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생활과 신앙생활
(출32:1-6)
요즘 열왕기하를 새벽시간마다 보고 있습니다. 거기서 보면 북 왕국 이스라엘의 가장 큰 죄는 여로보암의 죄를 따랐다고 합니다.
“왕하17:22. 이스라엘 자손이 여로보암이 행한 모든 죄를 따라 행하여 거기서 떠나지 아니하므로 23. 여호와께서 그의 종 모든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대로 드디어 이스라엘을 그 앞에서 내쫓으신지라 이스라엘이 고향에서 앗수르에 사로잡혀 가서 오늘까지 이르렀더라”
여로보암의 죄란 북 왕국 이스라엘에 거짓 제단을 만들어 놓고 거기서 하나님을 섬기게 한 죄였습니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먼저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왕상12:25. ○여로보암이 에브라임 산지에 세겜을 건축하고 거기서 살며 또 거기서 나가서 부느엘을 건축하고 26. 그의 마음에 스스로 이르기를 나라가 이제 다윗의 집으로 돌아가리로다
27. 만일 이 백성이 예루살렘에 있는 여호와의 성전에 제사를 드리고자 하여 올라가면 이 백성의 마음이 유다 왕 된 그들의 주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서 나를 죽이고 유다의 왕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리로다 하고“
만일 북왕국 이스라엘 사람들이 제사를 드리러 남 왕국의 예루살렘으로 가다보면 결국 북 왕국이스라엘이 남 왕국 유다에 흡수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북왕국 이스라엘에 거짓 제단을 만들어 놓고 거기서 제사를 드리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여로보암의 죄가 단순히 정치적인 이유만이 아니었습니다.
“왕상12:28. 이에 계획하고 두 금송아지를 만들고 무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다시는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의 신들이라 하고 29. 하나는 벧엘에 두고 하나는 단에 둔지라 30. 이 일이 죄가 되었으니 이는 백성들이 단까지 가서 그 하나에게 경배함이더라”고 합니다.
여기서 보면 정치적인 이유만 아니라 종교적인 이유가 나옵니다. 그것은 그들은 벧엘과 단에 두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그것은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섬기게 했습니다.
이것은 2계명을 어긴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백성들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을 곰 송아지 우상으로 만들어 섬겼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백성들이 출애굽할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스라엘백성들도 하나님을 금송아지 우상으로 만들어서 섬기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이스라엘백성들이 역사적으로 계속해서 하나님을 금송아지 우상으로 만들어서 섬기고 있습니까?
송아지는 주인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는 동물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심지어 소의 뼈까지 다 우려서 먹습니다.
이렇게 당시의 이스라엘백성들은 하나님을 송아지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어떤 분이냐, 나를 위해서 송아지처럼 모든 것을 희생하기만 하시는 분으로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나를 위하는 존재로 보십니까? 아니면 내가 하나님을 위한 존재로 보십니까? 물론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희생하면서까지 우리를 위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모든 것을 다 희생하시니까 “이제 하나님은 우리 종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송아지다 그래서 당신은 나를 위해서 희생만 하시되 내게 아무 명령이나 말씀도 하지 마시라”는 뜻에서 하나님을 송아지로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오직 나만을 위해서 희생만하시고, 또 단순히 나의 소원만을 들어주시고, 이제는 내게는 그 어떤 말씀도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을 종교생활이라고 합니다.
사실 세상의 모든 종교가 이렇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만든 인간의 종교는 모두 신들이 자신의 욕망을 채워주기 위한 것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만든 우상들이 자신의 욕망을 채워주지 않으면 언제든지 바꾸고 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종교생활입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은 그렇지 않습니다.
신앙생활도 제일 먼저 우리를 위하시는 하나님의 희생과 은혜가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희생과 은혜를 받은 우리들은 이제는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희생하고 죽어져야할 존재로 생각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SFC이라 할 때도 그리스도를 위한 학생이지, 학생을 위한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과연 하나님이 나를 위한 존재로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이제 내가 하나님을 위한 존재로 생각하십니까? 여러분들은 과연 인간이 만든 종교생활을 하십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신앙생활을 하십니다.
여러분 진정으로 저는 여러분들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스라엘백성들처럼 하나님을 희생만 하시는 송아지 형상으로 만드는 종교생활이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신앙생활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면 더 구체적으로 무엇이 종교생활이고, 무엇이 신앙생활인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1. 종교생활이란 하나님을 말 못하는 금송아지로 만들어서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은 하나님은 눈으로 보이지 않지만 지금도 살아계시고, 말씀하시는 인격적인 존재로 섬기는 것입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이 하나님을 금송아지로 만든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 당신은 송아지처럼 우리를 위해서 희생 만해주십시오, 또 하나님은 우리에게 황금만을 우리에게 주십시오 그리고 금송아지와 같이 우리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마십시오” 라는 이유였습니다. 이것이 종교생활입니다.
그러나 지금 모세는 시내산에서 눈으로 볼 수 없고 손으로 만질 수 없지만 살아계시고 인격적이신 하나님을 만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만난 모세의 손에 들려져 있는 것이 무엇이니까? 십계명입니다. 이것은 말 못하는 금송아지와 대조를 이룹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지금도 살아계신 분이십니다. 또 지금도 우리에게 끊임없이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여러분들은 정말 지금도 살아계시고 인격적이신 하나님을 만나셨습니까? 그래서 지금도 살아계신 그 하나님의 권위와 위엄아래 떨어본 적이 있습니까?
또 지금도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남으로 세상이 알지 못하는 희락의 기쁨을 경험하신 적이 있으십니까? 우리가 지금도 살아계시고 인격적이신 하나님을 만나보지도 못하고 교회를 다닌다면 우리는 아직 종교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참된 신앙생활은 우리의 인격과 삶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남에서 시작합니다.
이렇게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난 자의 첫 번째 특성은 하나님을 경외함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스라엘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금송아지를 하나님을 만들어 놓고 그 앞에서 그 하나님에 대한 두렵고 떨리는 모습이 없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먹고 마시고 뛰놀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난 모세는 그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 앞에서 두렵고 떨었습니다.
여러분 예배를 드리는 이 시간 지금도 살아계신 엄위하신 하나님 앞에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이 있기를 바랍니다.
또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난 자의 특징은 나로 말미암은 기쁨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기쁨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스라엘백성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자신들이 흥에 겨워서 뛰놀고 있습니다. 이것은 종교생활입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기쁨이 있습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마음의 평안이 있습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하나님만은 나를 사랑하시며 나와 함께 하신다는 확신이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도 살아계셔서 나와 함께 하시며 “나를 사랑한다”고 말씀하시고 “두려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날마다 만나시는 참된 신앙생활을 하시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 종교생활은 나의 의에서 시작합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시작합니다.
오늘 본문을 자세히 보시면 이스라엘백성들이 금송아지 우상을 무엇으로 만듭니까?
2. 아론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의 아내와 자녀의 귀에서 금 고리를 빼어 내게로 가져오라
3. 모든 백성이 그 귀에서 금 고리를 빼어 아론에게로 가져가매 4.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금 고리를 받아 부어서 조각칼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 하는지라
지금 이스라엘백성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금고리를 가지고 금송아지 우상으로 만들고, 그것을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쉽게 말하면 이스라엘백성들은 자신들의 의와 공로로 하나님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자신들의 의와 공로로 하나님을 만들었으니까 이제 하나님은 오직 자기 자신들만을 위해서 희생만 하라고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의 모든 종교생활에서도 나타납니다. 미얀마에는 수백톤의 금으로 탑을 만들었습니다. 지방으로 가면 엄청난 불상들이 많습니다. 모두 자신들의 의와 공로로 탑과 불상들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자신들의 공로로 만든 그 우상들이 철저히 오직 자신만을 위해서 모든 것을 해 달라고 빌고 있습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이 무엇입니까? 내가 교회를 위해서 바친 공로가 신앙생활의 출발이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바친 헌신들이 신앙생활의 출발이 아닙니다. 또 하나님 앞에서 내가 무언가 잘 났다는 나의가 신앙생활의 출발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의 출발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입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의와 십자가를 지신 의와 부활하신 그 의에서 출발합니다. 그러니까 신앙생활은 나의 의나 공로가 아니라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의와 하나님의 은혜에서 출발해야합니다.
그래서 인간이 만든 종교생활을 하고 있는 이스라엘백성들에게 모세는 하나님께로부터 십계명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 십계명 서문에서 “나는 너희를 애굽 땅 종 되었던 곳에서 구원한 여호와”라고 합니다. 즉 신앙생활은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데서 시작합니다.
그래서 1계명에서 4계명은 우리가 어떻게 그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배신하지 않고 감사할 것인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십계명 중간에 있는 5계명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인간들은 부모의 은혜도 반드시 알아서 공경해야한다고 말합니다.
이와 같이 무엇이 종교생활입니까?
나의 의 나의 공로에서 시작해서 내가 이렇게 하나님을 위해서 투자하고 헌신했으니까 하나님 당신은 나를 위해서 모든 것을 무조건 희생만 해주십시오 라고 하는 것이 종교생활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내 마음대로 해주시지 않으면 얼마든지 하나님도 버리는 것이 종교생활입니다.
그래서 출33장 4절부터 이스라엘백성들이 회개를 할 때 어떻게 합니까?
4. 백성이 이 준엄한 말씀을 듣고 슬퍼하여 한 사람도 자기의 몸을 단장하지 아니하니 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라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한 순간이라도 너희 가운데에 이르면 너희를 진멸하리니 너희는 장신구를 떼어 내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 어떻게 할 것인지 정하겠노라 하셨음이라 6. 이스라엘 자손이 호렙 산에서부터 그들의 장신구를 떼어 내니라
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백성들에게 단장품을 다 제거하라고 하십니까? 그 단장품들은 모두 자신들의 의와 공로를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떻게 종교생활에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들의 모든 공로와 의, 교회를 위해서 헌신하고 희생했던 삶의 모든 단장품들을 다 떼어버리시기 바랍니다. 나의 모든 의와 헌신과 인간적인 자랑들을 배설물처럼 여기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의 공로와 의의 헌신과는 비교할 수 없는 예수그리스도의 헌신과 그 공로와 그 의만을 붙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를 향하신 그 하나님의 그 구속의 은혜를 다시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이 한해를 돌아볼 때 저와 여러분 어느 누구도 마음에 상처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건들면 모두 상처와 아픔만 있습니다. 물론 이것이 인간적인 위로로 조금은 해소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부족합니다. 날마다 십자가 앞에 나아가서 그 보혈의 은혜를 날마다 덧입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가 내 공로에 따른 보상을 바라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함으로 모든 것을 행하시는 참된 신앙생활을 하시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 종교생활은 내가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은 내가 죽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아래 19절에 보면 종교생활을 하는 이스라엘백성들을 보고 십계명 돌 판을 깨뜨립니다. 이것은 이제 이스라엘백성들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졌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또한 이것은 이스라엘백성들이 단순한 종교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니까 무엇이 종교생활입니까? 나를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뜨리고 없애는 것이 종교생활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무엇인 참된 신앙생활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위해서 나를 깨뜨리고 없애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여러분 여기 나의 인간적인 생각들이 있습니다. 그 인간적인 생각들은 원수를 갚은 것입니다. 용서하지 않는 것입니다. 내 본성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항상 하나님의 말씀은 내 인간적인 생각들과는 다릅니다. 저는 말씀을 준비할 때 마다 “이 말씀은 사람들에게 잘 맞지 않는 말씀이다. 사람들의 본성을 거스르는 말씀이구나?”라고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이때 여러분 제가 인간들을 위해서 그 말씀을 깨드리고 없애야합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오히려 우리가 깨어져야합니까?
만일 인간들을 위해서 말씀을 깨뜨리고, 없앤다면 그것이 바로 종교생활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21장 44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돌은 말씀이신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날마다 말씀의 돌 위에서 스스로 깨어져야합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날마다 나의 본성을 거스르는 말씀을 들을 때마다 그 말씀에서 스스로를 깨뜨리고 죽여야 합니다.
그런데 구약시대 이스라엘백성들이 어떠했습니까? 그들은 자신의 본성을 거스르는 말씀을 전하는 선자자들을 모두 죽였습니다. 말씀자체이신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이렇게 나를 위해서 말씀을 깨뜨리고 없애고 죽이면 어떻게 됩니까?
나중에 말씀이 심판의 돌로 나에게 날라 와서 나를 완전히 가루로 만들어 흩어버리겠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와 같이 무엇이 종교생활이고. 신앙생활입니까?
--모든 것이 나 중심입니다. 하나님도 오직 나를 위한 존재합니다. 말씀도 오직 나를 위한 말씀입니다. 다른 모든 사람들도 오직 나를 위해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종교생활입니다.
그런데 참된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날마다 자신은 부인하고 죽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참된 신앙생활은 나 중심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중심입니다.
존F케네디가 “국가가 나를 위해서 무엇을 해 줄 것인가를 생각하지 말고, 내가 국가를 위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무엇이 참된 신앙생활입니까?
이제는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무엇을 해 줄 것인가 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또 이제는 교회가 나를 위해서 무엇을 해 줄 것인가 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내가 교회를 위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사람들이 나를 위해서 무엇을 해 줄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다른 사람을 위해서 무엇을 해 줄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오직 나만을 위한 하나님, 나만을 위한 다른 사람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위해서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살아가는 참된 신앙생활을 하시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 종교생활은 결국 사람을 죽입니다. 그러나 참된 신앙생활은 사람을 살립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5. 아론이 보고 그 앞에 제단을 쌓고 이에 아론이 공포하여 이르되 내일은 여호와의 절일이니라 하니 6. 이튿날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 번제를 드리며 화목제를 드리고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더라”
여기서 보면 종교생활을 하는 이스라엘백성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내일은 여호와의 절일이라 하고 금송아지 앞에서 하나님께 드릴 번제와 화목제물을 드립니다. 번제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앞에서 내가 죽어 없어지고 완전히 하나님을 위해서 헌신하겠다는 뜻입니다. 또 화목제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또 사람들과 화목하게 지내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스라엘백성들은 진정한 번제와 화목제가 아니라 종교적인 형식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이런 잘못된 종교생활은 결국 하나님의 진노로 사람들을 죽게 만들었습니다.
이런 종교생활이 예수님당시에도 있었습니다.
안식일에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잘라 먹었습니다. 그러니까 바리새인들이 왜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아무 일도 하지 말아야하는데, 왜 밀 이삭을 잘라 먹는 일을 하느냐고 합니다. 또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든 자를 고치시니까, 왜 안식일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아야하는데, 왜 병자를 고치는 일을 하느냐고 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율법적 규칙에 안식일에 양이 구덩이에 빠지면 건져주라고 하지 않느냐, 양의 생명이 귀하냐, 사람의 생명이 귀하냐, 사람이 양보다 더 귀하지 아니하냐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바리새인들이 이 일로 예수님을 죽이려 합니다(마12:14).
여러분에게 질문을 해보겠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입니까?
막2장 27절에 이것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원래 안식일 또는 주일은 예수그리스도의 구속의 결과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참된 안식과 평안을 누리는 날입니다. 또 사람들과의 바른 관계들을 통해서 참된 안식과 평안을 누리는 날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하던 육신적인 일을 중단해야합니다. 우리가 일주일동안 먹고 살기 바빠서 하나님 앞에 나와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참된 안식을 잘 누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내가 하던 육신의 모든 일을 내려놓고 주일예배시간에 나와서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참된 안식을 누려야합니다. 또한 육신의 일을 내려놓고 예배이후에 성도간의 교제를 통해서 참된 안식과 평안을 누려야합니다. 저는 이것이 구역소그룹 모임을 통해서 이루어져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예배를 통해서는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에서 참된 안식을 누려야합니다.
그리고 이제 구역소그룹 모임을 통해서 사람들과의 수평적인 관계를 통해서 참된 안식을 누려야합니다. 이것이 안식일 또는 주일의 참된 의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과연 이 예배시간에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참된 안식과 평안을 누리고 있습니까? 저는 진심으로 여러분들이 이 시간에 형식적이고 의무적인 종교행사 이 자리에 앉아 있지 않기를 바랍니다. 정말로 지금도 살아계셔서 여러분들의 모든 삶의 짐을 대신 져주시고, 여러분들에게 세상이 알지 못하는 참된 안식과 평안을 주시는 하나님을 기쁨으로 만나는 이 시간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또 소그룹 모임을 통해서 서로간의 깊이 있는 기도제목을 나누고, 교제함으로 이 땅에서 나의 모든 즐거움은 이 교회의 성도들이 되어야합니다(시16:3). (청년회 모임—교제중심으로 너무 좋다).
주일은 절대 우리를 죽이는 날이 아닙니다. 만일 주일이 죽이는 날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단순히 형식적인 종교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참된 안식만 아니라, 소그룹을 통한 교제를 통해서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있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다윗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시16:2b“--주 밖에는 나의 (행)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3. 땅에 있는 성도들은 존귀한 자들이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그들에게 있도다“
옆에 성도님들에게 다윗처럼 이렇게 고백하겠습니다.
“주 밖에는 나의 행복이 없습니다. 당신은 너무나 존귀한 분입니다. 나의 모든 즐거움이 당신에게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처럼 형식적이고 외식적인 종교생활로 사람을 죽이는 안식일 되지 않고, 생명을 살리는 주일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무엇보다 이 세상에서 낙심하고 피곤하여 절망가운데 있던 사람들을 위로하여 살리는 주일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http://blog.daum.net/bible3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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