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교

[스크랩] 유대교·기독교·이슬람교의 근원과 분쟁 요인

수호천사1 2018. 10. 20. 21:38

유대교·기독교·이슬람교의 근원과 분쟁 요인


종교는 인간을 구원하기도 하지만, 갈등과 전쟁의 대부분은 이로 인해 시작되고 피해를 입는다. 역사적으로 세계 분쟁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종교가 자리 잡고 있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종교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온갖 비극적 상황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암흑과 질곡에 빠져있다. 
‘하나님’이라는 동일한 신(神)을 믿는 형제 종교이자 세계적인 대표 종교인 유대교와 기독교, 이슬람교가 내세우는 핵심 가치인 사랑과 자비, 구원과 복음과는 너무나 다르게도, 작금의 현실은 갈등과 반목으로 점철돼 있다. 신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이 비극의 아이러니, 그 끝은 어디인가? 
  
이들 세 종교의 태생은 같은 뿌리의 형제 종교임이 분명하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현재 중동에서는 세계 기독교 국가의 대표인 미국과 이슬람 수니파무장세력 이슬람국가(IS) 간에 서로 죽고 죽이는 전쟁은 계속되고 있다. 이처럼 각 종교가 추구하는 평화 이상과는 정반대로 현실은 갈등과 반목, 무차별 살육이 벌어지는 등 이른바 ‘신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비극적 상황은 종교의 본질에 대한 의구심마저 갖게 한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과 맞물려 신간 『세 종교 이야기–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믿음과 분쟁의 역사』(홍익희 지음)는 세 종교의 본질을 역사의 흐름 속에서 밝혀내고 있다. 먼저 세 종교의 시작을 연 인물인 아브라함의 뿌리가 되는 고대 수메르 문명부터 기독교를 국교로 제정한 로마제국, 기독교와 이슬람교 간에 치러진 십자군전쟁과 유대교 박해가 행해진 중세 암흑기를 거쳐 홀로코스트와 팔레스타인 분쟁에 이르기까지 전방위적으로 세계사를 아우른다.


저자는 역사를 통해 신학적으로 누가 옳고 그르냐를 따지는 대신, 세 종교가 다 같이 믿는 하나님의 뜻에 누가 더 ‘합당한’ 길을 갈 수 있는지 살피고, 궁극적으로 그 합당함을 찾아내는 것은 결국 인간의 몫임을 전한다. 종교가 가진 본질인 평화와 공존의 관계를 모색해야 한다는 저자의 의미 있는 메시지는 세 종교 간 갈등과 대립이 치열한 이 시대에 커다란 울림을 선사한다. 필자도 이를 통해 세 종교 간에 평화 공존을 바라는 차원에서 다루고자 한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공통점과 차이점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이 세 종교의 공통점은 유일신을 믿는 일신교(一神敎)이다. 원래 이 세 종교의 뿌리는 하나다. 인류 최초로 유일신을 믿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세 종교가 출발했기 때문이다. 세 종교 모두 아브라함을 자기들 종교의 최고 조상으로 섬긴다. 다만 유일신을 부르는 명칭이 다르다. 
  
유대교에선 신을 여러 이름으로 부른다. 처음 하느님이 직접 모세에게 가르쳐준 이름은 '나는 나다'라는 의미의 '에헤으아세르 에헤으'였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감히 신의 거룩한 이름을 불러선 안 된다고 믿었다. 기독교에서는 엘로힘 또는 'YHWH'를 '야훼' 혹은 '여호와'라 부르나 유대인들은 지금도 신의 이름을 발음하려 하지 않는다. 한국 기독교에서 가톨릭은 '하느님' 그리고 개신교는 '하나님'이라 칭한다. 이슬람교는 '알라'라 부른다. 모두 같은 한분이지만 다른 이름이다.
  
오늘날 <구약>을 경전으로 삼고 있는 종교는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다. 유대교는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이 직접 신과 계약을 맺은 것을 믿는 유대민족의 종교다. 반면 기독교는 하나님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종교로 이를 받아들이면 누구나 기독교인이 될 수 있다. 
  
이보다 늦게 생긴 이슬람교는 예수를 구세주가 아닌 예언자로 인정하고 무함마드를 최후의 가장 위대한 예언자로 보는 종교다. 뿌리가 같기 때문에 당연히 이들 종교는 모두 <구약>을 <성경>으로 믿는다. 세 종교의 경전을 보면, 유대교는 <구약>과 <탈무드>이며, 기독교는<구약>과 <신약>, 이슬람교는 <토라>와 다윗의 시편, 예수 복음서 그리고<꾸란>이다. 글너데 이슬람교에서는 <꾸란>을 제외한 세개는 후대에 일부 내용이 변절됐다고 본다. 
  
세 종교는 공히 사후(死後)의 부활을 강조한다. 각 종교들은 부활과 최후의 심판 개념을 발전시켰다. 초기 유대교는 '야훼의 날'을 강조했다. 이를 '마지막 날'이라고도 한다. 유대교에서는 '마지막 날'이라는 용어는 메시아가 도래할 것이라는 유대인들의 믿음을 상징한다. 다른 종교들도 부활과 구원에 관한 종말론적 믿음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모든 민족을 심판하는 날 비로소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된다는 것이다. 다만 유대교 일파인 개혁파에선 죽은 후 육체의 부활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세 종교의 가장 큰 차이는 '예수에 대한 관점'에 있다. 기독교는 예수를 삼위일체설에 입각해 하나님의 아들이 자 신이라고 믿는 반면, 유대교와 이슬람교는 예수를 다만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 중 한 명으로 간주한다. 유대교는 예수를 유대교의 일파를 이끌다 순교한 선지자로 보고 있다. 예수에 대해 유대교는 <탈무드> <산헤드린>에서 '예수는 마술을 써서 이스라엘을 미혹시켜 배교케 했으므로 유월절 전날에 처형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유대교에서는 예수를 신의 아들, 삼위일체 하나님을 한 지체로 보지 않는다. 
  
다음으로 '구원에 대한 견해'의 차이다. 기독교는 우리 대신 십자가의 피로 속죄하신 예수를 믿음으로써 구원될 수 있다고 가르친다. 반면 유대교는 하나님이 준 율법을 지키고 선행을 하면 구원된다고 생각한다. 이슬람교도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서 선하고 바른 행동을 하면 구원받아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세 종교는 메시아에 대한 견해도 다르다. 정통파 유대교에서는 여전히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다. <성경>에서 약속된 메시아는 아직 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2500여년 전부터 두 가지를 희망하고 있다. 첫 번째가 메시아가 출현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그 메시아가 다가올 '올람 하바' 세상이다. '올람 하바'란 '메시아의 시대' 혹은 '다가올 세계'를 뜻한다. '지금 시대'는 히브리어로 '올람 제'이며 '장차 다가올 세상'은 ‘올람 하바'다.

세 종교의 기원 - 아브라함의 시대

수메르 문명과 문화 그리고 신화와 종교는 주변 지역과 후대에까지 큰 영향을 미쳤다. 나아가 가나안을 거쳐 히브리 문화와 유대교에도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수메르 문명을 소개하는 이유는 유대교 탄생 직전의 극도로 타락했던 시대상을 설명하기 위해서다. 당시 고도로 발달한 물질문명의 부작용과 다신교의 폐해가 어느 정도 컸는지 그리고 그 부작용으로 인한 타락과 부패, 우상숭배와 퇴폐가 얼마만큼 극심했는지를 살펴보기 위함이다. 그 결과, 하나님이 우상숭배와 음란으로 타락한 세상에서 아브라함을 선택해 구해내어 순수의 땅 광야로 보내게 된다.
  
수메르인들은 벽돌로 주택, 관개시설, 성벽, 지구라트 등을 갖춘 계획도시를 건설했다.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도시도 있었으나 대부분 계획도시였다. 수메르인들은 비교적 짧은 기간에 인구 1만명 정도의 도시국가들을 여러 개 건설했다. 수메르인들이 남긴 유산 가운데 경제사에 가장 큰 족적은 화폐의 발명이다. 기원전 9000년경부터 사람들은 교환의 단위로 가축을 사용했다. 그 뒤 농업의 발달로 사람들은 물물교환을 위해 밀다발을 사용했다. 이를 세켈이라 불렀다. 수메르인들이 기원전 3000년경에 동전을 제조해 사용하면서 여기에서 이름을 따 세켈이라 불렀다. 인류 최초의 화폐 단위였다. 아브라함이 살았던 무렵의 가나안 민족은 농경을 주재하는 바알 신과 아세라 여신을 믿었다. 바알 신은 풍요를 가져다주는 비와 폭풍우를, 아세라 여신은 창조와 번식을 주관했다. 그 무렵 가나안 사람들은 신들이 성행위를 자주해야 비가 많이 내려 풍년이 든다고 생각했다. 여신이 성적으로 흥분해 땀을 흘리면 그게 비가 된다고 생각했다.

유대교는 어떻게 탄생했나

하나님과 유대인의 관계를 적은 역사책이자 경전인 <구약성경>은 우주 만물에 대한 창조 이야기로 시작된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만들고 그 끝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했다. 엎드려 기어 다니며 땅을 바라보는 동물과 달리 사람만은 두 발로 서서 앞을 보고 하늘을 볼 수 있었다. 이것은 멀리 내다볼 수 있는 능력을 뜻한다. 인간이 본능이 아닌 이상을 추구하며 사는 것은 대단한 축복이었다.
  
하란에 정착한 테라는 그곳에서 죽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름을 받게 된다. 아브라함은 노아가 타락된 세상에서 선택받았듯 하나님께 선택받았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내리며, 너의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그리하여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너에게 축복하는 이들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리겠다. 세상 모든 종족들이 너를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소돔성은 당시 타락과 음란이 일상화된 곳이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말했다. “소돔과 고모라에서 들려오는 저 아우성을 나는 차마 들을 수가 없다. 너무나 엄청난 죄를 짓고 있다.” 아브라함은 그곳에 열 사람의 의인만 있어도 멸하지 않도록 용서를 청했다. 그러나 그마저도 소용없었다. 결국 하나님은 소돔에 사는 롯을 구해내고 그곳을 멸했다. 소돔과 고모라를 불로 심판한 것이다. 후세의 역사가들은 이 지역에 당시 대지진이 일어나 땅이 꺼지면서 밑에서 역청과 유황이 뒤섞여 솟아오른 것으로 보고 있다. 이스라엘 사해(死海) 남부 지역에 위치했다고 보는 이들 도시는 이때의 지진으로 사해에 수몰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살았던 우르도 훗날 강에서 흘러내린 토사에 묻혀 땅속에 매몰된다. 이로써 우상숭배와 문란함에 빠졌던 도시들이 사라졌다.
  
시나이산에서 40일 동안의 기다림 끝에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받았다. 유대교에서는 <출애굽기>에 기록된대로 시나이산 정상에서 하나님이 직접 '강림(降臨)'함으로써 인류에게 스스로를 들어냈다고 여긴다. <성경> 에 따르면 그 판(십계명을 새긴 판)은 하느님께서 직접 만든 것이고, 판에 새겨진 글자도 손수 새긴 것이라 한다.

유대교는 어떻게 종교로 자리잡았나
  
유대교는 크게 세 번에 걸쳐 민족종교로 자리 잡을 수 있던 계기를 마련했다. 아브라함과 모세, 바빌론 유슈기의 선지자들에 의해서였다. 유대교의 조상은 아브라함에서 시작된다. 여호와(야훼)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기를 그를 통해 인류의 모든 족속들이 축복을 받을 것이고 아브라함은 위대한 민족의 조상이 될 것이라고 했다. 이렇게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선택해 그 후손들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았다. 
  
이삭이 살던 시기에 남부 해안에 바다의 민족인 필리스틴 사람들이 이주해왔다. 이 사람들이 현재 팔레스타인들이다. 이스라엘인들이 청동무기를 쓰고 있을 때 이들은 이미 철제무기를 사용했다. 한수 앞선 민족이었다. 이들이 이집트에서 돌아온 이스라엘인들과 비슷한 시기에 남부에서 올라와 가나안 지방에 정착했다. 이들은 마차와 철제무기를 갖고 있었다. 이때부터 두 민족 간에 충돌과 영토 분쟁이 시작됐다. 전세계 1500만명의 유대인들 가운데 약 660만명이 미국에 살고 있다. 오늘날 유대교 분파는 크게 세 종류다. 율법과 전통대로 사는 정통파, 현대 흐름에 맞추어 진보된 개혁파 그리고 중도 보수격인 보수파가 있다. 근대 하스칼라 운동과 게토로부터 해방된 이후 유대교는 다양한 흐름으로 현대 세계에 대처하는 모습을 보인다. 하스칼라 운동이란 유대인들이 사회와 융합할 것을 주장하며 현대교육을 장려하는 운동이다.

기독교는 어떻게 탄생했나 
  
예수가 공생애를 시작한 이후 복음 전파를 위해 최초로 뽑은 제자가 12명이다. 이는 12지파를 염두에 둔 것이다. 12제자는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인 요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타대오라고도 불리는 유다, 빌립, 바돌로메, 도마, 세리 마태, 가나안사람 시몬, 가롯 유다이다.
  
예수를 믿는 사람의 수가 늘어나면서 박해도 그만큼 심해졌다. 이에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을 떠나 유대와 사마리아 각처로 퍼졌다. 이때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던 사울이란 사람이 있었다. 사울은 예수가 다윗이 예언한 구세주이며,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그리스도 곧 메시아라고 선전하는 기독교인들에 대해 격분했다. 더욱이 유대인들이 십자가에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3일만에 부활시켰으며, 유대인들이 이러한 죄를 회개하면 하나님이 용서해줄 것이라는 말에 분노했다. 그리스도인들이야말로 거룩한 성전과 율법을 거스르며 전능하신 하나님을 모독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다메섹 그리스도인들을 감옥에 잡아넣기 위해 산헤드린의 정식 공문을 가지고 다메섹으로 가게 됐다. 바울은 기독교의 세계화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 그는 복음을 이방 세계에 전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를 위해 그는 구원의 의미를 '은혜' 중심으로 설명함으로써, 유대 관습에 낯선 이방인들에게 문화적 충격없이 복음을 전파하는 데 성공했다.

기독교는 어떻게 종교로 자리잡았나
  
유대교와 기독교가 극명하게 다른 점이 있다. 유대교는 유대인에 한정된 종교인 반면 기독교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계기로 사랑과 전 인류의 구원을 지향하는 보편적 종교로 발전했다는 사실이다. <구약>이란 '하나님이 인간에게 이런 율법을 지키면 구원하겠다'라는 약속이다. 그러나 인간은 계명이나 율법을 지키지 않아 모두 하나님의 심판에 놓이게 되었다. 그래서 새로운 약속 곧 <신약>을 받게 됐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구약>은 어떻게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야 하느냐 하는 문제와 이스라엘의 역사를 기록했다면, <신약>은 예수가 그리스도 곧 구세주임과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게 하고 그를 왜 믿어야 하는가를 가르치는 안내서이다. 
  
유대교와 기독교가 처음부터 반목했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유대교와 초기 기독교는 오랜 기간 사이좋게 예배를 같이 들였다. 유일신 하나님을 믿는 뿌리가 같았기 때문이다. 초기기독교 예루살렘 교회의 경우 유대교의 한 분파인 '나사렛파'로 존재했다. 그러나 16세기 종교개혁은 유대인들의 운명에 결정적 영향을 줬다. 장기적 관점에서 프로테스탄트의 출현은 유대인들에게 크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종교개혁이 교황 중심의 기독교세계의 통일성을 무너뜨렸기 때문이다. 종교개혁으로 유대인들에 대한 노골적인 격리는 끝났다. 유대인들이 증오했던 수도사와 수도원들도 신교에서는 없어졌다. 유대인들은 종교개혁을 환영했다. 초기에 개신교와 유대교는 비교적 잘 지냈다. 

이슬람교는 어떻게 탄생했나

이슬람교의 창시자 무함마드는 570년 메카에서 출생했다. 그가 태어날 당시 아랍세계는 한마디로 사막에서의 삶이 한시도 편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아랍인들은 대부분 유목민이었다. 그들은 사막의 혹독한 기후 때문에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낙타와 양떼를 몰며 옮겨 다니며 살았다. 그러다 보니 자기 종족 이외에는 아무런 책임의식이 없었다. 이러한 궁핍한 생활은 그들의 행동을 공격적으로 만들었다. 그들은 전투에서의 용맹, 부족공동체에 대한 충성심, 약한 자와 가난한 자에 대한 관용 등 남성다운 태도와 여행자와 손님에 대한 환대 등을 미덕으로 여겼다. 
  
무함마드는 2년여의 고민과 망설임 끝에 자기가 받은 계시에 따라 유일한 알라의 종교인 이슬람교를 포교하는 데 나섰다. 그는 우선 아내에게 참된 신, 곧 알라에 대해 알려주었다. 다음에는 11살의 사촌동생에게, 그 다음에는 하인에게 설교했다. 그는 이처럼 주변 사람들로부터 시작해 613년 공적인 자리에서 가르침을 시작했다. 
  
이슬람교의 경전 <꾸란>은 무함마드가 알라로부터 직접적으로 영감을 받은 것으로 인정되는 공식적인 이야기들을 모든 기록이다. 그래서 이슬람교는 이를 두고 가브리엘 천사가 전한 신의 참된 말씀이라고 말한다. 이슬람교의 경전은 <토라>, <자부르>, <인질>, <꾸란>이다. <자부르>는 다윗의 시편이며 <인질>은 예수의 복음서다. 하지만 이 경전들은 유대교나 기독교의 <성경>과는 많이 다르다. 꾸란은 아랍어 동사 '읽다'에서 파생된 단어로 '읽는 것' 곧 독경이란 뜻이다. <꾸란>은 무함마드에 의해 외워져 추종자들에게 전달되었다. <꾸란>에 의하면 무함마드는 문맹자여서 글을 쓰거나 읽지를 못했는데도 알라의 계시에 의해 이를 외웠으며 추종자들이 <꾸란>을 기록했다. 

이슬람교는 어떻게 종교로 자리잡았나

무함마드의 사후(死後)에 이슬람교는 원로 중에서 무함마드 후계자인 칼리프를 선출했다. 그 뒤 정복전쟁을 통해 아라비아 반도 밖으로 진출하기 시작해 633~664년 시리아 이라크 북부 메소포타미아 아르메니아 이란 이집트 등 정복했다. 무함마드가 아들을 남기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자 이슬람교는 장로 중에서 칼리프(후계자)를 선출했다. 
  
초대 칼리프는 무함마드의 부인 다음으로 첫 제자가 된 무함마드의 친구 아부 바크르였다. 그는 메카에서 부유한 상인 출신으로 아내를 잃었던 무함마드에게 자신의 딸인 아이샤를 내준 인물이다. 그는 강대했던 동로마제국과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큰 승리를 거두면서 후에 거대한 이슬람 제국 건설의 기반을 닦았지만 아쉽게도 칼리프 자리에 오른지 2년 만인 634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바크르는 죽으면서 우마르를 다음 칼리프로 지명했다.
  
8세기 중엽 무함마드의 일족인 아바스 가문이 시아파, 이란인 이슬람교도들과 협력해 우마이야 왕조를 타도하고 아바스 왕조를 열었다. 아바스 왕조는 우마이야 잔당들을 철저히 학살했으나 한 사람이 살아남아 탈출해 이베리아 반도에서 우마이야 왕조를 재건했다. 그 뒤 아바스 왕조는 우마이야 왕조를 타도할 때 적극 협력했던 시아파를 탄압하고, 메소포타미아 한복판에 원형의 신도시 바그다드를 수도로 정하고 중앙집권제를 확립했다. 

서부 지중해상의 섬들은 모두 이슬람 세력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어 이탈리아 반도 서쪽의 세계는 동방세계로부터 차단됐다. 지중해는 이슬람교의 바다가 됐다. 지중해는 8세기 이후 이슬람교의 지배에 들어가 유럽인은 그 해역으로부터 완전히 거세됐다. 서기 632년 무함마드의 죽음으로 이슬람 세계는 위기에 직면한다. 뒤를 이은 아들이 없는데다 후계자 선정도 하지 않은 채 무함마드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통성이라는 화두가 이후 이슬람교 역사를 지배하게 된다. 무함마드의 사후 후계구도는 피로 얼룩졌고, 그에 따른 갈등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수니파와 시아파 간의 갈등도 여기서 출발한다.

세 종교간 반목과 갈등의 역사

유대인에 대한 기독교의 기본적인 태도는 로마제국에서 사실상 구체화됐다. 곧 하나님의 유대인 선택이 기독교로 옮겨왔다는 신학적 이해가 확대됐다. 1077년 예루살렘이 중앙아시아에서 쳐들어온 이슬람 셀주크튀르크의 손에 떨어졌다. 가톨릭교도들의 예수살렘 성지순례가 방해를 받기 시작했다. 이에 당황한 비잔틴제국은 서로마제국의 우르마노 2세 교황에게 원군을 요청했다. 1005년 교황은 이 문제로 프랑스 클레르몽에서 회의를 소집했다. 
  
이렇게 해서 이루어진 것이 1차 십자군 원정이다. 십자군은 1차 원정길 곳곳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이며 출발한 지 3년여 만에 예루살렘에 도착했다. 당시 셀주크튀르크가 동쪽의 티무르와의 전쟁에 집중한 시기였다. 1099년 십자군은 이슬람교도들에게 학살을 자행하고 예루살렘을 정복했다. 1144년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성지 탈환을 외치는 이슬람교 세력의 반격이 시작됐다. 이에 1147년 프랑스 루이 7세와 독일 콘라트 3세는 2차 십자군을 일으켰다. 
  
유대인이 고대로부터 박해를 받은 것은 종교적 마찰 때문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의 경제적독점이 현지인들의 반감을 많이 샀기 때문이다. 16세기 활자가 발명되기 전 책은 손으로 써야 했고 일반인은 글씨가 쓰인 책조차 볼 기회가 드물었다. 그것은 하층민이 접근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중세 유럽에서는 지방산물을 도시 시장에 가지고 와서 파는 일반 상업과 '원거리 무역'을 엄밀히 구분했다. 원거리 무역은 회계, 외환, 외국어 게다가 어느 곳에서 상품을 얻을 수 있고 어느 곳에서 더 높은 가치를 가지는가 하는 지식 등 많은 것을 알아야 했다.
  
히틀러 집권시기의 교황 비오 11세도 공산주의 혁명과 그 확산 뒤에는 이를 조종하는 유대인들이 있다고 보았다. 교황은 유대인을 가리켜 “공산주의는 어떤 중앙권력의 조종 아래 여러 민족의 문화와 특성을 따라 교묘하게 변형된 형태로 전파된다. 그들 극소수의 손에 엄청난 권력과 경제적 독점권이 집중돼 있다. 그들은 세상의 돈을 소유하고 마음대로 조작하며 여신을 통괄한다. 이처럼 경제와 사회 전체의 핏줄을 움켜쥐고 있어 그들 앞에서는 감히 아무도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한다”고 혹평했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이런 비극을 뻔히 보면서도 유럽사회는 침묵했다. 교회도 침묵했다. 당시 바티칸은 유대인 학살에 대해 한마디 발언도 하지 않았다. 종전(終戰)후 독일은 당연히 자국의 역사로서 나치스의 민족말살 계획을 중대한 범죄로 인지하고 전범을 철저히 찾아내 법정에 세웠다. 독일은 패전 후 일찌감치 나치를 전승국이 심판하기보다는 독일인 스스로가 나치의 행위를 범죄로 다루어 독일 법원에서 심판하는 것이야말로 독일 민주주의의 재생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하며 커다란 의미를 갖는다고 여겼다. 이스라엘 공화국은 유대인이면 간단히 심사를 거쳐 시민권을 발급해 줬다. 이를 '귀환법'이라 한다. 조부모 중 유대인이 있거나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 모두 유대인으로 간주했다. 1960년대 일어난 가장 극적인 사건이 6일전쟁이었다. 2차 중동전쟁 후 1964년경부터 아랍 게릴라의 활동이 시작돼 이들은 골란고원에 불법적으로 만들어진 이스라엘 정착촌에 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게릴라 기지가 된 시리아에 대해 이스라엘은 1976년 4월 대규모 공격을 감행했다. 1975년 레바논의 기독교 일파인 마론파는 레바논 내에서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가 세력을 확대하자 불안감을 느껴 공격을 시작했다. 이로써 이슬람교 좌익 연합과 기독교 우익 군부세력의 충돌로 레바논 내전이 벌어지고, 이스라엘과 시리아의 개입으로 이어졌다.
  
1988년 가자지구에 이슬람 저항운동세력 '하마스'가 창설됐다. 팔레스타인 국민협의회는 그해 11월에 독립을 선언했다. 25개국이 팔레스타인 망명정부를 승인했다. 2012년 가자 공습 당시 세계적인 학자이자 유대인인 놈 촘스키가 일갈했다. “해군도, 공군도, 방공망도, 중화기도 없는 주민들을 공격하는 것은 전쟁이 아니라 살육일 뿐”이라고. 유대인이 유대인을 비판하고 나설 정도로 현재 이스라엘은 강경 일변도의 정책을 취하고 있다. 


守岩 문윤홍(칼럼니스트)

출처 : 예수 코리아
글쓴이 : 예수코리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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