원히 나오신다. 그 영은 최종 완결된 것이 아니고, 항상 성부와 성자에게서 영원히 나오시는 영으로서 처음부터 완전한 영이시다. 영원한 나오심(pro- cessio aeterna)이라는 신학적 용어가 있다는 그 자체가 교부시대부터 정립된 교리임을 알 수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조에도 이것이 명시되어 있다: The Holy Spirit is eter- nally proceeding from the Father and the Son). 3-8. 보혜사이신 주님 자신의 또다른 형태의 보혜사 성령
주님은 요 14:16~17에서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실제)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 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이 또 다른 보혜사를 언급하셨을 때, 이 보혜사가 또다른 형태 안에 계신 그 분 자신임을 말씀하고 계셨다. 그 분은 육신 안에서 보혜사이셨지만, 부활 안에서 그 영이 되셔서 또다른 보혜사가 되셨다. 이 영이 실제의 영이신데, 그리스도의 실제이다. 그 분이 실제의 그리스도, 실제의 예수시다(90-그 영, 21쪽). 3-9. 세 부분으로 구성된 한 인격의 하나님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을 한 분 하나님으로서 경배한다(90-그 영, 22쪽);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분리된 세 인격이거나 세 하나님이 아니라, 그들은 한 하나님, 한 실제, 한 인격이다(93-삼분, 52쪽);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서로 다른 세 이름이 아니라, 신성한 삼일성의 유일한 이름이다. 이러한 이름은 복합적인 칭호이다. 성경 안에서 아버지 하나님이나, 주 예수나, 혹은 주 영(고후 3:17)과 같은 많은 신성한 칭호들이 복합적인 칭호이다. 마 28:19에 있는 복합적인 이름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라는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93-삼분, 52쪽). IV. 결론
1951년부터 54년까지에 전파한 윗트니스 리의 설교의 내용이 처음으로 알려졌을 때(54-영봉, 서문)의 내용과 약 10년 후에 출판된 글(1963-64)과 30년후의 글(1994년)을 비교하면서 그의 생각에 어떠한 변화가 있었는가를 살핌으로써 결론을 내리고자 한다. 윗트니스 리는 처음부터 주께서 부활하심으로 그 영 곧 성령이 되었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그 영이 되심으로써 그들 안으로 들어가셨다(54-영봉, 49쪽). 그 영이 되었다 하면서도 그리스도의 승천을 인정한다: 비록 그 분이 나중에 하늘로 승천하셨지만, 그 분은 여전히 제자들 안에 내주하면서 그들과 함께 하는 그 영이셨고, 또 이날까지 그러하시고, 다시 오실 때까지도 그러하실 것이다. 오늘날 그 분은 하늘에 앉아 계시지만, 동시에 이 땅에서 그 영으로서 영 안에서 믿음으로 그 분을 접촉하는 모든 자들 안으로 들어가셔서 그들과 함께 계신다(54-영봉, 50-51쪽).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승천하신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그 영 곧 성령이 되신 것을 강조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그 영이 되심으로써 그들 안으로 들어가셨다(54-영봉, 49쪽). 오늘날 그 분은 하늘에 앉아 계시지만, 동시에 이 땅에서 그 영으로서 … 제자들 속으로 들어가신다(54-영봉, 50-51쪽).
1963년부터 64년에 출판된 책에서는 양태론의 증거가 완연히 나타난다. 주님은 부활 후 그 영이 되셨다는 것이고 승천에 관한 말은 없다: 그 분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육신 안에서가 아닌 그 영으로서 그들에게 돌아오셨다. … 지금 주님은 그 영이시므로 우리 안에 거하실 수 있다. …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후에 그 분은 그 영이 되셨다. 오늘날 바로 이 영이 우리 안에 있다(63-누림, 33쪽). 요 20:21~22에 근거하여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 하신 것은 저희 안으로 숨을 내쉼으로 성령이신 그 분 자신이 저희 안으로 들어오셨다. … 그 호흡은 바로 그리스도 자신이었다(64-신약1, 92-93쪽). 요 14:17~18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또 다른 보혜사이신 그 영은 다름 아닌 또 다른 모습(형태)의 그리스도 자신이심을 이해할 수 있다. … 그 분의 죽음과 부활 이후 그 분은 영으로 변화되셨다. 우리는 이것을 물과 수증기로 예를 들 수 있다. 물이 수증기가 되더라도, 물의 본질은 여전히 동일하다. 그것은 형태만 다를 뿐이다. … 그 분은 또 다른 형태로 변화되고, 변모되셔야 했다(64-신약1, 95-96쪽). 그 분은 죽고 부활하시고 나서, 그 분은 그 영으로 변화되셨다. 그리고 그 때에 그 분은 제자들 안으로 들어가실 수 있었다(64-신약1, 98쪽).
이렇게 말함으로써 하나님은 한 분뿐이라는 것, 아버지가 아들이고, 아들이 그 영이라는 것은 양태론적 단일신론이 아닐 수 없다: 죽음과 부활을 통과하심으로써 그 분의 인성은 변화되어 그 분의 신성 안으로 이끌려졌다(64-신약1, 100쪽). 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은 셋이시다. 그러면 세분이 우리 안에 계시는가? 아니면 한 분이 우리 안에 계시는가? 우리 안에 한 분이 계시다는 것은 아버지가 아들이시오, 아들이 그 영이시라는 것을 가리킨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우리 안에 세분이 계셔야 한다(64-신약2, 175쪽).
결국 하나님은 한 분뿐이라는 것이다. 그는 또 성경보다도 체험을 강조한다: 다시금 이것은 우리가 신성한 삼일성을 우리의 체험에 의해서만 깨닫게 될 수 있음을 예시해 준다. … 실제적으로, 우리의 체험 안에서, 세분은 하나이시다(64-신약2, 175쪽).
그러나 윗트니스 리의 생각은 순식간에 또 바뀌어 세 분 모두가 우리 영 안에 계신다고 한다: 오늘날 세 분 모두가 우리 영 안에 계신다. 우리는 세 분이 분리되어 하나가 아니라는 것을 믿지 않는다(64-신약2, 176쪽).
그러면서도 윗트니스 리에게 하나님은 세 분일 수는 없으므로, 그리스도는 하나님 자신이시다 라고 담대하게 말한다(64-신약2, 234쪽). 이와 같이 그는 끝까지 철저하게 단일신을 고집한다. 부활 후에 숨으로 내쉰 호흡이 바로 그리스도 자신이라고 한 것은 그 양태 곧 변모의 과정까지 세심하게 변증한 것이다. 주님께서 제자들 안으로 성령을 호흡해 내셨는데, 그 호흡은 바로 그리스도 자신이었다(64-신약1, 92-93쪽).
보혜사는 변형된 주님이시다 라는 생각은 양태론이 아닐 수 없다: 요14:17-18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또 다른 보혜사이신 그 영은 다름 아닌 또 다른 모습(형태)의 그리스도 자신이다. 그 분의 죽음과 부활 이후 그 분은 영으로 변화되셨다. 우리는 이것을 물과 수증기로 예를 들 수 있다. 물이 수증기가 되더라도, 물의 본질은 여전히 동일하다. 그것은 형태만 다를 뿐이다. 그 분은 또 다른 형태로 변화되고, 변모되셔야 했다(64-신약1, 95-96쪽). 그 분은 죽고 부활하시고 나서, 그 분은 그 영으로 변화되셨다(64-신약1, 98쪽). 주님은 죽고 부활하심으로써 그 분은 육신에서 놀라운 인격이신 그 영으로 변화되셨다(고전 15:45下). 우리 안에 한 분이 계시다는 것은 아버지가 아들이시오, 아들이 그 영이시라는 것을 가리킨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우리 안에 세분이 계셔야 한다. 다시금 이것은 우리가 신성한 삼일성을 우리의 체험에 의해서만 깨닫게 될 수 있음을 예시해 준다. 실제적으로, 우리의 체험 안에서, 세분은 하나이시다(64-신약2, 175쪽).
결국 윗트니스 리에게 그리스도는 하나님 자신이시다(64-신약2, 234쪽).
90세에 쓰여진 글에도 변함이 없다: 하나님의 경륜과 하나님-사람의 합당한 삶(Gods Economy and the proper Livng of a God-Man)은 1994년 10월 18일부터 21일에 켈리포니아 아나하임에서 대만, 홍콩, 말레이시아로부터 온 장로들과 가진 교제에서 윗트니스 리가 준 메시지이다: 먼저 하나님이 육신이 되셨다. 둘째로, 육신 안에 계신 이 분은 생명 주는 영이 되셨다(94-경륜, 14쪽). 하나님은 셋이 아니다. 그 분은 하나이면서 셋인 분이시다. 그 셋의 최종완결이 누구에게 있는가? 그것은 개시(開始)인 아버지에게 있지 않다. 또 과정인 아들에게도 있지 않다. 삼일 하나님의 최종완결은 그 영에 있다. 그 영은 삼일 하나님의 최종완결이다(94-경륜, 26쪽).
더욱이, 그리스도가 생명 주는 영이 되심은 엄청난 되심이라는 주장에는 아연실색치 않을 수 없다: 그리스도가 생명 주는 영이 되심은 엄청난 되심이다, 하나님의 영은 성육신, 인생, 죽음, 부활의 과정을 통하여 최종 완결된 영이 되셨다. … 되다 라는 단어는 엄청난 것을 포함한다. … 오늘날 기독교 안에서 이 문제를 본 사람은 극소수이다. 오히려 어떤이들은 고전 15장45절 하반절이 말하는 마지막 아담은 생명 주는 영이 되었나니 라는 말씀을 온전히 믿지 않는다. … 오늘날 생명 주는 영은 최종 완결된 영이다(94-경륜, 29쪽). 고후 3:17이 말하는 바, 주는 그 영이시니 주님이 그 영이 되어서 우리 안에 계시므로 18절의 말씀처럼 우리는 날마다 변화되고 있다(94-경륜, 30쪽). 하나님은 하나이면서 셋--아버지, 아들, 영--인 분이시다. … 이 영은 곧 부활 안에서 변형되신 그리스도가 삼일 하나님의 최종완결이시다. 교회가 하락(下落)할 때, 이 최종 완결된 영은 일곱 영이 되었다(94-경륜, 33, 40쪽).
이로써 우리는 윗트니스 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단일신 사상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원인은 성경을 오해한 데서 비롯된다. 고전 8:4에 하나님은 한 분뿐이라 한다. 이 말씀은 6절과 연결시켜야 한다. 원어 헤이스를 우리말 성경에 한 이라고 한 것은 잘못된 번역이다. 4절에서와 같이 한 분 하나님으로 하면 명백해진다. 그 한 분 하나님은 곧 아버지라는 것이다(고전 8:6).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한 분뿐이시다. 아들이 한 분이시고, 성령이 한 분이시다(엡 4:4~6). 따라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세 분이시지만, 한 하나님이시다. 이 세 분의 권능과 지혜와 지존하심이 영원하시며, 무한하시며, 불변하시기 때문에 한 하나님이시다. 삼위란 세 위격(位格, three persons) 곧 세 분이라는 뜻이고, 일체(一體)란 한 몸이 아니고, 하나 라는 뜻이다(참고: 요 10:3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요 1:1~3의 말씀 곧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를 바로 번역하고, 3절을 능동문으로 고치면, 다음과 같이 되어 보다 명백해진다: 태초에 그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그 하나님을 향하여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그 하나님을 향하여 계셨고, 그 하나님께서 그 말씀(성자)이 없이는 만물을 지은 것이 하나도 없었느니라. 여기서 그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이시고, 그 말씀은 성자 하나님이시라는 것이 명백히 드러난다. 이 말씀이신 하나님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하나님 아버지가 육신이 되지 아니하셨다는 것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에도 분명히 드러나지 않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자신이 육신이 되셨다 라고 우기니, 도대체 어떠한 심장인가! |
출처 : 한국이단문제연구소
글쓴이 : 장충성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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