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예루살렘’(계 21:9-22:5)에 대한 개혁주의적 이해와 설교
1. 들어가는 말
20세기를 뒤돌아 보면 신학적으로 세대주의와 신사도운동이 급진적으로 발전하고, 전지구적으로 보급된 시대라고 판단된다. 이러한 영향력은 21세기에 들어서도 조금도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종말론에 한정하여 볼 때에 세대주의는 존 넬슨 다비나 스코필드가 주창한 고전적인 세대주의(Classic Dispensationalism)에서 존 월부드, 찰스 라이리 등을 대변자로 하는 수정된 세대주의(Revised Dispensationalism)를 거쳐 제3세대 세대주의라고 할 수 있는 점진적 세대주의(Progressive Dispensationalism)로 발전했으나, 여전히 전통적인 세대주의가 혼재하면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상황이다.
물론 점진적 세대주의의 경우 조지 엘든 래드의 종말론과 많이 가까워졌다고는 하나, 개혁주의적 종말론의 관점에서 볼 때에는 아직도 충분히 성경적이라고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더욱 더 문제가 되는 것은 전통적 세대주의에 기초한 온갖 시한부 종말론이 다양한 형태로 끊임없이 준동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바코드를 666이라고 한참 주장하던 이들이 이제는 베리칩을 666 짐승의 수라고 주장하고 있고, 선교의 완성이라는 시대의 표지를 들어 2030년경이면 주님이 재림하신다고 하는 시한부종말론을 말하는 이들도 있다. 주님의 재림이 임박하면 임박할수록 이런 종말론적 미혹은 더욱 더 가속화될 것이기 때문에 성경적이고 개혁주의적인 종말론의 확립과 교육이 시급하다고 생각된다.
필자는 평소에 우리 설교자들(이나 목회자들)이 개혁주의 신학 사상을 충만하게 가지고, 성경 66권에 대한 전반적인 강해와 교육을 할 수 있는 역량을 길러야 한다는 소신을 피력해 왔다. 그리고 최소한 우선적으로 기원에 대한 책인 창세기, 구원의 길을 정리한 로마서 그리고 종말에 대한 기록인 요한계시록을 잘 이해하고 바르게 강론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도 가지고 있다. 이는 필자의 실제적인 목회현장 경험에서 나온 깨달음이기도 하다.
필자는 성경본문을 전문적으로 다룰 수 있는 성경신학 전문가도 아니며, 개혁주의 설교학의 전문가도 아니지만, 성경적인 기초위에서 연속강해설교(lectio continua) 원리를 목회현장에서 실천하려고 분투노력했었고, 그러한 말씀사역 가운데는 요한계시록에 대한 연구와 강해를 빠트릴 수 없다.
20세기를 뒤돌아 보면 신학적으로 세대주의와 신사도운동이 급진적으로 발전하고, 전지구적으로 보급된 시대라고 판단된다. 이러한 영향력은 21세기에 들어서도 조금도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종말론에 한정하여 볼 때에 세대주의는 존 넬슨 다비나 스코필드가 주창한 고전적인 세대주의(Classic Dispensationalism)에서 존 월부드, 찰스 라이리 등을 대변자로 하는 수정된 세대주의(Revised Dispensationalism)를 거쳐 제3세대 세대주의라고 할 수 있는 점진적 세대주의(Progressive Dispensationalism)로 발전했으나, 여전히 전통적인 세대주의가 혼재하면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상황이다.
물론 점진적 세대주의의 경우 조지 엘든 래드의 종말론과 많이 가까워졌다고는 하나, 개혁주의적 종말론의 관점에서 볼 때에는 아직도 충분히 성경적이라고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더욱 더 문제가 되는 것은 전통적 세대주의에 기초한 온갖 시한부 종말론이 다양한 형태로 끊임없이 준동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바코드를 666이라고 한참 주장하던 이들이 이제는 베리칩을 666 짐승의 수라고 주장하고 있고, 선교의 완성이라는 시대의 표지를 들어 2030년경이면 주님이 재림하신다고 하는 시한부종말론을 말하는 이들도 있다. 주님의 재림이 임박하면 임박할수록 이런 종말론적 미혹은 더욱 더 가속화될 것이기 때문에 성경적이고 개혁주의적인 종말론의 확립과 교육이 시급하다고 생각된다.
필자는 평소에 우리 설교자들(이나 목회자들)이 개혁주의 신학 사상을 충만하게 가지고, 성경 66권에 대한 전반적인 강해와 교육을 할 수 있는 역량을 길러야 한다는 소신을 피력해 왔다. 그리고 최소한 우선적으로 기원에 대한 책인 창세기, 구원의 길을 정리한 로마서 그리고 종말에 대한 기록인 요한계시록을 잘 이해하고 바르게 강론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도 가지고 있다. 이는 필자의 실제적인 목회현장 경험에서 나온 깨달음이기도 하다.
필자는 성경본문을 전문적으로 다룰 수 있는 성경신학 전문가도 아니며, 개혁주의 설교학의 전문가도 아니지만, 성경적인 기초위에서 연속강해설교(lectio continua) 원리를 목회현장에서 실천하려고 분투노력했었고, 그러한 말씀사역 가운데는 요한계시록에 대한 연구와 강해를 빠트릴 수 없다.
본고를 통해서 필자는 요한계시록 21장 9절-22장 5절에 계시된 바 ‘새 예루살렘’에 대해서 고찰해 보려고 한다. 이어지는 본론 2절에서 논자는 우선 새 예루살렘, 도성인가 교회인가? 라는 주제의 신학적 숙고 작업을 한 후에, 3절에서는 전거 구절이 되는 요한계시록 21장 9절-22장 5절에 대한 논자의 강해를 요약적으로 제시하고자 한다.
새 예루살렘에 대한 본문을 어떻게 설교해야 한다는 설교학자의 당위성을 제시하기 보다는 필자가 해당 본문들을 어떻게 설교했었는가 하는 것을 이미 출간되어 있는 강해서를 근거로 하여 제시해 보려고 하는 것이다.
2. 새 예루살렘- 도성인가 아니면 구속받은 교회 공동체인가?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해 말하는 계시록 21장 1절 이하를 보면 곧장 새 예루살렘이 등장하고 그리고 21장 9절 이하에서는 새 예루살렘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해주는 것을 보게 된다. 이 새 예루살렘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서도 크게 두 가지 해석이 존재한다. 한편에서는 새 예루살렘을 구속받은 백성들이 영원히 거주하게 될 실제적인 도성 혹은 도시로 보는 입장과 구속받은 공동체를 상징적으로 말하고 있다라고 하는 입장이다.
2.1. 도성으로서 새 예루살렘
새 예루살렘을 비유적으로 해석하지 아니하고 실제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 거주민이 되어 살 도성으로 이해하는 입장을 먼저 살펴보도록 하겠다.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는 새 예루살렘이 “비록 비유적으로 어린 양의 신부라고 불린다고 할지라도(계 21:2, 9), 교회와 동일한 것은 아니다”고 말한다. 그는 히브리서 12장 22-23절을 논거로 제시하고 나서 다음과 같이 해명한다:
하늘의 예루살렘은 하나님 자신이 지은 도성이고(히 11:10),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데, 왜냐하면 그가 이 성의 건축자일 뿐만 아니라 또한 자신이 그곳에 거하기 때문이다(계 21:3). 그곳에서 천사들은 위대한 왕의 종들이며 수행원들이고(히 12:22), 복받은 자들은 그 나라의 시민들이다(계 21:27, 22:3-4).
물론 바빙크는 새 예루살렘에 대한 요한계시록 21-22장의 묘사를 문자적으로 해석해서는 안된다고 단서를 단다. 그에 의하면 요한은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다른 방식으로는 우리의 의식에 투사할 수 없기 때문에 개념들을 이미지들로 해석하여 보여 준”것이고, 또는 “내세의 실재들을 현세의 것들로 묘사한 것”이기 때문이다. 바빙크에 의하면 첫 창조 가운데 있는 모든 아름답고 선한 것들은 “하나님의 미래의 도성에 함께 집결되어, 갱신되고, 재창조되어 그 최상의 영광으로 들어 올려”질 것이지만, 새 예루살렘의 영광은 지상의 예루살렘이나 낙원 보다 더 영광스럽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20세기 미국 복음주의를 주도한 세대주의에 맞서서 역사적 전천년설을 강력하게 대변했던 조지 엘든 래드(George Eldon Ladd)의 경우도 새 예루살렘을 ‘하나님의 구속받은 백성들과 일치’시키는 해석에 의구심을 표현하고, 오히려 ‘구속받은 땅에서의 구속받은 사람들의 주요 거주지와 일치’한다는 결론을 내린다. 무천년설자인 필립 휴스(Philip E. Hughes)도 새 예루살렘을 새 하늘과 새 땅에 속한 도성으로 해석했다.
그리고 세대주의자들도 대체로 새 예루살렘을 성도들을 위한 영원한 거처라고 문자적으로 이해해왔다. 1967년에 간행된 NSRB은 새 예루살렘이란 “the dwelling place throughout eternity for the saints of all ages and fulfills the hope of Abraham for the heavenly city (Heb. 11:10-16; cp. Heb. 12:22-24)”라고 말한다. 존 맥아더는 새 예루살렘이 ‘실제적인 도시’(an actual city)라고 하는 점을 의심할 근거가 없다고 주장한다. 세대주의에 근거하여 시한부종말론으로 한국사회를 혼란케 만들었던 이장림 역시 새 예루살렘을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예비하신 처소”라고 보면서, 새 예루살렘에 대한 묘사들을 문자적으로 이해하였다.
2.2. 구속된 공동체로서 새 예루살렘
그러면 이제 새 예루살렘을 ‘교회 혹은 구속받은 교회 공동체’로 보는 입장을 살펴보도록 하자. 국내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쳐온 신약학자 윌리엄 헨드릭슨(William Hendriksen, 1900-1982)은 새 예루살렘을 “현재의 이상적인 교회에 의해 예표된 미래의 이상적 교회”라고 단적으로 해설했다.
헨드릭슨이나 그와 동일한 견해를 취하는 학자들, 예컨대 그레고리 빌(Gregory Beale)이나 이필찬이 제시하는 대표적인 전거구절은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δεῦρο, δείξω σοι τὴν νύμφην τὴν γυναῖκα τοῦ ἀρνίου)고 하는 요한계시록 21장 9절이다. 이러한 말씀 후에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전경을 보여주셨기 때문에, 비록 도성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어도 실제적인 도성이라기 보다는 어린 양의 아내인 교회 공동체를 가리킨다고 해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로버트 건드리는 1987년에 쓴 한 논문 가운데서 새 예루살렘을 ‘매우 거대한 상징’(a very large symbol)이라고 부르면서, 새 예루살렘이 상징하는 것은 성도들이라고 하는 견해는 ‘전혀 새로운 것’(nothing new)이 아니라고 말한다. “The New Jerusalem: People as Place, not Place for People”라고 하는 그의 논문 제목이 잘 보여주듯이, 건드리는 새 예루살렘은 새 땅에 있는 ‘성도들을 위한 거주지’가 아니라 ‘성도들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거처’(God’s dwelling pace in the saints)라고 해석한다.
최근 20여년 동안 이와 동일한 입장을 강변하고 있는 두 학자를 더 소개해 보려고 한다. 현 웨스트민스터신학교 교수인 그레고리 빌(Gregory Beale)과 이필찬이다. 두 사람 다 영국에서 요한계시록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요한계시록에 대한 주석을 출간한 전문가들이다. 빌은 1999년에 출간한 『요한계시록주석』에서도, 2014년에 간행한 주석 축약본에서도 새 예루살렘을 “새 창조와 영광 속에 들어간 완성된 교회”라고 일관되게 해석했다. 21:1-22:5에 대한 전체 단락 제목을 “The new creation and the church perfected in glory: in the new world to come, the community of the redeemed will be completed, perfected, inviolable, and glorious because God’s consummated, glorious presence will reside among them forever, whereas the unfaithful will be excluded from such blessing”이라고 붙였다.
이필찬은 1998년 리처드 보쿰의 지도하에 완성한 박사논문 4장에서 구조적 분석, 문맥적 분석, 주해적 분석, 주제적 분석 등에 근거하여 새 예루살렘이 교회를 상징하고 있다는 점을 학술적으로 논증하였다. 또한 2006년에 간행한 방대한 요한계시록 주석 속에서 대중적인 필치로 자신의 해석을 국내에 소개하기도 했다. 이필찬은 새 하늘과 새 땅 혹은 새 창조의 영광을 누리게 되는 주인공을 ‘그리스도의 신부’라고 소개하기 때문에(21:2, 9-10), 그리스도의 신부로 소개되는 새 예루살렘은 ‘교회’를 상징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고 해석한다.
또한 계시록 21장에 묘사된 새 예루살렘은 에스겔 40-48장에 예언된 ‘종말론적 새 성전에 대한 약속의 성취’로 간주하기도 한다. 그 성의 장광고가 각기 12,000 스다디온이라는 것은 지성소 기능을 가지고 있음을 상징한다고 해석하고, 사용된 보석의 의미는 ‘거룩한 도시, 새 예루살렘의 영광, 순결성, 아름다움, 그리고 소중함’을 나타낸다고 해설해 준다. 그리고 성내에 성전이 없다는 것은 새 예루살렘이 교회공동체를 상징하고 있다는 것을 증거해 준다. 그리고 나아가서 22장 1-5절에 묘사된 ‘새 예루살렘에서의 삶’은 ‘에덴에서의 삶의 회복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고 본다.
우리는 이렇게 새 예루살렘을 교회 내지 공동체(Gemeinde)를 가리킨다고 해석하는 다양한 신학자들이나 주석가들을 찾아볼 수가 있다. 추가적으로 우리는 칼 바르트를 언급할 수 있겠고, R. H. 마운스와 그가 소개하는 헌터, 키들 등의 학자들을 추가할 수가 있겠다.
2.3. 정리
우리는 이상에서 요한계시록 21-22장에 등장하는 새 예루살렘이 구속받은 성도들이 영원히 살 실제적인 도성이나 도시인지 아니면 새 하늘과 새 땅에 거주하게 될 구속받은 교회 공동체를 가르키는지에 대해 살펴 보았다.
양자가 다 해석학적인 근거위에서 자신들의 논의를 전개하고 있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어느 한쪽을 선택하기는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서 번 포이쓰레스는 “이미지의 유동적인 성격 때문에 도시의 거주자(성도)들과 도시 자체(영화롭게 된 창조와 함께 성도들)를 엄격하게 구별하지 않는 것이 가장 현명하다”고 언명했고, 리차드 보쿰의 경우는 새 예루살렘이라는 이미지가 가지는 삼중성을 ‘백성으로서 새 예루살렘,’ ‘장소로서 새 예루살렘,’ 그리고 ‘하나님의 현존’으로 제시하기도 했다. 분명한 것은 요한계시록은 상징주의(sybolism)로 가득한 책이기 때문에 새 예루살렘이 상징인지, 아니면 문자적인 것인지에 대한 판단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문자적인 해석을 취할 경우 새 예루살렘에 대한 묘사들 가운데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들, 예컨대 성의 장광고가 다 12,000스다디온이나 된다고 하는 21장 16절을 어떻게 이해할 것이며, 문자적으로 계산할 때에 현 미국 땅의 1/2정도의 사이즈가 되는데 그 성과 신천신지의 문자적인 관계가 어떻게 되는지 등의 난제를 해결하기가 어려워 보인다. 따라서 구속받은 신자들을 위하여 신천신지라고 하는 궁극적인 거처가 있기 때문에, 새 예루살렘은 구속받은 교회 공동체의 영광과 교회가 누리게 될 신천신지에서의 복들을 상징적으로 묘사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3. 새 예루살렘(계 21:9-22:5)에 대한 설교(논자의 사례)
그러면 이제 새 예루살렘(계 21:9-22:5)에 대한 실제로 설교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논자가 강해서를 통해서 이미 공표한 예를 요약적으로 제시해 보려고 한다. 앞서도 말했지만 논자는 이 본문에 대한 심도있는 설교학적인 논의를 제시하려고 하지 않으며, 그럴 능력을 갖추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다만 개혁주의적인 관점에서 신학 작업을 하고, 그 바탕 위에서 설교를 준비하고 케리그마를 선포해야 하는 개혁교회 목사의 소명을 따라 논자가 준비하고 전달했던 새 하늘과 새 땅(계 21:1-22:5)에 관한 설교의 내용을 요약적으로 제시함으로 하나의 예시를 하려고 하는 것 뿐이다.
논자는 예루살렘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는 요한계시록 21장 9절-22장 5절에 대해서 총 4회에 걸쳐서 강론하였다:35 (1) 새 예루살렘- 어린양의 신부(21:9-21), (2) 새 예루살렘의 영광(21:22-27), (3)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22:1-2), (4) 세세토록 왕노릇하리로다(22:3-5). 이제 각 설교 별로 본문을 어떻게 설교 했는지에 대해서 간략하게 개관해 보도록 하겠다.
3.1. 새 예루살렘- 어린양의 신부(21:9-21)
세 번째 설교는 새 예루살렘(21:9-21)에 대한 첫 번째 설교이다. 앞서 논의했듯이 새 예루살렘의 정체가 무엇이냐에 대한 해석은 크게 보자면 신자들이 영원히 살게 될 도시 혹은 성으로 보는 입장과 하나님의 거처가 되는 교회 공동체로 보려고 하는 입장으로 대별된다. 논자는 후자의 입장을 주로 취하고, 가끔 전자도 유보적으로 언급하는 형식으로 설교를 진행했다. 설교를 시작하면서 사물애호증(objectum sexuality)에 사로잡혀 베를린 장벽과 결혼했다고 공언했던 에이자 리타(Eija-Ritta)라는 여자 이야기로 설교를 시작했다. 왜냐하면 21장 9절에서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라고 소개된 바가 10절하 반절에서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라고 동일시하여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새 예루살렘 성은 어린양의 아내 혹은 신부라는 것이다.
어린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는 물질적인 성이 아니라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 혹은 교회라고 하는 점을 애써 부인하긴 어려울 것이다.
(1) 새 예루살렘의 정체
설교의 첫 번째 부분에서 ‘새 예루살렘의 정체’ 문제를 우선적으로 다루었다.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 유보적으로 말해서 “어떤 면에서는 … 구속받은 백성들의 처소를 상징”한다고 하는 점을 먼저 말했다(히 12:22-24). 하지만 아름다운 교회당 건물을 교회라 말하지 않듯이, 물질적인 성을 ‘어린양의 신부’라고 말하기는 어렵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어린양의 신부로서 새 예루살렘이 가리키는 바는 ‘교회 공동체’ 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 총수’를 가리킨다고 강론했다.
여인의 아름다움을 디르사나 예루살렘과 같은 성에 빗대어 말한 아가서 6장 4절이나 성도들을 건물에 비유한 사도들의 말씀들(엡 2:20-22; 벧전 2:5-6) 등을 인용 설명하면서 “따라서 구속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아름다움과 영광을 새 예루살렘으로 형상화한다고 해서 이해하지 못할 일도 아닐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한 교회 공동체를 새 예루살렘으로 비유한 것은 “개인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보다는 공동체로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에 강조점이 있음”을 부언했다.
(2) 새 예루살렘 성의 문과 기초
설교의 두 번째 부분에서는 새 예루살렘 성문과 기초석을 설명해주는 21장 12-14절 말씀을 강론하는데로 나아갔다. 열두 문 위에는 이스라엘 12지파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고, 기초석에는 어린양의 12사도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고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공동체가 구약과 신약의 백성들로 구성되어져 있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상징적 표현”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기초석에 사도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교회가 사도적인 가르침에 기초하여 세워졌음을 의미한다고 부연 설명했고, 동서남북에 각각 세 개의 문이 있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교회의 보편성(catholicity)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했다. 즉, 교회는 “동서남북에서 모여든 하나님의 자녀들로 구성된 보편적 공동체”라는 것이다.
(3) 성의 규모
설교의 세 번째 부분에서는 새 예루살렘의 규모에 대해서 진술하고 있는 21장 15-17절의 말씀을 강론했다. 본문에 의하면 새 예루살렘 성은 길이, 넓이, 그리고 높이가 동일하게 12,000스다디온(환산하면 2,200km)이나 되는 정입방체, 즉 큐브 모양임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성의 단면적은 현재 미국 땅 크기의 절반에 해당한다는 점을 말해 줌으로 문자적으로 성의 규모가 어떠한지를 짐직할 수 있게 하였다. 하지만 논자의 강조점은 실제적인 성이나 도시로 새 예루살렘을 이해하지 아니하고 교회공동체로 설명하는데 있기에, 이러한 규모에 대한 말씀도 상징적으로 설명하려고 노력을 경주했다. 일단 12,000 스다디온이라는 숫자에 담겨있는 의미는 레온 모리스(Leon Morris)의 다음과 같은 해설에 동의하며 인용했다. “10의 세제곱에 12을 곱하면 하나님의 백성의 완전한 총계가 된다.” 그리고 구약의 지성소가 정입방체였던 것을 따라 새 예루살렘 성도 정입방체의 모양을 취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로 충만한 공동체임을 상징”하는 것을 설명했다.
(4) 성의 건축재료
마지막 네 번째 부분에서는 ‘성의 건축재료’(21:18-20)에 대해서 강론했다. 19-20절상 반절에 의하면 12개의 기초석은 고귀한 보석들 12개로 놓여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21절에서는 성문이 통진주로 되어 있고, 성의 길은 맑은 유리같은 정금으로 되어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우선 12개의 기초석을 이루고 있는 보석들에 대한 정보가 많지 않은 현실에서 최대한 보석에 대한 설명을 해보았고, 이렇게 귀한 보석으로 되어있다고 하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다음과 같은 말로 강론해 보았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보석의 정확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잘 알지를 못합니다. 다만 완성되고 영화롭게 된 교회의 영광을 묘사하고 있음을 기억하십시다. 미국 개혁신학자였던 H. 훅스마가 말하는대로, 새 예루살렘으로 묘사된 교회의 ‘영광, 순수성, 아름다움, 그리고 가치’(the glory, the purity, the beauty, and the preciousness of this great and holy city)를 잘 표현해 주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또한 열두 대문이 진주로 되어 있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교회 공동체에 들어가는 것이 대형진주 보다 더 귀하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과 고난이라는 과정을 통해 진주가 만들어지듯이 우리가 그 구원의 문을 통과할 수 있게 된 것은 주님의 대속의 고난의 결과이자, 우리를 전도하기 위해 수고한 이들의 고난이 있었음을 설명하기도 했다. 그리고 성의 길이 ‘맑은 유리같은 정금’으로 되어 있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천국에서 누리게 되는 신령한 교제에는 감추어지거나 외식하거나 위선한 면이 없이 투명하게 서로의 속을 드러내고 살 것”을 의미한다고 해설했다.
2. 새 예루살렘- 도성인가 아니면 구속받은 교회 공동체인가?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해 말하는 계시록 21장 1절 이하를 보면 곧장 새 예루살렘이 등장하고 그리고 21장 9절 이하에서는 새 예루살렘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해주는 것을 보게 된다. 이 새 예루살렘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서도 크게 두 가지 해석이 존재한다. 한편에서는 새 예루살렘을 구속받은 백성들이 영원히 거주하게 될 실제적인 도성 혹은 도시로 보는 입장과 구속받은 공동체를 상징적으로 말하고 있다라고 하는 입장이다.
2.1. 도성으로서 새 예루살렘
새 예루살렘을 비유적으로 해석하지 아니하고 실제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 거주민이 되어 살 도성으로 이해하는 입장을 먼저 살펴보도록 하겠다.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는 새 예루살렘이 “비록 비유적으로 어린 양의 신부라고 불린다고 할지라도(계 21:2, 9), 교회와 동일한 것은 아니다”고 말한다. 그는 히브리서 12장 22-23절을 논거로 제시하고 나서 다음과 같이 해명한다:
하늘의 예루살렘은 하나님 자신이 지은 도성이고(히 11:10),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데, 왜냐하면 그가 이 성의 건축자일 뿐만 아니라 또한 자신이 그곳에 거하기 때문이다(계 21:3). 그곳에서 천사들은 위대한 왕의 종들이며 수행원들이고(히 12:22), 복받은 자들은 그 나라의 시민들이다(계 21:27, 22:3-4).
물론 바빙크는 새 예루살렘에 대한 요한계시록 21-22장의 묘사를 문자적으로 해석해서는 안된다고 단서를 단다. 그에 의하면 요한은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다른 방식으로는 우리의 의식에 투사할 수 없기 때문에 개념들을 이미지들로 해석하여 보여 준”것이고, 또는 “내세의 실재들을 현세의 것들로 묘사한 것”이기 때문이다. 바빙크에 의하면 첫 창조 가운데 있는 모든 아름답고 선한 것들은 “하나님의 미래의 도성에 함께 집결되어, 갱신되고, 재창조되어 그 최상의 영광으로 들어 올려”질 것이지만, 새 예루살렘의 영광은 지상의 예루살렘이나 낙원 보다 더 영광스럽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20세기 미국 복음주의를 주도한 세대주의에 맞서서 역사적 전천년설을 강력하게 대변했던 조지 엘든 래드(George Eldon Ladd)의 경우도 새 예루살렘을 ‘하나님의 구속받은 백성들과 일치’시키는 해석에 의구심을 표현하고, 오히려 ‘구속받은 땅에서의 구속받은 사람들의 주요 거주지와 일치’한다는 결론을 내린다. 무천년설자인 필립 휴스(Philip E. Hughes)도 새 예루살렘을 새 하늘과 새 땅에 속한 도성으로 해석했다.
그리고 세대주의자들도 대체로 새 예루살렘을 성도들을 위한 영원한 거처라고 문자적으로 이해해왔다. 1967년에 간행된 NSRB은 새 예루살렘이란 “the dwelling place throughout eternity for the saints of all ages and fulfills the hope of Abraham for the heavenly city (Heb. 11:10-16; cp. Heb. 12:22-24)”라고 말한다. 존 맥아더는 새 예루살렘이 ‘실제적인 도시’(an actual city)라고 하는 점을 의심할 근거가 없다고 주장한다. 세대주의에 근거하여 시한부종말론으로 한국사회를 혼란케 만들었던 이장림 역시 새 예루살렘을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예비하신 처소”라고 보면서, 새 예루살렘에 대한 묘사들을 문자적으로 이해하였다.
2.2. 구속된 공동체로서 새 예루살렘
그러면 이제 새 예루살렘을 ‘교회 혹은 구속받은 교회 공동체’로 보는 입장을 살펴보도록 하자. 국내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쳐온 신약학자 윌리엄 헨드릭슨(William Hendriksen, 1900-1982)은 새 예루살렘을 “현재의 이상적인 교회에 의해 예표된 미래의 이상적 교회”라고 단적으로 해설했다.
헨드릭슨이나 그와 동일한 견해를 취하는 학자들, 예컨대 그레고리 빌(Gregory Beale)이나 이필찬이 제시하는 대표적인 전거구절은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δεῦρο, δείξω σοι τὴν νύμφην τὴν γυναῖκα τοῦ ἀρνίου)고 하는 요한계시록 21장 9절이다. 이러한 말씀 후에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전경을 보여주셨기 때문에, 비록 도성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어도 실제적인 도성이라기 보다는 어린 양의 아내인 교회 공동체를 가리킨다고 해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로버트 건드리는 1987년에 쓴 한 논문 가운데서 새 예루살렘을 ‘매우 거대한 상징’(a very large symbol)이라고 부르면서, 새 예루살렘이 상징하는 것은 성도들이라고 하는 견해는 ‘전혀 새로운 것’(nothing new)이 아니라고 말한다. “The New Jerusalem: People as Place, not Place for People”라고 하는 그의 논문 제목이 잘 보여주듯이, 건드리는 새 예루살렘은 새 땅에 있는 ‘성도들을 위한 거주지’가 아니라 ‘성도들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거처’(God’s dwelling pace in the saints)라고 해석한다.
최근 20여년 동안 이와 동일한 입장을 강변하고 있는 두 학자를 더 소개해 보려고 한다. 현 웨스트민스터신학교 교수인 그레고리 빌(Gregory Beale)과 이필찬이다. 두 사람 다 영국에서 요한계시록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요한계시록에 대한 주석을 출간한 전문가들이다. 빌은 1999년에 출간한 『요한계시록주석』에서도, 2014년에 간행한 주석 축약본에서도 새 예루살렘을 “새 창조와 영광 속에 들어간 완성된 교회”라고 일관되게 해석했다. 21:1-22:5에 대한 전체 단락 제목을 “The new creation and the church perfected in glory: in the new world to come, the community of the redeemed will be completed, perfected, inviolable, and glorious because God’s consummated, glorious presence will reside among them forever, whereas the unfaithful will be excluded from such blessing”이라고 붙였다.
이필찬은 1998년 리처드 보쿰의 지도하에 완성한 박사논문 4장에서 구조적 분석, 문맥적 분석, 주해적 분석, 주제적 분석 등에 근거하여 새 예루살렘이 교회를 상징하고 있다는 점을 학술적으로 논증하였다. 또한 2006년에 간행한 방대한 요한계시록 주석 속에서 대중적인 필치로 자신의 해석을 국내에 소개하기도 했다. 이필찬은 새 하늘과 새 땅 혹은 새 창조의 영광을 누리게 되는 주인공을 ‘그리스도의 신부’라고 소개하기 때문에(21:2, 9-10), 그리스도의 신부로 소개되는 새 예루살렘은 ‘교회’를 상징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고 해석한다.
또한 계시록 21장에 묘사된 새 예루살렘은 에스겔 40-48장에 예언된 ‘종말론적 새 성전에 대한 약속의 성취’로 간주하기도 한다. 그 성의 장광고가 각기 12,000 스다디온이라는 것은 지성소 기능을 가지고 있음을 상징한다고 해석하고, 사용된 보석의 의미는 ‘거룩한 도시, 새 예루살렘의 영광, 순결성, 아름다움, 그리고 소중함’을 나타낸다고 해설해 준다. 그리고 성내에 성전이 없다는 것은 새 예루살렘이 교회공동체를 상징하고 있다는 것을 증거해 준다. 그리고 나아가서 22장 1-5절에 묘사된 ‘새 예루살렘에서의 삶’은 ‘에덴에서의 삶의 회복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고 본다.
우리는 이렇게 새 예루살렘을 교회 내지 공동체(Gemeinde)를 가리킨다고 해석하는 다양한 신학자들이나 주석가들을 찾아볼 수가 있다. 추가적으로 우리는 칼 바르트를 언급할 수 있겠고, R. H. 마운스와 그가 소개하는 헌터, 키들 등의 학자들을 추가할 수가 있겠다.
2.3. 정리
우리는 이상에서 요한계시록 21-22장에 등장하는 새 예루살렘이 구속받은 성도들이 영원히 살 실제적인 도성이나 도시인지 아니면 새 하늘과 새 땅에 거주하게 될 구속받은 교회 공동체를 가르키는지에 대해 살펴 보았다.
양자가 다 해석학적인 근거위에서 자신들의 논의를 전개하고 있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어느 한쪽을 선택하기는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서 번 포이쓰레스는 “이미지의 유동적인 성격 때문에 도시의 거주자(성도)들과 도시 자체(영화롭게 된 창조와 함께 성도들)를 엄격하게 구별하지 않는 것이 가장 현명하다”고 언명했고, 리차드 보쿰의 경우는 새 예루살렘이라는 이미지가 가지는 삼중성을 ‘백성으로서 새 예루살렘,’ ‘장소로서 새 예루살렘,’ 그리고 ‘하나님의 현존’으로 제시하기도 했다. 분명한 것은 요한계시록은 상징주의(sybolism)로 가득한 책이기 때문에 새 예루살렘이 상징인지, 아니면 문자적인 것인지에 대한 판단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문자적인 해석을 취할 경우 새 예루살렘에 대한 묘사들 가운데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들, 예컨대 성의 장광고가 다 12,000스다디온이나 된다고 하는 21장 16절을 어떻게 이해할 것이며, 문자적으로 계산할 때에 현 미국 땅의 1/2정도의 사이즈가 되는데 그 성과 신천신지의 문자적인 관계가 어떻게 되는지 등의 난제를 해결하기가 어려워 보인다. 따라서 구속받은 신자들을 위하여 신천신지라고 하는 궁극적인 거처가 있기 때문에, 새 예루살렘은 구속받은 교회 공동체의 영광과 교회가 누리게 될 신천신지에서의 복들을 상징적으로 묘사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3. 새 예루살렘(계 21:9-22:5)에 대한 설교(논자의 사례)
그러면 이제 새 예루살렘(계 21:9-22:5)에 대한 실제로 설교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논자가 강해서를 통해서 이미 공표한 예를 요약적으로 제시해 보려고 한다. 앞서도 말했지만 논자는 이 본문에 대한 심도있는 설교학적인 논의를 제시하려고 하지 않으며, 그럴 능력을 갖추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다만 개혁주의적인 관점에서 신학 작업을 하고, 그 바탕 위에서 설교를 준비하고 케리그마를 선포해야 하는 개혁교회 목사의 소명을 따라 논자가 준비하고 전달했던 새 하늘과 새 땅(계 21:1-22:5)에 관한 설교의 내용을 요약적으로 제시함으로 하나의 예시를 하려고 하는 것 뿐이다.
논자는 예루살렘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는 요한계시록 21장 9절-22장 5절에 대해서 총 4회에 걸쳐서 강론하였다:35 (1) 새 예루살렘- 어린양의 신부(21:9-21), (2) 새 예루살렘의 영광(21:22-27), (3)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22:1-2), (4) 세세토록 왕노릇하리로다(22:3-5). 이제 각 설교 별로 본문을 어떻게 설교 했는지에 대해서 간략하게 개관해 보도록 하겠다.
3.1. 새 예루살렘- 어린양의 신부(21:9-21)
세 번째 설교는 새 예루살렘(21:9-21)에 대한 첫 번째 설교이다. 앞서 논의했듯이 새 예루살렘의 정체가 무엇이냐에 대한 해석은 크게 보자면 신자들이 영원히 살게 될 도시 혹은 성으로 보는 입장과 하나님의 거처가 되는 교회 공동체로 보려고 하는 입장으로 대별된다. 논자는 후자의 입장을 주로 취하고, 가끔 전자도 유보적으로 언급하는 형식으로 설교를 진행했다. 설교를 시작하면서 사물애호증(objectum sexuality)에 사로잡혀 베를린 장벽과 결혼했다고 공언했던 에이자 리타(Eija-Ritta)라는 여자 이야기로 설교를 시작했다. 왜냐하면 21장 9절에서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라고 소개된 바가 10절하 반절에서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라고 동일시하여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새 예루살렘 성은 어린양의 아내 혹은 신부라는 것이다.
어린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는 물질적인 성이 아니라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 혹은 교회라고 하는 점을 애써 부인하긴 어려울 것이다.
(1) 새 예루살렘의 정체
설교의 첫 번째 부분에서 ‘새 예루살렘의 정체’ 문제를 우선적으로 다루었다.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 유보적으로 말해서 “어떤 면에서는 … 구속받은 백성들의 처소를 상징”한다고 하는 점을 먼저 말했다(히 12:22-24). 하지만 아름다운 교회당 건물을 교회라 말하지 않듯이, 물질적인 성을 ‘어린양의 신부’라고 말하기는 어렵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어린양의 신부로서 새 예루살렘이 가리키는 바는 ‘교회 공동체’ 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 총수’를 가리킨다고 강론했다.
여인의 아름다움을 디르사나 예루살렘과 같은 성에 빗대어 말한 아가서 6장 4절이나 성도들을 건물에 비유한 사도들의 말씀들(엡 2:20-22; 벧전 2:5-6) 등을 인용 설명하면서 “따라서 구속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아름다움과 영광을 새 예루살렘으로 형상화한다고 해서 이해하지 못할 일도 아닐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한 교회 공동체를 새 예루살렘으로 비유한 것은 “개인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보다는 공동체로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에 강조점이 있음”을 부언했다.
(2) 새 예루살렘 성의 문과 기초
설교의 두 번째 부분에서는 새 예루살렘 성문과 기초석을 설명해주는 21장 12-14절 말씀을 강론하는데로 나아갔다. 열두 문 위에는 이스라엘 12지파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고, 기초석에는 어린양의 12사도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고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공동체가 구약과 신약의 백성들로 구성되어져 있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상징적 표현”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기초석에 사도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교회가 사도적인 가르침에 기초하여 세워졌음을 의미한다고 부연 설명했고, 동서남북에 각각 세 개의 문이 있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교회의 보편성(catholicity)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했다. 즉, 교회는 “동서남북에서 모여든 하나님의 자녀들로 구성된 보편적 공동체”라는 것이다.
(3) 성의 규모
설교의 세 번째 부분에서는 새 예루살렘의 규모에 대해서 진술하고 있는 21장 15-17절의 말씀을 강론했다. 본문에 의하면 새 예루살렘 성은 길이, 넓이, 그리고 높이가 동일하게 12,000스다디온(환산하면 2,200km)이나 되는 정입방체, 즉 큐브 모양임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성의 단면적은 현재 미국 땅 크기의 절반에 해당한다는 점을 말해 줌으로 문자적으로 성의 규모가 어떠한지를 짐직할 수 있게 하였다. 하지만 논자의 강조점은 실제적인 성이나 도시로 새 예루살렘을 이해하지 아니하고 교회공동체로 설명하는데 있기에, 이러한 규모에 대한 말씀도 상징적으로 설명하려고 노력을 경주했다. 일단 12,000 스다디온이라는 숫자에 담겨있는 의미는 레온 모리스(Leon Morris)의 다음과 같은 해설에 동의하며 인용했다. “10의 세제곱에 12을 곱하면 하나님의 백성의 완전한 총계가 된다.” 그리고 구약의 지성소가 정입방체였던 것을 따라 새 예루살렘 성도 정입방체의 모양을 취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로 충만한 공동체임을 상징”하는 것을 설명했다.
(4) 성의 건축재료
마지막 네 번째 부분에서는 ‘성의 건축재료’(21:18-20)에 대해서 강론했다. 19-20절상 반절에 의하면 12개의 기초석은 고귀한 보석들 12개로 놓여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21절에서는 성문이 통진주로 되어 있고, 성의 길은 맑은 유리같은 정금으로 되어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우선 12개의 기초석을 이루고 있는 보석들에 대한 정보가 많지 않은 현실에서 최대한 보석에 대한 설명을 해보았고, 이렇게 귀한 보석으로 되어있다고 하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다음과 같은 말로 강론해 보았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보석의 정확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잘 알지를 못합니다. 다만 완성되고 영화롭게 된 교회의 영광을 묘사하고 있음을 기억하십시다. 미국 개혁신학자였던 H. 훅스마가 말하는대로, 새 예루살렘으로 묘사된 교회의 ‘영광, 순수성, 아름다움, 그리고 가치’(the glory, the purity, the beauty, and the preciousness of this great and holy city)를 잘 표현해 주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또한 열두 대문이 진주로 되어 있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교회 공동체에 들어가는 것이 대형진주 보다 더 귀하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과 고난이라는 과정을 통해 진주가 만들어지듯이 우리가 그 구원의 문을 통과할 수 있게 된 것은 주님의 대속의 고난의 결과이자, 우리를 전도하기 위해 수고한 이들의 고난이 있었음을 설명하기도 했다. 그리고 성의 길이 ‘맑은 유리같은 정금’으로 되어 있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천국에서 누리게 되는 신령한 교제에는 감추어지거나 외식하거나 위선한 면이 없이 투명하게 서로의 속을 드러내고 살 것”을 의미한다고 해설했다.
3.2. 새 예루살렘의 영광(21:22-27)
네 번째 설교는 새 예루살렘의 영광에 대해서 부연하고 있는 21장 22-27절을 강론한 것이다. 설교 초두에서 다시 한 번 새 예루살렘이 신자들의 영원한 거주지라기 보다는 어린양의 신부인 교회를 가리킨다는 점을 재강조했다.
그리고 세 번째 설교에 이어서 새 예루살렘 즉 구속받은 교회공동체의 영광스러운 특징들이 무엇인지를 강론했다.
(1) 성전도 태양과 달이 필요없는 곳
첫 번째 부분에서는 새 예루살렘에는 성전도 태양도 달도 필요없는 곳(21:22-23)이라는 점을 설명했다. 지상에 존재하던 예루살렘 성과 달리 새 예루살렘에는 성전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과 어린양이 성전이 되어주시기 때문이라고 하는 말씀 속에서 교회의 참된 영광은 하나님의 임재(쉐키나)에 있음을 해명했다. 그리고 그 성에는 해나 달의 비췸이 쓸데없다고 하는 말씀은 구약의 예언들(사 60:1, 3, 5, 19, 20; 슥 14:7)의 성취라는 점을 설명하고, 어린양이 성의 등불이 되시기 때문이라는 말씀을 “세상의 빛”이라는 요한복음 8장 12절과 연관하여 해명했다. 또한 다음과 같은 헨드릭슨의 해설을 인용함으로 내용 설명을 선명하게 하고자 했다:
등불이 어린 양인 것은 그가 우리에게 참된 하나님의 구원의 진리와 영적 기쁨 속에 살면서 거룩한 상태에 합당한 의를 주기 때문이다. 참 빛이신 그리스도는 무지와 비참함과 죄악과 도덕적 퇴폐를 없이 한다.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 안에서 그리고 이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은 교회에서 표현된다.
(2) 만국의 영광으로 장식되는 곳
설교의 두 번째 부분에서는 ‘새 예루살렘에는 만국의 영광이 다 모이는 곳이요, 만국의 영광으로 치장되어 지는 곳’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24-26절을 강론했다. 우선 25절에 있는 바 “낮에 성문들을 도무지 닫지 아니하리니 거기에는 밤이 없음이라”는 말씀을 먼저 해설해 보았다. 랍 벨(Rob Bell)과 같은 이들은 새 예루살렘 성의 문이 항상 열려있다고 하는 것을 들어 구원의 기회가 항상 열려있다는 것으로 곡해하려고 했지만, 밤이 없기 때문에 문을 항상 열어둔다라고 하는 말씀이 가리켜 보여주는데로 아무리 문을 열어두어도 침입할 악의 세력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는 바른 해석을 전달했다.
그러나 24절에 의하면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리라”고 말씀한다. 여기서 빛은 “새 예루살렘을 영원히 비추이고 있는 하나님의 영광이요, 어린 양의 빛”을 말한다. 또한 그 빛 가운데 다니는 만국(τὰἔθνη)은 계시록 7장 9-10절에서 상술하는대로 ‘동서고금을 물론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만국 백성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그렇다면 24절하 반절에 있는 바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리라”는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 구절은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겠”다고 하시는 26절의 말씀과 더불어 이사야 60장의 예언을 성취한 것임을 먼저 설명했다. 그리고 이런 구절들 속에서도 보편구원론(universalism)의 근거를 찾으려고 하는 자들에 반하여 “새 예루살렘에는 이 지상에서 탁월했던 이들도 포함”될 것이고, “왕들이라고 불리울 수 있는 사람들도 들어가게 될 것”이라고 특수주의적 구원(Particularistic salvation)의 관점에서 해명했다. 나아가서는 그들이 가지고 들어온다고 하는 '만국의 영광과 존귀'에 대한 카이퍼와 같은 개혁주의자들의 주도적인 해설이 무엇인지를 소개했다. 논자는 다소 약화된 표현을 사용하여 다음과 같이 결론을 지었다.
아무튼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인간이 성취한 모든 예술, 문화 등 고상한 것들이 하나님이 허락하신 가능성을 계발해 낸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런 것들이 신천신지에서도 어떤 형태로든지 남게 될 것이라는 점을 인정해야 합니다.
(3) 들어갈 수 있는 자들과 들어갈 수 없는 자들
설교의 세 번째 부분에서는 그 성에 들어갈 수 있는 자들과 들어갈 수 없는 자들을 규정하고 있는 27절 말씀을 강론했다. 그곳에는 “오직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 만이 들어갈 수 있고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씀을 통해 우리는 24, 26절에 대한 보편구원론적 해석의 유혹을 피할 수가 있다.
3.3.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22:1-2).
다섯 번째 설교는 계시록 22장 1-2절을 본문으로 삼고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이라는 제목으로 강론했다. 설교를 시작하면서 문명의 기원과 발전에 있어서 강의 중요성을 언급하고 난 후에 오염된 현재의 강들과 달리 ‘오염이나 위험요소가 전혀 없는 한 강’에 대한 소개에로 자연스럽게 옮겨갔고, 본문에서 소개하는 이 생명수의 강이 상징인지, 실제인지에 대한 질문으로 도입부를 마무리했다.
(1) 구약적인 배경
설교 첫 부분에서 1-2절의 구약적인 배경을 설명했다. 창세기 2장 8절-10절을 설명하면서 생명수의 강은 결국 ‘죄로 인해 잃어버리게 되었던 에덴 동산의 회복’이라는 점을 강론했고, 에스겔 47장 1-12절, 요엘 3장 18절, 스가랴 14장 8절 등을 열거하여 말하고, 본문 이해를 위해서는 이러한 구약적인 배경 이해가 전제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2)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
설교의 두 번째 부분에서는 본격적으로 본문이 말하는 생명수의 강에 대해서 집중하여 설명했다. 1절에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이라고 소개된 이 강이 수정같이 맑다고 하는 것은 “맑고 투명하고 오염이 되거나 썩고 부패한 요소가 전혀 없다”는 것을 의미하며, 또한 “말 그대로 맑고 투명하고 깨끗한 강물”이요 “수량이 풍성함과 거룩한 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논자는 “신천신지에 강이 있고 생명나무가 가시적으로 있을 것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생명수의 강과 그에 대한 묘사가 상징하는 바를 바르게 이해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헨드릭슨의 해석을 단도직입적으로 소개했다. “이 강은 영생, 온전하고 자유한 구원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의 선물을 상징한 생명의 강이다.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 말고 무엇을 생명이라 할수 있겠는가?” 또한 이 생명수의 강은 성령의 주심이라고 해석한 H. B. 스웨트의 해석을 소개하여 두 가지 해석을 종합했다. 이 생명수의 강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 신자들이 누리게 되는 풍성한 생명을 가리키는데, 이러한 생명 혹은 영생은 성령에 의해서 우리들에게 흘러오는 것이라고 강론했다. “이러한 성령을 통한 회복에 의한 생명의 충만함이 종말에 교회 공동체에게 완벽하게 이루어질 것”을 본문은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러한 생명수의 강이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온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권능에 의지에 기인한 것이며 그리스도의 구속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하여 보여줌으로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속한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3) 생명나무, 열매와 잎사귀
설교의 세 번째 부분에서는 2절을 해명하였는데 이 본문은 주의해서 설교해야 할 부분이기도 하다.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 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 우선 생명수의 강이 길 가운데로 흐른다고 할 때, 길은 복잡하고 좁은 골목길이 아니라 ‘주요 거리’를 가리킨다는 점, 또한 강이 주요 거리와 나란히 흐르고 있다는 말인지 아니면 길 대신에 생명수의 강이 흐르고 있다고 묘사하는지를 정확하게 알기 어렵다는 점을 토로했다. 하지만 마운스의 말처럼 “상세한 지세는 이 구절의 상징을 이해하는데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다”고 설명했다. 더욱더 주의해야 할 것은 강 좌우에 생명나무들이 있다고 말씀하지 않고 단수형을 사용하여 그 생명나무가 있다고 말씀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러한 난점도 본문이 상징적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점을 기억할 때 강론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단수형이나 집합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하는 문법적인 설명과 몇 성경 본문들(창 2:9, 3:22; 계 2:7)을 열거하면서 단수형이나 복수형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죄로 인해 거절당했던 생명나무에 그리스도의 피를 힘입어 자유로이 접근할 수 있게 되었고 풍성한 구속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을 설명했다.
그리고 그 생명나무가 “열 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는다고 하는 구절에 대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의 풍성함을 상징한다고 해설했고, 그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고 하는 오해 가능한 말씀에 대해서는 “앞으로 있을 시대의 영광은 현세에 속한 비유적 표현”한 것이며 “치료하는 잎사귀는 육신적, 영적 결핍이 전혀 있을수 없다”는 것을 상징한다고 해석한 마운스의 견해를 그대로 소개했다. 혹은 “내세의 영광의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은 죄의 결과로부터 온 모든 고통에서부터 완벽히 벗어날 것”이라고 해설한 정근두의 해설을 부언하기도 했다.
이 설교의 말미에서 논자가 강조한 것은 본문이 말하고 있는 생명나무의 정체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생명나무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음을 말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수치의 십자가를 지신 결과 우리를 위하여 영생을 주시며 새 예루살렘에서 충만한 삶을 누릴 수 있게 해주”셨다고 강론했다. 더욱이 이러한 생명은 장차 신천신지에서만 누리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이 땅위에서 거듭난 신자들이 선취하고 있으며, 그 완성적인 성취가 신천신지에서 이루어질 것임을 ‘이미와 아직 아니’(already but not yet)의 구속사적 구도 안에서 해명했다.
3.4. 세세토록 왕노릇하리로다(22:3-5).
사실 다섯 번째 설교와 여섯 번째 설교는 하나의 설교 속에서 다루어져 있지만, 보다 상세한 강해를 위해 두 개의 설교로 나누었다. 22장 3-5절을 본문으로 한 여섯 번째 설교이자 마지막 설교에서도 ‘우리가 누리게 될 천국과 신천신지의 영광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강론하였다.
(1) 다시 저주가 없는 삶
신천신지에서 성도가 누리는 삶의 특징 중 하나는 “저주가 없는 삶”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는 스가랴 14장 11절의 예언의 성취를 의미한다는 점(스가랴는 herem이라는 단어를 사용)을 설명하고, 궁극적으로는 창세기 3장에 기록된 바 죄의 결과로서 임한 저주가 제거될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저주가 없기에, “눈물, 애통, 이별, 싸움, 수고로이 일하거나 출산하는 일”도 없게 될 것이라고 구체적으로 설명하였다. 또한 이러한 저주의 제거는 오로지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심 때문이라는 갈라디아 3장 13절의 말씀도 소개하였다.
그리고 신천신지의 무궁한 삶은 “더 이상 죄를 짓거나 저주를 경험하게 될 가능성 없이 생명수의 강을 영원히 마시고 살수가 있”다고 하는 점을 부언하였다.
(2) 하나님을 가까이하여 섬기는 삶
신천신지에서의 삶의 특징은 단순히 저주와 그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난 삶 일뿐 아니라, 영원토록 하나님을 섬기며 사는 삶이라고 하는 점을 두 번째 대목에서 강론했다. 3절하 반절에 있는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라는 본문에 대한 해명이다. 구약시대에 모세나 엘리야 같은 사람들을 하나님의 종들이라고 표현했던 점을 들어, 본문에서 신자들을 종들(둘로이)이라고 표현한 것은 기분 나빠할 일이 아님을 말했고, 여기서 “섬긴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동사 라트류오는 “예배하다와 봉사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사전적인 의미를 소개한 후에 조금 디테일하게 설명했다. “우리는 복락원에서 영원토록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살 것입니다. 천군천사들과 함께 강건하고 우렁찬 목소리로 하나님을 찬송하게 될 것이다.”
4절에 의하면 신천신지에서 신자들이 누리게 되는 복 중 복은 하나님의 얼굴을 보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의 얼굴을 볼터이요”. 소위 지복직관(visio beatifica)라고 불리우는 것으로서 신학에서 수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주제이다. 논자는 회중들에게 복잡한 신학적인 논의를 소개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정당하게 취할 수 있는 수준의 해명을 했다. 고린도전서 13장 12절의 말씀을 인용하며 현재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것과 신천신지에서 누릴 수 있는 축복사이를 대조해서 설명했고, 신천신지에서 부활한 몸을 입고 살게 될 신자들은 하나님과 ‘직접적이고 친밀한 사귐’을 가질 수 있게 될 것이라고 강론했다. 또한 성도들의 이마 위에 하나님의 이름이 있을 것이라고 하는 말씀에 대해 앞선 본문들(3:12, 14:1)을 다시 상기시키면서, 성도들이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임을 가리킬 뿐 아니라, “이마에 하나님의 이름이 새겨진 자들은 곧 하나님을 닮은 자들이라는 의미”라고 강론했다.
(3) 세세토록 왕 노릇하리로다.
총체적인 구원을 받은 성도들이 신천신지에서 누리게 되는 또 하나의 중요한 복은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하게 된다고 하는 것이다. 이는 본문 5절하 반절에 명시적으로 기록된 내용이다. 논자는 이러한 영원한 왕노릇함이 “천년 동안 왕노릇”(계 20:4-6)함과 대조된다는 점을 설명하고, 땅에서의 영원한 왕 노릇함에 대한 여러 개의 관련 구절들(단 7:18, 27; 고전 6:2, 3; 계 1:6, 5:10; 마 19:28; 창 2:15)을 인용하면서 강론했다. 그리고 본 설교의 결론적 적용은 다음과 같이 선포되어졌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떻습니까? 믿는 자들이 장차 누리게 될 신천신지 복락원의 영광을 희미하게라도 아시게 되었습니까? 아, 그런 곳에 가서 영원히 나도 살고 싶다는 젠주흐트(Sehnsucht- 향수)가 생깁니까? 저는 이런 말씀들이 그냥 듣기에 좋은 소리가 아니라 저와 여러분의 영혼을 강하게 사로잡는 권세있는 말씀이 되기를 원합니다.
네 번째 설교는 새 예루살렘의 영광에 대해서 부연하고 있는 21장 22-27절을 강론한 것이다. 설교 초두에서 다시 한 번 새 예루살렘이 신자들의 영원한 거주지라기 보다는 어린양의 신부인 교회를 가리킨다는 점을 재강조했다.
그리고 세 번째 설교에 이어서 새 예루살렘 즉 구속받은 교회공동체의 영광스러운 특징들이 무엇인지를 강론했다.
(1) 성전도 태양과 달이 필요없는 곳
첫 번째 부분에서는 새 예루살렘에는 성전도 태양도 달도 필요없는 곳(21:22-23)이라는 점을 설명했다. 지상에 존재하던 예루살렘 성과 달리 새 예루살렘에는 성전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과 어린양이 성전이 되어주시기 때문이라고 하는 말씀 속에서 교회의 참된 영광은 하나님의 임재(쉐키나)에 있음을 해명했다. 그리고 그 성에는 해나 달의 비췸이 쓸데없다고 하는 말씀은 구약의 예언들(사 60:1, 3, 5, 19, 20; 슥 14:7)의 성취라는 점을 설명하고, 어린양이 성의 등불이 되시기 때문이라는 말씀을 “세상의 빛”이라는 요한복음 8장 12절과 연관하여 해명했다. 또한 다음과 같은 헨드릭슨의 해설을 인용함으로 내용 설명을 선명하게 하고자 했다:
등불이 어린 양인 것은 그가 우리에게 참된 하나님의 구원의 진리와 영적 기쁨 속에 살면서 거룩한 상태에 합당한 의를 주기 때문이다. 참 빛이신 그리스도는 무지와 비참함과 죄악과 도덕적 퇴폐를 없이 한다.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 안에서 그리고 이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은 교회에서 표현된다.
(2) 만국의 영광으로 장식되는 곳
설교의 두 번째 부분에서는 ‘새 예루살렘에는 만국의 영광이 다 모이는 곳이요, 만국의 영광으로 치장되어 지는 곳’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24-26절을 강론했다. 우선 25절에 있는 바 “낮에 성문들을 도무지 닫지 아니하리니 거기에는 밤이 없음이라”는 말씀을 먼저 해설해 보았다. 랍 벨(Rob Bell)과 같은 이들은 새 예루살렘 성의 문이 항상 열려있다고 하는 것을 들어 구원의 기회가 항상 열려있다는 것으로 곡해하려고 했지만, 밤이 없기 때문에 문을 항상 열어둔다라고 하는 말씀이 가리켜 보여주는데로 아무리 문을 열어두어도 침입할 악의 세력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는 바른 해석을 전달했다.
그러나 24절에 의하면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리라”고 말씀한다. 여기서 빛은 “새 예루살렘을 영원히 비추이고 있는 하나님의 영광이요, 어린 양의 빛”을 말한다. 또한 그 빛 가운데 다니는 만국(τὰἔθνη)은 계시록 7장 9-10절에서 상술하는대로 ‘동서고금을 물론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만국 백성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그렇다면 24절하 반절에 있는 바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리라”는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 구절은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겠”다고 하시는 26절의 말씀과 더불어 이사야 60장의 예언을 성취한 것임을 먼저 설명했다. 그리고 이런 구절들 속에서도 보편구원론(universalism)의 근거를 찾으려고 하는 자들에 반하여 “새 예루살렘에는 이 지상에서 탁월했던 이들도 포함”될 것이고, “왕들이라고 불리울 수 있는 사람들도 들어가게 될 것”이라고 특수주의적 구원(Particularistic salvation)의 관점에서 해명했다. 나아가서는 그들이 가지고 들어온다고 하는 '만국의 영광과 존귀'에 대한 카이퍼와 같은 개혁주의자들의 주도적인 해설이 무엇인지를 소개했다. 논자는 다소 약화된 표현을 사용하여 다음과 같이 결론을 지었다.
아무튼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인간이 성취한 모든 예술, 문화 등 고상한 것들이 하나님이 허락하신 가능성을 계발해 낸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런 것들이 신천신지에서도 어떤 형태로든지 남게 될 것이라는 점을 인정해야 합니다.
(3) 들어갈 수 있는 자들과 들어갈 수 없는 자들
설교의 세 번째 부분에서는 그 성에 들어갈 수 있는 자들과 들어갈 수 없는 자들을 규정하고 있는 27절 말씀을 강론했다. 그곳에는 “오직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 만이 들어갈 수 있고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씀을 통해 우리는 24, 26절에 대한 보편구원론적 해석의 유혹을 피할 수가 있다.
3.3.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22:1-2).
다섯 번째 설교는 계시록 22장 1-2절을 본문으로 삼고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이라는 제목으로 강론했다. 설교를 시작하면서 문명의 기원과 발전에 있어서 강의 중요성을 언급하고 난 후에 오염된 현재의 강들과 달리 ‘오염이나 위험요소가 전혀 없는 한 강’에 대한 소개에로 자연스럽게 옮겨갔고, 본문에서 소개하는 이 생명수의 강이 상징인지, 실제인지에 대한 질문으로 도입부를 마무리했다.
(1) 구약적인 배경
설교 첫 부분에서 1-2절의 구약적인 배경을 설명했다. 창세기 2장 8절-10절을 설명하면서 생명수의 강은 결국 ‘죄로 인해 잃어버리게 되었던 에덴 동산의 회복’이라는 점을 강론했고, 에스겔 47장 1-12절, 요엘 3장 18절, 스가랴 14장 8절 등을 열거하여 말하고, 본문 이해를 위해서는 이러한 구약적인 배경 이해가 전제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2)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
설교의 두 번째 부분에서는 본격적으로 본문이 말하는 생명수의 강에 대해서 집중하여 설명했다. 1절에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이라고 소개된 이 강이 수정같이 맑다고 하는 것은 “맑고 투명하고 오염이 되거나 썩고 부패한 요소가 전혀 없다”는 것을 의미하며, 또한 “말 그대로 맑고 투명하고 깨끗한 강물”이요 “수량이 풍성함과 거룩한 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논자는 “신천신지에 강이 있고 생명나무가 가시적으로 있을 것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생명수의 강과 그에 대한 묘사가 상징하는 바를 바르게 이해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헨드릭슨의 해석을 단도직입적으로 소개했다. “이 강은 영생, 온전하고 자유한 구원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의 선물을 상징한 생명의 강이다.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 말고 무엇을 생명이라 할수 있겠는가?” 또한 이 생명수의 강은 성령의 주심이라고 해석한 H. B. 스웨트의 해석을 소개하여 두 가지 해석을 종합했다. 이 생명수의 강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 신자들이 누리게 되는 풍성한 생명을 가리키는데, 이러한 생명 혹은 영생은 성령에 의해서 우리들에게 흘러오는 것이라고 강론했다. “이러한 성령을 통한 회복에 의한 생명의 충만함이 종말에 교회 공동체에게 완벽하게 이루어질 것”을 본문은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러한 생명수의 강이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온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권능에 의지에 기인한 것이며 그리스도의 구속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하여 보여줌으로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속한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3) 생명나무, 열매와 잎사귀
설교의 세 번째 부분에서는 2절을 해명하였는데 이 본문은 주의해서 설교해야 할 부분이기도 하다.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 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 우선 생명수의 강이 길 가운데로 흐른다고 할 때, 길은 복잡하고 좁은 골목길이 아니라 ‘주요 거리’를 가리킨다는 점, 또한 강이 주요 거리와 나란히 흐르고 있다는 말인지 아니면 길 대신에 생명수의 강이 흐르고 있다고 묘사하는지를 정확하게 알기 어렵다는 점을 토로했다. 하지만 마운스의 말처럼 “상세한 지세는 이 구절의 상징을 이해하는데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다”고 설명했다. 더욱더 주의해야 할 것은 강 좌우에 생명나무들이 있다고 말씀하지 않고 단수형을 사용하여 그 생명나무가 있다고 말씀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러한 난점도 본문이 상징적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점을 기억할 때 강론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단수형이나 집합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하는 문법적인 설명과 몇 성경 본문들(창 2:9, 3:22; 계 2:7)을 열거하면서 단수형이나 복수형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죄로 인해 거절당했던 생명나무에 그리스도의 피를 힘입어 자유로이 접근할 수 있게 되었고 풍성한 구속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을 설명했다.
그리고 그 생명나무가 “열 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는다고 하는 구절에 대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의 풍성함을 상징한다고 해설했고, 그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고 하는 오해 가능한 말씀에 대해서는 “앞으로 있을 시대의 영광은 현세에 속한 비유적 표현”한 것이며 “치료하는 잎사귀는 육신적, 영적 결핍이 전혀 있을수 없다”는 것을 상징한다고 해석한 마운스의 견해를 그대로 소개했다. 혹은 “내세의 영광의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은 죄의 결과로부터 온 모든 고통에서부터 완벽히 벗어날 것”이라고 해설한 정근두의 해설을 부언하기도 했다.
이 설교의 말미에서 논자가 강조한 것은 본문이 말하고 있는 생명나무의 정체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생명나무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음을 말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수치의 십자가를 지신 결과 우리를 위하여 영생을 주시며 새 예루살렘에서 충만한 삶을 누릴 수 있게 해주”셨다고 강론했다. 더욱이 이러한 생명은 장차 신천신지에서만 누리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이 땅위에서 거듭난 신자들이 선취하고 있으며, 그 완성적인 성취가 신천신지에서 이루어질 것임을 ‘이미와 아직 아니’(already but not yet)의 구속사적 구도 안에서 해명했다.
3.4. 세세토록 왕노릇하리로다(22:3-5).
사실 다섯 번째 설교와 여섯 번째 설교는 하나의 설교 속에서 다루어져 있지만, 보다 상세한 강해를 위해 두 개의 설교로 나누었다. 22장 3-5절을 본문으로 한 여섯 번째 설교이자 마지막 설교에서도 ‘우리가 누리게 될 천국과 신천신지의 영광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강론하였다.
(1) 다시 저주가 없는 삶
신천신지에서 성도가 누리는 삶의 특징 중 하나는 “저주가 없는 삶”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는 스가랴 14장 11절의 예언의 성취를 의미한다는 점(스가랴는 herem이라는 단어를 사용)을 설명하고, 궁극적으로는 창세기 3장에 기록된 바 죄의 결과로서 임한 저주가 제거될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저주가 없기에, “눈물, 애통, 이별, 싸움, 수고로이 일하거나 출산하는 일”도 없게 될 것이라고 구체적으로 설명하였다. 또한 이러한 저주의 제거는 오로지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심 때문이라는 갈라디아 3장 13절의 말씀도 소개하였다.
그리고 신천신지의 무궁한 삶은 “더 이상 죄를 짓거나 저주를 경험하게 될 가능성 없이 생명수의 강을 영원히 마시고 살수가 있”다고 하는 점을 부언하였다.
(2) 하나님을 가까이하여 섬기는 삶
신천신지에서의 삶의 특징은 단순히 저주와 그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난 삶 일뿐 아니라, 영원토록 하나님을 섬기며 사는 삶이라고 하는 점을 두 번째 대목에서 강론했다. 3절하 반절에 있는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라는 본문에 대한 해명이다. 구약시대에 모세나 엘리야 같은 사람들을 하나님의 종들이라고 표현했던 점을 들어, 본문에서 신자들을 종들(둘로이)이라고 표현한 것은 기분 나빠할 일이 아님을 말했고, 여기서 “섬긴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동사 라트류오는 “예배하다와 봉사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사전적인 의미를 소개한 후에 조금 디테일하게 설명했다. “우리는 복락원에서 영원토록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살 것입니다. 천군천사들과 함께 강건하고 우렁찬 목소리로 하나님을 찬송하게 될 것이다.”
4절에 의하면 신천신지에서 신자들이 누리게 되는 복 중 복은 하나님의 얼굴을 보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의 얼굴을 볼터이요”. 소위 지복직관(visio beatifica)라고 불리우는 것으로서 신학에서 수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주제이다. 논자는 회중들에게 복잡한 신학적인 논의를 소개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정당하게 취할 수 있는 수준의 해명을 했다. 고린도전서 13장 12절의 말씀을 인용하며 현재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것과 신천신지에서 누릴 수 있는 축복사이를 대조해서 설명했고, 신천신지에서 부활한 몸을 입고 살게 될 신자들은 하나님과 ‘직접적이고 친밀한 사귐’을 가질 수 있게 될 것이라고 강론했다. 또한 성도들의 이마 위에 하나님의 이름이 있을 것이라고 하는 말씀에 대해 앞선 본문들(3:12, 14:1)을 다시 상기시키면서, 성도들이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임을 가리킬 뿐 아니라, “이마에 하나님의 이름이 새겨진 자들은 곧 하나님을 닮은 자들이라는 의미”라고 강론했다.
(3) 세세토록 왕 노릇하리로다.
총체적인 구원을 받은 성도들이 신천신지에서 누리게 되는 또 하나의 중요한 복은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하게 된다고 하는 것이다. 이는 본문 5절하 반절에 명시적으로 기록된 내용이다. 논자는 이러한 영원한 왕노릇함이 “천년 동안 왕노릇”(계 20:4-6)함과 대조된다는 점을 설명하고, 땅에서의 영원한 왕 노릇함에 대한 여러 개의 관련 구절들(단 7:18, 27; 고전 6:2, 3; 계 1:6, 5:10; 마 19:28; 창 2:15)을 인용하면서 강론했다. 그리고 본 설교의 결론적 적용은 다음과 같이 선포되어졌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떻습니까? 믿는 자들이 장차 누리게 될 신천신지 복락원의 영광을 희미하게라도 아시게 되었습니까? 아, 그런 곳에 가서 영원히 나도 살고 싶다는 젠주흐트(Sehnsucht- 향수)가 생깁니까? 저는 이런 말씀들이 그냥 듣기에 좋은 소리가 아니라 저와 여러분의 영혼을 강하게 사로잡는 권세있는 말씀이 되기를 원합니다.
성도들이 장차 누리게 되는 복락원의 삶은 영원히 지루하게 계속되거나 아니면 무미건조하고 유약하게 시간만 보내는 허무한 삶이 아닙니다. 우리가 누리게 될 삶은 저주가 도무지 없는 삶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가까이하여 온 몸과 마음을 다해서 예배하고 섬기는 삶이 될 것입니다.
또한 복락원에서의 우리의 삶에는 어떠한 어둠이나 악의 요소도 없을 것이고 오로지 주 하나님과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찬란한 생명의 빛을 받으면서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더욱이 우리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왕노릇하심에 동참하게 될 것입니다. 영원히 세세무궁토록 왕노릇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어거스틴과 칼빈이 표현한대로 “하나님의 독생자가 인간의 아들이 되신 것은 우리들을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The only son of God became the son of man, that he might make us sons of God)라고 하는 의미인 것입니다.
이러한 영광과 특권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값을 치루셨으며 저주를 다 당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복락원에서 영원히 그 은혜를 찬송하며 우리에게 허락된 섬김과 다스림의 권세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상 생활에는 여전히 밤이 있고, 눈물 흘릴 일이 있습니다. 가슴 아파할 일들도 많이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눈을 들어서 복락원의 영광을 묵상합시다. 그리고 그곳에 가서 살 영적인 준비를 해 나갑시다. 연약한 조건 속에서 이지만 더욱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삶을 살아가십시다.
4. 나가는 말
이상에서 우리는 새 예루살렘에 대하여 신학적인 관점에서와 설교자의 관점에서 고찰해 보았다. 교회 밖에서 준동하고 있는 신천지와 같은 이단들의 위협뿐 아니라 교회내적인 혼란도 적지 않다고 판단되기에 이 주제와 그리고 전거본문인 요한계시록 21장 9절-22장 5절까지를 살펴본 것이다. 앞서 논의된 내용들을 간략하게 요약하여 보겠다.
첫째, 우리는 전거본문을 다루기 전에 우선적으로 관련된 신학적인 숙고 작업을 해보았는데(2절) 새 예루살렘을 실제적인 도성 혹은 도시로 이해할 것인가 아니면 구속받은 교회 공동체로 이해할 것인가에 대한 숙고 작업을 해보았다. 어느 쪽을 택하든 계 21-22장은 해명이 될 수 있으며, 어느 쪽의 입장이든 장점과 약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설교자는 새 예루살렘을 문자적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상징적으로 볼 것인지에 대한 입장을 정해야 할 것이다.
둘째로 논자가 실제 목회현장에서 전거본문(계 21:9-22:5)에 대하여 어떻게 강해했는지를 요약적으로 제시해 보았다(3절). 이렇게 하는 이유는 논자의 입장이 표준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실제로 이런 본문들을 개혁주의적인 신학의 기초위에서 어떻게 회중들에게 전달해야 하는지를 예시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더욱이 논자의 방대한 요한계시록 강해는 이미 공표되어 있어 신학자들이나 목회자들이 참고할 수 있기 때문에, 해당 내용을 요약적으로 제시해 보았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상 생활에는 여전히 밤이 있고, 눈물 흘릴 일이 있습니다. 가슴 아파할 일들도 많이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눈을 들어서 복락원의 영광을 묵상합시다. 그리고 그곳에 가서 살 영적인 준비를 해 나갑시다. 연약한 조건 속에서 이지만 더욱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삶을 살아가십시다.
4. 나가는 말
이상에서 우리는 새 예루살렘에 대하여 신학적인 관점에서와 설교자의 관점에서 고찰해 보았다. 교회 밖에서 준동하고 있는 신천지와 같은 이단들의 위협뿐 아니라 교회내적인 혼란도 적지 않다고 판단되기에 이 주제와 그리고 전거본문인 요한계시록 21장 9절-22장 5절까지를 살펴본 것이다. 앞서 논의된 내용들을 간략하게 요약하여 보겠다.
첫째, 우리는 전거본문을 다루기 전에 우선적으로 관련된 신학적인 숙고 작업을 해보았는데(2절) 새 예루살렘을 실제적인 도성 혹은 도시로 이해할 것인가 아니면 구속받은 교회 공동체로 이해할 것인가에 대한 숙고 작업을 해보았다. 어느 쪽을 택하든 계 21-22장은 해명이 될 수 있으며, 어느 쪽의 입장이든 장점과 약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설교자는 새 예루살렘을 문자적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상징적으로 볼 것인지에 대한 입장을 정해야 할 것이다.
둘째로 논자가 실제 목회현장에서 전거본문(계 21:9-22:5)에 대하여 어떻게 강해했는지를 요약적으로 제시해 보았다(3절). 이렇게 하는 이유는 논자의 입장이 표준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실제로 이런 본문들을 개혁주의적인 신학의 기초위에서 어떻게 회중들에게 전달해야 하는지를 예시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더욱이 논자의 방대한 요한계시록 강해는 이미 공표되어 있어 신학자들이나 목회자들이 참고할 수 있기 때문에, 해당 내용을 요약적으로 제시해 보았다.
한 사람의 설교자로서 요한계시록 연속 강해를 준비하면서 논자도 개혁파 종말론과 계시록에 대한 다양한 주석들을 참고하면서 요한계시록 강해를 진행해 보았다. 이러한 강해를 통하여 이단이나 사이비종말론에 미혹당하기 쉬운 회중들에게 바른 종말론과 성경적인 종말의식을 고취시켜 주고, 종말론적 삶을 살수 있도록 돕는 일에 목표를 두고 강해를 진행했다.
한 회중을 섬기는 설교자라면 성경 전체를 가르쳐야 할 책무를 가진 것이고, 그렇다면 언젠가는 요한계시록이나 예언서 본문들도 잘 가르쳐야 할 기회가 오기 마련이다. 특히 종말론과 관련된 미혹이 심한 말세지말에 사역하는 개혁주의 목회자들은 개혁파 종말론, 개혁주의적인 요한계시록 해석학과 주석학을 잘 연마함으로 설교자 자신이 충분한 준비위에 확신을 가지고 회중들에게 쉽고 분명하게 종말론적 진리들을 가르칠수 있어야 할 것이다.
한 회중을 섬기는 설교자라면 성경 전체를 가르쳐야 할 책무를 가진 것이고, 그렇다면 언젠가는 요한계시록이나 예언서 본문들도 잘 가르쳐야 할 기회가 오기 마련이다. 특히 종말론과 관련된 미혹이 심한 말세지말에 사역하는 개혁주의 목회자들은 개혁파 종말론, 개혁주의적인 요한계시록 해석학과 주석학을 잘 연마함으로 설교자 자신이 충분한 준비위에 확신을 가지고 회중들에게 쉽고 분명하게 종말론적 진리들을 가르칠수 있어야 할 것이다.
물론 처음 시작하는 이들에게는 요한계시록은 ‘열쇠를 잃어버린 자물통’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이미 앞선 선배들의 노작들을 참고하면서 연구와 준비에 매진한다면 요한계시록의 세계가 열리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새 예루살렘에 대한 설교도 제대로 선포되어질 때에 목회자나 교인들이 영원한 상태에 대한 갈망과 학수고대함이 생길 것이고, 영원한 것을 위하여 일시적인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 나라와 의를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게 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상웅(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조직신학)
출처 : 예수 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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