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학2

[스크랩] 자유의지론은 성경적인가?

수호천사1 2019. 2. 16. 15:07

자유의지론은 성경적인가?

최재석  |  jschoi4111@gmail.com

교회가 달라져가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경건한 주일성수를 위해서 십계명에 기록된 대로 주일에는 어떤 일도 하지 못하게 했다. 그래서 일요일에 당직 차례가 오면 당직을 바꾸느라 바빴다. 심지어 주일에 돈을 쓰는 것까지 일로 취급해서 주일에는 물건을 사거나 외식하는 것을 금했다. 돈을 쓰는 것도 일이냐고 물으면, 네가 돈을 쓰면 장사하는 사람이나 식당주인이 일하게 되지 않느냐고 말했다.

그러나 지금은 달라졌다. 보수적인 교회의 여전도회 회원들이 장애인들을 도우려고 교회에서 주일에 물건을 판다. 올 연초에 우리교회 목사는 시내의 식당에서 주일 오후에 은퇴 장로들을 대접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영화를 보지 말라고 하면서 TV조차 보지 말라고 했지만, 지금은 목사들도 즐겨 영화관에 가고 TV를 시청한다.

교인들의 생활만이 아니라 예배의 분위기나 강단에서의 가르침도 바뀌었다. 전에는 예배의 분위기가 엄숙했지만, 이제는 부흥강사들은 물론 담임목사들도 교인들을 가급적 웃기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목회유머집』이 나오기도 했다. 예전에는 부흥회에서는 물론이고 주일 설교에서도 지옥의 유황불을 언급하면서 교인들을 긴장시켰지만, 요즘은 주로 축복과 사랑을 강조한다. 우리가 일본의 지배와 6.25를 거치면서 살기 어려울 때는 고통을 많이 언급했지만, 요즘은 감사를 강조한다.

보통 우리는 신학이나 교리는 전혀 바뀌지 않는다고, 바뀌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신학도 교리도 성경을 기초로 해서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다. 그런데 문화가 달라져서  사물을 보는 눈이 변하면 성경을 달리 읽게 되고 거기에 따라서 교리가 바뀐다. 십계명에 명시된 안식일에 관한 우리의 태도가 달라지고, 예배의 분위기와 설교의 내용이 변하는 것처럼, 교리도 바뀐다.

확고부동한 것으로 보이던 예정론도 점차 그 절대성이 흔들리고 있다. 예정론과 자유의지론은 교회 역사에서 끊이지 않는 논쟁거리였다. 아우구스티누스 시대로부터 칼빈의 시대까지 세 차례의 종교회의에서 매번 예정론자들이 이기면서 자유의지론자들은 이단으로 몰렸다. 그 결과 예정론이 교리로서 깊이 뿌리를 내렸다.

그러나 자유의지론자들의 목소리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18세기에 와서 웨슬리가 자유의지론을 부분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자유의지가 감리교의 교리에 가미되었다. 그리고 요즘에는 자유의지를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근래에 자유의지론을 지지하는 사람들

C. S. 루이스는 자유의지를 적극적으로 내세우면서 세상의 악은 인간이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하기 때문에 생긴다고 말한다. 인간이 타락하기는 했지만, 칼빈의 말처럼 그렇게  전적으로 타락한 것은 아니라고,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이 남아 있어서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가 전문적인 신학자는 아니지만, 기독교 신앙의 변증가로 널리 알려져 있기 때문에, 그의 말에 귀 기울이는 사람이 많다.

존 파인버그의 『예정과 자유의지』(2011, 부흥과 개혁사)에서는 네 명의 현대 신학자가 예정과 자유의지에 관한 자신들의 견해를 밝히고 있다. 그중 두 사람은 ‘하나님 결정설’과 ‘하나님 전지설’을 각각 이야기한다. 그리고 나머지 두 명은 ‘하나님 능력 제한설’과 ‘하나님 지식 제한설’을 내세운다.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앞의 두 사람이 하나님의 예정을 강조하지만 자유의지를 어느 정도 인정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나머지 두 사람은 예정을 인정하면서도 자유의지를 폭넓게 받아들이고 있다.

그레고리 보이드는 『하나님 탓인가?』(2010, SFC)에서 인간이 불행한 일을 당할 때 하나님이 뜻이 있어서 그런 불행을 허락하신다고 말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리고 그는 그 불행이 선한 하나님의 뜻과는 관계없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인간의 자유의지로 인해서 하나님의 선한 뜻이 방해를 받는 성경 구절들을 열거한다.

한국 신학자들 중에서 김균진은 『예수와 하나님 나라』(2016, 새물결플러스)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고 다스리시지만, 우리 편에서도 의지를 가지고 선택하는데, 이 두 가지가 동시에 일어난다고 말한다. 그리고 예정과 자유의지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그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예정을 부인하고 예정과 자유의지가 조화를 이루는 하나님과 인간의 협동을 말한다. 이것은 웨슬리의 신인협동을 생각나게 한다.

장로교 목사도 이 대열에 합류했다. 김은섭 목사는 『예정론과 자유의지론의 조화』(211, 겨자씨)에서 성경에 예정과 자유의지가 모두 언급되어 있기 때문에 예정만 내세우면서 자유의지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포용력이 부족한 한국의 교계에서, 더구나 예정론을 강조하는 칼빈주의에 뿌리를 둔 장로교 목사로서 성경의 기록에 근거해서 대담한 발언을 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칼빈주의자를 자처하는 풀러신학대학교의 총장을 지낸 리처드 마우는 『문화와 일반 은총』(2012, 새물결플러스)에서 하나님의 예정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칼빈주의가 아주 답답하다고 안타까움을 토로한다. 그는 하나님은 예정에서 제외된 자들에게도 은혜를 베푸신다는 일반 은총을 강조하면서 그들이 자유의지를 발휘해서 인류 문화에 크게 이바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아가서 그는 칼빈주의자들이 마음을 열고 일반 은총 신학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러한 신학자들의 주장과 한국교회의 가르침 사이에는 간극이 크다. 한국교회는 대체적으로 보수적이고 거기에 더해서 미국의 근본주의의 영향이 아직도 위세를 떨치고 있다. 그래서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라고, 모든 것을 하나님이 해주시고 인간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고백하는 사람들 앞에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말하면 신앙이 없는 사람으로 간주된다. 그런데 자유의지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주장의 근거를 성경에서 찾는다. 성경에는 자유의지가 창세기로부터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줄곧 언급되어 있다는 것이다.


성경에 기록된 인간의 자유의지

성경에는 정말 자유의지에 관한 기록이 그렇게 많이 나오는가? 그렇다면 자유의지를 무시할 수 없겠다. 우리는 하나님의 권능을 믿기 때문에 그리고 예정에 관한 말씀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예정을 받아들인다. 그런데 성경에 자유의지에 관한 구절이 많이 나온다면 자유의지도 성경적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성경에서는 거듭 사람들이 매우 자유로운 존재로 창조되었다고 말한다. 먼저 창세기에서 보면 하나님은 아담 내외에게 자유의지를 허락하셨다. 하나님이 에덴동산을 만드시고 아담에게 그 동산에 있는 선악과의 “열매는 먹지 말라”(창 2:17)고 명하셨는데, 하와와 아담이 그 과일을 먹었다. 여기서 하나님은 아담 내외에게 그 과일을 먹는 것과 먹지 않는 것 사이에서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허락하신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아담 내외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르지 않고 그 과일을 먹는 것을 택했다.

구약과 신약에 나오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모든 명령에 대해서 인간은 자기 의지를 발휘해서 그 명령에 따르든지 따르지 않든지 두 가지 중에서 하나를 선택했다. 그 대표적인 예는 십계명이다. 제 일 계명을 보면,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출 20:3)고 되어 있다. 그리고 바로 다음에는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애굽을 탈출한 직후에 이스라엘은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절했고, 그의 신앙을 하나님이 인정한 솔로몬조차 모압의 그모스와 암몬의 몰록을 위하여 산당을 지었다.

신명기에서는 인간의 선택을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네가 만일 마음을 돌이켜 듣지 아니하고 유혹을 받아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그를 섬기면, 내가 오늘 너희에게 선언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망할 것이라 …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또 그를 의지하라”(신 30:17-20)

하나님은 그분의 길을 수용하든지 거절하든지 개인에게 선택의 기회를 주셨다. 그들이 하나님을 따르기를 선택하면 살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죽을 것이다. 이 본문에서 여호와는 그분의 뜻을 강조하여 표현하신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그분이 제공하는 생명을 수용하기를 원하신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람들이 그들의 마음에서 우러나와 하나님을 따르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그들이 자유롭게 선택하도록 하셨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들의 자유의지를 가지고 악을 행함으로써 하나님을 실망시켰다. 예루살렘에 대한 예수님의 애통은 인간의 반역이 하나님의 마음을 얼마나 고통스럽게 하는지를 분명하게 나타낸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마 23:37)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의 계획들에 대해 완고하게 저항하는 사람들로 인해 하나님이 자주 좌절하신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악이 자유 행위자들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확실히 보여준다(사 63:10, 행 7:51, 히 3:8, 15; 34:9, 신 9:6, 13; 10:16; 31:27, 삿 2:19, 왕하 17:14, 대하 30:8, 36:13, 느 9:16, 사 46:12; 48:4, 렘 7:26, 호 4:16).


마치면서

아우구스티누스 시대부터 칼빈의 시대까지 세 차례의 종교회의에서 자유의지가 정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유의지에 대한 주장이 끊임없이 고개를 드는 근본적인 이유는 자유의지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앞에서 본 대로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기록이 창세기로부터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줄곧 언급되어 있다.

예정론을 믿어온 우리에게 자유의지에 대한 언급은 엉뚱한 것처럼 보이지만, 자유의지가 성경에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자유의지론이 성경적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예정과 자유의지를 모두 받아들여야 한다. 그런데 그동안 대립적인 것으로 간주되어온 예정과 자유의지가 양립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이러한 의문에 대한 답을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찾을 수 있다. 예수님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십일조만을 강조하고 정의와 긍휼과 믿음을 버렸을 때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마 23:23)고 말씀하셨다. 십일조만을 강조한 유대교 지도자들은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일에만 몰두한 나머지 이웃과의 관계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이렇게 우리는 흔히 하나님에게만 집중하면서 인간은 외면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두 가지가 모두 중요하다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편향적인 태도를 취하기 좋아하지만, 성경에는 하나만을 강조하지 않고 두 가지를 모두 중시하는 경우가 많다. 예수님은 남성 중심 사회에서 남자와 여자를 동등하게 대하셨다. 선민의식이 강한 유대 사회에서 믿음 안에서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르지 않다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흔히 믿음을 강조하고 행위를 등한시 하지만, 성경에는 이 두 가지가 모두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우리는 유대지도자들처럼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열중하면서 이웃과의 관계를 소홀히 하지만, 예수님은 작은 자에게 한 것이 바로 하나님에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만을 염두에 두고 첫째가는 계명이 무엇이냐고 질문하는 서기관에게 그가 예상했던 것과 달리 이웃을 사랑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이 그의 예상과는 달랐지만, 그 서기관은 예수님의 말씀에 흔쾌히 동의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예정만을 생각해 왔지만, 성경에 하나님의 권능뿐 아니라 인간의 자유의지도 언급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한 지금. 우리도 그 서기관처럼 예정과 더불어 자유의지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흔쾌히 받아들여야 한다.

 

최재석 


출처 : 예수 코리아
글쓴이 : 예수코리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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