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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교회가 꼭 알아야 할 장례 지침서’ 펴낸 신성호 장로

수호천사1 2018. 4. 22. 22:20

[미션&피플] ‘교회가 꼭 알아야 할 장례 지침서’ 펴낸 신성호 장로 [2018-04-13 00:01]


“39년간 5000여회 장례식 돕다 보니 전도의 결실 따라와 감사”





▲신성호 지구촌교회 장로가 지난 6일 서울 여의도의 한 출판사에서
반평생 넘게 이어오고 있는 교회장례 봉사 경험을 말하고 있다.


‘초상이 많이 나면 교회가 부흥한다’는 말이 있다. 관혼상제를 중시하는 한국의 유교적 문화가 교회에 영향을 미치면서 나온 말이다.

실제로 가족의 장례를 치르는 동안 유족들은 교회는 물론 목사, 성도들과 깊은 유대감을 갖게 된다. 40년 가까이 교회에서 장례봉사를 해 온 신성호(76) 장로는 “이렇게 장례가 중요한데 요즘 교회와 목회자는 그걸 잘 모르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했다. 지난 6일 서울 여의도 기독교한국침례회 본부 요단출판사 회의실에서 신 장로를 만났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 장례봉사”


그는 젊은 시절 국제영화사의 제작부장으로 신상옥 감독을 수행하고, 영화 ‘스잔나’의 주제곡을 음반 제작하는 등 연예계에서 활동했다. 제작비를 날리고 낙향했다가 서울살이를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980년 1월. 그는 강남중앙교회 김충기 목사로부터 경조위원회 총무로 임명받았다. “상가에서 물도 안 마실 정도로 싫었어요. 어느 날 장례식장에 가는데 하나님이 ‘이것이 너에게 준 사명이다’ 하시는 것 같은 마음이 들었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이 일을 하고 있네요.”

건축업에도 손대고 한때 정치권에 발을 들이는 등 직업은 여러 번 바꿨지만 봉사만큼은 외길을 걸었다. 1994년 지구촌교회로 옮긴 이후 줄곧 장례위원으로 섬기며 지금까지 치른 장례식만 5000회가 넘는다. 병원 빈소 예약, 장례물품 마련은 물론 임종예배부터 입관·천국환송(발인)·하관·안치 예배까지 장례 일정 전체를 돕고 있다.

“주로 장례가 11월에서 5월 사이에 많은데, 여러 건이 몰리는 시기에는 하루 2시간 정도밖에 못 잤어요. 수도권 장례식장에 시신을 염할 사람이 없으면 아는 장례지도사를 불러 직접 염을 도왔지요.”

허례허식을 빼고 천국 환송의 의미를 되살리기 위해 대형병원이나 장례업자들과 실랑이도 많이 했다.

“한국에서 평민이 장례식을 치르기 시작한 건 조선시대 성종 때입니다. 수의나 완장은 일제 강점기 때 들어온 일본문화의 잔재예요. 화장(火葬)을 하면 비싼 수의 대신 평소 입던 옷을 권하고, 완장 대신 가슴리본만 달 것을 권합니다.”


“장례식장이 곧 전도현장”


현장에서 부닥치는 어려움도 적잖았다. 심지어 ‘네가 뭔데 남의 집 장례에 배 놔라 감 놔라 하느냐’며 귀싸대기를 날리는 유족도 있었다. 매번 죽은 자를 마주하고, 유족의 슬픔을 나눠야하는 궂은일을 왜 이토록 오래 해 왔을까. 그는 에피소드 하나를 들려줬다.

“우리 교회 장로님의 부친이 돌아가셨어요. 예수 믿는 아들, 며느리에겐 유산 한 푼 안 주겠다고 하신 분인데, 정성껏 모시던 며느리 덕분에 병상에서 약식 세례를 받으셨대요. 하지만 고인의 동생인 작은아버지는 기독교식으론 장례를 못 치른다고 버텼어요. 믿지 않는 딸들과 사위들도 반응이 안 좋았고요. 겨우 타협하고 설득해서 전남 순천으로 내려가 하관예배까지 마치고 기독교 추도예배 등에 안내를 했어요.

슬며시 작은아버지가 다가와 ‘나도 다 알아요. 그렇게 할 겁니다’ 하더군요. 2년 뒤 장로님의 모친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장례식장에 갔다가 깜짝 놀랐어요. 그때 그 작은아버지와 다른 형제들이 함께 둘러앉아 손에 성경책을 들고 찬송가를 부르고 있는 겁니다.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이처럼 정성껏 고인과 유가족을 섬기고 난 뒤 가족이 함께 교회에 등록할 때 느끼는 보람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사례비를 들고 오는 이들에게 “교회에 등록할 때 인도자 이름에 내 이름을 적어주는 것으로 충분하다”며 돌려보낼 수 있는 이유다.


장례 풍경에 비춰진 한국사회상


40년 가까이 지켜본 장례 풍경엔 한국사회의 시대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최근 잊을 수 없는 장례식은 60대에 이혼하고 70대에 세상을 떠난 유명한 국립대 교수의 장례식장이다. 황혼 이혼의 깊은 그림자를 목격했다. “아들의 간절한 부탁에도 이혼한 모친이 끝내 장례식장에 오질 않았죠. 상주가 못 마시는 술을 마시며 힘들게 버티는 모습이 안쓰러웠지요.”

가슴 아픈 장례식도 많았다. 1980년대 중동 건설 붐 당시 남편이 사우디아라비아에 나가 있는 동안 암으로 숨진 30대 여성의 장례식을 도왔다. “벽제 시립묘지에서 ‘우리 엄마 못 묻는다’고 몸부림치던 열 살 난 딸의 모습이 지금도 잊혀지질 않아요.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생명의 연한을 알지 못해 이렇게 살고, 슬퍼하는구나 싶어요. 그러니 아등바등 싸우며 미워하며 살지 말아야죠.”

따뜻하고 아름다운 장례식도 있다. “2년 전 교회의 시니어 목장 권사님이 돌아가셨어요. 아무 연고 없는 그분의 장례식을, 교회 시니어 성도 200여명이 마음을 모아 함께 치렀어요. 천국 가는 길을 배웅하며 노인들이 얼마나 감사해 하던지요.”

요즘 목회자와 교회들이 장례의 소중함을 간과하는 건 아닌지 그는 안타까워했다. 그 마음과 현장에서 체득한 정보를 담아 ‘교회가 꼭 알아야 할 장례 지침서’(요단)를 펴냈다.

“가족을 떠나보내는 이들의 슬픔을 위로할 수 있는 사람은 목사님밖에 없다는 걸 잊지 마시고 꼭 위로해주세요. 장례 마치고 돌아오면 교구 목사든, 담임 목사든 유족들을 꼭 끌어안고 함께 기도해주면 더욱 좋겠지요.”

그는 지난해 4월 뇌출혈로 쓰러져 큰 고비를 넘겼다. 이동원 원로목사가 병문안을 와서는 “아직 하실 일이 남아서 안 데려가신 것이니 열심히 봉사하라”고 위로했다고 한다.

“여생을 힘 닿는 대로 장례교육을 해서 많은 사람이 장례의 소중함을 깨닫고, 장례봉사에 참여하도록 하고 싶어요. 이렇게 좋은 전도 기회가 없으니까요.”


글·사진=김나래 기자 narae@kmib.co.kr

[출처] 국민일보

출처 : 은혜동산 JESUS - KOREA
글쓴이 : 죤.웨슬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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