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화

[스크랩] 누가 예수님의 제자인가

수호천사1 2018. 11. 24. 23:15

찬송가 373장엔 "세상 모두 사랑없어 냉랭함을 아느냐? 곳곳마다 사랑없어 탄식소리 뿐일세.

사랑얻기 위하여 저들 오래 참았네. 사랑없는 까닭에,,,,사랑없는 까닭에 저들 오래 참고 있었네..."

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교회에 사명에 대해서 작시자는 촉구하길 "먼저 믿은 사람들 예수 사랑 가지고 ....만민 중에 나가서 예수 사랑 전하세,,,"라고 합니다.


누가 예수를 잘 믿는 사람들일까요? 누가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람일까요? 누가 예수님의 진리를 잘 증거하고 있는 교회 공동체일까요? 예수님의 사랑을 알게 하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엔 진정한 사랑이 없습니다. 무엇이든지 상대가 날 사랑하는 것처럼 태도를 보이지만, 사실은 그 내면엔 저속한 의도가 깔려 있습니다. 날 이용해 먹기 위해 사랑하는 척,,,아껴 주는 척합니다. 나를 통해 그 무엇을 얻고자 그는 나를 사랑하는 척 할 뿐입니다.


남자가 여자를 사랑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가진 것을 그에게 채우기 위해 사랑에 목말라 있는 나를 사랑하는 척 할 뿐입니다. 여자가 나를 사랑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를 통헤 그가 얻고자 하는 그 무엇을 채울 수 있기 때문에 사랑하는 척 할 뿐입니다.


육체의 욕망입니다. 이기심입니다. 그것을 채우기 위해 사랑이란 이름으로 다가와서 날 이용할 뿐입니다. 기업인이 날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며...장사아치들이 날 사랑하는 척하는 것도 그의 고객을 만들기 위한 저의가 깔려 있습니다. 성직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설교를 들어주고 그가 세운 교회에 돈을 보태 주기 때문에 내 교인처럼 여기고 날 사랑한다고 입에 발린 소리를 내 밷습니다. 교인과 교인끼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에 이득을 채우기 위해 그를 사랑하는 척 할 뿐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하나님의 본성에서 나옵니다. 하나님의 본성을 가진 사람만이 서로 진정한 사랑을 나눌 수 있습니다.


이러하기에 거듭나야 한다., 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거듭남은 하나님의 생명의 본성이 생겨남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사람은 상대를 진정으로 사랑할 수 없습니다. 다 거짓 사랑입니다.가식입니다. 자기에 이기심을 채우기 위해 사랑하는 척 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옛 사람이요. 죄의 후손인 선천적 본성을 가진 인류입니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이 너희가 내게 속한 사람인줄 알게 될 것이라.."하십니다.

'서로 사랑하라'하십니다. 영어로 'YOU LOVE ONE ANOTHER'입니다. 이걸 직역하여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번역으로 말미암아 주 예수님이 말씀하신 '서로 사랑'에 대한 개념이 왜곡된 것 같습니다.


사실 전 이 '사랑'이란 단어에 근접한 개념을 가진 영어 단어는 '프렌디 쉽'이라고 증거하고 싶습니다. 성경의 많은 단어들을 헬라어 원어에서 영어로 직역하고,,그 영어를 한국어로 1:1직역함으로 왜곡이해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요한 계시록에선 일곱 유형의 상태를 가진 교회가 나타납니다. 그 중 가장 주님께 칭찬받는 교회는 '필라델피아 교회'입니다.  신약성경이 씌어진 언어는 헬라어입니다. 헬라 세계에선 사랑에 대한 개념을 가진 단어가 몇 가지 있습니다. 아가페. 필레오. 에로스. 에코...등입니다.

아가페는 조건없이 배푸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랑할 대상에게 베푸시는 호의를 '아가페 사랑'이라고 합니다. 은혜입니다. 은혜.즉 카리스는 값없이, 공짜로, 무료로 라는 개념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 은혜입은 사람은 그 은혜를 베풀수  있습니다. 조건없는 사랑을 베푸는 행위입니다. 속죄함을 입은 것이 은혜입니다. 받을 자격이라곤 하나도 없는 사람이 하나님께 사랑을 받았습니다. 이 사랑을 입었기에 그 사랑의 의미를 알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초대교회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시니 그들은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삯군 목자를 구별하는 것은 이 사랑으로 판별할 수 있습니다. 좋은 교회, 나쁜 교회를 분별하는 것도 이 사랑이 표준이 됩니다. 참으로 현실의 기독교를 보면 애처롭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내 교회, 소속교인들을 사랑하다고 합니다만, 그것도 참된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도 못하고, 사랑을 경험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증거가 역력히 나타납니다. 자기 교회 나가기 때문에 사랑하며..자기 교회에 헌금을 내러 오기 때문에, 사랑하기에 그건 아직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는 사람들이란 방증입니다.

정말 주님께서 보실 땐. 모두 '목자없이 유리하는 양들이요. 측은히 여길 수 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사랑이 어디에 있습니까? 참 사랑을 받아본 적이 있습니까? 조건없는 사랑을 받아본 적이 있습니까?


제가 왜 이런 사람이 되었는지 이해하실는지 모르겠습니다. 거의 모든 현실 교회를 비판하는 것처럼 비쳐집니다. 다 그릇 되었고, 다 잘못되었다고 강변합니다.  "도대체 그럼 당신이 참 교회라고 여기는 것은 무엇이요?" 라고 항변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이런 사람으로 변한 건 하나님의 참 사랑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수평적으로 그 사랑을 느끼게 해 준 형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 이게 형제 사랑이구나...이것이 주님의 형제된 사람끼리 사랑하는 것이로구나" 깨우쳐준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께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하셨습니다. 이렇게 주님의 사랑을 체험한 사람이 절 사랑했습니다. 무조건적 사랑을 입혔습니다. "형제님, 왜 절 이토록 사랑하십니까? "묻자 그는 말하길" 내 주님이 당신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사랑을 알고 형제님도 주님의 형제들을 저처럼 사랑하십시오..저도 그 사랑을 입었기에 형제님을 사랑할 뿐입니다. "하면서 참 하나님의 사랑을 깨우쳐 주었습니다.


"모세는 애굽의 모든 영화와 누리는 희락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선호하였다." 라고 히브리서 11장은 기록합니다. 세상에로부터 느끼는 그 이기적인 사랑,,,그것을 포기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과 서로 사랑하는 것이 올바른 인생임을 터득케 하셨습니다., 그 사랑을 알고 그 사랑을 실천하는 생애를 살았습니다.


기독교인입니까? 신자입니까? 그렇다면 그 사랑을 베푸는 사람들을 만났습니까? 그 사랑이 무엇인지 압니까? 현대에 거의 모든 기독교인들은  길잃은 양들입니다. 사랑없어..그 사랑을 받지 못해 그 사랑을 받고자 갈구하며..이 교회 ..저 교회에 전전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세상 그 어디에서도 초대교회 성도들과 같은 그 사랑은 맛보지 못합니다. 그 교회를 지도하는 사람이 그 사랑을 입지 못했으며..그러하기에 그런 사랑을 베풀지 아니하고 교인들을 자기 이득의 수단으로 여길 뿐인 것입니다. 이러하기에 그의 본을 따라 그 교인들도 그러합니다. 사랑이 없습니다. 남과 같습니다. 타인과 같습니다. 사랑을 갈구하여 교회에 나가보지만, 그 교회 지도자들은 자기 가속을 더 사랑합니다. 자기 아내.자기 가족을 위해 당신이 낸 헌금으로 충당합니다.

어디에 사랑이 있습니까? 어떤 교회에 사랑이 있습나까? 자기 가속보다 더 사랑하는 목회자를 만나 본 적이 있습니까? 자기 자신, 자기 가속보다도 당신을 더 사랑하는 목양자를 만나 본 적이 있습니까? 예수님처럼 "누가 내 형제요., 내 모친이냐?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이들이 내 형제요 내 모친이니라"이런 고백을 하는 목자를 만나본 적이 있습니까? 이런 분이 참 목자직을 잘 수행하는 청지기입니다. 이런 목회자에게 주님은 자기 양떼를 구속하여 맡기셨습니다. "때를 다라 양식을 나눠줄 자가 누구뇨? 이렇게 하는 것을 내가 보면 상을 주리라"하셨습니다. 이 기준에서 평가하면 오늘날 목회자들은 거의 모두가 삯을 바라고  하는 성직이기에 불의의 삯을 탐낸 자들이라서 주님께 버림받을 것입니다. 목자직을 수행할 자격도 없으면서 목자 행세를 하고 사는 거짓 선지자들입니다. 참담합니다. 현대의 거의 모든 교인들은 이런 가짜를 목자라고 여기고 추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필라델피아'는 기본어가 '필레오 ' 사랑입니다. "주 여, 왜 하필이면 필레오사랑입니까? 주님이 가장 사랑하시는 교회가 어찌하여 필레오 사랑의 공동체입니까?" 이 질문을 드린지 몇 십년이 흐른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깨우침을 불과 5년전에 깨우쳤습니다. '필레오 사랑'은 영어에서 가장 근접한 의미를 가진 단어는 '프렌디 쉽'입니다. 의구심이 일어 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나라의 현재성은 교회공동체이며 교회는 '아가페 사랑'으로 뭉쳐진 단체이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필레오 사랑'으로 명시하셨습니다.'프렌디 쉽'으로 계시하셨습니다.

그렇게 쓰실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요한복음15장에서 설명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내가 명하는대로 행하면 나의 친구라..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하니 ,,이제는 너희를 친구라 부르리라...이는 내가 아버지께 들은 것을 너희에게 다 알게 하였음이라.."


친구들끼리 사랑은  존재 의미가 같다는 것입니다. 하늘 아버지게서 알게 하신 그 어떠함(구속경류느 자기 백성을 택하시는 목적..경륜.엡1:9))을 위한 삶의 목적이 같으므로 친구입니다. 동료입니다. 동지입니다.

16절에선 이런 열매를 맺게 하려고 하나님께 들은 것을 너희에게 다 알게 하였다., 하십니다...이 명령을 수행하는 너희끼리 서로 사랑하라.(요15:17)하십니다.

어떤 교회가 참 교회의 표식이냐?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사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즐 알리라."(요13:34-35)


어떤 교회가 주님이 머리되신 교회입니까? 그 표지가 무엇입니까? 서로 사랑하면 그 표지로 우리가 주님께 속한 사람들임이 증명된 답니다.

서로 사랑하지 않는 교회는 모두 주님의 교회가 되기에 역부족입니다. 목사들이 교인들이 낸 헌금으로 교인들을 사랑으로 보살피는데 최우선 순위로 사용하지 아니합니다. 타락한 교회입니다. 주님을 뵙지 못한 설교자입니다. 자기가 헐벗을 지언정 성도들의 삶을 돌보는데 최우선 과제로 삼아야 합니다.

초대교회엔 예배시간마다 헌금 바구니가 돌아가는 일이 없었습니다..처음 헌금을 모으게 된 목적은 어려운 우주적인 몸에 지체를 돌보기 위해서였습니다. 바울사도도 이방교회를 세운 후에 처음 하는 일이 예루살렘 교회에 어려움을 당한 형제들을 돕기 위한 연보이었습니다."큰 흉년이 드니라..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 (행11:28-30)


열매는 형제사랑입니다. 난관에 봉착한 형제들을 돕는 것입니다. 서로 얼굴을 보지도 못했지만 우리가 서로 주님의 형제란 표지는 서로 돕는 사람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들도 거기서 내가 믿는 주님의 일을 하고 있기에 돕습니다. 서로 같은 고난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죠지물러,,허드슨 테일러. 스펄존. 케직의 사역자들은 모두 이런 원칙을 알았기에 그들의 시대에 이런 실행을 하였습니다. 같은 일을 위해 같이 참예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필레오사랑으로 뭉쳐진 신약 교회이며..주님이 인정하시는 교회입니다.


현대 교회를 살펴 봅시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의미의 제일 순위를 주일예배드리는 것으로 간주합니다. 어김없이 온갖 헌물들을 그 시간에 바칩니다. 소형교회는 말할 필요가 없이,, 대형교회엔 주일 예배에 헌물이 가득 들어옵니다. 무엇을 위해.누구를 위해 사용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예물을 받기보다 마음을 받으신다고 하셨습니다.

창조주께서 무엇이 부족하여 물질을 가져 오라고 하시겠습니까?  그런 것은 너희 같은 인간들에게나 필요할 뿐이라고 하십니다.

"내가 너희 성회(예배시간)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의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보지 아니하리라."(암5:21-22)

"주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렇더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시51:16)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헌물.헌금)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사1:11)


오늘날 성직자들은 모두 바리세인들의 정신적 후예가 되어 있습니다. 헌금에 대한 가르침은 어찌 그리 잘하는지요? 성경은 말합니다.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였다,,,고 기록합니다.

"낙타는 삼키고 하룻살이는 걸러 내는 도다"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원하시는 제물은 물질이 아닙니다, 상한 심령입니다. 겸비하고 통회하는 마음입니다. 바리새인들의 교훈을 조심하라,,하셨습니다...무엇이 중요한가요? 헌금입니까? 상한 심령입니까? 헌금의 가짓수를 늘이다가 요즘엔 일천번제 헌금이란 것까지 만들었습니다. 사도들이 보고선 통탄할 일이 아닌가요? 그것을 드림으로,,그런 예배를 드림으로 하나님께 은혜를 받을 수 있다고 상상하십니까? 그런걸 가르치는 설교자를 주님의 종이라고 섬깁니까?  주님께 물어 보고 주님이 원하시는 길로 나아가십시오.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돌이 되어 그 머리를 내려칠 것이니 가루가 될 것이라.."하신 경고가 임할 것입니다.

오늘날 대형교회에서 1부 예배.2부예배,,3부 예배,,뭐 이런 걸 창착하였는데...그 예배에 드리고 예물을 바친들 하나님이 받으신다고 상상하십니까? 그게 신앙생활입니까? 구원받아 교회라는 공동체에 머물게 하신 하나님의 뜻에 일치합니까?

 교회는 기본적 의미로 '코이오니아'입니다. 성도와 성도의 교제입니다. 서로 돌아보아 그날에 이르기까지 서로 격려하며 믿음을 고양시킵니다. 그런데 같은 교회에 다니면서 얼굴도 모르고,,,각자 삶을 상황도 모르면서 어찌 서로 사랑함으로  돌볼 수 있습니까? 교회당에 돈을 맡긴다고요? 그들이 그 헌물을 가지고 자기 육욕을 채우는데 쓸 뿐입니다. 자손대대로 착복하고자 세습하게 되고, 자기 부동산을 늘이며. 자기 혈육을 위해 헌물을 갖다 쏱아 부을 뿐입니다.

 이게 교회입니까? 교회생활로 성립된다고 여기십니까? 그런 사고방식으로 신앙하는 이상 언제까지라도 주님께 은총을 입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만날 수도 없습니다. 영생에 이르는 길에 들어설 수도 없습니다. 주님의 맘을 가진 형제도 만나지 못합니다.

회개하고 바른 믿음으로 나아가십시오, 주님을 만나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십시오.


"너희가 살려면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지어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너희 말대로.상상하는대로  이루시리라."(암5:14)


그릇된 방식으로 하나님에 대해 예배하며,,설교를 들으며,,,성경을 배워보십시오,,,결국은 멸망할 것입니다. "항상 배우나 끝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라"(딤후3:7)


현대 교회에 사랑이 없다고 타령하지 마십시오, 당신 자신이 그 멤버입니다. 일원입니다.

당신이 그런 타락한 교회를 존립하게 하는 장본인인입니다.

멈추십시오, 떠나십시오, 거룩한 무리와 함께 하십시오. 그 때서야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을 만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더러운 행실)을 접촉치 말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고후6:17-18)


다음 카페, 케직사경회에서 http://cafe.daum.net/testimonys 이 여호수아 목사


출처 : 케직(keswick) 사경회
글쓴이 : 이여호수아 목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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