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

[스크랩] 나는 어떻게 설교하는가?

수호천사1 2019. 2. 18. 10:30

나는 어떻게 설교하는가?


 구약성경을 연구하고 가르칠 책임을 맡은 사람으로서 설교를 어떻게 준비하여 어떻게 하는가 하는 문제는 늘 저를 사로잡고 있는 중요한 문제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먼저 제가 설교를 무엇이라 생각하는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런 다음, 본문을 정하여 설교 원고를 만들어 설교할 때까지 제가 어떻게 하는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렇게 준비해서 설교할 그 시간과 설교한 뒤에 제게 떠오르는 생각과 제가 하게 되는 경험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설교란 무엇인가? 설교자는 누구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 사람 앞에서, 특히 예배 시간에 전달할 때 이를 보통 설교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볼 때, 한[101/102]글학회에서 1992년에 펴낸 우리말 큰사전에서 설교(設敎)라는 낱말의 뜻을 그냥 '종교의 교의를 설명함'이라고만 풀이한 것은 만족스럽지 못합니다. 
설교는 분명히 내 뜻을 전하는 연설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오늘 우리 시대에 맞게 풀어서 쉽게 알려주는 연설형식의 말이기에, 설교자는 늘 먼저 설교자를 통하여 교우들(과 때로는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지 귀 기울여 들어야 합니다. 이 점에서 설교자는 구약성경의 예언자와 비슷합니다. 예언자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아'[預言] 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리하여, 설교자는 청중들에게 말하는 사람이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점은 설교의 전 과정을 통해서 한 시도 잊어서는 안 될 중요한 원칙입니다.
또한 설교가 궁극적으로 겨냥하는 바는 청중들로 하여금 성경에 대한 넓은 지식을 얻고 기독교에 대해 깊이 이해하도록 하려는데 있다기보다는 청중들의 삶이 달라지고 세상이 달라지도록 하여 마침내는 하나님의 온전한 구원이 개인과 온 누리에 이루어지도록 하는 데 있다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설교자는 하나님께서 사람들과 온누리를 움직이시고 살리시는데 쓰시는 인격적인 통로라 할 수 있습니다. 인격적인 통로라 함은 설교자 개인이 지닌 품성나 재질과 여러 가지 상황이 최대로 고려될 수 있음을 뜻합니다. 

1. 본문 정하기

설교 본문을 정할 때 먼저 생각하는 것은 이 설교를 들을 사람들이 어떠한 사람들인가 하는 점입니다. 그들의 나이, 성별, 가정환경, 교우관계, 직업, 사회 경력과 신앙의 경력, 학력, 사회적 신분과 지위 같은 일반적[102/103]인 상황을 생각할 뿐만 아니라, 요즈음 그들이 겪고 있는 특수한 상황도 생각합니다. 여기에는 또한 최근 사회적으로나 국가적으로나 문제가 되고 있는 바들도 함께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하면서, 이러저러한 상황에 있는 청중들에게 우리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실지를 하나님께 여쭈어 보는 가운데 설교본문을 정합니다. 물론 설교자 나름대로 하고 싶은 말과 그것을 뒷받침하기에 좋은 성경구절들을 머리에 떠올릴 수 있습니다만, 그런 본문들이 있더라도 일단은 덮어놓고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봅니다.
성경의 어떤 부분이 설교 본문으로 좋겠다고 일단 결정하게 되면, 될 수 있는 대로 그 범위가 너무 넓어지지 않도록, 분량이 지나치게 많아지지 않도록 앞뒤 글의 흐름을 잘 살펴 본문의 범위를 정합니다. 이렇게 할 때, 설교자의 마음대로 성경 어느 부분 가운데서 본문을 몇 절로 정하지 말고, 본문 자체의 흐름을 깨뜨리지 않도록 조심합니다. 제 경험으로는 본문의 분량이 열 절을 넘어가면, 설교의 촛점이 흐려질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 같습니다.

2. 본문 읽기

적당한 범위와 분량으로 설교본문을 정했으면, 그 다음에는 이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직접 설교자에게 말씀해 주실 것을 기도드리는 마음으로 본문을 열심히, 간절한 마음으로 읽습니다. 이미 그 전에 그 본문을 여러 번 보았기에 그 본문의 뜻을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어느 부분이든 읽으면 읽을 때마다 그 뜻이 새롭고 전에 깨닫지 못한 바를 깨닫게 되는 책이 아닙니까? 그런 만큼, 칼 바르트가 로마서 주석을 쓸 때 고백했던 바처럼 '마치 그 본문을 처음 읽는 것처럼' 한 자 한 자 손으로 짚어 가면서 또박또박 정성스레 읽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본문을 한글 성경으로라도 열 번 이상 - 많이 읽을수록 좋습니다 - 읽어서 굳이 내가 본문을 해석하려 하지 않는데도 본문이 스스로 나에게 무엇인가를 말할 수 있도록 합니다. 아무리 시간에 쫓긴다 하더[103/104]라도 본문을 너댓 번은 읽습니다.
이렇게 읽는 가운데 느낀 점, 깨달은 점, 머리에 떠오른 점을 종이에 적어봅니다.


3. 본문의 뜻 이해하기

아래 각 단계는 대부분의 경우 시간적으로 겹쳐서 이루어지는 작업이기에 편의상 나누어본 것이지, 엄격히 서로 구분되는 것은 아닙니다.
또 이 전 과정을 통하여 설교자는 한글 개역성경 뿐만 아니라, 각자의 형편에 따라 다른 한글성경들(공동번역성경, 표준새번역성경, 현대어성경, 신약만 있는 경우로는 새번역성경)과 외국어성경들과 원어성경들을 함께 볼수록 더 좋습니다.

(1) 다시 본문을 찬찬히 읽으면서, 본문의 짜임새와 흐름을 자세히 살펴봅니다. 
이 단계에서는 본문 한 문장 한 문장을 정확히 관찰합니다. 문장의 서술문인지, 명령문인지, 의문문인지, 인칭대명사('나', '너', '그' 등)가 앞의 어떤 명사를 가리키는 것인지 등을 낱낱이 살펴봅니다. 
명령문이라면 명령의 주체는 누구이며 명령을 받는 대상은 누구이며 명령의 내용은 무엇인지, 의문문이라면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묻는 것인지, 아니면 그냥 자신이 말하고 싶은 바를 강조하기 위한 수사의문문인지, 그 의문문에 대한 답이 있는지도 알아봅니다.
또 문장의 주어가 누구이며 술어가 어떠하며 한 문장에서 다음 문장으로 넘어갈 때 그 이음새가 어떠한지, 주어가 어떻게 바뀌었는지, 문장종류가 달라졌는지도 살펴봅니다.
본문의 흐름에 막힘이 없는지, 글의 흐름을 쉽게 하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그 까닭은 무엇일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봅니다.
본문의 짜임새는 될 수 있는 대로 표로 만들어 보면 좋습니다.

(2) 본문에서 자주 되풀이되는 낱말이 어떤 것인지, 낱말은 다르더라도[104/105] 같은 개념을 드러내는 것들이 있는지도 알아봅니다. 
그런 낱말들이나 개념들이 본문이 들어 있는 책, 구약성경, 신약성경에서는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 관주 성경이나 성구사전이나 성서어휘사전이나 성서백과사전에서 찾아봅니다. 그리하여 그것들이 본문에서 어떤 특별한 뜻을 지니는지 생각해 봅니다.

(3) 본문을 통틀어 보았을 때, 본문의 문학 형식이 어떠한지, 곧 산문인지, 시문인지, 산문이라면 어떠한 종류의 산문이며, 시문이라면 어떠한 종류의 시문인지도 살펴봅니다. 본문이 어떤 형식을 취하고 있다면, 그 그런 표현형식을 취하는지 생각해 봅니다.

(4) 본문에서 본문의 시대적인 배경, 지리적인 상황, 본문의 저자에 대해서 직접 말하거나 암시하는 바가 있는지 찾아봅니다. 그러려면 본문에 사람이름이나 곳 이름이나 때에 관한 말이 있으면, 그에 대한 내용을 관주 성경이나, 성구 사전이나, 성서백과사전 같은 참고서에서 찾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5) 본문이 앞 뒤 단락과 어떻게 이어지는지를 알아봅니다. 뿐만 아니라, 본문이 들어 있는 책, 더 나아가서는 구약 또는 신약성경 전체에서 본문이 어떤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를 알아봅니다.

(6) 구약성경에서 본문을 정했을 경우는 그 본문이 인용되었거나 관련되는 내용의 신약본문이 있는지, 신약성경에서 본문을 정했을 경우는 그 본문과 관련되는 내용의 구약본문이 있는지를 생각해 봅니다.

(7) 앞에서 알아 본 모든 것을 종합하여 본문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를 전체적으로 정리해 봅니다. 그리고 본문에서 중요한 내용들이 무엇인지를 뽑아 내어 간추려 봅니다.[105/106]

(8) 그렇게 한 다음 이제까지 본문의 뜻을 이해하기 위해 한 작업의 열매로 나온 것과 '본문 읽기'에서 적어 두었던 바를 견주어 보아서, 그 둘이 얼마나 서로 맞아 들어가며 어떤 점에서 다른지를 확인합니다. 
이 단계에서 본디 설교자가 본문에서 뽑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바와는 전혀 다른 뜻을 본문에서 이해하게 되는 수가 더러 있습니다. 그리하여, 어떤 경우는 아예 다른 본문을 다시 정해야 하기도 합니다. 달리는 본디 기대했던 바 보다 훨씬 더 귀중한 가르침을 깨닫게 되어, 우선 설교자 자신이 큰 감동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4. 본문을 청중의 상황에 적용하기

앞에서 한 작업의 결과를 밑바탕으로 설교 원고를 만들자면, 다시 한번 청중의 상황을 자세히 기억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하면서, 앞서 밝혀진 본문의 내용 가운데서 청중에게 직접적으로 적용될만한 것들이 어떤 것들인지를 찾아봅니다. 그렇게 찾은 것을 모두 설교 원고에 담기가 어려운 경우에는 그 가운데서 몇 가지를 뽑습니다.
청중의 상황을 잘 알기 위해서는 평소에 청중의 삶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지고 그들과 여러가지로 접촉하면서 그들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드리는 일이 끊임없이 있어야 합니다.


5. 설교 원고 쓰기

(1) 설교는 글말[文語]이 아니라 입말[口語]이기에 설교 원고는 될 수 있는 대로 글말투[文語體]가 아닌 입말투[口語體]로 씁니다. 

그러니까, 남이 하는 말을 받아 적듯이 내가 할 말을 적습니다. 
입말투로 글을 쓴다 함은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점을 뜻합니다. 
- 한 문장이 너무 길어지지 않도록 합니다. 
- 귀로 들어서 얼른 이해하기 어려운 낱말들이나 설교자가 뜻하는 바와는 다른 식으로 들릴 수 있는 낱말들은 피합니다.[106/107] 
- 우리 나날의 삶에서 보통 쓰이는 낱말들을 써서 문장을 만듭니다.
- 서술문, 명령문, 수사의문문 등을 골고루 섞어서 말이 메마르고 건조하지 않도록 합니다.
- 무엇을 거듭 말하면서 그것을 강조하고 싶다면, 꼭 필요한 경우를 빼고는, 똑같은 낱말을 자꾸 쓰기보다는 비슷한 뜻을 지닌 낱말들을 나란히 씁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또한 교회에서 너무 자주 오래 써 왔기 때문에 사실 그것이 지니는 귀중한 뜻이 아무런 영향을 끼침이 없이 듣는 사람들의 귀를 그냥 스쳐 지나가는 낱말이나 개념을 오늘에 맞도록 새롭게 표현하도록 애쓸 필요가 있  습니다.

(2) 전하려는 바가 듣는 이들의 마음에 쉽게 와 닿도록 하려고 어떤 보기를 들 경우에, 될 수 있으면 내가 직접 보거나 듣거나 읽거나 겪은 바를 중심으로 하면 좋습니다. 예화집이나 남한테 들은 말 가운데서 뽑아 쓰는 보기는 그 효과가 이미 상당히 떨어집니다. 또, 서양문화를 배경으로 한 예화보다는 우리 문화 전통에서 찾은 예화가 더 낫습니다.

(3) 설교원고의 짜임새는 여러 가지로 할 수 있습니다만, 전통적으로 하는 방식인 서론, 본론, 결론의 틀을 따른다면 다음과 같이 해 보는 것도 괜찮을 것입니다.
- 서론: 듣는 이들의 삶에 아주 절실한 문제를 첫머리에 꺼내면, 쉽게 그들의 관심을 집중시킵니다. 설교본문을 택한 까닭이나 과정을 간단히 밝힙니다.  설교제목을 어떻게 뽑았는지, 설교의 짜임새가 어떠할지를 알립니다.
설교제목은 될 수 있는 대로 본문 가운데 알맹이가 되는 낱말 몇을 뽑아 그것을 그대로 제목으로 삼아, 그 몇 마디 낱말이 계속해서 청중의 귀에 남아 있도록 하면 좋습니다. 이는 한편으로 설교의 내용을 쉽게 기억하게 할 수도 있고, 다른 한편으로 그렇게 제목으로 삼은 성경의 표현을 두고두고 되새겨 볼 수도 있게 하기 때문입니다.
- 본론: 설교본문의 내용을 간략히 풀어서 말한 다음, 본문에서 오늘 우리의 상황에 맞는 가르침을 두서너 가지 찾아 하나씩 청중에게 적용하여 말합니다.
- 결론: 설교제목을 다시 한번 상기시키면서, 본론에서 몇 가지로 자세히 말한 바를 몇 문장으로 간추립니다.[107/108] 

흔히들 본론에서 설교본문의 내용 소개는 청중들이 이미 다 잘 알고 있는 것으로 전제하고, 설교자가 본문에서 뽑은 가르침만 말합니다. 
그렇지만, 이는 다음 두 가지 점에서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 오늘 교인들은 설교자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성경을 잘 알고 있지 못합니다. 그리하여 우선 본문의 뜻을 풀이하기에 앞서서 본문에 도대체 무엇이 어떻게 적혀 있는가 하는 것부터 똑똑히 알려줄 필요가 있습니다. 
둘째, 설교자가 본문을 밑바탕으로 하여 말하고 싶은 바만 말하다 보면, 본문 스스로 청중들에게 말할 기회를 잃게 되기 쉽습니다. 설교자가 아무리 양심적으로 열심히 잘 준비하였다 하더라도, 그것이 성경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청중들에게 말씀하시려는 바와 반드시 같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의 내용을 그대로 말하는 가운데, 청중은 나중에 설교자가 말하는 않은 다른 가르침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바꾸어 말씀드리면, 본문이 설교보다 더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설교자가 혹시 놓친 귀중한 가르침도 본문의 내용을 그대로 알려주는 가운데 하나님 몸소 청중들에게 말씀하실 수 있도록 그런 틈을, 자리를 남겨두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본문 내용 소개를 너무 길게 하면, 도대체 설교자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알기 힘들어질 수도 있습니다.
또한 본론에서 설교자가 주장할 몇 가지도 보통은 매우 원칙적인 내용이 됩니다만, 그럴 경우 반드시 그러한 원칙을 삶에 적용할 수 있는 구체적인 보기를 하나씩 드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하면, 교인들도 실제 살아가면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6. 설교 원고를 쓴 다음 강단에 오를 때까지

설교원고를 다 썼다고 해서 설교 준비가 다 끝난 것은 아님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설교자는 강단에 오르는 순간까지 자신이 정말 본문을 제대로 잘 이해했는지 따져 봅니다. 본문을 거듭 거듭 묵상하면서 그 뜻을[108/109] 새겨 봅니다. 혹시라도 본문에서 중요하게 다룬 것은 제쳐 놓고, 그렇지 않은 것을 중요하게 본 것이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또한 원고대로 설교를 했을 경우 청중들이 어떻게 받아들일까 하는 점을 듣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 봅니다. 이것은 교인들의 눈치를 보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을 통해 말씀하실 하나님의 뜻이 제대로 교인들에게 전해질 수 있을까 하는 것을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여기서 경우에 따라서 설교자는 설교원고를 가족 가운데 한 사람에게 읽어 들려주거나 스스로 읽도록 하여 그 느낌에 대해 이야기하도록 할 수도 있습니다.
본문을 정할 때부터 그러했지만 설교자는 원고를 다 쓴 다음에도 이 설교가 참으로 하나님의 뜻을 교인들에게 제대로 전해주는 올바른 설교가 될 수 있기를 하나님께 간절히 구합니다. 


7. 강단에 선 설교자

먼저 설교자는 힘들여 원고를 썼지만, 그렇게 작성한 원고를 너무 믿지 않습니다. 또 그 원고에 지나치게 매이지도 않습니다. 설교는 결국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고 설교자는 그냥 입을 비롯하여 그의 몸을 빌려드리는 것 뿐이므로, 성령을 굳게 의지하고 성령이 이끄시는대로 따를 각오를 합니다. 이리하여 설교자는 때때로 준비할 때는 전혀 깨닫지도 생각지도 못했던 것들이 입에서 술술 나오게 되는 경험을 합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설교자는 그가 강단에 서서 자기 입으로 설교하는 그 순간에도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인 것입니다.
강단에 선 설교자는 이처럼 두렵고 떨리나 안온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서 있도록 자신의 마음가짐과 몸가짐을 흐트러뜨리지 않습니다. 
이 점에서 강단을 마치 자기 소견 발표 연설장 정도로 보고, 자기 이야기, 자기 가정 이야기, 자기 교회 이야기를 길게 늘어 넣으며, 온갖 잡된 이야기를 거침없이 내뱉으며 교우들을 웃고 울리는 설교자들의 모습은 매우 염려스럽다 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109/110] 
강단은 자기 말재주 자랑하는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어야 하는 곳입니다.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영광스러운 책임을 맡았다면, 어찌 강단에서 제멋대로 말하고 행동할 수 있겠습니까? 몸과 마음을 삼감이 없고 진지함도 없고, 그저 자신만만하게 강단에 서는 설교자들은 결코 바람직한 설교자들일 수 없습니다. 
아울러, 설교자는 강단에 선 순간 듣는 이들에 대한 뜨거운 사랑으로 가득 차 때로는 부드럽게 때로는 세게 하나님의 마음으로 그들에게 설교합니다.
흔히 듣는대로 설교자는 이번에 하는 설교가 자기 생애의 마지막 설교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서 설교합니다. 또한, 내 설교를 듣는 이들 가운데서도 설교를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듣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음도 생각합니다. 
설교하는 동안 설교자는 설교하는 것이 잘 되는지, 아니면 힘든지를 스스로 느낍니다. 자신이 하는 설교에 스스로가 몰입하여 자신과 자신의 설교가 하나가 되는 수가 있는가 하면,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 어쩐지 자신과 맞지 않고 자신에게 낯설다고 느끼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 어느 경우이든, 자신의 느낌에 지나치게 좌우됨이 없이 설교자는 끝까지 최선을 다하여 정성스럽게 한 마디 한 마디 설교합니다.
또, 성실하게 준비를 하여 정성스럽게 설교하는 설교자는 이미 설교하는 순간부터 자기가 하는 설교에 대해 교우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에 민감합니다. 듣는 이들이 열심히 들으며 때때로 고개를 끄덕이거나 눈을 반짝이는 분들이 있거나 "아멘"으로 응답하는 교우들이 있으면 신이 납니다. 거꾸로 여기 저기 조는 얼굴들이 보인다든지, 냉담한 기운을 느끼게 되면 설교를 하면서도 불안해집니다. 낭패감이 들기도 합니다.
그 어느 경우이든, 설교자는 이러한 청중의 반응에 너무 마음 쓰지 않고 끝까지 성실히 설교합니다.


8. 설교를 마치고 나서

설교를 제대로 준비해서 열심히 했다면, 불과 반시간밖에 안 걸리는 설교지만, 설교자는 온 몸의 진액이 다 빠져나간 듯한 피곤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청중의 반응이 좋으면 그러한 피곤함을 기쁨과 보람으로 이겨낼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마음까지 지치게 됩니다.
설교자는 자신도 실천하지 못하면서 교우들에게 이렇게 저렇게 합시다 라고 크게 부르짖은 데 대해서 자책감을 느끼면서도, 자신부터 새로운 사람이 되리라고 다짐합니다. 
설교자의 가장 큰 기쁨은 자신이 한 설교가 그 설교시간에 잠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 데 그치지 않고, 몇몇 청중들의 마음속에 깊숙이 자리 잡아 그들이 오래 오래 그 가르침을 따라 삶을 고쳐나가는 모습을 보는데 있습니다.

 
심지어, 더러는 십 년 이상의 긴 세월이 흐른 다음, "그 때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제가 삶의 방향을 바꾸어 오늘의 저가 되었습니다"라고 고백하는 말을 듣기도 합니다. 그럴 때면, 하나님께서 보잘것없는 사람을 쓰셔서 큰 일을 이루심에 대해 감사한 마음 이루다 말로 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마음 한쪽으로는 그 때 나의 설교를 듣고 울분을 터뜨렸거나 낙심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두려움에 다시 한번 몸을 떨게 됩니다. 그 분들은 그 후로 설교자에게 연락해 오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그들이 그 날 설교자가 한 설교를 통해 변화되지 못함으로 영영 잘못될 수도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박동현 교수/『예언과 목회 IV』(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1996), 101-111쪽

출처 : 예수 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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