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을 거부하는 사람들
어떤 사람들은 성경을 아주 중요시하면서도 신학에 대해서는 터부시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데, 신학은 인간에 의해 고안된 방법이라는 것이 이유인 것 같다. 이런 사람들은 대부분 이단이 아니라면, 무교회주의를 고수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성경을 고수한다고 하지만, 성경에서 추론되는 보편적인 원리들을 거부한다.
더구나 이들은 신학이 없던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구호를 곧잘 내세운다. 그 때엔 ‘신학’이 없었다고 그들은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사도 바울은 영지주의와 스도이고(스토아학파), 에비구레오(에피쿠로스학파) 등을 이단으로 정죄했는데, 사도바울이 이들을 이단으로 정죄할 수 있었던 기준은 예수님의 교훈과 구약성경이다. 성경의 보편적인 원리에 의존해서 이단들이 비성경적임을 공격했던 것이다. 더구나 바울서신인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칭의론’에 집중되어 있고, 에베소서는 ‘교회론’에 집중되어 있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아야할 것이 있다. 성경을 대하는데 몇 가지 방법이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상식실재론적인 방법’, ‘귀납적인 방법’과 ‘연역적인 방법’이다. ‘
'상식 실재론적 방법'이란 의미의 덧씌움 없이, 사물을 그저 있는 그대로 보는 방법이다. 가령, 참나무 한 그루가 있다면 그 참나무를 눈에 보이는 그대로 파악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상식실재론으로 어떤 성경구절을 본다면 다른 구절들과 의미 있는 연관을 통해서 보는 방법이 아니라, 기록된 그대로 보는 것이다.
"영접하는 자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는 요 1:12을 그들이 읽었다면, "구원은 인간의 영접이 선행(先行)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이 갈라디아서를 읽었다면, “구원은 인간의 행위 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한다. 이들은 이 두 가지 내용이 명백하게 모순됨에도 그것을 극복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인다. 물론 그들은 이성의 활동과 신학을 반대하기 위해 취하는 행동이겠지만, 분명하게 이해될 수 있는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을 자신들의 모순과 혼돈의 이해 속에 악의적으로 방치하는 죄를 저지르는 셈이다.
이와는 반대로, '신학'은 성경의 개별구절들을 종합하고 분석해서 명제를 산출한다. 상식실재론자들처럼 개별구절의 내용들을 그대로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우선 귀납적인 방법으로 개별구절들을 분석하되, 같은 내용을 가진 구절들을 한데 묶는다. 주제가 ‘구원’이면 구원을 제시하는 구절들을 한데 묶고, ‘은혜’라는 주제도 있다면 이도 같은 방법으로 묶는다. 성경의 모든 다른 주제들도 역시 마찬가지다. 같은 부류로 묶인 구절들에서 연역적인 방법으로 보편적인 원리를 추출한다. 그래서 신학적인 체계를 세우게 되는데, 이는 모두 성경에 근거하는 원리들이다.
물론 여기서 사용되는 신학적 원리들은 귀납적인 방법과 연역적인 방법이다. 개별내용을 하나하나 연구하고 분석하여 구분시키는 방법이 ‘귀납적인 방법’이고, 각각 다른 주제 아래 모인 구절들 속에서 공통의 원리를 추출하는 방법이 '연역적 방법’이다.
과연 상식실재론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아무런 전제 없이 성경을 볼 수 있을까?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하다. 성경에서 공통의 원리를 추출하지 못한다면 세상은 제각각의 신앙으로 중구난방이 된다. 그렇게 되면 이단의 주장을 반박하지도 못할 것이며, 교회의 순수성도 지켜내지 못한다. 자기가 선호하는 구절들만 골라서 믿으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이단은 이런 점을 노리고 성경을 상식실재론적으로 읽어야 한다고 말한다. 역사적으로 이런 주장들은 수도 없이 제기돼 왔지만, 교회의 결정을 통해 그들은 모두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성경을 자의적 해석에 맡겨두는 것이야말로 이단으로 가는 지름길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신학은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고 바른 신앙으로 인도하는 가이드라인이다. 이 가이드라인에 의해 수많은 이단들이 역사 속에서 분명히 드러났고, 또 그들의 주장들은 역사 속으로 지리멸렬했다. 신학은 하루 이틀에 성립한 것이 아니라, 수천 년 동안의 역사를 가지고 견고히 다져져 왔다. 따라서 신학적인 전제 없이 성경을 보자는 주장은 성경을 신자들의 믿음으로부터 분리해서 혼돈케 하려는 사단의 수작 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교회에서 성도가 교리공부에 충실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신학이나 교리를 많이 아는 것이 반드시 좋은 신앙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교리나 신학에 대해서 무지한만큼 성도가 겪어야 하는 혼란도 적지 않다.
목회자는 성도의 성장을 위해서 하나님께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다. 목회자는 성도가 잘 자라나게 하기 위해서 기본적인 신학에 충실해야 한다. 성도는 목회자와는 달리, '세상'과 '구별된 무리'(교회)의 사이에서 충돌하면서 살아야 하는 존재들이기 때문에, 그들을 든든히 세워야 하는 목회자들에게 신학의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목회자의 학자적인 정신이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신학을 무시하는 신앙인들이야말로 믿음의 정석을 포기하고 주관적인 신앙에 몰입하는 경우가 많다. 판넨베르그라는 신학자가 한 말은 유명하다.
"조직신학적 성찰 없이 성경을 바르게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기 기만적이다”
옮긴글
'목회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목사는 ‘직업’인가 ‘성직’인가 (0) | 2019.01.16 |
---|---|
[스크랩] 때를 따라 돕는 심방 사전 (0) | 2019.01.12 |
[스크랩] 십자가 신학과 목회 소명 (고후 4:1-6) (0) | 2019.01.02 |
[스크랩] 목회자가 실족하는 7가지 이유 (0) | 2019.01.01 |
[스크랩] 목회자들이 반드시 해야 하는 7가지 (0) | 2019.01.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