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blog.naver.com/esedae/221436811962
어제(7일) 날짜로 중앙일보에 연재기사인 ‘백성호의 우문현답’에 대한민국 최초로 문화부장관을 역임한 이어령(이화여대) 명예석좌교수와의 대담이 실렸다. 한국 나이 87세로 암과 투병(친병) 중인 이어령 교수의 죽음과 신앙 그리고 앞으로의 계획을 묻는 대담이었는데, 독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알려진 이어령 교수의 예수에 대한 생각을 풀어놓은 답변 내용이 마음에 걸린다. 잠시 대담 내용을 살펴보자.
질의: 생각하시는 비전이 뭔가.
응답 : “우선 비전의 바탕, 내 삶을 그리는 바탕을 말하고 싶다. 먼저 ‘인법지(人法地)’다. 인간은 땅을 따라야 한다. 땅이 없으면 인간은 존재할 수 없다. 우리가 어디에 사나. 지구에 살지 않나. 다음은 ‘지법천(地法天)’이다. 땅은 하늘을 따라야 한다. 땅에 하늘이 없으면 못 산다. 해도 있고, 달도 있고, 별자리도 있으니까. 그럼 그게 전부냐. 아니다. ‘천법도(天法道)’. 하늘은 도(道)를 따라야 한다. 다시 말해 우주의 질서를 따라야 한다. 그럼 도(道)가 끝인가? 아니다. ‘도법자연(道法自然)’. 도(道)는 자연을 따라야 한다.”
질의 : 마지막의 ‘자연’이란.
응답 : “우리는 그동안 ‘인법지’할 때 ‘지(地)’가 자연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게 아니다. 자연은 스스로 된 것이다. 자연스러움. 이 세상에 스스로 된 게 있나. 의존하지 않는 게 있나. 의지하는 뭔가가 없다면 그 자신도 없어진다. 그러니 ‘절대’가 아니다.”
질의 : 그럼 ‘스스로 된 것’은 뭔가.
응답 : “누군가 예수님에게 물었다. ‘당신은 신의 아들인가?’ 그러자 예수는 ‘예스, 에고 에이미(ego eimi·그리스어). 즉 예스, 아이 엠(Yes, I am)’이라고 답했다. ‘아이 엠(I am)’이 뭔가. ‘나는 나이다’ ‘나는 스스로 있다’는 말이다. 그건 무엇에 의지해서, 무엇이 있기 때문에 있는 게 아니다. 그냥 있는 거다. 스스로 있는 것은 외부의 변수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게 ‘자연’이다. 그게 ‘신(神)’이다.”
질의 : 그렇다면 ‘예수를 믿는다’는 건 무얼 뜻하나.
응답 : “우리는 ‘너 예수교 믿어?’하고 묻는다. 그건 교(종교)를 믿느냐고 묻는 거다. ‘너 신을 믿어?’ 하는 물음과는 다른 이야기다. 교를 믿는 것과 신을 믿는 것은 다르다. 기독교든, 불교든, 도교든 모든 종교의 궁극에는 ‘저절로 굴러가는 바퀴”와도 같은 게 있다. 스스로 움직이는 절대의 존재다. 인간은 단 1초도 무엇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존재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자율자동차라는 말, 유발 하라리가 말하는 ‘호모 데우스’ 같은 말처럼 공허하게 들리는 것도 없다.”
[출처: 중앙일보] 이어령 "암 통보받아···죽음 생각할 때 삶이 농밀해진다"
여기서 이어령 교수는 ‘생각하는 비전’을 묻는 대담자의 질문에 “스스로 있는 자(에고 에이미, 야훼, 눅 22:70)”라고 선언하신 예수님을 ‘자연(自然, 스스로 존재한다?)’으로 비유하며 인간은 자연을 따라야 한다는 ‘인법자연(人法自然)의 도리를 설파하였다.
“인간은 예수를 따라야 한다(人法自然).”는 복음의 도리를 설명하기 위한 과정이라고 하지만, 예수님이 스스로를 야훼(여호와, 성자 하나님)로 계시하신 “스스로 있는 자(야훼, 여호와)”라는 말씀을 가지고 ‘자연(自然)’이라는 단어와 연결 지은 것은 궁색할 뿐 아니라, 다분히 신성모독적인 표현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예수가 자연이고, 자연이 예수다.”라는 표현은 범신론에 바탕을 둔 뉴에이저(일루미나티)들이나 할 수 있는 주장인지라, 혹여 이어령 교수가 믿는 예수가 성경에서 가르치는 예수가 아닌 뉴에이지 사상에 바탕을 둔 ‘다른 예수’(고후 11:4)가 아닌지 의심스럽다는 뜻이다.
이어지는 대담에서도 이어령 교수는 “기독교든, 불교든, 도교든 모든 종교의 궁극에는 ‘저절로 굴러가는 바퀴’와도 같은 게 있다. 스스로 움직이는 절대의 존재다.”라는 주장을 통해 기독교(그리스도)의 유일성(요 14:6)을 부정하는 듯한 발언을 하고 있다. (모든 종교가 절대자(자연?)에 대한 믿음으로 하나로 통합될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인가?).
사도 바울은 아덴에서의 전도를 통해 인간의 생각(철학)이 하나님의 생각(복음)을 앞설 때, 어떤 참극이 벌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 바 있다(사도행전 17장). 부디 이어령 교수가 얼마 남지 않은 생애의 기간 동안이라도 “내가 생각하는(철학적인) 예수”가 아니라, “성경이 말씀하는 예수”를 만날 수 있기를 바래본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Jesus answered, "I am the way and the truth and the life. No one comes to the Father except through me.)”
- 예레미야 -
'복음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라 (0) | 2019.01.16 |
---|---|
[스크랩] 은혜란 무엇인가? (0) | 2019.01.15 |
[스크랩] 이승구 박사, 정통적 그리스도와 퀴어 그리스도의 차이 (0) | 2019.01.12 |
[스크랩] 한국사회를 향한 한국교회의 소명 (0) | 2019.01.07 |
[스크랩] 신원균 박사,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학의 장단 (0) | 2019.01.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