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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성경해석의 난점과 원리

수호천사1 2019. 1. 10. 15:54

성경해석의 난점과 원리



목 차
Ⅰ. 서론 - 문제 제기
Ⅱ. 성경에 관한 다양한 관점들
Ⅲ. 성경해석의 난점에 대한 역사적 고찰
Ⅳ. 성경해석의 성경적 원리 - 성경신학의 관점에서 -
Ⅴ.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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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서론 - 문제 제기


이 글은 우리의 신앙과 교회의 모습을 결정하는 가장 원초적이며 중요한 신학 작업인 성경 해석에 개재되어 있는 난점을 드러내고 그것을 해결하는 성경적 원리를 모색하는데 있다.
“성경을 해석한다”라고 했을 때 이미 여기에는 검토해야 할 두 가지 내용을 함축한다. 즉 첫째, 성경이란 도대체 어떤 책인가? 라는 성경관과 둘째, 해석이란 어떤 작업을 의미하는가? 이다. 이 둘은 상호 구분해서 논의가 가능하지만 실제적 성경해석에서는 서로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다. 다시 말해서 어떤 성경관을 가지느냐에 따라서 대략적인 해석의 틀과 방향이 설정된다. 가령 성경이 인간들이 기록한 역사적 문서에 불과하다면 해석의 방향은 그것이 생겨나게 된 역사적 맥락에 대한 이해와 역사적 인물로서의 예수에 대한 탐구, 그리고 신화적 사건에 대한 인간학적 분석이 중심을 이룰 것이다. 그러나 성경이 신적 계시의 산물이라면 해석의 초점은 내용의 통일성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대한 신학적 의미의 분석이 될 것이다.

이처럼 어떤 성경관을 가지느냐에 따라 개략적인 성경 해석의 방향이 설정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올바른 성경관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해석의 성경적 원리와 실제 해석하는 활동의 성격을 잘 파악하지 못하면 해석의 결과는 성경관과 일치하지 않을 수가 있다. 예컨대 성경이 통일된 의미를 가진 하나님의 계시라고 전제하더라도 해석의 과정에서 상호 모순이 되는 해석의 틀을 사용하게 되면 해석의 결과는 전제와 모순되는 내용을 드러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올바른 성경해석을 위해서 올바른 성경관의 확립이 필요할 뿐 아니라 성경해석의 원리와 방법을 잘 파악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교회사를 검토해 보면 이 일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교회사에서 나타나는 서로 다른 진리 주장, 그리고 그로 말미암는 신앙의 혼란과 교회의 분열 등은 따지고 보면 궁극적으로 서로 다른 성경관과 성경해석의 관점으로 말미암는다. 어떤 교파나 신앙 공동체든지 거기에는 그 모임이 지키고자하는 신조나 교리가 있기 마련이다. 그 신조와 교리는 한 신앙 공동체의 이념적 지향과 행동의 통일을 보장하고 담보하는 절대적 신념체제로서 기능한다. 그런데 신조 혹은 교리는 신앙의 내용을 체계화한 것으로서 그것들은 결국 성경에 대한 해석의 산물이다. 다시 말하면 성경 해석을 통해 신앙의 내용이 구성되고 그 신앙의 내용은 체계화 과정을 거쳐 성도의 신앙고백과 행동의 방향을 확고히 하는 신조 혹은 교리가 되는 것이다. 이는 고착되고 폐쇄적인 교리체계(fixed dogma)를 비판, 부정하는 경건 생활중심의 신앙 공동체에도 어김없이 나타난다. 현존의 교리는 아니지만 경건생활 중심으로 살아가자고 하는 ‘확고한 자기 주장’ 즉 일종의 교리가 있게 마련이다. 현존의 드러난 교리를 부정하는 감추인 교리를 갖고 있는 셈이다. 이는 인간이 구체적인 신앙 고백과 행동을 하기 위해서는 모종의 확고한 폐쇄적 신념체제를 요구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필연적 현상이다(교회밖의 삶에서도 이는 필연적이다. 인간은 자기 행동의 근거로 어떤 종류이든지 확고한 이데올로기나 의사종교적 신념을 갖는다. 도무지 모든 것을 열어놓고는 어떤 행동이든지 가능하지 않다. 필자는 개방적 사고 혹은 열린 사고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가장 폐쇄적으로 그 주장을 하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는 바는 결국 어떤 해석의 방향을 잡아 가느냐에 따라서 너무도 상호 이질적인 절대적 신앙체제와 행동의 토대가 형성된다는 것이다. 여기에 성경해석의 중요성과 심각성이 있다. 실상 모든 신학적 작업의 최종적 진위 판별은 여기에 달렸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신학적 주장을 올바르게 식별하고 올바른 신앙을 견지하기 위해서는 어떤 신학적, 혹은 신앙적 주장의 언어적 명제의 검토만을 통해서는 부족하며 그 주장이 생겨나게 된 성경 해석적 틀을 면밀히 검토하는 것이 요청된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성경해석의 원리와 방법에 대한 신학적 논의에 익숙해야 하며 궁극적으로 성경적 원리를 파악해야한다.

인본주의적 성경관을 주장하는 사람을 제외한 수많은 사람들이 성경은 객관적인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수납한다. 그런데 왜 성경의 해석 결과가 서로 상이한가? 여기에 어떤 난점이 도사리고 있는가? 그 난점은 어떻게 극복될 수 있는가? 이 글의 일차적 주안점은 성경 해석에 개재되어 있는 난점의 이유와 성격을 역사적으로 그리고 인식론적으로 철저히 규명하는데 있다. 필자가 볼 때 지금까지 성경해석학의 논의는 이점에 대한 철저한 분석이 이루어지고 있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극복의 대안 모색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해석의 난점에 대한 정확한 규명이 없이는 대안 제시가 피상적이거나 방향 착오가 될 수밖에 없다. 필자가 볼 때 성경해석의 가장 근본적인 난점은 성경을 해석할 때 발생하는 ‘주관적인 생각의 개입’이다. 즉 해석을 통해 객관적인 말씀의 내용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기 주관을 개입시킴으로 주관에 의해 변질되고 재구성된 해석의 결과를 가져오는 ‘해석학적 주관주의’이다. 교회사를 통해서 그리고 오늘의 교회 현실에서 드러나는 온갖 서로 다른 진리 주장과 분파 현상은 결국 성경 해석의 주관화로 말미암는다. 그러면 이 해석상의 주관주의는 원칙적으로 극복 가능한가? 그리고 해석자마다 자기의 해석이 더 객관적이라고 주장했을 때 그것을 판별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진리 주장의 최종적 판별 기준이 성경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 소박한 진술에 불과하다. 어떤 주장의 검증을 위해서 성경을 사용할 때 이미 거기에는 해석 작업이 시작된다. 따라서 그때 사용하는 해석적 틀이 무엇인지가 언제나 문제시 된다.) 이 질문들이야 말로 우리가 해명해야 할 성경해석과 관련된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현실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가 점차 커지고 있다. 외적으로는 매우 부흥 발전했으나 신앙의 내면을 들여다 볼 때 매우 부실하며 심지어는 위기의 징후 마저 보인다. 종교적 행사와 건축은 거창하지만 성도의 신앙적인 내면의 평안과 기쁨은 정착되어 있지 않아 보인다. 종교적 열심과 헌신도 있어 보이나 세상적 축복에 대한 기대와 보상심리의 발로이거나 다분히 맹목적 성향으로 보인다. 각기 진리 주장의 목소리를 높이지만 서로 모순된 주장이어서 극도의 혼란상을 보인다. 교회 개혁의 목소리가 여기 저기서 들리지만 진단과 처방이 너무도 다양하고 상호 모순된 것도 있어 오히려 혼돈만을 더해 갈 뿐이다. 왜 이렇게 되어 가는가? 그 이유를 일반적인 수준에서 여러 가지로 분석하고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성경의 권위를 무시하는 인본주의적 신학의 팽배와 도피적 신비주의 신앙의 확산, 그리고 세속주의와 물질주의 가치관의 교회내 침투, 뿐만 아니라 교회의 제도적 경직화 내지 교회 운영의 권위주의화, 또는 교회 지도자들의 영적 지도력의 부재 등을 들 수 있다. 그래서 개혁의 의지를 가진 자들은 앞에서 열거한 각 문제의 원인을 지적하며 그것들을 고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필자가 볼 때 그것은 근본적 치료가 되질 못한다. 열거된 문제점들은 보다 근본적 문제의 드러난 현상에 불과하다. 병으로 말하자면 징후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온전한 치료를 위해서는 징후의 근본 원인을 찾아야 한다.

필자가 볼 때 오늘날 한국 교회의 위기 현상의 근본적인 원인은 이 글에서 논의하고자 하는 성경해석상의 문제에 있다. 성경해석의 혼란은 궁극적으로 신관의 혼돈과 왜곡을 필연적으로 낳는다. 위에서 열거한 제반 문제점들은 이로부터 말미암는다.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인의 삶 그자체에 문제를 느끼고 그것을 고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것의 효과는 지극히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인간의 행위는 단세포 생물과 달리 인격적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즉 행위는 그 이전 믿음의 문제로 말미암으며 믿음은 다시 앎의 문제와 관련된다. 왜 행위가 없느냐고 말하기 전에 믿음을 키워 주어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믿음이 자라는가? 그것은 하나님을 바르게 앎으로부터이다. 결국 성도의 삶의 문제는 신관의 정립여부에 달려 있으며 그것은 올바른 성경 해석을 통해서 가능하다. 따라서 한국 교회의 올바른 개혁의 지향점을 모색하기 위해서는 현상적인 문제의 분석에 앞서서 우리는 현존 신학의 성경해석의 원리와 방법들을 검토해야 한다.
우리는 이상에서 논의된 문제 제기에 비추어 성경해석에 관련된 문제를 검토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먼저 다양한 성경관을 비교 검토함으로써 올바른 성경관을 모색하고자 한다. 성경관의 올바른 정립은 올바른 성경해석의 전제 조건이기 때문이다. 그 다음 성경해석의 난점을 역사적 고찰을 통해 드러낼 것이다. 그런 다음 마지막으로 성경 신학적 입장에서 성경해석의 원리를 밝혀 볼 것이다.

Ⅱ. 성경에 관한 다양한 관점들


앞에서 언급한 대로 우리는 성경해석의 문제를 검토하기전에 먼저 성경이란 도대체 어떤 책인가를 규명해야 한다. 여기서는 현존 다양한 신학적 입장에서 취하는 성경관과 그들의 정당화 방식을 살펴보고 상호 비교를 통해 어떤 성경관이 성경적인가를 밝혀 보기로 하겠다.
현존하는 성경관은 크게 보아 대개 4부류로 나누어진다. 첫째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는 듯하지만 성경 외에 성경과 같은 권위를 인정함으로써 사실상 성경의 절대적 권위를 부정하는 가톨릭, 혹은 신비주의자들의 견해, 둘째 성경의 신적 영감을 부정하고 단지 인간의 역사적 문서로 격하시켜 버린 자유주의신학자들의 견해, 셋째 성경은 그 자체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인간이 주체적으로 반응하는 시도를 할 때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고 하는 신정통주의 신학자 칼 바르트의 견해, 넷째 성경은 그자체로 하나님의 말씀으로써 의미상 일관된 통일성을 유지한다고 보는 보수주의 신학자들의 견해이다. 이들 각각의 주장을 살펴 보고 비교 분석하기로 하겠다.

첫째 가톨릭, 혹은 신비주의자들의 성경관을 검토해 보자.

이들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수납하는 듯 한 태도를 일단 취한다. 그러나 그들은 성경 옆에 무엇(가톨릭은 교회의 전통, 신비주의자는 직접적 계시)을 성경과 같은 권위로 받아들임으로써 사실상 성경의 절대적 권위를 부정한다. 여기서 우리는 이들의 주장의 숨은 의도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가톨릭주의자들이 성경66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면서 동시에 교회의 전통을 같은 권위로 수용하는 데에는 매우 인본주의적인 숨은 동기가 있다. 그들은 사실상 교회의 권위를 성경의 권위보다 더욱 우월하게 생각한다. 가톨릭주의자들에 의하면 성경이 66권으로 정경화된 것은 교회 회의의 결정에 의한 것이라고 간주한다. 다시 말해서 성경을 성경으로 확증한 것이 교회의 회의이므로 성경 그 자체보다 교회의 권위가 더 우월하게 간주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형식적으로 표방하는 것은 실상 그것에 빗대어 교회의 권위를 부각시키려는 의도에서이다. 이런 가톨릭의 의도는 결국 교황의 무오와 권위라는 반성경적 주장으로 연결된다. 왜냐하면 인간의 모임인 교회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결정하려면 논리적으로 어쩔 수 없이 그 모임의 최종적 우두머리의 신적 무오나 권위를 가정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그 회의의 결과를 신임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논리에 의해 교황의 신적 권위라는 정당화가 이루어진다.

이렇게 볼 때 가톨릭주의자들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표면적으로 인정하는 것은 성경 그 자체를 권위 있게 보려는 태도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런 권위 있는 성경을 결정할 수 있는 교회, 혹은 교황의 권위를 확보하려는데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성경의 권위를 역이용하여 교황의 권위를 부각하려는 것이다. 이는 실제 가톨릭의 교회 교육의 방식을 보면 확인된다. 그들은 성경 내용 그 자체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간직해온 전통이나 가톨릭 교리가 우선시된다. 뿐만 아니라 성경의 해석권이 교회에 위임되어 있어서 성경을 직접 대면하는 길이 개개인에게는 원리적으로 차단되어 있다. 다만 전통과 교리의 프리즘을 통해서만 보게 되어 있다. 여기서는 성경의 본래 의도가 드러날 수가 없다.

성경 계시의 종결성을 믿지 않는 신비주의자들의 성경관도 이와 유사한 방식이다. 그들도 역시 일반적인 의미에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인정하는 태도를 취한다. 그러나 신비주의자들은 성경 외의 또 다른 현재의 계시적 사건을 수용함으로써 사실상 성경의 권위를 정면에서 부정케 된다. 즉 그들은 지금도 하나님의 계시가 계속된다고 하는 계시관을 가짐으로써 정경적 권위를 가진 성경을 사실상 무효화하는 주장을 하게 된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기록된 성경이 아니라 현재 감각적으로 체험되는 계시적 사건이다. 그들은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이 아니라 비일상적 신비적 체험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거나 믿음을 확증하려고 한다. 환상, 입신, 예언, 방언 등이 구원 혹은 하나님의 임재의 징표로 받아들인다. 그들의 믿음의 표준은 객관적 성경이 아니라 주관적 체험인 것이다. 여기서 엄청난 진리의 왜곡과 혼란이 생긴다. 그들은 자신의 신비적 체험을 그대로 절대화하고 그 체험이 표준이 되고 토대가 되어 성경을 왜곡한다. 그중 특이한 신비적 체험을 한 자가 카리스마적 절대적 존재로 부각되고 그를 추종하는 자들이 생기게 되면 하나의 새로운 종파가 생겨난다. 이런 신비주의적 운동은 교회사에서 성경의 진리가 가리워 질 때마다 독버섯처럼 생겨났으며 이런 현상은 최근 20∼30년 동안 한국의 교회안에도 무섭게 번져 왔다.

결국 가톨릭주의자와 신비주의의 결정적 문제는 성경계시의 충족성 혹은 종결성을 믿지 않는 데 있다. 이는 앞으로의 성경해석의 틀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심각하게 검토될 것이다.


둘째 성경이 신적 영감을 지닌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는 자유주의신학자들의 견해를 검토해 보자.

인간 이성이 모든 진리 판별의 표준이요 권위로 부각되던 시기로 특징지워 지는 18세기 계몽주의 이후 본격적으로 태동되기 시작했던 자유주의신학에 의하면, 성경은 역사 가운데서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문서들의 집합에 불과하다고 한다. 19세기 문서설주의의 대표적인 인물인 벨하우젠에 의하면 성경은 고대 근동 지역에 굴러다니던 다양한 문서(J, E, D, P문서 등등)들의 모음집이다. 따라서 내용상의 통일성은 확보될 수 없으며 그것들은 역사적 오류를 면할 수 없다. 그리하여 성경이 인간 이성의 잣대에 의하여 비판되는 역사 비평(고등 비평)이 한 시대를 풍미하게 된다. 이는 그후의 궁켈로 대변되는 종교사학파에 의하여 더욱 과격하게 진행되고 20세기에 와서는 급기야 불트만에 의하여 성경은 당대 신앙 공동체의 삶의 정황에서의 욕구를 반영하는 한낱 신화들의 모음집으로 치부되고 하나님의 계시라는 말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성경관을 지니고 있는 자유주의자들도 그들 나름의 성경에 대한 가치 부여, 혹은 정당화의 방식이 있다. 물론 이때의 정당화 방식은 인본주의적이다. 그들은 성경이 오류로 가득찬 역사적 문서이지만 그 중에는 윤리적으로 고귀한 내용이 있을 수 있으며(특히 산상수훈) 또는 당대의 신화는 그들의 자기 이해 방식의 표현이므로 그것들을 오늘의 삶에 실존적으로 재해석할 수 있다고 간주한다(불트만). 그들의 눈에 비친 성경은 많이 봐 주어 인류의 여러 고전 중의 하나이다(안병무, 1972, P17). 다른 고전과는 달리 성경은 인간의 허물과 죄악상을 있는 그대로 폭로해 줌으로써 보다 건강하고 정직한 인간상을 창출하려는 인간주의적(humanistic) 의도를 가진 책으로 정당화될 뿐이다.

대략 이것이 19세기 이후 전개되어 온 자유주의신학의 성경관이다. 그들은 17세기 서양 과학혁명과 그 이후 전개된 계몽주의, 그리고 역사주의의 사상적 후예로서 인간이성의 자율성을 믿으며 그 이성의 심판아래 성경이 놓여져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자신의 신학체계 안에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운운 하는 것은 성경을 하나님의 계시로 보는 것이 아니라 실상 성경을 재단할 수 있는 인간 이성의 권능을 확대하려는 의도에서 이다. 이런 자유주의신학의 기획은 이제 자기모순에 빠져 그 유행의 종말이 보인다. 자유주의신학의 신학적 방법론인 역사 비평은 처음 시작될 때 성경에 표면적으로 보이는 오류, 모순의 문제(이때의 오류 모순은 어디까지나 성경을 보는 사람의 기준, 혹은 잣대를 전제한다. 한 사람에게 모순으로 보이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절묘한 논리적 거점으로 보일 수 있다.)를 해명하기 위해 시작된 작업이 점차 성경의 권위를 무너뜨렸고 따라서 하나님의 초월성을 제거시켜 갔다. 남은 것은 역사 내재적인 윤리적 추구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 논리적 극단인 불트만에 와서는 역사 마저도 믿을 수 없는 역사 회의주의에 빠지면서 단지 인간의 주체적 믿음만이 의미있을 뿐이라는 극단적 주관주의로 치달아 버리고 말았다. 성경에 대한 역사적 탐구가 역사자체를 불신하는 자기모순에 빠져 버린 것이다.

근대 사상의 이념에 토대를 두고 있는 자유주의신학은 이제 그 근대이념을 비판의 표적으로 삼는 포스트 모더니즘의 거센 출현으로 인해 자기 변신을 강요받고 있는 처량한 신세가 되고 말았다.


셋째 칼 바르트로 대변되는 신정통신학 계열의 성경관이다.

바르트의 성경관은 그의 신학이 말씀의 신학이라는 칭호에서처럼 얼핏 보아서 말씀의 권위를 매우 강조하므로 전통적 개혁신학의 성경관과 유사한 것으로 간주되고 수용되어 왔다. 그러나 바르트의 성경관은 그 실체를 면밀히 검토해 보면 그것 역시 근대 철학의 영향아래 있음을 알 수 있다. 바르트에 의하면 성경은 그 자체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기록된 명제적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면 절대적 신적 본질이 상대적 인간의 언어의 제한을 받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은 명제적, 객관적으로 주어질 수 없고 변증법적 활동으로써 인간의 실존에 충격을 가할 뿐이다. 이는 철학자 키에르케고르가 말한 신과 인간의 무한한 질적 차이라는 이원론적 주장에 근거한다.

그렇다면 바르트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운운한 것은 어떤 의미에서인가? 바르트에 의하면 성경은 그 자체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의 증거일 뿐이며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는 것은 별도의 절차가 필요하다. 즉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은 그것을 대면하는 인간이 거기에 실존적으로 반응할 때라고 말한다. 쉽게 말하자면 성경이란 인간이 기록한 오류가 있는 책에 불과하지만 인간이 그것을 의미 있게 수용하려는 주체적 결단에 의해서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become)는 것이다. 이는 성경보다 인간의 주체적 결단을 우위에 놓는 엄청난 귀결에 이른다. 이는 17세기 데까르트 이후 20세기 실존철학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던 인간 주체 의식의 철학의 절대적 영향아래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하여 바르트는 19세기 자유주의신학의 내재화를 비판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강조하는 듯 하였으나 키에르케고르의 실존철학에 의존한 나머지 결국 성경 그 자체의 권위보다는 인간의 주체적 결단을 우위에 놓는 그릇된 성경관을 주장하고 말았다.

마지막으로 전통적인 개혁신학의 성경관을 검토하고자 한다.

종교개혁 이후 전개된 개혁신학에서는 성경은 그 자체로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어 왔다. 성경은 여러 시대, 여러 기자들에 의하여 기록되었으나 한 분 성령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어졌기에 내용상 통일성이 있으며 사본상 혹은 번역상의 사소한 오류나 차이가 있을지라도 원본상 정확무오한 말씀으로 간주된다. 이 주장은 16세기 종교개혁시대로부터 주장되고 믿어져 왔으나 18세기로부터 전개된 고등 비평 혹은 역사 비평의 혹독한 비판을 받아왔다. 20세기말 현재에 와서는 소수의 보수주의 신학자들을 제외한 대다수의 신학자들에 의해서 조롱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러면 왜 이런 성경에 대한 개혁신학적 관점이 거듭되는 비판과 조롱의 대상이 되었는가? 그것은 필자가 볼 때 개혁신학자들이 성경의 진리성을 성경 내적인 논리를 통해 확증하지 못한 채 교리적 전제로써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형식적인 언명만을 강조해 왔거나 성경 외적 증거에 의해 정당화할려고 해왔기 때문이다. 성경이 절대적인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라면 그것은 성경 그 자체의 논리와 증거에 의해서 확증되어야 한다(이 주장은 논리적으로 순환 논리의 오류를 범하는 것으로 비판된다. 즉 증명해야할 주장을 그 주장의 근거로 삼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볼 때 성경은 특이한 자기 정당화의 방식을 가지며 형식적인 순환 논리의 오류를 벗어나는 장치를 갖추고 있다. 그것이 이 글의 후반부에서 밝히고자 하는 언약사적 논리이다.). 만약 그것이 성경 외적 논리나 증거에 의해 정당화를 시도한다면 이미 정당화 자체에 의문을 제기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 정당화에 동원되는 논리나 증거가 절대적 성경보다 낮은 수준이므로 그 정당화는 타당치 않게 된다. 비유컨대 권위있는 박사 학위논문을 수준 낮은 국민학생이 그 논리의 정당성을 말하려는 것과 같다.

이렇게 볼 때 이제 전통적으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맹목적인 강조는 그 시대를 마감하는 듯하다. 그것이 한 분 성령 하나님의 작품이라는 것을 성경 내적 논리와 근거에 의해 내용의 통일성을 보여 주어야 한다. 필자가 볼 때 전통적 개혁신학은 16세기 종교개혁때 그 역사적 소임을 충실히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후의 전개 과정에 있어서 너무도 세찬 인본주의적 신학 사조의 도전아래 방어적이고 소극적인 태도를 취한 나머지 과거의 불완전한 전통과 교리에 기대는 퇴행을 거듭했다. 루터와 칼빈이 발견했던 건전한 신학적 원리들(성경의 권위, 하나님의 주권, 이신칭의 사상, 하나님 영광)을 성경해석학적 논리에 의해 그 진리성을 확증해가지 못한 채 단편적 교리로서만 사용해 왔다. 그 결과 전통적 개혁신학은 폐쇄적 교리주의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채 신학적 퇴보를 가져 왔다(이 문제점은 독자들이 현존 보수주의 계열의 조직 신학이나 기타 서적을 참조해보면 금방 확인할 수 있다. 즉 주제에 대한 논리적 진전의 결핍, 교리들간의 모순과 상충, 주제에 대한 성경의 맥락적 이해의 부족, 주제에 대한 성경의 탈맥락적 인용 등등) 문제의 해결은 종전처럼 안이하게 교리만을 우선시 하여 강조하거나 성경이 무조건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역설하는데 있지 않다. 교리에 대한 성경해석학적 정당화를 시도해야 하며 또한 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지를 성경 내적 논리를 통해 찾아 내려고 해야 한다. 지금까지 개혁신학은 성경의 내용적 통일성의 근거로 구속사를 주장해 왔다. 그러나 구속사가 성경에 나타나는 중요한 주제 중의 하나임에는 틀림없으나 과연 그것이 성경 전체를 포괄하는 성경해석학적인 원리가 될 수 있는지는 검토의 여지가 있어 보인다.
이러한 문제점들이 지적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글의 입장은 전통적 개혁신학의 성경관이 타당한 것으로 받아 들인다. 물론 왜 그 입장이 타당한지는 이 글의 논의가 진행됨에 따라 밝혀질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해 본다.

Ⅲ. 성경 해석의 난점에 대한 역사적 고찰
 - 주관화의 난점을 중심으로-


우리는 앞의 논의를 통해 성경이 다양한 관점에서 이해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 다양한 견해 중에서 이 글은 성경이 그 자체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개혁신학적 전통을 올바른 관점으로 수용한다. 그러나 성경이 객관적이며 정확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전제하더라도 여전히 문제는 해석의 관점, 혹은 해석의 틀에 따라 서로 이질적인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즉 성경에 대한 동일한 관점을 견지하는 학자들간에도 성경에 대한 해석은 전혀 일치되지 않는 점을 우리는 쉽사리 발견하게 된다. 모든 신학적 작업의 원초적이며 궁극적 어려움은 바로 여기에 놓여 있다. 아무리 그럴 듯한 신학적 언어와 논리를 전개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주관적 성경해석의 산물이라면 그것은 헛된 수고에 불과하며 심지어 바른 신앙의 길을 왜곡하는 심각한 결과를 낳게 된다. 여기에 성경해석의 신학적 중요성과 심각성이 부각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씨름해야 할 심각한 문제는 어떻게 해야 성경해석의 객관성을 확보할 수 있느냐로 압축된다. 우리는 이 장에서 성경해석의 객관성 확보(달리 말하면 성경의 본래 의미를 그대로 드러내는 일)가 얼마나 지극히 어려운 작업이었는가를 역사적으로 고찰해 봄으로써 성경해석의 본질적 난점인 인간 주관의 개입의 문제를 소상히 드러낼 것이다. 그리고 다음 장에서 그 극복의 논리는 무엇인가를 탐색해 보고자 한다.

1. 초대 교회 시대
예수님 부활 승천후 사도시대를 통해 성경이 기록된다. 이 시대 바로 직후부터 성경해석의 문제가 발생한다. 초대교회의 대표적인 이단이었던 말시온(Marcion;100∼165)은 구약과 신약간에 내용적 통일성이 없다고 생각했다. 즉 그는 신약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지만 구약의 하나님은 물질 창조와 진노의 하나님으로써 구약의 창조주가 예수님의 아버지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말시온은 초대 교회에 성행했던 영지주의적 이원론, 즉 물질은 악하고 영혼은 선한 것으로 보는 사상의 영향으로 선하신 하나님이 물질 창조를 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구약의 물질 창조의 하나님이 진정한 하나님이 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앞으로 계속되는 역사적 고찰에서 이와 같은 오류가 확인되겠지만 말시온의 오류는 결국 성경 밖에서의 해석의 틀(영지주의적 사상)을 가지고 성경에 뛰어 든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해석의 틀에 성경내용을 자의적으로 짜 맞추고 그 틀에 부합하지 않는 성경은 배제시키는 오류이다. 우리는 이런 해석을 ‘성경의 외재적 해석’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이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올바른 해석을 우리는 ‘성경의 내재적 해석’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것은 성경 해석의 틀을 성경 안에서 찾아내는 것이다. 필자의 입장은 성경은 절대적 권위의 말씀으로써 성경 밖의 해석의 틀을 가지고 들어갈 수 없다고 본다. 만약 그렇게 되면 외재적 해석의 틀에 의해 성경의 절대적 내용이 왜곡 환원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점은 앞으로 논의가 진행될수록 더욱 밝히 드러날 것이다.

초대교회시기는 여러 학파로 나뉘어져 전개되어 갔다. 이 글에서 성경해석문제와 관련해서 검토할 대상은 알렉산드리아학파의 오리겐(Origen, 185∼254)과 안디옥학파의 크리소스톰(Chrysostom, 347∼407), 그리고 교부신학의 완성자 어거스틴(Augustine, 354∼430)이다. 이들은 초대교부시대의 성경해석의 대표적 경향을 반영할 뿐 아니라 문제점도 잘 노정시키고 있다고 보인다.
먼저 오리겐의 성경해석의 방법을 검토해 보기로 하자. 오리겐 성경해석의 가장 기본적인 특징은 우화적(allegorical: 풍유적)해석이다. 그는 인간의 삼분설에 근거하여 육은 문자적 의미, 혼은 도덕적 의미, 영은 우화적이거나 신비적 의미의 근거라고 보았다. 오리겐은 이런 삼중적 의미를 말했지만 실제로는 문자적 의미는 거의 언급하지 않았고 도덕적 의미도 아주 가끔 언급하면서 창조 기사뿐 아니라 율법, 역사, 예언서까지도 우화적으로 해석하는데 주력하였다. 우화적 해석이란 성경의 문맥 혹은 역사적 맥락을 일차적으로 고려하는 것이 아니라 해석자의 주관적 전제를 가지고 성경의 사건들을 자의적으로 짜맞추어 그럴듯한 이야기로 재구성함으로써 사실상 해석자의 기존 생각의 구도에 성경의 부분적 내용을 변조, 변용하게 되는 지극히 주관적인 해석의 모델이다. 여기에서는 성경의 본래 의미는 완전히 탈색되고 만다. 이런 성격을 가진 오리겐의 우화적 해석은 어거스틴을 거쳐 중세로 전승 심화됨으로써 중세 암흑기의 결정적인 원인이 된다.

이제 검토할 안디옥학파는 알렉산드리아학파에 비하면 훨씬 더 건전한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안디옥학파의 대표적 인물인 크리소스톰의 성경해석 방법은 우화적 해석을 견제하고 문법적 역사적 해석을 추구했다. 이 입장은 나중 종교개혁 시대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또한 이 학파의 장점은 성경의 통일성을 확신한 것이다. 물론 성경의 통일성이 기독론적인 편협성은 띠고 있지만 이 통일성의 관점은 성경해석의 내적 틀을 결정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이는 다음 장에서 집중적으로 거론될 것이다. 이처럼 안디옥학파는 대체로 건전한 해석 방법을 활용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학파의 문하였던 네스토리우스의 기독론의 이단성으로 말미암아 안디옥학파는 정통에서 떠났다는 비난을 받게 되었고 따라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었다. 안디옥학파의 견제가 없는 상황에서 알렉산드리아학파는 더욱 더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고 우화적 해석은 날로 성행하게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앞으로의 논의를 위해 한 가지 짚고 나가야 할 중요한 점이 있다. 안디옥학파의 문법적 역사적 해석은 올바른 성경해석의 매우 중요한 요소이며 우화적 해석에 비해 훨씬 건전한 입장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다음 장에서 더 논의되겠지만 문법적 역사적 해석은 성경해석의 일차적 과정에 불과하다. 이것만을 부각하거나 혹은 이것이 올바른 신학적 해석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성경은 단지 인간의 글이나 역사적 문서로 전락될 위험성을 내포한다. 실제 종교개혁 이후 자유주의신학 진영의 성경해석의 역사는 그렇게 진행되었다. 여기서도 우리는 성경해석의 포괄적 틀의 정립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확인할 수 있다.

이제 초대 교부신학의 완성자라고 하는 어거스틴의 성경해석의 방법을 검토할 차례이다. 어거스틴은 기독교인이 되기전 마니교를 믿었다. 그런데 마니교는 과격한 문자주의를 따랐다. 그러므로 구약 이해에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어거스틴이 마니교의 문자주의에 의해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어거스틴의 스승 암브로스는 우화적 해석으로 구약의 많은 부분을 어거스틴에게 이해시켰다. 어거스틴의 우화적 해석의 성경적 근거는 고린도후서 3장 6절의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였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죽이는 것이요, 우화적으로나 영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살리는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고린도후서의 전후 문맥을 고려치 않은 잘못된 인용이다. 고린도후서의 맥락은 어떤 성경해석의 원리를 언급하는 것이 아니다. 그 말씀의 흐름은 이러하다. 구약의 의문의 법, 즉 계명은 죄인인 인간을 정죄하고 죽이는 법이며 이제 그리스도가 오셔서 그 정죄를 대신 담당하시고 죽으심으로 성도는 죽음에서 해방되고 구원의 확증으로 성령께서 성도의 마음속에 심비의 법을 새겨 놓으신 복음의 원리를 설명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 말씀은 우화적 해석의 인용 귀절로 사용될 수 없음이 분명하다.

여기서 어거스틴의 우화적 해석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해석인가를 예를 들어 증명해 보기로 하자. 어거스틴은 요한복음 2장에 나타난 예수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든 사건을 이해할 때 물은 구약 예언을 의미하고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시각에서 본 예언을 의미하며 6개의 물항아리는 인류 역사의 6시대를, 두 세통은 삼위일체를 뜻한다고 해석했다. 그러나 이 사건은 그렇게 다양하고 엉뚱한 의미를 갖고 있는 말씀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께로서 오신 신성을 가진 그리스도임을 증거하기 위한 표적적 사건이다. 예수님은 그것을 통해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시어 제자들로 하여금 믿게 하시려는 데(요 2:11) 그 목적이 있다고 성경 자체가 증거하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사건의 세부적 내용인 물이나 포도주, 그리고 6개의 물항아리가 각각 무엇을 의미하느냐가 아니라 그 놀라운 표적 사건을 통해 예수 자신이 신성을 가진 그리스도임을 드러내는 데 있다. 그것이 제자로 하여금 믿게하는 근거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어거스틴의 우화적 해석은 그 사건이 위치하는 본문의 본래 의도는 사라져 버리고 엉뚱한 주관적 의미 부여만이 전면에 드러나게 된다. 이런 식의 해석은 해석자마다의 온갖 방식의 난삽한 해석을 낳을 수 있다. 이런 어거스틴의 해석의 방식이 중세기의 해석방법으로 그대로 이어진다.

이쯤의 논의를 통해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초대 교회의 대체적인 성경 해석의 경향은 성경의 흐름과 객관적인 기록 목적을 확인하지 못한채 성경 내용이 해석자의 주관적 전제와 의미부여에 의하여 심히 왜곡된다는 것이다. 이런 성경 해석의 주관화 현상은 중세 천년을 거치면서 더욱 심화되고 16세기 종교개혁을 통해서 전면적으로 비판되었다. 그러나 이 현상은 17세기 이후 정통 교회의 교리주의적 해석과 18세기로부터 태동된 철학적 전제의 조종을 받는 자유주의신학에 의해 양상은 다르지만 그 성격은 동일하게 되살아 났다.

2. 중세 교회 시대
중세의 성경 해석은 하나의 본문이 4중적 의미를 가진 것으로 요약된다. 이 주장은 중세의 대표적 신학자인 아퀴나스에 의하여 다음과 같이 정당화된다. 즉 신의 지능은 무한하다. 따라서 성경의 귀절들은 여러 의미를 갖는다. 그리하여 한 본문이 문자적 의미 외에도 신앙을 위한 우화적 의미, 행위를 위한 도덕적 의미, 미래 삶을 위한 천상적 의미를 보여 준다고 했다. 이런 4중적 의미의 극단적인 결과는 이사야서 1장에 관해 24권의 책이 집필된 것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여기서 우리는 왜 이런 해석이 생겨나게 되었나를 분석할 필요가 있다. 첫째 그것은 기본적으로 성경이 하나님의 계획된 의도에 의한 하나의 통일된 의미를 갖고 있는 책이라는 사실을 간과한데 있다. 성경 본문에 대한 다양한 의미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허용될 수가 없다. 만약 하나의 본문에 두 가지의 해석이 생긴다면 그 두 가지 해석 모두가 타당할 수는 없다. 둘 중의 하나가 맞거나 아니면 둘 다 틀리는 것이다. 아퀴나스는 앞에서 언급한 대로 성경 본문이 다양한 의미를 갖는다는 근거로 신의 지능의 무한성을 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타당한 근거가 아니다. 신의 지능이 무한하다고 해서 당신의 뜻을 다양하고 혼란스럽게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고린도 교회가 혼란스런 예언과 방언으로 하나님의 뜻을 명료히 깨닫지 못하고 혼선을 빚고 있을 때 바울은 하나님은 결코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라고 말함으로써(고전 14:33) 하나님의 지혜는 무질서 하지 않고 명백히 자신의 뜻을 계시하심을 말하고 있다. 실상 진리의 제일 조건은 통일성(Einheit)이다. 뜻이 통일되지 않고서는 그것은 진리의 값어치를 기본적으로 가질 수 없다. 성경의 의미적 통일성을 전제할 때 성경의 특정 본문은 그것이 전후 문맥과 분리되어 독자적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전체의 맥락 속에서 그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특정 본문의 해석은 성경전체의 의미에 비추어 올바르게 해석될 수 있다. 아퀴나스로 대변되는 중세 성경해석학은 이점을 간과함으로써 성경의 전체 맥락을 놓쳐 버리고 인간의 주관적 자의적 해석만이 난무하게 되었다.

중세의 4중적 해석의 또 한 가지 이유를 우리는 지적할 수 있다. 그것은 교부 시대로부터 전승되어온 성경에 대한 주석의 경향을 반영한다. 교부 신학이란 주로 성경의 전체 맥을 잡지 못하고(그 당시는 요즘처럼 성경이 한권으로 묶여 있지 않았기 때문에 낱권의 성경을 대면할 수 밖에 없었다.) 성경의 귀절들에 대해 단편적 주석을 가하고 그에 따른 단편적 교리를 형성하던 차원이었다. 그리고 그 주석은 주로 말씀을 가급적 넓게 적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점차 주석을 확대하는 경향이 생겨났고 이 때문에 한 본문에 다양한 의미 부여가 발생하게 된 것이다.

이런 단편적 주석과 한 본문에 대한 다양한 의미 부여는 오늘날까지 전승되어 신학의 대종을 이루고 있다. 그것은 소위 주경신학이라고 한다. 그런데 곰곰히 생각해 보면 이런 식의 성경 주석방법에는 엄청난 문제점이 도사리고 있음을 간파할 수 있다. 성경의 특정 본문은 앞에서 언급한 대로 성경 전체의 맥락적 의미와 분리되어 독립적 의미를 갖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전승된 주경신학의 연구 경향은 성경 전체의 흐름을 의식하지않고 각 절의 본문을 분석하고 각기의 의미를 파악하는 경향을 띠고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주석은 그 이전의 주석을 참조하기 때문에 갈수록 해석은 다의성을 띠어 간다. 어떤 경우에는 한 단어의 뜻을 깊이 연구한다는 명분아래 한 단어가 가질 수 있는 온갖 의미를 드러내는 경우도 있다. 지엽적인 분석에 분석을 가한 나머지 정작 파악해야 할 전체적 의미는 상실해 버린 꼴이 되고 말았다. 비유컨대 타자수가 글자 한자 한자에 집중하면 전체 글의 의미는 파악할 수 없는 것과 동일하다. 이와 같은 단편적 주석과 다양한 의미 분석이 갖고 있는 폐해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심각하다. 이는 해석의 난삽성을 증가시킬 뿐 아니라 성경의 흐름을 보는 눈을 갖지 못하게 하는 결정적인 오류를 갖고 있다. 이런 문제점의 극복은 결국 성경전체의 단일한 의미에 대한 명료한 파악으로부터 가능하다. 이는 다음 장에서 본격적으로 다루어 질 것이다.

3. 종교개혁 시대
16세기 유럽 대륙의 신앙적 지각변동을 가져왔던 궁극적 힘은 결국 종교개혁자들의 건전한 성경 해석으로 말미암았다. 루터는 중세의 우화적 해석을 배격했고 성경에는 하나의 근본적인 의미만 있다고 강조했다. 소위 복합적인 지성(multiplex intelligentia)이 성경의 전체적인 의미를 파괴했고 또한 성경의 확실한 의미를 파괴했다고 보았다. 루터는 우화적 해석을 가르켜 “해석자의 독창성을 보여주기 위한 원숭이의 장난”이라고 말하고 문법적 역사적 해석에 강조를 두는 건전한 면모를 보였다. 그러나 그는 모든 성경을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해석을 시도하여 소위 후대 개혁 교회의 구속사 신학의 원형을 제시하였고, 이는 성경을 인간의 구원에 관한 교리로 환원(reduction)시키는 편협성을 드러내었다. 필자는 이런 루터의 관점을 역사적 맥락에서는 긍정적으로 수용하지만 인간의 구원을 중핵으로 하는 구속사 신학은 성경 전체의 사상을 드러내는데 한계를 보인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터의 성경해석의 관점은 중세의 우화적 해석을 극복하고 성경의 단일한 의미에로 우리의 관심을 기울이게 한 점에서 매우 중요한 공헌을 한 것으로 보인다.

루터보다도 더 체계적이고 포괄적인 신학 사상을 가졌던 칼빈은 기본적으로 문법적 역사적 해석 방법을 따랐으며, 그는 그의 신학적 입장이 성경해석을 결정하지 않도록 애썼다. 오히려 성경해석을 통해 신학이 정립되도록 노력했다. 칼빈은 우화적 해석이란 성경의 뜻을 모호하게 만드는 사단의 궤계라고 간주했으며 성경은 성경이 해석한다(scripture interprets scripture)고 말함으로써 필자가 볼 때 가장 기본적인 성경해석의 원칙을 수립했다. 또한 칼빈은 “해석자의 제일 임무는 저자가 무슨 말을 해야 할 것이라고 우리 생각을 말하는 대신에 저자가 말한 것을 저자로 하여금 말하게 하는 것이다”라고 말함으로써 성경해석의 객관성의 원칙을 언명했다. 뿐만 아니라 칼빈을 통해 문법적 역사적 해석 방법이 더 튼튼한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지금의 입장에서 볼 때 칼빈도 역시 구체적인 해석 작업에서 자기가 세운 해석의 기본 원칙과는 어긋나는 미숙성을 노정한다. 칼빈은 구약 율법을 신약의 그리스도가 성취할 복음의 그림자로 해석하지 못하고 오늘도 지켜야하는 도덕법으로 봄으로써 당대 스콜라 신학의 도덕주의적 율법해석을 완전히 탈피하지 못함을 보인다. 뿐만 아니라 신학의 체계가 사도신경적 논리를 따름으로써 루터를 보다 확충적으로 계승한 모습인 구속사적 성경 해석의 틀에 의한 체계로 이루어진다. 칼빈의 대표작인 기독교 강요에서 그 골격을 드러낸 구속사적 신학체계는 그 이후 개혁신학의 확고 부동한 성경 해석의 기본틀이 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개혁신학은 구속사적 논리의 편협성을 벗어날 수 없었다.
실상 개혁자들의 구체적인 성경해석 작업은 지금에 드러난 성경 전체의 골격에 비추어 보면 매우 단편적이고 지엽적인 한계를 드러낸다. 그러나 필자가 볼 때 성경 해석사에 있어서 종교개혁의 위대한 공헌은 혁혁하다. 그것은 다름 아닌 올바른 성경해석의 기본 원칙의 수립에 있다. 즉 성경이 권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는 교황 권위의 부정을 의미), 그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누구나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는 사제만의 성경 해석 권리 부정),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는 성경의 외재적 해석 부정)이다. 그리고 성경에는 하나의 근본적인 의미만이 있다는 것(이는 성경의 다중 해석의 오류 지적) 이것들은 모두 오늘날의 시대에도 보편적으로 타당한 성경 해석의 명제들이다.

4. 고백주의 시대
종교개혁기를 지나면서 또 다시 다양한 신학적 해석과 견해가 속출하게 되었고 따라서 개혁 교회는 자기 정체성(self-identity)의 확립을 위해 믿는 바를 공식화하는 교리화 작업에 착수하게 된다. 그것이 16세기말부터 18세기까지의 개신교 정통주의라는 시대이다. 이 시대는 종교개혁기의 생동감이 점차 사라지고 고정화 되어간 교리의 반복적 주입과 교육이 이루어졌으며 성경 해석의 결과로 생겨난 교리적 틀이 오히려 성경을 보는 눈을 규정하고 그 틀에 의해 성경이 해석되고 재단되는 교리주의의 폐해가 생겨났다. 당대의 교리는 정통과 이단을 구분하는 절대적 기준으로 자리 잡고, 점차 성경 본문보다 교리가 우선시되는 주객 전도의 상황이 연출되기 시작했다. 이런 교리주의적 성경 해석은 정통임을 자부하는 개혁신학 속에 뿌리 깊게 정착되었고, 그 현상은 지금도 계속되는 실정이다. 이것은 교리의 본래 취지를 벗어난 불행한 사태라고 보인다.

교리화 작업은 언제나 도전해오는 비진리의 세력을 방어하고 자기확립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다. 그리고 당대의 교리는 그 당시로서는 최선의 성경 해석의 작업을 통한 결과이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해석의 절대적 전제와 규범으로 기능해서는 안된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성경보다 더 상위의 권위가 되기 때문이다. 교리는 당대로서는 최선의 주장이지만 그것은 언제나 잠정적인 것으로 보다 더 포괄적인 해석의 틀에 의해서 확충되거나 보완, 혹은 수정될 수도 있다. 성경의 절대적 권위를 믿었던 칼빈은 이 점을 예민하게 의식하여 자신의 신학적 주장이 언제라도 성경의 주장과 어긋남이 드러날땐 비판되어야 함을 강조했으나 그 후계자들은 이런 정신을 계승하지 못한 채 교리주의의 악습이 점차 강화되어 갔다. 이는 훗날 자유주의신학 태동의 간접적인 빌미가 되고 만다.

5. 19∼20세기 자유주의신학의 시대
17, 18세기를 거치면서 교리주의 폐쇄성에 지성적 회의와 답답함을 느끼는 지성인들이 기존의 기독교를 반발하기 시작했고 그와 더불어 태동되기 시작한 과학 혁명에 따른 서구라파 계몽주의의 영향아래 점차 성경을 역사적 문서로 규정하기 시작했다. 이때로부터 오늘날 자유주의신학 계열의 신학 방법론의 근간을 이루는 역사 비평 혹은 고등 비평의 시대가 전개되었다. 성경의 신적 권위가 무너져 내리자 성경 해석의 새로운 원칙이 수립되었다. 즉 성경을 당대의 시대 정신에 의하여 번역하는 신학의 철학화 작업이다. 종래에는 성경의 내용이 절대적이므로 당대의 시대 정신은 성경의 표준에 의하여 비판 받아야 했다. 그러나 그 시대 이후 자유주의신학에서는 오히려 당대의 철학 사상, 혹은 시대 정신이 표준이 되어 성경을 재구성, 재해석하게 되는 것이다. 칸트의 인식론의 영향하에 태동된 슐라이어막허의 인간 감정에 기초한 신학, 칸트의 도덕론의 절대적 영향하에 전개된 리츌의 도덕적 신학, 헤겔 철학의 영향으로 개진된 슈트라우스의 초자연성이 제거된 역사적 예수의 탐구 등 19세기 신학의 특징은 철저한 신학의 철학화 현상이었다. 이때는 이미 성경의 객관적 진리라는 명제는 사라져 버렸고 철학적 해석의 틀을 가지고 성경을 재구성했다. 이 현상은 20세기 현재까지 소위 현대 신학의 현란한 자기 변신의 작업속에서도 확인된다.

우리는 여기서 20세기에 전개되는 다양한 현대 신학의 성경 해석학적인 경향을 일일이 서술하기보다는 왜 그들이 성경을 그렇게 주관적으로 해석하게 되었는가를 이 글에 목적에 비추어 검토해 보기로 하자. 19세기 자유주의의 신학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취한 칼 바르트는 어떤 성경 해석적 태도를 취했는가? 그가 자유주의신학의 내재성을 비판하고 말씀을 강조했기 때문에 전통적 개혁신학의 입장과 유사해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칼 바르트는 우리가 이 글에서 집중적으로 거론하는 성경해석의 주관화의 문제를 의식했다. 그는 인간이 성경을 해석할때 아무런 선입견없이 가능한가를 가지고 고심했다. 우리가 성경을 대면할 때 도무지 아무런 전제없이 백지 상태로 뛰어들 수 있는가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그것은 불가능함을 시인한다. 그러면 주관화의 문제는 어떻게 극복될 수 있는가? 바르트에 의하면 해석자의 신앙의 순종에 달려있다고 보았다. 신앙의 순종이 이루어질 때 만이 성경을 읽는 자가 “자기 자신의 관심사와 질문의 체계로부터 벗어 나서 자기 자신의 초점을 성경 말씀에만 집중시킬 수 있다”라고 했다(베버, 1976, pp. 70∼71). 이 말은 바르트 신학의 성격 전체를 파악하지 못하면 신앙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대단히 건전한 주장처럼 보인다. 그러나 바르트가 이때 말하는 신앙이란 성경적 의미가 아니라 실존 철학에서 말하는 인간의 주체적 실존적 결단을 뜻한다. 바르트에 의하면 성경은 그 자체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기록된 성경보다 해석하는 인간의 주체적 반응과 믿으려는 결단이 중요하다. 결국 바르트의 성경해석은 자유주의신학과 양상만 다를 뿐 본질상 동일한 성격인 인간의 주체적 결단에 의한 주관화의 경향을 띤다.

바르트의 고민에서도 나타났지만 인간의 해석 활동을 조금이라도 반성해보면 어느 누구도 백지 상태로 즉 객관적으로 성경을 볼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어떤 수준과 내용이든지 모종의 전제를 가지고 해석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는 지금까지의 역사적 고찰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그렇게 되면 과연 성경은 영원히 객관적으로 드러날 수 없으며 따라서 객관적 진리 검증이라는 것도 불가능한 것이 아니냐는 문제가 제기된다. 여기에 대한 원리적이며 구체적인 해답의 모색은 실로 매우 심각한 문제이다. 이에 대한 해답 없음은 필연적으로 기독교의 절대적 독자성을 훼손시키는 종교 다원주의로의 진입을 의미한다. 오늘날의 신학의 분위기는 이미 포스트 모더니즘의 시대 정신과 맞물려 이 방향으로 대세는 기울어졌고 앞으로는 더욱 가속화 될 전망이다.

이 부분을 철학적으로 분석한 자가 바로 포스트 모더니즘의 선구자로 알려진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이다. 그에 의하면 전제 없는 해석이란 아예 없으며 세계 내에 던져진 인간의 실존은 신의 자리에서 세상을 보는 것과 같은 객관적 관찰이란 불가능하다고 했다. 인간은 어떤 책이나 사물을 보든지 이미 가지고 있는 전제를 투사(project)하여 그 대상에 접근할 수밖에 없으며 그 전제의 투사에 의해 각색된 내용이 다시 원래의 의식에 영향을 주는 해석학적 순환의 고리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하이데거의 주장에 의하면 인간의 해석의 객관성 확보라는 명제는 아예 있을 수 없는 허구이거나 자신의 주관성을 은폐하기 위한 술책에 불과하다. 해석이란 오로지 주관적이어야 함을 천명한 셈이다.

이런 하이데거의 영향아래 신학을 전개해 간 자가 불트만이다. 불트만에 의하면 성경이란 당대 떠돌아 다니던 다양한 양식으로 된 구전들의 모음집일 뿐이며 그 구전들은 하나님의 초월적 계시의 말씀이 아니라 당대 신앙인들의 자기 이해 방식의 표현일 뿐이다. 불트만에 의하면 예수의 행적은 역사적으로 확인될 길이 없으며 성경에 나타나는 신화적 사건은 사실이 아니며 초대 교회 공동체의 당대적 신앙의 산물일 뿐이다. 그러므로 오늘을 사는 우리들은 그 신화적 표현들을 그대로 믿을 것이 아니라 우리 시대의 실존적 해석의 틀에 의해서 재해석해야 한다고 했다. 이것이 그 유명한 불트만의 비신화화 해석 방법이다. 불트만은 하이데거의 해석의 원칙과 실존적 현존재 분석을 너무도 충직하게 잘 따름으로써 성경의 독자적 의미는 철저히 배제되었고 성경 해석은 완전히 인간의 주관적 사고의 방법에 종속되어 이루어졌다.

우리는 지금까지 긴 역사적 고찰을 통해서 그리고 특히 현대 신학에 와서 과격화된 성경해석의 주관화 현상을 확인했다. 현대 신학은 실제 그들의 철학적 해석의 방법에 의해 이루어짐으로 표현하는 언어는 신학적으로 현란하지만 실상 그 내용은 인간적 주관의 구성이 되고 말았다. 이는 기독교 진리의 자기 정체성의 포기와 기독교 신앙의 독자성의 상실을 의미한다. 이는 결국 성경해석의 성경적 원리의 미확인으로부터 말미암는다. 우리는 다음 장에서 그 극복의 실마리를 잡아가보도록 하겠다.

Ⅳ. 성경해석의 성경적 원리
- 성경신학의 관점에서 -


우리는 위의 논의를 통해 성경의 해석에 인간의 주관이 얼마나 많이 개입하여 왔는가를 생생하게 확인했다. 또한 우리 인간의 해석적 인식론적 과정을 살펴 볼 때 실제 인간의 해석적 활동에 인간 주관의 개입은 필연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 문제의 극복은 어떻게 가능한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는 객관적 해석이란 근원적으로 불가능하다. 어느 누구도 백지 상태에서 성경에 뛰어들 수는 없다. 모종의 주관적 관점으로 보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의 객관적 해석이란 원천적으로 포기되어야 할 허무맹랑한 이상에 불과한가? 그렇지 않다.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께서 하신다. 즉 성경을 기록하게 하신 객관자이신 성령께서 우리 마음 가운데 오셔서 인간의 해석 활동을 주관할 때 가능하다. 이는 알고 보면 너무도 자명한 이치이다 어느 한 편의 고상한 시(詩)가 있다고 하자. 그 시가 진정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가를 읽는 사람마다 나름대로 감상할 수 있다. 그러나 감상자들이 참으로 그 시의 원래의 뜻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느 누구도 저자의 미묘한 감정과 고매한 뜻을 완벽하게 느낄 수는 결코 없다. 그 시가 표현하고자 하는 의미는 영구히 저자 자신만이 알 수 있는 것이다. 저자가 말하지 않는 한 그것은 영원한 미스테리일 뿐이며 온갖 다양한 해석과 감상은 나름의 권리 주장이 있을 뿐 어느 것도 확정적이지는 못하다.

이와 똑같은 이치로 성경의 본래의 뜻은 성경의 원 저자(Auctor primarius)이신 성령의 사역이 아니고서는 확인될 길이 없는 것이다. 우리가 미숙하지만 성경의 본래 뜻을 조금이나마 깨닫는 것은 이미 성령께서 우리 마음 가운데 오셔서 성경의 뜻을 알아가도록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진리 발견의 공로는 전적으로 성령 하나님의 사역인 것이다. 이는 우리가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고찰해 보면 잘 나타난다. 예수님께서는 천국의 복음을 전하지만 제자들은 도무지 깨닫지 못하고 누가 좌우편에 앉게 될 것인 가로 논쟁했으며(마 18:1∼5; 막 9:33∼37; 눅 9:46∼48) 베드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했으나 정작 예수님이 그리스도로서 죽음을 예고 했을때 이를 수용하지 못했다(마 16:13∼24). 또한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하늘로부터 온 생명의 양식이 있음을 말했을 때 제자들은 이를 육신이 먹는 양식으로 오해했다(요 4:31∼34). 이런 제자들의 처지를 아신 예수님께서는 진리의 영이신 성령을 보내 주시기로 약속하셨고(요 14:25∼27) 그 약속대로 성령이 강림한 것이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이 오순절에 강림한 후에 제자들은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참으로 깨닫고 변화하게 된 것이다. 이처럼 성령만이 진리를 깨닫게 할 수 있는 권능을 가진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하여 진리를 발견할 수 없는 존재라는 기독교의 특유의 인간관과 맞물려 있다.

그러나 문제는 여전히 존재한다. 예컨대 두 사람의 해석자가 나름대로 성경을 해석한 뒤 그것이 성령의 사역이라고 각각 주장할 때 어느 내용이 성령의 사역인지를 확인 검증할 수 있는가? 그래서 우리는 성경의 객관적 진리 발견이 성령의 사역임을 주장하는 동시에 그것의 객관적인 검증은 여전히 성령의 작품인 성경 자체의 논리와의 부합여부에 의존해야 한다. 이를 위해 먼저 우리는 성경의 기록 목적이 무엇이며 그 일관된 논리의 틀이 무엇인가를 성경 안에서 확인해야 한다. 이것이 확인되지 않을 때 우리는 어떤 해석을 평가할 수 있는 기준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글의 기본 입장은 성경이 한 분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책이므로 그 구성 내용이 얼핏 보기에 다양한 사건과 교훈으로 되어 있는 것같아 보이지만 그 깊이를 들여다 보면 의미상의 일관성을 유지하는 것으로 간주한다(이 주장은 물론 성경 내용을 통해서 입증되어야 한다.). 그래서 66권의 기록 목적도 역시 단일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면 성경의 기록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자기 계시(self-revelation)이다. 이것은 너무도 기본적인 주장 같으나 실상 모든 성경 해석의 문제는 이 기본적인 주장을 일관되게 유지하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다. 인간은 타락이후 자신들의 이성의 능력으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기에 하나님께서 특별계시를 통해 자신을 계시했고 그 하나님 지식을 통해 하나님 당신을 경외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이 관점이 타당하다면 성경의 모든 내용들은 이 단일한 목적을 위한 도구적 방편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구약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 인간의 타락과 구원, 예수의 오심과 죽으심 그리고 부활 성령의 강림, 교회의 설립과 성장, 성도의 생활 등등 성경의 모든 사건들은 그것 자체로 무슨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들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자신의 능력과 영광과 자비를 드러내는(계시하는) 방편들이다. 비유컨대 하나님은 거대한 건축자이시고 성경의 다양한 사건들은 하나의 건축물을 이루는 데 필요한 요소들이다. 그래서 그 다양한 요소들이 결합되어 완성된 건축물은 건축자의 능력과 솜씨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의 대개의 성경해석을 보면 위에서 언급한 기본적인 입장에서 벗어나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성경이 마치 논어 맹자와 같은 차원의 인간 행동의 도덕적 규범으로 제시되거나, 혹은 사회정의나 사회개혁을 위한 지침서로서 사용되기도 한다. 심지어는 세속적인 축복의 교과서로도 활용된다. 이들 모두는 성경의 근본 기록 목적을 상실한 채 인간 중심의 선입견을 가지고 성경을 부분적으로 그리고 탈맥락적으로 활용하는 데서 생겨난 오류이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서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다. 성경의 기록 목적이 하나님이 어떠하신 분이심을 알려주는 데 있다면 그 구체적인 방법은 무엇인가? 이다. 그저 이런 저런 사건들을 아무런 질서 없이 보여주는 것은 아닐 것이다. 드디어 우리는 성경의 내재적인 해석적 논리를 확인할 단계에 온 것이다.

우리는 앞에서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한다는 종교개혁자들의 주장이 타당함을 언급했다. 여기서는 그 타당성의 이유를 밝히고자 한다. 필자가 믿건대 성경은 절대주권자 하나님이 드러내어 보여주신 계시 진리로서 인간의 머리에서는 생산될 수 없는 절대적 권위와 독자성을 지닌다. 그러한 성경이 만약 성경 밖에 있는 해석의 틀을 빌려와서 해석된다면 그것은 반드시 그 해석의 틀이 지니는 수준으로 환원되어 해석되거나 왜곡된다. 비유컨대 아버지의 말씀을 어린 자식의 수준에서 왜곡되어 이해되고 만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말씀은 올바르게 이해 해석하려면 그 수준과 동등하거나 그 이상이어야 한다. 그런데 성경은 절대적 독자성을 지님으로써 어떤 성경 밖의 해석의 틀은 성경보다는 하위의 수준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성경의 올바른 해석의 틀은 성경 자체 안에 내재될 수밖에 없음을 우리는 논리적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것이 종교개혁자들이 말한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말이 지닌 함축적 뜻이다. 그러므로 올바르게 성경을 해석하기 위해서 우리는 성경 안에 성경을 해석할 수 있는 해석의 틀을 찾아내도록 해야한다.


그렇다면 성경의 내재적 해석의 틀은 무엇인가? 전통적으로 개혁신학에서는 구속사적 논리라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필자가 보건대 인간의 구원을 중핵으로 하는 구속사적 해석은 성경의 중요한 하나의 하위주제일 수 있지만 그것이 성경전체를 포괄하는 원리적 틀로써 기능할 수가 없어 보인다. 왜냐하면 우리는 앞에서 말한 대로 성경의 기록목적이 하나님 자신의 계시이며 인간의 타락과 구속은 하나님 계시의 여러 방편중에 부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구속 이외에 창조, 섭리, 성령의 강림, 교회의 설립과 성장 등 많은 하위 주제들을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보다 원리적인 해석의 틀을 찾아내지 아니하면 안된다.

필자가 볼 때 최근에 논의되고 있는 박용기 목사가 제창하는 성경신학(Bible Theology)이 그 대안으로 보인다. 박용기 목사의 성경신학에 의하면 성경의 내재적 해석의 틀은 언약과 성취라는 골격으로 된 언약사적 구조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계시하시기 위해 언약과 성취라는 방편을 사용하셨다는 것이다. 인간의 구속은 언약의 성취과정상의 방법이며 언약의 내용이 하나님 나라라고 규정한다. 따라서 인간의 구속이나 언약의 내용으로서의 하나님의 나라는 성경의 중요한 요소들임에는 틀림없으나 그것들은 성경자체의 흐름을 포섭하는 해석학적인 틀로 격상되어서는 안된다. 이제 성경신학이 말하는 언약과 성취라는 해석적 틀이 참으로 타당한 논리이며 그것이 성경에 붙박혀 있는 내재적 논리인지를 성경자체의 흐름을 통해서 확인해 보도록 하겠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언약의 최초 형태는 창세기 1장 28절이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 창 1:28 -

위의 이 본문은 오늘날 신학계에서 해석상 가장, 그리고 결정적으로 오류를 범하고 있는 구절이다. 필자가 확인한 범위내에서 말하라면 이 본문이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문화명령(cultural mandate)’이라고 이해되고 있다. 필자는 이런 주장의 성경적, 신학적 근거가 무엇인지 문헌을 통해서 추적해 보았으나 그것을 명시적으로 논의하는 곳이 없었고, 이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모두 막연히 그렇다고 전제하며 받아들이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과연 이 구절이 하나님의 문화명령으로 해석되어야 하는가 라고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이 명령 앞에 하나님이 복을 주시며 라고 언급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최초로 주신 복(히브리어로 베라카; ?



Ⅴ. 결론



우리는 이 글을 통해 신학의 가장 원초적이고 중요한 작업인 성경 해석에 개재되어 있는 난점을 드러내고 그 극복의 실마리를 잡아 보려고 시도했다. 우리는 이를 위해 먼저 성경을 보는 다양한 관점들을 비판적으로 분석해 보았다. 이 글의 입장은 전통적인 개혁신학이 견지해온 대로 성경은 그 자체로 명제적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수용한다. 그러나 이 입장은 무조건적으로 주장될 내용이 아니라 성경 자체의 논리와 증거에 의해서 증명되어야 할 것으로 보았다.

우리는 성경 해석에 대한 역사적 고찰을 통해서 성경 해석의 가장 결정적인 난점은 결국 해석의 과정에 인간의 주관이 개입되는 문제였음을 확인했다. 이는 성경의 객관적인 의미를 왜곡시키는 중대한 오류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문제의 해결이 인간의 인식론적 노력으로서는 불가능함도 확인했다.

왜냐하면 우리는 문자 그대로 객관적인 입장에서 즉 백지의 상태에서 성경을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이데거가 잘 지적한 대로 전제 없는 해석이란 도무지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해석의 객관성이란 애초부터 포기되어야 할 이상에 불과하며 해석의 상대성을 너그럽게 관용해야 하는 것인가? 이것은 실로 기독교의 독자성의 문제와 관련해서 결정적인 중요성을 가진다. 이 문제의 성경적인 해답이 없는 한 우리는 오늘날 거세게 일고 있는 종교 다원주의의 주장을 원천적으로 거부할 이유를 갖지 못한다.

사실상 기독교만이 참된 구원의 종교가 아니라 모든 종교는 그 나름대로의 가치를 가진다는 종교다원주의(이 주장은 매우 관용적인 태도를 가진 것으로 보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이는 기독교의 독자성을 결코 인정치 않는 또 하나의 매우 독단적이고 배타적인 주장이다.)는 객관성과 절대성의 믿음을 포기하고 모든 세계 구성은 인간 주관의 산물에 불과하다는 포스트 모더니즘의 주장과 맞물려 있다. 우리는 이 문제의 해결이 인간에게 있지 않음을 확인했고 객관적 해석의 가능성은 절대 객관자이신 성령 하나님의 사역에 의한 성경의 내재적 해석의 틀의 발견에 있음을 확인했다. 어떠한 성경 밖에 있는 해석의 틀도 성경은 거부하며 성경 밖의 외재적 틀을 가지고 들어가면 성경은 그 본래의 의미를 드러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전통적인 개혁신학에서는 성경의 내재적인 해석적 틀이 구속사인 것으로 주장해 왔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성경의 중요한 여러 주제들 중의 하나 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성경 전체의 해석적 틀로 간주 하기에는 엄청난 무리가 따름을 보았다. 왜냐하면 성경은 인간의 구원 문제만으로는 환원될 수 없는 포괄적인 세계관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은 성경의 내재적인 해석의 틀을 최근에 논의되고 있는 언약사로 본다. 이 언약사는 언약과 성취가 성경의 골격이며 이는 하나님이 여호와이심을 계시하기 위한 방법이라고 간주하는 것이다. 이 논리는 구속사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자신의 논리 가운데 포함한다. 즉 인간의 구속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언약 성취의 방법으로 사용하시는 것이다. 언약을 이루는 과정에 구속이 행해지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구속하려고 당신을 계시하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영광을 계시하시려고 언약하시고 그 언약을 이루시는 과정에 구속을 이루신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논리의 역전이다. 종래의 구속사는 마치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존재하시는 인본주의적 논리를 함축한다. 그러나 언약사적 해석은 하나님은 스스로 자충족하시며 인간의 구속을 통해 스스로 영광을 드러내시는 분이라는 신본주의적 논리를 가진다.

우리는 이 글을 통해 성경 전체가 언약과 성취라는 단일한 해석적 틀에 의해 구조화되어 있음을 확인했다. 구약은 아담에게 주신 3대언약(생육 번성, 땅 정복, 통치)이 아담의 타락에도 불구하고 신실하게 이루어 주심을 아브라함에게 재언약하심을 통해 확증한다.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은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 어김없이 이루어졌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역사 전개이다. 욥기부터 아가서까지의 시가서는 언약 성취의 역사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속성의 찬양이며 예언서는 언약대로 이루심을 또 한번 보여주기 위해 때리시고 싸매시는 하나님의 사역을 잘 드러내준다.

신약은 구약의 그림자적 언약의 성취가 그리스도를 통해 실체적으로 이루어짐을 보여준다. 복음서는 구약의 언약대로 오신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그리스도 자신의 사역을 통해 보여주며 사도행전은 예수님의 언약대로 오신 성령의 사역을 통해 교회를 세워 가심을 보여 준다. 서신서는 교회를 점차 세워가기 위한 말씀으로서 단계적인 양육의 과정을 잘 보여준다. 계시록은 언약대로 오실 그리스도의 승리를 보여줌으로 신약이 종결되는 것이다.

요컨대 성경의 해석적 틀은 성경 안에 붙박혀 있다. 그것은 언약과 성취의 논리이다. 그 목적은 하나님이 여호와이심을 드러내심으로 예수는 그리스도임을 입증하려는 것이다. 모든 성경은 이 근본 목적을 드러내기 위해 구조화되어 있다고 보인다. 이 해석적 틀만이 성경 해석의 중요한 난점이었던 인간 주관의 개입을 차단하는 논리라고 보여진다.

【참고 문헌】
1. 권성수, 성경해석학, 총신대학 출판부, 1991
2. 박용기, 성경 개론, 진리의 말씀사, 1987
, 성경 신학 개론, 진리의 말씀사, 1990
, 성경적 기독교, 진리의 말씀사, 1991
3. 박형용, 성경 해석의 원리, 엠마오, 1991
4. 불트만(허혁 역), 신약 성서 신학, 성광 문화사, 1976
5. 벌코프(윤종호,송종섭), 성경 해석학, 한국 개혁주의 신행협회, 1979
6. 안병무, 역사와 증언, 대한 기독교 서회, 1972



김승일

출처 : 예수 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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