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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그리스도를 아는 것’(빌 3:10-11)에 대한 바울의 이해

수호천사1 2018. 11. 30. 21:39

‘그리스도를 아는 것’(빌 3:10-11)에 대한 바울의 이해


개역 성경의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라”(빌 3:10-11)로 되어 있다. 이 본문은 “내가 그리스도를 아는 것, 곧 그의 부활의 권능을 통해 그리스도를 아는 것과 그의 고난에 참예함으로써 그리스도를 아는 것으로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들의 부활에 이르려 하노라”고 번역된다. 


따라서 이 본문은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란 ①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을 아는 것이며 ②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함으로써 아는 것이며, 이로써 마침내 ③죽은 자들의 부활에 이르게 됨을 말하고 있다.

 

1. 본문의 배경


본문의 ‘알려하여’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그를 아는 것’(του γνωναι αυτον), 즉 ‘그리스도를 아는 것’으로 일종의 진행을 통해 어떤 지식이 점증된 결과를 의미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i) 그리스도를 알게 된 그 시점에서부터 자신의 지식에 위기가 발생하였으며, ii)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는(골 2:3) 그리스도의 중요성 때문에 그리스도를 알기 시작하는 그 자체가 이 세상의 다른 어떤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여기에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를 얻는 것’(빌 2:8)과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는 것’(빌 2:9)에 이어 ‘그리스도를 아는 것’(빌 2:10)을 성취하는 데 있어 방해가 되는 모든 것을 기꺼이 바울은 배설물로 여겼다는 것이다. 이러한 바울의 열정이 점차 고조되면서 결정적으로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야말로 그의 삶 속에서 지향하고 있는 궁극적인 목표가 된다는 점으로 강화되고 있다. 이와 관련해 바울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빌 3:8)고 밝히고 있다.

 

‘아는 것’(του γνωναι)을 비롯해 ‘알다’(γινωσκω)에서 파생된 동의어들은 이해와 체험과 친교 그리고 부부 관계 등의 개념이 내포되어 있다는 점에서 바울은 단지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아는 것이 아니라 삶을 변화시키고 계속해서 진행되어 가는 그리스도와의 특별한 친교를 열어 주는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사실은 다음과 같이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권능과 그의 고난에 참여하고자 하는 바울의 열망을 통해 더욱 구체적으로 서술되고 있다. 

 

2.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권능을 통해 아는 것


바울은 그리스도를 역사적인 사실로 아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의 삶 속에 항상 살아 있는 부활한 주로서 알고 싶어 한다. 그리고 바울이 알고자 하는 ‘능력’은 그리스도와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부활한 그리스도가 부여받은 능력이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그의 부활로 말미암아 발휘되는 능력을 체험함으로써 알기를 바라고 있다. 


여기에서 바울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자신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바울을 의롭게 하신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다(롬 4:25; 8:1, 16; 고전 15:17). 그의 성령을 보내셔서 부활의 권능을 체험하게 하시는 분은 바로 부활하신 그리스도이시다. 때문에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의 생명이 항상 바울의 새로운 생명의 원천이다(요 14:19). 이것은 성도들에게 임하는 성화의 권능이다. William Handriksen, 빌립보서, p. 224.


바울은 이 성화를 ‘새로운 삶’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이 새로운 삶은 교회 안에 임재하신 성령의 통치를 받고 살아가는 삶이다. 바울은 죽음으로부터 부활시켜 하나님 안에 있는 생명에 이르게 하기 위해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을 보내셔서 자신 안에서 창조적으로 활동하고 계심을 의심치 않는다.

 

3.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함으로 아는 것


본문의 ‘참예함’(κοινωνιαν)은 앞선 단어 ‘권능’(δυναμιν)과 동일한 정관사를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부활한 그리스도의 권능과 그의 고난에 참예함은 독립적인 두 가지 체험이 아니라 동일한 체험의 서로 다른 측면임을 보여주고 있다. Gerald F. Hawthorne, 빌립보서, p. 286.

 

따라서 그리스도를 그의 부활의 능력을 통해 아는 것이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다는 의미로 해석되는 되는 것처럼(롬 6:4)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함으로써 아는 것 역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의미로 해석되는 내적 체험이다(롬 6:8; 갈 2:19-20).


이것은 자신을 위해 고난당하시고 죽으셨던 그리스도를 앎으로써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생명으로 부활하기 위해 바울도 그리스도 안에서 고난을 받고 죽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이 사실은 뒤에 등장하는 ‘그의 죽으심을 본받음’이라는 분사 구문에 의해 확인된다. 이 ‘본받음’(συμμορφιζομενος)이라는 단어는 신약에서는 유일하게 나오는 단어이다.

 

‘그의 죽으심을 본받다’는 말은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ομοιωματι)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롬 8:5)는 말과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롬 6:8)라는 말씀을 통해 이해된다. 


이 말은 그리스도께서 육체적으로 고난을 받고 죽으셨던 것처럼 바울도 육체적으로 고난을 받고 죽으려 하고 있다는 말이 아니다. 이 말은 바울 자신과 모든 신자들이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 그리스도와 결합되어 죽음과 부활을 비롯한 그리스도의 생애의 모든 사건을 그리스도와 함께 나눈다는 의미이다. 이런 의미에서 바울은 과거의 사실인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며 그 죽음을 기꺼이 자신의 죽음을 삼아 그 죽음이 현재 가지고 있는 의미에 맞추어 삶을 살아간다는 의미에서 ‘그의 죽으심을 본받음’(συμμορφιζομενος)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논리적 과정을 거쳐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롬 6:11)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고난과 죽음을 당하신 그리스도와의 신비한 결합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체험할 수 있는 육체적 고통에 의해 더욱 강화된다. 즉 믿음 안에서 당하는 성도들의 고난은 바로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러한 해석에 근거하여 바울은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고후 4:10-11)고 말한다. 

 

마치는 말


이상에서 보는 것처럼 바울에게 있어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그의 메시아적 행위인 죽음과 부활을 아는 것이다. 이를 통해 죽음이라고 하는 현재적 실재를 체험하게 되며, 이 현재적 실재의 궁극적 완성인 부활에 동참하는 것을 아는 것이다.


여기에서 바울은 부활, 즉 종말론적 부활을 강력하게 소망하고 있다.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라”(빌 3:11)는 결론이 그것이다. 이 말은 “만일 내가 (부활을) 얻었다면 (그 부활은)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하는 것이라”는 의미로 장차 육신의 부활을 소망하고 있다.

 

 

송영찬 목사/기독교개혁신보 편집국장

 


출처 : 예수 코리아
글쓴이 : 예수코리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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